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화羽化의 꿈
2017/08/10 완성.
1. 나는 창작자로서 독자들에게 무엇을 주려고 했는가?
2. 붕괴 뒤에 건축이 있고 죽음 안에 진실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줬으면 했던 것일까. 그리고 거기서 자연스레 뻗어나오는 환희와 자유를, 나는 보여줄 역량이나 있었나.
우화羽化의 꿈
“번데기가 되었으면! 그렇다면 끝이 안 보이는 어둠과 감금 속에서도 안락을 찾은 채, 그러나 천변만화한 변화를 멈추지도 않은 채 언젠가 고치가 찢어질 것을 굳게 믿을 텐데.” F는 쇠락한 마을광장을 빙글빙글 돌며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내뱉었다. 노을 아래 그 광장은 온통 주황색과 붉은색 투성이였으며 사방에 고철이나 더 이상 쓸 수 없는 목재들이 무질서하게 버려져있었다. F는 자신이 이 마을광장에서 살기 시작한 지 몇 년이나 되었는가를 헤아려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셈으로는 구할 수가 없는 숫자였다. 그는 자신의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언젠가부터 옅은 갈색으로 변하기 시작한 그 무성한 수염들은 그의 쇄골까지 지저분하게 내려 와있었다. 그는 자신이 몇 살인지도 몰랐고 언제부터 마을광장에서 살았는지도 몰랐으며 단순히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엄청나게 오랜 시간동안 자신이 죽지도 않고 움직이는 청동상처럼 광장에 붙박여있다는 것이었다. F는 과연 자신에게 어린 시절이라는 것이 있었는지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전혀 생각나는 바가 없었다. 노쇠하여 기억력이 좋지 않아진 것인지, 아니면 정말 그에게 어린 시절이라는 것은 없어서 뜬금없이 노인으로 생겨나 마을광장에 처박혀버린 것인지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는 계속하여 광장을 돌다가 버려진 유리조각을 하나 집어 들었다. 그것을 햇빛이 반사되도록 비스듬히 들고 자신의 얼굴로 향하자, 쇳물로 만든 것 같은 딱딱하고 주름진 얼굴이 보였다. 그런데 그것은 언제 비춰보든 항상 같은 모양이었다. 다른 모양이었던 때가 있기나 한가? F는 도무지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그는 유리조각을 집어던지고 절망에 빠져 자신의 침낭으로 향했다. 광장 구석의 어느 계단참 밑, 언제나 그늘이 지는 그곳에 F의 침낭과 음식, 몇 가지 잡동사니들이 쌓여있었다. F는 진흙으로 만든 인형이 무너져 내리듯이 침낭 위로 쓰러졌다. <번데기가 되었으면!> 그는 눈을 감은 채 또 한 번 같은 문장을 마음속으로 반복했다. 그의 주변에는 이미 상하기 시작한 음식들 위에 날벌레들이 왱왱거리는 소리가 시끄러웠고 오물과 썩은 야채 따위의 냄새가 지독하게 피어올랐다. F는 오래 전부터 이곳에서 살았는데 어째서인지 그는 굶어죽거나 병에 걸리는 일도 없었고, 이 마을광장에는 여름도 겨울도 오지 않았다. 그는 항상 자신이 꽉 막힌 막다른 골목에 쓰러져있다고 생각해왔고 어느 모로 생각해봐도 그것이 사실인 것 같았다. 오래 전부터 F는 은연중에 자신의 죽음을 희망해왔지만 그의 교묘한 직감은 그가 절대 죽을 수 없다고 저주 같이 속삭이기만 하는 것이었다. F는 침낭 위에 쓰러진 채 고개를 돌려 눈을 떴는데, 시선 저 끝에 보이는 벌레 먹은 축축한 널빤지는 이미 오래 전부터 항상 그곳에 있었다. 그 누구도 그것을 치우지 않았고 F 자신도 그 널빤지에 대해 아무런 감상도 갖고 있지 않았다. 실상 그 광장에 놓인 모든 폐기물들이 마찬가지였다. 그것들은 썩지도 불타지도 사라지지도 않고 심지어 바람에 움직이지도 못하며 F 자신과 같이 그저 천년만년 그곳에 버려져있기만 했다. 변화의 낌새 같은 것은 이 광장 어디에도 없었다. F는 무의미하게 자신의 낡은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광장이 늘 노을빛이라는 것을 저주했다. 그런데 그 저주도 이미 몇 년을 반복해온 것이었고, 아무리 저주해봤자 해는 지지도 않고 머리 꼭대기에 걸리는 일도 없이 항상 비스듬히 광장과 납덩어리 같은 구름들을 붉게 비추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거짓말 같았으나 사실은 이 광장의 모든 것이 비수처럼 찔러대는 진실이었다. F는 눈물을 흘리며 다시 침낭에 얼굴을 파묻었다.
모든 존재들이 아무런 근거도 이유도 심지어는 목적도 없이 버려져있는 것 같다고, F는 늘 생각해왔다. 물론 자기 자신도 포함해서 말이다. F의 일과라고 해봤자 매일 똑같았던 것이, 잠에서 깨면 노을빛인 광장을 서성거리며 절망하고 좌절하다가 번데기가 되는 것에 대한 꿈을 꾸고, 너무 걸어 다리가 저려오면 침낭에 쓰러지고,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면서 잠들었다가 제대로 잔 것 같지도 않은 채 잠에서 깨면 또 이전 그대로인 붉은빛 광장 앞에 황망하게 맞서있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는 가끔 분노에 차 도대체 어디를 향한 것인지도 모를 저주를 퍼붓다 주저앉아 다시 울곤 했다. F는 자신에게 의식이 있다는 것이 신의 저주처럼 생각되었다. 아니면 저 하늘 높은 곳에 있는 그자의 악의적인 심심풀이 장난이라든가 말이다. 저 널빤지나 깨진 유리조각들, 고철들은 F와 똑같은 처지임에도 절망하고 저주할 줄을 몰랐다. 왜냐하면 그것들에게는 의식이 없고, 같은 존재라도 F보다 훨씬 더 철저하게 버려져있기 때문이었다. 그것들은 생각이나 의문조차 버려져있었다! 그러나 F는 그런 널빤지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널빤지나 고철 따위가 된다면 꿈도 꾸지 않는 무無와 공空의 세계에서 안락하겠지! 그러나 F는 그 자리에 있는 자체로 침묵하는 사물이 되기보다는 번데기가 되고만 싶다는, 자신도 이유를 잘 알 수 없는 갈망으로 매일을 울부짖었다. 그는 처절하게 안락을 바랐지만 동시에 절대로 안락하고 싶지 않았다. 안주한다는 것이 죄악처럼 생각되었는데 그러한 선악의 구분이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지도 모르면서, 그 늙은이는 서성거리고 고함을 지르고 울고 쓰러지며 고통 속에 잠겨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매일, 그야말로 매일 매일 반복되었고 영원히 끝나지 않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어떤 남자가 광장에 나타났다. 그자는 햇빛을 가리려고 밀짚모자를 쓰고, 몹시 닳고 낡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드러난 팔뚝이나 목덜미가 새까맣게 탄 것이 어떻게 보나 나그네 같았다. 그런데 그는 양 손에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았고 맨발에 나무와 끈으로 만든 샌들을 신고 털레털레 나타난 것이었다. F는 몹시 놀라 둥그레진 눈동자로 그 나그네를 쳐다보고 있었다. 사람을 보는 것이 너무도 오랜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나그네는 밀짚모자를 추켜올리고 광장을 슥 둘러보더니 F에게로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오는 것이었다. <저것이 악마이려나?> F는 무심결에 그렇게 생각했다. “노인장, 말 좀 물읍시다.” 나그네의 목소리는 겉보기보다 훨씬 어리고 카랑카랑한 음색이었다. “나는 이 마을에 들어와 세 시간 가량을 돌아다녔는데 그 어디에도 사람이 없고 이곳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바로 당신이오. 건물과 가게들은 멀쩡히 있는데 왜 아무도 이곳에 없는 거요?” F는 그 나그네가 충분히 가까이 왔기 때문에 드디어 그의 눈동자를 볼 수 있었는데, 나그네의 눈동자는 청회색으로 번쩍거렸고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있을 것만 같아 보였다. F는 더듬거리다가 대답했다. “오래 전에 이웃마을에 돼지농장이 생겼소. 안 그래도 불경기만 지속되던 이 마을에서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이웃마을의 커다란 돼지농장으로 모조리 옮겨가버렸소.” “노인장은 왜 가지 않았소?”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나그네가 물었다. “나는 이 광장에서 수 년 간 번데기가 되는 방법을 고심하고 있소.” F의 대답에 나그네는 팔짱을 끼더니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그는 대뜸 물었다. “이웃마을에 가면 볼거리가 좀 있소?” “듣기로는 큰 울타리 안에서 다 자란 돼지들을 도축장으로 끌고 갈 때 그것들이 꽥꽥거리는 모습이 볼만하다고 하오.” 그러자 나그네는 갑자기 위악적이고 높은 목소리로 웃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돼지농장은 이웃마을에 있는 것이 아니군!” F는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몰라 주춤거리면서 그저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러자 나그네는 갑자기 F에게 질문하는 것이었다. “나 같이 쉴 곳 모르고 돌아다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게 무언지 아오?” “글쎄, 나는 항상 이 광장에서만 살기 때문에……” “칼과 성냥이오. 이 두 가지만 있으면 마을에를 가든 사막에를 가든 심지어 눈밭뿐인 설국에를 가든 무서울 게 없지.” “그래서 짐이 없군.” F가 중얼거렸다. “그렇지. 그리고 지금 이 마을에서 필요한 건 오로지 성냥뿐이오.” 그렇게 말하더니 나그네는 밑도 끝도 없이 F의 따귀를 있는 힘껏 올려붙이더니 깜짝 놀란 그의 목덜미를 잡아 무시무시한 힘으로 광장 구석에 던져버렸다. 얻어맞고 던져진 F가 얼이 빠진 채 볼을 부여잡고 있는 동안 나그네는 F의 침낭, 잡동사니, 음식, 옷 따위가 들어있는 나무상자를 거칠게 한 군데로 모아 쌓았다. 그리고 그는 주저하는 기색도 없이 주머니에서 꺼낸 성냥에 불을 긋고 F의 물건더미에 던져버리는 것이었다. 불은 순식간에 타올랐다. 새까만 연기를 뿜어내면서 침낭과 물건들은 점점 재가 되어갔고 불길은 악마의 혓바닥처럼 날름거리며 높이 치솟았다. 나그네는 그 꼴을 잠시 보고 있더니, F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밤이 오기 전에 난 떠나야겠소.” 그리고 그는 터벅터벅 광장 밖으로 걷더니 연기라도 된 듯 사라져버렸다. F는 황당하고 겁이 난 채로 불길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의 모든 것이 재가 되는 것을 바라보고 있으니 갑자기 형언할 수 없는 활기와 함께 공포가 그의 혈관 속을 도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물건들이 다 타버리고 불길이 꺼질 무렵, 갑자기 해가 졌다. 사방이 새까맣고 암청색 하늘에는 달과 별들이 떠올랐다. F는 이제 일어서서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살면서 처음 맞는 밤이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광장조차도 검은색이었고 어디에도 노을은 남아있지 않았다.
F는 광장의 바깥, 멀리 보이는 마을의 현관에 짙은 그림자가 진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밖에는 침엽수와 활엽수들이 마구잡이로 어둠 속에 뭉개져있었고 작은 오솔길이 분명히 그곳에 있을 터였다. <번데기가 되었구나.> 하는 믿음이 명확한 근거도 없이 F의 마음속에 부풀어 올랐다. 그는 오솔길을 따라 떠나자고, 인생 최초의 결심을 했다. 그리고 그는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