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글/에세이 2021. 4. 8. 23:13 |

봄날


 겨울이 지나가고, 오전부터 차차 햇볕이 따뜻해지면 아무래도 그 온기가 반가울 수밖에 없다. 스스로 겨울을 좋아한다고, 마음이 차분해지는 데는 겨울 공기가 제일이라고 믿고 있더라도 그렇다. 겨울 공기나 냄새가 정신에 약이 되는 것이 사실이라도 역시 그 계절은 신체적으로 괴롭다. 추운 날씨는 보일러가 제대로 안 도는 방부터 시작하여 밖에서 담배 피울 자유도 빼앗아가는 등 사람을 곤란하게 한다.
 그러다 봄날이 오면 따뜻한 날씨는 곧장 반가운 마음을 들게 한다. 행인들은 한 꺼풀씩 겉옷을 벗고 여기저기 노란색, 분홍색 꽃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담배 두 대를 연달아 피워도 손이 곱지 않으니 새삼 웃음까지 나온다. 겨우내 그저 회색조였던 동네에 색깔이 입혀지면, 이렇게 내몰린 동네에 사는 불쾌한 이웃들마저, 그들도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엉뚱한 생각까지 드는 것이다.
 그러한 엉뚱한 생각에 장단이라도 맞추듯 얼마 전 아래층에 누군가 이사를 왔다. 원래 살던 세입자는 그 앞집의 알코올중독 가족이 하도 일 년 내내 소란이라 이사를 갔다는 게 빌라 사람들의 추측이다. 바로 그 집으로, 봄날이 한창일 때 새로운 가족이 들어온 것이다. 집 앞 골목에 서서 담배 피우며 그들이 이사 오는 모습을 보았다. 젊은 부부였다. 즉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별수 없는 일이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누구네 아들’이 아니고서야 젊은 부부가 이런 동네 말고 어디서 집을 구할까. 그들도 봄이라고 새로운 시작을 하는 거다. 앞으로 아래층에서 그들에게 벌어지게 될 일이라는 것은, 정말로 내 손 밖의 될 대로 될 일이다. 빨간 원색의 승용차를 타고 온 젊은 부부의 얼굴을 보니 그들은 부동산에서 그놈의 앞집 식구에 대해 듣지 못한 것처럼 생각됐다. 아니면 듣긴 들었으나 다른 방도가 없기에 저런 표정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이건 내가 간섭할 문제는 아니다. 그저 날이 따뜻하고 지구가 한 바퀴 돌아서 기분이 좋다. 이사 온 가족이 집을 꾸민다고 드릴이며 망치를 휘둘러대는 소리가 나도 짜증이 솟지 않는다. 아마 언제가 되건, 누가 먼저 시작하건 아래층에선 큰소리가 몇 번 나겠지. 어쩌면 또 경찰이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쩐지 봄이 끝나기 전에는 그런 일이 없을 것 같다. 나는 따듯한 볕 아래서 담배 태우는 나날이 즐겁고, 누군가가 도망가고 사라지는 일은 겨울 즈음에나 일어날 일이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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