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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뜰의 남자: <필경사 바틀비>를 읽고 안뜰의 남자                                                          -바틀비를 바라보던 또 하나  이 짧은 기록을 시작하기 전에 우선 밝혀두고 싶은 것은, 법원에서 검사와 판사가 뭐라고 했든 나는 결코 사악한 동기에 의해 행동한 흉악범이 아니라는 것이다. 스스로를 성자나 현자, 정의 집행자라고 말할 수는 없어도, 나는 지극히 일반적이며 이성적인 사고로 움직이는 시민이자, 나름대로의 지성을 갖춘 교육된 현대인이다.  그러나 실상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어쨌거나 나는 지금 툼즈 구치소 독방에 갇혀있다. 위에서 굳이 구구절절한 변명을 늘어놓은 것은, 이제부터 시작하려는 이야기가 변별력과 객관성이 결여된 광인의 일기 따위가 아니라는 점을 여러분에게 이해시키고 싶었기.. 공감수 2 댓글수 0 2025. 2. 24.
  • (2022/05/30)다리 밑에서 (2022/05/30) 다리 밑에서 이미 용훈은 탐색을 포기한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그녀는 지친 표정으로 강가 벤치에 앉아있다. 벌써 세 시간 동안 마포대교 북단을 들쑤시고 다녔으니 피곤할 만도 하다. 그녀는 쭉 뻗은 두 다리 사이에 양팔을 넣은 자세로 구부정하게 앉아있다. 허리까지 내려온 검은 머리칼이 계절 때문에 차가워진 강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용훈은, 터널 같은 것은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갈대밭을 헤치며 찾아낸 한강의 수위조절용 터널을 돌아본다. 비슷하지만 다르다. 그들은 세 시간 동안 이런 ‘비슷하지만 다른’ 터널을 네 개나 찾아냈다. 그것들은 전부 흡사한 생김새에, 자전거도로나 산책로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다. 콘크리트로 지어진 네모난 구멍은 성인 남성 키보다도 .. 공감수 2 댓글수 1 2024. 4. 21.
  • (2023/01/28)쥐구멍 (2023/01/28) 쥐구멍 5월 9일, 월요일, 오후 6시 오후 2시가 조금 지나 깨어났다. 뱃속에 커다란 동굴이 뚫린 것 같은 굶주림에 잠에서 깼다. 위장에서 고통이 느껴질 정도였다. 입 주변에는 거품이 잔뜩 말라붙어있었다. 허기와 목마름 때문에 역으로 욕지기가 치밀어올랐다. 그대로 거실 바닥에서 몸을 웅크리고 속을 게워내자, 식도가 타들어가는 것 같아 구토를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거실에서 끔찍한 소리를 내며 거의 투명에 가까운 위액을 뱉어냈다. 구토가 멈출 즈음이면 또 식도의 통증과 이물감 때문에 구역질이 올라오는 식이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눈물로 젖은 얼굴을 들었다. 잠들기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바닥과 벽의 경계에 뚫린 자그마한 구멍이었다. 딱 보기에 다 자란.. 공감수 2 댓글수 1 2024. 4. 21.
  • (2023/01/12)나는 이불을 개었다 (2023/01/12) 나는 이불을 개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침대 위에 이불을 갠다. 나는 내가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3년 전 나는 한가지 목표를 정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이불을 갠다는 목표 말이다. 그러나 목표를 정하기만 했을 뿐, 2년이 넘어가도록 나는 단 한 번도 이불을 갠 일이 없었다. 이불은 항상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었고 겹겹이 파도치는 그 곡선 주변으로 소주병과 맥주병 따위가 조화롭게 굴러다녔다. 곳곳에 책과 음반 따위가 무질서하게 쌓여있었고 무언가를 무너트리지 않고 걸으려면 몹시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다. 방뿐만이 아니라 온 집안이 그런 꼴이었다.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이었더라? 나는 책을 쓰기도 했고 대학로에서 베이스를 연주하기도 했고 가끔은 조각을 깎기도 했다. 돈이 필.. 공감수 0 댓글수 1 2024. 4. 21.
  • 소문에 의하면 그는 소문에 의하면 그는 1. 도대체 누가 저지른 짓인지는 알 수 없으나 도시에 나에 대한 소문이 나돌고 있다. 응급실에 실려 갈 때마다 능숙하게 거짓말을 해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의사라는 인종들은 생각보다 눈치가 빠르고 심지어는 훈련된 관찰력까지 있다. 그들은 내 거짓말을 믿는 수밖에 없었으나 의심을 완전히 거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처음 세 번의 시도들이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갔을 것을 상상하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하지만 우리 집 천장에 두 개의 시꺼먼 구멍이 나버린 일을 모두가 알고 있는 점은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한강 공원 한구석에서 시궁창 냄새가 나는 물을 토하고 저녁 하늘을 올려다보던 때가 아직도 기억난다. 도대체 누가 삶이 아름답다는 말을 함부로 했는지 이해할 수가 .. 공감수 0 댓글수 0 2022. 11. 29.
  • 우리 모두가 지옥으로 간다 우리 모두가 지옥으로 간다 이것은 작가와 작가 지망생들을 위한 글이다. 그러나 이 글에는 그 어떠한 종류의 충고나 조언도 없다. 애당초 내게 그럴만한 자격이 있지도 않을뿐더러, 사실 작가들에게는 어떤 종류의 조언과 충고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이곳에서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용서다. 말하자면 단테의 이 실용서였고, 밀턴의 이 실용서였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아주 오래전에―지금은 그것이 얼마나 오래전 일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이 마을에 도착했다. 어쩌면 ‘떨어졌다’고 말해야 옳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때 나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숲에서 막 빠져나온 참이었다. 시간은 밤이었고 내가 걸어온 어두운 숲을 벗어나자 갑자기 드넓은 초원이 펼쳐졌다. 그때 나는 어둠 속에서 초원에 .. 공감수 1 댓글수 1 2022. 11. 23.
  • 아레시보 메시지 아레시보 메시지 모든 일이 다 잘못되었다고 그는 생각한다. 변기를 얼싸안고 있는 그의 뒤통수 위, 화장실 천장에서는 약간 황색이 도는 백열등이 잉잉거리며 빛나고 있다. 변기에 고인 물에서는 토해낸 비누 거품이 무지갯빛으로 반짝이며 둥둥 떠다닌다. 퉤, 하고 입안에 맴도는 로즈메리 향을 뱉어낸다. 약간의 알코올 냄새가 섞여 있다. 그는 얼굴에 번들거리는 눈물을 소매로 닦는다. 그리고 손에 쥐고 있던, 베어 문 잇자국이 선명한 반쪽짜리 비누를 세면대에 올려놓는다. 선반에 개어진 수건들 틈에 놓아둔 휴대전화를 꺼내려다가, 그는 위장에서부터 올라오는 역한 비누향을 견디지 못해 온몸을 들썩이며 또 한 번 토악질을 하고 만다. 작은 비누 조각들이 더 많은 거품과 함께 변기 안으로 쏟아진다. 다시 눈물범벅이 된 얼굴.. 공감수 0 댓글수 0 2022. 2. 19.
  • 책과 담배 (스토리텔링 습작) 책과 담배 내 친구 이철우에게 전화가 왔을 때 나는 한창 서랍장이며 장롱 따위를 필사적으로 뒤지는 중이었다. 그날은 14일이었는데, 수중에 남은 돈과 날짜를 계산해보니 보름 동안 담배를 피우지 않아야만 생활이 가능했다. 나는 어떻게든 담뱃값을 충당하기 위해 여권과 통장이 있는, 가장 안쪽에 있던 서랍까지 전부 꺼내 바닥에 늘어놓았다. 어딘가에 천 원짜리 몇 장이나, 동전, 그도 아니라면 환전할 수 있는 적은 액수의 외화라도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친구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오백 원짜리 동전 하나도 찾지 못해, 돼먹지 않은 분노로 가슴속이 끓다시피 할 때였다. 거칠게 전화를 받자 철우는 잠시 말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서야 나는 감정을 추스를 수 있었다. 아니.. 공감수 1 댓글수 0 2021. 10. 22.
  • (엽편)구멍 (고전적 글쓰기 연습) 구멍 나는 지금 탁자 위에 앉아 검은 파도가 치는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 재앙은 모두 내가 불러온 것이다. 현실을 캄캄한 구멍 속에 집어넣으려 했던 결과, 이제 곧 내가 그 어둠에 삼켜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힘주어 말하건데, 나는 아무런 후회도 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 처음에는 부엌에 놔두었던 음식이 몇 개 없어졌다는 것을 눈치챈 정도였다. 대수롭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내가 먹어치운 뒤에 그 사실을 잊어버린 것일 터다. 나는 혼자 살고 있었고 내 기억력은 언제나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일은 흔히 일어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몇 번이나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다. 그러자 내 건망증이 범인이 아니라는 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 부엌에 올려놓았던 사과나 식빵들, 장을 보고.. 공감수 2 댓글수 0 2021. 8. 18.
  • 봄의 조각들 2020/04/16 1. 이것은 픽션이다. 더보기 봄의 조각들 아름다운 음악을 틀어놓으면 되지 않을까? 바보 같긴, 바로 그 아름다운 음악을 못 견뎌서 방금 전 카페에서 일행을 놔두고 도망 나왔잖아. 사내는 방 안에서 장롱에 기대앉은 채 중얼거렸다. 책상 위에 로라제팜이 30알이 넘게 있지만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쓰고 싶다. 생각해보니 단 한 번도 그런 것을 쓴 일이 없다. 더욱이 모두가 행복한 결말이라면. 그렇게 생각하자 사내의 얼굴이 유리로 만든 가면처럼 굳었다. 갈비뼈가 온통 피부를 뚫고 튀어나와, 장미꽃마냥 활짝 필 것 같은 흉통을 느꼈다. 그럼 더할 나위 없지. 실패한 원고만 가득한 삶이라도 끝나는 것이 삶이다. 시체라도 꽃처럼 핀다면, 사람들은 아름답다.. 공감수 0 댓글수 0 2020. 4. 16.
  • 동생의 기억 동생의 기억 형 주변에 항상 신기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기억한다. 늘 악기 케이스를 등에 매고 다니는 사람무리라든가, 볼 때 마다 줄담배를 물고 있는 더벅머리를 한 남자들이라든가 말이다. 형과 나는 십년을 훌쩍 넘기는 나이차가 있어서, 형은 동생이라기보다 조카쯤 되는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기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 형이 나를 같은 핏줄로서 아낀다는 것은 당시의 어렸던 나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형의 직업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일정하게 출퇴근을 하는 것도 아니었고 한량처럼 부모님에게 돈을 꾸지도 않았다. 다만 일주일에 몇 번인가 집에 돌아오지 않는 밤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으레 대낮에 집 앞의 평상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당시 여덟 살이나 됐을까 싶은 내가 학교에서 .. 공감수 0 댓글수 0 2020. 2. 4.
  • 슬퍼하는 나는 슬픔 자체가 슬픈 존재인가 슬퍼하는 나는 슬픔 자체가 슬픈 존재인가 최씨는 쉽게 슬퍼한다. 오늘 아침에는 교복 차림의 소년소녀들을 보고 슬퍼했다. 그들이 발랄했기 때문에, 그리고 곧 그들의 젊음이 탁하게 흩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젊음이라는 것의 덧없음에 대해 사유해보기도 전에 가로수를 보고 슬퍼했다. 그것이 도시계획에 의해 규칙적인 거리를 두고 일정하게 서있기 때문이었다. 인위성과 무위자연에 대해 저울질을 해보기도 전에 하늘에 구름이 너무 많아서 슬퍼했다. 이쯤 되니 최씨는 자신이 왜 슬퍼하는지도 알 수가 없어서 슬펐다. 그러나 딱히 논증할 것도 없었다. 슬픔은 기억나지도 않는 아주 오래 전부터 최씨의 뇌에 총알파편처럼 박혀있었고, 딱히 해결된 일도 없었다. 그러나 최씨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슬픔에 대해 말한 일이 없다. 애당초 .. 공감수 1 댓글수 1 2020. 1. 2.
  • 나의 작은 마음은 어디에 있나 나의 작은 마음은 어디에 있나 준영은 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는 계속 반복해서 네팔에서 사온 보리수 염주의 알을 세고 있었다. 몇 번을 세어도 107개나 109개가 될 뿐 도무지 108개라는 답이 나오질 않았다. 그 잡상인이 만들 때 108개를 정확히 넣지 않은 것은 아닐까, 그런 의문이 들면서도, 달리 할 일도 없어서 계속 세고 있었다. 보일러를 틀어놓은 방바닥은 따뜻했다. 이대로 죽게 되는가, 그런 생각을 했다. 백수로 지낸 지 5년 째.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아온 지 5년 째. 5년 내내 되풀이한 문장은 다자이 오사무의 그 유명한 였다. 무엇이 그리 수치스러웠는지 명확하게 기억나는 바는 없지만, 여하간 수치스러웠다. 단 한 푼도 벌지 않고 살면서도 겨울엔 바닥에 보일러가 돌아간다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공감수 1 댓글수 0 2020. 1. 2.
  • (완결미정)분노대리인의 수기 ...더보기 분노대리인의 수기 8월 26일. 오늘은 김가네에서 사온 김밥이 터져있었다.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한 줄에 4500원이나 하는 김밥이 포장될 때부터 터져있다니 이것이 말이나 되는 일인가? 모두 사회인 실격이다. 김밥집에서 터진 김밥을 파는 사회 따위 애당초 없는 게 낫다. 내가 돈이 썩어 넘쳐서 한 줄에 4500원 하는 김밥을 사는 게 아니란 말이다. 아무 김밥이나 먹을 셈이었으면 한 줄에 1000원하는 김밥으로 족하다. 김가네는 김밥 전문점이다. 김밥 전문점이면 김밥을 마는 사람도 김밥 전문가여야 한다. 동네 아줌마 데려다가 김밥 말게 해놓고 김밥 전문점이라고 하지 말란 말이다. 그러나 이따위 상황이 길마다 펼쳐져 있는 것이 현실 사회다. 이런 쓰레기 같은 것이 인류가 5천년에 걸쳐 만.. 공감수 0 댓글수 0 2019. 10. 16.
  • 악인의 둥지 악인의 둥지 벽 밖의 냉기가 거실까지 침범하던 날. 옷과 코트를 갖춰 입고, 분명 밖은 하얀 아침햇살로 가득할 날에, 내 다리는 현관 앞에서 무너졌다. 움직여야한다고 생각했지만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열심히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한 것 같았고 소리 없는 구토처럼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나무로 된 현관바닥은 차가웠고, 손을 뻗으면 닿을 현관문이 100m는 멀리 있는 것처럼 보였다. 27살. 어른이 될 수는 없었지만 스스로의 목숨을 책임져야한다고 목이 졸린 나이. 청바지를 뚫고 들어오는 냉기를 온 다리로 느끼며,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다고 느꼈다. 겁에 질린 손으로 핸드폰의 전원을 끄고, 힘이 풀린 다리를 밀며 곰팡이 냄새로 가득한 방으로 기어간다. 폐부와 심장.. 공감수 0 댓글수 0 2019. 5. 5.
  • 도망자 2017/12/24 완성. 1. 억지로 쓴 거 같기도 하고2. 그러나 혈통에 대한 이야기는 항상 쓰고 싶었다. 도망자―그리고 그 도달점에 대한 길지 않은 질문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가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은 내 열 살 무렵의 기억이었다. 내가 이미 잠들어있을 시간인 밤 열두 시 경이 되면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비틀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면서 짙은 알코올과 남성용 향수의 냄새가 뒤섞인 채 내게로 덮쳐들었다. 그리고 겨울이건 여름이건 변함없이 뜨거운 손이 내 볼을 어루만졌고, 그 손에서는 언제나 역한 공업용 기름 냄새가 났다. 내가 가만히 눈을 뜨면 잠결에 흔들리는 시야 속에 아버지의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 보였고, 그는 한껏 취한 채, 이 세상 그 어떤 근심도 그를 건드리지 못.. 공감수 0 댓글수 0 2017. 12. 26.
  • 그는 그곳에 있었다 2017/10/22 완성. 1. 나는 글을 쓴다.2. 나는 일을 한다. 그는 그곳에 있었다 시간은 오후 9시. K는 공원의 벤치에 앉아있었다. 밤이 이르게 오는 계절이라 해는 이미 졌지만 공원은 흰색과 주황색의 빛으로 찬연이 빛나고 있었다. 가로등들이 마치 사람이 만든 보름달 같다고, K는 생각했다. 사람들이 이제 달을 원하는 만큼 만들 수 있게 되었구나. 필라멘트에서 뻗어 나오는 빛살들은 희고 둔한 유리알을 거쳐 파도에 부딪치는 달빛처럼 어지러이, 그러나 둔중한 무게를 가지고 공원을 환히 밝히고 있었다. K는 일부러 골라잡은, 공원에서 가장 어두운 구석에 앉아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눈동자로 공원 전체를 살피고 있었다. 아직 너무 늦은 시간이 아니었기 때문인지 어린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며 놀고, 부.. 공감수 0 댓글수 0 2017. 10. 22.
  • 우화羽化의 꿈 2017/08/10 완성. 1. 나는 창작자로서 독자들에게 무엇을 주려고 했는가? 2. 붕괴 뒤에 건축이 있고 죽음 안에 진실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줬으면 했던 것일까. 그리고 거기서 자연스레 뻗어나오는 환희와 자유를, 나는 보여줄 역량이나 있었나. 우화羽化의 꿈 “번데기가 되었으면! 그렇다면 끝이 안 보이는 어둠과 감금 속에서도 안락을 찾은 채, 그러나 천변만화한 변화를 멈추지도 않은 채 언젠가 고치가 찢어질 것을 굳게 믿을 텐데.” F는 쇠락한 마을광장을 빙글빙글 돌며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내뱉었다. 노을 아래 그 광장은 온통 주황색과 붉은색 투성이였으며 사방에 고철이나 더 이상 쓸 수 없는 목재들이 무질서하게 버려져있었다. F는 자신이 이 마을광장에서 살기 시작한 지 몇 년이나 되었는가를 헤아려보았.. 공감수 0 댓글수 0 2017. 8. 10.
  • 법法의 안쪽으로부터 2017/08/08 완성. 1. 자가 표절 의혹.2. 실존주의는 사망했는가? 법法의 안쪽으로부터 나타나엘은 몹시 당황해있었다. 지금 그는 어떤 감옥의 철창 안에 있었는데, 몹시 좁고 지저분한 그 감방은 한 사람을 구속시키고 생활하도록 하기에 딱 알맞은 크기와 모양새만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너무 높이 있고 철창이 쳐져있어 보이지도 않는 단 하나 뿐인 창문이나 딱딱한 침대에 들끓는 빈대, 벼룩 따위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나타나엘이 자신이 왜 갇혀있는지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는 감방에서 자신이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간수에게 몇 번이나 상황의 해명을 요구했으나 그는 늘 무뚝뚝하고 퉁명스러운 말투로 따위의 대답만, 사실은 대답조차 될 수 없는 말마디만 내뱉는 것이었다. 애당초 사건의 발단부터가 나타나.. 공감수 1 댓글수 0 2017. 8. 8.
  • 은자 이야기 2017/08/01 완성. 1. 스승께서 실존의 절망에 멈춰버리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2. 나는 그를 나 자신보다 신뢰한다. 2017/08/02 추가분량 완성. 1. 일반 독자들은 매끄럽게 활주로에 랜딩하는 여객기를 바란다. 은자 이야기 K는 대지의 끝에 산다. 직각으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세운 흙집이 그의 집이다. K는 집을 지을 때부터 언젠가 풍랑이 이 절벽을 더 가파르게 깎는다면 그 집이 절벽 채로 바다로 무너져 내릴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한 인지가 사실 그가 절벽 위에 집을 세운 가장 큰 이유였던 것이다. 덕분에 그 집은 이 세상 그 어느 건물보다도 세계의 끝에 가까운 집이 되었다. 창문을 열면 아래로는 자잘한 암초들이 보이고 그 위로는 오로지 바람에 쓸리는 물결과 한도 .. 공감수 0 댓글수 2 2017. 8. 1.
  • 뿌리의 근심 2017/07/17 완성. 1. 장마철이라 비가 많이 온다. 뿌리의 근심 나는 뿌리다. 며칠 전부터 끊임없이 비가 내리고 있다. 더는 빗물을 마시고 싶지 않지만 나는 뿌리인지라 계속 마셔야만 한다. 이대로 가면 내 위에 뻗은 나의 몸체와 머리가 썩어버릴 것이 분명하지만 나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나는 뿌리라서 물을 마시도록만 설계되었고 입을 다무는 방법은 알지 못한다. 절망적인 마음에 내 몸체나 머리와 대화를 하고 싶었지만 나는 그 방법을 모른다. 나는 계속 물을 마시기만 하는 것이다. 내 모두가 썩어버릴 것을 알면서도 내게는 방법이 없다. 가끔 내가 있는 곳까지 잔뿌리를 뻗은 다른 뿌리들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 「그러나 우리는 뿌리일 뿐이지 않은가」라는 대답만 돌아올 뿐 전혀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 공감수 0 댓글수 3 2017. 7. 17.
  • 정자亭子의 슬픔 2017/07/10 완성. 1. 텍스트는 출판만을 위하여 창조되는 것이 아니다.2. 더 자유로워져야만 한다. 정자亭子의 슬픔 아주 오래 전에, 어쩌면 얼마 전에. 한 소년이 내 위에서 랭보를 읽었다. 나는 그가 시집의 단어 하나하나를 발음하며 읽었다고 명확히 기억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그저 잉잉거리는 날벌레 소리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이 연못 위에 꽤나 오랫동안 떠있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애당초 과거라는 것은 잘려진 반죽처럼 토막토막 나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 순서에 관계없이 뒤죽박죽으로 뭉쳐진 것이기 때문에 어느 사건의 시간대를 특정시키는 것이 내겐 커다란 골치다. 아무튼 확실한 것은 그 소년이 내 위에서 랭보를 읽었다는 것인데―그런데 어쩌면 보들레르일지도 모르겠다, 여하간.. 공감수 0 댓글수 0 2017. 7. 10.
  • 땅의 감금 2017/07/06 완성. 1. 나는 이제 내가 누구를(혹은 무엇을) 위해 글을 쓰는 지 어느 정도 알고 있다.2. 이 길도 결국은 끊고 떨치고 떠나는 길이다. 땅의 감금 곰팡이와 언젠가 먹어본 오래된 치즈 냄새가 나는 도시의 변두리에서 K는 태어났었다. K의 가족은 몹시 궁핍했다. 이미 백 년 이상 대물림된 가난에, 그들은 이미 항의하거나 심지어는 고통스러워하지도 않게끔 적응되어 있었다. 실상 가난이라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불운하거나 절망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사는 변두리의 기후에 있었다. 지옥의 동심원들처럼 깊고 깊은 내륙지방에 사는 그들에게는 수백 년간 단 한 번도 태양의 빛이 곧바로 내리쬔 일이 없었고, 사방은 철책과 붉은 벽돌의 담으로 막혀 바다나 해변을 본다는 것은 꿈속에서.. 공감수 0 댓글수 0 2017. 7. 7.
  • 어느 동물원이라는 오브제 2017/05/26 완성. 1. 새삼 느낀 것이지만 나는 역시 글 쓰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그 즐거움은 그 어떤 살아있는 자를 위함도 아니다. 어느 동물원이라는 오브제 우리 동물원을 찾아주신 단 한 명의 숙녀 분! 이 동물원을 책임지는 원장으로서 우리 모든 직원들을 대표해 크나 큰 환영의 인사를 표합니다! 보아하니 대단히 어리둥절하신 모양이군요. 그럴 법도 합니다, 우리 동물원의 이 세계적인 크기와 깊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전혀 유명하지도―사실은 이라는 단어조차 쓰기가 부끄럽죠!―, 심지어 그 누군가에게 알려진 일도 단 한 번도 없어 실상 숙녀 분이 우리 동물원의 첫 번째 관람객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말입니다. 아마 숙녀 분께서는 산에서 길을 잃으셨던 모양이죠! 그 등산복과 등산지팡이, 그리고 .. 공감수 0 댓글수 0 2017. 5. 26.
  • 구도求道 2017/05/17 완성. 1. 여러 일들이 있은 후에 나는 세속의 진지함을 고통스럽게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리고 존재의 진중함과 부조리를 다시 찾아내게 되었다. 구도求道 우선 내 젊은 시절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으로 삼아야할 것 같다. 그 시절 나는 독한 럼주를 마시고 궐련을 피우는 것을 즐겼으며, 친구들과의 모임을 좋아해 자주 찾아가는 것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즐거운 마음으로 스스로 모임자리를 계획하고 주관하기도 했다. 당시 나는 중간규모의 사무기기 제작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내게 맡겨진 일은 회사에서 만드는 제품들의 사용설명서를 쓰는 일이었다. 이것은 계획적으로 제품을 관찰하고 움직여보거나 한 뒤에 고객의 입장이 되어 문장과 도면을 창작하는 일이었으므로 다소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했다. 게다가 새로운 .. 공감수 0 댓글수 1 2017. 5. 17.
  • 유리감옥 2015/10/5 완성 1. 쓸 때는 신나게 썼다.2. 완성하고 보니 만족할 수도 불만을 가질 수도 없다. 유리감옥 K는 어리다. 하지만 어리다고 하여 아주 어린 것은 아니다. 구체적으로 그는 성인이 되기 직전에 있을 만큼 어리다. 신체적인 연령에 대한 설명이지만 사실 그보다 더 정확한 설명이 어디에 있겠는가. 정신이 몸에 귀속된 것이니만큼 신체와 정신은 비례할 수밖에 없다. 아무튼 그는 아직 성인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학생도 아니다. 한때 그의 친구였던 이들은 이제 고등학교를 졸업할 준비를 하고 있다. 계절은 가을이었다. 젊은 피가 활개치고 다니기에 좋고, 상념과 망념이 여학생들의 손목에 한 줄씩 그어지는 계절.K가 사는 단칸방과 마주한 건물의 일 층에는 작은 구멍가게가 하나 있다. K는 그곳을 자주.. 공감수 1 댓글수 0 2015. 10. 12.
  • 사직서 2015/4/17 완성. 1. 나는 나의 문학을 사랑한다. 2. 설령 내가 문학이라는 것의 정의를 내릴 수 없더라도. 사직서 어제는 골목 구석에서 죽은 고양이를 발견했다. 들어 올려보니 눈알은 뒤쪽으로 돌아가 있었고 내장은 몹시 딱딱했다. 필경 겨울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딱딱하게 얼어붙은 내장을 상상하며 그것을 꺼내 만져보고 싶은 욕망이 생겼지만 그러지 않았다. 나는 사람들의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시체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근처의 은행 화장실로 가 비누로 손을 씻었다. 도시에서 죽는 들짐승들은 무슨 병이든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그들에게 병사(病死)는 가장 자연스러운 죽음이다. 작년 한 해는 정말로 지랄 같았다. 어제, 즉 신년 1월 1일에는 죽은 고양이와 만났다. 오늘 나는 회사에 사직서를 냈.. 공감수 0 댓글수 0 2015. 4. 22.
  • 모든 것의 해답이 사랑에 있나 2015/01/16 완성. 1. 시 쓴다고 거의 반년동안 소설에 손도 안 대다가 쓴 것.2. 나도 몰라. 모든 것의 해답이 사랑에 있나 아가씨, 저와 대화 좀 하실까요? 저는 종교인도 아니고 피라미드 업체 판매사원도 아니며 변절자도 아니나 미치광이냐고 물으시면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군요. 그러나 걱정하실 것은 없습니다. 아! 물론, 제가 저 자신을 위험하지 않다고 자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디에 있겠습니까? 특정 시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시대에나 충동과 광기는 있었지요. 그것은 인류의 역사가 항상 피와 정액―실례.―으로 쓰여 졌다는 것이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범국제적 비관론자로 보일지도 모른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이해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저는 이.. 공감수 0 댓글수 0 2015. 1. 17.
  • 교차로 2014/8/4 완성. 1. 척 팔라닉의 을 읽었다. 교차로 그는 빌라의 복도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복도 창문으로 맞은편 건물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맞은편 건물의 한 창문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남자의 기억에 따르면 근 몇 달간 그 집은 불이 꺼져있는 날이 없었다. 창문을 통해서 가끔 파자마 차림의 삼십 대 정도로 보이는 여자가 집안에서 돌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뭔가를 정리하기도 하고 청소를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간간히 팬티바람의 남자가 보였다. 그도 역시 삼십 대 정도로 보였다. 남자는 미광이 비쳐 뿌옇게 보이는 눈동자로 그 장면을 그저 쳐다보고만 있었다. 이제 얼마 뒤면 어린 여자아이 하나가 보일 것이었다. 왜냐하면 전에도 매번 그랬기 때문이다. 일곱 살 즈음 되어 보이는 어린 여자.. 공감수 0 댓글수 0 2014. 8. 13.
  • 모든 이름 있는 것들에 대한 그의 혐오 2012년 3월에 집필한 장편소설. 실질적으로 내 최초의 장편소설이다. 모든 이름 있는 것들에 대한 그의 혐오 임명준 0. 우선 알아둬야 할 것들에 대하여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짚고 넘어가야할 것들이 몇 가지 있다. 나는 이제부터 어떤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이다. 이 남자는 인생을 완전히 실패했으며, 그의 이야기는 몹시 듣기 괴롭고 끔찍한 사건들로 도배되어있다. 그러나 나는 이 남자에게 관심을 가졌다. 내가 누구냐고? 나는 단순한, 조작된 관찰자다. 나는 전기소설의 작가도 아니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전지적인 누군가도 아니며, 신이나 운명 따위는 더더욱 아니다. 나는 그냥 와 그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그리고 그의 주변 인물들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한정적.. 공감수 0 댓글수 0 2013.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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