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담배

글/에세이 2023. 3. 15. 07:41 |

줄담배


 역 근처의 구석진 곳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자니 누군가가 내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고개를 돌려보니 키가 작은 노파였다. 그녀는 생쥐 같은 인상을 주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담배를 구걸했다. 담뱃갑을 열어보니 마침 세 개비가 남아있기에 두 개비를 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감사 인사도, 떠나지도 않고 그저 멀뚱히 내 얼굴만 쳐다보며 서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내뱉은 말은 “한 개비가 더 있던데.”였다. 이번에는 내가 멀뚱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돗대를 가져가는 법이 세상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딱히 화도 내지 않으면서 말했다. 그러자 노파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역 저편으로 걸어가 버렸다.
 이상한 꿈이라도 꾸는 듯한 기분으로 돗대를 피워버렸다. 그리고 역사에 있는 편의점에서 담배 한 갑을 샀다. 남은 돈이 그리 많지 않았다. 지갑에 남은 현금은 이천 원뿐이었다. 어차피 담배 한 갑도 못 살 돈이라고 생각하자, 그것이 돈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캔커피 두 개를 사는 데 모조리 써버렸다. 얼마 뒤 약속했던 대로 친구가 역전에 나타났다. 나는 캔커피 하나를 건넸다. 친구는 의례적으로 고맙다고 했다. 그가 담배 한 대만 피우고 가자고 했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또다시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는데 시야 저편에서 그 노파의 모습이 작게 보였다. 맞은편 흡연장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나는 갑자기 우울해졌다. 가슴 속에 흙탕물이 흐르는 기분이라, 한 개비를 더 빼물고 불을 붙였다. 젠장, 내가 중얼거렸다. 친구가 의아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나는 잠시 침묵했다. 친구는 캔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나는 왜 내가 ‘젠장’이라고 말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우리는 흡연장에서 어정거리다가 술을 마시러 가자고 결정했다. “아.” 내가 돌연 떠올렸다. “그 캔커피가 내 마지막 자산이었어.” 그렇게 말하자 친구는 실없이 웃었다. 잠시 생각하더니, 술은 자신이 사겠다고 했다. 나는 고맙다는 말 대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리는 시내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키 작고 생쥐 같은 노파는 여전히 흡연자들에게 개비담배를 구걸하고 있었다. 점점 날씨가 따뜻해지고 있었다. 덕분에 별의별 사람들이 다 거리 위로 기어나오는, 별로 유쾌할 것도 없는 간절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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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가들에게

글/시 2023. 3. 12. 19:37 |

사상가들에게


장고하지 말라, 우리는 우연히 살아있다
먹을 것만을 찾아, 팔십억 인간들은
애벌레처럼 이 땅을 기어 다닌다
그 대단한 숫자보다, 턱없이 많은 죽음이
우리 발밑에 아무 역사 없이 쌓여있다
땅이 교훈을 주리라 믿지 말라, 의미란
비바람에 무너진 묘비 무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운율에 맞추어 글 쓰는 일일랑 그만두고
우연히 나타난 생애나 듬뿍 들이켜 취해버려라
우리는 회한할 새도 없이 갑자기 쓰러지리라, 그러니
닥쳐오는 모든 것에 장고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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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과 먼지를 위한 인내


1.
너희들이 털가죽 없는 살덩이로 태어날 때
세상은 벌써 날고기를 먹는 놈들로 가득했다
너희들이 추운 새벽에 힘겹게 깨어날 때
태양은 너희들을 위해 눈떠주지 않았다.

2.
내가 만난 너희들은 모두 종점 출신이었다
너희들의 생이란 그 삶을 쪼개 파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따금 머리가 비상한 사람들이 나타나
세계란 몹시 체계적이며 균등하다고 강론했다.

3.
그러나 땅에 뿌리박은 나무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땅밑에 묻힌 자들은
혀도 입술도 썩어 흙이 되어
생전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워졌기에
너희들의 심오한 사상에 대해 논의하지 않았다.

4.
너희들은 3월의 추위도 견디지 못하는 몸뚱어리를 끌고
누구도 비웃을 수 없도록 길고 어렵사리 달려왔다
그런데 너희들은, 어느 닫혀가는 순간에
과연 불에 타지 않는 것이 있을지 따위를 생각한다.

5.
나는 미로 한복판에 수십 년째 퍼질러 앉아
이제는 사망기사란도 사라진 신문 따위를 생각한다
너희들이 마지막으로 터트릴 웃음에 관해 생각한다.

6.
오만한 나는 아직 젊어, 먹고 마시면서 기뻐한다
그러나 나 또한 너희들처럼 종점 출신으로
종점이 될 정거장에서 벗어난 일 없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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