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 그리고 삶들

글/에세이 2020. 10. 30. 18:06 |

책들, 그리고 삶들



 20살 즈음 나는 헌책방에서 『말도로르의 노래』 2편과 4, 5편을 찾아냈다. 당시 나는 그로부터 수년 전에 민음사에서 낸 동일한 시집의 1편을 읽은 뒤였다. 강한 감명을 받고 이것이 6편으로 이루어진 산문시집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책방과 도서관,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도 1편 이후의 번역본에 대해서는 어떠한 정보도 찾을 수 없었다.
 잠깐 『말도로르의 노래』가 내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말하고 싶다. 나는 10대 중반부터 구약, 신약은 물론 불교 경전과 주역, 코란, 탈무드와 카발라 관련 도서 따위를 귀신에 홀린 듯이 뒤져댔다. 그러나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종교의 발생과 변형, 그것이 인간행동이나 문화에 끼치는 강력한 영향력에 대해서는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에서 똑같이 배울 수 있는 지식이었다. 기독교 영지주의나 조로아스터 교리, 한국 조계종의 근원인 임제종에 대해서는 깊은 흥미를 느끼고 공부도 나름 해보았지만, 그것들이 내 가슴을 꿰뚫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사람에게 영혼이 있다고 칠 때, 차라리 내 영혼을 개혁한 것은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이나 장 그르니에의 『섬』, 그리고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대표작들이었다. 그 책들을 통해서 생겨난 것 같은 내 안의 교리는 알베르 카뮈와 도스토옙스키, 니체 등과 함께 거의 종교나 다름없는 형태가 되었다. 굳이 말하자면 인간에게는 날것의 삶밖에 없다는 종교 말이다.
 그러나 안심하지도 만족하지도 못했다. 아니, 애당초 내 안의 그 ‘종교’에 의하면 나는 절대 안심하지도 만족하지도 못한다. 나는 감각과 지각과 경험을 무차별하게 씹어 삼키는 목 아래가 없는 머리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터져 나오는 분노와 증오가 어디서 생겨나서 어디로 가려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내 머리통을 언젠가 보았던 정신분열증 환자의 병실처럼 만들어놓는 것이다. 그 병실의 벽에는 온갖 연결되지 않고, 상충하고, 모순되는 단어들이 진심을 다한 필압으로 빼곡하게 쓰여있었다. 그런 이미지들과 몇 년을 정신병동에서 살다 퇴원한 친척의 살찌고 둔해진 얼굴 같은 것은 아직도 내게 오랜 위협으로 남아있다.
 그런 상황에서 김영승 선생님이 내게 민음사에서 낸 『말도로르의 노래』를 추천했다. 수업 중에 선생님이 보여주신 첫 두어 페이지만으로 나는 완전히 매혹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음날 곧바로 사서 전부 읽었고, 다시 읽었다. 과장 없는 본심으로 말하는데, 나는 사람들이 30~40년을 인생 속에서 헤매다가 성경을 읽고 구원을 얻었다고 하는 얘기가 헛소리가 아니라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다. 어떤 텍스트들은 정말로 그런 힘이 있고, 사람마다 성질이나 자라온 환경에 따라 반응하는 텍스트가 다른 것이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이 말은 모든 종교인에게 불쾌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내가 딱히 악의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말해두고 싶다.
 그러니까 그 악의와 신성모독과 증오로 똘똘 뭉친 산문시집이 내 성서가 된 것이다. 적어도 당시에는 말이다. 마음이 터질 것 같을 때면 그 책을 여기저기 펴보며 여러 번을 다시 읽었다. 어쩐지 ‘괜찮다’는 기분이 들고 피부 위로 바늘처럼 올라오던 혼란들이 아프지 않게 된다. 그래서 나는 그 시집을 6편까지 전부 읽고 싶었고, 몇 년을 헌책방부터 고서점까지 닥치는 대로 뒤지고 다녔다. 그러나 도저히 정보조차 나오지 않아서 방통대 불문학과에 입학했다. 불어를 배워서 원서를 읽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불어로 동화책을 더듬거리며 읽을 때쯤 이건 아무래도 보통 시간이 걸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런데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별생각 없이 들른 헌책방에서 청하 출판사의 『말도로르의 노래』 2편 한 권과 들어본 적도 없는 출판사의 4, 5편을 묶어놓은 한 권을 발견한 것이다. 2편은 1987년에 발행된 것으로 낡고 여기저기 밑줄이나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긴 했지만 비교적 깔끔했다. 그러나 4, 5편을 묶어놓은 것은 엄청나게 오래된 데다가 단어 대부분이 한자표기였고 심지어 세로쓰기 형태였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나는 몹시 흥분했고 바로 그것들을 집어 주인에게 계산해달라고 했다. 사실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도 아니지만, 놀랍게도 주인은 2천 원을 받고 그 두 권을 팔아주었다.
 여기까지 얘기해놓고 허무한 말이긴 한데, 일단 정보는 알려야 할 것 같아서 써야겠다. 『말도로르의 노래』는 2018년에 1편부터 6편까지 완역되어 판매되고 있다. 그때까지의 내 노력이 도대체 뭐였는가 싶기도 하지만, 아무튼 잘된 일이다. 불문학과는 애저녁에 그만두었다. 공부도 공부지만 술자리에서 학과장한테 거하게 사고를 쳤다.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다. 지금은 불어 인사랑 자기소개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서론이 길었는데 사실 이 글의 주제는 그 산문시집 자체가 아니다. 『말도로르의 노래』라는 책이 내게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공익근무를 끝내고 22살 때 나는 미국에 잠깐 가게 되었다. 18살 때부터 친하게 지낸 앤드류라는 친구의 고향에 함께 가게 된 것이다. 당시 우리 집은 차상위 계층이었고 나도 편의점 새벽 아르바이트나 몇 개월 하다가 그만둔 상황이어서 도무지 해외여행을 갈 상태가 아니었지만, 친구는 그냥 비행기 티켓 값만 내고 나머지는 맡기라고 했다. 체면 차릴 이유도 없었고 한국에서 할 일도 없었다. 통장 잔액을 다 긁어내니 왕복티켓 값은 나왔다.
 여행이라기보단 친구네 집에 놀러 가는데 다만 비행기를 탈 뿐이라는 기분이었다. 앤드류의 고향 집은 아칸소주의 로저스시(市) 교외에 있었다. 그야말로 남부 깡촌의 아무것도 없는 동네였다. 거기서 2주를 보내야 하니 나는 한가할 때가 많을 것이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2년 전에 사놓고 몇 번이나 도전했지만 도무지 계속 읽을 수가 없었던 그 책을 짐가방에 넣었다. 세로쓰기에 한자투성이인 『말도로르의 노래』 4, 5편 말이다. 친구에게 들은 바로는 주택 간 거리가 거의 1km씩 되고, 집 맞은편은 옥수수인지 뭔가를 키우는 거대농장이고, 아직도 카우보이 비스무리한 영감님들이 농지에서 말을 타고 돌아다니는 곳이라고 했으니까. 이번에야말로 반억지로라도, 그 활자가 안경알 위를 헤매다니는 것 같은 책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인천공항에서 텍사스공항으로, 텍사스공항에서 아칸소공항으로 날아갔다. 아칸소공항은 인천과 텍사스에 비하면 거의 오두막으로 보일 정도였다. 여하간 출구로 나오자 앤드류의 어머니와 누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키가 작고 안경을 썼는데 어쩐지 인텔리 느낌이 났으나 표정이 온화했다. 내가 인사를 하며 맴(ma'am)이라고 부르자 크게 웃으며 그냥 카를라라고 부르라 했다. 나도 미세스 버르퀘스트라는 긴 문장을 매번 말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좋은 일이었다. 앤드류의 누나는 이름이 메건이라는 것과 그 집 가족 중 유일하게 인상이 차가웠고, 어쩐지 행동거지에 이질감이 느껴지는 영국 남자와 결혼해 살고 있다는 것 외엔 기억나는 게 없다. 나중에 앤드류가 알려주었는데 가족 모두가 메건만이 ‘버르퀘스트’답지 않다고 여긴다고 했다. 그리고 후에 카를라 아주머니는 내가 그녀를 도와 장작을 나르고 있을 때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사위는 ‘영국 머저리’라고 말하기도 했다.
 ‘버르퀘스트’에 대한 것은 맞는 말이었다. 공항 주차장에서 차에 시동을 걸고 기다리고 있던 앤드류의 아버지를 만나는 순간 뭐가 ‘버르퀘스트’다운 인간인 것인지 대강 알아차렸다. 시종일관 이쑤시개를 질겅거리고 있는 70살 가까이 된 그 키 큰 노인은 날 처음 보자마자 마치 오랜 친구의 아들이라도 만난 것처럼 웃었다. 그리고 남부 사투리가 너무 심해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를 (여전히 이쑤시개를 문 채)큰 소리로 늘어놓으며 내 어깨를 탕탕 쳤다. 대충 잘 왔다, 비행기를 오래 타서 피곤하겠다, 배 안 고프냐,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카를라 아주머니 때와 마찬가지로 내가 서(sir)라고 하며 인사를 하자 주차장이 다 울리도록 웃으며 데이브라고 부르라 했다.
 2주간 한가하리라는 내 생각은 완전히 착각이었다. 집까지 운전하는 내내, 여전히 이쑤시개와 남부 사투리 때문에 절반 이상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로 계속 내게 뭔가를 물어보거나 혼자 농담을 하고 스스로 엔진 소리를 묻어버릴 정도로 크게 웃는 아저씨의 성격이 파악되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집 앞에 도착했을 때 처음 알았는데, 이 가족은 경제력이 없어서 남부 시골에 사는 가족이 아니었다. 오히려 돈이 넘쳐도 굳이 북부도시로 갈 이유가 없는 성질의 가족이었다. 현관 게이트를 열고 차고까지 가는데 차로 1분이 넘게 걸렸다. 집은 단층이었지만 어림잡아 200평은 넘었고 앞마당 뒷마당은 아예 어디까지가 끝인지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 부잣집이었구나, 하고 생각하며 그들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아저씨가 잔에 뭔가를 따라 내밀었다. 주방 테이블 위에 있는 유리항아리에서 떠낸 것을 보자 바로 감이 왔다. 금주법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심심찮게 나오는 그 문샤인이었다. 처음 만난 아들 친구를 집에 들이자마자 자기가 담근, 아마도 50~60도는 될 밀주를 권한다. 나중에 양조면허가 있다고 들었으니 밀주는 아니지만. 순간적으로 우리 아버지가 미국에서 태어났으면 이런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잔을 받아 전부 입안에 털어 넣었다. 참이슬이 50도가 되고 아스파탐을 안 넣으면 이런 맛이 나는 것이로구나 싶었다. 나중에 생각한 것인데 아저씨는 그 한 잔으로 ‘아들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판단한 것 같다. 그런 부분도 우리 아버지와 근본적으로 같은 인간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여하간 카를라 아주머니가 나더러 2주간 앤드류가 고등학생 때까지 썼던 방을 쓰라며 안내해주고, 나는 거기에 짐을 풀었다. 그리고 아주머니는 좀 한탄하는 것 같은 목소리로, 내가 온다고 하자 남편이 저녁으로 훈제 소갈비를 만들겠다며 아침부터 뒷마당 드럼통에 숯을 만들었다고, 자신은 그 요리가 너무 매워서 못 먹는다고 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는 얘기를 했다. 내가 짐을 풀자마자 아저씨는 내게 집을 안내해주었다. 한마디로 넓었다. 그리고 차고가 두 개였는데 본채에서 떨어진 커다란 차고에는 연식도 가늠이 안 되는 빈티지 스포츠카가 있었다. 이걸 타시는 것이냐고 묻자 그렇지는 않고, 그냥 수리하고 개조하는 게 취미라고 했다. 차고의 냉장고에는 손글씨로 라벨이 붙은 맥주병이 잔뜩 있었다. 아저씨는 자신이 담근 것이고 냉장고 문에 라벨에 써놓은 이름마다 알코올 도수가 얼마나 되는지 적어놨으며, 아무 때고 꺼내 마셔도 좋다고 했다. 내일 낮이 밝으면 지하실의 스테인리스 탱크에서 발효시키는 걸 보여주겠다고 덧붙였다. 그 와중에 커다랗고 하얀 케빅이라는 개가 계속 우리를 따라다녔다.
 첫날이라고 해야 하나, 오후 늦게 도착해서 잠들 때까지 나와 앤드류와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계속 대화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한국에서라면 나는 가족이든 누구든 이렇게 대화하는 걸 좋아하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 것보다도 위험한 일이다. 너무 오래 대화해서 내가 경계심을 풀고 얘기를 꺼내버리면 그들 중 거의 8할은 내 인생에서 없어진다. 그런데 나는 2주간 신세 지게 될 사람들에게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있는데도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다. 이 자리에 없는 메건에 대해 생각이 미쳤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지만, 아마 메건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나는 틀림없이 위험을 느껴서 입을 닫고 간단하며 무해한 대답만 반복했을 것이다. 딱히 구체적인 이유를 설명하기는 힘들다.
 아무튼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2주간 내 짐가방에 『말도로르의 노래』 4, 5편이 있다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우선 첫날부터 재채기가 심했는데, 이틀이 지나서야 그게 약한 알레르기 반응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유는 뭐든지 될 수 있었다. 서양 공기, 서양 나무, 서양 건축물, 서양 개, 서양 세제. 나는 아주머니에게 혹시 알레르기 약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녀는 내게 디펜하이드라민이라는 약을 꺼내주었다. 그것은 훌륭한 약이었다. 알레르기 반응이 즉시 멈출 뿐만 아니라 세계와 나 사이에 장벽이 생긴 것처럼 내 뇌를 향한 아무런 자극도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그 느낌에 맛이 들려 며칠 사이 하루에 140mg까지 삼키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내성이 생긴 것인지 알레르기 약 이상의 효과가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그 사이 한 번, 완전히 약에 취해 있을 때 카를라 아주머니가 자신의 친구와의 점심식사에 나를 데려간 적이 있다. 나는 그때 정말로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친구분이 이 아시아인에 대해 의아해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노년의 백인 여성이 자신의 친척이 자가면역질환에 걸렸다는 얘기를 했을 때 나는 정신이 나간 상태로(영어로는 이 상태를 Stone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내 기억 속 어딘가에 있던 5~6개의 자가면역질환의 이름을 유창한 영어로 늘어놓으면서 어느 것이냐고 물었다. 그 이후로 기억이 없으나 나중에 카를라 아주머니는 친구가 놀라워했으며 내게 의대생이냐고 묻자, 내가 중졸이라고 대답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전부터 경험한 것이지만 만취하거나 약 기운에 정신이 뒤집혀있으면 평소엔 기억 속에 흩어져있던 외국어들이 전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리고 내가 익숙하지 않은 장소에 있으면 긴장성 변비에 걸리는 체질 때문에 1주일 이상 변을 보지 못하자 앤드류가 파이프와 대마잎을 가져다주었던 일, 데이브 아저씨가 시도 때도 없이 미국에 왔으면 치즈버거를 먹어야 한다며 픽업트럭에 태우고 로저스시의 모든 치즈버거 가게에 데리고 다녔던 일 등이 기억난다. 대마는 장운동뿐만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굉장한 효과가 있었다. 치즈버거에 대해서는, 앤드류가 왜 한국의 지역마다 다른 된장찌개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인지에 대해 공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단 한 번 그 환각 같은 이국 생활에서 정신이 원래대로 돌아온 일이 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사흘 정도 전이었을 것이다. 데이브 아저씨는 오두막에 가자며 나와 앤드류를 트럭에 태우고 어딘가로 향했다. 짐칸에는 시꺼먼 가방이 산처럼 쌓여있었다. 오두막에 가자길래 나는 무슨 톰 아저씨의 오두막 같은 것을 생각했는데, 그것은 착각이었다. 버르퀘스트 가족이 통째로 소유하고 있는 산에 세워놓은, 아직 완성이 덜 된 나무집 두 채였다. 우리는 거기에 대충 짐을 던져놓고 불을 피운 뒤 아저씨를 따라 산 능선에 있는 평지로 향했다.
 앤드류는 매번 있는 일이라는 듯 널따란 평지 곳곳에 나무판자와 표적을 세우고, 아저씨와 나는 짐칸에 있던 시커먼 가방들을 전부 바닥에 내렸다. 그것은 작은 핸드건부터 자동권총, 돌격소총에 기관총, 심지어 대전차용 저격 라이플까지 포함한 40정 정도 되는 총기와 3000발 가까이 되는 탄환들이었다. 내가 이곳에서 사격을 해도 되냐고 묻자, 아저씨는 총기 소유 자격증을 갖고 있으며 이 산이 전부 자신의 사유지이기 때문에 문제없다고 대답했다. 이 늙고 호탕한 남부 백인의 진짜 취미는 바로 이것이었다.
 나는 이것저것 총을 쏴보았으나 자동소총은 도무지 표적에 맞지도 않고, 저격총은 우선 스코프 초점을 맞추는 것부터 감이 잡히질 않아 결국 유난히 손에 잘 맞는 리볼버로 사격 연습을 하고 있었다. 아저씨가 저격총으로 맞추기 위한 사제폭탄을 섞고 있을 때(이것이 합법인지 아닌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나는 이미 걸레짝 같은 표적 맞은편에서 리볼버에 장전을 하고 있었다. 그때 괜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아무리 봐도 실전용이 아닌 무식하게 크고 총신이 전부 강철로 된 리볼버에 탄환을 채우면서, 나는 무언가가 내 정신을 붙잡고 끌어내리는 느낌을 받았다.
 이것으로 한 방만 내 미간에 쏴버리면 끝이다. 다시는 현실로 돌아올 필요가 없다. 완전히 소멸하는 것이다. 휴대용이라기엔 너무 무겁고 큼직한, 틀림없이 총기 애호가들을 위해 만들어진 이 취미용 리볼버의 구경은 내 뇌를 관통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머리통을 아예 박살 내버릴 것이다. 한발 한발 탄창에 탄환을 넣으면서 그런 생각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떠올랐다. 그때 트럭 짐칸에서 어떤 작업을 하던 앤드류가 다가와 내게 뭔가를 건넸다. 한국에서는 오래전에 없어진, 필터도 없는 말아 피우는 궐련이었다.
 내 친구가 뭔가를 눈치챘는지 아닌지 그런 것은 알 도리도 없고, 사실 중요하지도 않다. 나는 고맙다며 궐련을 받아 물고 불을 붙였다. 스스로 죽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것은 몹시 유감스러운 일이다. 도덕이나 윤리 같은 것은 다 때려치우고, 심지어 내가 여기서 자살을 할 경우 버르퀘스트 가(家)의 사람들이 감당해야 할 외교적 문제 같은 것도 다 무시하더라도 말이다. 게다가 미래도 과거도 아무런 중요성이 없다. 나는 지금 산 중턱의 청량하고 차가운 공기 속에서, 친구와 그의 아버지와 함께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현실이라는 불가해한 개념에 금이 가는 것 같은 탄약 터지는 소리를 즐기고 있다. 미래에 무슨 절망이 있을지 가늠해보는 것은 멍청한 일은 아니지만 불필요한 일이다.
 내가 여섯 발을 표적에 쏘는 동안 아저씨는 평지 끝에 세워놓은 사제폭탄을 세 발이나 맞췄으나 폭발하지 않아서 불쾌해하고 있었다. 재료를 금고에 너무 오래 넣어놔서 습기가 찬 것 같다고 불평하는 말소리가 들렸다.
 나중에 앤드류가 알려준 것인데, 우리가 미국에 가기 전 앤드류는 미리 가족들에게 친구 MJ가 정신치료를 받고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전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데이브 아저씨는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나를 40정의 살인무기와 함께 사람 하나 없는 산으로 데려갔다. 이 점에 대해서 나는 설명하거나 해석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다지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종일 소파에 멍하니 앉아서 아저씨의 수제 맥주를 계속 마셨던 일. 메건이 어머니에게 어린 아들을 맡기러 오면 카를라 아주머니가 바쁠 때 내가 한쪽 팔에는 한 살배기 어린아이를 안고, 다른 손으로는 맥주병을 쥔 채 마당을 돌아다녔던 일. 케빅이 그늘에 엎드린 채 아무 감정도 읽을 수 없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던 일. 데이브 아저씨가 흡연자인 나를 위해 마당 한쪽에 양철 버킷을 꺼내놓으며 ‘나도 피웠지만, 그건 역겨운 습관이야.’라고 말했으나 목소리에서 그 어떤 경멸이나 악의도 느껴지지 않던 일. 그런 일들이 끝나고 앤드류와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14시간의 비행은 피곤한 것이므로 나는 수면제와 함께 삼킬 생각으로 기내에서 럼주를 주문했다. 여기서 좀 재미있는 일이 있었는데 40대쯤 되어 보이는 백인 스튜어디스 여성은 뜬금없이 나보고 군인이냐고 물었다. 나는 잠깐 생각해본 뒤 공익 출신이더라도 서류상으로는 병장제대로 기록된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래서 나는 곧이곧대로 고국에서는 병장(Sergeant) 제대 취급이라고 말해버렸다. 그러자 스튜어디스는 군인에게는 음료 제공이 무료라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짓더니 럼주를 가지러 가버렸다. 그제야 저 사람이 무엇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한 건지 알아차린 나는 순간적으로 해명을 하려 했지만, 어차피 럼주 한 잔은 5달러밖에 하지 않고, 아메리칸 항공이 그런 걸 신경 쓸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에 들었던 손을 내려버렸다. 옆에서 앤드류가 웃고 있었고, 나도 웃었다. 아마 내 피부가 중동사람 피부였으면 실제로 미군 장교더라도 그런 질문은 하지 않았겠지.
 인천공항에 도착하자 하늘이 온통 하얀 잿빛이었고 태양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공항철도를 타고 중간까지 앤드류와 함께 가다가 노선이 갈라졌다. 수트케이스의 드르륵거리는 바퀴 소리와 함께 집에 돌아오자 아무도 없었다.
 방에서 짐을 풀다가 셔츠 더미 속에 박혀있는 『말도로르의 노래』 4, 5편을 발견했다. 주변의 책장에 적당히 집어넣었다. 그리고 대강 예상할 수 있었다.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다른 누군가를 위한 것도 나 자신을 위한 것도 아닌 생활이, 비관이라고도 낙관이라고도 할 수 없는 생활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예전에 나는 캘리포니아에서 2개월 정도 방탕하게 지냈던 일에 대해 산문을 쓰면서 ‘아무도 내가 누군지 모르는 곳’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여행의 요점이라고 적었던 적이 있다. 아무도 나를 몰라서, 내가 아무도 아닌 곳에서는 책을 읽고 정보와 지식을 꾸역꾸역 뇌에 집어넣을 필요가 없다. 실제로 버르퀘스트 가에서의 2주 이후 나의 모든 여행은 그런 식이었다. 네팔 안나푸르나의 해발 2,300m 지점에서 몇 주씩 담배만 물고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등산하는 서양인들은 내가 현지인인 줄 알았고 현지인들은 내가 뭘 하는 사람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책은 한 줄도 읽지 않았다.
 얼마 전 앤드류로부터 케빅과 함께 지내던 두 마리의 검은 고양이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그중 한 놈이 너무 늙어 치매가 왔는지, 사방에 오줌을 뿌리고 아무나 공격해대며 정신을 잃고 있었다는 것이다. 데이브 아저씨는 뒷마당에 구멍을 파고 권총 탄환 두 방으로 사태를 해결했다. 아저씨의 말에 의하면 동물병원에서 안락사시키려면 200달러가 들지만 총알 두 개는 25센트도 안 한다는 것이다. 순간 나는 아저씨의 표정과, 이쑤시개와, 빈민 시절에 어깨에 새겼다는 문신이 떠올라 소리 내 웃어버렸다. 분명 어떤 사람들은, 특히 북부도시의 리버럴이나 동물권리주의자들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화를 내겠지. 돈이 썩어 넘치면서 반려묘를 위한 200달러가 아까운 것이냐고 부르짖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안다. 아저씨도 아주머니도 그 검은 고양이를 사랑했다. 그러나 버르퀘스트 가의 그 넓은 땅에서 생명과 죽음은 그뿐이다. 특히나 짐승에 대해서라면 더욱 그렇다. 새벽마다 케빅이 취미 삼아 뒷마당에서 아르마딜로와 다람쥐를 사냥해 그 시체를 화단에 쌓아놨던 것이 똑똑히 기억난다. 더욱 명확한 것은, 아저씨에게 있어서 고양이의 혈관에 치사량의 모르핀이 들어가는 것과 머리통에 두 발의 탄환이 들어가는 것은 아무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 가족들을 먹여 살리려고 도축장에서 엽총을 들고 일용직도 하던 사람이다. 아마도 그에게 죽음과 존엄에 대한 복잡한 사상 따위는 없겠지만, 그 어떤 죽음도 존엄하거나 혹은 존엄하지 않을 수는 없다는 사실이 아저씨의 혈관에 흐르고 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에서 나는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사변과 사상이 비대하게 붙어 본체가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친구는 거의 남지 않았고 내 방엔 온갖 책들이 난잡하게 펼쳐져 있다. 이야기의 시작이 됐던 『말도로르의 노래』 4, 5편은 도대체 어딜 갔는지 모르겠으나, 완역본이 있으므로 그다지 상관은 없다. 여전히 분노와 증오 등은 터진 경동맥의 혈액처럼 울컥울컥 솟아오르곤 한다. 과연 양으로만 따진다면 삶은 살 이유보다 죽을 이유가 더 많아 보인다. 그러나 앤드류에게서 그 치매 고양이와 아저씨 얘기를 들었을 때 모든 고뇌들이 다 실없는 농담으로 느껴졌다.
 별로 중요할 게 없는 것이다. 나는 언젠가 내가 먹을 고기를 스스로 도축하고 해체하는 경험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굳이 책들을 전부 불태울 필요도 없다. 사상가들을 병원과 절벽으로 몰아가는 그것들은 거기에 그대로 있어도 좋다. 삶이 너무도 간단한 살해와 포식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 관념이 아니라 촉각이 된다면, 정신의 혼란과 증오는 내 내면을 갉아먹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나는 독서를 하더라도 활자들에게 내 영혼을 빚지지 않을 것이고, 손에 묻는 피보다 중요한 책 따위를 찾아다니지도 않을 것이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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