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사비 괴몽

기록/생각 2020. 9. 13. 09:45 |

와사비 괴몽


 며칠 전 오후 3시에 기괴하고 강렬하고 슬픈 느낌에 번쩍 눈을 떴다. 왜 해가 중천을 넘어가는 오후 3시에 눈을 뜨냐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몰라 말해두자면 난 그날 아침 9시에 약 먹고 잠들었다. 평소대로라면 오후 6시에 눈을 떴어야 한다. 아무튼 시간이 중요한 게 아니고…….
 악몽을 꾸다가 벌떡 깨는 일이야 가끔 있는 일이지만 그 기괴하고 강렬하고 슬픈 느낌은 악몽의 잔재가 아니었다. 무언가 아주 억울하고 유감스럽고 절망이 가득해서 더는 이런 현실은 못 견디겠다고 꺽꺽댔더니 정말로 그 세계로부터 퍼뜩 깨어나 버린 것 같았다. 그런데 눈을 뜨고 보니 뭔 놈의 꿈이었는지 기억나지도 않고, 그런데 기억나지 않는다고 심장이 뱀마냥 허물 벗는 느낌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60초인가 눈뜬 채 이불 덮고 누워있다가, 니미 견딜 수가 없어서 태아처럼 웅크리고 으악-흐악-하며 울었다. 한 15분 그랬나, 친척들 죽을 때도 친구 부모님 장례식에서도 항상 뭐 잘못 먹은 비둘기마냥 어리바리 돌아다니기만 하던 게 나였는데.
 이유도 뭔지 모르고 목이 막히게 억울하고 유감이어서 이젠 눈으로 곡을 하다가 마침내 밥 지어도 될 만큼 눈물을 쏟고 진정을 했다. 얼굴을 파묻은 이불이 축축해진 게 기분이 더러워서 반대로 누웠다. 그리고 이성이 좀 돌아오자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분명히 어떤 유명한 사람이 인간의 이성은 기억과 경험으로 되어있다고 했는데, 기억나지도 않는 꿈에 꺽꺽 우는 것은 틀림없이 이성적인 것이 아니고, 그러면 감정은 정말로 아무 이유도 근거도 없이 날뛰는 놈이구나.
 또 그런 사변이나 왱알앵알하는 평소의 임명준으로 돌아와 있는데 뜬금없이 무슨 꿈이었는지 기억이 났다. 전부 다 기억난 건 아니지만 울었던 이유는 기억이 났다. 꿈에서 현자인지 오즈의 마법사인지 선지자인지 아무튼 그런 놈이랑 대화를 했는데, 나더러 “사실 당신 가슴 속에 들어있는 건 심장이 아니라 고추냉이라오.”하며 미친 소리를 하는 것이다. 내가 발끈해서 증거를 대라고 하자 놈은 어느 연못에 가면 내 심장이 가라앉아있으니 찾아보라고 했다. 그래서 찾아가 보니까 진짜로 내 심장이 있더라. 전 세계 75억 개가 전부 똑같이 생긴 근육펌프기인데 어떻게 바로 내 것인 줄 알아봤는지는, 꿈이니까 그런가보다 했다. 아무튼 한 손에 심장을 들고 늑골을 벌컥 열어서 안을 들여다보니 거기에는 고추냉이인지 와사비인지가 떡하니 있었다. 아, 이런 썅……, 하는 순간에 잠에서 깬 것 같다.
 왜 하필 와사비지. 내 무의식이 초밥이라도 먹고 싶은가. 그런데 와사비는 그렇다 치고 이건 사실 프로이트니 융이니 하는 사람들 부를 필요도 없이 간단한 괴몽이다. 인간짓 좀 그만두고 싶다, 평생을 노력해도 이미 내가 오함마로 박살 낸 장독대 파편 위에 물 붓는 격인데 차라리 메디컬 닥터 사인 들어간 부품결손 증명서라도 있으면 좋겠다, 감정이고 죄책감이고 양심이고 다 엿 바꿔먹었으면 좋겠다, 아아. 니미.
 그런데 이미 그 감정과 죄책감과 양심을 작동시키는 주요부품이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그 자리에 광어회에나 발라먹는 초록색 일제 양념이 들어있었다면, 정말로 억울해 미칠 노릇인 것이다. 그 현자인지 오즈의 마법사인지 선지자인지에게로 돌아가 다음엔 뇌를 할라페뇨랑 바꿔야 하냐고 묻고 싶은 것이다. 감정과 죄책감과 양심을 뚝 떼어 북아프리카의 사막 지역으로 멀리멀리 던져버리려면 중추신경계의 몇십 퍼센트를 외산 스파이스로 갈아치워야 하냐고 멱살을 잡고 따지고 싶은 것이다.
 여하간, 어쩐지 그 꿈 이후로 시도 때도 없이 부정맥 비슷한 게 일어나는데 나는 일주일 전 이미 의사에게 기존 대비 절반의 알프라졸람으로도 버틸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해버렸다. 아아. 아아. 아아!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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