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맑은 날에

글/에세이 2023. 3. 30. 17:10 |

어느 맑은 날에


 2주간 내리 위장병 때문에 고생을 했다. 며칠 약을 챙겨 먹고, 어느 날 아침 일어나보니 구역감과 위산 역류는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다만 잠에서 깨어날 때 나는 무언가가 아주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확히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는 당장 알 수 없었다. 끙끙대며 이불에서 일어나 물을 한 잔 마셨다. 그리고 한동안 거실과 방을 오고 가며 이 괴기스러운 이질감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작업용 책상 위에 마구잡이로 쌓인 책 세 권이 별 의미도 없이 눈에 들어왔는데, 맨 밑으로부터 페터 한트케, 베르톨트 브레히트, 허먼 멜빌의 순서로 책이 쌓여있었다.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허먼 멜빌의 책을 맨 밑에 두고 그 위에 페터 한트케를 두었으며 맨 위에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집을 올려놓았다. 나는 이 작업에서 약간의 위안을 느꼈다. ‘잘못된’ 무언가가 다소는 제자리를 찾았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속이 헛헛한 듯이, 더러는 백일몽을 꾸는 듯이 나는 도저히 제 컨디션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음!” 나는 괜스레 목소리를 내보았다. 아마도 지금 상황이 꿈인지 아닌지 확인하려는 목적에서 그랬던 것이리라. 그리고 나는 내 오른손을 들여다보았는데, 아주 기겁하지는 않았지만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황색 피부밑에 튀어나온 관절과 뼈, 그리고 불거진 핏줄 따위가 전에 없던 강렬한 형상으로 내 눈에 박혀버린 것이다. 내 손이 원래 이렇게 생겼던가? 나는 거의 30초가량 손을 앞뒤로 돌려가며 유심히 관찰했다. 크게 달라진 점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그보다도 이렇게까지 아무런 변화가 없는 ‘내’ 손에 대해 놀라움을 느낀 까닭을 도무지 알 수가 없어 오히려 싱숭생숭한 기분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때 나는 내 미국인 친구가 해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는 대학생 때 친구들과 함께 소위 ‘매직머쉬룸’이라는 것을 섭취한 적이 있는데, 환각이 사라지고 나자 몹시 이상한 부작용이 몇 달이나 지속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 부작용이란 자신의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사물들이 너무도 강렬하게, 그리고 치명적일 정도로 분명하게 자신들의 존재성을 부각하고 있어서 도무지 눈을 뜨고서는 휴식도 취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아마 지금의 나와 비슷한 기분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하며 나는 또다시 집안을 서성거렸다. 서성거리기엔 그다지 넓은 집도 아니지만, 여하튼 나는 방문과 화장실 문 따위를 전부 열어보며 세계로부터 완전히 이방인이 된 기분을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핸드폰을 일주일 넘게 꺼두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위장병을 앓느라 도무지 기력이 없어 누군가가 전화를 걸어오거나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것에 일일이 반응하기도 귀찮았던 것이다. 지금 핸드폰 전원을 켜면 아마 부재중 전화가 열 몇 통은 쌓여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핸드폰은 그냥 꺼두기로 했다. 나중에 활력이 좀 돌아오면 그때 자초지종을 설명할 수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냉장고 문을 5번 정도 열였다가 다시 닫았다. 여전히 식욕이 없었다.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같은 동 303호에 사는 아저씨가 마침 볕을 쬐러 나온 것인지 인사를 해왔다. 그와 만나는 것은 약 2달 만이었다. 나는 그가 왜 이런 대낮에 집에 있는 것인지 궁금해하면서, 오랜만이라고 인사를 한 뒤, 한 대 피우겠느냐고 담뱃갑을 내밀었다.
 아니오, 이젠 끊었어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그는 티셔츠의 목덜미를 슬쩍 내리면서 목에 난 수술 자국을 보여주었다. 이젠 평생 끊어야겠죠.
 저런, 큰일이었겠네요.
 뜬금없지만 그제야 나는 오늘이 일요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쩐지 길에 행인들이 평소보다 많다 싶었다.
 햇빛이 좋네요. 내가 말했다.
 이젠 봄이죠.
 나는 어쩐지 없던 기력마저 다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담배는 다 탔고, 그에게 인사를 한 뒤 계단을 올라 집으로 돌아갔다. 다시 안방 문을 열어보니 아까는 발견하지 못했던 동생이 침대 구석에 온몸을 쑤셔 넣은 듯한 자세로 잠들어있었다. 오후 4시였다. 나는 동생이 그대로 자도록 내버려 두고 안방 문을 닫았다. 내 방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한 가지 생각 때문에 우울해졌다. 곧 마감을 맞춰야 할 원고를 위장병 때문에 2주 내내 내팽개쳐두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것이다. 날아간 2주를 되돌릴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대책 없이 게으른 기분이 되었다. 나는 작업용 책상에 앉아 브레히트의 시를 몇 편 읽었다. 다시 덮어놓으며 “흠!” 하고 또 괜한 소리를 냈다. 삼월이 끝나가고 있었고 내게는 아무런 계획도 떠오르지 않았다.
 창밖에는 날씨가 퍽 괜찮았다. 그러고 보니 6월에 친구가 결혼식을 올린다고 했다. 요새는 축의금으로 5만 원만 냈다가는 괜히 나중에 뒷담화 거리나 된다고, 그런 얘기를 TV뉴스에선가 친구로부터였던가 주워들은 기억이 났다. 나는 멍한 채로 의자 위에 앉아있었다. 6월이 되기 전에 무슨 좋은 일이라도 생길 테지. 중얼거리면서 나는 이상하게 앉은 자세 때문에 골반이 몹시 아팠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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