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사 중(壞死 中)

글/시 2014. 9. 6. 01:42 |
괴사 중(壞死 中)


세존께서 오시려면 수십만 년도 더 남았단다.
나는 그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 썩은 몸뚱이로는
도무지 그분을 맞이할 수가 없는 탓이다.
앙굴리말라는 차라리 미치기라도 하였지, 미친다는 것은
죄의식도 자문도 버리고 광란한다는 것으로
오히려 수행길 들려면 어떻게든 미쳐야하는 것이다.
바야흐로 정신병원 대기실에 앉아있으면
온갖 병자들의 온갖 병증이 공기를 통해 전염되는
그리하여 진료실 문 열고 들어갈 때쯤이면
어엿한 미치광이가 될 수 있는 편리한 시대다.

아흔아홉 개의 손가락만 모으면 세존께서
내 앞에 오시지 않을까 싶어 밤새 술 마시며
칼인지 펜인지를 숫돌에 존나게 갈았다.
이빨 사이에 욕지거리 물고 갈았다.
그것은 오래전에 이미 수십 번이나 피맛을 보았다.
내 좁디좁은 가슴에서 심장이 발악하며
바깥으로 뛰쳐나가려 할 때마다 나는 출구나마 만들어보려고
복장뼈를 부수고 늑골을 여는 방법에 골몰하였다.
그러나 칼날인지 펜촉인지는 주로 살점만을 뚝뚝 열어제끼고
핏줄기 묻은 채로 방치되었다. 그래서 시방 내가 갈고 있는
이 칼인지 펜인지도 남의 손가락을 절단하기는커녕
아, 쓰바, 석가세존 만나도 할 말이 없으니
불문학으로 꽉꽉 들어찬 책장에 끼워 넣고
나는 잠이나 잘 듯 싶다.
한여름에 동면이나 할 듯싶다.

한여름인데도 내 난도질당한 영혼은 간질 환자처럼 발광이다.
춥고 시려서 돌아가시겠으니 당장이라도 악업 쌓고
지옥 유황불꽃에 따뜻해지자고 발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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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일기.

기록/생각 2014. 9. 4. 18:54 |

어제 뭉크전 보러 서초동까지 갔다가 비를 피해 찻집으로 들어갔다. 들어갈때부터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무엇이 좋지 않았냐 하면 입구부터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과 빈공간에 여유롭게 채워넣은 조각들이 예감이 좋지 않았다. 난 친구와 함께 어정어정 들어가서 의자에 앉으려는데 유니폼 입은 점원이 생글생글 웃으며 '이쪽에 앉으시지요'하는 것이었다. 나는 친구에게 속삭였다. '야, 우리 좆됐어.' 그리고 어정어정 점원이 소개한 자리에 앉으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차분한 공기는 사람들 차나 마시라고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쪽팔림 무릅쓰고 점원에게 다가가 메뉴판이나 한번 보자고 하였다. 커피 한 잔에 육천오백 원이었다. 시바. 나는 친구 셔츠 잡아당기며 찻집 밖으로 도망쳤다. 시바. 자본주의가 날 울게 만든다. 누나 나는 맑스나 배우러 가야할까봐요. 사람들이 육천오백 원짜리 커피 때문에 날 빨갱이라고 부르더라도 별 도리가 없어요.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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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부러진 집에서

글/시 2014. 9. 3. 16:59 |
구부러진 집에서


내가 사는 집은 구부러진 집이다
정신이 멀쩡할 때에는 집에 들어올 수 없다
알코올과 니코틴으로 눈동자가 돌아버렸을 때에만
이 집에 들어올 수 있다 그래야만
이 집이 가진 경계선과 면적들이 멀쩡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현관문에 열쇠를 꽂고 돌릴 때에도
남들이 하듯이 똑바로 찔러넣어서는 안 된다
잘못된 위치에 꽂아야만 문이 열린다.

이 집은 구부러져 있기 때문에
소시민들이 쓰는 보통 가구로는 채워 넣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밤마다 밖으로 나가
다 썩어가는 나무 등걸과
한번 쓰였다가 버려진 못들을 주워 모아
텁텁한 냄새가 나는, 이미 만들어질 때부터 망가진
그런 가구들을 만들어 집에 채워 넣었다.

이 집에 들어오는 햇빛은
구부러진 창문을 통과하는 순간부터
거울에 비치는 달빛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절대로 아침을 맞이할 수 없다. 아침이라는 것은
죽은 태양의 허묘(墟墓)다.
이곳에서는 그림자 진 사물들만이 진실이 된다.
망가진 책장에 꽂힌 책들은 펼쳐보면
문자가 아니라 죽은 시인들의 발광이 소리가 되어
내 입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여기서 독서는 늘 광란이다.

나는 아직도 방문을 나설 때마다
어깨나 머리를 어딘가에 부딪친다 사방이 변색된 핏자국이다
언젠가 내 몸속의 피가 전부 이 구부러진 집에 바쳐질 때
나는 이 집의 일부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딱히 그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나는
다른 집에서는 살 수가 없는 탓이다.

지나가던 아이들이 창문을 두드렸다. 아저씨는 왜 여기에 사나요.
나는 창문을 열고 말한다. 너희 어머니가 이 집 주변에는
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맞아요. 이 집에는 구부러진 인간이 산다고 했어요.
그리고 우리 마을 목사님께서
이 집은 마귀가 지은 집이라고 했어요.
내가 묻는다. 마귀가 뭔데?
사람을 나쁜 길로 홀리는 괴물이요.
이 집은 마귀가 지은 집이 아니야. 만약 마귀가 보고 싶다면
마을 중앙에 계신 판사님을 찾아가 보거라.
아이들이 말한다. 거기엔 저번 주에 교수형 당한 사람들이 걸려있어서
가고 싶지 않아요.
내가 말한다. 누가 교수 당했다고?
몇 명의 시인들과 예술가들이었어요. 그들은 죄를 지었대요.
그들도 구부러진 집에서 살았다면
그런 꼴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 안타깝구나. 그리고 난 창문을
닫았다.

<탕겐! 내 이름은 안드레아스 탕겐이야!> 나는 중얼거리면서
다리가 두 개 밖에 없는 의자에 앉았다.
나는 배가 고팠지만 눈이 붉은 쥐들이 내 음식을 모두 가져가버려서
먹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 집에 살기 시작한 이래로
단 한 번도 식사를 한 기억이 없다.
탕겐, 내 이름은 안드레아스 탕겐.

그런데 도대체 내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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