내 애절함은 닳고 닳아 불경한 집착이 되었다. 애당초 사랑이란 없었노라. 모든 성애(性愛)가 성욕(性慾)으로 변모하면서 나는 태어났다. 피를 가득 담은 가죽주머니라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이 나라에서 네온사인이 가장 밝게 빛나는 곳에는, 자신의 등에 일종의 날개가 달려있다고 상상하는―누구의 깃털이든 밟기 위해 혈안이 된 소년들이 담배연기로 자신의 메마른 몸을 감추며 걸어 다닌다. 나는 그늘에 숨어 술병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마셔버렸다. 바다 건너의 일 따위 나는 모르오! 나는 외쳤다. 변명거리가 필요했고 입안에 머금은 것은 온통 핑계뿐이었으므로. 정직을 추구하기 위해 흰 것들에게는 모조리 잉크를 부어주었다. 비단 바다 건너뿐만이 아니라 오만 지평선들의 너머에 있는 것들은 송두리째 모른다고 욕설을 퍼부었다. 돌아오라. 부디 돌아오라. 그대의 죄악이 모두, 죄악이라고 부르고 싶은 것들은 모두 죄악이 되어 끈적거리는 선혈로 웅덩이 진 곳에. 여인들은 잉태하고, 여인들은 손톱을 세우고 잉태한다. 나는 당신의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 누구의 아내도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값싼 단어들은 새로이 만들어져야한다. 그러나 우선은 내리쳐 산산이 박살내어야한다. 나의 잔혹한 욕망들을 말로 만들어내기만 해도 너무 많은 눈물들이 쏟아져 내린다. 오, 부디 나를 동정해주시기를! 너무 많은, 너무 많은 언어들에 잠겨 나의 언어는 목이 졸렸다. 봄 햇살 밑에서 가볍고 얇은 옷을 입고 활보하는 여인들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혀를 깨문다. 흉기를 품고 사는 것이 나 자신인지 당신들인지, 광기는 투명해질수록 그 밑으로는 혼돈과 모순을 뚝뚝 흘려댄다. 마침내 모순이 더 이상 모순이 아니게 될 때까지 광기는 깨끗해진다. 발작하는 방법을 모르는 간질 환자처럼 잉크를 퍼부어주었다. 내 병에는 다시 잉크가 차올랐고 나는 마셔버렸다. 나는 시학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미학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내 수첩 페이지를 먹은 염소는 죽어버렸다. 그래서 나도 남은 조각을 집어삼켰다. 갈증을 참을 수 없어 술집으로 도망쳤다. 생각해보니 매일같이 반복하고 있는 일이었다. 나는 내가 지상의 인간의 손을 붙잡고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그는 눈부시지 않은 황혼과 같아 위대했고 그 황혼에서는 가끔 날벼락이 쳤다. 그러나 매일 찾아오는 침묵의 새벽이여. 너는 광란이었고 미치광이들의 어머니―차라리 어머니의 치맛자락이다. 나는 그 손을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오로지 그 이글거리는 것을 경외하는 추한 범죄자였다. 시꺼멓게 중독된 내 심장을 나는 꺼내 바친다. 그 독의 이름은 시(詩)다. 그 중독은 타인의 영혼을 머리 째 집어삼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 땅에서, 나는 불유쾌하게 부유하거나 늪 위를 걷듯 천천히 침수되거나 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왕이 되었다……. 짐이 선포하노니 이 땅에 더 이상의 자비나, 혹은 자비라고 착각되는 것은 없을 지어다! 가신들이여, 짐은 왕정을 부정하노라. 왕정뿐만이 아니라 신정을, 공화제를, 민주제를, 모든 정부를 부정하노라! 오로지 야만만을 행하라고 짐은 명령할 것이다. 폭력과 테러와 반달리즘이 법이며, 또한 아무것도 법이 아닐 지어다! 유일한 지침인 아름다움은 피와 살점과 뼛조각 속에 있으며, 그것을 찾아내 내게 바치는 자는 칭송받을 것이다. 갓 태어난 자신의 새끼를 베개로 눌러 질식시켜 죽이는 어미에게는 짐이 눈물로 키스할 것이다. 약자를 구타해 죽이고 그 살점을 모닥불로 구워먹는 잡배들이 더 많은 식인을 행하도록 보조하라. 아버지를 죽이고 선생을 죽이고 짐에게마저 송곳니를 드러내는 소년에게, 짐은 기꺼이 목을 내어줄 것이다. 부디 모든 것을 원시의 혼돈으로 돌아가게 하도록 하라……. 그것은 그리도 아름다웠노라. 심지어 내가 왕이 아닐 때에도 그랬노라. 내가 거지에게 주머니를 털어 가진 것을 모두 내어주었을 때, 나는 미치도록 나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왜인지는 몰랐다. 영원히 모를 것이다. 나는 영원히 부랑하는 왕일 것이다. 종말은 오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나는 무언가에게 패배했으나 절대로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아가씨, 저와 대화 좀 하실까요? 저는 종교인도 아니고 피라미드 업체 판매사원도 아니며 변절자도 아니나 미치광이냐고 물으시면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군요. 그러나 걱정하실 것은 없습니다. 아! 물론, 제가 저 자신을 위험하지 않다고 자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위험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디에 있겠습니까? 특정 시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시대에나 충동과 광기는 있었지요. 그것은 인류의 역사가 항상 피와 정액―실례.―으로 쓰여 졌다는 것이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범국제적 비관론자로 보일지도 모른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이해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저는 이러한 시각에 대해 비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솔직히 인류와 개인의 성격적 차이, 그리고 그들의 야만성에 대해서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관측할 수 있는 개념이라는 거지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역사적으로 권력자들은 항상 대중의 무질서를 통제하기 위해서 온갖 방법들을 연구해왔지요. 어떤 때는 위협이고, 협박이었으며, 어떤 때는 분노를 유도하거나, 어떤 때는 절대자라는 상징을 이용하고, 어떤 때는 회유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많은 국가나 민족에서 민중의 치안이 가장 좋았던 시점은 다른 국가와 전쟁 중인 때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국가 안에 존재하던 혼란과 무질서를 국경 너머로 던져버림으로서 질서를 유지시킨 겁니다! 눈치 채셨겠지만 이건 제로섬 게임이에요, 아가씨. 그리고 가장 쉽게 이기는 방법은, 너무 한가한 나머지 길거리에서 유리창을 깨고 방화를 저지르고 다니는 사람들에게 <공동의 적>을 부여해주고 분노에 모든 에너지를 쏟게 만들어 더 이상 다른 미친 짓거리는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의외로 많은 지도자들이 이 방법을 사용했어요. 적(敵)! 이게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상상도 못하실 겁니다. 사람은 집이 없고 밥이 없어도 살지만 적이 없으면 살지 못합니다.
서두가 너무 난잡했나요? 사실 이런 기질 때문에 제가 미치광이라고 불리곤 하지요. 처음 보는 사람에게 뜬금없이 나의 비관들을 설교해버리고 마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괜찮을 겁니다. 아가씨는 아직 도망치지도 않았고 자리를 옮겨 앉지도 않았군요. 제가 능란한 서울 말씨를 쓰고 목소리도 높지 않기 때문인가요? 뭐, 좋습니다. 버스는 아직도 한참을 달려야 하니까요. 교통수단이 발전하면서 어딘가에서 어딘가로 가는 일이 기술적으로 아주 쉬워졌어요. 그러나 <떠나는> 일은 아직도 힘든 일이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말하면서 떠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긍정적인 것에든 부정적인 것에든 사람은 속박되지 못하면 불안해하니까 말입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언어에 속박되어있었죠. 지난 수십 년간 말입니다. 그것도 주로 늙은 언어들에게요. 덕분에 근대에 사망한 것들이 아직도 제 심장을 움켜쥐고 있답니다. 보아하니 아가씨는 이십 년 하고도 조금 더 이 땅에 붙잡혀 있었겠군요. 아가씨의 눈동자가 아직은 피로해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하여, 저는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눈동자라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오만가지 것들을 알려주지요. 아무리 옷을 잘 입고 머리를 짧게 깎아도 숨길 수 없는 것들을 말입지요. 저는 아가씨 또래임에도 불구하고 초췌하며 빈 굴처럼 눈이 쑥 들어간 여자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들은 가을에도 짧고 나풀거리는 옷으로 속살을 드러내며 밤의 번화가를 방황하곤 하더군요. 이게 저의 편견일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녀들은 주로 네온사인 밑에서 발견되고, 인간의 고기를 바라는 핏기 없는 얼굴로 밤에 드문드문 미광을 비추고 있습니다. 나는 가을바람과 담배연기로 물든 그녀들의 회색 팔뚝을 볼 때마다 감탄하곤 합니다. 그러나 아가씨의 눈은 아직 총명하며 빛이 앉을 자리를 비워두고 있군요. 당신의 갈색 단발머리는 인생을 증오하지는 않는다는 상징 같은 것일까요? 그런 것에 대해선 생각해본 적이 없다구요.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생각하지 않는 것 말이에요. 이런, 전화가 왔군요. 잠시 실례. 여보세요? 예, 예. 아뇨, 그것에 대해선 더 이상 고민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예. 이해를 못하신 것 같군요. 저는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다음 계획 같은 것은 없습니다. 전부 정리해버리세요. 제 전화는 곧 사용이 중지될 겁니다. 이크. 실례했습니다. 전화기를 놓고 온다는 걸 깜빡하고 가져와버렸군요. 습관이 되어서요. 요샌 누구나 핸드폰을 들고 다니지 않습니까? 저도 그런 사람입니다. 항상 누군가에게서 전화가 걸려 와야 하기 때문에, 돈과 음식과 옷을 위해서 호주머니의 한 구석을 전화기에게 바칠 수밖에 없었지요. 제 직업이요? 아! 뭐라고 말해야할까요. 굳이 말하자면 저는 전문적인 거짓말쟁이입니다. 거짓말로 돈을 벌지요. 물론 이런 직업을 갖기 위해서는 언어적 수단에 아주 능수능란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또, 머리모양이나 옷차림 같은 것에도 주의 깊어져야 하죠. 부수적인 것이 아니냐고 물으실 수도 있지만, 사람들은 대체로 말에 속아 넘어가기 전에 옷차림과 머리모양에 먼저 속아 넘어간답니다. 이건 거의 진실에 가깝죠. 자신만만하고 현학적인 어조는 마무리를 지을 뿐이에요. 저는 그렇다 치고, 아가씨의 직업에 대해서 말해볼까요. 당신은 아직 학생일겁니다. 아마 어른이 된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군요. 어쩌면 그 눈동자가 속이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만 말이죠. 그리고 아가씨의 외양을 보아하니 딱히 부족하달 건 없었지만 그렇다고 유복하지도 않은 가정에서 자랐을 것 같군요. 인간의 씀씀이라는 것은 보통 아동기에 고착되어서 크게 변하질 않죠. 그리고 계절상으로 보아 여름방학이 끝물일 것인데 지금 이 버스에 타고 있다는 것은, 본가에서 먼 학교에서 기숙사나 자취생활을 하고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 전부 맞았다고요? 너무 놀라진 마세요. 만일 아가씨가 점집엘 갔다면 방금 제가 말한 것과 똑같은 얘길 들었을 겁니다.
언제나 사회와 사회인이라는 것은 매뉴얼 화(化) 되어 있었지요. 대부분의 개인은 사회가 요구하는 것에 맞춰 자신을 개조해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그냥 당연한 일이지요. 인간이 사회라는 것을 성립시킨 뒤부터, 그들은 모두 그 보이지 않는 왕에게 떡고물을 받아먹어야만 했으니까요. 자승자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문제가 되어버렸군요. 융이 말한 집단무의식이나 유동적인 시대정신이 실존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도 없고 말이에요. 사실 그런 것들은, 중요한 만큼이나 아무 의미도 없답니다. 개인이 개인 이상의 것에 대해서 말할 때면 항상 설득력이 떨어지곤 하니까요. 해가 산맥 사이로 가라앉기 시작하는군요. 버스는 아직도 한참을 달려야 하고요. 이런 산골짜기에 노을이 깔리는 시간이면 저는 제 마음 속에서 으르렁거리는 뭔가를 느낀답니다, 아가씨.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아주 오래 전부터 깊고 어두운 곳에 철창을 세워 가둬놓은 일종의 야수지요. 인간들이 누구나 갖고 있는 자신의 숨겨야하는 인격 말입니다. 제 친구 얘기를 하나 해볼까요. 그 친구는 저보다 세 살 정도 어린 후배로, 전에는 미술 공부를 하는 학생이었습니다. 일처리가 그리 능수능란하지는 않지만 성실하고 착한 성질을 갖고 있는 녀석이었어요. 굳이 눈에 보이는 문제라면 남성적인 매력이 좀 부족하다는 것뿐이었죠. 아시다시피 매력이라는 것은 굳이 남녀사이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적인 대외활동을 책임지는 <능력>이죠. 그 매력이라는 것이 부족하다는 뜻은 그 친구가 세상에서 많은 불편을 보게 될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고요. 여하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그 친구는 사실 아동 성애자였던 겁니다. 성인 여성에게는 매력을 못 느끼고, 어린 아이들에게만 욕망을 가지는 성적 괴물 말이에요. 그 친구가 언제 자신이 이상성애자라는 것을 깨달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점은 그는 서른이 가까워질 때까지 그것을 숨기고 억누르고,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살아왔다는 것이지요. 욕구의 해소가 필요했을 때에는, 글쎄요, 뭐 어떻게든 했겠지요. 법에 저촉되지 않는 방법으로 말예요. 문제는 어느 날 그가 그런 생활에 진력이 났다는 것입니다. 성애(性愛)라는 것은 인간 존재의 태반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대단한 것인데, 그걸 삼십 년 가까이 목을 졸라 눕혀놓기만 했으니 그야 진력이 날 법도 하지요. 게다가 그는 남자란 말입니다……. 하하! 제가 이 시점에서 성(性)을 구분하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시나요? 그러나 사실입니다. 남자라는 것들은 무엇이든 분출해야만 하는 족속들이지요. 굳이 상스러운 의미가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뭐 하여간에, 그는 그대로 회사를 박차고 나가서 TV 뉴스에 나오는 범죄자들처럼 천륜을 어기는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었습니다만, 안타깝게도 그의 고지식한 양심 때문에 그러지는 못했습니다. 그것도 그 친구의 불운이지요. 그래서 그 녀석이 어떻게 했는가 하면, 경찰서를 찾아가서 벌컥 문을 열고 말한 겁니다. 나는 당신네들이 그렇게도 증오하는 아동 성애자요. 나를 감옥에 처넣든지 당장 쏴죽이든지 하시오. 경찰들은 입이 떡 벌어졌지요. 웬 미친놈인가 하고 쫓아낼 수도 있었지만, 그들의 역할이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경찰들은 그 친구를 테이블 앞에 앉혀놓고 질문을 시작했지요. 당신 어린아이를 강간하거나 성추행한 적이 있소? 아니오. 아동 포르노 같은 것을 소유하고 있소? 아니오. 그럼 도대체 무슨 명목으로 당신을 체포하란 거요? 글쎄, 그건 당신들 일이지 내 일이 아니오. 그리고 아동 성애자가 전 인류의 적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알지 않소? 아하! 이거야말로 한편의 코미디지요. 사람들은 사실 자신이 증오하는 족속들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만 증오스러운 지를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여하간 경찰들은 유감이지만 자신들이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는, 내가 어느 날 더는 참지 못하고 다섯 살배기 꼬마아이를 평생 다시는 제정신으로 살지 못하도록 망가트리면 어떡하려고 날 놔주는 거냐고 했지요. 그러자 경찰은 손톱을 좀 물어뜯다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디다. <제가 정신병원에 연결해드릴 수는 있습니다.> 친구 녀석은 그 말을 듣고 머리에 열이 올라서 그냥 경찰서를 박차고 나온 뒤에 저에게 전화를 했지요. 이래 뵈도 전 동생이나 후배들에게 꽤나 신망을 받고 있는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그날 저녁 술집에서 만났고, 그 녀석은 홧술을 마셔대면서 저에게 이 이야기를 해준 겁니다. 그러면서 그가 그러더군요. 형, 자기가 괴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살아가야하는 기분을 아시오? 저는 대답했습니다. 암, 아주 잘 알지. 그러자 그 친구는 말없이 건배를 요구하더군요. 그래서 우리는 소주잔을 부딪치고, 또 계속 마셨답니다.
제가 다소 과하게 자신만만한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사실 저에게도 그런 시기가 있었어요. 더는 이러한 치욕 속에서 살 수는 없다면서 자기 자신의 살을 발라내는 그런 시기 말입니다. 치욕과 죽음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라면 일본인들이 전문가이기는 합니다만, 저도 나름의 철학을 갖고 있답니다. 날카로운 단도로 자신의 심장을 조준하는 시기는 누구에게나 있지요. 문제는 그 칼날을 결국 바깥으로 향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랍니다. 마침 밖에는 어둠이 깔리고, 버스 안 전구에 불이 들어왔군요. 날씨 탓에 모든 광경들이 아른거리고 말입니다. 예를 들자면 저 소나무, 어둠 속에서도 당당하게 솔잎들을 세우고 있는 소나무를 보십시오. 저것들은 겨울이 와도 낙엽을 흩뿌리지 않지요. 저들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저것이 신이―어떤 종류의 신이든 말입니다. 그-혹은 그녀가 누구를 위해 존재하든― 인간 속의 야수를 위해 세워둔 이정표처럼 보입니다. 아아, 날이 잘 선 도끼로 둥치를 쪼개야만 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자신의 살을 찢고 창살을 부순 뒤 야수의 정수리에 도끼를 박아 넣어야만 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왜냐하면 우리가 정의하는 <인간>이라는 개념은 보이지 않는 양심에 의해 너무 고결하게 다듬어졌으니까요. 그러나 아가씨, 그 야수는 <죽음>이라는 성질을 갖고 있지 않답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해볼까요. 아가씨가 어느 날 밤 새까만 어둠 속에서 수평선도 보이지 않는 바다의 음산한 파도소리를 듣고 있을 때, 그 해변에 등대가 하나 서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등대의 빛은 너무도 치졸하고 미약해서 그 누구의 눈도 되어주지 못할 때, 태곳적부터 인간이 감히 단 한 번도 손을 대지 못한 세계라는 것이 형체도 없이 으르렁거릴 때……. 아시겠습니까? 인간은 개인의 미약함을 숨기기 위해서 문명을 세운 것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밤을 환하게 밝히고, 손끝도 댈 수 없는 하늘로 우주선을 쏘아 보내고, 궁극적으로는 인간 자신의 뇌와 영혼을 분석하기 위해 불철주야 메스를 휘젓고 있습니다. 아! 그래요! 그들은 <모른다>는 것이 너무도 공포스러운 것입니다! 그 많은 신학 논문과 유럽의 철학서들, 포스트모더니즘을 믿는 정신과 의사들과 세계대전, 더 쉽게 적을 쏘아 죽일 수 있는 첨단 기술로 만들어진 총과 대포들, 미국과 러시아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믿고 있는 궁극의 사회. 나는 그것들을 공포에 대한 <도전>이라고 해야 할지 공포에 대한 <도피>라고 해야 할지 단언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얼마나 위대한 업적을 이루건, 결국 모든 공포는 자기 자신의 내면에 굴을 파고 들어앉아있는 한 마리의 들개에 대한 공포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아, 그들은 절망할 것일까요?
아가씨, 세계를 세계의 눈으로 보기 시작하면 인간이 더 이상 인간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버린다는 것을, 아가씨도 동의하리라 믿습니다. 바로 아가씨 나이 무렵에 사람들은 그 연결점을 발견하게 되지요. 존재에 대한 의심이 광란을 거쳐 회의가 되어버리는 나이에 말입니다. 제가 적(敵)에 대해서 말한 것을 기억하십니까? 저는 그것이 인간에게 필수적인 것이라고 말했습지요. 인간! 하하! 제가 왜 웃는지 아시겠습니까? 저는 자신만만하게 말하면서도 계속 자신이 쳐둔 덫에 걸려버리고 마는 언어적 장애를 겪고 있습니다. 언어의 한계 바깥에 있는 개념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할 때 누구나 겪게 되는 모순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기는 그래서인지 몰라도 독일 철학자들의 책을 읽어보면, 그들은 그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단어들을 조합해 새로운 단어를 창조해내곤 하더군요. 그들과 언어에 절망해 길거리에 무대를 세워놓고 광란하는 행위예술가들 중 누가 더 현명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간 이것은 노력이지요. 인류의 최대 발명품이라고도 할 수 있는 언어에게 배신당하지 않으려는 노력이요. 짐승이나 야수에게는 그런 노력이 필요 없습니다. 그들은 말을 하는 대신 송곳니와 발톱을 사용하지요. 진리에 대한 그 단순하고도 잔혹한, 완벽한 표현이라니, 인간에게 길들여지지 않은 짐승은 그렇게 감탄할만한 기술들을 가지고 있답니다. 이쯤에서 나츠메 쏘세키가 만들어낸 고양이가 생각날 법도 합니다. 그 고양이는 살면서 인간에게 물드는 바람에 심히 유감스러운 결말에 빠져버리고 말았지 않습니까. 짐승의 자살이라니, 저는 그 고양이가 잃어버린 야만에 대해 그저 유감일 뿐입니다.
버스에서도 담배를 피울 수 있었던 시절이 떠오르는군요. 지금은 그런 짓을 저질렀다간 국가적으로 말살당하는 극형을 받게 되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담배라는 것은 말입니다 아가씨, 그것이 신체에 유해하든 유해하지 않든,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한 개비의 궐련이 인간의 영혼에 얼마나 많은 상징을 부여하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담배에만 해당되는 사유가 아닙니다. 코로 들이마시는 각성제라거나, 발륨이 나오기 전에는 모든 지적노동자들이 애용했던 바르비투르산이라거나, 중국인들이 은을 팔아치워 사들였던 신경이완제까지, 인간의 영혼을 조정할 수 있게 만드는 이 놀라운 물질들은 그야말로 인간이 예술과 함께 발견한 또 다른 비상구라고 할 수 있지요. 애당초 이런 약물들을 인간이 발견해 아름다운 정제로 빚어낸 이유부터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도망치고 싶은 것입니다! 무엇에 대해서냐구요? 아, 그야 물론 모든 것에 대해서지요! 우리는 시간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하고, 삶으로부터, 죽음으로부터, 그리고 하늘과 땅과 우리 모두를 구속하는 중력과!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것입니다……. 아아, 아가씨. 부디 오해는 마십시오. 이런 얘기를 사실 당신 같은 꽃다운 나이의 젊은 아가씨에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저도 알고 있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계 없이 털어놓고 마는 것은 나의 끔찍한 버릇이랍니다. 어떻게 보면 직업병이기도 하지요. 제가 이미 말했듯이 제 직업은 전문적 거짓말쟁이랍니다. 그런데 거짓말이라는 것은 날조 투성이일 때는 오히려 의미가 없습니다. 어떤 때는 차라리 거짓말이 진실보다도 사물의 구체성을 정확하게 지시하지요. 제가 하는 거짓말은 2012년에 지구가 멸망한다는 등의 대책 없는 낭설이 아닙니다. 저는 세련되게 차려입은 정장으로 사실과 거짓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뒤섞어 끊임없이 털어놓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만일 당신이 초자아라는 개념을 더 이상 숭배하지 않는다면……니체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같은 것이지요. 하기는 니체는 너무 많이 쓰인 이름이긴 합니다. 근대 유럽 철학을 대표하는 상징이자 아무도 성공시키지 못하는 지침이 되어버린, 철저하게 비극적인 심벌이에요. 여하간, 제 거짓말은 이런 것들입니다. 저 자신은 이 세계와 인간의 관계가 더는 변할 수 없고,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막다른 골목으로 머리를 들이밀고 있다고 믿지만, 제 직업은 저의 자랑스럽고 유연한 혀와 철로 된 안경테를 이용하여 인류가 나아갈 길을 지시하는 철학이 아직은 남아있노라고, 그 사상을 사람들의 머릿속에 인쇄하는 것이지요. 아, 저는 제가 사악하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뭐라구요? 제 직업이 작가냐고 물으시는군요. 제가 되묻지요.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진실로 존재한다고 믿으십니까?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알려드리지요. 이 나라의 노동법에 따르면 작가나 소설가라는 직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로 작가나 시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법적으로 백수입니다. 다만 <취미>로 작성한 원고라는 이름의 엔터테이먼트를 출판기업에 팔아 생계를 유지할 뿐이죠. 작가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 따위는, 이 나라에는 없답니다. 아가씨.
제가 말해놓고도 우스운 단어군요. 예? 아뇨, <취미>라는 단어 말입니다. 아아, 이 얘기를 하려면 제 과거를 들춰야만 하는데, 어쩔 수 없군요. 사실 저도 젊을 적에는 아주 많은 분노를 뱃속에 끌어안고 사는 청년이었답니다. 저는 항상-그리고 모든 것에 화가 나있었고 기회만 있다면 언제든지 폭력을 사용했죠. 열아홉 살 때 오십을 바라보는 대학교수와 나이도 잊고 주먹다짐을 벌인 일이 생각나는군요. 그게 말입니다, 그 사람은 스스로를 니체이스트라고 믿었지만, 제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파시스트에 지나지 않았답니다. 그리고 당시의 저는 그런 상황과 마주하면 먼저 소매부터 걷어 올리는 미치광이였고요. 저는 모든 지식인들에 대한 반란자이자 극도의 개인주의와 아나키즘으로 무장하고 반달리즘의 옷을 입은, 말하자면 잠을 잘 때조차 눈동자에서 불꽃이 튀는, 증오로써 살고 있는 청년이었습니다. 상상하기 어려우시다고요? 이해합니다. 저도 지금의 제 모습이 그때와는 전혀 합치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여하간 그렇게 피가 끓던 때에, 단 한 가지 믿고 있던 것은 <예술은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대단하다>나 <귀중하다>나 <위대하다>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주십시오. 제가 선을 그어놓은 단어는 <중요하다>였답니다. 그때 저는 예술에는 반드시 피와 영혼이 필요하다고 믿었고, 작품이라는 결정을 위해 인생 전부를 예술에 바친 랭보와 로트레아몽을 신성시했습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제가 가장 증오하는 무리들은 <딜레탕트>라는 무리들이었지요. 아! 소위 <글쓰기 수업> 같은 곳에서 제 눈동자만 보고서 질겁하고 도망쳐버린 아주머니들, 그 풍족한 노년에 다소의 품위만을 얹고 싶어 했던 무고한 아주머니들이 떠오르는군요. 아무래도 잔혹성 또한 제가 짊어지고 태어난 천성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 나이를 먹었지요.
이것이 제가 <취미>라는 단어를 사용해놓고 스스로 웃은 이유랍니다, 아가씨. 한때 저는 예술은 절대 취미가 될 수 없다고 믿었고, 그 믿음을 위해 영혼을 불쏘시개로 사용하다가, 어느 순간 자신이 막다른 골목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지요. 그곳에서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사람들도 저와 마찬가지로 막다른 골목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는데, 그들은 자신의 길이 막혀버렸다는 것을 모르더란 말입니다. 청백색으로 불타는 것 같던 제 영혼은 그 순간 식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재가 되기에는 너무 차가워진 머리로 생각해보니, 눈앞의 모든 것이 어느새 열정과 광기를 잃고 한낱 소일거리와 코미디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이 나라에 <예술가>라는 직업은 없어요. 그렇게 해서 저는 제 천직을 찾고만 것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전문적 거짓말쟁이라는, 오로지 언변과 정직하지 못한 미소만으로 돈을 버는 천직을요.
예? 아가씨에게는, 지금 제가 정직하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구요. 아하! 그것을 제가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보십시오. 우리는 떠나기 위한 버스를 타고서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지 않습니까. 발목부터 늑골까지 담쟁이덩굴 같은 이 땅의 손아귀에게 붙잡혀 있다가, 이제 떠나려 할 때 갑자기 혀가 환희를 외치는 것을 경멸하지는 말아주십시오. 마침 하늘은 검푸른 보라색이고 만월이 떠있지 않습니까. 이런 밤에 외치고 으르렁거리는 것 외에 또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아, 제 영혼이 식을 때, 그때 절망하는 방법마저 잃어버린 것을 오늘처럼 감사하게 여긴 일이 없습니다.
저 어둠이 깔린 숲을 보십시오, 아가씨. 한 가지 묻고 싶군요. 저곳에서 무엇이 보입니까? 아, 침묵이라고요? 그것 참 굉장한 대답이군요……. 물론 저곳에서 침묵이 보이긴 합니다. 사실 보일 뿐만이 아니라, 그 침묵이라는 것을 거의 폭력적으로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지요. 그러나 제가 말한 것은, 그 침묵 안에서 보이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아가씨. 저것은 전쟁입니다. 심지어 식물들조차도 자신의 삶으로 다른 삶을 찢어발기려는 전쟁을 벌이고 있지요. 키 작은 나무들은 어떻게든 태양빛을 받기 위해 괴상한 모양으로 잎을 뻗고, 키 큰 나무들은 자신들과 같은 땅에서 양분을 빨아 먹는 다른 나무들을 말려죽이기 위해 더 높게 넓게 잎사귀들을 피운답니다. 그리고 물론 짐승들도 자신의 피를 위하여 토끼와 고라니들의 고기를 물어뜯고 적을 상대하기 위하여 송곳니를 날카롭게 갈아놓지요. 이것은 다큐멘터리에서 말하는 순환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전쟁이지요. 엔트로피의 법칙을 아시지요, 아가씨? 그것을 다른 말로 한다면, 그것은 <죽고 죽여라>랍니다. 그러니까 보십시오, 저 삶의 욕망으로 가득한 푸른 숲을 말입니다. 나는 감히 저것이 아름답다고 말하겠습니다. 전쟁이야말로 우리의 기원이지요. 우리도 그 전쟁 속에서 태어났으며,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날 때 다들 날카로운 단도를 하나씩 쥐고 나옵니다. 문명의 발전이란 것은 전쟁을 종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개념을 감각으로부터 멀게 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었지요. 그리고 계속 반복되는 이야기입니다만, 전쟁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 그렇지요. 그것은 적(敵)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바로 인간의 삶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적이라는 존재입니다. 사실 그것은 생의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그 누구도 적으로 만들지 않고 생식(生殖)과 인간성마저 지워버린 뒤 오로지 피안의 저편을 향해 홀로 저벅저벅 걸어가는 수행자들을 상상해보십시오. 나는 그들을 경외하기도 합니다, 아가씨. 그러나 나는 그들을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위버멘쉬로 향하는 길을 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그저 <인간도 짐승도 식물도 아니게 되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입니다. 적이라는 것은 당신의 존재를 더욱 단단하고 확실한 것으로 만듭니다. 분노와 증오가 당신의 신체를 보다 확정적으로 다듬고, 적을 향한 당신의 어쩔 수 없는 사랑이 당신의 눈동자에 생명을 돌게 만듭니다. 당신은 손톱을 더 날카롭게 다듬을 것이며 칼을 쥐고 휘두를 수 있게 뼈와 근육을 준비할 것이고, 오로지 투쟁만이 존재의 의무라는 것을 마침내 깨닫는 것입니다…….
적은 증오스러우면서도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마치 당신이 당신일 수 있게 만드는 당신의 분신과 같으며, 당신에게 생명의 원액이 돌게 만드는 삶의 기원입니다. 이미 말했듯이 이것은 오로지 인간에게만 국한되는 개념이 아니지요. 아가씨, 나는 당신에게도 적이 있으리라고 분명하게 믿습니다. 물론 아가씨가 그 <대상>일 수도 있는 무언가를 적이라고 인식하시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아직 확신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투쟁이 끝나버리면 인간에게 남은 것은 쇠퇴와 죽음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부디 제 얼굴을 보아주십시오, 아가씨. 제가 지금 이 일련의 성토를, 웃는 얼굴로 내뱉고 있는 것인지 나는 모르겠습니다. 모든 개념들이 너무도 추상화되어버린 이 내륙에서 많은 사람들이 적을 잃어버리고 땅 밑으로 가라앉는 것을, 내 눈으로 너무 많이 보았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상대주의와 다원주의를 경멸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말아주십시오. 시대정신이 얼마나 많은 똘레랑스를 품게 될지언정, 그것은 존재의 기원과는 별 상관이 없는 일일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과거에는 너무도 명백했던 적의 존재가 지금에 와서는 도무지 확인할 수 없는 아지랑이 같은 것이 되어버렸고, 그리하여 이 행성에 사는 수많은 인간들이 정신적 공황상태를 겪고 있다는 것이지요. 막다른 길, 막다른 골목! 제가 말했던 막혀버린 골목, 후퇴할 수도 없는 막다른 길은 바로 지금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서성거리면서, 오로지 <무언가>를 찾으려고 뿌예진 눈동자로 침을 흘리고 다닙니다. 그러나, 아! 도대체 무엇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시대와 함께 흉기마저 퇴화해버린 그들이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요?
그러나 제가 항상 이러한 무책임한 비관에만 젖어있던 것은 아니랍니다, 아가씨. 이 시대의 많은 지식인들이 지금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것은 서양문명의 종말이며, 이제는 다시 동양철학이 새로운 길이 되어줄 것이라고 말하죠. <구토>와 <이방인>을 한 손에 들고 거대한 서점들이 사방에 자리 잡고 있는 시내거리를 붉은 가죽구두를 신고 종횡무진 했던 저에게 그것은, 사실 다소 이해하기 힘든 주장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고백컨대 오후 두 시에 내리쬐는 겨울의 태양빛마저도 저에게는 조르바의 어깨를 검게 태운, 지중해의 빛살을 암시하는 속삭임으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지식인들의 주장을, 저는 들을 수도 있었고 어느 정도는 감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사실 저에게도 철학이라는 것은 이미 근대에 끝나버렸고, 현대란 아무런 열정도 기대도 없이 <남겨진 시대>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척수의 근저에서 뱀처럼 쉿쉿거리며 일어서고 있었기 때문이죠.
잠깐 이야기를 우회시켜도 되겠습니까, 아가씨? 감사합니다. 아가씨가 사랑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실는지 모르겠군요. 어쩌면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고, 어쩌면 아가씨처럼 사랑하기 아름다운 나이에는 그것이 사방에 꽃을 피우고 있을 수도 있지요. 저는 인생에서 단 한 번 사랑에게 잡아먹혔었답니다. 신경학자들이 <고작 세 달밖에 지속되지 않는 호르몬 분비>라고 부르는 것이, 마치 망치로 머리를 깨부수듯이 저를 쓰러트려버렸죠. 맹세컨대, 제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빛>을 본 것은 그때뿐이었습니다. 오로지 한 사람만이 이 세계에서 가장 빛나는 듯이 보이고, 그녀가 뿜는 신성한 빛으로 말미암아 세계 역시 전에 없던 아름다움을 품게 되었답니다. 도취, 그것은 도취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환각제이자 각성제였고 눈물이 흐를 만큼의 아름다운 <패배>였습니다. 그러나 아가씨, 당신이 이것을 아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의 결말은 부조리극보다 더 기이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기기괴괴한 것이랍니다. 그것은 희극은커녕 비극도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결말들 앞에서 울어야할지 웃어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고, 소위 운명이라고 부르는 혼돈의 도가니가 마음 내키는 대로 사방을 해머로 때려 부쉈다가 새로 짓는 것을 지켜봐야하지요. 한때 사랑이라는 이름이 나의 단도를 녹이 슬어 스러지게 했다가, 어느 날 홀로 더러운 구정물이 하수도를 타고 흐르는 새까만 도시 한 복판으로 돌아왔을 때 자신의 손아귀에 한 자루의 새롭고 익숙한 단도가 쥐어져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의 기분이란 참으로 기묘한 것이지요. 쉽게 말해, 한번 지옥에서 건져 올려 졌다가 다시 지옥으로 내던져졌을 때 느끼는 감정은 절망이 아닙니다, 아가씨. 그것은 말하자면…… 아아, 자신이 진실을 발견했다는 일종의 깨우침이지요.
제가 왜 갑자기 사랑에 대해 이렇게 냉소적으로 늘어놓았는지 궁금하실 겁니다. 인류를 이끌 새로운 철학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지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는 불교철학을 연구하는데 실패했던 것입니다. 자비심과 보리심이라는 개념은 충분히 인상적이고 흥미로웠습니다. 고통에서 영원히 벗어난다는 단순하고도 궁극적인 목표는 통쾌할 정도였지요. 그런데, 맙소사, 아가씨, 그것을 연구한다는 시점에서―학술적으로든 종교적으로든 말입니다― 이미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개념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감각이듯이, 그들의 수행 또한 논리로 접근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차라리 사이비 종교들의 신앙교육 방식은 심리학적으로 아주 초보적인 테크놀로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불교철학을 저 자신에게 대입시켜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제가 느낀 것은 정신의 분열이었습니다. 유럽에서 태어나 매카시즘의 땅에서 자란 제 영혼은 투쟁하는 자이기를 그만두는 것에 끔찍한 공포를 느끼더라 이 말씀입니다. 피를, 더 많은 피를 흘리고 흘리게 해야만 한다는 강박이 사라지는 것이, 마치 저 자신을 잃는 것처럼 두려웠더란 말씀입니다! 적을 쓰러트리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핏물이 튀는 전쟁을 어머니 같은 죽음이 내 목숨을 가져갈 때까지 계속하는 것만이 인간의 유일한 의무이노라고! 사랑이 모든 것의 해답일 수도 있지요. 그 이해할 수 없는, 이해될 수 없는 성질의 차원이 모든 것이 해답일 수도 있지요. 그러나 저는 겁먹고 지치고만 것입니다…….
예. 겁먹고, 지쳐버렸습지요. 아직도 저는 입안에 스물여덟 여개의 흉기를 품고 있고, 제 혀는 냉소를 두들겨 만든 날카로운 단도에 필적합니다. 오로지 거짓말과 능멸로 사람들의 주머니를 털고, 혁명을 말하는 척 하면서 파멸에 부채질을 합니다. 어느새 저는 너무 많은 나이를 먹어버렸고, 기존 관습에 대한 반란자이자 미친 반달리즘의 화신이었던 제 젊은 모습이 아스라하기만 합니다. 아아, 아가씨. 이 버스가 달리는 내내 저는 아가씨에게 계속 적(敵)에 대해 강론하였지요. 그러나 제 눈가에 단단히 박힌 주름은 제가 웃는 얼굴의 사기꾼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이제 저의 적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그 사랑스럽고 증오의 감정으로 들끓는, 육시하여야 마땅할 나의 적이 누군지를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안개로 자욱한 시대에 막다른 길목에서 어물쩍거리는 목적 잃은 들개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남들에 비해 더 아는 것이 있다면, 막다른 골목에서 이 골목은 막혀있노라고 알고 있다는 점뿐이지요. 어느새 창밖으로 밤바다가 보이는군요. 저쪽에 보이는 것이 항구인가요? 아, 배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군요. 뱃속을 비우고 잠자는 거대한 짐승처럼, 배들이 연기를 뿜으며 침묵하고 있어요. 사람들이 내릴 준비를 하는군요…….
너무 오래 떠들었나보군요. 제 실없는 소리를 여태껏 들어온 아가씨도 지치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만 저의 말동무가 되어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리고 싶군요. 예? 아아,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되지요. 제가 말씀드린 것들이 <공부>가 될 리가 없습니다. 제 입에서 나오는 모든 이야기들은 아가씨의 인생에 해(害)밖에 되지 않을 거예요……. 먼저 내리시죠.
밤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차군요. 여기만 벌써 겨울인 것 같습니다. 어둡고, 그러나 인간들이 피운 불빛이 몽환적으로 반짝이고, 빛이 닿지 않는 밤바다는 음산하고 으스스한 것이 과연 로트레아몽이 시의 주제로 썼을 법 합니다. 그나저나 이 항구를 자주 이용하시는 것 같은데, 매표소까지 안내를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감사합니다. 예, 여기군요. 아가씨, 저기 매표소 옆 구석에 엎드린 사내가 보이십니까? 비렁뱅이로군요. 전철역이든 공항이든 항구든, 사람들이 오고가는 곳에는 거의 항상, 무슨 상징처럼 비렁뱅이들이 있어요. 아, 다음이 제 차례군요.
출항이 30분 뒤라고 되어있네요. 아가씨는 어디로 가십니까? 아, 일본이요. 학교가 일본에 있으신가봅니다. 저는 어디로 가냐구요? 글쎄요, 그게 무슨 상관이랍니까. 굳이 말하자면, 아가씨, 저는 다섯 개 국어를 할 줄 알고 키르케고르를 원서로 읽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런 것들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증명할 곳으로 갈 거라는 것입니다.
출항이 30분 뒤이니 미리 타 있는 게 좋겠군요. 아가씨와의 짧은 인연은 이것으로 마지막이니, 작별인사를 하고 싶지만…… 먼저 해결할 일이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죠. 이보시오, 아저씨. 이 시간까지 비럭질 바가지 두고 엎드려 계신 거 보니 집도 절도 없는 분 같은데, 이거 받으시오. 아닙니다. 전 어차피 떠날 사람이라 다시 와서 되돌려달라고 할 일 없으니, 그냥 받으시오. 안에 현금카드도 있으니 미친 것처럼 쓰지만 않으면 적어도 반년은 사람처럼 살 수 있을 거요. 그러니까 통째로 받으시라니까. 예, 예. 당신이야말로 복 받으쇼.
예, 이제 작별인사를 할 수 있겠네요. 예? 아아, 예. 지갑 통째로 준 것 맞습니다. 괜찮아요. 생각해보니 휴대폰도 줘버릴 걸 그랬군요. 뭐어, 나중에 배 위에서 바다에 던지면 되겠네요. 괜찮다니까요 아가씨. 여권이랑 배표는 코트 주머니에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생은 항상 편도여행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