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초안)

글/에세이 2022. 2. 10. 22:49 |

여행


 24살 때, 나는 텍사스주 오데사에서 3주 정도를 머물렀다. 그때까지 내게 여행이란 특별한 의미나 목적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어쩌다 돈이 생기면 현실에서 도망치듯, 평소 생활에서 가장 먼 곳으로 떠나버리는 나쁜 버릇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오데사에서 있었던 우연한 만남 이후로 나의 여행은 차례차례 나름의 체계를 가지기 시작했다.
 오데사의 가을 하늘은 눈에 띄게 높고 투명했다. 그 밑에는 색채 없는 건물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웅크린 것처럼 땅을 뒤덮고 있었다. 하늘과 땅이 유난히 멀어 보이는 곳이었다. 당시 나는 그곳에서 친구 율라이아의 집에 얹혀 지내고 있었다. 이렇다 할 이유는 없었다. 마침 직장을 그만두었고, 그 2년간 월급을 받아 저금한, 많지도 적지도 않은 돈이 수중에 있었다. 그리고 전전해에 한국에서 만나 친구가 되었던 율라이아가 놀러 오지 않겠느냐고 가볍게 말을 꺼냈으니, 바로 비행기 표를 끊었던 것이다.
 그전에도 몇 번 미국 남부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마다 이토록 큰 땅덩어리에 갈 곳도 구경할 것도 없다는 사실에 놀랐었는데, 오데사는 더욱 볼 것이 없는 동네였다. 주변 수십 킬로미터에 몰개성한 주택들만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거리에는 행인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곳 주민들은 아침이 되면 차를 타고 다른 도시로 출근했다가, 저녁에는 돌아와 잠만 자는 것 같았다.
 첫 주부터 하는 일 없이 지냈다. 정오 즈음 되면 잠에서 깨어, 씻고 밖으로 나갔다. 친구가 준 예비열쇠를 주머니에 넣고 줄담배를 피우며 마냥 걸었다. 행인도 없어 한산한 거리를 자동차들이 하나둘씩 달렸다. 가끔은 큰 길가의 벤치에 앉아 몇 시간이고 책을 읽었다. 그 동네에서는 늘 담배를 물고 다녔던 것 같다. 공화당이 득세하는 주라서 담뱃값이 싼 것이 다행이었다. 오후 9시가 되면 돌아와 혼자 술을 마시고, 친구와 잡담을 하다 잠들었다. 그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렇게 한 주를 보내니 당연하다는 듯 생활이 불균형해지기 시작했다. 잠에서 깨어나는 시간이 점점 늦어졌다. 저녁에 술을 마셔도 잠이 오지 않게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지금 생각하면 친구에게 굉장히 걱정을 끼쳤다―서(西)오데사의 도심을 한밤중에 슬렁슬렁 돌아다니고 있었다. 당시 나는 그런 행동이 위험하다는 것을 자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친구에게 폐를 끼치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새벽마다 인적도 없는 시가지를 헤매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밤이었다. 층이 낮은 아파트가 늘어선 거리를 꺾어 들어가는데, 골목 저편에서 붉은 불빛이 작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인공적인 빛이 아니라 드럼통에서 타고 있는 장작불인 듯했다. 그리고 곧바로 누군가가 이쪽을 향해 무슨 말을 외쳤다. 나이든 여자 목소리였다. 남부 사투리가 강하게 섞인 말투로 그녀는 ‘거기 아시아 사람, 뭘 하고 있어?’ 라고 내게 묻고 있었다.
 달리 생각할 것도 없이 그녀는 노숙자가 분명했다. 그런데 당시의 나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지, 자리에서 벗어나기는커녕 정직하게 ‘산책을 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호기심 때문이었을까, 나는 불꽃이 일렁이는 드럼통 쪽으로 걸어갔다. 4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백인 여자였다. 온갖 잡동사니를 잔뜩 실어놓은 쇼핑카트를 드럼통 옆에 세워놓은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부자연스럽게 웃었다. 관광객이 밤중에 다운타운을 돌아다니는 것은 위험하다고 충고했다. 그리고 느닷없이 ‘핫도그를 먹겠느냐’고 물었다. 가까이 다가가서야 안 것인데 그녀는 드럼통에 피워놓은 불로 핫도그를 굽고 있었다.
 지금 나는 그때의 자신을 이해하기 힘들다. 대체 무슨 담력이었는지, 좋다고 대답한 나는 그녀와 핫도그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 판단과 행동이 당시의 나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던 것 같다. 그녀의 이름은 ‘카를라’였다. 내 이름을 말해주었으나 익숙하지 않은 음절들이었는지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나는 카를라에게 담배를 한 개비 권했다. 그녀는 굉장히 즐겁게 담배를 피우며, 미국에서 노숙자로 사는 것이 어떤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카를라는 곧 닥쳐올 겨울을 대비해 서쪽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본격적으로 추워지기 전에, 무조건 서쪽으로 가야만 한다고 말했다. 오데사에는 그녀의 여동생이 사는데, 여동생은 ‘멀쩡하게 사는’ 사람이어서 다소 도움을 받을 수 있었으나 잠자리까지 빌리지는 못했다고 했다.
 설명을 듣고 있자니 나는 카를라의 주변인들이 그녀를 어떤 사람으로 판단하고 있는지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당장 위험할 일이야 없겠지만 아마 그녀에게 정신질환이나 중독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10분 정도 이야기를 듣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식을 나눠주어서 고맙다고, 20달러 지폐를 하나 건넸다. 그것이 잘한 일인지 아닌지는 지금에 와서도 알 수가 없다. 노숙자에게 돈을 주는 문제에 대해 미국은 유난히 논란이 심한 곳이다. 그러나 당시의 내 입장과 상황을 생각해보면 특별히 더 나은 선택도 없었으리라. 그리고 무엇보다 카를라는 진심으로―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고마워했다.
 나는 친구의 집까지 아무 문제 없이 돌아왔다. 그리고 계피 향이 나는 싸구려 위스키를 몇 잔 마시고 잠이 들었다.
 며칠 뒤 토요일 아침, 친구와 나는 식사를 하러 근처의 팬케이크 식당을 찾았다. 창가 자리에 앉아 음식을 주문했다. 친구는 자신이 돈만 더 벌 수 있다면 텍사스를 떠날 것이라는 등의 이야기를 했다. 그때 누군가가 커다란 통유리 창을 두드렸다. 돌아보니 창 너머에서 카를라가 반갑다는 듯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조금 놀랐으나, 역시 반가운 마음에 손을 마주 흔들었다. 그녀의 뒤쪽에는 아무 옷이나 마구 겹쳐 입은 사람들이 서넛 거리에 앉아있었다. 내가 손을 흔드는 것을 보더니 그녀는 만족한 듯 그 사람들 사이로 돌아갔다.
 다시 고개를 돌리자 친구는 놀란 표정이었다. 지금은 그의 심정을 백분 이해할 수 있지만, 당시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친구는 떨떠름한 얼굴로 농담인 양 말했다. 자신은 반년을 여기서 살았어도 친구가 없는데 너는 벌써 길에서 친구를 만들었느냐고 말이다.
 이것이 텍사스주 오데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쓰다 보니 율라이아에게 대단히 폐를 끼쳤구나 싶다. 지금 그는 인디애나에 살고 있고 관계가 소원해진 지 2년 정도 되었다. 카를라는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그해 겨울이 오기 전에 충분히 서쪽으로 이동하는 일에 성공했는지, 아직 살아있을지, 확인할 방도도 없다. 다만 그날, 밤거리에서 그녀를 만난 뒤부터, 내게는 여행에서 빠트릴 수 없는 한 가지 주제가 생겼다. 예를 들자면, 텍사스에서 아칸소까지 스무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이동할 때, 사정사정하며 몇 달러를 빌리더니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사라져버린 인도계 소년, 캘리포니아에서 몇 번이나 마주쳐 함께 저녁을 먹었던 수염이 새하얀 흑인 노숙자 조나단, 북인도에서 가는 곳마다 떼로 몰려오던 헐벗은 아이들, 그리고 용도를 알 수 없는 잡스러운 수공예품을 기를 쓰며 팔려고 하지만 그냥 주는 돈은 못 받겠다던 네팔의 잡상인 등.
 이처럼 외국을 갈 때마다 가장 눈에 들어오고 인상에 남는 것은 거리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어느 공항에 내려도 유명한 관광지나 유적보다는, 시장 골목과 상업 지역으로 먼저 발걸음이 향한다. 그런 버릇이 시작된 것은 카를라와 만난 뒤부터다.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만남이었다. 그러나 나의 여행은 그때부터 서서히 의미가 명확해졌다. 나는 박물관이나 고건물을 보기 위해 떠나지 않는다. 낯선 거리에서 사는 낯선 사람들 사이에 섞이고 싶어 떠난다.
 사람들은 호텔이나 관광버스가 아니라 거리에 있다. 이방인이 되어 스며들면 그 거리는 가끔 고향보다도 친숙하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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