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려있는 망념 속에 단 한마디의 구원이라도 있으면


 어제는 끔찍했습니다. 그리 좋은 날은 아니었노라고 쓸 수도 있었겠으나, 결코 그러지는 못하겠습니다. 멈추지 않는 불면과 부서진 우정을 동시에 겪는 것이 ‘그리 좋은 일은 아니’라고 쓰지는 않겠습니다. 숙면은 점점 더 멀어졌습니다. 그리운 이는 갈수록 그리워졌습니다. 가슴에 뚫린 바람구멍에 바람이 본분처럼 난도질을 하는데, 오래 잠들지 못한 의식이 상처를 모자이크로 가려놓은 피고름처럼 여겨, 더더욱 나는 혼란해 아파했습니다.
 진심은 왜곡되는 법입니까?

 씁쓸한 맛이 방안의 책만큼 쌓이고 별안간 요조의 호리키마저 떠올랐으나 오랜 친구에게 그런 연상을 하지는 않겠다고 나는 펜을 고쳐 쥐었다고쳐 쥐고 같은 문장을 남겨두었다.

 그러나 밤은 어떤 위로도 하지 않는다
 잠 못 드는 이의 눈꺼풀 속엔 잡념이 빛나며 형이상학을 그리고
 눈을 뜨면 밤은 결코 어둡지 않다
 구멍을 중심으로 우그러드는 폐부에
 사랑을 외치고 시간을 외치다
 걸신들려 활자에게로 투신하고 만다
 거꾸로 잉크 속에 처박히는 내내
 사람들은 잠들어 있다.

 동터오는
 밤낮없는 마을
 새빨간 눈, 앞
 책더미에
 선물 받은 말마디 하나
 충분하다, 고

 그래
 그러니까

 충분
 하다고.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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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의무가 개폼 잡는 것 말고 또 뭐가 있다고


 형식이 내면에서 필요를 잃고
 그 누구를 위하지도 못해
 녹아버린 후
 가끔 이런 말도 듣긴 했다
 그렇게 시 잘 쓰던 사람이
 왜 욕지거리 집어넣으면서 멋을 부려

 아
 옘병할,
 생각하니까 또 욕 나오는데
 뭐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담배 쥐고 나간 어젯밤의 어둠에는
 늘어진 검은 실처럼 이상한
 본 적 없는 선이
 허공에
 머리 위에서 바람 따라 흔들리고 있었고

 잘 보니
 전봇대서 떼어온 전선, 옆 빌라
 어느 가구에 끌어다 놓고
 더 잘 보니
 고정하겠다고 가스관에
 타이 묶어놨던데
 더 자세히 보면

 그 연약한 가스관은
 삼 년 전 태풍으로 떨어진 간판에 직격
 당해
 삼 년째 방치된
 그 가스관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웃음과 청량한
 욕지거리도 터져 나와
 아, 염병, 살겠다고 아주
 지랄들을
 하며 웃고, 그 앞에서
 담뱃불 붙이고.

 전혀 거리낄 것도
 위조할 것도
 꾸밀 것도
 멋 부리고 개폼 잡을 일도 없는
 자연하고 티 없는
 웃음에 쌍욕에
 가로등도 깜빡이는 창동의 밤에
 연기보다 불분명한 군청색 하늘에

 전기고 돈이고 삶이고 시간이고 떼갈 건 모조리 떼가야 했던 만사천여 명의 주민들이
 안락하고 싶어
 잠들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마침

 씨발새끼야, 하고,
 주택가 그림자 너머 저편
 불 밝은 24시간 편의점에서
 청명한 쌍소리 들려오니
 또 웬 놈이 술 처먹고
 또 아침이면 잊어버릴 싸움을
 싸우나 보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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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이나 박차고 나갔던 둥지는


 계절은 여름이라는데
 얼어붙은 비와
 써늘한 밤바람은
 어디고 침습해오며

 죽은 작가들의 피가
 방바닥
 켜켜이 적혀

 손끝의 잉크가 새긴 말들이며
 새까맣게 터진 심부며
 소리 없이 새 나온 언어들

 좌절했다고
 중얼대보니
 과연 좌절했다.

 냄새를 맡는다.

 이곳은 나의
 방,
 언제고 준비된
 중력이 쌓인

 냄새가 나는

 초봄이 다가온 기척도 없어
 잊고 있던 봄코트 꺼내
 새벽 네 시
 물을 보러 갔다

 석유처럼 검은 하천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왱왱거리는 날벌레 무리가 빗속에서 구름까지
 만들기에,
 돌아오자,
 거울에는
 삼 년도 더 된
 너무 익숙해 꼴도 보기 싫은 그 이 비친다.

 오는 길 편의점의 새벽 알바생은
 손님을 증오하는 눈을 가졌다.

 참으로 배운 그대로
 마음이 뿌려놓아 비추는 여기에서는
 신발 벗고 문을 닫아도
 신발 신고 문을 열어
 젖혀도
 둘러싼 모든 하나가
 지옥이다.

 펜을 쥐니
 냄새가
 더욱
 끔찍하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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