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정신
현실은 병신이다.
그것도 그냥 병신이 아니라
다리 세 개는 잘려나가고
나머지 하나는 삐걱거리는 테이블만큼
병신이다 우리는
그 테이블에서 식사를 해야 한다.
어른이 되면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내 유년의 최후였다.
자유라니, 도대체 얼마나 왜곡된 개념인지.
지금 내가 자유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도 잃어버릴 만큼 술에 취해서
고꾸라지는 순간의 망각뿐이다.
아무런 공포도 없는, 죽음과 가장 가까운
여름날 거리 곳곳에 너부러져있는
초록색 술병과 움직이지 않는 몸뚱이들.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그것은 떠나야만 했던
떠나지 않으면 안 될
생명의 한계와 같은 것이었다. 참으로
그래서 내 영혼은 내 인생 전부를 합해
단 세 달만을 살아있었고
아무도 개골창을 흐르는 하숫물을
생수(生水)라고 부르지 않는다.
나는 주로 시체들과 섹스를 한다.
사랑이 떠난
회색 욕망들.
나 자신을 죽이는 것은 유쾌하지 않다
그래서 이따금 칼을 들어보았다.
세상에는 도덕과 윤리를 초월하는 살인이 있다고
어느 법대 학생처럼 생각해보려고 했다.
모든 핏자국이 잉크와 활자로 뒤덮이는 시대에
초월적 정의 같은 것이 굳이 무슨 위용이 있어야 할까.
우리는 침수되고 있고 썩어 가라앉는다.
초원의 사자 같은 이빨이 갖고 싶었다.
우리는 잘못된 방향에 있다.
이것은 변환기가 아닌 침체로 향하는
마지막 골목이다. 바람은 차가워지고 사람들은 옷깃을 여미고
나는 어제 꽃도 피지 않은 나무를 쓰다듬다가
가시에 찔려 몇 방울의 피를 흘렸다.
이제는 슬픔이나 절망이라는 말조차
싸구려가 되어버려 함부로 발음할 수 없다.
마지막 계절
광기조차 파괴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