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은 몸과 썩지 않는 눈동자와 마비된 사상


존재의 과잉 때문에 삶이라는 것이 더럽게 퍽퍽합니다. 사실 나는 어릴 때부터 닭 가슴살을 싫어하지 않았던가요. 그런데 어른이 되어 담배를 물고 술병을 물고 약통을 물다보니 어느새 내 영혼부터가 닭 가슴살보다도 수분이 하등해진 것입니다. 이놈의 인생을 매끄럽게 굴리려면 기름이라도 쳐야할 텐데, 기름을 치기 이전에 나사들은 사이즈가 안 맞고 엔진은 이십사 시간 과열상태입니다. 어려서부터 길가에 버려진 고철들을 보면 모조리 주워서 내 가슴에 담아둔 탓입니다. 나는 도무지 길가에 버려진 작고 커다란 고철들을 내버려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들도 누군가에게 버려진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리고 그 고철들을 내버린 사람들이 보기에 나는 살아 움직이는 고철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버려진 것이 버려진 것들을 어떻게 또 버릴 수 있겠습니까. 쓰레기와 녹의 냄새가 나는 팔에라도 담아 끌어안아야지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항상 고철들과만 피와 고기로 교감을 나누다보니 살아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치 냉담해진 것입니다. 이것도 패배주의가 낳은 부작용일까요? 나는 항상 손가락이 서너 개 잘리고 흉터를 가진 손들과만 악수를 한다는 것입니다. 하얗고 깨끗하게 다듬어진, 대리석으로 만든 것 같은 고귀한 손들은 가까이만 닿아도 소름이 끼칩니다. 그래서 내가 잡았던 소녀의 손에는 담뱃진이 눌어붙어 있었고, 눈동자에 젖과 꿀과 ―당연하게도―눈물이 흐르던 여인의 손은 오랜 절망과 신에 대한 고뇌로 깎여나가 있었습니다. 내 눈동자에는 술이 머금어져있었고 희망을 만나면 거의 반사적으로 경계부터 했었습니다. 내가 여인들의 손에 눈물을 떨구었던 것은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고독을 부채질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놈의 고독, 고독, 고독. 참 쉬운 말이고 쉬운 단어입니다. 그런데 고독의 뒷면에는 주체가 과잉되어 손가락마저 불어터져 아무 것도 잡을 수 없는 서러운 마스크가 있습니다. 고독은 우리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흘러들어오려고 오는 것입니다. 나는 과잉되어서, 술을 마시면 토하고 담배를 피우면 허파를 쥐어짜고 약을 먹으면 정신을 사방으로 뿌려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내가 이용할 수도 없는 부풀어 오른 개념들은 여전히 나에게는 너무 많은 것입니다. 존재의 과잉이 나를 짓눌러 죽이고 있다고 외쳐왔습니다. 아니 그것은 나를 죽이지는 않지요. 사실은 죽이지도 살리지도 않고 영원한 경계선의 한복판에 거적처럼 걸쳐놓는 것이지요. 나는 행동주의자가 되기에는 너무 녹슬었고 이론 속에 파묻히기에는 너무 뜨겁습니다. 내 피는 쓸모없는 것들의 용광로처럼 되어버렸습니다. 현실에 배설 당했으나 공기보다 가벼운 두 발 때문에 항상 어설픈 고도에서 거꾸로 부유합니다. 음식을 먹으면 항상 토하고 싶은 것도 내가 거꾸로 떠다니기 때문일 테지요. 이박삼일을 자도 술이 깨지 않는 것은 뇌에 피가 몰렸기 때문일 테지요. 한때는 니체에 미쳐 칼을 쥐고 다니고, 카뮈에 미쳐 무감각의 마을에서 피를 찾아다니기도 했는데, 사상이라는 것도 오만가지 이유에 의하여 삭아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배부른 기득권층도 분노하는 혁명가도 될 수 없도록 아주 애매하고 미묘하게 삭아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존재의 무게가 점점 과잉되도록 아주 적절하게 삭아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언젠가 존재의 무게가 아니라 존재의 쪽팔림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만, 다른 쪽으로 생각해보면 이 지랄 맞게 과잉된 상태가 최종국면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애매하고 어디로 향할 수도 없는, 철로에 덜컥 발이 끼어버린 상태가 내가 가고자 했던 길과 어쩔 수 없이 가야만 했던 길이 합쳐진 행로의 결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그래서 나는 철로에 덜컥 발이 낀 채로, 부디 철마 하나 달려와 주기를 뻔뻔하게 기원하는 것입니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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