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26

기록/생각 2020. 4. 26. 22:37 |

20200426


 하늘을 온통 뒤덮은 것이 구름인지 스모그인지 알 수 없다. 푸른색은 보이지 않는다. 잠에서 깨자마자 아버지에게 꾸지람을 받았다. 도무지 뭘 먹질 않으니 아사하려는 것이냐고 화내는 것 같았다. 어쩐지 화가 나는 듯 수치스러운 듯, 대충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병적으로 식욕이 없으면 담배도 맛이 없는 것인가. 두 모금 빨고 버렸다. 이제 곧 5월이라 길거리에서 겨울 코트를 입고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심지어 반팔을 입고 다니는 남자도 있었다. 어이없는 발상이지만 내가 약한 인간이라는 기분이 들어서 기척을 내지 않으려고 숨듯이 걸었다. 약한 인간, 사실은 맞는 말이지. 여하간 아무 생각 없이 동네를 돌아다니는데 당연하다는 듯 발걸음이 카페에서 멈췄다. 커피를 마셔도 될까요. 이런 물음이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의사들은 내가 커피를 마시면 안 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의사들’이란 의학박사 두 명이다. 내과 의사와 신경정신과 의사. 내과 의사야 내가 위장병 때문에 아무것도 못 먹는 중이니 속 깎는 커피 같은 건 먹지 말라는 것이고, 신경정신과 의사는 아예 카페인 자체가 내 분열증을 악화시키니 완전히 그만 두라는 것이다. 한참 카페 현관 앞에서 멍하니 있다가 뒤에서 누군가가 입장하려고 하면 비켜주는 일을 반복했다. 그래, 알았어, 알았다고, 젠장, 염병할. 각성효과가 있는 허브 티 같은 건 없나. 왜 차에 쓰는 허브들은 하나같이 진정효과 밖에 없는 거야. 신체기능이 진정되면 반드시 끔찍한 우울감이 몰려온다. 게다가 이미 하루에 한주먹씩 삼켜대는 향정신성약물 때문에 생활이 안 될 정도로 항상 멍하고 졸린 상태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카페에 들어갔다. 이 카페는 예전에도 몇 번 와봤는데, 원래 인적 없는 골목에서 장사를 하다가 대단히 성업이었는지 행인이 많은 교차로로 자리를 옮겼다. 커피나 차보다는 차라리 ―그들의 광고 문구에 의하면―프랑스에서 재료를 수입해와 만드는 전문가의 프랑스풍 빵들과 디저트가 주요 상품인 것 같다. 밀가루나 설탕에 프랑스고 한국이고 도대체 무슨 차이인가 싶지만, 그런 광고가 효과가 있으니 지속하는 거겠지.
 주문대 앞에 서서 상당히 머뭇거렸던 것 같다. 여자 종업원은 내가 주문을 했는데 자기가 못 알아들은 거라고 생각했는지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다시 주문해달라고 했다. 나는 결국 쫓기듯이 말했다.
 “얼 그레이 한 잔 주세요.”
 아아, 결국 카페인 음료를 시키고 말았다. 홍차 같은 건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데. 그래도 커피 원두 갈아서 짜낸 것 보다는 위장에 덜 나쁘지 않을까. 근거는 없지만 말이다. 계산을 하니 진동벨을 주었다. 울리면 차를 가지러 오라는 것이다. 나는 진동벨을 들고 최대한 가게 구석에 있는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내가 앉은 자리에서 2m 쯤 떨어진 곳에 젊은 남녀 세 명이 나처럼 진동벨이 울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언가에 대해 발랄하게 떠들고 있다.
 “범준이 자살한대.” 청일점인 남자가 유쾌한 어조로 말했다.
 “왜?” 여자 중 한 명이 물었다.
 “인생이 힘들어서.” 대답하면서 웃었다. “이 의자 딱딱하네. 저기 앉아야지.” 같은 테이블의 마주보고 있던 빈 의자로 옮겨갔다.
 듣고 싶지 않다. 이런 대화는 정말로 듣고 싶지 않다. 순식간에 기분이 가라앉고 헛구역질이 나왔다. 저들은 아마도 대학생일 것으로 보인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으면서도 각자 핸드폰에 몰두해서, ‘범준이’가 자살할 것이라는 둥 자기 자신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얘기를 테이블 위에 내던진다. 내가 아는 ‘인간’의 정의와 개념이 심하게 시대착오적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나는 저런 ‘인간’들을 모른다. 모르는 인간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은 두렵다. 나는 두 손으로 진동벨을 붙잡고 어서 벨이 울리기만을 필사적으로 바랐다.
 벨이 울렸을 때는 이미 옆 테이블의 이상한 담화를 듬뿍 들어버린 뒤였다. 삶의 의욕이란 것이 대가리에 총을 맞은 듯 절망적인 기분이 되었다. 내가 젊은 사람들, 특히 대학생 쯤 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카운터로 가니 왠지 사람이 많아서 “잠시 비켜주시겠어요.”라고 말했다. 목소리가 이상했던 것이 분명하다. 앞에서 길을 가로막고 있던 젊은 여자가 화들짝 놀라면서 어깨를 움츠리고 급하게 길을 비켜주었다. 이미 그런 것에까지 일일이 상처받을 상태가 아니었다. 덩그러니 카운터에 놓여있는 얼 그레이를 가지고 자리로 돌아왔다.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위장병을 앓으면서 식욕이 없어짐과 동시에 미각도 부서졌다. 예전에는 소믈리에 실기시험에서 최고점을 받을 정도로 자부심이 있었던 미각이다. 그러나 별 수 없다. 애당초 무슨 맛과 향기를 기대하고 얼 그레이를 시킨 것도 아니었다. 커피를 시켜서 두 의사들에 대한 죄악감을 짊어지기는 싫었고, 하지만 다리가 세 개밖에 없는 의자 같은 생활이라도 유지하기 위해 카페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단숨에 들이키고 자리를 뜨고 싶었다. 그러나 홍차가 너무 뜨거웠다. 세 명의 대학생은 계속 옆 테이블에서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 남동생도 저 나이 또래 인데, 대학은 가지 않았고, 집에서 군대 갈 준비나 하고 있다. 요새 어머니와 몹시 사이가 안 좋아 눈 뜨자마자 밖으로 나가서 오후 11시쯤에나 돌아온다. 뭘 하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우리 가족의 뭔가에 대해 퍽 기분이 상했는지, 누가 말을 붙여도 대답을 하지 않는다.
 가게를 나와 집으로 향하는 길을 걸었다. 그래, 결국엔 돌아가는 수밖에 없지. 어디 달리 갈 곳이 있겠느냔 말이야. 중얼중얼. 카페에서 모든 기력을 잃어서인지 걷는 속도가 거북이 뺨친다. 담배를 피울까 싶어 주머니를 뒤지다가 지금은 담배 맛도 못 느낀다는 것을 생각해냈다. 그냥 주머니에 손을 넣어둔 채, 갑자기 모습 자체가 푹 꺼질 사람처럼 걸었다.
 집에 도착하니 왜인지 문들이 죄다 닫혀있었다. 아버지는 나한테 화가 난 거지 어머니랑은 문제가 없을 텐데. 아차 싶었다. 아, 젠장, 또 나라는 문젯거리 때문에 부부싸움이라도 했을 공산이 크다.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이젠 아주 존재 자체가 사람들한테 민폐구나.
 점점 분노라는 게 무슨 감정이었는지 잊어가고 있다. 누군가 나에게 화를 내면 가만히 앉아 듣는다. 설령 그것이 부당하다고 해도, 무슨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입을 열면 더 피로하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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