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도의 여인

글/시 2012. 5. 24. 22:54 |
적도의 여인


해와 달이 서로 닮아
분간하지 못하게 되었을 적에
봄의 악마가
내 눈꺼풀 사이에
한 장의 그림을 심어두고 갔다

나는 미지근한 독액 웅덩이 속에 죄수의 몸을 담그고
쥐약을 먹은 들개처럼
비몽사몽 하여
그림에 온 정신을 빠트리고 있었다

아, 나는 적도의 여인을 보았네!
나는 곱디고운 모래를 온통 적신 그녀의
붉은 피도 보았고
꿈같은 태양의 조각이 땀으로 방울져 흐르는
그녀의 갈색 피부도 보았네

그리고 강철 같은 빛이 번뜩였다

적도의 여인이여, 그대 악마의 벌건 혓바닥이자
소금과 돌로 깎아낸 성(城)이자
내 생명을 산산조각 내어
죽여 버리는
황홀한 비수(匕首)여

나는 영혼 밑바닥에서부터 그녀를 증오했다
그러나 나의 하얗고 덩어리진 몸은
사랑해마지않는 적도의 여인에게
살해당하고 싶어
개처럼 헐떡이고
생쥐처럼 울었다

징을세게후려친것처럼농밀하고멀리퍼지는어떤소리가사방을가득메웠다

내 눈동자는 소리를 질렀지
꿈 없는 잠이 하늘을 뒤덮고
안식 없는 죽음이 내 가슴을 물들였지
나는 잘린 동맥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처럼 끓었지

정신을 차려보니 세계가 내게서 그림을 빼앗아간 뒤였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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