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래, 보라. 어디에 진리가 있으며 어디에 길이 있는가? 신념과 미덕과 믿음과 소명으로 이루어진 황금으로 된 길은 어디에 있었는가? 우리들의 발이 향해야할 곳을 찾아 헤매고 있다면 우선 우리 자신이 어떤 땅에서, 어느 하늘 아래에서 태어났는지를 알아야한다. 우리의 정신을 뿌옇게 가리고 있는 희망이라는 이름의 안개를 걷어내야 한다. 오, 희망은 실재할지도 모른다. 물론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가 되지 않는 미래를 가리키는 단어이고, 우리들이 스스로를 위해 머리위에 걸어놓은 당나귀의 당근 같은 것이다. 우리가 만들어내고 스스로에게 부여한 관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말도록 하자! 그것은 세계에서 온 것이 아니다.
 반복하건데 우선 우리가 태어난 세계를 명철한 눈으로 주시해야한다. 관찰해야하는 것은 우리가 태어난 이 세계다. 이 땅에서 피어나는 현상이며 사라지는 생명이자 떠오르는 시간들이다. 어느 굉장한 허무주의자가 지어놓은 거대한 관념의 체제가 아니다. 현상의 너머에 존재한다는 플라톤의 이데아계도 아니다. 태양의 하얀 빛살과 대지를 뒤덮은 콘크리트빛 인공 구조물, 인간의 누리끼리한 가죽과 나뭇잎의 초록빛깔에 눈을 두어야한다. 우리와 함께 태어난 형제의 눈 안쪽에 담겨 있는 새까만 맹목성과 필멸의 운명을 있는 그대로 맛봐야한다. 매일 같이 자라는 손톱을 보라. 그것은 손가락의 관절 안쪽에서부터 밀려나와 점점 길어지고, 우리는 하얗게 밀려난 부분들을 깎아내어 버린다. 세포는 늙고 죽어 피부위에 시체가 산처럼 쌓인다. 세계는 생명과 죽음으로만 이루어져있다.
 만약 당신이 인간의 소관을 벗어난 영역과 희망사항이나 다름없는 은총에 대해 말할 셈이라면 당장 입을 다물도록 하라. 당신은 인간이며 우리들도 인간이다. 그것은 정신이 자의식을 가지기 시작한 날부터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인간의 시각과 인간의 촉각밖에 알지 못하며 인간의 언어로 인간의 영혼을 논하는 인간의 철학을 한다. 상정된 초현상은 흥미를 끌 수 있을지는 모르나 진실에 대한 인간의 탐구에 답을 내주지는 못한다. 진실! 무엇을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태어나자마자 우리에게 휘둘러진 단 하나의 실마리이자 화살표가 그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은 죽음이고 필멸이다. 유한한 존재인 우리가 자신만만하게 말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진실이 바로 죽음이다.
 내가 허무주의자라고 부르는 이들이 비웃음을 한껏 머금은 채 소리를 지르는 것이 들린다! 「하-하! 당신은 표면적인 것밖에 보지 못하는 편협한 자로군! 사물에는 현상보다 깊은 본질적 의미가 있으며 삶과 죽음 또한 표상적인 것일 뿐, 그 속에는 마땅히 영원이라는 축복이 있다네!」 뭐라고? 도대체 그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현상보다 깊은 본질, 의미, 심지어 영원과 축복이라니! 그들이 내게 ‘표면적인 것밖에 보지 못’한다고 손가락질할 때 나는 그야말로 경악을 금치 못한다. 우리가 <삶> 이외의 삶을 살아본 적이 있거나 이 <세상>이 아닌 세상과 만난 적이 있거나 <영원>한 존재였던 적이 있던가? 우리가 죽음 너머를 내다보거나 논리초월적 논리를 증명하거나 영원의 무게를 재는데 성공했던 적이 있던가? 세상은 곧 세상이며 삶은 곧 삶이고 죽음은 곧 죽음이다. 존재란 <고작> 그만큼의 존재다. 물론 죽음 뒤의 세계가 있을 수도 있다. 영혼이 영원을 살아갈 수도 있다. 어느 절대성이 우리에게 존재의 소명과 삶의 의미를 부여해주었을 수도 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이 <없다>고 단언하지 못한다. 단언할 만큼 오만할 줄을 모른다. 왜냐하면 몇 번이나 말했듯이 우리는 유한한 존재이고 모순과 오류로 살아가는 정신이며 죽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령 그런 것들이 실재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삶의 인간>인 우리에게는―적어도 우리가 살아있고, 또 인간인 이상―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죽기 때문이다.

2.
 왜냐하면 우리가 죽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삶>에 한정된다. 죽음은 존재의 종언이고 모든 가치와 의미들이 절멸하는 장소다. <나>를 구성하는 것은 뇌와 척수와 호르몬과 정신과 영혼과 그 외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혹은 앞으로도 알지 못할 온갖 화학적이고 물리학적인 동시에 추상적이며 영적인 요소들이다. 죽음은 그것들을 전부 종말로 밀어 넣거나, 최소한 그 중 일부라도 <나>에게서 떼어내 썩어 없어지게 만든다.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은 아닐지언정 적어도 <나>의 끝인 것만은 의심할 바가 없다. 그리고 <나>의 끝은 동시에 모든 것의 끝이다.
 우리들의 단 하나뿐인 세계에서는 아무것도 심판받지 못하며, 그 무엇도 취향 이외의 것으로는 판단되지 않는다. <인간의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관념들을 부정해야 비로소 우리는 세상을 긍정한다. 이 황폐한 대지에는 애초부터 신념도 미덕도 믿음도 소명도 없었다. 이곳에는 그 어떠한 길도 없고 우리는 광막한 사막 한 가운데에 난데없이 떨어져 내린 것이다. 말하자면 신은 부정당했다. 그것은 곧 모든 사물들에게 의미를 내려주는 절대적인 가치의 척도가 부정당했다는 뜻이다. 신은 필멸이라는 자연의 법칙에 의해 <우리의 정신 속>에서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절대성은 이미 허구의 단어가 된지 오래다.
 고로 이 땅에는 법이 없다. 규칙도 질서도 도덕도 없다. 모든 것에 대한 <최후의 심판>이란 삶의 인간에게는 나약한 존재를 향해 으르렁거리는 공갈협박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들을 옭아매는 것은 왜곡된 합리주의에서 태어난 암묵적 협의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을 위한 합리주의가 근거라고 말하기도 낯 뜨거울 만큼 너무도 이율배반적이고 시대와 상황에 따라 파도처럼 출렁인다. 그것의 뿌리는 터무니없이 빈약하다. 심지어 그 <암묵적 협의>라는 것은 어떤 돌발적인 소수자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편의도 제공하지 못하고 오히려 고통과 억압이 되기만 하는 경우도 많은 것이다.
 그러나 기만적 형법에 대한 그들의 숭배를 비난하는 것은 이쯤에서 그치도록 하자. 우리는 결론으로 넘어가야한다.

3.
 그래, 보라. 어디에 진리가 있으며 어디에 길이 있는가? 없다. 어디에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죽음을 보증으로 두고 완전한 정신의 자유에 눈이 뜨였다. 자유란 비인간적인 것이다. 그것은 명철한 것이지만 아름답지는 않다. 그것을 씹어 삼키는 순간 모든 <희망의 노예>들이 우리를 향해 돌팔매질을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도로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도로 토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세계의 맹목성과 허무와 그리고 사멸을 인지하고 있다. 모든 것이 죽는다면 그 어떤 행위도 구속당하지 않는다. 언제 구둣발 소리와 함께 찾아올지 모르는 사형집행자 앞에서 우리는 완벽하게 개인이며 눈을 뜬 의식이다. 그 순간 우리의 의식은 희망의 노예들이 말하는, 소위 <범죄자의 의식>이 된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우리는 단지 실존의 눈앞을 가리고 있는 독안개와 역겨운 기만들을 걷어내고 싶었을 뿐이다. 사막 위에는 법률도 표지판도 없다. 그저 작열하는 태양과 끝없이 펼쳐진 모래밭뿐이다. 우리는 태양 아래서 외롭고 공허하며, 치명적으로 자유롭고 열광적이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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