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나약함을 정의내릴 수 있는가

 ■ 항상 사회에 남아 그들이 군대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을 관망하고 있는 나로서는, 군대에서 그들이 배워온 것, 그리고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규격화된 정신을 가지게 된 것에 대해서 수많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어떤 친구들은 내게 <피터 팬>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들이 보기에 나는 온몸, 온정신을 다하여 어른이 되는 것을 거부하는 유별난 청년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아, 그들의 통찰을 너무 안일한 것이라고 비난할 자신감이 나에게는 없다. 그리고 군대라는 2년간의 사회인이 되기 위한 스파르타식 교육을 마치고 돌아온 그들에게, 내가 다소 가엾은 인간으로 보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대하여, 나는 반박할 의지조차 없다. 그렇다, 사실 나는 아직도 이 세상의 온갖 것들에 반항하며 소모적 투쟁을 치르고 있다. 이 사회를 지탱하는 이들이 철썩 같이 믿고 있는 유교적 예법, 조직사회의 규율, 부조리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갖지 않는 삶, 과잉된 합리성과 실존적 인간조건에 대한 회피. 내가 어머니의 살점과 분리되었을 적부터 나의 심장 속에 살고 있는 그 피투성이의 야수는, 분노와 증오라는 이빨로 아직까지 나의 가슴을 물어뜯고 있다. 그러나 이제 막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 나의 친구들은 나의 흉터를 이해하지 못하며, 거기서 흘러나오는 찐득찐득한 피를 객기라고마저 칭한다. 나는 그들을 탓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반박의 말조차 꺼내지 않는다. 이런 위험한 전쟁 중에 입으로 내뱉는 말들은, 언어라는 것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굉장히 피상적인 것밖에는 표현할 수 없다는 진실에 힘입어, 나 자신의 어리석음을 증명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나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순순히 털어놓겠다. 내가 발견한 어른이 되지 않는 방법은, 그 누구에게도 애정이나 신뢰를 주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사람들과, 심지어 내 절친한 친구들과도 정신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지 않는다. 만일 나의 오래된 고독이 머리를 내밀거나 상대가 나에게 어떠한 종류의 매력을 느껴, 내가 그어놓은 선이 침범 당하려하는 기색만 보여도 나는 불안 때문에 뒤죽박죽이 된 눈동자로 멀리 도망친다. 나의 가장 절친한 친구조차도 내게는 그저 목의 갈증을 교우관계에서 해갈하기 위한 한 순간의 쾌락을 위한 마네킹이고, 내일 그가 차에 치여 죽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의 장례식조차 가지 않을 것이다. 말하건대 나는 모든 인간관계에서 공포를 느낀다. 내 심장을 시꺼멓게 물들인 것들은 분노와 증오, 불신과 비밀스러운 조소다. 누군가를 짊어지고 그 무게를 감당한다는 책임으로부터 영원히 도망치고 있는 나는, 어쩌면 정말로 <피터 팬>, 팅커벨이 없어 날지 못하는 피터 팬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쯤 되면 이 산문은 이미 나 자신에 대한, 나 자신을 향한 고해나 마찬가지다. 스스로도 아직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지만, 내게 있어 문학이란-예술이란 어떤 위대함이나 고결함도 없는 단순히 비겁한 도주로인 것일지도 모른다. 추악함과 퇴폐 속에서 자유와 미학을 찾겠다고 제 발로 세상의 밑바닥까지 내려간 것은, 밝은 세계에서 얼굴을 들고 다니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로지 문학과 미학에 온 생애를 바치겠다고 다른 그 무엇도 짊어지거나 손을 마주잡지 않은 이유는, 인간으로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내게는 너무도 힘든 일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인간을 사랑하기를 그만두겠다고 내 고독의 목에 쇠사슬을 감아놓은 것은, 내게 사랑스러운 존재가 생긴다는 것을 감당하기에 나는 너무 취약한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쯤에서 나는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한다. 독자여, 도대체 무슨 영광을 얻겠다고 당신은 내가 나 자신이 불량품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글을 읽고 있는가? 이것은 패배주의와 퇴폐주의에 빠진, 보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날법한 인간의 고백록이 아닌가. 그리고 이런 글을 쓰는 내가 사실은 그 어떤 종류의 도움도 거절한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당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내가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이유가 어른이 되어 짊어져야할 책임들이 두려운 것인지, 아니면 여전히 이 세상의 긍정할 수 없는 수만 가지 부조리들과 짐승 같은 싸움을 벌여야하는 것 때문인지 분간할 수도 없다. 어쩌면 둘 중 하나일 것이고, 어쩌면 두 가지가 혼재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
 아, 그런데 심지어 나는 더 이상 스스로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방법까지 발견해버렸다! 그것은 이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들 가운데 무엇보다도 간단하고 손쉬운 방법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당신의 본성 속에 숨어있는 광기의 문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그 흉측스러운 문을 열고, 당신의 고민, 고통, 슬픔, 기쁨, 절망과 희열까지 모조리 다 그 문 안에 처넣어버리고 문을 걸어 잠그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당신은 더 이상 고통 받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광기의 문 속에서 온갖 감정과 현상들은 진흙탕처럼 뒤섞이고 부글부글 끓다가, 결국 내놓는 것은 당신을 포함한 이 세상 전부가 수준 낮은 농담이라는 결론이다. 그렇게 되면 무슨 일에도 웃을 수 있고, 그 무엇도 당신을 상처주지 못한다……. 심지어 당신의 오만가지 괴로운 과거들도 더는 명확하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과거가 없는 인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당신 스스로가 어떤 분명한 존재가 아니라, 그저 가스가 떨어지면 사라지는 라이터 불꽃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믿어버린다.
 이것은 조언이 아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조언을 하기에는 너무 낮은 위치에 있는 인간이다. 나는 스스로 절벽 밑바닥에 떨어져서, 기어 올라가려는 노력을 하기는커녕 그 밑바닥에서 오히려 더 깊은 구멍을 파고 있는 인간이다. 심지어 나는 가끔 나의 늙은 분노가 이끄는 대로 들고 있던 삽을 휘둘러 사람들의 목을 벤다. 나는 아직 내 본성 어딘가에 자비심과 찬란한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고 너무도 작은 목소리로 외치고 있는 희망, 그 희망의 입에마저 재갈을 물려버렸다. 이제 내게 절망과 비참은 나의 인격이나 다름없게 되어버렸다.
 그러나, 아, 선량한 독자들이여. 지금 하늘에는 너무나도 밝고 고요한 달이 떠있다. 담배연기와 이유를 알 수 없는 우울 속에서 그 달빛과 마주하자 내 눈에서는 이미 말라버린 줄 알았던 눈물이 흘러나올 뻔했다. 나도 슬픔을 느낀다. 어른이 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나임에도, 이런 밤이면 나의 나약함과 스스로 만들어낸 비참이 눈동자 앞에서 흔들거린다. 완전히 미쳐버린 광인들이여, 부디 그 광증 밖으로 나오지 말라. 광기와 이성의 경계선에서 세상을 본다는 것은 심장이 수천 조각으로 썰리는 것 같은 고통을 당신에게 선사할 것이다. 부디 괴물로 살아가다가 죽음을 맞기를 바란다. 그것이 당신들의 평화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의 전부다. 그리고 그들과는 정반대의 극점에 있는 어른들, 선량한 사회의 소시민들이여. 고흐가 말했듯이 철학과 사색은 당신을 비극적인 죽음으로 몰고 갈 것이다. 부디 그대들의 사랑스러운 가정과 안전한 직장에 몸을 담는 것을 그만두지 말라. 존재에 대한 고민은 다른 불쌍한 사람들에게 맡겨버려라. 철학자들의 논문을 불태우고 그대들의 일상을 지키는 일에만 골몰하라.
 스님께서는 내게, 모든 이들의 자성 속에 부처가 있다고 하셨다. 그의 말씀대로라면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나조차도 본성 속에서 자비와 평온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나는 그의 말을 믿고 싶다. 그러나 너무 오래전부터 나는 희망의 입에 재갈을 물려놓았다. 나는 그 성직자의 자비심 넘치는 말에도 심장을 칼로 난도질당하는 것 같은 고통만이 느껴졌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거렸다. 모른다. 언젠가 이 분노와 증오가 사라진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그때 나는 그의 가르침을 믿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당신은 그의 가르침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란다. 사실 나는 얼굴도 모르는 당신을 한없이 증오하지만, 동시에 당신이 내가 있는 이 끔찍한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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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대 앞에서

글/에세이 2014. 5. 1. 19:18 |
교수대 앞에서

 한국에서 사형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이루어진다. 우선 검사가 피고가 죽어 마땅한 이유를 목청 높여 부르짖는다. 그는 이러한 말들을 한다. 우리 사회의 규율과 양심, 국민이 지켜야할 절대적 질서, 법의 고결함, 그리고 검사 앞에 선 불쌍한 불량인자가 이 공동체에서 제거 당해야할 정당성. 그런 것들 말이다. 사실 이 검사라는 인간은 퍽도 호감이 가는 생김을 하고 있다. 그가 가진 인간적 매력이라는 것은, 그에게 흔들림 없는 신념이 있음에 기반하고 있다. 그는 인간의 사회 안에 사는 사람인 것이다. 크리스천들이 성경을 갖고 다니듯이 그 검사는 법전을 들고 다니며, 그 법전의 성스러움을 믿고, 심지어 자신의 영혼을 책갈피처럼 그 두꺼운 책의 책장 사이에 끼워두기까지 한다. 아무튼 그는 범죄자에 대하여 사회적 인간이 가져야할 건전한 분노를 사정없이 발산한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그러한 분노에 자부심마저 느끼는 것이다. 왜인가 하면, 사회라는, 더 나아가 국가와 집단의식이라는 우상(Idol)께서 그의 분노를 인정해주었기 때문이다. 이 검사라는 인간은 도무지 망설일 이유가 없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그 매력적이고 분노 가득한 목소리로, <국가>께서 이 더러운 범죄자에게 내리라고 말씀하신 처벌은 바로 죽음이라고 마침표를 찍는다. 피고의 변호사는 손짓발짓을 다 써가며 형량을 낮춰보려고 노력하지만, 공동체의 세례를 받은―마치 신부(神父)와 같은 검사의 지엄한, 살인에 대한 명령을 어떻게 흔들어볼 여지가 없다. 사실은 이 변호사조차도 자신이 변호해야할 범죄자에게 왠지 모를 역겨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저런 공방이 오간 뒤에, 판사는 몇 가지 생각을 한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의 사고는 <살인의 본질>에 대해서는 완전히 빗겨 가있다. 그는 그저 법전과 사회적 윤리에 비추어보아 검사와 변호사 중 누구의 말이 더 그럴듯하게 들리는 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무로 만들어진 망치가 세 번 내려쳐진다. 옳거니, 그들 생각에 저 범죄자는 이 사회에서 하등 쓸모가 없으므로, 목을 매달아 죽인들 누구 하나 불쾌하게 생각하는 이가 없을 것 같은 것이다.
 판결이 내려진 후 검사는 오늘도 사회의 일부로서 열심히 일을 했다는 만족감을 느끼며 돌아선다. 검사는 저 범죄자를 죽이라고 말했고, 판사가 그 주장을 입증해주었으니, 이제 저 범죄자는 대롱대롱 목이 매달려 죽을 것이다. 검사와 판사가 할 일은 여기까지다. 그들은 이제 집으로 돌아가 사랑스러운 가족들을 껴안고 먹음직스런 식사를 한 뒤에 기분 좋은 피로를 느끼며 잠에 들 것이다. 아하, 그것 참 신통한 방법이다.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한 사람을 죽일 수 있으니 이 얼마나 훌륭한 사회란 말인가. 식탁에 돼지고기를 올리기 위해 돼지의 멱을 따고 온몸의 피를 묻히며 찢어지는 돼지 울음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퍽도 마음 가뿐한 일이다.
 여하간 변호사는 그 흉악한 범죄자에게 찝찝한 목소리로 사과 한 마디쯤은 했을 것이다. 이제 피고는 교도소로 옮겨지고, 화장실만한 감옥에 갇혀 거의 모든 행위가 제한된다. 그 비좁은 감방에서 제한된 자유만을 가지고서 이제 그가 기다려야하는 것은 한 번의 사인이다. 나라의 녹을 먹고 사는 훌륭한 정치가가 사형집행을 위한 서류에 사인을 하기만을 기다려야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 주, 혹은 몇 개월이 지난 뒤에 서류에 인가가 내려진다. 우리는 도대체 그 서류에 사인한 사람이 어떤 낯짝을 하고 있는지 상상도 할 수가 없다. 왜 자신이 굳이 이런 서류에 사인을 해야 되는 가에 대해서 그 누군가는 약간의 불쾌감을 느꼈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아무튼 일은 일이다. 그는 사인을 한 뒤에 도장을 찍고 만다.
 날이 정해지면 이제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그리고 어느 날 새벽에 간수들이 사형수를 감옥에서 꺼내더니 머리에 자루를 뒤집어씌우고 어딘가로 끌고 간다. 사형수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 길인지 정도는 예측하고 있다. 그러나 도무지 반항할 틈새도 없을 정도로 모든 일이 기계적으로 진행된다. 간수들은 교수대 앞으로 그를 데려가 목에 밧줄을 건 뒤에 사라진다. 그들이 할 일은 거기까지이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세 명의 공무원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에게 내려진 명령은 아무도 살인을 저지르지 않고서 그 사형수를 죽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것이다. 만약 당신에게 그런 명령이 내려진다면 아마 당신은 방편을 찾기 위해 꽤나 고심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 걱정 없다. 우리들은 수 천 년 전부터 그 방법을 찾아내왔다. 그리하여 그들이 하는 일은, 목에 밧줄이 걸린 사형수를 내버려두고 다른 방으로 들어가, 세 개의 버튼 앞에 각자 서는 것이다. 그리고 호흡을 맞추기 위해 숫자를 세고, 동시에 버튼 세 개를 누른다. 그 세 개의 버튼 중 하나가 무작위하게 작동하여 사형수 밑의 발판이 덜컹하고 떨어진다. 그 사람은 이제 목뼈가 분질러져 죽었다.
 이것 좀 보시라. 기가 막히지 않는가? 아무도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는데 한 남자가 살해당했다. 사형이라는 절차에 가담한 사람들 중 아무도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다. 아무도 죄책감이나 살생을 저질렀다는 지저분한 감정을 느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 사형수를 죽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혜라는 것도 참 대단하지 아니한가? 과거에는 사람을 죽이려면 주먹이든 칼이든 도끼든, 무엇이든 쥐고서 직접 손을 휘둘러야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아무리 이유가 명확하다고 해도 기분이 더러운 일이다. 그래서 인간들은 이 사회의 편의를 위해서 책임이라는 것을 국가나 집단 같은 기묘한 추상성에 전가하고 마지막에는 빨간색의 작은 버튼이라는 형태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심지어 이제는 누가 그 사형수를 죽인 건지 분간조차 할 수가 없다. 옳거니, 그래서 당신들의 사회라는 것은 더 이상 존재에 대한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로군…….
 그런데, 나는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당신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의혹에 빠질 것 같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 뭔가가 분명하지가 않은 것이다. 그 사형수의 죽음을 멋진 논리로 부르짖던 검사는 지금 어딜 갔지? 사형 집행 서류에 사인을 한 그 신사는 왜 코빼기도 보이지 않느냔 말이야? 글쎄, 만약 당신이 그런 의혹을 느낀다면, 지금이라도 당신의 손을 유심히 보기 바란다. 그리고 당신의 지갑에 들어있는 반짝거리는 지폐들도 말이다. 당신들이 작당하여 거울로 된 미로에 파묻어버린 것, 그것이 바로 거기에 있다.
 당신들의 손과 지폐에 묻어있는 신선하고 끈적거리는 피가 보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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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일. 장편소설 <광기와 사랑> 초고 완성.
A4용지 102페이지. 200자 원고지 948장 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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