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봉오리

글/시 2012. 12. 9. 01:02 |
꽃봉오리


용광로의 시뻘건 쇳물이
눈동자 위로 쏟아지던 시절은 이미 지나가버렸다.
이제 태양빛은 차갑게 식힌 화살촉처럼 예리하고
공기는 사금파리처럼 날카롭다.
어둠이 잎사귀 위에 피어나는 이슬인 양
콘크리트 대지 위에 발자국을 남긴다.
이십일 세기의 약물과 병으로 얼룩진 내 심장은
인적 없는 거리 차가운 바닥 위에
단 한 방울의 피도 체액도 흘리지 못하고 굴러다닌다.
나는 에탄올로 된 눈물을 흘리고
그것을 핥아 위장 깊숙이 쌓아둔다.
나는 재로 된 혓바닥을 갖고 있다 그것은
고목의 뿌리처럼 길고 여러 갈래로 갈라져서
반쯤은 균사에 덮여있고 반쯤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다.
너무 깨끗한 하늘에는 내 얼굴이 비쳐 보인다.
그것은 어떤 눈동자 없는 흰색 물고기를 떠올리게 한다.
오래전에 멸종된, 눈동자 없는 물고기.
아마 그 물고기에게는 빈약한 다리가 돋아있을지도 모른다.
푸른색 발광 다이오드. 몇 개의 빛줄기. 가끔 그것이 깜빡거리면
나는 어떤 생각을 한다. 내일에 대한 생각이다.
왜냐하면 또 해가 뜨기 때문이다. 내 방 천장 속에 사는
내 동료들은 내일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내게 달콤한 목소리로
헤로인과 사카린처럼 휘감겨드는 목소리로 속삭였지만
태양은 또 뜰 것이다. 왜냐하면 종말 따위는
허약한 영혼의 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산 정상에 사는
어떤 초인의 그림자다. 그는 절대 자신의 그림자를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언제나 하늘 너머의 하늘을 보고
진실 너머의 허상을 탐구하며 바짝 마른 영혼으로
기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땅 속에 묻힌 눈을 뜬
익사자다. 죽음이라는 환상에 가까이 갈수록
어떤 빛이, 한없이 어두운 빛이 내 눈꺼풀 밑에서 번뜩인다
나는 매료당했다. 내가 무너지는 소리에.
어머니의 비명에. 아버지의 탄식에. 내 혈액의 침묵에.
나는 초인에게서 눈을 돌리고 말도로르에게 말을 건다.
왜냐하면 내가 그를 사랑할 수도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물론 나도 그렇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어떤 소시민적이지 않은 희망이다. 그것은 그리도 아프다.
지드는 땀과 지중해의 햇빛 속에서 복상사했다.
내 위장 속에서 쿨럭 거리며 솟아나오는 독액이 있다.
나의 회색의 뇌수는 단단한 등껍질을 가진 벌레들의 무리로 변신해간다.
나는 점점 껍질뿐인 번데기가 되어가고 있다. 애벌레는 자신의 살마저
껍데기를 만드는 데에 낭비해버렸다. 그것은 영원히 우화하지 못할
것이다. 절망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찬양이다. 찬양이기도 하다. 저 위에 사는 누군가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대한 조소어린 찬양.
그러나 그 조소 또한 순수하지 못하다. 우리는 태초의 혈육을 잃었다.
비치지 않는 거울. 눈동자 속의 눈동자. 나는 결핍 속에서
만개한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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