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노예를 구분하는 개념들


 많은 사람들이 영원을 믿고 싶어 한다. 어떤 영원보다도, 특히나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의 영속성을 믿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들은 약속을 바랬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그들은 약속을 받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누군가가 정해준 모럴과 계율을 따르기만 하면 영생을 얻으리라고 그들은 두꺼운 한 권의 책이라는 형태로 손가락을 건 것이다. 그리고 <그들> 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세속적 신앙들은 하나 같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영원을 가리키고 있다. 문제는 신앙의 종류가 아니라 인간의 욕망인 것이다. 이 지구를 차지하고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과거에도 그러했고, 현재에도 여전히 자신이 사멸하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나는 그들을 이해한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이, 그들의 소시민적인 삶에서 자유와 환희를 찾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주어진 시간이 촉박하다고 느끼고,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채로, 그리고 도대체 자신이 무엇을 위하여 살았는지도 모르는 채로 죽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무한이라는 시간이 당신에게 주어진다면, 당신은 그것들을 찾을 수 있을까? 글쎄, 천만의 말씀이다.
 아름다움에 대하여 이야기하겠다. 이것은 다소 나 자신만의 미학론에 대한 서술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내가 자신 말고 누구의 미학을 이야기하겠는가. 말하건대 미(美)라는 것은 일종의 빛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각자 다른 미학관이 있지만, 그들이 보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항상 빛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빛이라는 것은 항상 형태를 달리하고, 종류 또한 한 가지가 아니다. 어떤 아름다움은 초봄에 새싹 위에 내려앉는 황금빛 비단 같은 온유한 빛이고, 어떤 아름다움은 하늘이 쪼개지는 순간 번쩍여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는 섬광이다. 그런데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정신에서의 무한을 추구하던 이들이 보았던 아름다움은 항상 눈 깜빡 할 사이에 사라져버리는 폭력적인 섬광이었다는 것이다. 내가 믿기로는, 그들은 언젠가 태양이 꺼져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실재하지 않는 권위를 위하여 손을 뻗고 기도하던 이들보다도, 더욱 전신전령으로 무한을 추구하던 이들은 차라리 하늘을 향해 침을 뱉은 이들이었다. 그것이 진실에의 추구에 영혼을 쏟아부어버린 대가였다. 그리고 당신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얻은 것이 절망이었다는 사실을. 그래서 그들이 빛에 눈이 타들어가 미쳐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동조할 생각은 없다. 물론 나는 그들을 존경한다. 수만 번도 더 반복된 파괴와 창조 끝에서 인간―사회적 동물이기를 포기한 그들을 존경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는 것이 있다. 문제는 우리들의 절대적인 죽음도, 상대주의와 다원주의로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는 시대적 정신도, 존재자로서 품고 있는 절망도 아니다.
 문제는 바로 아름다움이다.
 태양이 꺼져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하늘이 무너지고 모든 것이 차갑게 식어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리고 보라. 당신이 밤거리를 걷고 있을 때 돌연 보이는, 노란 가로등 빛이 쓰고 있는 치명적인 마스크를, 저 담장 위에서 당신을 지켜보고 있는 들 고양이의 불신으로 된 눈을, 한순간 들렸다가 멀어지는, 보이지도 않는 자동차의 엔진소리를. 그렇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 가지 뿐이다. 아름다움은 유한성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 말이다.
 수많은 예술가들의 예술작품은 그 유한성을 포착하려고 한 발버둥이다. 한순간에 지나가버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며, 또 언젠가는 세계와 함께 허무 속으로 잠겨버릴, 어찌 보면 단 한 푼의 가치도 없는 순간. 그것만이 그들이 목숨을 걸어야했던 것이었다. 그들은 탐닉했다. 우리 인간이 <그것>을 대할 때, 선택할 수 있는 행위는 탐닉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탐닉하는 인간에게는 회의주의로 돌아설 여유조차 없었기에! 그리하여 죽음이 찾아오리라는 것을 절망으로 느끼지도 않게 되었기에. 사람들이 그를 광인이라고 부르는 와중에도, 그는 자유와 휘황찬란한 빛 속에 있었기에 말이다.
 만일 무언가가 영원히 지속된다면, 확신컨대 그것은 전혀 아름답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시간과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시간 속에서 퇴색해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을 비켜가는 시간으로 인하여 <본질의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그것은 영속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로 소멸일 것이다.
 이야기를 다시 돌리겠다. 영원을 바라는 사람들. 영생을 바라는 사람들.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로 인해 당신들이 나를 오만하다고 불러도 나는 개의치 않고 말할 것이다.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야말로 기쁨이라고 믿는 자들, 그들의 정신은 천박하다. 그들은 아름다움이 무슨 개념인지를 모른다. 그저 소시민적 쾌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안일함의 색깔을 미(美)라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눈이 멀었다. 존재의 본질이 어떤 빛살을 내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그들은 눈이 먼 장님들이다. <Memento mori>. 죽음을 상기하라. 그것은 오직 위협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더욱이 그것은 약자들이 받드는 권위나 약속 따위와는 아무런 상관관계도 없다. 죽음을 상기할수록 당신의 인생은 순간의 미학(美學)에 가까워질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이야말로 당신의 생명을 더욱 찬란한 생명으로 만드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말하건대, 문제는 바로 아름다움에 있다.
 아름다움이라는 휘광은 영원을 부정하는 가장 강력한 상징이다. 그리고 인간은 누구나 아름다움을 발견할 자질을 갖고 태어난다. 인간은 미(美)의 빛을 만난다. 인간은 죽는다. 인간은 어떻게 해야 진정으로 <살다 갈> 수 있을지 갈망한다. 아름다움은 당신의 인생을 스쳐지나간다. <허무주의자들의 무덤을 짓밟고 나아가야한다.>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에 모든 것에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분명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이 동반되겠지. 그러나 당신의 영혼이 파괴될 때마다 그 파괴된 부위에서 더 강하고 명징한 새살이 돋는다. 그리고 모든 생(生)이 고통이라는 사실은 이미 우리가 오래 전에 받아들인 진실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고통의 손을 움켜잡는 것이다. 나는 수도(修道)의 길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광기라고 부르는 길에서, 그 수도의 길이 가장 가까워보인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니까 모든 고통들이 어느새 퍼레이드 중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금화처럼 보이게 될 때, 환희와 절망이 뒤섞여 당신의 눈동자에서 모든 감정이 사라지고 오직 바닥을 알 수 없는 영혼의 구렁만이 보이게 될 때, 미(美)에 대한 탐닉이 당신의 영혼을 자유롭게 만들고 진리에 대한 통찰이 당신의 머릿속에서 사방팔방에서 터져대는 폭죽처럼 터지게 될 때 말이다.
 영원이라는 개념에 침을 뱉을 때 생명은 비로소 생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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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주의자들의 무덤을 밟아야만 한다


달이 뜨지 않은 밤이면 산은
더욱 괴기스러운 모습으로 침묵한다.
나무와 풀잎들 사이사이로 어둠을 머금고
가끔 동굴 속에서 으르렁거리는 밤 짐승처럼
배를 깔고 누워 포식성의
고요를
마치 위협인양
취약한 인간의 영혼 앞에 펼쳐 보인다.

나의 동족들아, 같은 피를 마시고 자란
비대하고 결핍된 영혼의 조각들을 가진
같은 어머니 죽음의 치맛자락을 기억하는
동족들아, 너는 분명히
잔혹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저 새까만 침묵을
본 일이 있다.
그리고 너의 마음 한편에는 이상한 분노가
말하자면 오히려 억울함 같은 것이 외친다.
「늙은 자연이여, 이 행성 위에서 당신은 어째서 그리도
우리 나약한 인간들을 향해 적개심 아닌 적개심을,
차라리 공포스러운 장엄함으로 우리의 영혼에
망치질을 하고야 마는가?」

그는 침묵한다! 우리는 그가 입을 여는 것을
단 한 번도 본 일이 없다.
우리가 그와 마주할 때마다 그는
어떤 때는 구부러진 손으로 어둠을 쥐고
어떤 때는 우리의 시각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태고부터 변한 것이 없는 심원한 암흑을
파도소리에 섞어 보낼 뿐이다.

차가운 내륙지방에서 서리만을 먹으면서 자란 인간에게
새까만 밤바다에서 등대 하나에만 의지하여 <길>을 찾으라 한다면
그는 분명히, 차라리 단도를 하나 들어 자신의 목을
찌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치졸한 에고가
구름 낀 밤중의 산과
은밀하게 그르렁거리는 밤바다를 마주할 때
인간은 자신이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치명적인 진실에 영혼이 말라
더 이상 지혜 있는 동물로서의 손과 발도 잃어버리고
도망칠 생각도 못한 채 그 자리에 쓰러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의 동족이여,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끝 간 데 없이 펼쳐져 지평선과 하늘마저 뒤섞인
이 황무지 위에서 너희들은 왜 말라버리지 않는가?
공포로 떨리는 비명을 하루 종일 질러대면서
왜 아직도 낮에는 태양을 삼킬 듯이 천공을 향해 입을 벌리고
밤에는 달빛에 맞아 칼자국이 나면서
모래를 그러쥐며 기느냔 말이다.

「우리의 공포는 정당하다.」 그런 말을 하는 너의 얼굴을 내가 보았는데
너에게는 이미 눈동자가 없었다. 푹 파인 구렁 두 개가 있을 뿐이었다.
나는 너희들이 영원을 믿는다고 생각하고
반쯤은 화가 나고 반쯤은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으로
네 멱살을 잡아, 들어 올리면서 외쳤다.
「네 아버지가 불타서 모래가 된 것을 기억하라.」
그랬더니 너는 웃는 것처럼 울고, 우는 것처럼
웃으면서 말했다: 「내 관이 비어있어도 나는 괜찮다.」

그런데 이 모든 촌극을 아무 말 없이 지켜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저쪽에 솟은 모래로 된 산이었다. 그 산은
감정 하나 담기지 않은―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미쳐버리게 하는
그 눈동자로 우리들의 추태를 구름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리는 이성을 잃어버릴 뻔 했도다! 내가 말하기를
많은 초월적인 것들은 우리 눈에 거의 절대성으로 비쳐 보인다.
그러면 우리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우리의 초라한 존재성 때문에
우리들은 견딜 수 없는 침묵 속에서
집을 잃고 햇볕 아래 놓인 달팽이처럼 말라비틀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돌아버리지 않기 위해, 눈동자 없는 나의 동족이
그대로 산산조각 나서 모래와 재로 변해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
그의 칼을 빼앗아서
나의 한쪽 눈알을 도려낸 뒤 그 눈알을 내 동족의 오른쪽 눈구멍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나는 피 흘리면서
나의 동족은 내 도려내진 눈에서 흐르는 피를 받아먹으면서
그 모래로 된 거대한 산을 보았다.
그것은 여전히 아무 표정도 없었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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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적 예법과 합리주의, 그리고 보리심


 글을 시작하기 전에, 우선 내가 이 글을 쓰기 위해서 많은 양의 진정제와 신경 안정제를 위 속에 털어 넣었다는 사실을 밝힌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부터 시작하려는 글의 주제에 대하여 나는 이십 년도 넘는 기간 동안 괴물 같은 분노와 증오만을 씹어대면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분노만으로는 당신의 심장 속 문으로 걸어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증오로 물든 인간의 주장이란 논설이 아닌 차라리 폭력, 그것도 독자의 영혼에 칼을 들이대면서 외쳐대는 폭력인 것이다. 물론 그것만으로 충분했던 시기도 있었다. 당신의 정수리 한복판에 날붙이를 박아 넣을 때마다 뿜어져 나오는 정신의 진액이 내 갈증을 해갈해주었고, 그것만으로 만족했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계몽주의나 사회참여문학 같은 이데올로기들은 접어두더라도, 나는 이제 나의 분노들을 문 안에 넣고 자물쇠를 잠가버린 것이다. 항상 증오 때문에 핏발 선 눈동자로 사물을 볼 수는 없다. 내가 앞으로도 계속 글을 쓰기로 길을 정한 이상, 나는 당신들의 얼굴에서 역겨움과 조소, 구역질만을 보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어쩌면 가끔 잠가둔 문이 열리고 이미 내 인격의 일부나 다름없는 그 지옥 같은 감정들이 튀어나올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나중의 일이다. 나는 내가 아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해야한다.
 지금 이 나라 안에 살고 있는,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연식이 생긴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사회에서 인간과 인간들의 위치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예(禮)>라는 것을 말이다. 예절 중에서도 특히 유교적 예법은 우리 사회 가장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 사람들의 정신, 그 뿌리 부근에 박혀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 그 유교적 예법이라는 것은 단 한 시도 당신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들의 머릿속에 너무 깊이 뿌리를 내려서 이제는 차라리 초자아(Super-ego)의 일부나 다름없다. 그리고 심지어 우리들은 그 예법의 정당성에 대해서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생활의 거의 전부가 그것으로부터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길을 걸으면서도 우리는 반대편에서 노인이 걸어오면 지래 겁을 먹는다. 왜냐하면 <반드시> 우리가 길을 비키고 고개를 숙여야하기 때문이다. 술자리에서 넥타이를 풀고 잔을 부딪치면서도 우리는 긴장하고 있어야한다. 겁도 없이 어른보다 잔을 위로 들고 건배를 했다가는 나중에 무슨 해코지를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퍽도 이상한 일이다. 한민족이라는 민족이 언제부터 이렇게 유교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지 생각해보면, 그것은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니다. 고작해야 조선시대와 함께 시작된 유교적 문명은 당신들의 민족이 과거에 선택했던 다른 사상적 문명의 유구함을 생각해보면 굉장히 짧고, 또 공허한 것이기 때문이다. 유교라는 것은 끝없는 전쟁으로 피폐하던 당시의 중국에서 통치 이데올로기로서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통치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위정자들이 우민들을 보다 손쉽게 조종하기 위해 만들어낸 <식(式)>이다. 애당초부터 그들에게 진리나, 사물 혹은 존재의 본질에 대한 탐구심은 없다. 그들이 만들어낸 <-ism>은 사실 사상조차 아닌 것이다. 사상이 사상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은 존재에 대한 고찰과 성찰, 그리고 세계를 향한 깊이 있는 통찰이 있어야한다. 그리고 또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는, 바로 <정직>이다. 존재로서의 정직. 인간으로서의 정직. 인식하고 관찰하는 자로서의 정직. 그리고 표현하는 자로서의 정직 말이다. 설령 그 누군가가 아무리 그로테스크하고 잔혹한 사상을 부르짖더라도, 그것이 정직하다면 그 부르짖음에는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중국 왕조, 그리고 조선 왕조, 지금에 와서는 우리들의 사회에까지 적용되고 있는 그 유교라는 것에서는 도무지 인간 본연에 대한 통찰이나 정직성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들이 말한 것은 오직 하나다. 그들-즉 더욱 위에 서고 싶은 자들이 인가를 내린 가면만을 뒤집어쓰라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예절이라는 것도 굉장한 우스갯소리다. 그 예절의 이름으로 존중받아야할 사람이 된 이들은, 스스로가 타인들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에 대한 근거가 <피>와 <시간> 밖에 없는 것이다. 왕을 받들어 모셔야하는 이유는 그가 왕가에서 태어났기 때문이고, 어른 앞에서 엎드려야하는 이유는 그가 당신보다 더 많은 시간을 먹어치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유교교리의 얄팍함은, 마치 파시스트처럼 꽉 막힌 사고의 폐쇄성에 있다. 그들은 새로운 발상은 그것이 무엇이든 자라나기도 전에 목을 잘라버린다. 그들은 의문이나 반발 따위는 꿈도 꿀 수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그리고 조선왕조 500년. 그들은 역사 속에서 공중분해 되었다.
 그러나 국가가 분쇄되어도 그간 민생들에게 주입되어온 통치 이데올로기는 사라지지 않은 모양이다. 식민지시대와 근대를 거쳐, 그럭저럭 숨통이 트인 현대에 와서도 유교적 사고방식은 여전히 당신들의 미간 한복판에 독을 품은 화살촉처럼 박혀있다. 물론 많은 변화가 있었다. 서방세계의 문물과 문화가 한반도를 뒤덮었고, 젊은이들은 몇 번이나 전투경찰들에게 화염병을 던지며 목소리를 내고 싶어 했다. 그에 힘입어 우리가 사는 국가는 서양에서 온 <합리주의>라는 것을 사회에 적용했다. 몇 계몽주의자들은 더 이상의 허례허식을 붕괴시키기 위해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하기도 했고 글을 쓰기도 했고 악기를 연주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번 굳게 닫힌 인간들의 사고방식은 쉽게 열릴 수가 없는 법이다. 지금 우리들의 사회는, 늙은 유교적 예법이라는 기반 위에 서양적 합리주의로 페인트칠을 한 것일 뿐인 괴상망측한 모양새가 되었다. 법정 안에서 매일 같이 벌어지는 일들을 관찰해보면 이러한 사실을 더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그들의 두꺼운 법전이 말하고 있는 것은 분명 합리주의와 자연법에 기초한 사회윤리인데, 그 사회윤리는 한 꺼풀만 벗겨보면 조선왕조 시대의 유교적 교리를 말하고 있고, 심지어 법봉을 내리치는 판사가 내린 판결의 근거는 <오래 전부터 우리의 초자아가 되어버린 유교적 교리에 비추어봤을 때 저 범죄자는 얼마나 싹수가 없는가>에 기반하고 있다. 더 나아가 패륜범죄라도 접하게 되면 상황은 더욱 볼만하다. 검사나 판사들은 이미 오래된 분노로 가득하고, 언론은 <극악무도한 패륜아>라는 문장을 어렵지 않게 사용하며, 그 범죄자에 대한 처벌은 이미 <처벌>이 아니라 <복수>나 다름없다. 도대체 패륜이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 그 범죄자는 다른 범죄자들과 하등 다를 것이 없는 <그냥 범죄자>란 말이다. 이럴 거면 차라리, 마치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밀크커피를 마셨다는 이유로 사형당한 뫼르소처럼, 그 범죄자가 식사시간에 어른들보다 먼저 밥숟갈을 떴다는 죄목도 추가하란 말이다.
 이쯤에서 잠깐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 나는 분명히 분노로 이 글을 쓰지는 않겠다고 다짐했었는데 글을 진행하다보니 어느새 혈관 속에서 피가 끓고 있었던 모양이다. 마음을 다잡고 계속하도록 하자.
 예절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자. 그것은 유교적 교리에 있지도 인간들 사이의 거리에 있지도 않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진정한 예절이란 식이나 법 따위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 자비심, 보리심에 진정한 예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거기에는 특별한 규정 같은 것이 없다. 그러나 소위 깨달았다고 하는 스승들의 행위에는 분명히 모든 인간들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있다. 통치 이데올로기나 철학적 사유에서 나온 규정들보다 더 확실하고 자연스러우며 유연한 것이 거기에는 있다. 모든 인간들을 자비로 바라보고, 타인과 나 사이의 경계가 사라져 한 몸처럼 되고 나면 인간이 자신의 몸을 존중하듯이 타인도 자연스럽게 존중하게 된다. 상대가 불편하면 자신이 불편한 것과 다름없으니 그를 편하게 해주고, 상대가 고통이나 슬픔을 느낀다면 자신이 그런 감각을 느끼는 것처럼 그것들을 해소해주려고 노력한다. 이 사회에 필요한 것은 다른 누군가를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욕망을 먼저 규제하는 것이다. 모든 이들을 자신의 신체일부처럼 여긴다면 그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 걸고 매달려있는 예법이라는 거추장스러운 것이 도대체 왜 필요하겠는가? 나는 부디 당신들이 자유로워지기를 바란다. 처음 태어났을 때부터 갖고 있던 <존재로서의 자유>라는 것을, 부디 다시 발견하기를 바란다. 이 사회에서 너무 오래 살아왔기에 스스로도 눈치 채지 못하고 발목에 족쇄를 달아 스스로 노예가 된 사람들이, 모든 인간은 처음부터 그 누구의, 그 무엇의 노예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정신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느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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