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5/09'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9.05.09 제 1 정리
  2. 2019.05.09 휴머니즘
  3. 2019.05.09 이천십구년의 한 조각

제 1 정리

글/시 2019. 5. 9. 19:18 |

제 1 정리


담배 술 마약 할 수 있는 건 전부 했다
시간에게서 도망치려고 매듭도 묶었다
누구에게도 주지 않을 결심으로 체내의 피를 전부 꺼냈다
폐는 썩었고 간은 문드러졌고 심장은 텅 비었다
맹장 한 조각도 인류를 위해서는 쓰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각막은 계단참에서 쓰러졌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다, 수치와 통계 너머의 잔혹함만 보인다
이것이 21세기의 그노시즘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신이 되는 방법은 없다, 애당초 신이 없다
여러 번에 걸쳐 게르만족에게 맞아죽었다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에게는 초인이 필요하다>
그러나 초인과 감정 없는 정신병질자의 차이를 모르겠다
애당초 그 차이를 감각할 수 있다면 아직 인간이다
사팔뜨기 철학자를 비웃으며 세계를 분해했다
꿈속에서 느끼는 사랑은 꿈결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꿈에는 논리가 없다, 논리가 해체되면 웃음만 남는다
더러운 옥상에 서서 도시를 내려다보기도 했다
이 우주에 높이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찾았다. 이게 우울증 환자가 되지 않는 방법이다
이것은 거대한 하수 시스템이다
추락하고 역류하고 흐르고 다시 사용된다
인류애라는 단어를 입술에 달고 사는 이들에겐 주머니칼을 흔들어보였다
하수구에 사는 쥐들에게도 사회와 유대가 있다
영장류들은 머리가 좋을수록 잔혹한 행위를 저지른다
혼돈은 혼돈으로밖에 정의되지 않는다
그래도 감각을 사랑하려고 했다, 육신에서 잘라낸 영혼은 필요없다
순간을 송두리째 느끼려고 했다, 필멸하는 존재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를 실존주의자라고 소개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것도 거짓말이다
타락 모순 퇴폐 악의 증오 원한 자멸 불신
이 퍼즐들은 자기소개의 액자에 도무지 들어맞지 않는다
다시 돌아온다, 바텀라인bottom line은 또 혼돈이다
그렇다면 골라라, 무관심하거나 혼돈을 가중해라

당신이 성모상에게 꽃을 바치는 와중에도
이 행성에서 사람들은 짚이 쓰러지듯 죽어간다.

Posted by Lim_
:

휴머니즘

글/시 2019. 5. 9. 01:33 |

휴머니즘


양장으로 된 시집들에는 곰팡이가 슬었고
싸구려 시집들만 커버가 멀쩡하다
은박까지 입혀져 거금 구만 원이 들었던 톨스토이는
내 위악을 위하여 불태워버렸다
중고책방에서 이천 원에 구한 헤르만 헷세는
내 책장에서 가장 늙은 책이다

곰팡이 핀 것들을 다시 꽂아놓고
불타고 남은 재는 성당에라도 바쳐야하나?
이미 너무 많은 유령들과 만났고
심지어 그것들은 내 집에 산다
그들과의 대화는 내게서 피와 살을 앗아간다고
충분히 현명한 이가 말했지만

이제 작별이다! 몇 번을 고해도
그들이 떠나지 않는 것은 아마
이미 내가 그들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몇 년 전 길거리에서 어느 노인이 급사할 때
가던 걸음을 멈추지도 않은 나는
1분마다 몇 명의 사람들이 죽는지 셈할 수 있었다

책장은 창문과 거울, 심지어는 현관까지 막아버리고
나는 선악을 믿지 못하니
곧 위악을 행하고
고로 악이 되고
그래서 성냥불을 그었던 것이다

돌과 모래밖에 없는 별로 가야해

라고 중얼거리며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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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십구년의 한 조각

 

 

더는 사람구실 못하게 될 만큼 남들이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하다가 마침내 사람구실 좀 하고 살자는 마음이 들어 달력을 보니 달력 읽는 법도 이미 잊어버렸고, 아들 너 도대체 언제쯤 취직할래? 니 아부지 이미 영감님 다 됐는데 뭐하자는 거야, 사람구실 하자는 결심은 섰는데 살면서 사람구실 해 본 일이 한 번도 없어 뭘 해야 할 지 모르겠어서, 괜히 착잡해서 대마나 한 대 빨고 싶은데 대마 살 돈도 없다.

 

마지막으로 원고에 손 대본 게 아마 5주 전이지? 이젠 스스로 작가니 시인이니 하는 것도 구라야 새꺄, 아주 자기정체성에 사기 치는 거라고, 거울 보면서 주절대는데 그 와중에 담배는 피우고 싶어 어슬렁어슬렁 연기 뿜으며 골목으로 나가면 도대체가 이 막다른 도시는 변하는 게 없고, 날이 저물고 부모님 내일 직장 나가려고 잠들면 혼자서 외로움이나 마시러 간다. 세 시간 뒤에는 이미 상할 대로 상한 위장이 새벽골목에 토악질 하라고 시킨다.

 

차라리 예전 같으면 산사에서 뒤지게 마시고 취한 채로 불상 끌어안고 펑펑 울었을 텐데, 더 젊었을 때는 새벽 네 시에 동네 비구니 절 쳐들어가 주무시는 스님들 다 깨우면서 부처님 앞에서 울면서 절도 했다. 참회하러 가서 악업만 더 쌓았다. 그런데 이제는 쌓은 악업이 허용량을 넘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네, 이 좁아터진 욕계에선 도무지 도망갈 곳이 없고, 나 혼자 법륜에서 튕겨 나와 추락하고 있다는 믿음이 위안이다.

 

같은 중학교 다니던 용훈이는 벌써 몇 년 째 빙상장 얼음 갈고닦아 가족들 먹여 살리고, 문학적 신념 차이라는 지랄보다 못한 이유로 5년 전 서로 두들겨 패다 연락 끊은 영권이는 알아보니 예쁜 마누라 만나서 애 낳고 알콩달콩 산다고 한다. 그동안 난 뭐 했나 고민해보니 아무래도 난 여기에 있던 게 아니라 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랑 암스테르담 들락거리며 알제리에서 살았던 것 같네, , 진눈깨비 맞으면서 아니스 빚느라 손이 다 뭉개졌지. 그거 알아? 암스테르담에선 카페에서 대마를 팔아, 시간 나면 네덜란드 시민들 행복도 설문조사 한 번 해봐.

 

언제부턴가 하늘이 하늘로 안 보여, 그러니까, 하늘을 보면 그게 하늘이라는 걸 알기는 아는데, 저게 도대체 뭣 때문에 있는지를 모르겠다는 거지, 머리 위에 파란 하늘이 아니라 콘크리트가 깔려있어도 다를 게 없을 것 같아, 옘병…….

좀 닥쳐 시발. 나 이력서 쓰는 중이야. 중학교 동창 중에는 유일하게 나 같은 백수인 종인이가 일축했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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