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이 크롤러 (The Sky Crawlers, 2008)
기록/영화 2010. 12. 7. 23:42 |
영화 시작부터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공중 전투씬과, 직후 화면을 온통 덮는 화려한 피보라.
스크린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건지 파악도 하기 전에 영화는 '이곳에서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인트로 이후부터 결말까지, 영화가 진행되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동안 영화는 사람이 죽고 있다는 사실을 관객의 눈앞에 들이밀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감추고 자극적인 표현을 절제하면서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끈질기게 반복되는 살인행위를 고의적으로 관객의 시선으로부터 돌려놓는다.
<적기를 격추시킬 때는 어떤가요?
승리자가 된 듯한 기분이 듭니다.>
글쎄요, 생각해 본적도 없습니다.
서로 죽이고 있는데도?
직업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느 비지니스든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를 잃게하고 이익을 내는 쪽이 승리자인 것입니다.>
심지어 자신의 살인행위에 대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무감각하고 이성적인 반응을 보이는 주인공(그는 에이스 파일럿이다. 즉 누구보다도 적을 많이 죽이는 캐릭터다.)과 어느 때고 간에 무표정하고 타성적인 얼굴만을 내보이는 동료 파일럿들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며 관객에게 '과연 이 영화에서는 전쟁이라는 살인행위가 계속되고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까지 들게 만든다.
오락영화를 제외한 거의 모든 전쟁영화에서 나타나는 주제인 '국가가 허용한 살인행위'에 대한 고뇌를 이들은 하지 않는다.
그런 것에 대해 고뇌할 감정조차 갖지 않는다.
운명이나, 한계 같은 것이...
하지만 그 누구도 그를 격추시킬 수 없어.>
티쳐. 절대로 격추되지 않는 '어른 남자' 파일럿.
티쳐의 존재는 가부장적이고 엄격한 규칙을 연상시킨다.
동료 파일럿인 유다가와의 죽음.
그 후 그의 빈자리를 매우기 위해 배속된, 생김세도 버릇도 유다가와와 흡사한, 아니 오히려 그와 똑닮은 파일럿.
정확히 말하자면 주인공에게 있어 유다가와는 죽었지만 죽은 것이 아니다.
그는 재생산되었고, 주인공에게 있어서의 유다가와라는 타인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강제된 영원성.
그들의 내면처럼, 그들의 생활 역시 무감각하고 타성적인 일들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식사, 음주, 흡연, 창녀와의 정사, 수면.
죽음에도 변하지 않는 얼굴들.
언제나 같은 식당에서 같은 식사를 반복하다가 그들은 언제나와 같은 전쟁을 치루러 하늘로 날아오른다.
그러나 바로 그 '언제나와 같은 전쟁'이 벌어지는 하늘이야말로 이 무덤덤한 개인들에게는 '일상'을 분기시킬 기회의 장소다.
아니면 죽여줄래?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 영원히 이대로야.>
그 기회란 바로 죽음의 기회다.
끊임없이 반복되기만 하는 일상을 부숴버릴 방법이 단 하나밖에 없는 절망적인 세계.
그리고 이 단단하게 닫힌 세계는 그들이 가진 '영원히 늙지 않는 아이(킬드레)'라는 속성과 그들이 창공에서 죽음을 맞을 때마다 계속해서 그들을 재생산하는 회사의 존재로 말미암아 더욱 절망적이고 완전무결한 순환고리로 완성된다.
이제 우리는 알았다. 이들은 전쟁행위에 대해 고민할 정도로 여유가 많지 않다. 죽지 않는 이들로만 구성된 타인의 그룹은 개인의 실존을 가차없이 막다른 길로 내몬다. 왜냐하면 자아란 타인과의 비교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데, 영화의 등장인물들이 가질 수 있는 타인이란 변화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영원한, 즉 비인간적이고 절대적인 타성의 결정체 같은 것들 뿐이기 때문이다.
개인은 영원한 타인들 사이에서 자신도 영원하리라는 막연한 직관을 가질 것이고, 그것은 타성에 대한 그의 감각을 더욱 예민하게 만들 것이다.
오직 타성.
그리고 그들이 변화를 위하여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자발적인 죽음과 타의적인 죽음 두가지 뿐이다.
쿠사나기. 계속해서 자살을 말하는 인물.
그녀는 과거에 진로우라는 인물을 자살'시켜주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스크린에 등장하는 모든 킬드레들 중 가장 오랫동안 '재생산'되지 않은 듯 하다.
캐릭터들의 대사와 문맥을 짜맞추어보면 그녀는 적어도 8년 이상을 자살에 대한 치열한 고민으로 살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도 분명 자신의 자살 이후에도 계속되는, 강제적인 스스로의 영원성을 발견했을 것이다.
무언가를 바꾸게 될 때까지.>
자신을 죽여달라고 말하는 쿠사나기에게 주인공은 희망을 말한다.
영원하기 때문에 오히려 누구보다 강렬하게 존재의 헛됨을 느끼고 있을 킬드레에게,
'무엇인가를 바꾸게 될 때까지 살라'고 막연한 희망을 말한다.
사실 이 막연한 희망이야말로 거의 모든 의식하는 존재들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실낱 같은 삶의 근거이다.
그리고 주인공은 티쳐와 '전쟁'을 하기 위하여 하늘로 오른다.
항상 지나가는 길이라고 해서 경치가 똑같은 것은 아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일까?
그것 뿐이기 때문에 부족한 것일까.>
이것은 일종의 회의주의이다.
인간의 욕구, 타성, 삶의 근거 따위를 통째로 비끄러매는 물음.
이 무관심하고 단단한 세계에서 우리는 왜 무언가를 갈망해야만 하는 것인가?
무언가를 갈망하기 때문에 인간인 것인가.
결론 내려지지 않는 회의의 시선.
이 대사로 인하여 작중에서 티쳐가 상징하는 바는 확실해진다.
아버지. 규율. 원칙. 절대성. 어른. 권력.
'절대로 파괴할 수 없는 규칙'을 파괴하기 위해 주인공은 티쳐를 향해 총구를 겨눈다.
자살행위, 혹은 변화를 위한 도전.
혹은 두가지 전부이기도 할 것이다.
그는 티쳐에게 죽는다.
영화 시작부분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한 자극적인 출혈과 폭발.
그는 죽었다.
자살이었나, 혹은 변화를 위한 도전이 좌절당한 것인가?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단정짓기는 어렵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의 심리는 복합적이고 의문형 투성이이다.
결과가 한가지라고 해서 결론까지 하나로 결정지어지지는 않는 것이다.
복합적인 죽음.
그리고 유다가와와 마찬가지로, 그는 재생산되어 돌아온다.
계속되는 회귀.
그는 또 티쳐에게 총구를 겨눌까?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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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m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