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에서

글/시 2023. 3. 25. 16:59 |

지상에서


옛적에는 곳곳에 신이 있었다
그들은 자비롭지도 엄격하지도 않았다
계절의 바람이나 살갗에 닿는 햇볕처럼
그들은 결코 말하는 일도 없이
분명히 그곳에서 숨 쉬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먹어야만 했고
누군가 앓는다면 허리 굽혀 약을 얻어야 했다
산새들은 봄에도 노래하지 않게 되었고
나는 너무 일찍부터
신들이 맛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느 장마철 빗물에 잠긴 안방
손전등의 빛줄기 속, 나는 발밑에서 떠오르는
표정 없고 창백한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그날부터 나는 균형을 잃고
온몸을 사방의 모서리에 부딪으며 걸어왔다

그래도 우리는 먹어야만 했고
우리 중 몇몇은 삶을 다 마시기도 전에 쓰러져버렸다
도시에서 빛나는 것들은 대체로 생선 뼈 따위였다
나는 누군가 가르쳐주기도 전에
신들이 맛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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