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적 예법과 합리주의, 그리고 보리심


 글을 시작하기 전에, 우선 내가 이 글을 쓰기 위해서 많은 양의 진정제와 신경 안정제를 위 속에 털어 넣었다는 사실을 밝힌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부터 시작하려는 글의 주제에 대하여 나는 이십 년도 넘는 기간 동안 괴물 같은 분노와 증오만을 씹어대면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분노만으로는 당신의 심장 속 문으로 걸어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증오로 물든 인간의 주장이란 논설이 아닌 차라리 폭력, 그것도 독자의 영혼에 칼을 들이대면서 외쳐대는 폭력인 것이다. 물론 그것만으로 충분했던 시기도 있었다. 당신의 정수리 한복판에 날붙이를 박아 넣을 때마다 뿜어져 나오는 정신의 진액이 내 갈증을 해갈해주었고, 그것만으로 만족했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계몽주의나 사회참여문학 같은 이데올로기들은 접어두더라도, 나는 이제 나의 분노들을 문 안에 넣고 자물쇠를 잠가버린 것이다. 항상 증오 때문에 핏발 선 눈동자로 사물을 볼 수는 없다. 내가 앞으로도 계속 글을 쓰기로 길을 정한 이상, 나는 당신들의 얼굴에서 역겨움과 조소, 구역질만을 보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어쩌면 가끔 잠가둔 문이 열리고 이미 내 인격의 일부나 다름없는 그 지옥 같은 감정들이 튀어나올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나중의 일이다. 나는 내가 아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해야한다.
 지금 이 나라 안에 살고 있는,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연식이 생긴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사회에서 인간과 인간들의 위치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예(禮)>라는 것을 말이다. 예절 중에서도 특히 유교적 예법은 우리 사회 가장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 사람들의 정신, 그 뿌리 부근에 박혀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 그 유교적 예법이라는 것은 단 한 시도 당신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들의 머릿속에 너무 깊이 뿌리를 내려서 이제는 차라리 초자아(Super-ego)의 일부나 다름없다. 그리고 심지어 우리들은 그 예법의 정당성에 대해서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생활의 거의 전부가 그것으로부터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길을 걸으면서도 우리는 반대편에서 노인이 걸어오면 지래 겁을 먹는다. 왜냐하면 <반드시> 우리가 길을 비키고 고개를 숙여야하기 때문이다. 술자리에서 넥타이를 풀고 잔을 부딪치면서도 우리는 긴장하고 있어야한다. 겁도 없이 어른보다 잔을 위로 들고 건배를 했다가는 나중에 무슨 해코지를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퍽도 이상한 일이다. 한민족이라는 민족이 언제부터 이렇게 유교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지 생각해보면, 그것은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니다. 고작해야 조선시대와 함께 시작된 유교적 문명은 당신들의 민족이 과거에 선택했던 다른 사상적 문명의 유구함을 생각해보면 굉장히 짧고, 또 공허한 것이기 때문이다. 유교라는 것은 끝없는 전쟁으로 피폐하던 당시의 중국에서 통치 이데올로기로서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통치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위정자들이 우민들을 보다 손쉽게 조종하기 위해 만들어낸 <식(式)>이다. 애당초부터 그들에게 진리나, 사물 혹은 존재의 본질에 대한 탐구심은 없다. 그들이 만들어낸 <-ism>은 사실 사상조차 아닌 것이다. 사상이 사상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은 존재에 대한 고찰과 성찰, 그리고 세계를 향한 깊이 있는 통찰이 있어야한다. 그리고 또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는, 바로 <정직>이다. 존재로서의 정직. 인간으로서의 정직. 인식하고 관찰하는 자로서의 정직. 그리고 표현하는 자로서의 정직 말이다. 설령 그 누군가가 아무리 그로테스크하고 잔혹한 사상을 부르짖더라도, 그것이 정직하다면 그 부르짖음에는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중국 왕조, 그리고 조선 왕조, 지금에 와서는 우리들의 사회에까지 적용되고 있는 그 유교라는 것에서는 도무지 인간 본연에 대한 통찰이나 정직성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들이 말한 것은 오직 하나다. 그들-즉 더욱 위에 서고 싶은 자들이 인가를 내린 가면만을 뒤집어쓰라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예절이라는 것도 굉장한 우스갯소리다. 그 예절의 이름으로 존중받아야할 사람이 된 이들은, 스스로가 타인들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에 대한 근거가 <피>와 <시간> 밖에 없는 것이다. 왕을 받들어 모셔야하는 이유는 그가 왕가에서 태어났기 때문이고, 어른 앞에서 엎드려야하는 이유는 그가 당신보다 더 많은 시간을 먹어치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유교교리의 얄팍함은, 마치 파시스트처럼 꽉 막힌 사고의 폐쇄성에 있다. 그들은 새로운 발상은 그것이 무엇이든 자라나기도 전에 목을 잘라버린다. 그들은 의문이나 반발 따위는 꿈도 꿀 수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그리고 조선왕조 500년. 그들은 역사 속에서 공중분해 되었다.
 그러나 국가가 분쇄되어도 그간 민생들에게 주입되어온 통치 이데올로기는 사라지지 않은 모양이다. 식민지시대와 근대를 거쳐, 그럭저럭 숨통이 트인 현대에 와서도 유교적 사고방식은 여전히 당신들의 미간 한복판에 독을 품은 화살촉처럼 박혀있다. 물론 많은 변화가 있었다. 서방세계의 문물과 문화가 한반도를 뒤덮었고, 젊은이들은 몇 번이나 전투경찰들에게 화염병을 던지며 목소리를 내고 싶어 했다. 그에 힘입어 우리가 사는 국가는 서양에서 온 <합리주의>라는 것을 사회에 적용했다. 몇 계몽주의자들은 더 이상의 허례허식을 붕괴시키기 위해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하기도 했고 글을 쓰기도 했고 악기를 연주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번 굳게 닫힌 인간들의 사고방식은 쉽게 열릴 수가 없는 법이다. 지금 우리들의 사회는, 늙은 유교적 예법이라는 기반 위에 서양적 합리주의로 페인트칠을 한 것일 뿐인 괴상망측한 모양새가 되었다. 법정 안에서 매일 같이 벌어지는 일들을 관찰해보면 이러한 사실을 더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그들의 두꺼운 법전이 말하고 있는 것은 분명 합리주의와 자연법에 기초한 사회윤리인데, 그 사회윤리는 한 꺼풀만 벗겨보면 조선왕조 시대의 유교적 교리를 말하고 있고, 심지어 법봉을 내리치는 판사가 내린 판결의 근거는 <오래 전부터 우리의 초자아가 되어버린 유교적 교리에 비추어봤을 때 저 범죄자는 얼마나 싹수가 없는가>에 기반하고 있다. 더 나아가 패륜범죄라도 접하게 되면 상황은 더욱 볼만하다. 검사나 판사들은 이미 오래된 분노로 가득하고, 언론은 <극악무도한 패륜아>라는 문장을 어렵지 않게 사용하며, 그 범죄자에 대한 처벌은 이미 <처벌>이 아니라 <복수>나 다름없다. 도대체 패륜이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 그 범죄자는 다른 범죄자들과 하등 다를 것이 없는 <그냥 범죄자>란 말이다. 이럴 거면 차라리, 마치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밀크커피를 마셨다는 이유로 사형당한 뫼르소처럼, 그 범죄자가 식사시간에 어른들보다 먼저 밥숟갈을 떴다는 죄목도 추가하란 말이다.
 이쯤에서 잠깐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 나는 분명히 분노로 이 글을 쓰지는 않겠다고 다짐했었는데 글을 진행하다보니 어느새 혈관 속에서 피가 끓고 있었던 모양이다. 마음을 다잡고 계속하도록 하자.
 예절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자. 그것은 유교적 교리에 있지도 인간들 사이의 거리에 있지도 않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진정한 예절이란 식이나 법 따위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 자비심, 보리심에 진정한 예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거기에는 특별한 규정 같은 것이 없다. 그러나 소위 깨달았다고 하는 스승들의 행위에는 분명히 모든 인간들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있다. 통치 이데올로기나 철학적 사유에서 나온 규정들보다 더 확실하고 자연스러우며 유연한 것이 거기에는 있다. 모든 인간들을 자비로 바라보고, 타인과 나 사이의 경계가 사라져 한 몸처럼 되고 나면 인간이 자신의 몸을 존중하듯이 타인도 자연스럽게 존중하게 된다. 상대가 불편하면 자신이 불편한 것과 다름없으니 그를 편하게 해주고, 상대가 고통이나 슬픔을 느낀다면 자신이 그런 감각을 느끼는 것처럼 그것들을 해소해주려고 노력한다. 이 사회에 필요한 것은 다른 누군가를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욕망을 먼저 규제하는 것이다. 모든 이들을 자신의 신체일부처럼 여긴다면 그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 걸고 매달려있는 예법이라는 거추장스러운 것이 도대체 왜 필요하겠는가? 나는 부디 당신들이 자유로워지기를 바란다. 처음 태어났을 때부터 갖고 있던 <존재로서의 자유>라는 것을, 부디 다시 발견하기를 바란다. 이 사회에서 너무 오래 살아왔기에 스스로도 눈치 채지 못하고 발목에 족쇄를 달아 스스로 노예가 된 사람들이, 모든 인간은 처음부터 그 누구의, 그 무엇의 노예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정신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느끼기를 바란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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