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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9.16 걷는 구두
  2. 2018.09.16 탄생의 종말

걷는 구두

글/시 2018. 9. 16. 22:06 |

걷는 구두



나는 걷는 구두

밑창은 해지고 코는 닳았다네

갈대들이 내 목을 간질이고

뚫린 코에 들어오는 진한 돌, 흙 내음

나는 걷는 구두라네


하늘은 가끔 비를 내리기도 하고 해를 띄우기도 하지

나는 모래를 걷어차며 그것을 보네

내 가죽은 젖었다가 마르고, 더욱 뻣뻣해지고

그러나 오랜 걸음은 또 나를 부드럽게 만들어

나무와 풀들은 말이 없어


사막도 걸었고 해변도 걸었지

내 코엔 온 세상의 정수가 빨려 들어왔다가 도로 빠져나갔고

심지어 태양의 냄새까지 나는 맡아보았다

어둠의 냄새도, 달의 냄새도 날 짓눌렀다 가고

바람은 나의 온 가죽을 부드럽게 애무하였고

나는 그것들을 기억하네, 아니, 기억하지는 않아 사실은

바로 바람에 흘려보내버렸지, 내 뒷굽 너머로

태양에 달궈진 돌들은 뜨거워

밤의 얼어붙은 모래는 송곳 같아

나뭇잎 사이로 생명이 오락가락하고

나의 작은 그림자를 오래도록 따라오는 죽음

나는 걷는 구두

보고, 맡고, 듣고, 담았다가

내뱉어낸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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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의 종말

글/시 2018. 9. 16. 02:18 |

탄생의 종말



이 도시에서 보는 하늘은 밤에도 회색이다


완전한 어둠과 별빛의 청량함을 기억하는 건

산중턱의 밭두렁에서 귀신을 보고 두려워하던 기억이 있다

촛불의 일렁임에 정신이 팔려 찻물을 발에 쏟은 기억이 있다

가을 달의 청명함에 몇 시간이고 하늘을 보던 기억이 있다


나 말고는 아무도 없는 산

새들은 죽고 나무들은 말이 없다

새벽 세 시가 되면 저 높은 곳에서

새벽예불을 알리는 목탁 소리가 들려왔다

그 전까지는 만물이 자는 산


술에 취한 새벽 두 시

도시를 거닐면 사방이 찬란하고 적색이고 회색이다

내 폐는

문명을 통과한 타르와 니코틴

매연가스에 거멓게 쿨럭이며 음악을 갈구한다

그러나 절대 노래 부르지 못 한다


온전한 달빛을 본 지 얼마나 되었지?

밤의 구름은 이미 구름이 아니다

저 옛날, 그러나 너무 옛날은 아닌

산 속에서 죽은 신들에게 둘러싸여 입을 다물고 기다릴 때

나는 묶인 입으로 달을 노래했었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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