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풍경 묘사에 너무 치중한 도입부가 몰입하는 데에 장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일종의 실험적 의도로 설정된 것이다.
2. 주변에서는 혹평이 난무했다. 재미가 없다는 둥 몰입도가 떨어진다는 둥 심지어는 본 작품에 대한 '존재 당위성'에 의문이 제기되기까지 했다. 사실 이것은 내게 큰 좌절을 안겨주었다. 나는 몰이해라는 괴물에게 물린 느낌이다. 그러나, 모르겠다. 그들의 의견 또한 중요하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들의 '비평'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3. 2파트를 통째로 지워서 엔딩의 느낌에 변주를 주는 것도 고려해볼만 하다.
수몰
1
따뜻한 계절이 오자 밤에도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새벽이 되면 밖을 나돌아 다니는 버릇이 있었는데, 겨울이 이미 다 지나간 덕분에 가벼운 옷차림으로도 산책을 할 수 있게 되어서 그 점이 좋았다. 그리고 지나간 계절보다 확연히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내가 사는 동네는 대로에서 꽤 먼 곳에 위치한, 좁은 골목이 많고 빌라들이 다닥다닥 모여 있는 거주 지역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매일 오전 두 시 경이 되면 산책을 하곤 했다.
나는 골목에 서있었다. 공기 중에서는 축축한 습기의 냄새가 났다. 밤바람은 나긋했고, 사위가 조용하여 마치 무덤 속처럼 깊었다. 가로등이 하나 내 곁에 우뚝 서서 주홍색 빛을 흩뿌리고 있었고, 그 빛이 어둠과 뒤섞여서 무거운 물결처럼 골목길 주변을 비추고 있었다. 골목은 좁았고 경사져있었다. 하늘은 짙은 암청색이었다. 키가 큰 나무 하나가 가지를 하늘로 뻗고 있었다. 그런데 잎이라고는 한 장도 달려있지 않았고 앙상한 가지들은 꽃봉오리 같은 모양을 한 채 엉켜있었다. 그 나무에는 일 년 내내 단 하루도 푸른 잎이 나는 일이 없었다. 적어도 내 기억에는 그랬다. 그 나무는 늘 앙상했고 갈색이었으며 오로지 키만 컸다.
나는 골목을 벗어나 보다 넓은 길로 나왔다. 단독주택들의 담장이 길가에 묵묵히 늘어서있었고 내 옆에는 몇 달 전에 망한 슈퍼마켓이 자리하고 있었다. 간판마저 떨어져나간 마켓 안쪽은 완전히 캄캄했다. 그리고 외벽에는 커다란 빨간 글씨로 <임대>라고 쓰여 있었다. 가로등의 빛 덕분에 겨우 그 글씨를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봄의 밤 특유의 수수한 냄새를 즐기며 계속 걸었다. 길모퉁이에서 밝은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24시간 편의점의 유리로 된 벽 안에서 비쳐 나오는 흰색의 조명이었다. 깊은 밤중에 오직 그곳만이 대낮처럼 밝았지만 역시 밤에게 기가 눌려 그 빛마저도 침묵하고 있었다. 나는 지나가면서 편의점 안을 힐끗 들여다보았다. 손님은 단 한 명도 없었고 계산대에서 유니폼을 입은 점원이 무뚝뚝한 얼굴로 책을 읽고 있었다. 문뜩 나는 그리로 들어가서 점원에게 무어라고든 말을 걸고 싶은 기분이 들었으나 그럴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지나쳐버렸다.
어느 단독주택 정원에 벚나무가 심어져있었다. 나무에는 벚꽃이 잔뜩 피어있었는데 마치 흰색 폭탄이 터진 것 같았다. 벚꽃의 색은 어둠 속에 흰색 물감으로 찍어 놓은 것처럼 특히나 두드러져보였다. 그런데 가까이서 보니 벚꽃 잎 하나하나가 너무 커다랗고 잎의 뿌리 부근에서 기어 올라온 분홍색 선들이 그야말로 불거진 혈관 같아서 혐오스러웠다. 바닥에는 떨어진 벚꽃 잎들이 흩어져있었고 그것들은 이미 낮에 행인들의 발에 밟혀 찢겨지고 더러웠다.
나는 한동안 담장에 마주서서 벚꽃을 구경했는데 남의 생식기관을 그렇게 자세히 관찰한다는 것이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아무도 나에게 뭐라고 지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경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질리자 나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이 보였다. 가볍게 입은 몇 명의 사람들이 가로등 빛 아래의 교차로를 거닐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낮에 보는 것보다 평온해보였고 무엇인가로부터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쪽에서 이따금 자동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공기를 가르고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 말이다. 아무튼 이 시간에는 무엇이든 급할 것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천천히 걸었다. 가끔씩 마주치는 사람들의 인기척이 내 마음속에 어떤 이질적인 파장을 일으켰다. 내가 그 파장을 좋아하는 것인지 불쾌하게 여기는 것인지는 잘 알 수 없었다. 밤이기 때문에 사람의 존재가 더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나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고 강가를 걷고 싶었다.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강까지 가려면 삼십 분 정도 걸어야 했다. 그런데 나는 자동차들이 무서웠고 대로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새벽에도 도로에는 차들이 다녔다. 드물기는 했지만 말이다. 강으로 가려면 차들이 다니는 도로를 여럿 건너야 했다. 그것은 내게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차들은 항상 적막을 깨트리는 역할을 맡고 있었고, 빨랐으며 돌연스러웠다. 나는 갑자기 한 달 전에 길에서 본 장면이 떠올랐다. 나는 가방을 메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는데―때는 오후였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커다란 폭발음이 들렸다. 나는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향했는데 그곳에는 버스 하나가 멈춰서있었다. 버스에 타있던 승객들은 정신없이 바깥으로 빠져나왔고, 버스의 뒤쪽 꽁무니에서는 시커먼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버스에서 내려온 기사는 연기가 새어나오는 버스 뒤쪽 커버를 열어젖혔다. 버스의 내장기관들이 검게 그을려있었고 지옥의 구덩이처럼 끊임없이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길 가던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그것을 구경했다. 나도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버스를 보았다. 얼마 뒤에 경찰차가 경광등을 번쩍이며 도착했다. 차에서는 두 명의 경찰이 내렸다. 그들은 버스기사와 어떤 대화를 했다. 나는 옆에서 그것을 구경하고 있던 어느 남자에게 물었다. <다친 사람은 없대요?> 그는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나도 알 도리가 없었다. 그 뒤에 나는 버스에서 내린 승객들이 머뭇거리다가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해 도시 곳곳으로 흩어지는 것을 보고 나서 집으로 돌아갔다.
이것은 현대의 교통수단이 가진 돌연성에 대한 단적인 예이다. 그래서 나는 낮에, 어딘가 멀리 갈 일이 있을 적에는 어쩔 수 없었지만 지금만큼은 웬만해서는 차들과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것들이 달리는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구석이 뭉근하게 불편해졌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강까지 갈 수 있는 여러 개의 길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려보았다.
땅 끝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어쩐지 나른해졌고 생각하는 것이 귀찮아졌다. 굳이 강에 갈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강에는 여기보다 사람이 많을 것이다. 잠 못 이루고 밖으로 나와 강가를 거니는 도시 사람들 말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자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어둠이 스미어 석유처럼 새까만 강물이 울렁거리며 흐르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밤을 가로지르는 물 흐르는 소리. 가로등이 비추는 곳에는 빛이 반사되어 보석조각처럼 물결이 번뜩거린다. 그런 것들을 상상하며 나는 길 한가운데를 아무 말 없이 맴돌았다. 어둠이 나의 발소리를 덮어주었다.
나는 나의 소심함에 다소 절망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싫어하는 것이나 피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어쩌면 그냥 이대로 강까지 한달음에 달려가거나 혹은 집으로 다시 돌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사람이 내 앞을 스쳐지나갔다. 공기 중에 갑자기 알코올 냄새가 퍼졌다. 나는 멈칫하고 멈춰 서서 그 사람이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길을 따라 걷더니 모퉁이에서 발길을 꺾고 마침내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어쩐지 그러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그가 간 길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순간 바람이 몸에 끼쳤다. 순하고 부드러운 바람이었다. 나는 절망적인 기분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었다.
갑자기 밤안개가 끼었다. 아까부터 공기가 습하다 싶기는 했지만 순식간이었다. 취객은 저편에서 나비 같은 발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안개가 너무 깊어서 머리 위의 가로등 불빛이 물밑바닥에서 올려다보는 달덩어리 같았다. 나는 물속을 걷는 기분으로 취객을 따라갔다. 그는 발걸음이 느렸다. 그래서 의식하지 않고 걷다보면 어느새 간격이 좁혀져있었다. 일부러 발걸음을 늦춰야했다. 너무 가깝게 걸으면 의심을 받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몇 번이나 골목길 모퉁이를 돌았다.
걷다보니 내가 뭘 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나는 취객이 어디로 가는 것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공기는 눅눅했다. 안개 때문에 하늘은 거의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는 내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느꼈다. 마리오네트를 조종하는 손처럼 크고 육중한 숙명이 나를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일종의 포기상태였고 밤안개는 점점 짙어졌다. 그런데 나는 생각을 하다가 그만 취객을 놓쳤다. 그는 마치 육신이 연기로 변해 흩어진 것처럼 안개 속에서 사라졌다. 나는 주인을 잃어버린 개마냥 주춤거렸다. 내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골목에는 아무도 없었고 보이지도 않는 안개 저편에서 자동차들이 달리는 소리만 아득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바람이 부는 소리. 나는 주황색 벽돌로 쌓은 낮은 담장에 손을 짚었다. 벽돌은 공기 중의 습기를 머금어 축축했고 그래서 기분이 나빴다. 나는 익사할 것 같았다. 물줄기가 기도를 훑어 내렸고 얼굴이 피지와 수분으로 끈적거렸다. 어떤 냄새가 났다. 그것은 물의 냄새였다. 땅바닥에서 젖은 시멘트의 냄새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나는 조금 정신이 없었고 절망과 비슷한 것이 정신의 밑바닥에서 슬금슬금 기어 다니고 있었다.
가로등의 불빛이 출렁거렸다.
나는 왔던 길을 돌아가기 시작했다. 내 발걸음은 지쳐있었다. 나는 안개와 액상의 조명 속에서 모퉁이를 돌고 돌고 돌았다. 문뜩 취객 생각을 했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나는 그가 인간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런 황당무계한 생각을 했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에게 조금 놀랐다. 골목길은 복잡했다. 내가 왔던 길을 전부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비스럽게 느껴졌다. 물론 이곳은 내가 사는 동네이지만 지금은 안개와 물결치는 어둠 때문에 침몰한 유령선 안을 걷고 있는 것 같았다. 웬일인지 목이 말랐다. 나무 비슷한 것들이 시야를 스쳐지나갔다. 마침내 나는 아까 지나쳤던 교차로로 나올 수 있었다.
그곳은 골목길보다 밝았고 안개도 조금 걷힌 것 같았다. 점점이 사람들이 길가를 걷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힐끔거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동차들이 도로 위를 달리는 소리가 아까보다 더 크고 선명하게 들렸다. 거리 어딘가에서 왁자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두리번거렸다. 기분 좋게 취한 젊은 친구들이 술집 앞에 모여서 떠들고 있었다. 그들은 큰 목소리로 말했고 종종 웃음을 터트렸다. 그 높고 위악적인 웃음소리를 듣자 나는 그렇게 웃어본지가 얼마나 되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다지 떠오르는 기억이 없었고 친구들에 대한 추억도 낯설기만 했다. 그런데 나는 그들의 형체가 마치 신기루처럼 불분명하게 보였다. 나는 그 웃고 떠드는 환상들을 지나쳐 걸었다. 어쩐지 식은땀이 흘렀고 두려운 기분이 들었다. 그 젊은 친구들이 내게 해코지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이었고 나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벚나무를 지났다. 그것은 여전히 희고 밝았지만 안개 때문에 분명하지 않았다. 나는 편의점도 지나쳤는데 안에 손님이 있는 것 같았다. 유리로 된 벽은 김이 서린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이상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습기 때문에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편의점 안은 제습과 보온이 잘 되어있을 것이다. 그런데 바깥 공기도 그렇게 차갑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벽이었다. 나는 계속 걸었다.
경사진 길을 걸어 올랐다. 죽은 나무는 안개 낀 새벽하늘을 움켜쥔 손아귀처럼 뻗어있었다. 나는 지쳐있었고 잠을 자고 싶었다. 길 끝에는 후줄근한 빌라가 한 채 서있었다. 열 평짜리 반지하가 내 집이었다. 나는 잠수하듯이 계단을 내려갔다. 자물쇠를 풀고 현관문을 열자 눅진한 곰팡이 냄새가 끼쳐왔다. 나는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아버지는 문이 닫힌 방 안에서 자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맨 먼저 화장실로 들어가 수도꼭지 앞에 쭈그리고 앉아 세수를 하기 시작했다. 수돗물과 비누로 얼굴에 번질거리는 습기와 기름을 씻어냈다. 그리고 나는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비척대며 방구석으로 기어들어가 잤다. 지옥으로 도망치는 기분이었다.
자는 동안 비가 내렸다.
나는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마도 자면서 빗소리를 들은 탓이리라. 빗방울 하나하나가 전부 선명하게 눈에 보였다. 그리고 그것들은 살을 엘 듯 차가웠고 양동이로 들이붓는 것처럼 몹시 쏟아져 내렸다. 나는 그 비를 전부 맨몸으로 맞으며 거리를 걷고 있었다. 내 복장은 거지처럼 못 입었고 초라했지만 비참하지는 않았다.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거리가 온통 물웅덩이였다. 나는 철벅거리며 걸었다. 하늘은 전부 비구름에 가려서 낮인지 밤인지도 분간할 수가 없었다. 태양도 달도 없었고 세상은 커다란 하수구였다. 비오는 날의, 흙탕물이 범람하고 더러운 물거품이 튀기는. 그리고 빗물에 젖어서 털이 엉긴 생쥐들도 돌아다녔다. 나는 그 쥐들의 눈을 본 적이 있다. 그것은 깊이를 알 수 없이 새까맣고 길거리의 보석처럼 빛났다.
걷다보니 길가에 사람이 있었는데 그녀는 내가 열두 살 때 모시던 학교선생님이었다. 그녀는 십여 년 전 모습 그대로였고 봄옷을 입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선생님은 비에 젖어 있지 않았다. 우리는 바로 어제 만났던 사람들처럼 인사를 했다. 나는 선생님의 발치에 도롱뇽이 기어가는 것을 보았다. 아니 기어간다기보다는 오히려 물웅덩이 속을 헤엄치고 있었다. 나는 그것에 정신이 빠져서 멍해진 상태였다.
그런데 선생님은 갑자기 나를 꾸짖기 시작했다. 내가 너무 반항적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변명을 하려고 했지만 혀와 입술이 마비된 것처럼 잘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말하는 것조차 힘들어서 끙끙거리는 구십 살 먹은 노인처럼 이상한 억양으로 말을 했다. 그런데 그것은 전혀 변명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내 반항성을 계속 지적했고 나는 야단맞는 열등생처럼 기가 죽었다. 그런데 나는 야단을 맞으면서 한 가지 생각에 열중해 있었다. 그것은 내가 만일 천 년을 살더라도 평생 교사는 되지 못하리라는 생각이었다. 한참을 그런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선생님은 사라져있었다. 나는 그녀가 사라진 이유를 그새 늙어서 죽었기 때문이리라고 추측했다.
나는 나의 학창시절에 대해서 조금 생각을 했다. 비가 내리는 거리에 선 채로 말이다. 그 시절에 내게는 친구들이 있었고 삶이라는 것도 무작정 괴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음울한 아이였다. 당시의 나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 그것이 전부 내 탓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 같다. 심지어는 그 믿음이 과장된 채로 굳어져서 내 손으로 어머니를 죽였다는 가공의 기억까지 만들어 갖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여자를 죽였다는 생각에 젖어있었다.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너무 어렸을 때의 일이었다. 내가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진 채로 유소년기를 보냈다고 생각하자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차가운 빗방울이 피부를 때렸고 나는 어느 담장 밑에 서있었다. 가끔 <우르릉>하는 낮고 깊은 소리가 빗소리 속에 섞여 들려왔다.
비가 도무지 멎질 않았다. 폭우라는 말로도 표현이 어려울 만큼 정말이지 엄청나게 쏟아졌다. 이미 이것은 자연현상이 아니라 일종의 재해로 생각이 될 정도였다. 나는 쏟아지는 물줄기 속에 서있는 기분이었다. 발밑에서 세차게 흐르는 급류는 점점 수위가 높아지고 있었다. 세상이 이대로 침몰해버릴 것 같았다.
몸이 으슬으슬 떨려왔다. 이미 피부의 곳곳이 얼어붙은 듯이 감각이 없었다. 그런데 몸속에서는 피가 끓는 것처럼 심상치 않은 열기가 느껴졌다. 나는 비를 너무 맞아서 그런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병원을 찾아 걷기 시작했다. 꿈속의 거리는 단조로웠고 비구름에 가려진 빛 때문에 모두 엇비슷한 색깔을 하고 있었다. 도시는 그림자로 지어져있었다. 잿빛이었다. 나는 거리의 구석에서 어느 허름하고 좁은 건물을 발견했다. 현관을 열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내가 문을 연 탓에 포도 위를 흐르던 빗물들이 계단을 따라 밑층으로 둑이 터진 것처럼 흘러들어갔다. 나는 텀벙거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조명도 없는 어둡고 축축한 통로를 따라 내려가자 끝에는 문이 또 하나 있었다. 나는 그것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지하실 문 안쪽에 병원이 나타났다. 넓고 천장이 낮은 한 층짜리 병원이었다. 맨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의자가 잔뜩 놓인 대기실이었는데 환자들이 거기에 앉아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말이 없었고 굉장히 조용했다. 나에게는 그들이 살아있는 생물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몸 안 쪽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나는 젖은 몸을 끌어안고 의사를 찾아 병원 안을 헤맸다―그곳에는 간호사나 접수원이 없었다―. 어느 복도 구석에 의사 가운을 입은 남녀 세 명이 모여 있었다. 여자 한 명과 남자 둘이었다. 나는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여의사가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녀에게 덜덜 떨리는 입으로 말을 걸었다. <진찰을 받고 싶은데요…….>
나는 남자는 진찰하지 않아요. 그녀는 똑 부러지는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나는 다소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알겠다고 말했다. 다른 두 사람의 의사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이 특히 눈에 띄었는데 그는 창공처럼 푸른 눈과 스포츠 컷으로 깎은 짧은 금발머리를 갖고 있는 독일인이었다. 나는 예전에 그와 대화를 나누었던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로 다가가 병세를 좀 봐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하며 내 젖은 양 어깨를 붙잡더니 자신의 한 손을 내 이마에 대었다. <열이 심하군요.> 그리고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것을 꺼내서 내 팔에 붙였다. 시험지의 색깔이 짙은 핏빛으로 물들어갔다. 어쩐지 벚꽃 잎이 떠오르는 색이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그리고 바이러스 반응도 있네요.>
그리고서 그는 어떤 방으로 들어가더니 종이로 된 컵에 열댓 개쯤 되는 알약을 담아가지고 돌아왔다. 그의 다른 한 손에는 물이 담긴 컵이 들려있었다. 그는 나에게 알약이 든 컵과 물 컵을 건네며 삼키라고 말했다. 나는 군말 없이 그가 시키는 대로 그 수많은 약을 물과 함께 집어삼켰다. 가지각색의 알약들이 식도를 지나 위장으로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들이 내 뱃속에서 달가닥거렸고 천천히 녹아 혈관 속을 흘렀다. 그런데 약을 먹고 난 이후부터 나는 내가 현재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주변의 모든 것들이 톡 건드리기만 하면 부서져버릴 나비의 날개처럼 취약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얼마간 비틀거리다가 갑자기 잠에서 깨어났다.
오후였다. 방안의 끈적끈적한 공기가 얼굴에 달라붙어왔다. 주변은 조금 어두컴컴했다. 형광등은 켜있지 않았고 창문으로부터도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집 안에는 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아마 오전에 일을 나갔을 것이었다. 나는 방금 전까지 보고 있었던 꿈이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분간하기가 어려워서 어리둥절했다. 비에 젖은 옷의 차가운 감촉이 여전히 피부에 남아있었고 내 위장에는 아까 삼킨 약들이 바글바글하게 들어있을 것 같았다. 나는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꿈을 꾸고 나면 언제나 죽음이 그리웠다.
지금이 몇 시인지 알고 싶었다. 나는 벽시계를 보았다. 다섯 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공기가 무거웠다.
나는 일어나서 거실을 조금 돌아다녔다. 여전히 정신이 멍하고 뭔가 육중한 것에 눌려있는 것 같았다. 앉은뱅이 식탁 위에 아버지의 메모가 붙어있었다. <밥 차려 먹어라>라고 적혀있었다. 나는 입맛이 없었고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바깥 공기를 쐬고 싶다고 생각했다. 화장실로 가서 세수를 하며 남은 잠을 털어낸 뒤 나는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갔다.
하늘이 낮았고 공기 중에 검푸른 환상이 팔랑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비가 그친지 얼마나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방에 물웅덩이가 고여 있었다. 진한 물 냄새가 후각에 밀어닥쳤다. 젖은 풀과 들짐승들의 냄새와 하늘에서 맴도는 비구름의 냄새가 폭포처럼 내게로 쏟아졌다. 아직 해가 저물지는 않았지만 짙은 구름과 습기 때문에 거의 저녁이나 다름없었다. 빛이 형태를 잃고 흐물거리는 연기처럼 퍼져있었다.
나는 내 시야가 뒤집혀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고 강을 보러 가야했다. 새벽부터 그 욕망이 강하게 남아있었다. 지금 내 정신에는 기름이 끼어있었다. 그런데 강으로 가면, 그 물결의 힘줄과 깊고 차가운 강물에 모든 더러운 기름과 때들을 씻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내가 미친 것은 아닐까? 나는 갑자기 내가 마지막으로 <무언가>를 해본지가 무척이나 오래되었다는 점을 떠올렸다. 예를 들자면 나는 책을 읽지도 못했다. 왜냐하면 도저히 책을 읽는 것에 집중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무언가를 하려고하면, 내 머릿속에는 엄청난 수의 작고 징그러운 날벌레들이 있는데, 그것들이 동시에 윙윙거리며 날아다니고 두개골 안쪽에서 뇌수에 머리를 박아대는 것이었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이미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짐승처럼 깊이 자며 꿈속을 헤매거나 혹은 혼란한 정신으로 캄캄한 가운데 산책을 하는 것뿐이었다.
<음, 그런데 내가 미쳤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대수란 말인가?> 나는 대범한 말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문뜩 어머니의 얼굴을 기억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녀의 생김새를 떠올려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대신 흐리멍덩한 원망의 표정만이 슬그머니 나타날 뿐이었다. 나는 포기했다.
내리막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나는 강을 보러 가야했다. 이번에는 자동차나 대로도 날 막을 수 없었다. 그런데 골목을 내려가다 보니 뭔가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뒤돌아서 골목길을 살펴보았다. 뭔가가 없었다. 그러나 확실하진 않았다……. 나는 어제의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어제와 다른 점을 찾아냈는데, 그것은 바로 나무였다. 나무가 없었다. 그 죽은 나무 말이다. 거리로 나가는 골목길에 심어진 앙상한, 마녀의 손아귀처럼 비죽비죽한 갈색 나무. 그것이 없었다. 나는 원래 그 나무가 있던 자리로 걸어갔다. 나무는 밑동만 남아있었고 그 옆에 있는 담장 안쪽에 토막 난 나무줄기가 정갈하게 쌓여있었다. 내가 자는 동안 나무 주인이 그것을 잘라버린 것이었다. 아! 내가 가볍게 감탄했다. 아마도 주인은 이곳에 새로운 나무를 심으리라. 어리고 싱싱한 것으로 말이다. 그리고 나는 가던 걸음을 재촉했다.
벚나무와 교차로를 지나 골목을 빠져나왔다. 여기저기 행인이 많았고 자동차들은 줄지어 달리고 있었다. 내가 사는 동네는 비교적 높은 곳에 위치해있었기 때문에 대로로 나가려면 기다란 내리막길을 통하거나 혹은 급하게 경사가 진 높은 계단을 내려가야 했다. 나는 시멘트로 된 계단을 밟고 내려갔는데 내 발과 균형 감각이란 언제나 신뢰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당장이라도 넘어질 것처럼 비틀비틀하며, 어쩌면 이대로 굴러 떨어져서 급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찼다. 그러나 나는 죽지 않았고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마구 달려대는 자동차들의 속도와 소리에 놀라워하며 건널목을 건넜다. 하늘은 어두컴컴했지만 사람이 많았다. 나는 그들이 나를 노려보고 있다는 환각 때문에 고개를 숙인 채로 걸었다. 나는 거대한 교회를 지났고 더러운 세차장도 지났다. 점점 더 낮은 지역으로 향했다. 그리고 하천을 하나 건넜는데 그것은 강은 아니었다. 좁고 지저분한 개천이었다. 나는 다리를 건넜다. 다리를 건너는 중에 교복을 입은 학생들 무리를 보았는데 그들은 자전거를 타고 있었고 네 명이었다. 그들은 어리고 발랄했으며 어떤 본능적인 확신에 차있는 것처럼 보여서 그 점이 내게는 낯설었고 나를 주눅 들게 했다.
구름 낀 하늘이 나를 짓눌러댔다.
강에 거의 다 왔을 무렵 갑자기 버스 하나가 내 옆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데 그 버스가 바퀴로 물웅덩이를 밟는 바람에 나는 꼼짝없이 물세례를 받게 됐다.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막으려고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나는 깜짝 놀랐고 얼떨떨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안됐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옷이 젖었고 차가웠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서있었다. 빗물은 마르면 고약한 냄새가 난다. 집에 돌아가서 옷을 세탁해야한다고 생각하자 짜증이 치밀었고 귀찮았다. 그래서 나는 그냥 젖은 채로 가던 길을 계속 갔다. 강이 멀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남자가 내 앞에서 멈춰 섰다. 그는 양복 차림이었고 오십 살은 되어보였다. 그는 이상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남자의 갑작스러운 출연에 놀라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십 초 가량 그러고 있었다. 나는 이 남자가 도대체 내게 무얼 바라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외치는 것이었다.
당신이로군!
뭐요?
당신이라고! 어젯밤에 날 뒤쫓아 왔던 사람!
그제야 나는 그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남자는 새벽에 내가 쫓았던 취객이었다. 그는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가 거리에서 나를 보고 말을 건 것이었다. 나는 당황해서 뭐라고 말을 떼야할지 몰랐다. 어쩌면 그가 나를 신고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십시오, 나는 수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우연히 가는 길이 같았던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는 산책을 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 새벽에? 한 시간 동안이나?
당신은 그때 술에 취해 있었을 텐데도 기억력이 비상하군요.
내가 술을 마셨었던 것은 어떻게 알았소?
날 지나쳐갈 때 술 냄새가 났었으니까요.
나는 당신이 강도인 줄 알고 기회를 보다가 재빨리 뛰었지. 나는 지금 당신 팔을 붙잡고 경찰서로 갈 수도 있소. 왜냐하면 지금은 퇴근시간이고 주변에는 행인들도 많으니까 나는 겁날 것이 없지.
제발 그러지 마세요. 나는 정말로 수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 왜 나를 따라왔는지 설명해보시오.
그렇다면…… 사실 가는 길이 같았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계속하시오.
이미 말씀 드린 대로 나는 산책을 하고 있었는데 강에 가고 싶었고―실제로 나는 지금 강으로 가는 중입니다― 골목을 헤매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차들이 다니는 도로를 무서워해서 선뜻 강까지 갈 마음이 들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건 일종의 패배나 마찬가지인 것이니까요……. 그래서 방황하던 와중에 당신이 날 지나쳐간 것입니다!
그게 무슨 이유가 된단 말이오?
나는 그저 집에 들어가지 않을 구실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목적으로 하고 골목을 싸돌아다닌 것에 지나지 않아요!
설명을 들어도 여전히 당신이 수상스럽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소.
그 점은 나도 그렇게 생각되었다. 어떻게 설명하든 내가 일반적이고 정당한 행위를 했다는 얘기는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다소 자포자기하여 물었다.
그렇다면 나를 신고하실 겁니까?
처음에는 그럴 생각이었지만 당신과 대화를 나눠보니 생각이 바뀌었소. 당신은 강도질을 할 만큼 대담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보이는군. 그 말투나, 머뭇거리는 제스처 따위가 말이오.
아! 그것은 지당한 말씀입니다. 실제로 나는 요 몇 년간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범죄행위는 더더욱요!
그래서 나는 당신이 나를 안심시켜주기만 한다면 당신을 놔주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오.
안심이라니요? 어떻게 내가 당신을 안심시킬 수 있지요?
당신이 거짓말쟁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지.
남자의 말에 나는 한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면서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그에게 나의 정직성을 증명할 수 있을까?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행인들이 길거리에 서서 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우리를 가벼운 호기심으로 바라보며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아까 말씀 드렸다시피 나는 이제부터 강으로 갈 생각입니다.
그래서?
그리고 나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기껏해야 빗물에 젖은 이 옷뿐이고…… 그래서 당신에게 내 정직을 어떻게 증명해야할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정직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몇 가지 이야기를 할 수는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해보시오.
나에게는 아버지가 한 분 계십니다. 그는 기계수리공입니다. 사십 년 동안이나 그 일만 해서 가족을 먹여살려왔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무슨 일을 하십니까?
나는 회계사요.
그렇군요. 회계사라! 그렇다면 당신은 아마도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겠군요.
그렇소. 나는 K대를 나왔지.
우리 아버지는 대학을 나오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내심 내가 좋은 대학에 가기를 원하시곤 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사실 훌륭한 학생이었거든요. 적어도 학교를 그만두기 전까지는 말이죠. 나는 어느 날 갑자기 학교를 그만뒀고 내게는 그것을 말릴 어머니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 줄곧 나는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나의 전부입니다…….
남자는 내 말을 듣고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표정에서 순간 몰이해 비슷한 것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서 가슴이 쓰려왔고 그 늙은 남자를 마음껏 껴안아주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 사실이 너무나 슬퍼서 나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내가 우는 것을 보고 남자는 놀라서 소리쳤다.
왜 우는 거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만 가봐도 되겠습니까? 나는 이제 강으로 가야합니다……. 부디 나를 신고하지는 말아주십시오!
그리고서 나는 눈물을 훔치며 마구잡이로 길을 걷기 시작했다. 남자는 내 뒤에서 당황하여 굳어있었다. 나는 그로부터 멀어졌다. 계속해서 멀어졌다. 한참이나 걸으면서 울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상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길을 가다가 다섯 살 쯤 되어 보이는 작은 남자아이가 자기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있는 장면을 보았는데 그 장면 때문에 나는 마침내 소리까지 내며 울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계속 걸었다. 강가에 거의 다 와서야 눈물이 멈췄다. 나는 빨갛게 부은 눈가를 소매로 닦고 훌쩍이며 걸음을 재촉했다.
하늘은 갈수록 어두워졌다. 해가 지고 있었다. 나는 마침내 강가에 도착했다. 쏴아 거리는 물소리가 사방을 가득 메웠다. 공기 중의 습기가 짙어졌고, 아까부터 보이던 검푸른 환상도 더욱 많아졌다. 가로등들이 켜졌다. 저녁이 된 것이다. 나는 홀린 것처럼 강가로 걸어갔다. 시선 끝에서 시커먼 물살이 번뜩거리며 흐르고 있었다.
강변에는 사람이 많았다. 따뜻해진 날씨 때문일 것이다. 한가로이 거니는 가족들이나 반바지를 입고 뛰는, 운동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뭔가 묵직한 것이 나를 치고 지나갔다. 나는 충격 때문에 뒷걸음질을 쳤다. 어느 건장한 남자 하나가 뛰고 있었는데 내가 못보고 그만 부딪힌 것이었다. 그는 뛰어가면서 내게 사나운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똑바로 보고 다녀, 정신 나간 놈아!> 하고 말이다. 나는 갑자기 밀쳐진 덕분에 놀라고 당황해서 가만히 서있었다. 그러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남자가 뛰어간 방향을 향해 화가 난 것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만일 내게 양심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바람에 주변을 거닐던 사람들이 전부 내 쪽으로 고개를 향했다. 나는 보라는 듯이 화난 목소리로 소리를 쳤지만 사실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저 무어라고든 할 말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물론 남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나는 기분이 이상했다. 소리는 질러놨지만 겁을 먹은 것 같았다.
방금 일어난 사건 때문에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처럼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지만 딱히 이렇다 할 분노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나는 조금 좌절하고 있었다. 내 마음속에서는 나를 밀치고 지나간 그 남자가 부럽다는 괴상한 생각마저 고개를 들고 있었다. 나는 너무나 역겨웠고 정신이 없었다. 그토록 갈망하던 강에 도착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바라던 그 무엇도 구하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실망감과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초조해진 마음으로 혼자 뭐라고 <기억도 하지 못할> 말들을 씨부렁거리며 강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다리를 향해 걸어 올라갔다.
나는 다리의 한가운데까지 올라갔다. 보행자만이 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다리여서 차들은 없었다. 그런데 다리를 이루는 콘크리트나 강철 케이블에 온갖 요란한 조명이나 장식 따위가 달려있었다. 이것은 새로운 시장이 선출되고 나서 생긴 것들이었는데, 아무래도 도시 미화의 목적으로 설치된 것으로 보였다. 강변에도 갖가지 해괴한 현대미술품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어둡고 음습한 저녁에 이러한 모던한 조명과 장식들은 기괴하게만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내 눈에 그것들은 일종의 묘석처럼 보였다…….
만약에 내가 정갈해질 수 있다면! 나는 되뇌었다. 나는 중유처럼 까맣고 무겁게 물결치는 강물에 눈을 처박은 채로 되뇌었다. 나는 다리의 난간을 붙잡고 있었고 가끔 흰 거품을 일으키는 강물의 소용돌이를 향해 고개를 기울이고 있었다. 나는 이상한 공상에 빠져있었다. 그런데 나는 너무 정신이 혼란했기 때문에 지금도 꿈을 꾸는 것인지 아닌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공상인지 아니면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인지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축축하게 젖은 옷이 피부에 바짝 들러붙어있었고 비 냄새를 머금은 바람은 얼굴에 엉기었다. 가끔 강 표면에서 검은색 그림자가 울컥거리며 솟았다가 사라졌다. 나는 흥분하기 시작했고 희열인지 절망인지 알 수 없는 발작적인 감정에 사로잡혀있었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망가져왔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 깨닫기도 전에 강물을 향해 뛰어내렸다.
2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내 몸은 완전히 젖어있었고 나는 물을 토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처음 보는 사람이 내 뺨을 때리고 있었다. 나는 버석버석한 땅바닥에 누워있었는데 하늘이 전부 눈에 들어왔다. 비구름은 어느새 개고 없었다. 별이 빛나고 있었다. 검푸른 빛으로 말끔한 하늘 속에서 별들이 새하얀 광선을 뿜으며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한 번 더 내 뺨을 때리려던 손을 붙잡아 제지하며 그 사람을 보았다. 역시 생판 모르는 사람이었다. 내가 눈을 뜬 것을 보고 그가 입을 열었다.
이럴 수가, 괜찮아요?
뭐라고요?
나는 시체가 떠내려 온 줄 알았는데, 살아있군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왜 강물에 실려 온 거예요?
다시 말해줘요.
왜 강에 빠진 거냐고요.
내 발로 뛰어들었어요.
맙소사, 당신 자살하려고 했군요.
뭐라고요? 아녜요.
아니라니?
죽으려고 한 게 아니라고요. 왜 그런 말을 하지?
하지만 스스로 뛰어들었다고 했잖아요.
맞아요. 내가 강에 뛰어들었지.
그런데 자살하려고 한 게 아니라고요?
네. 나는 그냥…….
그냥?
모르겠어요. 아무튼 난 죽으려고 한 게 아니에요. 나는 살고 싶어요.
살고 싶다니?
나는 그냥 살고 싶다고요.
맙소사.
…….
이런, 당신 미친 사람이군요.
그리고 그는 무슨 끔찍스러운 벌레라도 본 것처럼 인상을 찡그리더니 일어서서 뒷걸음질 쳤다. 그 사람은 경악한 표정으로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넋을 놓은 채로 그와 마주보았다. 손발이 몹시 차갑고 무감각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머리맡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기침을 했다. 추웠다. 나를 쳐다보던 사람은 <미친 사람이야.>라고 계속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는 도망치듯이 가버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