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증오와 절망은 고통으로 환원되었다. 정신적인 것은 육체적인 것에 귀속되어있고 얼마든지 형태를 바꿀 수 있다. 그 부피와 양만은 유지하면서 말이다. 그리하여 나의 터질 것 같은 <중심>은 세계의 모든 병폐를 닥치는대로 집어삼키고 붙들어 매었다. 사실 개인이 말할 수 있는 세계란 즉 그 개인의 세계 뿐이다. 외계와 연결되어있는 그 접점과 내면의 아노미 뿐이다. 내 정신은 어떻게든 땅 위에 서있다. 두 발로 바닥을 딛고. 그것은 생리적인 희생에 의한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늘 자해를 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그것이 기제이기 때문이다. 세계와 연결되어있는 상태 자체가 나의 신경을 파멸로 몰아넣는다. 그 파멸적 에너지로 말미암아 산출되는 수많은 것들이 내게 위안을 주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내가 병질의 덩어리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나는 단언할 수 있다. 사실 모든 사람들이-이 복잡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고뇌를 안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완전한 파괴고 종말이다. 그것은 유아적인 욕망이면서도 사실은 가장 명확한 답이다. 파괴. 탄생의 가능성마저 일절 남기지 않는 완벽한 파괴. 그것이 모든 <의식하는 것들>의 근본적인 욕망이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았던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파멸에 대한 갈망이 있는가 하면 계속 존재하고자 하는 갈망 또한 있다. 그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우리의 심장 깊숙한 곳에서 혈액과 근육에 뒤섞여 박혀있다. <살기에는 너무 타락했고 죽기에는 너무 젊다.> 그리고 실상 <완전함>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인간의 세계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흉터 투성이로 박동하는 심장. 탄환과 탄약. 단 한 발의 충동. 그 정도 뿐이다. 그래서 삶을 <당하는> 사람들은 뛰는 피로 무엇을 하는가? 그들은 구조의 해체를 계속하면서 존재의 본질을 찾아 헤맨다. 목적이 없는 것이 바로 목적인 것이다. 내버려진 존재인 우리들은 <내버려져 있는> 존재성을 더욱 과시하면서 정신적 표류자의 모습을 제시하려 한다. 모든 병폐와 통증을 껴안은 채로 그저 뛰어드는 것이다. 필연이 우리를 부수러 올 때까지. 우리는 가치라는 것이 실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영원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절대>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코웃음을 치고 침을 뱉는다. 실재하는 것은 고통 뿐이다. 고통! 내 온 존재를 꿰뚫는 고통. 그것이 우리가 <알> 수 있는 전부고, 개인의 세계를 실재하는 세계로 감각하게 해주는 주된 근거다. 그것은 증오라는 중요한 감정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존재에 대한 증오. 생명에 대한 증오. 구조에 대한 증오. 체제에 대한 증오. 인식에 대한 증오. 세계를 구성하는 의지들에 대한 증오. 증오는 <적>을 발견하게 만든다. 적을 발견하고 증오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우리의 존재성은 한층 더 의식적으로 정립되어간다. 그리하여 우리는 죽은 집단의 불완전한 의식이 만들어낸 체계를 거부하고 자기자신만의 양심-혹은 취향-을 건립하게 되는 것이다. 독자적인 정신의 출범이다. 유일하게 되는 것. 그것은 중요한 일이다. 관습과 체제에 의해 만들어진 인간을 완전히 해체시키고 나면 남는 것이라고는 생물학적인 본능 밖에 없다. 그만큼이나 인간의 신념이나 가치관이란 허황되고 무근한 것인 것이다. 거기서부터 시작해야한다. 존재의 고통을 느끼며, 세계의 내외에 산재하고 있는 병질과 날것 그대로 마주치고, 절대적인 죽음을 인지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지독히도 비인간적으로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우리의 새로운 의식은 세계를 다시 한 번 파악해나가기 시작할 것이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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