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의 봄

글/에세이 2012. 4. 5. 23:55 |
 봄이 왔는데도 땅 위는 메말랐고 황량하다. 하늘에는 여전히 겨울의 색깔. 나는 사물들의 광야에서 생명의 달콤한 살점을 그린다.
 도서관 창가에서 내다보는 풍경에는 녹색이 없다. 벌써 4월이 되었는데도 거리 위에서 나부끼는 바람은 봄이 왔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철사 조형물처럼 뒤틀린 채 비죽비죽 솟은 나무들에는 새싹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잿빛으로 황폐하다. 나는 그 나무가 뿌리박은 토지를 본다. 일 제곱미터가 채 되지 않을 법한 좁은 땅이다. 그 흙 바깥으로는 전부 보도블록이 땅을 틀어막고 있다. 저렇듯 생명의 숨구멍이 철통처럼 막혀있으니 나무도 싹을 틔울 마음이 들지 않을 듯도 싶다. 무엇보다도 공기가 차다. 공기 중에서는 겨울의 냄새도 봄의 냄새도 아닌, 어떤 메마르고 정체된 듯한 냄새가 난다. 가끔 비가 오기 직전에는 습기 탓인지 진한 봄의 냄새가, 숲의 정액 냄새 같은 것이 나기도 하지만 그때뿐이다. 공기 중에서는 더 이상 시베리아의 투명하고 영혼을 설레게 하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 꽉 막힌 냉장고 안에 들어앉아있는 느낌이다. 하늘은 비현실적으로 푸르고 가끔 뜯어진 천 조각 같은, 작고 하얀 구름이 두어 개씩 흐르지만 어딘가 실존하는 풍경이 아닌 것 같다. 그것은 마치 색연필로 빈틈없이 칠해놓은 파란 종잇장 같다. 말하자면 거대한 하늘 그림이 우리들의 머리 위를 뒤덮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하늘에서는 높이도 거리감도 느껴지지가 않는다.
 나는 지나간 겨울을 회상한다. 그 완벽하게 투명했던 하늘과, 살을 엘 정도로 차가운 공기가 행인들의 눈빛을 날카롭게 하고 어쩐지 정신의 꼭짓점을 뿌듯하게 만들던 그 계절을 말이다. 그 냉기에는 어떤 인간미 없는 희망이 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추위 속에서도 무언가를 찾아내고야 말리라는, 자신의 세계 속에 빠져서 흥분하여 외치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런데 겨울의 그 초인간적인 냄새는 이미 지나가고 없다. 다시 일 년이 흘러야만 우리는 그 냄새를 맡을 수 있으리라.
 지금 이 덜 된 봄. 나는 이파리 없는 나무들의 숲으로 눈길을 향한다. 지난 가을부터 썩기 시작하여 이제 흙이 된 낙엽들과 나무의 갈색 몸통들이 하나가 되어 거대한 가시덩굴 따위로 보인다. 사람들은 가끔 말없이 내 옆을 지나간다. 나는 이 모호한 추위와, 유리창으로 가로막힌 세계와 나 사이에서 어떤 절망을 발견한다! 왜인지 “저” 세계는 더는 움직이지 않을 것만 같다. 이제 불타 재가 되는 일도, 얼어서 영원히 죽는 일도 없이 언제까지고 이 기묘한 상태를 지속할 것만 같은 것이다. 문뜩 어떤 불안이 뱀처럼 내 심장을 휘감는다. 이렇게나 덜 되어먹은 상태로? 나는 생각한다. 그 수많은 순진한 이상주의자들과 퇴폐주의자들을 내버려두고 세계는 이대로 정지한단 말인가? 새삼 “영원”에 대한 공포 때문에 나의 눈동자가 떨린다. 영원보다는 죽음이 훨씬 낫다! 백 번 천 번 옳은 말이다. 이 괴상한 계절의 경계선이 나를 두렵게 만드는 것이다. 세계가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어떤 결론을 향해 돌진하지도 못하며 그저 이대로 멈춰서버린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어떤 관념의 냄새가 공기 중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리고 이 비주얼. 모든 기대가 거세당한 것 같은 모습만이 유리창에 커다랗게 비친다.
 그때 짝을 지은 두 사람의 여학생이 내 뒤를 지나가며 경쾌한 소리로 웃는다. 그녀들은 갈색 체크무늬 교복치마 위에 두터운 재킷을 입고 각자 목도리를 두르고 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벌써 문 밖으로 향하고 있는 그녀들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학생들이 잘 신는 얇고 흰 신발이 가벼운 소리를 내며 대리석 바닥을 밟고 지나간다. 젊은 여자들의 밝고 가벼운 웃음소리는 항상 나를 놀라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모르는 세계인 것이다. 내가 이해해본 적도 없고 가져본 적도 없는 그 감정을 갖고서 마음껏 바깥으로 표현하는 그녀들은 분명 나와는 다른 인종이다. 그녀들이 생각하는 것을 내가 생각하지 못하듯이 내가 생각하는 것을 그녀들은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순간 나는 내가 나의 공포스러운 망상에서 깨어났다는 느낌을 받는다. 나는 안경을 벗어 창가에 올려놓고 두 손으로 눈을 비빈다. 눈알 속에서 피로가 물웅덩이에 떨어진 잉크처럼 흩어지더니 서서히 흐려진다. 나는 다시 안경을 쓰고 창밖을 바라본다. 풍경은 여전히 황량하지만 세계는 계속해서 흐르고 있다. 이 불쾌한 계절도 언젠가는 지나가버릴 것이다. 나무에는 새싹이 돋고 바람은 날뛰는 봄의 향기를 싣고 사방으로 불어댈 것이다. 이 세계가 영원이라는 절대적 절망의 도가니에 빠져버릴 일은 아마도 없으리라. 나는 봄의 달콤한 살맛을 기대해도 괜찮을 것이다.
Posted by Lim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