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이라는 공포에
이 행성이 고함지르고 몸부림치던 것은
대양에 물을 풀고 초목에 발자국을 내기 위해서다.
우리는 단어를 사용하는 법을 잘못 배웠다.
위험은 지상의 본질이다.
세 그루만 넘어가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차라리 새까만 녹색의 어둠 속에는
아직도 마물이 살고 있다.
월계수 나무 아래
발굽을 디디고서.
인간이 손에 쥔 칼과 톱은
공포에 대한 무기다.
그러나 고작 한 그루의 나무와
그 나무껍질의 거칠거리는 촉감과
둥치를 뒤덮은 키 큰 이끼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분명히 종말을 연상케 한다.
바위와 돌 사이를 위협적으로 굽이치는
산과 산 사이의 계곡물은
그 힘줄과 근육의 꿈틀거림은
화가들을 미치게 만들고 틀림없이 그 연식이란
바다의 나이와 같다.
우리가 왜 숲의 왕을 모시고 그 목을 잘라
나뭇가지로 만든 왕관을 새로운 숲의 왕에게
계승시켰는지는
오로지 풀과 나무와 지구의 혈액으로 포화된
원시의 숲에 가야지만 동의할 수 있다.
우리는 수풀에 발자국을 찍는 신을 경외했고
그만큼 그를 증오해야만 했다.
애니미즘은 분명히 우리의 심장에 새겨져있다.
어떠한 정신의 시대에도
우리는 원시 앞에서 졸도하게 된다.
인간에게 살해당할 권리를 가진
피와 털가죽을 가진 신들은
모더니즘과 사상개혁 밑에서도 죽지 아니하였다.
우리는 인류의 종말을 마주하고 살 수 있다…….
소금 기둥으로 만들어진 우상들의
태양과 모래의 땅과
무한을 현상으로 만드는
영겁의 파도소리로 으르렁거리는 대양과
캄캄한 신이 어슬렁거리는
덮쳐오는 녹색의 숲은
언제까지고 위협이고 공포이며
반드시 경외해야할
영원이자 종말―언어철학마저 분쇄하는―이다.
우리는 사시나무 떨 듯이 떨고
성냥개비처럼 쉬이 부러지고
불붙은 짚더미처럼 사라지며
사원에서 무릎을 꿇고
오로지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