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호의 남자

기록/생각 2020. 9. 29. 00:14 |

304호의 남자


 낮이든 밤이든 3층 계단에선 늘 비슷한 목소리가 울린다. 바보처럼 명랑하게, 동시에 비꼬듯이 주절거리는 남자의 목소리거나, 슬픔인지 절망인지에 가득 차서 울부짖는 남자의 목소리다.
 같은 빌라에 사는 처지라 그 남자를 몇 번 마주친 일이 있다. 40대 초반 정도로 보이고 머리를 삭발했으며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뼈가 부러질 것처럼 바싹 말랐다. 빌라 앞에서 담배를 피우다 마주치면 그는 항상 어딘가에서 소주 3병을 봉투에 담아 집으로 가고 있거나 소주를 사기 위해 나가고 있다. 가을이 다 됐는데도 늘 런닝에 츄리닝 바지 차림이다. 밖에서 그가 울부짖거나 희희낙락 지껄이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우리 집이 4층에 있어서 오르락내리락 하다보면 3층 계단에서 언제나 그런 소리가 들릴 뿐이다.
 누군가한테 그가 아내와 함께 산다는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 여자를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목소리는 알고 있다. 낮에는 3층 계단에서 늘 남자의 정신 나간 괴성만 들리지만 밤이 되면 분노로 가득 찬 여자의 목소리가 섞여 들린다.
 그 남자에게 직업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없겠지. 그러니 낮에도 술에 취해 지껄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약간의 거식증 때문에 살이 잔뜩 빠진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그 남자의 체구를 보면, 그러니까 관용구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뼈 위에 가죽밖에 없어서 과연 기능을 하기나 하는 것인가 싶은 몸으로 무슨 일을 하겠는가. 아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소주에 들어있는 칼로리만으로 생존하고 있는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불행한 집은 어디에나 있다. 게다가 난 인생의 대부분을 거지 같은 동네에서만 살아왔다. 불행한 집은 수도 없이 보았고 우리 집도 불행한 집 중 하나였다. 그런데 3층의, 304호에서 들리는 목소리―혹은 목소리들―를 무시하며 계단을 오르내리면 그것은 불쾌하게도 흔한 ‘불행한 집’과는 달리 이상한 메아리를 내 가슴 속에 남긴다.
 나는 폭음하는 일은 별로 없지만 술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알고 있다. 친가 사람들 모두가 술을 좋아하지만 유전인지 뭔지 그들 중 누구도 술에 취했을 때 슬퍼하거나 날뛰기는커녕 점점 즐거워하고 친절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학창시절까지만 해도 난 알코올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술을 마시게 되자 생각이 바뀌었다. 나 역시 친가 쪽 피를 물려받았는지 행태야 비슷했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술에 취하면 괴롭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았다. 그것은 대단한 것이었다. 굳이 날 비극적 인물로 설명할 생각은 없지만 신체·정신적 고통과 끝없는 고립감은 존재의 일부인 것처럼 평생 날 따라다닌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외가 쪽에 알코올 문제로 인생을 말아먹거나 정신병동에 수감 된 사람이 있다는 것이 그때 기억났는지, 그때쯤 알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그 때문인지 어머니는 내가 성인이 된 후에도 끈질기게 날 술로부터 떼어놓으려 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간에 나는 술을 마셨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폭음하는 일은 별로 없었지만, 한 시간에 500ml씩, 몇 시간에 걸쳐 계속 맥주를 마시는 일이 많았다.
 3층을 지나가면 이미 일상이 되어버린 그 남자의 목소리가 계속 들린다. 완전히 술에 꼴아버린, 도대체 누구랑 대화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발랄하게 누군가를 큰 소리로 비꼬고 있거나 심하게 절망한 소리로 언어조차 되지 않는 외침을 커다란 폭의 높낮이로 반복한다. 내가 불쾌한 건 소음공해 때문이 아니다. 그 목소리가 거울처럼 느껴지기 때문도 아니다.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저 남자가 지금 불행하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불행한 알코올 중독자가 만취해 헛소리나 절규를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24시간 취해있는 저 남자는 불행하지 않다. 심지어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소리를 내며 곡을 할 때도, 열 받고 처참한 심정인 아내가 저주를 쏟아부을 때도 불행하지 않다. 그냥 취해있는 거다. 비참한 자아 따위는 이미 술에 익사했고, 절규하는 자기 자신을 볼 수 있을 리도 없으니, 저 남자는 불행한 것이 아니라 그냥 취해있는 거다.
 오늘도 난 멍청한 짓을 저질렀고 그걸 만회하려고 맥주 한 캔을 마셨다. 아니, 순서가 반대였는지도 모른다. 별 상관은 없다. 아무튼 마음은 편해지지 않았고 죄악감과 자기혐오가 물질이 되어 날 찔러댔다. 맥주를 더 사야겠다고 생각해서 밖으로 나갔다. 3층을 지나 내려갈 때 그 남자의 혼잣말 같은 것이 304호 철제문 밖으로 새어 나왔다. 뭐가 걱정되기 시작한 건지는 모르겠다. 내 미래에 재활센터가 보였나? 그런데 내가 정말 그런 걸 걱정하기는 하나? 아마 그리 머지않아 304호에 경찰차나 앰뷸런스가 도착하면서 계단 속의 목소리는 끝나버리겠지. 나는 스스로 내가 고통스럽지 않고 비참하지 않고 고독하지 않기만 하다면 미래에 재활센터가 있든 정신병동이 있든, 심지어 영안실이 있든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하려 했다. 또 자신에게 거짓말인지 진실인지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수단인지를 말하고 있다.
 이상한 죄악감 속에서 맥주는 사러 가지 않았다. 주차된 차들 사이에서 터질 것처럼 쿵쾅대는 심장을 움켜쥐고 줄담배를 피웠다. 그리고 돌아와서 목요일에 지하철을 타게 될 일이나―바보 같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요새 하는 일 중 가장 힘든 일이다― 언제 집안에서 싸움이 터질지도 모르는 일이나 의사가 한 충고 같은 건 전부 고의로 무시하고 박하사탕처럼 알프라졸람제를 집어먹었다.
 내가 정말 무서워하는 건 다음과 같은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자신을 관측할 자신을 영구히 잃어버리는 것, 그러니까 이성을, 그러니까 지성을, 그러니까…… 사실 그다지 중요한 것도 내 통제하에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내가 끔찍하게 집착하는 것을 잃어버리는 것 말이다. 어쩌면 너무 간단하게 술에 쓸려나갈지도 모르는 것.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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