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지 않는 불안감과 생각하지 않는 공포에 대하여. 나는 손끝에서 나는 단조롭고 신경질적으로 반복되는 소리들처럼 공포에 질린다. 내가 이미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고통이란 가끔은 사고를 잊게 만들기도 하고, 가끔은 그야말로 미치광이의 머릿속 같은 상념의 쓰나미 속으로 처넣기도 한다. 후자가 좋다. 고통스럽지만 후자가 좋다. 적어도 그런 때에는 심장이 쪼그라들어 쥐새끼처럼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고통은 온갖 내장들을 크게 만든다. 울렁거리고 욱신대는 내 피와 살덩어리들을 피부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든다. 생각하지 않는 공포에 잡아먹혔다는 것은 허무를 잊었다는 뜻이다. 죽음을 잊고 생명조차 잊었다는 뜻이다. 이곳에 있는 감각과 펄떡거리며 뛰어다니는 피투성이의 정신도 잊어버리고, 그 손에 들려있어야할 잔인하고 끔찍한 전쟁의 도구들 마저도 잊어버렸다는 뜻이다. 잊어서는 안된다. 고통에서 벗어나고, 비일상에서 일상으로 도망치고, 감각과 충동에서 상식으로 굴러떨어져서는 안된다. 벌레들에게 갉아먹히고 말 것이다. 새까만 벌레자국으로 너덜너덜해지고 말 것이다. 명징한 정신은 흉터 속에. 피흘리는 통각 속에. 내리찍는 흉기 속에. 비참하고 어두운 정념 속에. 진정성이다. 정신의 전쟁. 사상의 조각들이 피와 함께 튀고 울부짖음으로 가득한 처참한 살육전. 생명의 모습. 필연. 나는 너희들을 모두 증오해야만 할 것이다. 혹은 슬퍼해도 좋다. 병사의 손에는 죽음이 낳은 허무가 들려있어서는 안된다. 죽음이 낳지 않은 허무가 들려있어야만 한다. 생명의 탄생과 함께. 그러니까 고통을 잊어서는 안된다. 잊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언제나 고통과 함께 하자. 그 고통에 익숙해질 즈음이면 더 강하게, 더 자극적인 통증을, 정신을 차려야만하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사실 그럴싸한 환경만 있으면 굳이 통각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 그럴싸한 환경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비극과 절망으로 가득한 이 세상과도 닮아서, 익숙해질 틈 따위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고가 멈추지 않는다. 사고가 멈춘 절벽 밑의 시체가 되지 않는다. 끊임없는 고통은 절망이고, 절망은 고뇌의 입구이고, 그 문 안쪽에는 도그마 없는 사상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지독함, 생명. 가치다. 가치를 찾을 필요도 없이, 이미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던 지독한 아름다움이다.
 시지프스. 시지프스의 신화가 떠오른다. 처음으로, 까뮈의 필체 바깥에서.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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