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은

글/시 2014. 10. 16. 01:38 |
일단은


일단은 살아보고 있다.
가로등이 어둡게 깜빡이는
밤에만 살아있기는 하지만
일단은
살아보고 있다.

자주 꽃과 하루살이들에게 질투한다.
단 며칠만 생명과 생존을 노래하다가
당연하다는 듯이 깊은 충족감과 함께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져 썩어가는
그들에게.

오늘은 깨어난 지 다섯 시간이 되었다.
그늘진 거리를 곁눈질하면서 걷다가
몇 개비의 담배를 다 태워 떨어트리고
벌써 피곤해하는 눈동자를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먹을 것이 라면밖에 남지 않았기에
나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바닥에 엎드려 울었다.
창문 밖에는 벌써 찬바람이 웅웅거리며 울고
내 컴퓨터 스피커에서는
항상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생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친구는 여자를 만나보라고 거친 조언을 해주었다.
나는 일주일 만에 면도를 하고 거울을 보았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정말이지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과거에 낯선 침대에서 함께 누웠던
눈빛이 파리하고 몸 곳곳에 문신이 있는
초췌한 위악으로 분장한 여자들을 생각했다.

밤거리에서 손을 잡고 걸어가는 연인들을 보았다.
나는 이름 모를 구역질과 분노를 삼키며
내가 왜 그것을 삼켜야하는 지도 모르며
그들의 웃는 얼굴을 힐끗 보았다.
날고기가 먹고 싶었다.
야만의 세계에서는 가장 먼저 살해당할 내가
지금 이 행성의 어떤 인간보다도
야만의 감각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주로 환상을 배고 잔다. 그것이 환상인 줄
빤히 알면서도, 나는 아무도 찾지 않는 환상을
내 폐허가 된 가슴에 주사한다.
언젠가 그것이 누워있을 때뿐만이 아니라
도로 위에 불안하게 서있을 때까지 날 끌어안으면
그때는 패배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미치광이가 되는 일도 그리 쉽지는 않다.
나는 꿈꾼다.

꽃이 떨어지고 있다.
낙엽들이 쌓일 것이다.
창문들이 닫히고
이윽고 눈이 내리리라.
일단은 살아보고 있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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