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폴 요양원

글/시 2021. 11. 4. 23:22 |

생폴 요양원


 어쩌다 세상은 온통 화재로 미쳐버렸는지, 새벽에도 안개는 끼지 않고, 밀밭은 녹은 황금으로 끓어오른다, 접은 종이에 불이 붙듯 지평선마저 재가 된다, 사내는 캔버스에 고함을 친다, 밭은 유황빛, 하늘에는 용광로가 엎질러져 있었다, 쏟아진다, 자국만 남은 정오의 정신, 사이프러스 나무에 광기처럼 붙는 불길, 성난 신의 눈동자, 쏟아졌고, 무겁게 일렁이는 밀이삭들, 농부는 낫처럼 허리가 굽었다, 불꽃 속 가을걷이 열병 걸린 사람처럼 이지러진다, 요양원의 가장 무방비한 들판 위, 사내는 메모로 가득 찬 자신을 뒤진다, 거듭 피고 지는 생활, 평생 밭을 가는 고통을 받으리라는 저주, 그는 기억하고, 태양 아래에 그림자조차 없다, 열과 어지럼증의 틈바구니, 사내는 볕이 갉아먹은 자리를 새긴다, 태양과 사람과, 불길이 날름거리는 풍광, 송두리째, 모조리. 인적이 모두 사라진 복도, 권총을 든 사내가 미술관 벽의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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