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의 끝자락에서


 모든 것이 변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계속해서 변해가고, 변하는 것 같으면서도 변하지 않는다. 어제 왔던 봄이 어느새 여름과 가을을 거쳐, 북풍과 함께 몰아치는 겨울로 나타난다. 새로운 한 해를 얼마 남기지 않은 지금, 우리는 신년이라는 것이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돌았을 뿐이고, 과거에도 수도 없이 그래왔으며 앞으로도 오래도록 그럴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의 인생에 대해 회고해야만 한다는 의무감을 느낀다.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나무들 사이로 얼음송곳 같은 겨울의 빛살이 비추기 시작하면 나는 언제나 고요한 죽음을 떠올린다. 모든 것이 잠에 들고 죽는 계절, 이 추위 속에서는 인간들마저도 말이 없어지고 돌과 불꽃으로 쌓은 자신의 방패 밑으로 기어들어간다. 사방에 죽음이 만연해있고 여름에는 그렇게도 수다스러웠던 태양이 이제 대지를 주시하는 하나의 거대한 눈동자 같은 모습으로 절망적인 침묵을 지키고 있다. 이런 계절에야말로 사람은 삶을 사유한다. 황금색 비단 같은 햇살의 물결이 나체의 싱그러운 피부를 감싸 안고 파도 속에서 생명의 호흡을 느끼며 수영하던 여름에는 사유할 시간이 없었다. 그때는 모든 이들이 생명을 소진하느라 바쁠 뿐이었다. 그러나 이 추운 계절에 우리는 눈앞에 펼쳐진 광대한 죽음의 그러데이션을 마주하고 생각에 빠질 시간이 얼마든지 있다. 콘크리트 도로 위를 굴러다니는 시멘트 조각마저도 잠에 빠져있는 것 같은 시간에,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삶에, 변화무쌍하면서도 한결 같은 세상 어딘가에 영원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 같다고 느낀다.
 영원의 흔적, 그것은 수천 년이나 젊은이들의 영혼을 괴롭혀온 것이었다. 우리는 만물의 한계성을 알고 있다. 태어난 것은 죽고, 만들어진 것은 망가진다. 그런데도 젊은 예술가들의 영혼은 이 반복되는 계절 속에서, 피와 흙으로 다져진 땅의 역사와 하늘의 광활함 때문에 혼란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무한에 대한 갈구이다. 이 위대하고도 위험한 갈구는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인간의 본성처럼 모두의 마음속에 뿌리를 박고 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인류는 종교를 만들었고 영원불멸하는 영혼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애를 썼으며 절대자의 허무한 발자국을 찾아 헤매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충분히 지혜로운 이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이 세상에 무한한 것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적어도 인간에게는, 적어도 인간의 세계에는 말이다. 도대체 누가 처음으로 터질 것 같은 감정을 기록하기 위해 하늘을 향해 끔찍한 고함을 쳤을까? 누가 정령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피를 흘렸을까? 그리하여 니체가 정신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그리하여 랭보가 불타는 아프리카 땅에서 외다리로 죽음을 맞이했다. 무한에 대한 갈구는 이 일시적인 세상에서는 너무나도 위험한 것이라서 결국은 인간을 광기 속으로 떨어트리고야 만다.
 어떤 이들은 아주 교활하다. 그들은 어른이 되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들은 정신에 대한 위협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혼돈 속에 빠지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을 기가 막히게 찾아낸다. 그들은 자신의 내면에서 아우성치는 갈망의 입을 막아버린다. 그들의 세계는 언제나 봄 아니면 가을이다. 그들은 항상 무언가를 잊어버리고 있다는 감각을 느끼지만, 그것을 잊어버린 채로 그냥 둔다. 바쁜 일상과 반복되는 타협, 그리고 타성으로 영혼의 뜨거운 피를 굳혀버린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들이 소위 말하는 <인간>이 되고야 만다. 아마도 그들 대부분은 선한 사람들이다!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가정에 충실한,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인간들이다. 그들은 더 이상 영혼의 유치한 외침 때문에 괴로워하지도 않고, 찾을 수도 없는 영광의 열매를 찾아서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사막으로 휘청거리며 나아가지도 않는다. 그래, 선한 이들아! 이것은 바로 당신들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언젠가 그렇게 되어버릴지도 모르는 젊은 당신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누가 미치광이 같은 영혼의 갈망에 붙들려버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들을 탓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어디에 정답이 있다고? 타성은 좋은 것이다. 그것은 달콤하고, 위협적이지도 않다. 우리는 그것으로 인하여 앞으로 올 12월 31일의 마지막 순간에도 앞으로 다가올 일분을 이미 지나간 일분처럼 맞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른>들 조차도 기억할 것이다. 자신이 미치광이였던 그 필연적인 시절을 말이다. 원인 모를 정신의 목마름 때문에 악행을 저지르기도 하고, 어쩌면 위대하다고 여겨지는 정체불명의 추상 때문에 새하얗게 질린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던 혼돈과 드높은 절망의 나날들을. 누구에게나 그러한 본성이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에게는 모두 <인간이 아니게 되는 것>에 대한 불타는 듯한 열망이 있었다.
 그것은 광인의 길이기도 하고 동시에 성자의 길이기도 하다. 그들 중에서도 누군가는 계율을 발견하고 누군가는 우주 전체에 수북이 쌓여 점멸하는 아나키즘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것은 그들의 특질이다. 그런데, 그런데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언젠가 필멸할 아름다움을 좇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라. 먹구름이 자욱이 낀 하늘에서 번쩍하고 굴러 떨어지는 빛의 물방울에 감동하던 순간을 떠올려보라. 그리고 영원할 것 같았던 젊은 시절이 지나가버린 것에 대해서 회상해보라. 수많은 위대한 문명들이 무너져 흙과 모래먼지가 되어버린 것에 대해서 생각해보라. 우리에게는 본성이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이성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정답을 알지 못한다. 아무도 정답을 알고서 선택하지 못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하는 채로 선택하기만 한다. 아하, 모든 것이 결국에는 허무의 절대적인 구덩이 속으로 끌려들어가고 마는데, 선택 따위가 무슨 중요성을 갖느냐고 화를 낼 사람도 있겠지! 그러나 보라, 느껴보라, 우리는 죽을 것이 분명하지만, 지금 우리는 살아있다.
 로트레아몽과 반 고흐의 죽음은 어떤 것이었는가? 누군가 그들의 인생이 공허하다고 말했는가? 혹은 누군가가 그들을 위대하다고 말했는가? 만약 로트레아몽 백작의 시집이 끝내 발견되지 못하고 프랑스의 한 도서관 구석에서 썩어버리고 말았다면? 만약 반 고흐의 그림이 단 한 점도 팔리지 않고 그의 이름이 역사의 뒤틀림 속에서 묻혀버렸다면? 그런데 그런 것이 도대체 무슨 중요성을 가진단 말인가? 감히 추측하건데, 우리는 아마도 위대함을 정의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저 위대함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무한의 끝자락을, 영원의 흔적을 장님처럼 더듬어 가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사실 그것은 절망적이다. 그러나 절망 때문에 좌절할 필요까지는 없다. 절망과 좌절은 동의어가 아니다. 세계는 절망적이지만, 인간은 좌절하지 않을 능력을 가지고 있다.
 또 내일이 온다. 미래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쏟아져 내리며 도무지 가늠할 수도 없는 가능성에 대해 선택하라고 강요한다. 모든 것이 사멸하고 사라져버릴 것이라는 단 하나의 분명한 진실 아래에서, 우리는 살아가는 것을 선택해야한다. 왜냐하면 미래가 더 이상 오지 않는 순간은 죽음의 순간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의 유일한 의무는 오직 살아가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우리 가슴 속에서 미치광이처럼 아우성치는 어떤 열망을 품고, 그것에 휘둘려 손을 피에 적시기도 하고, 혹은 그 열망의 입에 재갈을 물려 타성 속에 묻어버리기도 하면서.
 그러면서 우리는 살아간다.
Posted by Li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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