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2/16 - 과정과 결과.
Last ideal(egloos) 2010. 7. 9. 14:06 | 진지한 폐쇄 속에서, 개인은 세계가 얼마나 넓은지 알고 있다. 북쪽으로 가면 눈이 내린다. 입이 잠긴 채로, 진지한 폐쇄 속에서. 최초의
관계에 증오만 덧씌우며 망가본적이 없는 사람들은 정신병리학을 비웃을 입이 있다. 무엇이 옳든 간에.. 갇힌 사람은 벗겨진 얼굴 가죽 대신
노이즈를 얼굴에 바르며 벽돌을 쓰다듬는다. 울림이든, 아니면 이동이든, 촉감이 없다. 닿아서 터져나오는 반동이 없다. 북쪽으로 계속 올라가면
눈이 내릴 것이다. 격리당한 병자들과 사랑하고 싶다. 나에게서 나온 것이 전부 허망하게 흩어져 없어지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아 왔다. 입자를
만들어야만 할 것이다. 그것들을 뭉쳐서, 다시 입자를 만들어야만 할 것이다. 36.5도의 펄떡거리는 것들을 꽉 움켜잡고 싶다. 오히려 내가
굴러떨어지는 것을 본다. 사지가 잘려 소금이 뿌려진 시체의 피부가 황폐한 붉은 빛인 것도 보았다. 나는 사물밖에 보지 못했다. 단단하게 잠기어져
있는 것들을 묻었다. 나는 동의와 긍정을 외치는 자들을 증오한다. 그들의 눈에 비치는 억지로 만들어진 세상의 형태에 진저리를 친다. 그들이
무엇을 책임지고 있냐고 묻고 싶다. 그리고 또 무엇을 보았냐고. 얼마만큼의 눈꺼풀과 타협이 필요했는지, 깎여나간 정신들의 멱살을 잡고 묻고
싶다. 아무도 없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해야 한다.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 계절도 현상도 없는 폐허에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그렇다.
철저한 폐허에서, 온갖 것들이 통증에 찔려 튀어나오는 꼴을 보고 있어야 한다. 그 순간을 인지해야 한다. 땅과 하늘과 그 사이의 온갖 사물들이
낯모르는 얼굴로 황폐한 색깔들을 토해내는 것을, 보아야 한다. 나는 망가진 인간들과 사랑하고 싶다.
누군가가 이해와 관용을 말하면서
입꼬리를 역겹게 일그러트린다. 어떤 집단이 이해와 관용을 말하면서 입꼬리를 역겹게 일그러트린다. 빛이 비처럼 회색조로 흐르며 떨어져내리는
도시에서 그들이 활개치고 다닌다. 언제부터인가 그랬다. 그들은 긍정으로 뇌가 문드러지게 만드는 책을 쓰고 비참한 미소를 짓는다. 지글지글.
이곳에 쌓인 것들이 바닥이 났다. 북쪽으로 가서 눈을 만나야한다. 폭식과 토악질을 하고, 더 깊은 곳까지 파내기 위해 과장된 감각을 찔러넣는다.
그 폐쇄된 도시에서, 질병이 깃든 벽돌과 파리가 앉은 피부를 쓸어담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하늘 아래에서 필연과 환각적으로 희열하고 싶어서: 내가
그동안 집어든 것들은 벽돌이 되었고 그 벽 안에 쌓여있던 덩어리진 감정들을 끄집어내기만 했다. 무언가가 완전히 바닥나 버렸다는 사실을 오래
전부터 나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틀림없이, 내가 다시 무지와 부조리 사이에 떨어트려지면 그 감정들은 순식간에 넘쳐 흐를 정도로 차오를 것이다.
퍽이나 우습던가? 그러나 관념이 아닌 창작은 그런 곳에서 나온다. 환부 말이다.
어떨까. 환부는 썩 적절한 타이밍에 터졌다.
어딘가 들뜬 듯한 기분이 장애물이 됬던 것이 사실이리라. 아무튼 간에, 나는 비틀린 시각으로 희망을 외치는 이들을 증오한다. 단 하나의 점으로
영원히 수렴하도록 만들어진 인생이다. 유일한 가치다. 절망은 오히려 죽음을 기피하게 만든다. 맹목적으로 펼쳐진 시간의 광막함이 공포스럽기에
사람은 계획이라는 것을 세우고 당연하다는 듯이 미래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