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모금의 물

글/에세이 2013. 9. 28. 22:49 |
한 모금의 물


 누구에게나 평생 짊어지고 가는 고민이 있듯이 내게도 오랜 시간동안 고민해온 것이 있었다. 그 고민의 해방구를 찾기 위해서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스크를 관찰하며 살아온 것 같다. 말인즉슨, 나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그들이 과연 나의 동족인지를 의심하며 샅샅이 수색하고 다녔던 것이다. 문제의 시발점은 굉장히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의 나는 과거에 대해서 여러 가지 입장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다소 감상주의적으로 그것을 평가할 수도 있고, 아니면 아주 냉철하게, 혹은 ―날 담당하고 있는 의사의 힘을 빌려―정신분석학적으로, 아니면 마치 타인의 삶인 것처럼 무관심하게, 반대로 원망과 증오를 가득 담아서……. 그러나 내가 무슨 입장을 선택하든 사실 자체는 그다지 변하는 것이 없다. 그것이 나의 유전적 특성 때문이든 내 피에 함유된 감상주의자의 소질 때문이든 나의 위대하시고도 절망적인 어머니 때문이든, 나는 철저하게 고독했다. 어린 시절에 고독하다는 것은 여러 가지 비극적인 결과를 낳는다. 그중 대표적인 것을 몇 가지 꼽아보자면, 우선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게 된 이후에도 여전히 고독의 자손들이 나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 둘째로 진심으로 인간의 손을 잡을 수 없게 되는 것, 셋째로 끝없는 갈증에 아직까지도 시달리게 되는 것. 사실 첫 번째 예와 세 번째 예는 거의 비슷한 얘기라고 할 수 있다. <고독의 자손>들 중 하나가 바로 갈증이고, 또 동시에 선천적으로 지고 태어나는 그 정신의 갈증이 인간을 고독하게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갈증. 감히 말 하건데, 나는 태양의 빛살과 인간들의 따스한 피를 얻어 마시며 살고 있는 <갈증>이다. 어떤 실존주의 철학자가 모든 인간이 다 갈증의 현상이라고 말한 것 같기도 하다―나중에 다시 생각해보니 이런 말을 한 철학자는 없었다. 아무래도 앙드레 지드나 알베르 까뮈, 장 폴 사르트르 등의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한 말이 내 머릿속에서 멋대로 뒤섞이고 압축되어 만들어진 문장 같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내 주변의 인물들은 그다지 그렇지 않았다. 너무도 추상적이고 정체모를 갈증에 시달리며, 사막을 기어 다니는 개의 눈동자로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은 나 혼자뿐인 것 같았다―이러한 발상은 어린아이 특유의 고립된 세계관에게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다른 아이들이나 어른들은 존재의 근원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처절한, 그 죽어가는 새된 비명을 듣지 못하고 유유자적 세계를 맛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무엇에 혀를 대든 바싹 마른 모래의 절망적인 맛밖에 보지 못했고, 무엇인지도 모를, 허공을 떠다니는 <절대>를 갈구하며 나 자신의 생명을 물어뜯고 있었다. 여기서 나의 고민은 시작되었다. 나는 왜 남들과 다른가? 나는 왜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들으며, 남들이 알지 못하는 맛으로 입안을 가득 채우고 살아가는가. 내 안에는 의심이 생겼다. 저들이 과연 나의 동족인가에 대한……. 나는 인간이 무엇인지 정의내릴 수 없었다. 굳이 선을 긋자면 <저들>과 <나>만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들의 거대한, 60억이라는 숫자로 무장한 집단 속에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저들은 과연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저들이 인간이라면, 나는 인간인 것일까?: 이것이 나의 질문이었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증오가 나의 뿌리 위에 쌓이기 시작했다.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물론 나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수많은 이질적 무리 속에 외톨박이로 내버려진 존재가 자기혐오와 의구심 끝에 도달하는 것은 결국 증오이다. 사람들에게 전쟁이 <우리>와 <저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었다면, 나에게 있어서 전쟁은 <나>와 <그들 모두> 사이에서 24시간 발생하고 있는 절대적이고 영원한 것이었다. 곧 나는 증오의 아들이 되었고 사람들이 소위 악이라고 부르는 것이 나의 감각을 잠식해나갔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실낱같은 기대에 매달린 나의 탐구는 지속되었다. 나의 동족을 찾는 것! 처음에 나는 죽은 사람들부터 시작했다. 그렇다, 죽은 사람들. 인류에게는 문자라는 훌륭한 발명품이 있었다. 나에게는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의 머릿수보다 몇 억 배는 되는 죽은 사람들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단이 있었다. 나는 걸신들린 것처럼 죽은 사람들의 책들을 읽어나갔다. 수도 없이 많은 예술가가 있었다. 수도 없이 많은 철학가가 있었고, 성자라 불리는 사람들, 혹은 희대의 악인이라 불리는 사람들, 그리고 또 무자비하게 죽어간 도저히 셀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몇 년에 걸친 독서 끝에 과거에 죽었던 누군가는 나와 흡사한―아! 나는 도저히 <같은>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는 없다. 그것이 너무도 오만한 단어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 위대한 철학자, 예술가들과 내가 <같은> 갈증을 가지고 있다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겠는가?― 갈증을 가지고 평생을 무엇인지도 모를 무언가를 갈구하며 살아가다가, 결국에는 그 <무언가>를 구했는지 구하지 못했는지도 확신하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이것은 내게 커다란 위안이자 동시에 공포였다. 내가 속할 수 있는 종류의 인간들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들의 결말은 거의 대부분이 너무도 참담한 것이었다. 해소되지 않는 갈증 끝에는 거의 열이면 아홉 광기가 아가리를 벌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목마른 사람들은 펜과 붓으로 무장하고 눈을 가린 채, 거의 자살적인 달음박질로 광기의 아가리 안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그리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조리 다 죽었다(정말이다). 나도 그런 운명에 묶여있단 말인가? 정말로 나는 이 갈증을 평생 해소하지 못하는 것이란 말인가. 아무튼 간에, 죽은 사람들에 대한 검토를 마친 뒤에 나는 살아있는 사람들 사이로 끼어들어갔다. 이제 <갈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해졌다. 나는 그 갈증을 짊어 메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찾아 헤맸다. 그런 사람들은 그리 흔하지는 않았다. 고백하자면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그러한 사람들을 열 명도 만나지 못했다. 아무튼 존재하기는 존재했다. 나는 그들에게 접근해 나의 서투른 사교기술로 그들의 지인, 혹은 친구가 되었다. 그들 대부분은 예술가였고, 몇 명은 성직자이거나 혹은 아무 곳에도 쓸 일 없는 백수―백수라는 표현은 너무 과격한가? 그렇다면 내 어린 시절의 독서경험을 이용해 그들을 <골방철학자>라고 부르도록 하자―였다. 그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자신의 갈증을 해소시켜줄 단 한 모금의 시원한 물을 찾아 살아가는 일에 골몰하고 있었다. 나로 말하자면 내 방식은 문학이었다. 수십 번 정도 절망 끝에 몰린 뒤에는 갈증을 해소하려고 발악하지 않는 방법을 문학 위에 차용하게 되었지만……. 여하간 그들도 답을 모르는 것은 확실했다. 나도, 그들도, 그저 무작위성에 한쪽 발을 걸친 채 살아갈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동지가 생긴 것만으로도, 내게 <인간>이라는 타이틀이 부여된 것만으로도 다소 만족했다. 그 뒤의 삶은 활자와 더불어 파도와 폭풍우에 휩쓸리는 반복적인 절망과 희열의 길이었다. 어느 날은 나의 심장을 산산이 깨뜨리는 미(美)의 노래를 듣고 마침내 살길을 찾았다며 희희거리다가, 어느 날은 결국 이 잔인한 갈증이 나의 목을 물어뜯고야마는구나 하고 눈물샘에서 알코올을 방울방울 흘리며 더러운 길바닥에 나뒹구는, 그러한 날들이었다.
 나는 아직도 나의 갈증을 해소해줄 <그것>이 무엇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그것은 위대함인가? 아름다움인가? 성스러움인가? 명예인가? 사랑인가? 여전히 내 이빨 사이에는 유아기의 욕구불만을 상징하는 담배꽁초가 물려있고, 술을 먹기 위해 돈을 벌며, 나는 사회적으로 불구인 절름발이다. 그러나 여하 간에 나는 사는 것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한 모금의 시원한 물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서는, 죽고자 해도 죽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Posted by Lim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