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2/11 - I'm very ape and very nice.
Last ideal(egloos) 2010. 7. 9. 14:01 | 알베르 까뮈가 살았던 세상에 태어나서 다행이다. 척 슐디너와 같은 시대를 살아서 다행이다. 니체가 희망을 갖는 것을 거부해서 다행이다.
커트 코베인이(그리고 사람들이) 자살을 해서 다행이다. 그들이 이 땅에 태어나서 정말 끔찍할 정도로 다행이다. 그 어떤 종교적 신념도 가치를
심판하지 못하는 땅에서 태어나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찾으려고 현재를 피투성이로 만들며 칼부림을 해대는 자들이 있어
다행이다. 회칠한 하얀 담벼락 밑에서 녹아 없어지듯이 태어나서 다행이다.
그리고 차별이 있어서 다행이다. 커다란 권리들에 의한 격리가
있어서 다행이다. 폭력이 있어서 다행이다. 강요가 있어서 다행이다. 말인즉슨 테러리즘이 있어서 다행이다. 나와 그들이 전부 상처투성이라서
다행이다. 고통을 감각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비극이 덩어리진 세계여서 다행이다. 덩어리지지 않은 비극들이 사방에 녹아 흐르는 세계여서
다행이다. 이 세계가 치명적인 의식으로 말미암아 절망이 필연이 되는 구조라서 다행이다. 그것이 명증함이어서 다행이다.
그리고 이 모든
단어와 그 저변에 깔린 관념들이 오해와 혼란으로만 작용할 것이라는 사실이 지독하게도 다행이다.
사람들이 사조와 논리의 울타리를
인지하지 못하는 짐승들이라 다행이다. 모순과 함께 사는 이들이 자만의 애인이라 다행이다. 간혹 사람을 사랑하는 장님들이 쏟아내는 각양각색의
비난이, 그리고 그것들이 말미에 마주치게 될 무가치가 다행이다. 노화뿐만이 아니라 질병과, 사고와, 재앙과, 또한 전쟁과 살인이 세상에 있음이
너무도 다행스럽다. 이 시기를 사랑한다. 온갖 사물들 위에 만연한 종말적인 추상화와 그로 인해 찢어져 속이 들여다보이는 표피들이 주는 쾌활한
인상들이 위안이 된다. 통증은 네거티브가 아니다. 오히려 감상주의가 그렇고 멜로가 그렇다. 질병에 좀먹힌 정신이란 그런 것이며, 그러나 그런
'감상'을 미화하는 구역질나는 시대에 떨어뜨려져서 참으로 다행이다.
나는 매일 아침 하늘색 태양이 뜨는 도시에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