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法의 안쪽으로부터
2017/08/08 완성.
1. 자가 표절 의혹.
2. 실존주의는 사망했는가?
법法의 안쪽으로부터
나타나엘은 몹시 당황해있었다. 지금 그는 어떤 감옥의 철창 안에 있었는데, 몹시 좁고 지저분한 그 감방은 한 사람을 구속시키고 생활하도록 하기에 딱 알맞은 크기와 모양새만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너무 높이 있고 철창이 쳐져있어 보이지도 않는 단 하나 뿐인 창문이나 딱딱한 침대에 들끓는 빈대, 벼룩 따위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나타나엘이 자신이 왜 갇혀있는지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는 감방에서 자신이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간수에게 몇 번이나 상황의 해명을 요구했으나 그는 늘 무뚝뚝하고 퉁명스러운 말투로 <당신은 구속되었소.> 따위의 대답만, 사실은 대답조차 될 수 없는 말마디만 내뱉는 것이었다. 애당초 사건의 발단부터가 나타나엘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평소처럼 직장에서 퇴근해 저녁을 먹고 약간의 운동을 한 뒤, 허브티를 마시고 ―지금은 이미 감촉조차 잘 기억나지 않는―침대에 누워 자고 있었는데, 새벽 즈음엔가 난데없이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들이닥치더니 그의 얼굴에 검은 가죽자루를 씌우고 어디론가 한참을 끌고 가더니 이 감방에 처넣어버린 것이었다. 감옥에서 눈을 떴을 때 그는 제일 먼저 회사의 상사에게 전화를 해야겠다는 생각부터 했다. 단 한 번도 지각하거나 결근한 일이 없는 나타나엘이 갑자기 회사에 나오지 않는다면 상사는 분명 불쾌해하면서 전혀 나타나엘에게 이득이 될 리 없는 상상력을 발휘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철창을 붙들고 간수에게 전화기를 좀 가져다 달라고 했으나,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면서 <무슨 소릴 하는 거요? 당신은 구속된 몸이고 전화 따위를 할 수 있는 자유는 없소.> 라고 단정지어버리는 것이었다. 나타나엘은 흥분하여 <나를 납치한 당신들이 도대체 무슨 집단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일에 대해 응분의 대가를 받게 될 거요. 나는 건실한 직장인이고 어엿한 사회의 일원이며 존경받을만한 국민이란 말이오. 그리고 도대체 당신들 때문에 내가 직장을 잃게 된다면 그건 누가 보상해줄 거요?> 라고 외치자 간수는 또 한 번 웃으면서 <뭔가 착각하고 계시군. 우리는 바로 그 국가를 위해 일하는 사법기관이오. 당신은 정당한 절차에 의거하여 이곳에 구금되었단 말이오.> 라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해대는 것이었다. 정당한 절차라니? 도대체 언제 그 절차라는 것이 진행되었는지 나타나엘로서는 전혀 모를 일이었다. 나타나엘은 이 답답한 간수에게 대화를 시도하는 것을 잠시 포기하고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평소에도 그는 매우 이성적인 성격이라 어떤 사건이 벌어지면 그 이유와 인과관계를 유추해보는 데에 길들여져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도 빈대가 들끓는 침대에 걸터앉아 혹시 자신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언가 죄를 지었고 그로 인해 구속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시작한 것이다. 물론 저 간수의 말이 완전히 거짓일 가능성도 있었다. 어쩌면 이 감옥은 나타나엘의 정부와는 좁쌀만큼도 상관없는 곳이며 나타나엘을 납치한 그 제복 입은 남자들이나 간수도 나타나엘을 구금시켜놓는 것으로 재물이나 혹은 그와 비슷한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범법자들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한 평짜리 감방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라는 것이 턱없이 부족하고 형편없다는 것이었다.
나타나엘은 뒷짐을 지고 감방 안을 빙빙 돌면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건 누군가의 모략에 걸려든 것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타나엘은 살면서 담배꽁초를 길거리 구석에 버리거나 무단횡단을 하는 정도의 범법 밖에는 저지른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새벽에 갑자기 들이닥쳐 체포―그것을 체포라고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지만―하여 그대로 감방에 던져 넣는 정도라면 그 죄질이 아주 무거워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나타나엘을 모략중상하여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 나타나엘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나타나엘은 다시 간수에게로 가 말했다. “당신들이 무슨 소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평생을 결백하게 살아온 사람이오. 물론 사람이라면 살아가다 몇 가지 실수를 하기도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내가 저질러온 실수들은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었소. 당연히 이런 감방에 집어 던져질만한 종류의 것도 아니었고! 그러니 당신들은 큰 실수를 하고 있는 거요. 분명 누군가의 중상모략으로 내가 이 꼴이 된 것이 틀림없으니 당신들이 더 철저히 조사를 한다면 내가 결백하리라는 것이 분명 밝혀질 것이오.” 그러자 간수는 철창 밖에서 나타나엘의 눈동자를 지긋이 바라보더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일에는 관심도 없고, 게다가 내 소관도 아니오. 당신이 무슨 이유로 이 감옥에 잡혀 들어왔든 내겐 하등 상관이 없는 일이오. 내 직무는 그저 당신이 밖으로 탈출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것뿐이니까.” 그 말에 나타나엘은 놀라서 내뱉었다. “그럼 당신은 내가 무슨 근거로 잡혀 들어왔는지도 모른다는 거요?” “물론이오. 보통 나 같은 간수들은 대부분의 수감자들이 어떤 인물이고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모르오. 우린 그냥 우리 책임을 다 하고 그에 대한 대가인 월급을 받을 뿐이지.” “이것은 완전히 코미디로군!” 나타나엘은 어이가 없다 못해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나타나엘이 절망스럽게 웃는 얼굴로 침대에 걸터앉자 간수에게는 그 모습이 딱해보였는지 그는 한 마디 말을 붙이는 것이었다. “가끔 우리도 수감자들이 무슨 죄목으로 잡혀왔는지 아는 방법이 있소. 그런데 그건 당신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군.” “그 방법이라는 걸 들어나 봅시다.” 나타나엘이 이미 별 기대도 하지 않는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바로 수감자들 자신에게서 듣는 거지. 예를 들어 당신이 이곳에 오기 전에 바로 이 감방에 갇혀있던 자는 자신이 저술하여 배포한 반체제주의 서적 때문에 이곳에 잡혀온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었소.” “그래서 그는 사상범으로 잡혀온 겁니까?” 나타나엘이 물었다. “확신할 수는 없소. 말했다시피 그 양반도 스스로 추측하기에 자신이 잡혀올 만한 이유나 근거가 그 책 밖에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뿐이니까. 그러나 우리 윗사람들이나 고등법원의 법관들이 실제로 무슨 이유로 그 남자를 구속시켰는지 우리 간수들로서는 알 도리가 없소.” “그는 어떻게 되었죠?” 그러자 간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의미심장하게 대답했다. “그것 역시 알 도리가 없소. 감옥에서 그 자를 빼내간 요원들은 우리보다 훨씬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고 그들이 수감자를 빼가서 어디로, 혹은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 질문할 수 있는 권한이 간수들에겐 없소.” “그렇다면 도대체 이 사법체계는 각각 유기적으로 연결된 부분이 하나도 없고 토막 난 기계처럼 각자 독립적으로 움직이기만 하는 것이로군!” 나타나엘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노파심에서 말하자면 아마 수감자를 이동시키는 요원들도 자신들이 담당한 수감자가 어디로 이동해야하는지만 알 뿐 어떻게 되는지는 전혀 모를 거요. 왜냐하면 분명히 그들보다도 높은 지위와 권한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테고, 기본적으로 법원에서 오고가는 정보들은 전부 기밀사항이기 때문이지. 우리는 그냥 각자 우리의 직무만을 다 할 뿐이오.” “맙소사.” 이제 나타나엘은 얼굴을 두 손에 파묻고 이 절망스러운 사태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조차 포기하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면 나타나엘이 무슨 짓을 하든 이 감방에서 더 많은 정보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해보였다.
나타나엘은 침대 위에서 한참을 눈을 감고 앉아 있다가 퍼뜩 무언가가 떠오르기라도 한 듯 입을 열었다. “절차.” 유레카를 외치듯이 내뱉어진 그 단어에 간수는 나타나엘쪽으로 고개를 향했다. “당신은 분명 내가 적법한 절차에 의해 구속되었다고 말했소.” “그건 사실이오.” “그런데 나는 그 제복 입은 사람들이 내 방에 들이닥칠 때까지 나에 대한 어떠한 종류의 소송이나 기소가 이루어졌다는 정보를 단 한 번도 들어본 일이 없소.” 그러자 간수는 껄껄대며 크게 웃었다. “내가 맞춰보지. 당신은 그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참가한 일이 없으니 자신과 무관한 일이리라고 주장하려는 거지.” 나타나엘은 동의의 뜻으로 간수의 눈동자를 곧바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법률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생각일 뿐이오. 만약 죄인이 자신에 대한 소송절차에 참가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죄인에게 변론의 기회를 주는 것과 같소. 그런데 인간이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얼마든지 거짓말을 하는 짐승이라 피고인이 소송에 참가한다는 것은 법관들이나 혹은 사법체계 자체에 대해서 죄인이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뜻이오. 고등법원의 법관들이 수호하고 있는 사법체계란 그야말로 절대 손상시킬 수 없는 성스러운 것이기에, 죄인이 거짓말로서 사법체계를 모독할 수 있는 기회 자체를 차단시켜야 하오. 그래서 누군가에 의한 기소가 이루어지고 나면 법은 피고인을 완전히 방치하고, 또 사법체계에 접근할 기회를 온전히 차단시킨 뒤에야 일을 시작하지. 내 생각에 당신이 체포되기 이미 수 달 전부터 법률가와 조사원들이 당신 주변을 온통 뒤지고 다녔을 거요. 단 당신이 절대로 눈치 채지 못하도록! 그리고 틀림없이 당신이 죄를 지었다는 증거가 확정되면 그때 요원들을 보내 당신을 체포하는 거지.” 나타나엘은 간수가 그렇게 즐거워하며 길게 말을 늘어놓는 것을 처음 들었다. 그는 자신이 몸을 담고 있는 사법체계라는 것이 그토록 완전무결하며 성스럽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타나엘은 반발심이 들기도 하고 화가 나서 내뱉었다. “그렇다면 내게는 변론의 기회 따위는 전혀 없는 거요?” “법은 실수를 하지 않소.” 간수는 그 말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
나타나엘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 입을 다물고 감방 안을 빙빙 돌기 시작했다. <마치 아무것도 못하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철창 안의 짐승 같군!> 나타나엘은 열을 내며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간수의 말대로 법이 절대 실수를 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나타나엘의 삶에서 중대한 범죄행위를 찾아냈다는 것이니, 그것이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그러나 아무도 해답해줄 사람이 없었다! 당장 저 간수부터가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지만 그 일이 무얼 위해 행해지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고위법관들을 포함하여 법원이라는 기관에 소속된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실정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끔찍한 생각이 한 가지 떠올랐는데, 만일 사법기관의 일꾼들이 자신들은 절대 실수를 하지 않는다고 믿으면서 실수를 해버린다면, 정말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이 변호의 기회도 갖지 못하고 감금 당해버릴 수도 있다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나타나엘이 지금 감방에 있는 것도 사실은 나타나엘과 동명이인인 어떤 자가 범죄를 저질렀는데 서류상의 실수로 나타나엘이 그 동명이인의 범죄자와 혼동되어 이런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 동명이인이 뒷골목의 폭력배든 마을 공장의 통장이든 일단 나타나엘의 이름이 적힌 서류에 직인이 찍히고 나면 법관이라는 족속들은 사실을 확인하기는커녕 나타나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다시 조사해볼 의지조차 없을 것이었다. 게다가 나타나엘은 자기 자신을 변호할 기회조차 절대로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생각이 이쯤 이르렀을 때 나타나엘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간수에게 말했다. “그래서 난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요?” 그러자 간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미 말했다시피 난 더 이상 아는 게 없소. 난 그저 당신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간수일 뿐이오.”
나타나엘은 계속 의미 없이 반복되기만 하는 대화에 지쳐버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는 높이 난 창을 바라보았는데, 회색의 거무죽죽한 구름이 하늘을 온통 뒤덮어 그것이 하늘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다. 새 한 마리 날지 않았고 구름은 납빛으로 낮게 짓누르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문뜩 나타나엘은 일상에서 사귀었던 친구들이나 가족들에게 생각이 미쳤는데, 아마 지금쯤 그들은 나타나엘의 행방에 대해 알 수가 없어 당황하고 있을 것이었다. 아니면 법원에서 그들에게 통보를 했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간수의 말을 들어도 이 사법체계의 형태를 대충 상상해보아도 법원이 나타나엘의 지인들에게 상황을 통보했을 일은 아마도 없을 것 같았다. 그들은 그저 도도하고 자신들은 신성한 법을 모신다는 자만에 부풀어 사소하지만 사실은 중요한 일들에 대해서도 전연 관심을 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려면 어떤 일인가. 모르긴 몰라도 직장에 전화도 할 수 없는 지금 나타나엘은 이미 사직처리 되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호운이 와 나타나엘이 감방에서 벗어나 다시 사회로 나간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쌓아온 직위와 재물은 모조리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나타나엘은 사회에서 사라져버린 사람이나 다름없었고,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이 감방을 벗어나는 것이나 자신이 왜 구속되었는지, 법관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도 생각하였듯 나타나엘은 이미 갇힌 짐승처럼 잉여의 존재가 되어 무슨 처벌이 내려지든, 설령 갑자기 나타나엘 자신이 사라져버리든 아무 중요성도 가지지 못하는 것이었다. 나타나엘은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이런 일은 언제나 닥쳐올 수 있는 것이었어. 게다가 모든 이들에게!” 간수는 나타나엘의 말소리를 듣고 곁눈으로 그를 보더니 다시 정자세로 뒤돌아섰다.
며칠 밤인가가 지났다. 이제 나타나엘은 자신이 지내는 감방에 대해서도 별 불만을 갖지 않게 되었다. 감방에 있으나 거리에서 활개를 치고 다니나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며칠간 나타나엘의 머릿속을 꽉 채워버린 것이었다. 침대에 사는 빈대와 벼룩 때문에 나타나엘의 몸은 온통 울긋불긋해졌지만 나타나엘은 그런 사실에도 그다지 관심을 주지 않았다. 나타나엘은 더 이상 간수와 무의미한 대화를 나누려고 시도하지도 않았고, 매일 매일이 날짜나 밤낮의 경계도 없이 혼탁하게 되어 시간이 흐르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나타나엘이 실상 아무 생각도 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는 분명 무언가에 골몰하여 있기는 했다. 다만 그것을 생각이라고 해야 할지 혹은 사색 따위와 닮은 것이기나 한지도 애매한 일이었다. 그는 그냥 가끔 감방의 시멘트벽을 만져보거나 철창의 금속성 냉기를 느끼며 한없이 무언가에 골몰해있었다. 나타나엘은 분명 창밖을 자주 내다볼 수도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고의로 그런 짓을 꺼리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갈색 제복을 입고 낮은 모자를 쓴 남자가 나타나엘의 감방 앞에 나타났다. 그는 무관심한 눈으로 나타나엘을 슥 쳐다보더니 간수에게로 가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속삭이는 것이었다. 간수는 직립한 자세로 남자의 말을 들으며 단 한 마디의 대꾸도 하지 않고 몇 번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했다. 제복의 남자는 금세 떠났고, 나타나엘이 의문의 눈빛으로 간수를 쳐다보자 간수는 무덤덤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별 거 아니오. 그저 당신에 대한 절차가 더 진행됐을 뿐이오.” 나타나엘은 대답을 듣고도 초점이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간수 쪽을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패배조차도 그다지 패배라고 단언할 수가 없다.” 어느 날 밤 나타나엘은 침대에 앉아 있다가 돌연 내뱉었다. 나타나엘은 자신이 태어난 이래의 일들을 쭉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믿어왔던 것들, 말하자면 나타나엘이 간수에게 토로했듯이 건실한 직장인에 사회의 구성인물이고 존경받을만한 국민이라고 스스로 믿어왔던 것들에 대해서도 이리저리 각도를 바꾸고 뒤집어보며 사고해보았다. 그런데 뭐가 어찌 되었든 나타나엘은 지금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말미암아 감방에 갇힌 채 어느 누구도 모를 결과를 마냥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나타나엘은 운명이라는 것이 잔혹한가에 대해서 자문했다. 그러나 그 말 자체가 다소 이상한 것이었다. 운명은 잔혹하지도 친절하지도 않았다. 운명은 그저 운명이었고 그것은 자신의 본성대로 별 다른 법칙성도 없이 굴러다니는 것이었다. 나타나엘은 자신이 그것을 반항의 묵시하는 눈동자로 쳐다볼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몇 가지 참담한 이유로 인하여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 참담한 이유라는 것도 자신이 수인이라는 입장에서 보자 애당초 참담할 것도 없는 사실이었다. “많은 일들이 아무 이유도 없이 일어나곤 하지.” 나타나엘은 침대에 누운 채 중얼댔다.
어느 새벽 나타나엘이 깊은 잠에 들어있을 때, 간수가 나타나엘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그 때문에 나타나엘은 눈을 뜨고 일어났는데, 워낙 감옥의 조명이 어둡고 게다가 막 일어난 참이라 흐린 시야 안에 간수를 포함한 세 명의 남자가 보이는 것이었다. 새로 나타난 두 남자는 얼마 전 찾아왔던 갈색 제복의 남자와 같은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이제 침대 위에 앉아있는 나타나엘을 쳐다보고 있었고, 간수는 큰 소리로 말했다. “보시오. 이 분들이 왔다는 건 당신의 법무절차가 거의 끝나간다는 증거요.” “그것은 기쁘게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군.” 나타나엘은 들릴 듯 말 듯하게 중얼거렸다. 간수는 허리춤에 찬 열쇠꾸러미를 꺼내더니 감방의 문을 열었다. 나타나엘은 그대로 침대에 앉아있었는데, 제복차림의 남자 둘이 감방 안으로 들어오더니 나타나엘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면서 한 남자가 나타나엘에게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당신은 신성한 법의 일부가 되었으니 당신에게 참 잘 된 일이요.” 나타나엘은 그 말을 듣고 그저 너털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들은 나타나엘의 양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처음 나타나엘이 그의 집에서 체포되었을 때처럼 가죽부대를 머리에 씌웠다. “걸으시오.” 누군가가 말했고, 나타나엘은 순순히 그 말을 따랐다.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두 남자가 나타나엘의 양팔을 잡아주며 방향을 제시했다. “좀 걸어야 할 거요.” 둘 중 한 사람이 말했다.
그들은 오랫동안 걸었다. 나타나엘은 지금 자신이 어디로 가는 지도 몰랐고, 무얼 위해 가는 지도 몰랐고, 지금 나타나엘이 밖에 있는지 감옥 안에 있는 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전연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나타나엘은 그저 자기 발걸음에 집중하며 한 발짝 한 발짝을 떼는 그 구두밑창의 감촉을 신선한 샘물을 마시듯이 즐기고 있었다. 또 한참을 걷자, 나타나엘은 자신이 눈동자를 최대한 아래로 하면 가죽부대의 뚫린 방향으로 자신의 구두와 길바닥을 한정적으로나마 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언제부터인가 그는 초록색 일직선 위를 걷고 있었다. 나타나엘은 이 모든 일들에 대하여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 무슨 코미디란 말인가! 그러나 이제 그에게 불만을 토로하는 기색은 없었고, 그저 근거를 알 수 없는 웃음만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 걷고 나자 세 사람은 동시에 멈췄다. 그리고 제복의 남자가 나타나엘의 머리에서 가죽부대를 벗겼는데, 나타나엘은 자신이 아주 어둡고 동시에 이상한 흰빛의 조명으로 비춰지는 방 안에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 끝, 방의 가장 깊은 곳에는 어두운 흰빛 속에서 교수대 하나가 고고하게, 마치 오래 전에 죽어 뼈만 남은 태곳적 신神의 시체처럼 경건하게 서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