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지러뜨리다

글/시 2023. 3. 29. 20:33 |

어지러뜨리다


한낮은 밤을 기대하는 마음만으로 흘러간다
사내는 낮 동안 과연 어떤
특기할 만한 일이 있었는가 세어보고
결국에는 열 손가락 전부가 필요하지도 않았다
무서운 불안이 텅 빈 페이지 위에
약속처럼 사내와의 만남을 기다리고
그는 날조된 기억을 샅샅이 뒤진다
그러나 분명, 무슨 일인가 있었을 거야
중얼거리고, 까닭도 근거도 없이
악독한 슬픔이 벼락처럼 혈관을 돈다
침침해진 눈을 두 손바닥으로 누르는
그를 보고, 사내의 동생은
저녁을 먹겠느냐고 간단히 묻는다
뜻밖에도 날씨는 선선하고
나무들이 새잎을 창문에 부딪혀대고 또
바로 어제 형광등을 갈아 끼웠기 때문에
아무리 해도 그는 음식을 씹어 삼킬 수 없다

빈 페이지는 굼뜨지만 분명하게, 가장자리부터
누렇게 변해간다 또한 우습게도
처음 그 변색을 발견한 것은
사내가 더는
스스로의 직업을
남에게
설명할 수 없게 된 무렵부터였다.

Posted by Lim_
:

무제

기록/생각 2023. 3. 26. 07:18 |

 그는 정오 즈음에야 늦게 일어났다. 어쩐지 우울한 기분이 들어서 커피를 끓였다. 커피가 다 끓었을 때 그는 의사가 한 말을 떠올렸다. 의사는 카페인을 멀리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커피를 마시지 않고 나가서 담배를 피웠다. 무언가가 이상했다. 콕 집어 말하자면 몸이 몹시 둔해진 느낌이었다. 걷는 속도도 덩달아 느려지는 바람에 3층에 도착했을 때 그는 아무 생각 없이 현관문 손잡이를 쥐려다가, 곧바로 이것은 자신의 집 현관문이 아니라고 알아차렸다. 한층을 더 올라가 문을 열었다. 싱크대에 올려놓은 커피는 약간 식어있었다. "뭔가 이상한데." 그는 굳이 소리내어 말했다. 잠시 서 있다가 그는 잔에 담긴 커피를 하수구에 쏟아버렸다. 자신이 모종의 병에 걸린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했으나 딱히 어딘가가 아프지는 않았다. 그는 자리에 누웠다가 5분도 되지 않아 다시 일어났다. 작업을 하려고 했으나 머릿속에 북풍이 부는 것처럼 정신이 산만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잠에서 깬 뒤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되는대로 적어서 주변 사람에게 보여주고자 마음먹었다.

Posted by Lim_
:

지상에서

글/시 2023. 3. 25. 16:59 |

지상에서


옛적에는 곳곳에 신이 있었다
그들은 자비롭지도 엄격하지도 않았다
계절의 바람이나 살갗에 닿는 햇볕처럼
그들은 결코 말하는 일도 없이
분명히 그곳에서 숨 쉬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먹어야만 했고
누군가 앓는다면 허리 굽혀 약을 얻어야 했다
산새들은 봄에도 노래하지 않게 되었고
나는 너무 일찍부터
신들이 맛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느 장마철 빗물에 잠긴 안방
손전등의 빛줄기 속, 나는 발밑에서 떠오르는
표정 없고 창백한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그날부터 나는 균형을 잃고
온몸을 사방의 모서리에 부딪으며 걸어왔다

그래도 우리는 먹어야만 했고
우리 중 몇몇은 삶을 다 마시기도 전에 쓰러져버렸다
도시에서 빛나는 것들은 대체로 생선 뼈 따위였다
나는 누군가 가르쳐주기도 전에
신들이 맛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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