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나오면 막다른 골목


어제는 몹시도 술잔을 비웠습니다
전날도, 그 전날도
새벽에도 등 밝은 어느 맥주집에서
벌써 2월도 끝나가는데, 그 집 창문에는
성탄절 램프들이 깜박거리며
시시각각 색깔을 바꾸고
나는 코트의 지퍼를 목덜미까지
바짝 여미고, 황금빛
황금빛 잔을 연달아 입으로 옮겨가고
그러나 누구와 마셨는지
어느 누구와 장대한 허풍을,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예술이니 삶이니, 하는 것들을
비싸고 덧없는 안주처럼 주워섬겼는지
그런 것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가게에는 어느새 우리밖에
누군지 모를 우리밖에 남지 않았고
우리는 계속 마시고, 골짜기를 흐르는
샘물의 소리처럼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무자비하게 뛰어내리는 폭포수처럼
귀청 떨어질 웃음소리를 내다가……
멍한 채로 나는 아직 동트지 않은
어렴풋이 가로등 빛이 보이는 골목에 서서
한 모금 한 모금 담배를 태웠습니다
늦겨울 추위에 만취한 몸은 떨리고
나는 연기를 계속 들이쉬고
내쉬고 다시 한 잔을 마시러 들어가는 것입니다
돈은 없이, 다만 술은 계속 내어와 지고
또 한 모금 한 모금
벌써 며칠째 나는 마시고 있는지, 몰래
눈앞의 표정 몰래 세어보며
알코올에 붉어진 얼굴과 눈동자로
도대체가 낯모를 눈앞의 그 얼굴을
한 모금, 한 모금씩 바라보는 것입니다
해는 곧 뜰 터이고, 인조가죽 지갑에는
단 한 장의 지폐도 없이.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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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빛

글/시 2023. 2. 6. 16:05 |

아침의 빛


태양은 쏜살같이, 잠든 머리 위를 스쳐 갔다
헐떡이는 폐부를 문지르며 커튼 자락 잡아당기자
창틀에는 이미 겨울밤 피어올라 있었다
검은 창문에 비친 얼굴은 희끄무레하였다

주차된 차들 위로 밤빛 무겁게 비춘다
잠옷 차림으로 서서 담배에 불을 붙이자
가로등 주광색이 흰 연기에 물먹듯 스민다
메마른 바람은 자꾸만 무언가를 읊조리고

너는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것이냐며,
까닭 없이 슬픔은 시작되었다 다시
니코틴 따위가 혈관 곳곳으로 퍼지고
건널목 너머 주택에 켜진 형광 불빛만으로도

나는 그만 장초를 버린 심정이다, 한 모금
한 모금 그 형광 불빛을 바라보고
만약 황금빛 태양 하늘 꼭대기에서 쏟아지면
이 뿌리 없는 서러움도 재가 되려는가, 생각해보는 것이다

슬리퍼 끄는 맨발은 아프게 얼고
겨울은 아직도 물러나지 않았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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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결과

기록/생각 2023. 2. 4. 03:38 |

 나는 쉽게 내가 쓰는 작품에 동화된다. 문제는 내 작품의 대부분이 스스로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 가공물이라는 점이다. 내가 갖고 있는 기억들 중 인위적으로 덮어 씌워지지 않은 것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이것은 기억의 문제만이 아니다. 나는 내가 쓰는 소설과 너무 밀접한 나머지 작품을 쓰는 내내, 계속하여 자기자신을 가공하고 갱신한다. 끔찍하게 우울한 이야기를 쓸 때 나는 더 많은 항우울제를 삼키게 되고, 전 세계를 돌아다닌 이야기를 쓸 때 나는 바보 같은 보헤미안이 된다. 나에게는 확고한 자기자신이 없다. 그로 인해 상상력은 현실의 껍질 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개념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은 제외하고, 오로지 감각적인 것에 대해서만 말이다. 없다. 내게는 명백한 호오가 없다. 쾌락과 고통도 생물적인 반응의 영역에 머무를 뿐, 좋고 싫다는 가치부여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 나라는 실체가 분명하지 않다.

 생각하는 것을 기록하고 글로 쓰는 일을 그만둔지도 한참이나 되었다. 그간 머릿속은 점점 탁해졌다. 과거도 제대로 보이지 않고 미래는 확률과 수치조차도 되지 못한다. 지금 내가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은 생명력은 힘이 세다는 사실 뿐이다. 내가 살고자 하지 않아도 생명은 엄청난 완력으로 살고자 한다. 그렇게 질질 끌려다니는 듯이 살아왔다. 혹은 살고있다. 무언가 전환점이나 원동력이 될만한 것을 찾아야한다고, 다만 염불 읊듯이 멍하니 생각하고 있다.

 술. 술을 너무 많이 마셔왔다. 담배나 약도 마찬가지다. 현실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라면 얼마든지 알고 있고 버릇처럼 실행해왔다. 결국 눈앞에 나타난 것은 십 수년간 방치되어있던 이상하고 참담한 현실이다.

 분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많은 이들의 불합리한 방식 덕분에 나는 대단한 겁쟁이가 되어버렸다. 다시 말해야겠다. 거대한 분노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밖으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겁이 많은 개는 짖기라도 한다는데, 나는 짖는 것조차 두려워 내 모든 힘을 스스로의 숨통을 눌러놓는데 쓰고 있다. 원한이야 많지만 그것을 위해서 행동할만큼 나는 자신을 존중하거나 살피지 않는다.

 계속 밤에 깨어있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낮이 두렵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들이 두렵다. 기피하고 싶고, 그들로부터 격리되고 싶다.

 글을 쓰는 것밖에 도리가 없다. 다른 삶의 방식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전부 실이 끊어졌다. 이 기묘한 길에서 벗어나기에는 너무 늦었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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