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치병에 걸린 자를 동정하는 것은 그만


<착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병에 걸렸다.
난 더 이상 지나가는 노파의
지팡이를 빼앗아 그녀를 두들겨 패지 못한다.
그것이 순수라고 말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순수라는 단어를 나 자신에게 사용할 만큼
순진하지 못하다. 어린 시절에 나는
학교 창고에서 발견한
새끼 생쥐들이 바글거리는 둥지에
불을 질렀었다. 아이들은 비명을 질렀다.
나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였고
그것들은 털도 나지 않은 한갓 생쥐였다.
어머니가 나를 도취시켰다. 야생의.

착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병에 걸렸다.
내 청바지는 무릎 부분이
갈기갈기 찢겨있다. 몇 년 전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술을 처먹고
갑자기 친구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그가 일하는 구멍가게로 냅다 달렸다.
나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얼굴부터 떨어졌다.
얼굴 오른쪽이 전부 찢겨나갔고
바지도 찢어져있었다. 나는 얼굴에서 피를
뚝뚝 흘리며 웃으면서 구멍가게로 들어갔다.
친구가 날 쳐다보았다. 마침 물건을 사던 손님이
내게 반창고를 주었다. 나는 눈에서
소주를 흘렸다.
반창고는 상처의 십분의 일도 가리지 못했다.

착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병에 걸렸다.
나는 이를 뽑고 머리카락을 잘랐다.
위장에서부터 올라오는 악취는
무슨 짓을 해도 사라지지 않지만
나는 잇몸에 피가 날 정도로 이를 닦는다.
사람들 앞에서는 입을 닫는다.
온갖 장기와 뇌와 영혼에서 스미어 나오는 악취를
그들에게 들킬까봐. 나는 이를 닦는다.
사람들에게 인사를 한다. 처음 보는 노파에게도
시답지 않은 잡담을 건넨다.
그러나 멀찍이서 할뿐이다. 나는
착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병에 걸렸으니까.
가까운 곳에서는
나의 악취를 들키고 만다.

착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병에 걸렸다.
나는 자주 웃는다. 과거에 어머니는
날더러 웃는 연습을 하라면서
입에 볼펜을 물려주었다.
나는 며칠 만에 그 짓을 포기했지만
덕분에 지금 나는 잘 웃는다.
내 흉부에는 수십 개의 흉터가 있지만
옷을 입으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잘 웃는다.
나는 옷을 세탁하고 머리를 감는다.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담배를 피운다.
술을 마셔도 길가에 주차된 자동차들의
창문을 깨지 않는다.

착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병에 걸리는 것은
생각보다 쉽고
생각보다 아프고
생각보다 쓸쓸하다.
버스가 도로를 달리고 전동차가
사람들을 싣고 철로를 달려도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부서져가고 있다.

Posted by Lim_
:

도망자

글/시 2014. 9. 26. 07:26 |

도망자


아침마다 도망치는 사람들을 마주친다.
그들이 무슨 생활을 하는지
내 과거에 비추어본다.
사실 그것은 생활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生은 이미 없다.
새벽마다 병의 이름을 가진 상념과
어둠과 밤과 달의 속삭임과
별들의 혼잣말과 영원히 잠들지 않는
도시의 빛살과 가로막힌 벽들과
근대의 유물이 된 사상과 지껄이는 밤요정들과
너무 무거워진 존재 때문에
빈 집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구멍 뚫린 흉부에 채워 넣을 무언가라도 찾으려고
밤거리를 배회하다가―그들의 실패는 자명한 것이다―
마침내 아무것도 찾지 못하면 떠오르는
태양의 귀퉁이를 두려워하며
이제는 햇살을 피해 다시 빈 집으로
도망치는 것이다.
이따금 그들은 서로 마주쳐
동류의 냄새를 맡고서 주춤거리지만
서로 말을 섞거나 새침하게 악수를 하는 일은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동정과 자괴감과
도무지 불이 붙지 않는 분노와 방향을 잃은 증오와
종말에 대한 허망한 기원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알고 있다.
나는 빈 집으로 도망치는 그들을
천박한 언어로 바라본다.
내가 낮에 술을 마시는 이유도 태양이 두렵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에게 말을 걸지 않는 것은
나는 그나마 야간 生活者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사실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과 더불어
원하는 것이 없는 이를 구하는 방법이란 없으며
내가 찾은 구원의 찌꺼기라는 것도 결국
술과 담배와 약물과 詩임을
알고 있음이다.

Posted by Lim_
:
모든 밤에는 잠들지 말자


어둠 속에 앉아있으면
담배연기 뿜는 내 숨소리조차 방해다.
사방이 밤으로 가려진 좁은 내 돌의자 위에서
나는 공간이 무한히 늘어나는 것을
느낀다. 나는 담뱃불을 끄고
해왕성 너머 가본 적도 없는 심연에
내 가죽 하나를 걸치고
종말의 소리를 기다린다.

시간이 멈추는 곳은 도시의 밤이다.
나는 이곳에서 영원히
깨어있는 채로 잠들어있기를 원하지만
또 태양이 뜰 것이다.
아무도 바라지 않는
또 하나의 아침이 시작될 것이다.

빛이여, 빛이여
너는 누구에게도 안식이 아닐 것이다.
너는 숨죽이던 사물들 위에
빛의 가시를 박아 넣고
꿈꾸던 시인들을 깨워
백주의 폐인으로 만들어 놓는다.
풀벌레 우는 적막을
구두 소리로 된 디스토피아로
추락시켜버린다.

새까만 어둠으로 만든 내 요람을
뒤집어 흔들어 깨워
멀리 꿈속의 고향으로 미뤄놓고
근대의 야수들과
욕망과 천한 상념 속으로
날 떨어트리고 빛으로 비추는
너.

차라리 사막의 백야로 보내다오.
리큐어와 눈과 흔들리는 눈동자로
빛을 가리고 혼돈의 춤을 추는
태양의 시체가 사방에 내려앉는
그 사막으로.

얼어붙은 지중해 위를 나는 끝없이 걷고
별들이 가리키는 방위를 나는 찬탄한다.
모든 이들이 목적이라는 것을 잊고
새하얗게 말라버린 채 방황하고
나 홀로 얼음에 죄업을 묻는
그런 밤에.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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