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피

글/에세이 2021. 9. 9. 23:05 |

길 위의 피


 나는 손안에서 담뱃갑을 돌리며 시멘트 위의 핏자국을 보고 있었다. 약속 시간에는 이미 늦었다. 그러나 방금 내가 보았던 일은 그저 지나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만나기로 한 친구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준다면 지각쯤은 간단히 용서해줄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내가 서 있는 자리는 방금까지만 해도 여자 둘의 새된 비명과 울음소리, 경찰과 구경꾼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로 소란스러웠다.
 30분 전, 나는 역을 향해 걷고 있었고 중간에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다. 단지를 질러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기 때문이었다. 20미터 정도 앞에 개를 데리고 아파트 단지를 산책하는 사람이 각각 둘 있었다. 나와 같은 방향으로 걷는 한 명, 반대 방향에서 오는 한 명이 막 마주치기 직전이었다. 내 쪽에서 뒷모습만 보이는 여자는 애견용 목줄을 쥐고 있었다. 줄 끝에는 작고 하얀 소형견이 있었다. 반대쪽에서 오는 사람은 이제 30대나 되었을까 싶은 젊은 여자였다. 그녀가 쥔 줄은 털이 누런빛이고 주둥이가 길쭉한, 커다란 개의 목에 걸려있었다.
 추위가 막 물러가기 시작하는 3월의 쾌적한 오후였다. 하늘은 맑았고 아직 기울지 않은 태양이 얼굴과 외투 위로 따사로운 빛을 뿌리고 있었다. 나는 곧 친구들과 식사를 하며 술도 한잔 마실 예정으로, 들뜬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때 앞에 가던 작은 개가 날카롭게 짖기 시작했다. 그 새되고 히스테릭한 짖는 소리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대형견을 향한 것이었다. 개들의 심리 같은 것은 알지 못하지만, 보아하니 자기보다 몇 배나 큰 동족을 보고 겁을 집어먹은 것 같았다. 깡깡댄다고 해야 할지 깽깽댄다고 해야 할지, 여하간 어지간히도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짖었다. 개 주인은 목줄을 잡아당기며 개에게 그만두라고, 사람 말로 어르고 있었다. 커다란 놈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짖는 녀석을 쳐다볼 뿐, 짖지도 으르렁거리지도 않았다. 그러니 나는 그 직후 일어난 일에 대해,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는 것도 딱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계속 성가시게 짖어대는 작은 놈에게 느닷없이 커다란 놈이 덤벼든 것이다. 10살짜리 사내아이만 한 몸집이 용수철처럼 튀어나가는 바람에 개 주인은 목줄을 놓쳐버렸다. 그 커다랗고 누런 개는 순식간에 작은 개의 배를 힘껏 물더니 도리질을 치며 양옆으로 마구 흔들어댔다. 개 주인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달려들어 멈출 생각은 없는 듯했다. 하기야 10초도 되지 않아 벌써 사방에 선혈이 튀고, 하얗고 작던 개는 새빨갛게 물들어버렸으니, 아무리 자신의 개라고 해도 선뜻 손을 대기 힘든 광경이기는 했다. 나는 10미터 정도 간격을 두고서 그 모습을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 자신이 키우던 개에게 겁을 집어먹은 주인들이 우스꽝스럽다는 생각도 들었으나 도무지 우스운 상황은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명을 들은 아파트 경비원이 달려오고, 사람들이 모여들고, 이젠 구경꾼들까지 함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60대 중반의 나이로 보이는 경비원은 어떻게든 개들을 떼어놓으려고―사실 개들끼리 맞붙은 상황도 아니고 일방적인 도살이었지만― 애를 쓰고 있었으나, 이미 피를 본 누런 개는 아주 끝장을 낼 기세였다.
 누군가의 신고로 경찰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커다란 녀석이 붉은 덩어리를 한쪽에 뱉어놓고도 한참이 지난 뒤였다. 시멘트 위에 피가 흥건하게 고였고 개 주인들의 울음소리, 비명, 넋이 나간듯한 흐느낌까지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거기다가 구경꾼들까지 한몫하여 집단으로 알아듣기 힘든 고성을 내고 있었다. 커다란 개 쪽의 주인을 책망하는 욕설, 어떡해, 어떡해, 하며 상황을 더욱 어수선하게 만드는 황망한 목소리들…….
 결국 순찰차가 주인 둘과 주둥이가 피투성이가 된 개,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가늠이 되지 않는 작은 개를 데리고 현장을 떠났다. 그러자 구경꾼들은 한동안 서로 의견을 말하고, 대화를 나누며 수런수런하다가 약속이라도 한 듯 제 갈 길을 갔다. 순찰차가 떠나고 5분도 되지 않아 자리에는 피 웅덩이를 치우는 경비원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경비원마저 청소를 마치고 자리를 뜨자 마침내 나는 일이 벌어졌던 자리에 가까이 다가갔다. 여태껏 나는 멀찍이서 상황을 관망하고만 있었던 것이다. 벌써 스며들어버린 핏자국이 시멘트 바닥에 얼룩처럼 들러붙어 있었다. 몹시 담배가 피우고 싶었으나 남의 아파트 단지에서 그럴 수는 없어, 공연히 손으로 담뱃갑만 돌려댔다. 5분 가량, 머릿속의 난잡한 생각들을 정리하며 나는 넋이 나간 듯 서 있었다. ‘짐승’과 ‘동물’이라는 단어가 서로 위치를 바꿔가며 온갖 문장들 속에 배치되었다가 사라지곤 했다.
 시계를 확인하자 슬슬 출발하지 않으면 친구들에게 정말로 호되게 욕을 들을 시간이었다. 나는 친구 중 한 명에게 전화를 걸어, 조금 늦겠다고 전하면서 바쁘게 역으로 향했다. 25분 즈음 후에 나는 의정부 시내의 호프집에서 친구들과 만나고 있었다.
 서로 얼큰히 술이 들어갔을 무렵 나는 오늘 보았던 끔찍하고 흥미로운 광경을 친구들에게 이야기했다. 일이 일어난 순서에 따라 이해하기 쉽도록, 그리고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을 수 있도록 간략하면서도 완급을 주어 설명했다. 친구들의 반응은 미간을 찌푸리거나 이입하여 화를 내는 등 다양했으나, 의견은 전부 비슷했다. 그 여자는 왜 목줄을 놓쳤느냐, 왜 곧바로 달려들어 멈추지 않았느냐, 그러게 큰 개들은 입마개를 채워야 한다, 등등.
 아니, 그게 아니야, 우리 곁의 짐승들 이야기를 한 거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정정하려 했으나 대화는 이미 다른 주제로 넘어가 있었다. 용훈이는 공무원 시험 벌써 두 번째 아니냐, 승호는 요즘 주식 한다더라, 종인이는 대기업까지 들어가더니 도대체 왜 그만두고 나왔냐, 이러쿵저러쿵……. 이런 대화가 되어버리면 그다지 할 말이 없다. 나는 이빨을 상대의 배에 깊숙이 박아넣고 양옆으로 흔들어대던, 그 커다랗고 누런 개에 대해 가만히 생각했다. 순식간에 피투성이 헝겊처럼 되어버린 작은 개에 대해서도 말이다. 그러나 친구들에게는 나는 웃는 얼굴로 저들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만 보였을 것이다.
 그 누런 개는 상대에게 덤벼들기 전까지 아무런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대형견들이 으레 그러하듯 늠름하면서도 온순한 표정으로 서 있었을 뿐이다. 나는 다시 한번 짐승과 동물이라는 단어에 대해, 집착하듯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어쩐지 그것들은 그래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길들여있더라도 이따금 마구잡이여도 괜찮다. 동물이니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니, 그래야만 동물이다. 누군가 건배를 외치기에 나도 맥주잔을 들었다.
 술에 취한 친구들의 표정을 돌아보았다. 새삼 술에 취해도 우리는 동물처럼 될 수 없다는 사실이 이상스럽게 느껴졌다. 이곳은 참 안전하구나, 술집마저도 안전하구나, 다행이고 당연하고 조금은 슬프다.
 그날 밤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며, 술기운 속에서 잡스러운 생각만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었을 때, 털 없는 짐승이 아니라 진짜 짐승이 되어있으면 좋겠다, 송곳니도 있고 발톱도 있으며 마구잡이로 죽을 수도 있는 짐승,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되나, 카프카에게 기도하면 되는 일인가. 그러면서 집까지 돌아와 이불 위에 쓰러져 잠들었다.
 한주 뒤 비가 올 때까지 검은 핏자국은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었다.

Posted by Lim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