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해도 실패해도 인생은 계속되며 내일은 또 온다. 시간은 오직 미래만을 향하여 향일성 식물처럼 뻗어나가고, 그 절대적인 굴레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죽음으로 투신하는 것 하나 뿐이다. 나는 어떤가? 세계의 온갖 우중충하고 날카로운 색깔들 사이에서 나는 늘 죽음을, 즉 해방을, 마음 편한 포기를 꿈꿔왔다. 포기라는 것은 정말로 매력적인 것이다. 퇴폐주의자가 태양을 향해 눈을 향하지 않는 것처럼, 포기는 늪처럼 끈적끈적하고 깊은 안심을 사람에게 선물해준다. 고뇌하지 않게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고통 받는 사람에게는 무엇보다도 달콤하게 생각되는 독주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점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고 있다. 내 정신은 너무도 쉽게 상처입고 예민해지기 때문이다.
 굉장히 오랜 시간동안 나는 포기와 부정의 경계선에 서서 양극점에 두 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어떤 때에 내 영혼은 모든 의식들을 내버린 채 삶을 포기하기를 원했고, 또 어떤 때에는 누구보다 명철하게 눈을 뜨고 가시나무 사이에 궁극적인 질문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기를 원했다. 나는 경계선 상에서 유난히도 모순의 감정에 휩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모든 인간적인 희망들이 부정당하고 내가 안락하게 눈감을 수 있는 자리마저도 세상의 적의 넘치는 손아귀에 빼앗겨버린 지금, 나는 더 이상 그 경계선 위에서 쭈뼛거리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되었다. 퍽이나 잔혹하게도, 실패는 내게서 포기의 가능성마저도 앗아가 버렸다. 그것은 내 선천적인 반항아적 기질과 깊은 관계가 있다. 다행스럽게도 아직 나는 발을 빼앗겨도 앞으로 기어갈 의지─어쩌면 아집에 지나지 않는 감정일지도 모르지만─ 정도는 갖고 있는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 나는 내 정신의 밑동이 이미 오래전에 썩어 없어졌을 것이라고 믿어왔다. 그래서 언제고간에 무엇인가가 나를 밀친다면,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몸체 째로 뒤로 넘어져 절망의 바닥에 닿아 산산조각이 나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의외롭게도 내게는 다리와 발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나는 나를 밀친 무심한 의도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내 두개골과 가슴 속은 반항의 감정으로 하얗게 되었다. 그것은 병든 증오와는 별개의 것이었다. 이상한 이야기지만 그 반항은 참으로 상쾌하고 선명했다. 마치 어느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걸작을 구상하며 캔버스를 마주하고 있는 화가의 눈동자에서 번뜩이는 순백의 광기처럼, 그것은 온통 메마른 고통으로 가득하기는 했지만 병질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게 나는 미래에 관여하지 않는 생명을 본 것이다.
 나는 실패했다. 그것은 분명 내가 선택할 수도 있었던 수많은 가능성들을 지워버렸지만, 오히려 다른 여지들이 사라지고 살아있는 인간이 고를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인 두 가지 선택만이 남게 되자 나는 내가 죽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자발적 죽음은─적어도 내 상황에선─ 관념의 부르주아적 상태에서만 발생할 수 있는 선택이었던 것이다. 온갖 요란한 불꽃과 눈가림과 혼란을 위한 장막들이 걷어내진, 극도로 가난한 세계에서는 삶밖에 남아있는 것이 없다. 오직 삶 뿐만으로 고독하게 존재하는 삶.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 홀로 돋아난 인간존재. 그 이외의 것들은 전부 부수적인 의식에 지나지 않는다. 식물은 자살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이다.
 나는 내가 자살할 수 있을 때까지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사랑하는 것과 내가 열망하는 것. 태양을 향해 천공으로 향하는 해바라기처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삶을 집어삼키며 그것들을 향해 기는 것밖에 없다. 여전히 나의 세계에는 고통이 해변가의 모래알처럼 흘러넘치고 나는 손톱만한 희망마저 거부할 정도로 헐벗었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그렇게 하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고통은 차라리 그 필연성의 증명이나 다름없다.
 나는 산다. 살 것이다. 사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나는 죽을 수 있을 때까지 살 것이고, 시선 저 끝에서 태양처럼 번쩍이며 섬광을 발하는 그것을 향해 뼈와 근육으로 된 가지를 뻗을 것이다. 이것은 긍정도 아니고 선택도 아니며 희망은 더더욱 아니다. 이것은 부정이자 반항인 동시에 실존에 구속당한 인간조건이 만들어낸 유일한 결과이며, <그것> 이외의 모든 것이 목이 잘렸다는 점에서는 절망과도 그다지 다를 것이 없다. 아무튼지 분명한 것은, 또 한 번의 내일이 오면 나는 기염을 토하며 그것을 깨물어 삼키듯이 살아 내리라는 사실이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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