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판기

글/시 2021. 2. 4. 22:35 |

자판기


무심하게 흘러가는 자리에는 반드시 자판기가 서 있다

종로 막걸리집 뒷문과 늙은 보쌈가게 사이 골목
버스가 서지 않는 흙투성이 정류장
대관령 산자락, 염소농장 철책 앞
낡고 정체 모를 자판기들

그들은 사람의 발걸음이 딛지 않는 곳에만
자연스레 피어나는 버섯인 양
먼지와 빛살을 뒤집어쓰고
동전을 먹여도 아무것도 뱉지 않으면서
가끔 하얀 불빛을 깜빡거리기도 한다

상품을 채우던 손들은 어디로 갔는지
매상을 담아가던 장지갑들은 어떻게 됐는지
우뚝 솟아 빈혈에 걸린 그들의 옆통수에는
누군가의 이름과 번호가
날카롭게 긁혀 지워져 있다

그러면 나는 꿈같은 열에 들떠 생각한다
숲속에서 자라나는 고고한 자판기를,
그들에게 엉기듯 둘러싼 담쟁이덩굴을
곧 그것들이 피워낼 황록색 사사로운 꽃을,

숲속마다 산맥마다 황량한 언덕마다
솟아나 수액이 도는 자판기들이 매일 밤
그 꽃들을 위해 달무리 같은 파란 빛을 비출 것을,

그렇게 되면 마침내 나는
그들에게로 걸어갈 다리도 동전을 쥘 손도 없어진
활자가 되어버린 인류를
흐뭇한 마음으로 생각한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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