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이름 있는 것들에 대한 그의 혐오
실질적으로 내 최초의 장편소설이다.
모든 이름 있는 것들에 대한 그의 혐오
임명준
0. 우선 알아둬야 할 것들에 대하여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짚고 넘어가야할 것들이 몇 가지 있다. 나는 이제부터 어떤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이다. 이 남자는 인생을 완전히 실패했으며, 그의 이야기는 몹시 듣기 괴롭고 끔찍한 사건들로 도배되어있다. 그러나 나는 이 남자에게 관심을 가졌다. 내가 누구냐고? 나는 단순한, 조작된 관찰자다. 나는 전기소설의 작가도 아니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전지적인 누군가도 아니며, 신이나 운명 따위는 더더욱 아니다. 나는 그냥 <그>와 그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그리고 그의 주변 인물들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한정적이며 순간적인 관찰자다. 이 이야기가 끝을 맺고 나면 자연스럽게 나라는 관찰자도 사라질 것이다. 나에 대한 이야기는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 말해둬야 할 것들이 있다. 나는 어떤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어떻게 태어났는지는 모른다. 왜냐하면 남자 자신도 그 기억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는 남들이 태어나듯이, 어떤 청년과 아가씨가 만나서, 서로에게 반하고, 몇 년 간의 연애를 하다가 결혼식을 하기 전이나 한 후에 여자의 뱃속에 잉태되었을 것이다. 미리 말해두자면 그건 그리 좋은 일이 아니었다. 비극의 시작이라고 부를만한 일이었다. 사실 남자의 지론에 의하면 어떤 탄생이든 다 비극인 법이지만, 나는 딱히 그런 주관을 갖고 있지 않다. 아무튼, 그는 그냥 태어났다. 아마 태어나면서 울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남들도 태어날 때 우니까. 그리고 그는 기억할 수 없는 소년기를 보냈는데, 그 시절의 기억들은 굉장히 단편적이고 또 인상에 치우쳐있어서 구체성을 갖지 못한다. 그러나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들도 알 만한 것이었을 것이다. 왜, 다들 알고 있지 않은가. 어둠 속에 방치된 어린아이와, 원망으로 가득한 어른들의 고성과,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 그리고 욕설과 찢어지는 듯한 비명,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밤. 그런 것들 말이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들이다. 어린 시절이라는 것은 대개 그런 것들로 채워지기 마련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기억을 잊고 자신만만한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 대지 위에 서게 되지만, 안타깝게도 이 남자는 그러지 못했다. 이 시점에서 당신은 선택을 할 수 있다. 지독한 트라우마에 잡아먹혀 편집증과 광기밖에 남지 않게 된 나약한 남자의 불쾌한 이야기가 듣고 싶지 않다면, 당신은 그냥 책을 덮어버리면 된다. 그것으로도 좋다. 왜냐하면 이 책을 덮어 버리고나면 태양의 찬란함과 인생의 꿀 같은 달콤함을 노래하는 다른 책들이 수도 없이 당신 손에 쥐여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법도 규칙도 없는 세계에 내던져져 양심마저 파괴된 채로 광증과 어둠에 사로잡혀 신음소리를 흘리면서 나락 밑바닥을 기는 어떤 남자에 대한 이야기가 듣고 싶다면, 당신은 계속 책장을 넘기면 된다. 사실 나는 무엇을 추천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굉장히 순간적인 관찰자이기 때문에 이 남자 이외의 인생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다. <Les Shamps-Elysees>라는 노래를 아는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노래의 가사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빛살이 가득한 샹젤리제 거리에서 타인에 대한 어떤 두려움이나 의심도 없이, 가슴을 열고 한 여자에게 명랑하게 말을 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지하에서 기타 반주에 맞춰 춤을 추고 웃고 노래하다가, <기나긴 밤을 지새운 뒤 연인사이가 되어> 희망과 축복이 가득한 미래로 걸어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 그들은 알제의 바닷가로 가서 수영을 하며 함께 놀 수도 있을 것이고, 파리의 한 식당에서 부르고뉴의 어떤 도멘느 양조자가 빚어낸 값싸고 맛있는 와인을 마시며 그림과 같은 한때를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인생은 내가 아는 인생이 아니다. 그저 노래 가사를 듣고 추측해볼 뿐이다. 내가 아는 인생은 <그 남자>의 인생뿐이다.
아까 하던 얘기를 마저 하겠다. 그는 나이를 먹어 학교에 입학했고, 열두 살이 되었을 즈음에 첫사랑을 경험했다. 그러나 첫사랑의 상대가 된 여자아이는 태양빛이 녹은 쇳물처럼 흐르던 그해 여름날 차에 치여 사망했다. 그때 소년은 웃었다. 그도 자신이 왜 웃었는지 알지 못했다. 물론 나도 모른다.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그리고 소년이 열네 살이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어느 어두운 새벽에 부엌에서 식칼을 찾아들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잠들어있는 안방으로 숨어들어갔다. 그는 깊게 잠들어있는 어머니를 한동안 내려다보다가, 드디어 칼을 들어 그녀를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그때는 아직 그에게 죄책감과 모럴이라는 것이 있었다. 누구나 그 나이 때에는 도덕적인 법이다. 그래서 그는 거친 숨을 참지 못했고, 칼을 쥔 손은 마구 떨렸다. 마침내 칼을 내리찍었을 때, 손의 진동 때문에 칼은 어머니의 목을 빗나가서 그녀의 귀를 잘라버렸다. 어머니가 비명을 지르면서 깨어났을 때 소년은 피 묻은 칼을 품에 안고 이불 위에 쓰러진 채 엉망으로 울고 있었다. 그는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눈물을 흘리며 처절하게 울고 있었고, 감정에 북받쳐 딸꾹질까지 하며 소리 내어 통곡했다. 그의 꼴이 너무 비참해서 어머니는 소년의 뺨을 후려갈기지도 못했다.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았던 부모는 소년을 정신병원에 집어넣었고, 그는 일 년 정도를 광인들 사이에서 지냈다. 구속용 벨트가 달린 침대와 완충 처리가 된 벽 속에서, 그때 그의 마음에 무언가가 꽃 피었다. 피와 담배연기로 자욱한 한국 땅의 어느 어두운 도시 구석에서나 필 법한 끔찍한 꽃이었다. 그 꽃이 정확히 어떠한 것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것은 당신들이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에서 찾아내야할 것이다. 아무튼 소년은 퇴원할 때 웃는 얼굴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다 극복한 것처럼 보였고 눈동자에는 이상한 자신감이 이글거렸다. 그는 사람이 달라져 마치 두려움이라는 것을 모르는 인간처럼 학교를 다녔다. 그때부터 그는 미술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그는 하루 종일 거의 말하는 일도 없이 그림을 그렸고, 그의 방에는 스케치나 아크릴화 따위가 수북이 쌓였다. 그리고 그는 고등학교에서 한 여자아이를 만났다. 그 여자아이는 청년의 가슴 속에 깊은 인상을 남겼지만, 이 이야기는 밑에 가서 하자. 짤막한 몇 줄의 글로 정리해버릴 만한 것이 아니다. 아무튼 그는 더는 부모를 죽이려고 하거나 차에 치여 죽는 사람을 보면서 웃는 일도 없이 나이를 먹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가 성인이 되고 나서 몇 년 뒤에 말이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집을 나왔고 한동안 거리에서 살았다. 남자는 가족에 대한 것은 전부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는 거리에서 살면서 버려진 음식을 주워 먹었고 강가에서 신문지를 덮고 잠을 청했다. 그러다 가을이 끝나갈 때 즈음에, 남자는 겨울이 오면 자신이 죽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기억을 쫓아 학생 시절 가깝게 지냈던 친구를 찾아갔다. 그 친구는 남자를 보고 몹시 놀라며, 동시에 반가워했다. 그리고 그는 기꺼이 남자를 위해 작은 다락방을 하나 마련해주고 자신의 화실에서―그 친구도 그림을 그렸다. 그는 미대생이었다― 지내게 했다.
이제부터가 본편이다. 당신들은 이 남자가 어떤 인간인지에 대해서 아주 약간이나마 감을 잡았을 것이다. 아직도 이 남자가 어떤 결말을 향해 나아갈지 알고 싶다면, 무엇이든 좋으니 인생을 예찬하는 노래를 하나 틀어놓고 책장을 넘겨라. 그것이 당신의 마음을 다소나마 지켜줄 것이다.
1. 아침나절의 빛에 대하여
현태는 거울 앞에 서있었다. 그는 웃통을 벗고 있는 중이었다. 방의 형광등에서 내리쬐는 하얀 빛살이 현태의 창백하고 혈관이 불거진 피부 위로 번질거리며 흘렀다. 그는 벗어낸 셔츠를 방 한 구석으로 집어던지고 거울로 시선을 향했다. 바닥에 비스듬하게 세워진 기다란 거울은 현태의 모습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비추고 있었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상처였다. 현태의 가슴팍에 새겨진, 무수히 많은 붉은 흉터들 말이다. 그것들은 전부 병적인 감상주의자의 손목에서나 보일 법한 길고 곧바른 형태를 하고 있었다. 상처들은 많고, 또 깊었다. 어떤 것들은 오래되어서 이미 흔적만을 남긴 채 사라지고 있었고, 어떤 것들은 갓 새겨져서 붉은 피딱지로 덮여 있기도 했다. 현태는 다소 어리벙벙한 눈으로 그 흉터들을 바라보다가, 한 손을 들어 가슴팍의 상처투성이 피부를 가만히 더듬었다. 손끝이 상처에 닿자―그의 주먹도 상처로 가득하다. 벗겨나가고 찢어진 피부들―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전류처럼 흘러내렸다. 그 통증을 바라보는 현태의 눈. 그 깊고 새까만 눈에서는 냉각된 기름처럼 허옇게 뜬 공허를 읽어낼 수 있었다. 그러다가 현태는 손톱 끝으로, 어떤 상처 위에 덮인 딱지를 긁는가 싶더니 그것을 그대로 뜯어내버렸다. 지금까지는 간질간질하던 통증이 순식간에 번뜩이는 고통으로 번개 쳤다. 길게 뜯어낸 딱지를 바닥에 내버리고 현태는 진물과 피를 뱉기 시작하는, 선명한 붉은색의 상처를 여우같은 눈동자로 거울을 통해 들여다보았다. 드러난 생살 위에 송골송골 체액이 맺혔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은 방울지다 못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찐득한 진액이 피부 위를 또르르 굴러가는 것을 현태는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그는 꿈꾸는 것 같은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진물이 맺힌 상처 위에 현태는 손바닥을 올려놓고 지그시 눌렀다가 떼었다. 손바닥의 한 가운데를 길고 얇은 체액의 선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것을 보더니 그는 돌연 슬며시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도 무슨 바람처럼, 실없는 장난이나 거짓말처럼 이내 없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그는 갑자기 경멸감을 느끼면서 고개를 돌렸다. 현태는 더 이상 상처를 가지고 장난질을 하는 것도, 거울 앞에 서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마치 자신이 무슨 변명거리를 찾아 헤매는 것 같은 느낌이었고 욕지기가 날 것 같았다. 그는 이제 심지어 그 거울을 깨트려버리고 싶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맨주먹으로 말이다. 쨍강하고 유리가 깨지는 소리를 듣고 싶었고 산산 조각난 유리조각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현태는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마구 쳤다……. 상자 안에 모래를 담고 세차게 뒤흔드는 것처럼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고통이 그의 피부 위에서 날뛰었다. <그만!> 그가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만! 그만! 나를 돌려보내다오! 현태의 주먹은 계속해서 자신의 가슴을 탕탕 때리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 해야 이 모든 것을 <그만둘> 수 있는 지 도무지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는 바지만 입은 채로 그랬다. 지저분하고 좁아터진 방 안에서 미친놈처럼.
그의 방은 좁고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천장도 낮았다. 방 안에 있는 가구라고는 책장과 책상 하나, 그리고 현재 현태가 깨부수고 싶어서 안달이 나있는 거울 하나가 전부였는데, 그것들만으로도 방은 발을 둘 곳 없이 좁았다. 책상과 평행하게 바닥에는 지저분하고 얼룩덜룩한 이불이 깔려있었다. 그것은 밤새 현태가 자고 일어난 뒤 정리되지도 않고 그대로 내버려져있는 것이었다. 이불을 개놨다면 그나마 좀 나을 것이었지만 현태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이불은 늘 펼쳐진 채였다. 덕분에 방 안의 남은 공간은 모조리 이불이 차지하고 있었고 따라서 이 방에서 움직이려고 하면 필연적으로 그것을 밟아야만 했다. 고로 현태도 지금 이불 위에서 그 소리 없는 난동을 부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방에는 창문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날것의 빛이 들어올 일도 없었다. 그의 방은 좁았다. 사실, <이곳>은 방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한 것이 너무 많았다. 이곳은 방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다락같은 곳이었고 안에 있으면 흡사 관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특히 너무 낮아서 까치발이라도 들면 바로 정수리가 닿을 듯한 천장 때문에 더욱 그랬다. 턱없이 적은 공기의 용량이 이 방을 더욱 더 <관짝>처럼 만들고 있었다.
현태는 이제 주먹질을 멈췄다. 그의 눈은 빨개져있었다. 언젠가 읽은 랭보의 시 한 구절이 현태의 머릿속에서 계속 메아리치고 있었다. <나를 향해 발사!> 그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리고 무너지듯이 더럽고 축축한 이불 위에 주저앉았다. 권태 같은 것이 몰려왔다. 앉은 채로 머리를 푹 숙이고, 현태는 눈을 부릅뜬 채 이미 게을러진 정신으로 무언가를 생각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음…… 음…….” 그는 일부러 소리 내어 보았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생각했다. <화실에 가는 것이 좋겠다. 그렇다. 화실에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지금 나는 달리 할 일이 없다. 셔츠는 어디로 갔지? 밖으로 나가려면 셔츠를 입어야 한다. 아무리 닳고 지저분한 것이라도…… 안 입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지. 화실. 화실에 가는 것이 좋겠다. 그런데 지금이 몇 시일까? 어제 나는 시계를 책상 위에 벗어 놓고 잠들었었다. 열한시……. 열한시다. 지금 화실로 가면 영운이도 있겠군. 좋다. 충분히 잤다. 그리고 매일 같은 아침이다.> 그리고서 현태는 아까 자신이 방 어딘가로 집어던진 셔츠를 찾기 시작했다. 그의 붉은 눈은 천천히 원래의 색깔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어지러운 머리와 권태로운 기운은 여전히 그의 영혼을 혼란 속에 붙잡아두고 있었다. 현태는 마침내 베개 옆에서 셔츠를 찾았다. 그는 좁은 방 안에서 뱅글뱅글 돌며 그것을 입었다. 단추를 하나씩 끼우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 다 입은 뒤에 현태는 책상 위에 놓아두었던 손목시계를 집어 들어 오른쪽 손목에 찼다. 그리고 현태는 잠깐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더니 덥수룩한 머리를 손으로 대강 정리하고 문 앞에 섰다. 그 뒤에 그는 문고리를 돌리고 밀면서, 넋 나간 목소리로 혼자서 중얼거렸다.
“나를 향해 발사!”
현태의 방은 이상한 곳에 있었다. 방으로 통하는 문은 하숙집의 건물 복도 구석에 뜬금없이 나있었는데, 그것은 어째서인지 바닥에서 1미터 정도 떨어진 높은 곳에 뚫려 있었다. 그래서 방으로 들어갈 때에는 최대한 다리를 올려서 문지방을 밟고 올라가야 했고, 나올 때에는 거의 뛰어내리다시피 하며 내려와야 했다. 다른 방들보다 높은 곳에 위치해있고 또 굉장히 좁았기 때문에 그곳이 어쩌면 다락이 아닌가 생각해볼 수도 있겠지만 다락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애매한 곳에 있었다. 사실 그 방은 처음 건물이 세워질 적에, 설계도에는 나와 있지 않은 방이었다. 실상인즉 설계시의 실수 때문에 건물을 지어놓고 보니 여유 공간이 생겨버렸는데, 그것을 어떻게든 활용하려고 방을 뚫어버린 것이 바로 현태의 방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방에는 전선만 겨우 연결되어있을 뿐, 보일러도 들어오지 않았고 습기 배출도 원활하지가 않았다. 즉 실제로 현태가 사는 방은 <방>이 아니었던 것이다. 원래는 쓸모없는 물건들을 모아두는 창고 정도로 쓰이고 있던 것을 하숙집 주인이 터무니없이 싼 값으로 월세로 내놓은 것이었다. 아무리 도시에 빈민이 넘치는 시대라고는 하지만 그런 곳에 살 사람은 없겠거니 싶었는데 현태는 그 방에 자리를 잡았다.
주인이 처음 현태를 보았을 때의 첫인상은 그리 좋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희망이 없고 관념적인 병에 찌든 거리의 젊은이처럼 보였다. 그러나 아무튼 현태는 그 방을 빌렸다……. 그것이 약 일 년 정도 전의 일이었다.
지금 현태는 방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그는 우선 문지방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은 뒤에 다리를 밑으로 늘어트렸다. 그리고 앞쪽으로 떨어지다시피 하며 복도에 착지했다. 현태는 딱 눈높이 즈음에 있는 문고리를 잡아당겨 문짝을 닫았다. 잠그지는 않았다. 훔쳐갈 것이라고는 눅눅하고 곰팡이 슨 이불밖에 없었다. 그런 것을 도대체 누가 가져가겠는가 말이다. 현태는 복도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그의 걸음걸이는 다소 불안정했다.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는지 한 손으로는 난간을 꽉 붙잡은 채 천천히 발을 옮기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거리로 나왔다. 늦은 오전인지라 골목에는 사람이 없었다. 현태는 어슬렁어슬렁 골목 담장 밑을 걸었다. 그는 세수도 하지 않아 끈적거리는 얼굴을 쓰다듬었다.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빛이 회색 골목을 구석구석까지 훑고 있었다. 봄이었다. 노곤하고, 산들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깃털처럼 정신이 가벼웠다. 그의 정신에는 무게가 없었다. 현태는 전날 점심때부터 배가 고프다고 생각했다. 위장이 빈 만큼이나 사고도 비어있었다. 영운이한테서 돈 만 원만 빌려서 빈 것들을 채워야겠다고 현태는 생각했다.
푸른 장막인 것처럼 하늘이 짓눌러왔다. 멀리서 자동차 굴러가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골목은 더러웠다. 현태는 언제나 <아침>이라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침은 더러웠다. 가령 하늘 저편에서 들려오는 나지막한 새소리가. 아침의 빛살 때문에 유독 선명하게 보이는 회색 콘크리트의 질감이. 밤을 몰아내고 이제 막 태양의 냄새로 풍성해지기 시작하는 공기가. 그리고 무엇인가가 <시작되었다>고 일러주는 아침 특유의 그 정신적인 감촉이!
아침이란, 공간 속에 온갖 색깔들이 경계도 없이 질펀하게 섞인 것이 정말이지 더러웠다. 봄의 아침은 특히나 더 그랬다. 그래서 현태는 이유도 없이 기분이 더러웠다. 망할. 노기도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잠꼬대 하듯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바람이 얼굴에 끼쳐왔다. 햇살이 눅진하게 뒤섞인 바람이었다. 그래도 사람이 없는 것이 다행이지. 그가 갑자기 중얼거렸다. 왜냐하면 내 셔츠가 더러우니까 말이다. 그의 셔츠는 더러웠다.
보다 넓은 거리로 나오자 행인들이 늘어났다. 그들은 지나가면서 현태를 힐끗거렸다. 현태의 셔츠는 여전히 더러웠다. 그는 그것이 조금 창피한 듯도 싶었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현태는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바닥에 들러붙은 까만 껌딱지들이 눈에 띄었다. 행인들은 모두 말쑥했다. 현태도 한때는 말쑥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그런 건 전부 <버려진> 사실들이었다. 현태는 미지근한 태양 밑에서 걸으면서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곧 점심시간이다. 거리에 사람이 더 많아질 것이다. 그는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래서 걸음을 재촉했다. 곧 현태는 뛰듯이 걸었다. 얼른 화실로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한참을 뛰다가 골목에서 꺾자 학원가가 나타났다. 저녁시간이 되면 오가는 학생들로 시끄러워지는 거리였다. 그 학생들과 강사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식당도 꽤나 있었다. 현태는 늘어선 건물들 가운데 한 채를 골라 들어갔다. 이 층과 삼 층에 넓은 미술학원이 있는 건물이었다. 현태는 이 층 구석의, 명패도 안 달린 열다섯 평짜리 방으로 가서 문을 밀어젖혔다. 방에는 이미 불이 켜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현태를 향해 고개를 드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영운이였다. 그도 금방 도착했는지 방구석에서 이젤을 옮기고 있었다. 영운은 중키에 머리를 깨끗하게 빗어 넘기고 안경을 쓴, 일견에 깔끔해 보이는 청년이었다. 그는 현태를 보자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을 하며 인사를 건넸다. <왔어.>하고 말이다. 현태는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응, 하며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더니 숨도 쉬지 않고 말했다.
“오늘도 수업 있냐?”
“두 시 쯤에…… 박 교수님 수업.” 영운은 하던 작업을 계속 하며 말했다.
“그 인간 아직도 교수질 하나?” 현태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영운은 픽 웃었다. 그는 웃으면서 현태에게 무어라고 말을 하려다가 놀랐다는 듯이 현태의 발치를 보며 물었다.
“너 신발 어쨌어?”
그 말에 현태는 <응?>하고 반문하며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어럽쇼> 하는 소리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흙 묻은 양말바람이었다. 생각해보니 신발을 책상 옆에 둔 채로 그냥 나온 것이었다. 그렇다면 집에서부터 계속 양말바람으로 여기까지 걸어온 것 아닌가. 현태는 발치를 잠깐 내려다보다가 눈을 내리깐 채로 혼잣말을 했다.
“사람들이 쳐다본 게 셔츠 때문이 아니었던 모양이군.”
“너 그 꼴로 집에서 온 거냐?” 영운이 당황하여 물었다. 현태는 그를 쳐다보더니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게 선 채로 있다가 현태는 툭 내뱉었다.
“그보다 나 만 원만 빌려다오.”
“너…… 잠깐 기다려. 내가 신발 가져올 테니까.” 영운은 아연하여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말꼬리를 흐리더니, 그렇게 말하고는 현태 옆을 스치며 건물복도로 나갔다. 현태는 명받은 대로 그 자리에 멀뚱히 서서 영운이 계단을 올라 삼 층으로 사라지는 것을 물고기 같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몇 분 뒤에 영운은 손에 구두 한 짝을 들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것을 현태에게 내밀며 말하는 것이었다.
“이거 신어.”
“어디서 났어?” 현태가 받지는 않고 물었다.
“원장실.”
“너희 아버지 구두냐? 멋대로 가져와도 돼?”
“그럼 맨발로 있을 테냐?” 그제야 현태는 구두를 받았다. 좀 크다 싶었지만 군말 없이 양말의 흙을 털어내고 신었다.
“아버지는 학원 안에서는 실내화 차림이시니까 괜찮아. 이따가 돌아갈 때는, 내가 학교 갔다 오는 길에 들려서 슬리퍼 하나 사올 테니 그거 신고 돌아가.” 현태가 신발을 다 신자 영운이 그렇게 말했다. 현태는 알았다는 듯이 <그래.>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또 뭐야. 만 원?”
“그래, 어제부터 아무 것도 못 먹었다.”
그러자 영운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뒤지더니 만 원짜리 지폐를 한 장 꺼내서 현태에게 건네며 말했다.
“돈 없으면 바로바로 말해라. 굶지 말고. 알았어?”
“알았다.” 현태가 지폐를 받으며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현태는 지폐를 주머니에 구겨 넣으며 시계를 보았다. 열두 시 이십 분 전이었다. 뱃속에선 공복감이 사나운 짐승마냥 날뛰고 있었다. 배가 고프다 못해 뱃가죽 속의 살점이 썩둑 잘려나간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생각에도 힘이 없었다. 그런데 뭘 먹지? 현태는 생각했다. 허기만 채우면 그것으로 족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소식하는 습관이 있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어느 정도 이상 먹으면 속에서 불쾌감이 끓어올랐다. 그래서 <먹는 것> 자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은 먹어야 사니까 어쩔 수가 없었다. 오래 굶으면 머리도 어지러웠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빵집에 가기로 했다. <그 전에 이젤에 캔버스를 세워두자.> 현태는 생각했다.
구두가 헐거웠다. 발걸음을 뗄 때마다 뒤꿈치가 공중에 떠있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현태는 별 수 없이 구두를 끌고 다녔다. 그는 화실 구석에 길게 나열되어있는 캔버스 더미를 뒤적거리더니 가장 안쪽에 있는 것을 끄집어냈다. 그리고 헐거운 구두를 덜렁거리며 창가에 세워진 자신의 이젤 앞으로 가서 캔버스를 걸었다. 정오의 빛살이 창문을 타고 들어와 캔버스의 하얀 면 위에서 노란 미광을 내며 부서졌다. 그곳에는 이미 미완성의 그림이 그려있었다. 현태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무뚝뚝한 눈으로 훑어보았다. 유리를 뿌려놓은 것처럼 투명한 암청색이 그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영운이 현태 옆으로 걸어오더니 관심을 보였다.
“오늘도 안에서 그릴 거야?”
현태는 그림에 눈을 박은 채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벌써 봄이야.”
“응?”
“이건 겨울 그림이거든.”
영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실상이 그랬다. 현태는 늘 혼잣말을 하듯이 대화를 했다. 그리고 영운은 그런 것에 이미 오래 전부터 익숙해져있었다. 현태가 캔버스 귀퉁이를 손끝으로 쓰다듬더니 중얼거렸다.
“속이 쓰리다.”
“왜? 굶어서?”
<몰라.>하고 현태가 웅얼거렸다. 밥을 먹으러 가야겠다. 현태는 생각했다. 그런데 세수가 하고 싶었다. 밤새 배어나온 피지 때문에 얼굴이 번들거렸다. 그는 그런 것을 참지 못했다. 그래서 화실에 있을 때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학원 화장실에서 얼굴을 씻곤 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면 그러지 못했다. 하숙집의 공동 화장실은 사람을 마주칠 가능성이 너무 높았다. 사람을 만나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니었지만 현태는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기를 싫어했다. 정확히는 얼굴, 표정 속에 담긴 뉘앙스와 감정의 흔적과 <부당성>이 눈에 들어오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현태는 전에도 자신에게 친절하게 인사를 건네던 하숙집의 젊은 친구 얼굴에 주먹을 날릴 뻔했다.
현태는 문뜩 고개를 돌려 영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신기했다. 영운의 얼굴은 그다지 역겹지 않았다. 가끔 그의 습관적인 미소가 너무나도 추잡한 형태로 달려들 때도 있었지만, 현태는 영운을 싫어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호의를 갖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봐온 얼굴이라 그런가? 하지만 오래 보았다고 해서 다 익숙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현태는 영운의 얼굴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말했다.
“세수하러 가야겠어.”
“밥은? 나도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같이 먹을까?”
“무얼 먹으려고?”
“모르겠다. 국밥집에 갈 테냐?”
현태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는 오늘은 육식을 할 만한 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국밥 국물 위에 허옇게 뜬 짐승 기름이 눈에 선했다.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현태를 채식주의자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또 천만의 말씀이다……. 아무튼 그는, 오늘은 육식을 할 기분이 아니었다.
“세수하러 갈래.” 그가 툭 내뱉고 구두를 덜걱거리며 화실 밖으로 나섰다. “밥은 혼자서 먹어.”
“너 또 빵 쪼가리 먹으려고 그러지? 밀가루만 먹으면 위가 상한다고.” 영운이 문 밖을 향해 외쳤다. 그러나 현태는 들은 척도 않고 복도 한쪽에 있는 남자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로 들어가서 세면대 앞에 서더니 현태는 소매를 걷고 세수를 하기 시작했다. 차가운 물이 얼굴에 끼쳤고 정신도 조금 투명해지는 것 같았다. 비누가 닳고 닳아서 조약돌만 했다. 그는 비누 거품으로 얼굴을 문지른 뒤에 물로 씻어냈다. 그리고 한 번 더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현태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세면대에 처박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젖은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고 손으로 얼굴에서 물을 털어냈다. 그리고 그는 눈앞에 있는 거울을 보았다. 거울에 물기가 번들거리는 현태의 얼굴이 비쳤다. 창백한 얼굴이었고, 현태는 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거울을 향해 히죽 웃어보았다. 괜히 한 번 그래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는 갑자기 토했다.
토사물이 울컥 식도에서 솟구쳤다. 현태는 재빨리 세면대 하수구에 고개를 처박고 속을 게워냈다. 묽고 시큼한 액체만 쏟아져 나왔다. 어제부터 줄곧 굶은 탓인 듯싶었다. 그는 두어 번 더 구역질을 했다. 덕분에 눈에 조금 눈물이 고였다.
“드디어 속을 다 비웠다.” 현태는 입가에 토사물을 묻힌 채로 작게 중얼거렸다. 물을 틀어 토악질한 것을 흘려보내고 입가를 닦은 뒤에 거울을 보았다. 눈이 빨갰다. 그는 조금 비틀거리면서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2. 식욕과 육체적 진실에 대하여
빵집 점원은 수상스러운 눈으로 현태를 살피고 있었다. 현태는 빵집 안을 느린 걸음으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는 벌써 매장 안을 다섯 바퀴째 빈손으로 도는 중이었다. 특별히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아니 그보다는 식욕이 없었다. 식욕이 없는 것은 아닌가? 현태는 혼자서 생각했다. 배가 쓰릴 정도로 허기가 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선뜻 뭔가를 집어서 먹을 기분이 들지를 않았다. 차라리 이대로 계속 굶다가 쓰러져서 죽어버리면 그것으로 그만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내 그만 둬야만 했다. 뱃속이 너무나도 아팠기 때문이다. 현태는 마침 눈앞에 있던 빵덩어리를 하나 집어 들고 비척비척 계산대로 걸어갔다. 그리고 점원 앞에 빵을 턱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느릿느릿―혹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커피…… 커피도 하나 주세요.”
“무슨 커피로 드릴까요?” 점원이 되물어왔다.
“밀크커피요.” 현태는 점원의 눈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계산대 옆에 진열된 케이크조각들을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밀크커피는 없는데요.”
“그럼 아무 거나 비슷한 걸로 주십시오.” 현태가 중얼중얼 말했다. 점원은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 현태가 내놓은 빵덩어리를 계산대 뒤쪽으로 가져가서 몇 조각으로 자르더니 봉투에 담았다. 그 뒤에 커피를 일회용 컵에 담아서 빵 봉투와 함께 건넸다. 점원이 얼마라고 값을 말했다. 현태는 점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머니에서 구겨진 만 원짜리 지폐를 꺼내서 내놓았다. 그리고 아무 이유도 없이 자신의 앞머리를 손으로 잡아당겨댔다. 그러고 있는 사이에 점원은 계산을 마치고 거스름돈을 현태에게 내밀고 있었다. 현태는 그것을 받아서 호주머니에 찔러 넣더니 멈칫하고 움직임을 멈췄다.
점원이 이상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현태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눈은 계산대 옆에 놓여있는 투명한 플라스틱 박스에 박혀있었다. 박스에는 <제 3세계 어린이 구호성금>이라고 글자가 찍혀있었다. 현태는 입을 반쯤 벌린 채로 한참이나 그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천천히 입을 뗐다…….
“점원 아가씨, 알고 계십니까?”
점원은 <네?>하며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이 반문했다.
“유흥업소에 놓인 성금 통이 다른 업소에 놓인 것보다 성금이 더 잘 모인답디다. 그리고 제일 잘 모이는 곳은 퇴폐업소라지요.” 그렇게 말하고 현태는 점원을 지긋이 쳐다보았다.
점원은 뭐라고 말해야할지 몰라 다소 당황하더니 <그거 재미있네요>라고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그 반응에 현태는 약간이지만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는 계산대 위에 놓인 빵을 낚아채듯 손에 쥐고, 점원이 내미는 일회용 플라스틱 커피 컵을 거칠게 받은 뒤 가게 밖으로 뛰듯이 걸어 나갔다.
<제기랄!> 현태가 이빨 사이로 욕설을 씹었다. 또 말들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팔꿈치로 문을 밀치고 나가자 봄바람이 코끝에서 불어댔다. 현태는 자신이 멍청한 광대가 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손에는 빵을 담은 봉지를 달랑달랑 쥐고……. 그는 안절부절 못하며 거리를 빠른 걸음으로 가로질렀다. 그러면서 사납게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그들이 굶어죽든 말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는 아무것도 짊어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사실 현태는 양손에 들린 빵과 커피를 길거리에 집어던지고 싶었다. 그리고 마구 짓밟아서 곤죽을 만들고 자신은 영원히 굶주린 채로 있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그것들을 그대로 손에 들고 거리를 헤매다가 차도 옆에 설치된 벤치를 찾아내고 거기에 앉았다. 그리고 현태는 소음을 흩뿌리며 지나가는 차들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음, 사실 내가 결백해질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실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괴로워할 필요도 없다. 내가 느끼는 죄책감은 모두 잘못 심어진 믿음 때문에 생긴 것이다. 헤헤. 그렇다! 나는 그냥 조소할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비굴하게 굴지 않을 것이다.> 그러자 현태는 보다 기분이 나아졌다. 그는 소리 없이 히죽거리며 웃었다.
그는 봉투를 열고 빵을 꺼냈다. 커다란 흰 빵 덩어리였다. 현태는 그것을 손에 들고 굶주린 짐승처럼 서둘러 뜯어먹기 시작했다. 그는 묵묵히 빵 덩어리를 노려보면서 씹었고 삼켰다. 목이 멜 때는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다시 빵을 꾸역꾸역 빈 위장 속으로 쑤셔 넣었다. 길거리 벤치에 앉아서 거지처럼 끼니를 해결하는 현태를 지나가는 학생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곤 했다. 그리고 자동차들이 마구 오갔고 먼지가 날렸으며 공기가 탁했다.
봄이라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현태는 아직도 깊고 몽롱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꿈속을 헤매고 있는 것 같았다. 구역질, 구역질. 그는 초점을 잃은 눈동자로 빵을 씹고 음료를 들이켰다. 현태는 자신이 어디 즈음에 살고 있는지 영 알 수가 없었다. 그림을 그리지 않을 때에는 모든 것이 건드리면 쉽게 무너져버리고 형태조차 파악되지 않는 안개 같았다. 대로변에서, 차들이 내는 소음이 옥죄어왔고 텁텁한 햇볕이 먼지처럼 머리칼 위에 가라앉았다. 이건 누가 꾸는 꿈이지? 이건 누구의 망상이야?
현태는 입에 빵을 가득 넣은 채로 웃었다.
그는 모두 먹어치웠다. 너무 많이 먹어서 토할 것 같았다. 원체 그는 위장이 큰 사람이 아니었다. 현태는 구역감을 집어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큰 구두가 거추장스러웠다. 그림을 그리러 가야했다. 현태는 그림이 그리고 싶었다. 사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림을 그리는 것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현태는 킥킥대면서 길을 걸었다. 자기혐오로 옷을 짜 입은 흥분감이 그의 내부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환각 같았다! <내 정신은 너무 피로하다. 나는 약이 필요해…….> 현태가 간신히 의식을 쥐어짜내며 생각했다.
학원가에 들어섰을 때 그는 거의 춤추듯이 걷고 있었다. 이상한 리듬이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고 현태는 악단의 지휘자라도 된 것처럼 손가락 끝을 허공에 그어댔다. 이 모든 일이 태양의 빛이 식어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문뜩 그의 뇌중에 떠올랐다. 왜냐하면 겨울에는 빛이 훨씬 더 선명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봄의 태양은 너무 오래 방치되어서 먼지가 쌓인 궤짝 같았고 더 이상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흔들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분명히 그렇다! 그런데 내가 만약 길 가는 사람을 붙잡아 죽인다면…….> 그는 생각했다. <그러면 태양이 다시 빛나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나 자신은 좀 더 단단한 뿌리를 갖게 되고 말이다. 또 대기 중의 먼지가 모두 걷히고, 사물은 본질의 섬광으로 뚜렷하게 빛나고, 꿈에서 깰 것이다. 마치 20세기 초에 인간정신을 위하여 피가 흘렀던 것처럼!> 하지만 아무런 범죄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날뛰는 정신을 이와 잇몸으로 꽉 깨물고 다리가 부러진 바퀴벌레처럼 걸어 다녔다. 지나가는 행인들이 그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고 놀라워했지만 현태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미술을! 예술을! 영혼을!” 현태가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대뜸 허공에 지껄였다. “당신은 내가 길을 잃어버릴 거라고 생각했지?” 그리고 그는 몹시 흥분하여 킬킬거리며 소리죽여 웃었다. 그의 머릿속은 어떤 영광에 대한 찬미로 가득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음, 그리고 고통! 그것만큼 중요한 것도 달리 없다. 내가 기쁘게 맞이하는 고통. 이것을 모두에게 나눠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구시렁구시렁. 그의 정신이 나불거렸다.
교복 차림으로 화구통을 들고 다니는 학생들이 현태를 스쳐지나갔다. 그들을 보고 현태는 갑자기 엄청난 슬픔이 가슴에서 흐르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들떠서 발작하던 정신도 거짓말인 것처럼 얼어붙었다. 이 거리에는 미술학원이 많았다. 멀지 않은 곳에 유명한 미술대학이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하릴없이 감정을 배설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배신이었다. 그래서 현태는 몹시도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질끈 눈을 감았다. 그가 마음속으로 변명하듯이 외쳤다.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현태가 늘 얼마나 살고 싶어 하는 지에 대해서는 언젠가 또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아주 어려운 문제였다. 그는 슬픔을 추슬렀다. 또 자기 자신의 생존조건에 대한 증오심이 솟아오를 것 같았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휘발유를 부은 진흙 뻘에서 헤엄치는 것처럼 현태는 살고 있었다. 그는 늘상 그랬고 이제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약에 홍수가 일어난다면…….> 그는 중얼거리면서 마침내 화실 건물로 걸어 들어갔다. 현태는 어떤 대재앙을 상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몽상은 어떠한 종류의 복수심에 의한 것도 아니었다. 만일 세상이 현태가 사랑해 마지않는 멋진 친구들로, 완벽한 이해력을 갖추고 비단결 같은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로 가득하다고 하더라도 현태는 대재앙을 바랄 것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습관이었고 말하자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그가 계단을 오르다 말고 갑자기 희희낙락하여 박수를 치면서 외쳤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안색을 싹 바꿔 정색하면서 중얼거렸다. “언젠가 나는 돌아갈지도 몰라…… 자궁 속으로…… 다시는 태어나지 않아도 되는…….” 그는 짐짓 무뚝뚝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현태는 이 층에 도달했고 복도를 거쳐 화실로 들어갔다.
화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영운은 아직 식사 중인 모양이었다. 현태는 설핏 차가운 공기가 감도는 화실 안을 구두를 질질 끌고 돌아다니다가, 햇빛이 드는 창문에 모조리 커튼을 쳤다. 그리고 구석에 있는 탁자에서 물감과 붓, 그리고 팔레트를 집어든 뒤 캔버스 앞에 가서 섰다.
화실은 그늘져서 서늘했다. 형광등은 꺼져있었고, 커튼을 거쳐 들어오는 약한 빛만이 방안을 비추고 있었다. 그러나 현태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런 날에는 주변이 밝으면 그는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빛이 밝으면 밝을수록 현태의 정신 또한 수백 수천 조각으로 갈라져 온갖 괴상한 이야기들을 지껄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정육점에 대해서라든지. 정육점. 현태는 늘 도시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소와 돼지가 도살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부끄러워했고 불쾌하게 여겼다. <정육>. 정리된 고기들. 그것 또한 배신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아무튼 정육점에 대해 분노하면서 파란 겨울 하늘과 침묵하는 나무들을 그릴 수는 없는 법이었다. 생각을 늦춰야했다. 경기를 일으킨 어린애를 어르듯이 차분하게. 그리고 색깔과 이미지 속으로 천천히 잠수해야한다. 광란하지 말고. 광란하지 말고. 광란하지 말고. <나의 장면>에 집중해야한다. 그 순간에. 그 섬광에. 마침내 소리가 잦아들고 시간이 정지할 것이다.
현태는 그림을 그렸다.
영운은 화실 문을 열다가 현태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는 아주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화실로 들어왔다. 커튼을 통과한 푸르고 아련한 빛이 만들어낸, 고요한 연못과 같은 빛 웅덩이에 파문을 일으키고 싶어 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만약 그 푸른 연못 위에 조금이라도 파문이 일어난다면 현태는 신경질을 내며 붓을 내던져버릴지도 몰랐다. <아, 그것이 현태를 대하기가 어려운 까닭 중 하나지.> 영운이 살금살금 걸으면서 생각했다.
그런데 현태 입장에서는, 분명히 그렇지 않았다! 그는 기분이 좋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그림에 열중해있었고 만일 영운이 커다란 구두소리를 내면서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을 지라도 그것은 그의 창작활동에 조금의 지장도 주지 못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영운이 현태를 존중하는 의도에서 그러한 정숙함을 지키고 있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현태는 캔버스 너머로 힐끗 영운에게 눈길을 던졌다. 그것이 인사였다. 그리고 곧바로 다시 작업으로 돌아가 주변 일에는 완전히 관심을 끊어버리는 것이었다.
그의 <열중>은 곁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무서운 것이었다. 날개가 잘린 천사가 흙바닥에서―마치 차에 치인 비둘기 같은 모습으로― 발버둥치는 것처럼 그의 손가락은 움직였고 그의 눈동자는 자신의 원래 색깔을 찾기 위해 수천 번씩이나 번쩍거리면서 열광적으로 색을 바꾸고 있었다. 영운은 그러한 현태의 모습을 보면서 늘 질투와 경외심이 뒤섞인 이상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저 무능력자가! 그렇다. 자신이 없으면 밥 한 끼를 위해 구걸조차 제대로 하지 못할 저 완전한 무능력자가 어떻게 저럴 수 있단 말인가. 대학을 그만둘 때도 그는 모두의 비웃음을 샀었지. <저러한 인간>이 그나마 굴종조차 할 줄 모른다면 도대체 어떤 삶을 살 수 있겠느냐고……. 영운이 갈 곳 없게 된 현태를 자신의 화실로 부른 것도 사실은 그가 현태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이 어려서부터 보아왔던 그 광인이 갖고 있는 어떤 번뜩이는 천재가? 혹은 그저 광기가, 어떤 모습으로 만개하고 불에 타버릴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들이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라는 점도 인정으로서 나타나기는 했다. 그러나 영운이 파악하고 있기로는, 현태는 누군가의 친구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우리가 쉽게 이해하는 친구라는 관계도 현태의 머릿속에는 없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는 엄청난 <악한>일지도 모른다. 물론 현태를 악한이라고 칭하고자한다면 <악>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재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영운은 거의 십년 전부터 현태가 자신과 함께 세상에 부딪히고 구르며 성장하는 것을 보아왔다. 하여 그의 오래된 이상함도, 몸과 함께 점점 커가는 광증도 전부 보았다. 그러나 현태는 여전히 남들은 보지 못하는 빛을 보면서 그 속에서 헤매는 것 같았고 산산이 조각난 사금파리처럼 도무지 끼워 맞출 수 없는 퍼즐조각 같았다. 즉 영운조차도 현태를 알지 못했다. 사실 누가 누구를 완전히 알 수 있느냐는 물음이 여기서 제기될 수 있으나, 적어도 인간이 개를 쓰다듬을 때 그 개가 기뻐하거나 혹은 거리껴하는 것을 알 수 있듯이 <이해>라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인 것이다. 그런데 현태는 늘상 남들과 다른 곳을 보고 있었고, 남들과 다른 것에 의해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것은 즉 영운과 사람들에게는 몰이해였다.
현태는 지금 이상한 빛에 취해있었다. 그것이 그를 끊임없이 그림 그리게 만들었다. 잠시라도 정신의 긴장을 늦추면 그 빛은 새처럼 멀리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악착 같이 그림에 달라붙었고 안타까워했다. 그 빛이 달아나버리면 현태는 다시 도무지 밟을 수 없는 땅으로 뚝 떨어져버리는데 그곳은 움찔거리는 그림자들의 지옥이다. 그 그림자는 배고픈 개들처럼 현태의 정신을 물어뜯고 갈가리 찢어 설 수 없게 만든다. 미칠 지경인 것이다. 안 그래도 그는 미쳐있는데, 만화경에 비친 풍경인 것처럼 현태의 시선은 조각조각 분열되어 구름 위와 기름 웅덩이 속을 부유한다. 그러한 컨디션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그래서 즉, 이상한 빛을 품고서 그림을 그리는 순간만이 현태에게는 제정신으로 있을 수 있는 아주 소중하고도 귀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비록 남들 보기에는 더욱 미친 것처럼 그의 눈동자에서 불꽃이 튀고 그림 속에 그의 영혼이 붙들린 것 같더라도.
<겨울의 빛, 겨울 하늘의 빛!> 현태가 머릿속으로 중얼거렸다. 얼마나 멋지고 선명했던가? 곤충과 식물이 모두 죽는 추위 속에서 빛살은 금속성으로 고고하게 빛난다. 마치 미간에 박히는 화살처럼. 쏟아져 내리는 창(槍)처럼. 그는 마지막으로 푸른 물감 위에 흰색 선을 그었다.
그리고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한 손에는 팔레트를, 한 손에는 붓을 들고 이젤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영운은 옆에서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현태는 술 취한 것처럼, 혹은 화난 것처럼 사나운 걸음걸이로 같은 곳을 맴돌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공중에 대고 말하는 것이었다. “아 그래! 끝났다. 가버렸다!”
영운은 그러는 현태를 보고 드디어 여유가 생겼구나 싶어서 말을 걸었다. “이봐, 네가 봐야 할 게 있는데.” 그러자 현태는 영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가 봐야 할 것?”
“그래, 사실은 내 앞으로 편지가 한 통 왔거든.”
“설마 그게 내 부모님한테서 온 건 아니겠지.” 현태가 불안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건 아니야. 이건 우리 고등학교 동문회 대표한테서 온 거다.” 그러면서 영운은 접힌 종이 하나를 현태에게 내밀었다.
현태는 여전히 양 손에 붓과 팔레트를 든 채로 영운이 내민 종이를 내려다보다가 주변에 있는 탁자 위에 그것들을 내려놓고 종이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새삼 중얼거렸다. “편지로군!”
“읽어보면 알겠지만 맨 끝에 특별히 너에 대한 언급이 되어있다. 아무도 지금 네 주소를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혹시라도 연락처를 아는 사람은 이번 동창회에 대한 정보를 너에게 전해달라고…….”
현태는 듣는 둥 마는 둥 편지를 읽었다. 현태와 함께 고등학교 마지막 년도를 보냈던 학우들이 동창회를 연다는 내용이었다. 영운이 말했듯이 편지 끝에는 현태에 대한 글귀도 짧게 적혀있었다.
“그리운데! 이게 도대체 언제 적 이름들이야?” 현태가 외쳤다. “그리고 편지를 쓴 건 전교 일등의 우리 반장 나으리로군.”
“넌 휴대전화도 없고 집도 나와 살고 있으니 어떻게 연락해야할지 몰랐겠지.” 영운이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갈 테냐?”
그러자 현태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편지를 접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 번 가량 접은 편지를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는 손으로 턱을 괬다. 입은 다문 채 말이다. 그것은 현태가 말을 주저하고 있다는 표시였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서있는 영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그들이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랍군.”
“하하!” 현태의 말에 영운이 웃음을 터트렸다. “도대체 누가 널 기억하지 못하겠어? <3학년 1반의 정신병자>를!”
“그래…… 그런 별명도 있었지.” 현태는 조용히 읊조리듯이 말했다. <정신병자>라는 강렬한 단어에도 그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들이 나를 보고 싶어 할까?”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군. 너는 나쁜 학생이었지만 나쁜 친구는 아니었어. 아마 교사들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야.”
“그럴 수도 있겠지.” 현태는 졸린 듯한 눈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나는 그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나쁜 피를 가진 인간이었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오 년 만에 만나는 얼굴들이야. 만나보고 싶은 친구는 없어? 나는 너와 같이 갔으면 하는데. 재미있을 거야.”
“만나보고 싶은 친구라.” 현태가 되뇌었다. 그는 머릿속으로 담배 연기에 휩싸인 듯 흐릿한 얼굴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보았다. 그런데…… 그는 어떤 얼굴과 마주했을 때 갑자기 피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현태는 눈동자를 크게 떴고 흥분이 가슴 속에서 맴돌았다. 그리고 격양된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래. 있는데. 만나고 싶은 아이가.”
“있어? 그럼 갈 테냐?” 영운이 되물었다.
“가지! 가고말고!”
현태는 주머니칼로 도려낸 붉은 과실처럼 입을 벌려 웃었다.
3. 혼돈과 순수에 대하여
동창회에 가는 것이 결정되자 영운은 기뻐했고, 곧 자기 물건을 챙겨 학교로 갔다. 수업 시간이 가까워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서면서 슬리퍼를 잊지 않고 사오겠노라고 자신에게 다짐하듯이 현태에게 말을 주었다. 현태는 화실에 홀로 남았다. 그는 저녁이 될 때까지 단 한 발자국도 화실을 나서지 않고 계속 그림을 그렸다. 아니 그림만 그렸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는 그림을 그리다가도 자주 벌떡 일어나서 허공에 뭐라고 말을 내뱉고 웃고 화내고 겅중겅중 뛰거나 초조한 발걸음으로 화실 안을 쏘다니다가 다시 이젤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곤 했던 것이다. 그것이 늘 그가 하는 일이었다.
도시에 그늘이 깔리기 시작하자 현태는 커튼을 걷었다. 이제 너무 어두워져서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그는 캔버스에 물감이 마르게 내버려두고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상점들이 불을 켜고 교복을 입은 학생무리가 거리를 바쁘게 지나다니고 있었다. 이 거리는 낮보다 오히려 저녁에 더 소란스러웠다. 집에 돌아가는 학생들이나 저녁을 먹기 위해 골목을 들쑤시고 다니는 사람들로 인하여. 현태는 말없이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눈동자 깊숙한 곳에 바닥없는 늪이 있어서 정신이 그리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개구리, 도마뱀, 도롱뇽 등 바닥에 붙어사는 것들의 행진.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지구에 기름을 끼얹고 불을 붙일 것이다.> 현태의 가슴이 지껄였다. 나는 이런 싸구려 파괴주의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는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것을 느꼈다. 검은색 피가 혈관을 흐르는 것이 아팠다. 현태는 신경질적으로 창문에서 몸을 홱 돌렸다. 그리고 그는 팔레트 옆에 놓인 페인팅 나이프를 집어 들고 화실 구석으로 가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화실에 깔린 그늘이 뭐라고 소곤소곤 떠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현태의 수 십 개의 정신에게 말을 거는데 모든 정신의 입장에서 대화를 나누자면 너무나도 피로하다. 그는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창문에서 비쳐 들어오는 암황색 약한 조명이 현태의 상처투성이 가슴을 비췄다. 적색 선들이 그의 가슴 위에서 강물의 지류처럼 여러 갈래로 흐르고 있었다. 아침에 보았듯이. 현태는 유화물감이 묻은 채인 페인팅 나이프를 들어서 자신의 가슴을 조준했다. 그리고 하나, 둘. 현태는 나이프를 들어 올리는가 싶더니 그대로 손목의 반동을 이용해서 가슴 위에 그것을 내리찍었다.
페인팅 나이프의 무딘 칼날에 피부가 찢어져나갔다. 아! 바닥이 차갑구나. 통증을 느낄 때는 유난히 냉기에 민감하다. 아니 통증이라는 것 자체가 확확 달아오르는 냉기의 불꽃과도 같다. 피부가 찢어지고 그 속으로 분홍빛 갓난아기 젖살 같은 속살이 드러나 보인다. 그것은 빛을 받아 번들번들하다. 그 속살은 한동안 바깥 공기를 들이마신 뒤에야 머뭇머뭇 피를 토하기 시작한다. 송골송골 핏방울이 맺히는가 싶으면 순식간이다. 터진 둑처럼 줄줄 흐른다. 현태의 뱃가죽이 미지근한 피로 젖고 한 박자 늦게 피부가 찢긴 고통이 번개처럼 가슴 위를 구른다.
“아하!” 현태가 고통에 겨워 일그러진 웃음을 지으면서 소리쳤다. 그리고 그는 다시 페인팅 나이프를 들어 올리더니, 가슴에 내리찍는다. 가죽이 터지듯이 찢긴다. 또 피 한줄기가 엎어진 잔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처럼 울컥울컥 솟는다. 피가 흘러넘쳐 그의 면바지 윗부분에 얼룩이 졌다. 현태는 언젠가 잡지에서 본 아마존 강처럼 수십 수백 줄기로 나뉘어 배 위를 흐르는 혈액을 손으로 문질렀다. 앙상하게 마른 피부의 감촉 위에 걸쭉한 피가 덧씌워져 미끈미끈하다. 그의 손바닥은 칠을 한 것처럼 빨갛게 물들었고 현태는 그것을 들여다보다가 또 나이프를 들어 가슴을 찢는다. <이것은 쾌락이다.> 그는 생각했다.
<이것은 내가 지상에 서있기 위한 방편 중의 하나이고, 삶의 습관이며, 또 쾌락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렇게 하는 것밖에는 다른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오, 이 고통! 눈물이 찔끔 흘러나올 정도의 통증. 나는 이렇게 해서 내 안의 엉킨 《감상》들이…… 해소되는 것을 느낀다. 혈액의 분출과 함께. 말하자면 토악질 같은 것이다. 독을 마시면 위장이 스스로 그것을 되뱉는 것처럼. 토악질을 하는 것도 참 즐겁지 아니한가? 내 속을 비워가는 느낌이 말이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불교적일 수도 있겠다…… 헤헤!> 현태는 자조했다. 그리고 그는 떨어트리듯이 나이프를 바닥에 내던졌다. 쇠붙이와 돌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음침한 화실 안에서 유리창 깨지듯이 울렸다. 세 줄기의 새로운 상처가 욱신거렸고 피가 끊임없이 흘렀다. 지금 보니 그의 셔츠 구석구석에 묻은 까만 얼룩들도 전부 피다. 하기는 그가 어떻게 꼬박꼬박 세탁을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현태의 가슴에 난 흉터의 개수만큼이나 셔츠의 얼룩도 많다. 그는 다리를 뻗고 바닥에 늘어졌다. 창문가의 어둡고 노란 빛이 흔들거리면서 그의 시야를 괴롭혔다.
돌로 된 바닥이 싸늘한 것이 계속 마음 한 구석에 걸렸다. 현태는 손으로 바닥을 짚어보았다. 서늘했다. 그리고 바닥에는 피로 된 손도장이 찍혔다. <영운이가 또 뭐라고 하겠군.> 그가 권태로운 정신으로 중얼거렸다. 그렇다. 그는 권태로웠다. 피를 보니 또 매사가 다 귀찮게 느껴지고 허무주의적인 감성이 가슴을 들볶았다. 화실 바닥에 누운 채로 피를 질질 흘리고 있는 현태. 공간은 어둡고 칙칙하다. 그가 느끼기를 이 장면 그대로 모든 것이 <구덩이>에 빠져버릴 것 같았고 그런 심상이 어쩐지 즐거웠다. 현태는 눈을 감고서 소리 없이 낄낄 웃었다.
건물 전체가 호수 밑바닥에 잠긴 것처럼 조용했다. 거리의 소음은 화실까지 닿지 못했다.
현태는 가늘게 눈을 뜨고 어둑한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제 차분한 정신으로 동창회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상처에서 나온 피가 끈적끈적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녹은 강철처럼.
<그 아이를 만나겠구나.> 현태가 뻐끔거렸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뒤로 땋은 단발머리. 항상 웃음기가 가득 담겨있던 수정 같은 눈. 코 주변에 점점이 찍힌 귀여운 주근깨. 복숭앗빛 입술. 잘 만들어진 도자기처럼 아름다운 곡선을 가진 턱. 찔레꽃 같이 하얀 얼굴.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웃음…… 그녀의 웃는 얼굴. 현태는 감히 흉내 낼 수도 없었던, 현태가 절대 지을 수 없었던 웃는 얼굴.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쯤 굳은 피 한 방울이 배 위로 도로록 굴러 떨어졌다. 현태는 일어서서 멍한 표정으로 주변을 기웃거리더니 문을 향해 걸었다. 피를 흘린 덕분인지 조금 어지러웠다. 그는 화실을 나서고 복도를 거쳐 화장실로 걸었다. 복도에 아무도 사람이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현태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는 셔츠 단추를 전부 열어젖혀 맨 가슴을 다 드러낸 채였고 끔찍한 흉터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비틀비틀 걸었다.
그녀의 웃음! 현태의 뇌가 되뇌었다. 현태의 세계는 오래 전부터 광기와 상처로 들끓는 세계였다. 고로 그가 아는 것도 오직 광증과 병증에 대한 것들밖에 없었다. 그는 대체로 유쾌하였지만 머리가 돈 놈이었다. 현태는 웃더라도 깨끗하게 웃을 줄을 몰랐다. 그리고 그러한 <순결> 같은 것이 실재하리라고는 도무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현태는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있었던 것이다. <순결한 웃음>이 말이다. 현태는 처음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았을 때 영혼을 쇠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는 완전히 홀려버렸다. 그리고 이해한 것이다. 그녀는 오염되지 않은 인격이노라고. 말인즉슨 현태는 자신이 오염된, 병에 걸린 인간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실감했다. “아아!” 현태가 세면대로 다가가면서 울부짖었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던 것 같다!” 현태는 찢어진 목소리로 화장실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고함을 질렀다. <흐흐흐, 감상주의라!> 그리고 그는 웃었다. 세면대 앞에서 현태는 거울을 쳐다보았다. 피범벅의 광인이 하나 서있었다. 그것을 보고 그는 더 크게, 더 위악적으로 웃기 시작했다.
“그녀를 만난다고? 네가?” 현태는 거울에 손가락질을 하면서 소리쳤다. 이 더러운 놈. 이 미친놈. 이 머리가 돌아버린 녀석아! 그는 그렇게나 웃다가 목이 찢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심하게 웃었다. 아, 그녀의 완벽한 웃음이여! 그 순결한 눈동자와 깨끗한 입술이여! 현태의 세계에서는 절대 발견하지 못할 그 미덕들. 거울을 향한 손가락 끝에는 빨간 피가 묻어있었다.
그런데 현태는 한참을 웃다가 긴 한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납덩어리 같은 눈동자로 천천히 거울 속의 자신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현태도 자신이 늘 일종의 착란상태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마음속에 자꾸만 <그녀>의 한 점 더러움도 없는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와 같은 학교를 다니던 때의 나는 어땠던가? 그때도 나는 그녀에게 차마 손가락 하나 댈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모든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의 상징이었고…… 나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나는 이상한 욕망만으로 득시글거리는…… 말하자면 벌레였다!> 그는 생각했다.
<정말로 그녀를 만나러 갈 것인가?> 현태가 거울을 노려보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어떤 보상을? 그럴 수도 있다. 그녀는 지난 오 년간 어떻게 변했을까. 아마도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완전한 존재였으니까. 완전한 것은 변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런데 현태는 어떤가? 그는 추락하기만 했다. 더욱 더 깊은 곳으로, 더욱 더 어둡고 음습한 곳으로. 사회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광기의 발원지로 굴러 떨어져오기만 했다. 흐흐! 그는 오히려 웃었다. 비탄에 빠지는 것은 성격적으로 맞지 않았다. 현태는 고뇌하고 있었지만 기분만은 유쾌했다. 그것이 그의 광증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아무튼 간에, 현태는 마침내 입 밖으로 자신의 생각을 씨부렁씨부렁 내뱉기 시작했다.
“아니다. 그래도 나는 그녀를 만나러 갈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그럴 수 있고, 그렇게 하고 싶기 때문에. 영운에게 부탁해보자. 그는 나를 덜 미치광이처럼 보이게 하는 일에 협조해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모든 것이 기대된다. 나는 아무런 희망도 없고…… 따라서 전적으로 희망적이다. 내가 감히 무언가를 바라기라도 한단 말인가? 아니다! 나는 그렇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가 나를 두려워하지는 않았으면 좋으련만…….”
그리고 그는 씨익 웃었다. 그리고 내친 김에 세수를 했다. 가슴의 상처가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쓰라린 것이 너무나도 유쾌했다.
현태는 정신과 옷차림을 추스르고 화실에 앉아있었다. 그는 화장실에서 걸레를 가져다가 핏자국을 닦아낸 뒤였다. 여전히 붉은 자국이 지저분하게 번져있기는 했지만, 아무튼 그가 그것을 치우려고 했다는 점만이라도 가상히 여기도록 하자. 아직도 형광등이 켜있지 않았다. 해는 이미 진 뒤였고 사위는 점점 더 어두워져갔지만 현태는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였고 조명 같은 것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다. 그는 멍청한 얼굴로 어둠 속에 앉아서 허공을 쳐다보다가 가끔 <왜 영운이 돌아오지 않는 걸까?> 따위만을 생각하곤 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화실의 문을 두드렸다. 현태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냥 넋 놓고 노크를 한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철컥하고 문고리가 돌아갔다. 문이 열리고 어떤 교복 차림의 소녀가 들어왔다.
“아저씨, 있어요?” 그 아이가 어두컴컴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화실에 대고 외쳤다.
현태는 또 한참을 대답하지 않고 있다가 돌연 <음!>하고 기침 소리를 냈다. 그러자 소녀는 문가에서 더듬거리더니 형광등의 스위치를 찾아 눌렀다. 번쩍하고 불이 켜졌다.
“있으면 불 좀 켜놓도록 해요.” 소녀가 지적하듯이 말했다. 현태는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그러다가 그는 대뜸 물었다.
“왜 또 왔어?” 그는 눈동자를 들어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말했다시피 봄 계절의 교복을 입고 있었다. 블라우스 위에는 학교 문양이 가슴께에 박힌 얇은 카디건을 걸치고, 어깨에는 까만 화구통을 매고 있었다. 소녀의 얼굴 생김생김은 당찬 모양새를 하고 있었고 검은색 기다란 머릿결이 허리까지 내려왔다.
“오늘도 아저씨 그림 보러 왔죠.” 소녀가 대답했다. 그러자 현태는 소녀를 지그시 노려보더니 뭔가를 내놓으라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소녀는 주머니를 뒤지더니 담뱃갑을 꺼냈다. 그리고 그 가늘고 하얀 손가락으로 담배 한 개비를 꺼내서 현태에게로 다가와 그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불도.” 현태가 담담하게 내뱉었다. 소녀는 빨간색 라이터도 꺼내서 그에게 주었다.
현태는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댕겨 빨았다. 니코틴이 피 속을 돌았다. 알싸한 맛이 머릿속에 퍼졌다. 그는 길게 연기를 뿜었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서 이젤을 들더니 소녀 쪽으로 돌려놓으며 말했다. “자, 실컷 봐라.”
소녀는 의자를 끌어와서 그림 앞에 다소곳이 앉았다. 그녀는 바닥에 화구통을 내려놓고 진지한 얼굴로 현태가 그린 풍경화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현태는 무뚝뚝한 얼굴로 담배 연기를 뿜으면서 소녀를 바라보았다. 이 아이는 왜 자꾸만 화실에 오는 걸까? 현태는 소녀가 자신의 그림을 보러 이곳에 온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자들 특유의 사치 취미 같은 것인가 싶기도 했다. 한때 귀부인들이 예술가들을 액세서리처럼 소유하고 다녔듯이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꽤 불쾌한 일이다. 하지만…… 아무려면 어떻단 말인가?> 그는 무심히 연기를 빨아들였다.
“오늘 그린 건 이게 전부인가요?” 소녀가 물었다.
“스케치도 몇 점 있어. 탁자 위에.” 현태가 담배를 쥔 손으로 탁자를 가리켰다.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탁자로 걸어갔다. 그리고 탁자 위에 마구 흩어져있는 종이들을 주워 모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현태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화실 안은 한동안 형광등이 잉잉거리는 소리와 소녀가 종이를 넘기는 소리만이 정적 속에 흘렀다. 창문 밖은 완전히 캄캄했다. 화실에 불을 켜놔서 더욱 그랬다. 담배는 거의 다 타들어가서 필터만 남은 상태였다. 현태는 마지막으로 한 모금을 빨고 꽁초를 창문 밖으로 던져버렸다.
“어, 그러면 안돼요.” 그림들을 살피던 소녀가 현태의 행위를 보고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현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소녀의 눈동자를 멀거니 마주보았다. 소녀가 화실 한 구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쓰레기통이 있잖아요.”
“창문은 여기 있잖아.” 현태가 턱짓으로 바로 옆의 창문가를 가리키는 시늉을 해보였다. 소녀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코로 숨을 한 번 뿜고 말았다.
소녀는 스케치를 다 본 것 같았다. 그녀는 종이더미를 정리해서 탁자 위에 올려놓더니 현태를 향해 한 발짝 다가왔다.
“아저씨, 몇 살이에요?” 소녀가 물었다.
“왜.”
“그냥. 집은 있어요?”
“집도 없어 뵈냐?”
현태의 반문에 소녀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것을 보고 현태는 그만 소리 내서 웃어버렸다.
<이 아이는 내가 《이상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에게 접근하는군. 나는 이 소녀의 당찬 눈매에서 세계에 대한 자신감 같은 것을 읽어낼 수 있다. 선(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자신만만하지만 비뚤어지지는 않은…… 말하자면 정의가! 그리고 이 정의의 소녀는 나에게 어떤 호기심의 화살을 향하고 있는 것인가?> 현태는 웃다 말고 소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너, 화가가 되고 싶으냐?” 현태가 소녀의 화구통을 가리키며 물었다.
“맞아요.”
“그리고 미대에 가고 싶고?” 현태가 재차 물었다. 소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현태는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며칠이나 면도를 하지 않아 까슬까슬한 수염이 손끝에 느껴졌다. 그가 굳이 소녀에게 어떤 조언을 할 필요는 없었다. 조언은 무슨 조언이란 말인가. 현태가 사는 방식은 도저히 남에게 추천할만한 것이 못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현태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말을 삼갔다. 대학의 교육방식이나 교수들의 성질 같은 것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런 것은 전부 별 의미가 없는 말들일 것이었다. 그래,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현태는 도망자다. 그는 전부 집어치우고 도망쳐 나왔다. 그리고 현태는 지금 <밑바닥>에 있다. 물에 빠진 채로, 지푸라기 대신 캔버스를 부여잡고.
“난 아저씨의 그림이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소녀가 말했다. “너무 차갑고, 너무 고요하긴 하지만요. 마치 얼음 덩어리처럼.”
“비평 같은 건 필요 없어.” 현태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 말에 소녀는 공격을 당한 것처럼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은 비열한 것이었지만 사실이었다. 그렇다, 이것은 분명히 해둬야 할 것이었는데, 현태는 <누군가>를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었다. 현태 자신도 스스로가 왜 그림을 그리는지 잘 알지 못했다. 누군들 알 수 있겠는가? 그는 다만 그가 그림을 그릴 수 있고, 또 그려야 했기 때문에 그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자기도취에 취해있는가? 그것에 대해서는 언어철학적 검토가 필요하다. 과연 자기도취라는 그 부정적인 뉘앙스의 단어가 얼마나 넓은 그물망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여하간, 현태의 그림에 대해 단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그것은 <생존방식>이었다. 사자가 먹이를 사냥하고 새가 하늘을 나는 것처럼 말이다. 갈매기가 하늘을 날 때 반드시 누군가가 그 낢의 근거에 대해 비평해줘야만 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하늘을 날아가는 갈매기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저 새가 나는 이유는 너무 이상하다!>고 혹평을 해대는 인간이 있다면 그것은 우스운 인간이리라. 필경 갈매기는 그 비평가의 목소리에 손톱만큼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물론 새의 나는 방식이 이상하다면 어떤 이들은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도 있다. <저 갈매기는 불구인가?>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지금의 현태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에 너무 열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의견들은 필요로 하지도 않았다. 만약에 정신적으로 고차원인 어떤 창작행위만을 예술이라고 부른다면, 현태는 결코 예술가가 아니었다. 그는 직관과 충동에 홀려있었고 내면에서 고동치는 소리와 이미지들 때문에 미친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현태의 미술은 마치 막힌 파이프에서 마침내 폭발적으로 물줄기가 새기 시작하는 것처럼 탄생했다. 그것은 전혀 고상한 것이 아니었다.
“미안해요.” 소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 사과를 하지?” 현태는 오히려 화가 치민다는 듯이 되물었다. 실제로 그는 점점 짜증이 나고 있었다.
<이것 봐라! 나는 또 화가 나기 시작하는군. 내 감정이라는 것은 정말로 알 수가 없다. 나는 지금 상황이 내가 화를 낼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다. 그런데 나는 짜증이 치민다! 내 생각에 나의 감정기관은 어딘가 고장이 난 것 같다.> 현태는 화가 나는 한편으로 또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내가 비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내가 정말로 그렇게 오만무도한 인간인가? 글쎄, 나는 모르겠군!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조차 모르겠어!” 그는 흥분해서 연이어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너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너는 그냥 네 생각을 말했을 뿐이다! 그런데 나는 <필요 없다>는 한마디로 일축했지. 오히려 내가 너에게 사과를 해야 하는 것 아닐까? 하! 하!”
소녀는 조금 겁에 질린 것 같았다.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왜냐하면 현태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높은 목소리로 지껄이면서 끊임없이 과격한 제스처들을 취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는 충분히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녀는 도망치지는 않았다. 깡이 좋은 아이였다. 소녀는 그 자리에 서서 현태가 지껄이는 것을 멈출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현태는 흥분하는 것에 지쳐서 다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한층 진정된 기분으로 입을 다물고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새파랗게 어린 아이한테 무슨 짓을 한 거지? 이런 멍청한 놈…….> 그는 자책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요.” 소녀가 조곤조곤 말하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그녀가 반복해서 말했다.
그때 화실 문이 철컥하고 열렸다.
남자 두 명이 화실 안으로 들어왔다. 한 명은 영운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영운과 생김세가 닮은,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금테 안경을 걸친 노신사였다. 현태는 의자에 주저앉은 채로 눈동자를 들어 그들을 보았다. 그는 지금 신경질이 나있었기 때문에 어쩌면 영운에게 왜 이렇게 늦었냐고 소리를 지를지도 몰랐다. 그러나 현태는 그저 불만스럽게 입을 꽉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어어, 이 아가씨 또 왔군.” 영운이 현태 앞에 서있는 소녀를 발견하고 말했다. 소녀는 영운을 향해서 말없이 고개를 끄떡해보였다.
“소연이 네가 왜 여기에 있니?” 영운 뒤에 서있던 노신사가 소녀를 보고 물었다.
<소연? 이 아이 이름이 소연인가보군. 흠, 그러고 보니 나는 아직까지 이 소녀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그것이 뭐어 대수로운 일도 아니지만…….> 노신사의 말을 듣고 현태가 생각했다.
“이 아이는 가끔 우리 화실에 와요, 아버지. 아마 현태의 그림을 보러 오는 것 같습니다.” 영운이 그 노신사에게로 고개를 향하며 대신 대답했다.
“아, 그래? 그것 참 놀라운 일이로군.” 영운의 아버지가 곁눈질로 아직까지 인사 한마디도 안하고 구석에 앉아있는 현태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는 오늘도 거지 같은 꼴이로군. 일자리는 아직도 구하지 못했나?”
“아하, 괜찮습니다. 저는 여전히 유쾌합니다 아버님.” 현태가 비실비실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언뜻 누군가에 대한 조롱 같은 것이 섞여있었다.
“유쾌하다니 다행이군 그래.” 영운의 아버지가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그는 소연을 향해 명령하듯이 말했다. “시간이 늦었으니 소연이 너는 이제 돌아가도록 해라. 그리고 현태 군을 계속 만나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을 좀 해보도록 해. 왜냐하면 현태군은 그다지 본받을 만한 인간이 아니거든.” 그의 말에 현태가 소리죽여 웃음을 터트렸다.
소연은 현태와 영운의 아버지 사이의 긴장된 공기 때문에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그럼 돌아갈게요.” 그녀는 바닥에 놓여있던 화구통을 집어 들고서 영운의 아버지에게 인사를 했다. “내일 뵐게요 원장님.”
“잘 가거라!” 영운의 아버지가 자신을 지나쳐가는 소연에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소연은 화실 문을 나서면서 힐끗 고개를 돌려 현태를 바라보았다. 그는 의자에 널브러진 채로 얼음처럼 차가운 미소를 짓고서 소연을 보고 있었다. 소연은 순간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밖으로 나갔고, 화실 문을 닫았다.
이제 화실 안에는 현태와 영운, 그리고 영운 아버지만이 남아있었다. 그들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약에 취한 것처럼 흔들거리는 형광등 불빛만이 화실 안을 비추고 있었다. 영운은 뭔가를 걱정하는 표정이었고 그의 아버지는 여전히 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때 현태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화실에 직접 내려오시는 것도 오랜만이로군요! 무언가 저에게 볼일이 있으십니까?”
“그래. 내 구두를 돌려받으러 왔네.” 영운의 아버지가 분명한 발음으로 말했다.
“이런! 그걸 까맣게 잊고 있었군요.” 현태가 명랑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주섬주섬 구두를 벗고 영운의 아버지에게 그것을 건넸다. “덕분에 오늘 맨발로 지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가 양말바람으로 말했다.
영운의 아버지는 구두를 받아들고 현태를 잠깐 마주보더니, 아무 말도 없이 돌아섰다. 그리고 현태에게는 등을 돌린 채로 영운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먼저 돌아가 있겠다.”
“들어가세요 아버지.” 영운이 말했다. 그 뒤에 영운의 아버지는 화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화실 안에 두 사람만이 남자 현태는 다시 의자 위에 무너지듯이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한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늦었군!”
“학교에서 같은 조 사람들이랑 논의할 게 있었거든. 그리고 여기, 네 슬리퍼다.” 영운이 대답하면서 그때까지 손에 들고 있던 까만 비닐봉지를 건넸다.
현태는 그것을 받아서 거꾸로 쏟았다. 문구점에서 파는 싸구려 슬리퍼 한 쌍이 쏟아져서 바닥에서 굴렀다.
“저 소연이라는 학생은 네 그림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지?” 영운이 한창 신발을 신고 있는 현태에게 물었다.
“글쎄, 아무려면 어때.” 현태는 딱딱하게 대답했다. “그보다 동창회가 언제라고 했지?”
“이번 주 토요일.” 영운이 대답했다.
“오늘은 무슨 요일인데?”
“오늘은 화요일이지.”
“수, 목, 금…… 네 날 뒤군.” 현태가 중얼거렸다.
<아! 머리가 아프다! 머리가 아파! 깨진 온도계에서 흘러나온 수은이 구르는 것처럼 통증이 머릿속을 구른다. 네 날 뒤라.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영운을 기다리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 그 소연이라는 소녀가 갑자기 들어와서 내 생각을 방해하기는 했지만, 나는 충분히 많은 생각을 했다. 동창회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녀에 대해서. 주로 그녀에 대한 생각이었지. 사실 동창회 같은 것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나는 그녀를 확인하기만 하면 된다. 그녀가 여전히…… 내 존재를 완전 부정할 만큼 완벽한지를! 건강한 것의 찬란함이여! 그리고 나는 또 하나를 확인해야한다. 《그 시절》 내가 갖고 있었던 욕망을…… 말이다. 아아, 머리가 아프다.> 현태는 생각하면서 자신의 머리를 감싸 쥐었다.
“영운아, 나는 이 꼴로 동창회에 갈 수는 없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갑자기 말했다. “그래서 너에게 부탁을 해야겠다. 토요일 날 나를 건강한 사람처럼 꾸며다오!”
“뭐라고?” 영운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건강한 사람처럼? 그야 어려울 것 없지. 하지만 네가 그런 부탁을 하다니 의외인걸!”
“나는 내 실험이 실패할 것 정도는 알고 있다.” 현태가 중얼중얼 말했다.
“무슨 말이야?”
“아니다. 너는 그냥 내가, 적어도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인간처럼 보이게 만들어주면 된다.” 현태는 눈동자를 굴리면서 영운에게 말했다. <나는 꾸미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성은 갖고 있다. 책략도 갖고 있다. 나의 얇은 가면이 깨지지 않은 채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그런 것은 이미 오래전에 결말을 보았다. 나는 그냥 미친 사람인 채로 있는 것이 더 낫다. 누구에게 나은가 하면 모두에게 그렇다. 하지만 나는…… 이번만은…… 헤헤!> 그는 속으로 생각하면서 웃었다.
“좋아. 해주지. 나는 여전히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원하는 대로 해주마. 머리를 잘라주고 면도를 시키고 세련된 옷을 입혀주마. 그래서 토요일에, 우리 학창시절의 친구들이 너를 볼 때 깜짝 놀라게 해주자고.” 영운은 즐거운 듯이 말했다. 그것이 그의 좋은 점이었다. 현태를 의심하지 않고 그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는 것 말이다. 그것은 현태에게 좋은 일이었다. 영운은 현태를 위해 자신의 재산이나 시간 등을 희생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다행인 것은 영운이 그러한 일들을 어느 정도는 즐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영운은 현태라는 특이한 인간을 뒷바라지 하는 것을 마치 희귀동물을 <키우는> 것처럼 즐거워하기도 했다. 이것은 그의 성질 때문이리라. 아무튼 현태가 영운 같은 인간을 만났다는 것도 현태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행운이었다.
현태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캔버스 따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탁자 위에 놓여있는 스케치 더미도 화실 한구석에 쌓아두고 말이다. 그는 이제야 피곤을 느꼈다. 마치 지금까지는 광기가 그를 활기 넘치게 만들고 있던 것처럼. 그런데 현태는 재차 머리가 아프다고 생각했다. 분명 하루 종일 뇌에 가해진 과부하 때문이리라. 현태는 너무나도 생각을 많이 했다. 늘상 그의 머릿속에는 어떤 <말>들이 자동적으로 흘러나오는데 현태의 정신은 그것들을 붙잡고 논리 분석하여 그에 대한 해석과 의견을 끊임없이 지껄이는 것이다. 하루 이십사 시간을 그렇게 지껄이며 보낸다는 것은 굉장히 피곤한 일이었다. 그래서 머리가 아픈 것이리라. 각성제 따위로 한껏 들떠있던 정신이 가라앉기 시작할 때 끔찍한 통증을 느끼듯이 말이다.
“아, 나는 이제 돌아가야겠어.” 정리를 마친 현태가 말했다. “너는 더 있다가 갈 테냐?”
“그래, 오늘은 하루 종일 학교 때문에 바빴으니 이제부터라도 그림을 좀 그려야지. 너 화실 열쇠는 갖고 있지?” 영운이 말했다.
“아마도…… 바지 주머니에 있군.” 현태가 호주머니를 더듬더니 말했다.
“나는 내일 오후 늦게나 화실에 들를 거야. 그때 머리를 자르러 가자고. 그리고 미리 좀……” 영운은 자신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씻어두라고.”
“좋아. 알겠다. 나는 이제 간다.” 현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슬리퍼를 질질 끌며 화실 밖으로 향했다. 영운이 그에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현태는 화실 문을 닫고 나왔다. 복도는 어두컴컴했고 메아리 같은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는 계단을 내려가 건물 밖으로 나섰다. 이미 완전한 밤이었다.
하늘은 어두운데 거리는 인공의 조명으로 밝게 흔들렸다. 아, 그리고 사람이 많았다. 골목 구석에 있는 현태의 시야에 보이는 사람만 열 명에서 열댓 명은 되어보였다. 어떤 사람들은 취해있었고 목소리가 높았다. 현태는 얼른 집에 돌아가야겠노라고 생각했다. 이런 광경을 보면 마음이 울렁거려서 좋지 않았다. 별은 없었다. 단 하나도 없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집을 향해 걸었다.
가끔씩 썰렁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은 축축했고 고로 불쾌했다. 공기 중에서 물방울의 냄새가 났다. 현태는 사막에 가고 싶었다. 그곳도 밤에는 춥다고 했다. 뼈가 얼어붙을 만큼. 현태는 사막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어떤 그림을 그릴지 궁금했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눈에 보이는 사람들은 줄어갔다. 그리고 빛의 수 또한 적어지고 있었다. 길거리는 점점 더 어둡고 소리 없는 곳이 되어갔다. 현태는 집으로 향하는 음침한 언덕길을 걸어 오르면서 생각했다. <나는 어쩌면 이런 나라에서 태어난 것을 감사해야할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내가 사는 나라에서는 민간인의 총기 소유가 금지되어있기 때문이다. 만약 전부터 내게 차갑고 묵직한 권총이 한 정 있었다면…… 나는 틀림없이 내 머리를 쏘았을 것이다. 최소한 삼십 번은 그랬을 것이다. 나는 죽음이 무엇인지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내 미간에 총알을 박아 넣었을 것이다. 수도 없이……. 하지만 삶이라는 것은 유쾌한 것이니까 나는 내게 총이 없었다는 사실을 고마워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는 눈을 감고 웃었다.
주택가 안쪽의 캄캄한 골목으로 들어서자 하늘에 달이 뜬 것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현태는 즐거워졌다. 그는 자신이 밤과 하나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고 그의 밤에는 단 하나의 호흡하는 생명도 없었다. 그는 세계가 좋았다. 특히나 이렇게 인간이 멸종한 세계가 말이다. 그는 너무도 유쾌한 기분이었고 그래서 이대로 심장이 멎어버렸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나 그는 계속 걸었다. 언덕길 끝에 하숙집이 있었다.
현태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하숙집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도 아무도 없었다. 모두들 자는 모양이었다. 그는 희미한 빛을 내는 알전구가 달린 복도를 지나쳐서 자신의 방 앞에 도착했다. 현태는 우선 방문을 열고 슬리퍼를 벗은 뒤에 그것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다락> 속으로 기어 올라갔다. 그는 등 뒤로 문을 닫았다.
썩은 공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현태는 어둠 속에서 떨어트리듯이 슬리퍼를 바닥에 내려놓고 천천히 셔츠를 벗기 시작했다. 손끝으로 더듬으며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창문조차 없는 <관짝>이라서 눈이 익숙해질 수 없는 어둠이 사방을 뒤덮고 있었다. 그는 단추를 다 풀고 셔츠를 벗었다. 벗으면서 옷깃이 상처에 스쳐 상처가 따끔거렸다. 현태는 책상이 있을 방향을 향해 벗은 셔츠를 던졌다. 그리고 손으로 눈앞을 더듬으며 느릿느릿 바닥에 펼쳐진 이불 위에 앉았다. 그는 잠시 동안 그러고 있었다. 너무 깊은 어둠 때문에 사고가 발을 떼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는데 그것이 좋았다. 피로가 몰려왔다. 현태는 자기도 모르게 흐흐거리고 웃었다. 아아, 너무나도 아늑하고 너무나도 역겨운 굴이다. 그는 천천히 이불 위로 상체를 넘어트렸다. 그리고 쭈그린 채로 잠에 빠져들었다. 아주 깊은 잠에.
4. 고립과 동일화에 대하여
현태는 익사하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는 호숫가에 있었는데 얼굴을 알아 볼 수 없는 힘이 센 두 남자가 현태의 양팔을 붙잡고 있었다. 현태는 그들이 자신을 호수 속으로 끌고 갈 것을 알았다. 그는 이제 곧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두려웠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현태는 자신의 팔을 붙들고 있는 남자들에게 계속해서 농담을 지껄였다. 그리고 일부러 마구 웃기도 했다. 그들에게 친근한 것처럼 굴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이런, 이제 나는 죽겠군. 내가 원하지도 않는데 말이다.> 현태는 생각했다. 그리고 눈알을 굴리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몇몇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였는데 그들은 현태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현태를 붙잡은 남자들이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그들은 천천히 호수를 향해 걸어 들어갔다. 현태는 공포심과 기쁨 때문에 발작하듯이 웃어댔다. 그는 마지막으로 누군가에게 친절한 한마디를 남기고 싶었다. 자신이 인간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를 어떤 몸짓이나 언어로 표현하고 싶었다. 예를 들어서 지나가는 낯모르는 여인에게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한다든지. 현태의 발을 밟고 당황하여 사과를 하려드는 행인에게 한없이 인자한 표정으로 어깨를 두드려준다든지 하는 일들 말이다. 그러나 주변에는 현태를 꼼짝 못하게 붙잡고 있는 남자 둘밖에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어깨까지 물속에 잠겨있었다. 하는 수가 없어서 현태는 물에 빠지기 직전 그들에게 명랑하게 인사했다.
“수고들 하셨습니다. 형제여!”
그리고 현태는 붙들린 채로 물속으로 끌려들어갔고 기도를 통해 폐에 물이 차는 것을 느끼면서 발버둥 쳤다. 남자들은 발버둥치는 현태를 붙잡고 묵직하고도 차분한 발걸음으로 점점 더 깊은 호수 밑바닥으로 걸어 들어갔다. 현태는 자신이 몸부림치는 소리가 물 때문에 진동하여 들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입과 코로 마구 기포를 내뿜으며 호흡이 한계에 달한 것을 감지했고, 마음속으로 초읽기를 시작했다. <셋, 둘, 하나. 자, 이제 죽는다.>
눈을 뜨자 새까만 어둠이었다. 현태는 눈동자를 크게 뜨고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눅눅하고 매캐한 냄새가 나는 공기가 콧구멍을 들락거리고 있었다. 눈알은 불을 지핀 것처럼 바싹바싹 타들어갔고 온몸에는 철근을 매달아놓은 양 관절이 무거웠다. 현태는 정리되지 않는 사고를 천천히 한 덩어리로 모아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여기는 집이다. 나는 죽지 않았다. 방금 그것은 꿈이었나보다.> 그렇다. 현태는 방의 이불 위에 누워있었다. 사방이 흑막을 친 것처럼 캄캄한 이유는 빛이 들어올 구석이 없기 때문이었다. 현재 몇 시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현태는 보통 오전 열 시 즈음이면 잠에서 깨곤 했다. 그는 생각을 주워 모으며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아. 아아. 현태는 몸을 일으킨 채로 연이어 신음을 내뱉었다. 꿈을 꾸고 난 뒤 눈을 뜨면 언제나 이 연속성이 괴로웠다. 꿈은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은 계속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 그것은 현태에게 엄청난 불안과 불만을 안겨주었다. 어쩌면 죽음조차도 어떤 <깨어남>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아니다. 그것만은 생각하지 말자. 그것은 최악이다. 이루 말할 것도 없는 최악의 경우다. 도대체 어떤 신이 영원의 나라에 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했는지? 영원은 모든 형벌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형벌이다. 종말, 종언, 파국, 결말: 이 얼마나 <완전한> 개념들인가. <아아, 나는 깨어나는 것이 너무나도 싫구나.> 현태는 일어서서 어지러운 머리로 비틀비틀 형광등의 스위치 쪽으로 향했다. 주변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완전히 경험과 감각에만 의지하여 스위치를 찾아야했다. 그리고 드디어 손으로 더듬어 찾아낸 스위치를 켜자 깜빡깜빡하고 형광등에 불이 들어왔다.
순식간에 방안의 모습이 드러났다. 좁고 음침한 그의 <관짝>. 현태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로 절뚝절뚝 거울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매일 하는 것처럼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검은색 면바지만 입고 서있는 현태. 가슴팍에는 붉은 낙서들. 그는 배시시 웃었다. 그러면서 손톱을 세워 가슴 한복판을 세게 긁었다. 겨우 굳어가던 상처들이 다시 터져 진물과 피가 배어나오고 통증이 비몽사몽 하던 정신을 세게 때렸다.
“아하!” 그는 이제야 정신을 차렸다는 듯이 활기차게 소리를 쳤다. “나는 내가 불타 사라질 수 있다면 기꺼이 지옥으로 뛰어내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았고 현태는 살아있는 인간이었다. 그것만이 중요했다……. 살아있는 인간은 삶 밖에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 말이다. <그렇다면 오늘도 살아가야지. 무엇이 어찌되든 말이다. 흠, 그래. 무엇이 어찌되든……. 왜냐하면 살아가는 것만이 인간의 유일한 의무니까…….> 현태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현태는 책상 위에 널브러져있는 누더기 같은 셔츠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입기 시작했다. 피와 습기 때문에 눅눅한 셔츠자락이 피부 위에 달라붙었다. 흰색 형광등 빛 밑에서도 여기저기 그늘이 진 방의 구석구석이 현태의 눈에 들어왔다. 그것들은 어쩐지 그의 정신을 음울하게 만들었다. 자신이 어두운 굴속에 사는 털북숭이의 짐승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다. 물론 안락하다면야 안락한 것이지만 말이다. <흠, 그렇다고 내가 햇빛과 태양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 저녁나절의 물기 어린 공기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내가 그리는 그림 속의 빛살과 불꽃처럼 선명한 색깔들이다. 어쩌면 나는 자기도취에 빠진 사람일지도 모른다.> 현태는 셔츠의 단추를 끼우면서 묵묵히 생각했다.
그는 바지 주머니를 뒤져보았다. 화실 열쇠와 지폐 몇 장이 있었다. 어제 영운이 <좀 씻어두라>고 말한 것이 떠올랐다. 현태는 목욕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숙집에서 몸을 씻기는 어려웠다. 화장실에 샤워시설이 비치되어있기는 했으나 비좁았고 사람이 자주 들락거렸다. 비좁은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여러 사람이 공용으로 쓴다는 것은 현태에게 있어 커다란 문제였다. 그러고 보면 현태가 마지막으로 몸을 씻은 것도 일주일은 더 된 일이었다. 세수만은 하루에 몇 번씩이나 하고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아, 지금 내 가슴 속에 흐르고 있는 것은 불행인가 아니면 고독인가?” 현태가 빙글빙글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는 문가에 놓인 슬리퍼를 집어 들더니 형광등을 끄고, 문을 연 뒤 밖으로 나갔다.
<나는 내가 더러운 감상주의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한다.> 복도에 내려선 현태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생각했다. 그것은 옳은 말이었다. 그래서 현태는 늘 폭포수 같은 광증 속에서도 냉정―말하자면 자신이 느끼는 감상에 대한 냉정 말이다―만은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그의 몇 안 되는 중요한 미학적 신념 가운데 하나였다.
아침 햇살이 하늘을 향해 열린 담장 너머에서 비쳐 들어오고 있었다. 오늘은 맑은 날이었다. 약간 노란 빛을 띠는 빛살 속에서 어떤 미약한 열기 같은 것이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현태는 홀린 것처럼 창공을 쳐다보았다. 그는 이러한 날에도 자신의 마음속에서 음침하고 우울한 감정이 구더기처럼 꿈질거린다는 것이 놀라웠다. 만약에 그가 가슴뼈를 쥐어 뜯어내서 그 속에 든 것들을 전부 바깥으로 쏟아낸다면……. 현태는 이상한 망상을 했다. 자신의 열린 가슴 속에서 온갖 끔찍스러운 지네나 회충 같은 것들이 덩어리로 뒤엉킨 채 후드득 떨어져서 사방을 기어 다니고, 검은색 끈적끈적한 피가 쏟아져 나와 그것에 닿은 모든 것들을, 가령 돌이나 공기나 풀 따위들을 모조리 현태의 색으로 물들이는 것이다. 그러면 세상은 현태가 그린 그림과 비슷한 것이 될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현태의 그림 또한 수많은 절제와 편집광적인 고립의 결과물이었으니까 말이다. 아무튼 멍청한 생각이었다. 현태는 발걸음을 돌려 계단을 내려갔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길거리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현태는 특별한 목적도 없이 동네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그는 길거리를 돌아다니면서도 자신의 가슴 속에 니트로글리세린 같은 폭발성의 액체가 출렁거리고 있다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을 찔러 대서 괴로웠다. 그는 <생각>에게서 벗어나고 싶었고 방금 잠에서 깨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이 피로했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그림을 그릴 때면 괴롭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우선은 몸을 씻을만한 곳을 찾아야했다. 이 시간에 목욕탕이 문을 여는지는 알지 못했으나 아무튼 현태는 골목골목을 들쑤시고 다니면서 목욕탕을 찾아다녔다.
“영운은 오늘 오후 늦게나 화실에 온다고 했다.” 현태가 길을 걸으면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 나는 몸을 좀 씻어놔야 하고……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글쎄,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우선은 목욕탕을 찾는 것이 급선무이기는 하다. 아무리 생각해봤자 내가 더럽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물론 신체적으로 말이다. 정신적으로는, 나는 내가 더럽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 말할 수 있고말고. 하지만 내가 괴로운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야…….”
그런데 현태는 또 갑자기 킥킥대며 웃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갑자기 동창회에 대한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그는 명랑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 나는 이제 어떤 결론 같은 것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다 행운이다. 나는 기뻐하지 말아야할 이유가 없다. 나의 방향성 없는 인생이 하나의 점을 찍게 될 것이다. 랄라!> 현태는 생각하면서 발걸음을 놀렸다. 그런데 그때 목욕탕 간판이 현태의 눈에 보였다.
그는 잘 됐다는 듯이 간판이 붙은 건물로 들어갔다. 그러나 입장료를 내는 창구 앞에 들어서자마자 현태는 멈칫하고 발을 멈췄다. <만약 안에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하지?> 현태가 걱정스럽게 생각했다. <그들이 나의 가슴에 난 상처를 보게 된다면? 그들은 나를 어떤 인간으로 생각할 것인가. ……그런데 내가 지금 이런 걱정을 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너무 새삼스러운 일이다. 사람들은 늘 나를 보면서 좋지 않은 생각을 한다. 나는 뻔뻔해도 좋다. 나는 원래가 미친 사람이지 않은가…….> 그는 머릿속으로 자기 자신을 설득했다.
그리고 현태는 일부러 당당하게 창구 앞으로 발을 내밀었다. 창구 너머에는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늙은 노인 하나가 의자에 앉아있었다. 현태는 창구 위에 한 손을 얹으며 말했다. “어른 한 사람!” 그의 목소리는 유난히 발랄하고 한 편으로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무튼 간에 노인은 잠에서 깬 듯이 현태를 바라보더니 손가락 네 개를 펴 보이며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사천 원>이라고 하였다. 사천 원! 한 끼 식사 값이로군! 현태는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손을 집어넣으면서 과연 사람은 허기를 채우고 나서야 청결 따위를 찾는 것이라고 중얼거렸다. 하기는 사 천 원이든 사 만 원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는 돈을 단 한 푼도 벌지 못하고 있는데. <너무 빈곤하면 오히려 경제적인 문제에 대해 고민할 이유가 없어진다.> 현태는 지폐를 세면서 생각했다.
그는 입장료를 지불하고 <남탕>이라고 적힌 불투명 유리로 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현태는 생각했다. 문제는 없다. 아무 문제도 없다. 나는 어떤 명확한 목적의식을 갖고 그를 위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말이다. 그는 탈의실에서 로커 하나를 열고 옷을 벗기 시작했다. 깡마르고 지저분한, 그리고 가슴에는 상처투성이인 그의 몸이 희멀건 형광등 불빛 밑에 드러났다. 탈의실에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그것은 다행이었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현태의 몸을 보기라도 한다면, 그는 분명 쓸데없는 고뇌에 빠져 자신의 감정 때문에 괴로워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밝은 탈의실에 알몸뚱이로 서있게 되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가슴팍에 손을 대어보았다. 말라붙은 피와 딱지로 거칠거칠했다. 그는 탈의실 형광등의 이상한 색조 때문에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다. 현태는 욕탕으로 터덜터덜 걸어 들어갔다.
목욕탕 안에는 이마가 다 까진 노인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주변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 같았고, 온탕에 몸을 담근 채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었다. 현태는 그를 발견하고 잠시 주저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샤워기 앞으로 향했다. 실제로 그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저런 늙은이들은 남한테 아무 관심도 없는 법이다. 나이를 먹을 대로 먹고 시간과 주름 속에 파묻히게 되면, 신경 쓰는 것이라고는 고형질의 법칙밖에 없게 된다. 그렇게 사람은 늙어가고 죽어가는 것이다. 흙으로 돌아가서, 마침내 세계와 하나가 되고…….
“그러니까 늙는다는 것은 세계와 동일화되는 과정인 것이다. 점점 개인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잃게 되는…….” 현태는 샤워를 하면서 중얼거렸다. 물소리에 그의 목소리가 묻혀 들리지 않았다. 목욕탕은 휑했고 뜨거운 수증기로 가득 차있었다. 조금만 긴장을 늦추면 정신이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현태는 뇌수에 이슬이 맺히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그는 눈을 감고 머리를 감으면서, 어떤 주황빛 환상을 보았는데 그것은 금방 기억에서 잊혀졌다. 그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전히 나는 별세계에 사는 것 같다.”
현태는 마지막으로 비눗기를 몸에서 씻어내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기껏 사천 원이나 내고 들어왔는데 몸만 씻고 바로 나가기에는 돈이 아까웠다. 탕에 조금 들어가 있을까 싶었다. 욕탕은 냉탕까지 합쳐서 모두 세 곳 있었는데, 그중 한 곳에 늙은이가 몸을 담그고 있었다. 그 늙은이는 현태가 들어온 뒤로 단 한 번도 현태에게 시선을 향하지 않았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눈을 감고 있는 것 같았다. 샤워기의 수도꼭지를 잠그자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만 유난히 크게 울렸다. 현태는 노인이 있는 탕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뜨거운 물이 상처에 닿자 살을 기름에 튀기는 것 같았다. 현태는 인상을 찡그리면서 물속에 몸을 담갔다. 혀끝까지 기어 올라온 욕설을 억지로 집어삼켰다. 현태는 물속에서 자신이 송장이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피부에는 온통 벗겨지고 찢어진 상처들. 염증이 올라 울긋불긋한 것이 마치 차에 치인 살덩어리 같았다. 그는 수증기 때문인지, 어째서인지 심장 한 쪽이 뭉근한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수압과 부력 때문에 수중에 뜬 팔다리가 거추장스러웠다. 육체와 영혼이 절단 당한 느낌. 현태는 쓸 데 없는 생각이 자꾸 떠오르는 것이 불편했지만 굳이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같은 탕에 몸을 담그고 있는 늙은이는 눈을 감은 채로 입술을 뻐끔거리고 있었다.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들이 메아리치며 나지막이 울렸다. <토요일이 멀지 않았다.> 현태는 일부러 그 생각을 했다. 그의 마음속에 기대감이 끓는 물처럼 들끓기 시작했다. “내 인생. 굴러 떨어지는 바윗덩어리 같은 내 인생. 나는 그림을 그리지만 화가는 아니지. 인생을 살지만 인간은 아니지. 하지만 나는 이제 곧 무언가가 될 수 있을 거야.” 현태는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곁에 있던 늙은이가 눈을 뜨고 쳐다보는 것 같았지만 이제는 현태가 눈을 감고 있었다. 뜨거운 물결이 그의 나신을 핥으며 출렁거렸다. 목욕탕의 주황빛 조명이 현태의 눈꺼풀을 뚫고 들어와 비치고 있었고, 현태는 자신이 땅으로 착륙하지 못하는 풍선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가슴의 상처들만이 그 자신을 사람으로 느끼게 하는 유일한 요소였다. 그 통증만이 말이다.
“어쩌면 나는 이전에 몇 번이나 죽어본 일이 있는 건지도 몰라.” 현태는 길을 걸으면서 느닷없이 말했다. 지나가던 남자가 이상한 눈길로 현태를 보았지만 곧 스쳐지나갔다. 현태는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죽어본 경험이 여러 번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전생이나 윤회 같은 시답잖은 것은 믿지 않았다. 그런 얘기가 아니었다. 기계의 전원이 꺼지는 듯한 갑작스러운 종말을, 목이 잘리고 시야가 끊기는 순간의 가슴 먹먹하고 체념적인 감정을 그는 몇 번이나 겪어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언제였더라? “하지만 나는 태어난 이후로 단 한 번도 죽어본 일이 없지 않은가?” 그의 이성이 말했다. 그러나 이성 따위는 이미 현태의 내부에서 거의 입지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니야. 나는 죽어본 일이 있다. 그것도 여러 번이나 말이다. 나는 죽음과 동떨어져있지 않아. 나는 몇 번이나 그와 손을 잡았고 그의 품으로 굴러 떨어져 봤다. 흠, 어쩌면 내가 환각 속에서 사는 것일 수도 있지. 어쩌면 미친 것일 수도 있고. 하지만…… 나는 죽어본 일이 있는 것 같다…….> 현태는 완전히 죽음에 대한 생각에 빠져서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화실로 가는 중이었다. 목욕을 하고 나와서, 한결 청결해진 기분으로 봄의 다사로운 바람이 머리를 말리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그것은 새삼스럽고 오랜만인 것이었다. 이제 이 피와 얼룩 투성이의 셔츠를 벗고 깨끗한 옷을 입게 되면 어떤 기분이 들까? 현태는 괜히 마음이 들뜨는 것 같았다.
“물론 필요에 의한 것이지만, 사람 흉내를 낸다는 것도 유쾌한 일이야.” 현태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는 곧 들뜬 마음을 꺼트리려고 하기 시작했다. 마음이 조금이라도 헐거워지면, 거기서는 노리고 있었던 듯이 향수가 흘러나온다. 어린 시절의 원망과 억울한 감정이 배고픈 짐승처럼 아가리를 내밀어대는 것이다. 그것은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끔찍했다. 현태는 아무것도 기억해내고 싶지 않았다. <그만, 그만! 생각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만약 내 사고의 전원을 내 마음대로 꺼버릴 수만 있다면! 수없이 가시가 박힌 뭉툭한 곤봉이 구르는 것처럼 내 정신 속에서 무언가 무겁고 걸쭉한 것이 흘러나온다.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고 싶지 않다. 나는 유쾌하고 싶지만 유쾌할 수가 없다. 이런, 빌어먹을…… 이게 다 누군가의 탓이지만, 나는 그 이름을 떠올리기도 싫어…….> 그는 좌절스러운 얼굴로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는 화가 났다. 하지만 어서 이러한 감정에서 벗어나야했다. 그저 잊고 다시 광적인 희열과 열망에 빠지는 것이 최선의 길이었다. 조금이라도 평범한 기쁨에 발을 담그려고 하면, 언제나 억울함으로 가득한 괴기한 얼굴의 꼬마아이가 그의 정신 깊숙한 곳에서 머리를 내밀었기 때문에, 현태는 남들처럼 웃을 수 없는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그는 일부러 입을 꾹 다물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화실까지 그리 멀지 않았고, 그림을 좀 그리다보면 금세 영운이 올 것이었다.
“아아!” 현태는 걸으면서 야수처럼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망각을 위해서였다. 스스로 화를 내고 있다는 것조차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상체를 구부정하게 숙이고 커다란 발걸음으로 터벅터벅 걸었다.
큰길로 나오자 정장차림의 남녀들이 많았다. 언제나 그렇지만 그 사이에서 현태는 길을 잘못 든 산짐승 같이 보였다. 기다란 머리에 며칠째 면도하지 않은 얼굴, 지저분한 셔츠보다도, 늘상 하얗게 질려있는 그의 눈동자가 더욱 그렇게 만들었다. 벌써 수십 년이나 이러한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왔는데도 그렇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그의 눈은 늘 감정의 용광로 같았고 그를 별다른 인물로 보이게 만들었다. 현태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가끔 그는 외국으로 나가는 상상을 했다. 아예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들 사이에서라면, 오히려 현태의 이방인 같은 기분이 덜할 것 같았다. 아, 그는 한국인들이 싫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바로 이 지구상에서 현태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인종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아무리 잘 이해하게 되어도 익숙해질 수 없다는 것은, 알면 알수록 멀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이곳에서 현태는 언제까지고 이방인이며 외지인이었다. 그는 어서 화실로 피신해야했다.
“어머니!” 현태가 빌딩의 입구로 들어서며 돌연 외쳤다. <나는 누구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인가? 내 어머니의 얼굴조차도 더는 기억하고 있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는 갑자기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현태는 계단을 오르며 화구통을 맨 몇몇 학생들과 지나쳤다. 그들은 영운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미술학원의 원생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현태를 알고 있었다. 얼굴 뿐만 이었지만 말이다. 그가 늘 이 층 구석의 화실에 처박혀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고, 어딘가 조금―혹은 상당히― 이상하다는 것이 원생들 사이의 소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소연이라는 소녀가 저녁마다 현태를 만나러 오는 것도 꽤 용기 있는 행동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도 분명 친구들에게서 현태의 좋지 않은 소문들을 들었을 것이다. 노을이 질 무렵이면 복도 구석의 화실에서 들려오는 찢어지는 외침소리라든지, 혼자 허공에 대고 지껄이는 욕지거리들에 대한 소문을.
하! 하지만 그따위 것들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현태는 실실거리면서 입속말을 되뇌었다. 모든 것이 다 잘 풀려가고 있다. 내 가슴 속의 무딘 나이프는 점점 날이 서고 있고, 계절은 봄이다. 어머니, 어머니, 얼굴조차 알 수 없는 어머니,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내가 그림을 그려야할 정도로 세상은 아름다워요. 현태는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감정이 머리 꼭대기에서 폭발할 것 같았다. 그는 화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기름기를 씻어내서 살랑대는 기다란 머리칼의 촉감이 기분이 좋았다. 화실에는 서늘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고 창문에서는 쏟아지는 물결 같은 햇빛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가끔 현태는 자신이 행운아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현태는 불행했지만 자신이 불행한 것만큼이나 세상이 가끔 아름답게 빛난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불행? 불행이라니? 사실 불행 같은 것은 없었다! 현태는 전혀 불행하지 않았다. <암, 그렇고말고.> 현태는 불행이 뭔지조차 몰랐다. 고통에 대해서라면 지구상의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지만, 불행은 별개였다. 그것은 이해하기 힘든 단어이자 허공에 붕 뜬 것 같은 개념이었다. 어떻게 해야 <불행해질 수 있는지> 현태는 잘 알지 못했다. 그에게는 늘 성인(聖人)의 후두부에서 빛나고 있는 후광처럼 광증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불행해지는 법을 몰랐다.
현태는 실실 웃으면서 이젤을 창가 옆자리로 옮겨놓았다. 그리고 화실 구석에 놓아두었던 덜 그린 그림이 그려진 캔버스를 가져와서 이젤에 고정시켰다. 그러나 그는 한동안 그 그림을 선 채로 내려다보더니,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캔버스를 도로 빼서 캔버스 더미 속으로 돌려놓았다. 그리고서 그는 새로운 깨끗한 캔버스를 가져와서―분명 영운이 사둔 것이다― 이젤에 올려놓았다. 그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그리고 싶었다. 가슴 속에서 광증과 영감이 사납게 몸을 섞으며 날뛰고 있었다.
“가끔은 밤에도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현태가 파스텔 연필을 집어 들면서 중얼거렸다. 지금은 낮이었다. 환한 낮이었다. 현태는 캔버스에 희미한 선으로 어떤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낮은 언덕이 있고, 별이 있고, 또 물이 있었다. 지금은 스케치 단계라서 정확히 무슨 그림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현태가 밤그늘 속에 어떤 사람의 형태를 작게 그려 넣는 것이 보이기는 했다…….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늘 절감할 수 있는 사실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세상 밑바닥에 가라앉아있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현태에게도 그 정도 객관성은 있었다. 현태는 자신의 몸 위로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현실이라는 이름의 수압을 느낄 수 있었고, 질펀한 심해의 흙더미를 손으로 움켜쥐며 자조적으로 웃을 수도 있었다. 분명 그는 가장 낮은 곳에 있었다. 다만 그림을 그리는 일이 그러한 수직적인 상대성에서 현태를 조금 별개의 것으로 만들어 주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자기위로에 지나지 않는 일일지도 몰랐다. 그저 현태가 아는 것이라고는, 오래전부터 그래왔듯이 그림을 그려야한다는 것뿐이었다. 화실은 조용했고 복도 쪽에서 가끔 학생들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그런데 내가 세상 밑바닥에 너부러진 존재라고 한들 무슨 상관이람? 나는 오히려 그것이 즐겁기까지 하다. 현태는 입술을 움찔거리면서 그렇게 되뇌었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퇴폐적이고 희망이 없는 상태에 대해 질색하면서 싫어하지는 않았다. 그다지 아무 생각도 없었다. 현태는 다른 삶의 방식 같은 것을 몰랐다.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쩌면 그가 태어났을 때, 어머니로부터 분리되었던 순간부터 모든 것이 이렇게 되도록 정해져있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현태는 광인이었고, 사회적 쓰레기였으며, 잉여인간이었다. 굉장히 오래 전부터 그랬던 것 같았다. 그가 학생이었을 때조차도 그랬다. 현태는 단 한 번이라도 사회의 기대에 보답해본 적이 없었다. 애당초 그런 것에는 관심조차 가지 않았다. 어떻게 하란 말인가? 마치 오물통에서 굴러 떨어지듯이 태어난 것을. 아아, 그러나 절망할 이유조차도 없다. 모든 것은 그냥 <그런> 것이다. 현태는 유쾌했다. 고통스러웠지만 유쾌했다. 아니, 오히려 고통 받고 있기 때문에 유쾌했다. 삶이란 그런 것이려니 싶었다. 그는 그 무엇도 손에 넣어본 적이 없고, 잃어버린 적도 없었다. 어떤 면에서 그는 아직도 갓 태어난 아기 같았다. 흠, 아무려면 어떻단 말인가. 다시 겨울이 왔을 때 영운조차 현태의 곁을 떠나고, 그의 <관짝>마저 잃어버려 하얗게 눈이 덮인 거리에서 잠들 듯이 눈을 감게 된다고 하더라도 아쉬울 것이 없었다. 그는 마치 초월한 것처럼 타락해있었다.
세 시간 가량이 지났다.
5. 화장하는 괴물에 대하여
“오늘은 수요일이야!” 한창 그림을 그리던 현태가 갑자기 외쳤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떤 기대가, 그리고 불안이, 혹은 떨리는 듯한 발작적 감정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우연히도 마침 화실 문이 열렸다. 영운이었다. 영운은 화실로 들어오려다가 갑작스러운 현태의 외침을 듣고 어리둥절해있었다.
“그래. 오늘은 수요일이지. 네가 날짜를 기억한다니 놀라운 걸.” 영운이 말했다.
“왔군. 오랫동안 너를 기다리고 있었어. 그림을 그리면서.” 하긴 그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도 없지! 현태가 머릿속으로 이어서 말했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보는 일 자체가 생각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 견자의 사유가 그렇지 않더라도, 그의 육체는-혹은 그의 눈동자는 생각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의 몸은 미쳐있다. 마치 현태의 머릿속처럼, 거의 반쯤은 반사적으로, 그리고 반쯤은 무의식적으로 사유의 움직임을 계속하는 것이다. 현태는 그 <생각>들을 잘라내고 도려내야했다. 물론 현실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그렇게 정교한 작업을 하기에 그는 너무 미쳐있었고 머리가 복잡했다. 그러나 그림을 그릴 때만은…… 그는 최소한의 결정만을 남겨두는 일에 골몰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이 차갑고 부동적인 세계로 보이는 것일 수도 있었다. 현태 자신은 그런 것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말이다. 그는 붓을 내려놓으면서 영운에게 고개를 돌렸다.
“지금이 몇 시지?” 현태가 물었다.
“네 시. 네 시 반이야.”
“네 시 반이라!” 현태가 괜스레 유쾌하게 외쳤다. 오랫동안 그림에 집중하다가 붓을 내려놓으니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그는 어지럼증 속에서 기분이 좋았다. 영운에게 이런저런 말을 붙이고 무엇이든 좋으니 대화를 하고 싶었다. 가끔 그럴 때가 있었다. 침묵이 달아나고 절망이 망각되는 날들. 그러나 그런 때에 어떻게 하면 좋은지 현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는 유쾌하면 주로 자해를 했다. 왜냐하면 그의 유쾌함은 늘 자학적인 집착과 맞닿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해가 떠있었다. 아픈 것은 싫었다. 아픈 것은 싫다. 통증은 싫어. 현태가 웃는 얼굴로 입속말을 중얼거렸다. 그런 현태를 영운은 씁쓸한 얼굴로 쳐다보며 매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았다.
“정리해. 머리 자르러 가자.” 영운이 말했다.
“머리를 잘라?” 현태가 되물었다. 그는 아직도 제정신이 아니어서 몸에 힘이 없었다. 자꾸만 눈꺼풀이 내려오는 것을 느꼈다. 아직 낮인데도 기력이 다 빨려나간 것 같았다. 영운의 머리를 자르러 가자는 말에 현태의 머릿속에서는 단두대에서 머리가 잘려나가는 장면이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머리를 자른다고?” 현태는 웅얼거리면서 자신의 목을 쓰다듬었다.
“그래, 이발하러 가자고.” 영운이 이상한 눈으로 현태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 그래, 이발 말이지.” 현태는 그제야 알아들었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래, 건강한 사람이 되려면 머리를 잘라야지. 깔끔하고 단정한 사회인처럼.” 사회인처럼. 마치 <그들>처럼 말이다. 그들의 거리를 함께 걷고, 그들과 웃는 낯으로 대화할 수 있는 흉내를 내기 위해서는 먼저 외관을 맞춰야했다. 그렇게 한다면 현태의 하얗게 질린 눈도, 병적일 정도로 창백한 얼굴도 어느 정도는 감출 수 있을 것이었다. 머리를 자르러 간다. 그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마치 할로윈 데이에 서양인들이 변장을 하고 다니는 것처럼 말이다.
현태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구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있던 그림은 이젤 위에 놓아두었다. 그림은 웬만큼 구색을 갖춰가고 있었다. 밤하늘 아래 낮은 언덕 너머로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고, 얼굴 표정을 알아볼 수 없는 작은 사람이 어느 나무 밑에서 시냇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요한 그림이었다. 현태는 불현듯 소연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아저씨의 그림이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흥, 그러나 그런 감상평이 도대체 무슨 중요성을 가진단 말인가. 현태는 코웃음과 함께 금세 소연의 말을, 그리고 얼굴마저 잊어버렸다.
“머리를 깎고 나면 옷가게에 갈 거야. 너한테 잘 어울리는 정장을 찾아보자고.” 화구를 정리하고 있는 현태에게 영운이 말했다.
“정장? 그렇게 비싼 옷은 필요 없는데.” 현태가 조금 놀란 듯이 말했다. 영운은 평소에도 현태를 위해서라면 돈 씀씀이가 커졌지만, 언제나 현태가 죄책감을 가질 정도로 커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장이라니. 현태가 알기로 정장은 어지간히 비싼 옷이었고, 그런 옷은 대학교 입학식 때 아버지 것을 빌려 입은 뒤로 입어본 일이 없었다.
“요즘에는 싼 것도 많아. 그리고 너도 말이야, 장차 화가가 될 사람이 정장 한 벌쯤은 갖고 있어야지.” 영운이 웃으면서 말했다.
“화가라.” 현태는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되뇌고 나서 들리지 않게 혀를 찼다. 장래의 일 같은 것은 현태에게는 안중에도 없었다. 특별히 그가 무계획적인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의 현태에게는 현재 말고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사고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먼 미래는 한 달 뒤였다. 왜냐하면 달마다 집세를 내야했기 때문이다. 집세만 마련하면 현태는 적어도 한 달은 잘 곳을 찾아 거리를 전전하지 않아도 되었고, 그 뒤에 영운에게 가끔씩 돈을 빌리면 식생활도 해결되는 것이었다. 현태는 그렇게 살았다. 장차 화가가 될지 아니면 두 달 뒤에 그의 관짝에서 변사체로 발견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특히 현태는 더욱 몰랐다. 하지만 그는 굳이 영운의 말에 반박을 하거나 면박을 주지는 않았다. 영운이 그에게 그런 기대를 걸고 있다면, 아무래도 좋은 일 아닌가? 영운이 그의 부모가 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리고 소연이라는 여자아이도 그렇지. 훌륭한 그림이라니. 그런 것을 누가 안단 말인가. 자꾸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현태는 기분이 나빠지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유쾌한 기분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면서 지금까지 한 생각들을 모조리 잊어버렸다. 그리고 그는 정리를 마치고, 앞서서 화실 문을 열고 나가며 말했다. “그럼 가자고.”
현태가 앞서서 나오긴 했지만 그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계단을 내려가는 도중에 자연스럽게 영운이 앞서게 되었고, 현태는 서쪽 하늘에 떠있는 노란색 태양을 보면서 건물 밖으로 따라 나왔다. <날씨가 좋군. 봄의 태양은 굉장히 섹슈얼하다. 넘치는 생명력과 에로스를 온통 지구에 뿌려대고 있지. 하지만 이런 날일수록 나는 하늘을 보고 싶지 않아. 나는 겨울의 하늘이 좋다. 햇살마저 하얗게 얼어붙는 겨울……. 그런 날에는 잠들 때마다 죽음의 그림자가 머리맡에서 어른거리지. 참 즐거운 일 아닌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꿈을 꾸면서 잠든다는 것은 말이다. 아, 하지만 난 죽고 싶은 것은 아니야.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미래는 너무 멀고 현재는 너무 광막하다. 그러므로 사람이 죽음에게 이끌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야. 특히나 나처럼 가슴 속에서 광기가 날뛰는 사람은, 더욱 본능에 목이 매여 움직이기 마련이지. 언젠가, 글쎄, 하지만 나는 토요일까지는 살아야 해. 그녀와 만날 것이 아니냔 말이다. 그녀를 만나서 과거의 나를, 앙상한 갈비뼈 속에 피와 광증을 담고 빙글거리며 거리를 거닐던 어린 나의 소원을…… 다시 한 번 확인해보는 것이다. 과연 내 손이 어떻게 움직일까? 나는 외로움 같은 것은 느끼지 않아. 왜냐하면 내 머릿속에, 그리고 내 심장 속에 수도 없이 많은 환영들이 항상 축제를 벌이며 시끄럽게 발을 구르기 때문이다. 햇빛이 나를 어지럽게 하고 있어…….> 현태가 영운을 뒤쫓아 가면서 생각했다. 정말로 그는 점점 뭔가에 취해가는 것 같았다. 낮도 저녁도 아닌 어중간한 시간에 비추는 태양빛은 마치 독을 탄 술과 같아서 그의 몸을 불안하게 흔들어놓았다.
현태는 환각적인 상념에 잠긴 채로도 거의 무의식적으로 영운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영운은 앞서가면서 가끔 고개를 돌려 현태가 제대로 쫓아오고 있는지 확인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현태는 머리를 반쯤 뒤로 젖히고 피로한 눈동자로 하늘을 보면서, 열린 입으로는 뭐라고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비척비척 따라오고 있었다. 그러면 영운은 한숨을 쉬면서 다시 거리를 걷는 것이다. 저 친구를 건강한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일이 과연 가능할지 모르겠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영운은 입안에 씁쓸한 맛이 감도는 것을 느꼈다. 그때 현태는 자신이 갑자기 폭발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완전히 취해있었다.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몸이 갑자기 폭탄처럼 폭발해서 사방으로 살점과 뼈가 흩날리고, 주변을 걷던 사람들은 현태의 피를 한바가지 뒤집어쓰게 되는 것이다. 왠지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현태는 순간적으로 그 생각을 완전히 믿기도 했다. 왜냐하면 햇빛이 관능적이었고 거리에는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노이즈처럼 울려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태가 자신이 폭발할지도 모른다는 믿음 때문에 자신의 기다란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잡아당기고 있을 때, 그들은 미용실에 도착했다.
“이봐, 정신 차려.” 영운이 거의 공황상태에 빠져있는 현태의 어깨를 툭 치면서 말했다. 덕분에 현태는 자신의 편집증적인 집착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고, 여전히 다소 혼란스러운 눈동자로 영운을 쳐다보았다.
“다 왔어? 거리에 사람이 너무 많았어. 난 토할 것 같아.” 현태는 실제로 욕지기를 느끼고 있었다. 그는 공중에서 막 추락한 사람처럼 속이 어지러웠다.
“참아. 들어가서 물이라도 좀 마시면 나아질 거야. 들어가자고. 네 지저분한 장발을 세련된 헤어스타일로 바꿔야해.” 영운이 미용실 문을 밀어젖히면서 말했다. 현태는 아무 말도 없이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머리를 자른다. 그래, 즐거운 일이지.> 현태가 눈을 껌뻑거리면서 생각했다. 이발과 면도를 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굉장히 달라 보이기 마련이다. 우선 겉모습이 갖춰지면 연기를 하는 일이 좀 더 편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자신의 외관에 기반을 두어서 어떤 인간성을 연기하는 까닭이다. 미용실 안으로 들어가자 젊은 미용사들이 그들을 반겼고, 손님이 세 사람 있었다.
“이 친구 머리를 다듬을 건데, 얼마나 기다려야 하죠?” 영운이 현태를 가리키면서 미용사에게 물었다. 미용사는 십 분 정도만 기다리면 된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들은 소파에 앉아 기다리기로 했다. “이봐, 물을 좀 마셔.” 영운이 현태에게 말했다.
영운의 말에 현태는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정수기 앞으로 가서 물을 따라 마셨다. 여전히 속이 어지러웠지만 미용실 안이 조용했기 때문에 욕지기는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이발하러 오는 것은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이상한 냄새가 나는군. 현태가 생각했다. 현태가 맡은 냄새는 미용실 특유의, 염색약이나 샴푸의 향기가 뒤섞인 것이었다. 그는 여전히 피곤했기 때문에 눈을 좀 문지르다가 영운의 옆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이상한 냄새가 나.” 현태가 혼잣말처럼 영운에게 말했다.
“그래. 미용실 냄새야.” 영운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현태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동그랗게 뜬 눈으로 주변 사람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손님 중 두 사람은 미용사에게 머리를 맡기고 있었고, 한 사람은 머리에 비닐 같은 것을 뒤집어쓰고 비행접시처럼 돌아가며 열을 내뿜는 기계 밑에 앉아서 잡지를 보고 있었다. 자리가 하나 비어있었지만 미용사가 둘 밖에 없었기 때문에 현태는 어느 한 사람의 이발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현태는 소파 앞에 놓인 테이블에 잡지들이 쌓여있는 것을 발견하고 한 권을 집어 펼쳐보았다. 여성잡지였다. 가방이나 구두의 광고나 선정적인 기사들이 페이지를 가득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곧 흥미를 잃어버리고 잡지를 내던지듯이 테이블 위에 돌려놓았다. 어느 날부터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현태는 활자를 읽는 것을 불편해했다. 왜냐하면 그의 머릿속이 너무 난잡하고 반사적인 관념들로 가득해서 문장을 한 줄 읽는 동안에도 오만가지 생각들이 거품처럼 끓어올랐다가 터져버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 때 그는 책을 사랑했었다. 그는 주로 이미 죽은 작가들의 책을 좋아했고, 그림을 그리지 않을 때에는 늘 책을 읽고 있었다. 그 때는 지금보다 정신이 덜 복잡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현태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는 일과 미쳐있는 일 외에는 그 어떤 일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안타까운 일은 아니야. 내 머릿속에서는 소설보다도 훨씬 환상적인 환각들이 항상 날뛰어대니까, 조금이라도 지루할 여유가 없어.> 현태가 생각했다. <난 생각이 끓어 넘치는 만큼이나 아무 생각도 없는 걸.>
“오래 기다리셨죠.” 현태가 고개를 푹 숙이고 머릿속으로 되뇌던 중에 미용사가 말을 걸어왔다. 현태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머리가 분홍색이었고 단발이었는데, 몸매가 다 드러나는 봄옷을 입은 젊은 여자였다.
“아, 예. 제 차례인가요.” 현태가 아직도 꿈을 꾸는 것처럼 말했다. 미용사는 그렇다고 했다. 현태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거울 앞으로 가 앉았다.
거울에 현태의 전신이 비쳤다. 아, 끔찍하군. 자기도 모르게 현태의 입에서 그런 말이 신음처럼 흘러나왔다. <밝은 곳에서 보니까 더 지독하잖아…….> 현태가 미간을 찌푸린 채로 생각했다. 병든 사람처럼 창백한 얼굴에, 그에 어울리지 않게 피처럼 새빨간 입술―그는 자신의 입 꼬리에서 왠지 모를 구역감이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슴께까지 마구 내려앉은 머리카락. 백태가 낀 것 같은 희멀건 눈동자. 뒤죽박죽으로 자란 수염까지. <나는 자화상은 그리지 말아야겠어.> 현태는 그렇게 생각했다. 미용사가 현태 뒤로 와서 섰다. 그녀의 얼굴도 거울에 비쳤는데, 그녀는 현태의 끔찍한 몰골을 보고서도 계속 사람 좋게 웃고 있었다. 현태는 그 얼굴에 침을 뱉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그만두었다.
“머리가 많이 기시네요 손님.” 미용사가 말했다.
“네. 그렇군요.” 현태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떻게 잘라 드릴까요?”
“그게…… 전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정말이었다.
“네?”
“저는 이런 곳에 와본 적이 없어서요…….” 현태가 주변의 밝은 조명을 두리번거리면서 말했다. “저 친구를 좀 불러주시겠습니까?”
그때까지 현태와 미용사가 나누는 대화내용을 들으면서 히죽거리고 있던 영운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는 미용사에게 뭔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먼저 이 기다란 머리카락은 전부 잘라주세요. 왜냐하면 이 친구가 건강한 사회인처럼 보이게 만들어야하니까 말입니다. 아, 하지만, 사실 말이죠, 이 친구는 화가랍니다.” 영운이 주절주절 자랑하듯이 이야기했다.
“어머나, 멋진 직업이네요 손님.” 미용사가 놀란 듯한 얼굴로 말했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현태는 다시 한 번 그녀의 얼굴에 침을 뱉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영운에게도 분노와 배신감을 느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려니 하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너무 몰개성하게 잘라버려도 안됩니다. 아시다시피 예술가는…… 아시겠죠? 하지만 되도록 깔끔하게, 비전이 있는 젊은이처럼 보이게 잘라주세요. 세세한 것은 맡기겠습니다.” 영운이 웃으면서 말했다.
예술가라니, 웃기지도 않는군. 하지만 현태는 이미 반론할 기력조차 없었다. 그는 이미 거의 자포자기하여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든 내버려둘 생각이었다. 창피를 당한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서 가슴이 뜨끔거리기는 했지만, 그가 뭘 어쩔 수 있단 말인가. 미용사는 영운의 추상적인 주문에도 당황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알았다고 말했고, 영운은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여전히 실실 웃으며 말이다. 미용사는 먼저 빗으로 현태의 길고 새까만 머리를 빗어 내리기 시작했다.
“화가를 만나는 건 처음이에요.” 미용사가 흥미롭다는 듯이 말했다.
“대단한 건 없습니다. 그리고 난 사실 화가도 아녜요. 그냥 그림 그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현태는 말하면서도 자신이 왜 이런 말을 하는 지 알 수가 없었다. “무능력자죠.”
“그림을 그리는 건 멋진 일이예요.” 미용사가 현태의 머리에 분무기로 물을 뿌리며 말했다. 그녀는 현태의 말을 듣는 것 같지도 않았다. “저도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어요. 학생 때 말이죠.”
현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실제로 할 말도 없었고, 이 여자는 상대가 대꾸하지 않아도 끊임없이 이야기할 것만 같았다. 미용사는 마침내 가위를 집어 들었고, 그의 머리를 서슴없이 자르기 시작했다. 현태는 자신의 머리카락이 마구 잘려 떨어져나가는 것을 보고 어쩐지 슬픈 기분이 들었다. 그는 다른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미용실이라는 곳이 이발소처럼 면도도 해주는 곳이던가? 잘 모르겠군. 아무려면 어때. 영운이 알아서 하겠지. 예를 들자면 그런 생각들 말이다.
“가능하다면 손님이 어떤 그림을 그리시는지 보고 싶네요.” 확실히 그녀는 상대가 어떤 사람이든 간에 계속 떠들어댈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나도 내가 어떤 그림을 그리는지 잘 몰라요.” 현태가 여전히 다른 생각에 잠긴 채로 말했다. “우리들의 눈이 어떤 것을 보아야겠다고 먼저 생각한 뒤에 사물을 보지 않듯이 말입니다.”
“아!” 미용사는 감탄한 것 같았다. “처음 가게에 들어오실 때부터 비범한 분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현태는 눈썹을 찡그렸다. 비범한 분은 무슨 비범한 분. 나 같은 건 영운이 없으면 여름에도 얼어 죽을 사회적 쓰레기일 뿐이지. 그러나 굳이 말로 꺼내지는 않았다. 이런 것은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변하는 중 아닌가? 아니, 정확히 얘기하자면 변하는 척을 하는 와중 아닌가 말이다. 현태는 자신의 머리카락이 잘려나갈 때마다 이성의 매듭이 점점 단단해지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것은 일종의 착각이었고 자기기만이었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그래, 이 아가씨와 즐거운 듯이 대화를 한다면 어떨까? 마치 자신감이 넘치고 사회적 활동력이 충만한 누군가처럼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어쩐지 유쾌해질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미용사의 가식―그것이 정말 가식인지 아닌지는 현태는 물론 미용사 자신도 잘 알지 못할 것이었지만 말이다― 가득한 얼굴에 침을 뱉고 싶다고 생각했던 현태지만, 지금은 그 사회적이고 적응력 좋은 얼굴에 기분 좋게 웃어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러한 급격한 기분 변화도 광증의 일종은 아닐까?> 현태는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해도 별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쩐지 머리의 오른쪽 관자놀이 부분이 송곳으로 쑤시는 것처럼 아프기 시작했지만 통증과는 별개로 그는 유쾌했다.
“내 화실은.” 현태가 찡그렸던 눈썹을 펴면서 얘기했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요. 아, 사실 내 화실도 아니죠. 친구의 화실에 얹혀살면서 그림을 그리는 것뿐이니까요.”
영운이 뒤쪽에 앉아서 흥미 가득한 눈동자로 현태와 미용사를 쳐다보는 것이 거울에 비쳐 보였다. 그는 현태가 그렇게 적극적으로 누군가에게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는 것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그것도, 꽤나 정상적인 어투로 말이다. 보통 현태가 말이 많아질 때는 주로 그가 그의 광기에 휘둘려서 제정신이 아닐 때뿐이었다.
“어머나, 한 번 가보고 싶네요.” 미용사가 말했다.
“실망할지도 몰라요.” 현태는 입 꼬리를 말면서 말했다. 미용사의 <가보고 싶다>는 말이 거짓이든 진심이든 지금의 현태에게는 아무 상관도 없었다. 그는 그저 자신이 가면을 쓰고 누군가와 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재미있게 느껴질 뿐이었다.
“설마요.” 미용사도 웃으면서 말했다. 현태는 그녀를 따라서 입을 벌려 웃어보였다.
<이상한 광경이로군.> 영운이 소파에 앉은 채로 생각했다. <지금 저 친구는 뭔가 이상해. 원래 이상한 인간이기는 했지만, 하지만…… 뭐라고 이야기해야할까? 아무튼 무언가가 이상하다. 시체에다 분장을 시켜놓은 것 같은 저 얼굴을 보라지. 그는 분명히 무언가를 연기하기 시작하고 있다. 흥미롭지만 소름이 끼쳐.> 영운은 불안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차라리 현태가 평소처럼, 완전한 생활 무능력자와 광인의 얼굴과 혀로 날뛰어준다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연스럽고 가장 억제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현태라는 인간의 심장 속에는 악마가 수 백 마리 살고 있어서, 보통 사람의 몇 백 배나 되는 생명력 때문에 늘 주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는 필연적으로 미친 사람이어야 했고, 그의 악마들을 묶어둬서는 안됐다. 만일 그의 악마들을 묶어둔다면 그의 광기는 쌓이고 변질되어 어떤 지독한 독이 될지 전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현태는 지금 어떤 이유 때문에, 스스로 자신의 악마들에게 수갑을 채우고 재갈을 물리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머리를 다 잘랐다. 미용사는 잔 머리칼을 다듬고 현태를 세면대로 데려가 머리를 감겼다. 영운은 현태가 뒤로 젖혀진 의자에 누워서 자신의 머리를 미용사에게 맡기는 것을 주의 깊게 보고 있었다. 그 뒤에 미용사는 거울 앞에서 젖은 현태의 머리를 말리더니 스프레이 같은 것을 뿌리고 빗으로 모양을 냈다. 현태는 거울을 보고 얼떨떨해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현태가 학창시절에 거울에서 봤던 것 같은 소년이 나이를 먹고 청년이 되어 비치고 있었다. 상당히 훌륭하게 말이다. 물론 그는 여전히 너무 말라서 광대뼈가 다 드러나고, 눈알이 희번덕거렸지만 더 이상 예전처럼 위협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영운은 당황하고 있는 현태에게 다가가서 자신의 주머니에 있던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면도기였다.
“면도해.” 영운이 짧게 말했다.
현태는 아무 말도 없이 그것을 받아서, 입가에 물을 묻히고 면도를 시작했다. 엉성하게 자란 수염들이 잘려나가고 입가와 턱이 점점 깨끗해졌다. 면도를 마친 그는 면도기를 도로 영운에게 돌려주고 거울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 이 정도면 속일 수 있겠어.> 현태가 마음속으로 희희낙락하여 뇌까렸다. 그는 아직도 자신의 눈에 비치고 있는 청년이 누군지 잘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유쾌했고 더욱 조직적인 무언가가 된 느낌이었다.
“잘 어울리시네요 손님.” 미용사가 말했다.
“그렇습니까?” 현태가 넌지시 웃으며 되물었다.
“그래, 잘 어울리는군. 이 정도면 훌륭해.” 영운이 뒤에서 덧붙였다.
현태는 웃었다. 그의 웃음 속에는 어떤 치명적인 비열함이 숨어 있었지만 영운이나 미용사는 눈치 채지 못했다. 그는 즐거웠다. 그래서 그는 일어서서 영운을 향해 돌아섰다.
“좋아, 나는 사실 이게 나한테 어울리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네가 그렇다니 그런 거겠지.” 실제로 그는 자신의 모습에 대해 객관적인 판단을 할 정도로 사회적이지는 못했다. 그래서 영운이 붙어있어 다행인 것이었다. “이제 내가 건강한 사람처럼 보이는가?”
“먼저 옷을 사러 가자고. 그 뒤에 얘기해주지.” 영운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영운은 계산대에서 계산을 했다. 그동안 현태는 미용사와 호의가 담긴 악수를 나눴다. 미용사는 악수를 하면서 현태에게 물었다.
“화실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아, 물론이죠. 저쪽으로 얼마쯤 가면 <C 미술학원>이 있는데, 그 건물의 2층에 있답니다. 언제든지 놀러오세요.” 현태는 그녀가 올 것이라는 기대는 전혀 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말했다.
“그 건물 알고 있어요.” 분홍색 머리의 젊은 미용사는 발랄한 눈동자를 한 채로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태는 관심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현태는 영운을 따라 미용실을 나왔다.
“조금만 가면 양장점이 있어.” 현태가 미용실 문을 나오는 것을 보며 영운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말했다. 현태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의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겨보았다. 평소 시야를 가리고 있던 앞머리가 사라지자 세상이 더욱 환하게 보였다. 그는 눈이 부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길을 가는 사람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더욱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영운은 걷기 시작했다. 현태도 그를 따라서 걸으면서 자신의 옷매무새를 살펴보았다. 점심에는 목욕을 하고 방금 머리를 깎았다. 그는 전보다 밝아보였지만 그의 옷차림은 여전히 엉망이었다. 구겨지고 피, 얼룩이 묻은 셔츠와 지저분한 바지는 그대로였다. 그는 고개를 들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이 전보다 조금은 그 거리에, 환각적인 것이라고는 일절 찾아볼 수 없는 거리에 익숙해 보인다고 느꼈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방금 웃을 때와 마찬가지로 비열한 희열 같은 것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현태는 그것을 잘 숨겼다. 숨겨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고통스럽거나 억지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환희를 위한 준비이자 계획이었다. 현태는 모든 일이 다 잘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웃었다. 아무도 그가 웃는 것을 보지 못했다.
현태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인사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단순히 머리를 잘 정돈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이제 어떤 희망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다들 갖고 사는 소시민적인 희망은 아니었다. 그는 아직도 앙드레 지드가 희망을 거부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현태에게 늘 본이 되어보였다. 그래서 그는 만족하지는 않았지만 절망에 빠지는 방법도 몰랐고, 광기와 비틀린 정열로 현재를 마주하며 살 수 있는 것이었다. 아, 그가 정말로 현재를 마주하기는 했느냐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제 모두가 알다시피 그는 아주 미쳐있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미치광이야.> 현태가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조용히 지껄였다. 커다란 바위에게 있어 세계가 그 자신만큼이나 단단하고 변화하지 않는 것처럼, 미치광이의 세계는 늘 미쳐있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누가 가장 객관적인 세계를 볼 수 있을까? 그것은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누군가이거나, 혹은 아마도 신일 것이다. 적어도 현태는 자신의 현재에 대해서는 늘 충실했다. 그들은 곧 양장점에 도착했다.
커다란 가게는 아니었다. 현관 앞에는 값싼 구두들이 전시 되어있었고, 통유리로 된 벽을 통해 가게 안에 가득 걸린 옷가지들이 보였다. 영운은 그곳에서 옷을 살 것이라고 했다. “구두는 네가 신던 걸 신어도 괜찮을 것 같아. 왜냐하면, 너랑 만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네 구두를 관찰하는 일은 없을 것 같거든.” 영운이 가게 안으로 들어가면서 말했다. 현태도 그에 동의했다. 그는 아직 그의 구두를 마음에 들어 했다. 지금 그가 신고 있는 것이 얼마 전에 영운이 사다준 슬리퍼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늙은 점장이 그들을 맞이했다. 그는 키가 멀쑥하고 잘 차려입은 50대 후반 즈음 되어 보이는 남자였는데, 현태는 그를 처음 보자마자 한 달 정도 못 먹어서 기력이 다 빠진 영운의 아버지를 상상했다. “어서 오세요.” 그가 기계적으로 인사했다. 현태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까딱 숙여 인사했다.
“우리는 이 친구가 입을 옷을 찾고 있는데요, 셔츠와 웃옷, 그리고 양복바지를요.” 영운이 현태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너무 비싸지 않은 것으로요.”
“아!” 점장이 반사적으로 줄자를 꺼내며 대답했다. “먼저 치수를 좀 재어보죠. 옷 사이즈는 알고 계십니까?”
“아뇨. 기억이 나질 않아요.” 현태가 느릿느릿 대답했다. 그는 어째서인지 말하다가 혀가 꼬일 뻔했다.
“그럼 제가 재보도록 하죠…….” 그러면서 점장은 줄자로 현태의 허리, 어깨너비 따위를 재기 시작했다. 현태는 얼떨떨하게 서서 팔을 벌리고 점장이 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영운은 가게 벽면에 걸려있는 옷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장례식에 가는 것도 아니니까 너무 어둡지 않은 옷이 좋겠어.” 영운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현태는 별 생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패션에 대해서는 완전한 문외한이었던 것이다. 영운이 생각하는 대로 선택하게 하는 것이 그의 최선이었다. 현태의 패션 감각이라는 것은 일 년 삼백육십오 일 똑같은 셔츠와 바지를 입고, 더우면 소매를 걷고 추우면 외투를 걸치는 것뿐이었던 것이다. 점장은 마침내 현태의 옷 사이즈를 재는 일을 끝냈다.
“이쪽으로 오시죠. 젊은 분이니까 이런 정장풍의 옷도 어울리실 것 같군요.” 그러면서 점장은 벽에 걸려있는 웃옷을 몇 개 내려 그들 앞에 펼쳐보였다. 영운은 그것들을 주의 깊게 살피면서 현태에게 물었다.
“네가 좋아하는 색이 뭐더라?”
“보라색.” 현태가 대답했다.
“그건 안 돼. 미친놈처럼 보일 거라고.” 영운은 현태를 보지도 않고 되받아쳤다. 현태는 입을 다물었다.
영운은 웃옷들을 하나씩 집어서 현태의 상체에 대어보고 가격표를 확인했다. 현태는 그저 마네킹처럼 서서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영운이 옷을 고르는 동안 현태는 가게 조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약간 주황빛 색깔이 나는 흰색 전구였다. 그런 색의 빛이 옷가게에 잘 어울리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건 점장이 조명 설정이나 배치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빛이라는 것은 늘 현태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것이 어떤 색깔을 하고 어떤 뉘앙스를 갖고 있든, 빛은 그의 감정을 오만가지 색깔로 파도치게 했고 어떤 때에는 파문조차 없는 깊은 늪처럼 만들기도 했다.
“친구 분 옷을 대신 골라주시는 건가요?” 점장이 영운에게 웃으며 말했다.
“아, 저 친구한테 자기 일을 맡기면 끝이 안 나거든요.” 영운이 현태와 웃옷을 번갈아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현태는 지금 그들이 누구 얘기를 하는 것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는 그냥 넋이 나가있었고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아니, 아무 생각도 없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는 거대한 나무 위에 앉은 타조를 상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현태가 생각하기에 타조라는 것은 키가 크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키가 큰 나무와 잘 어울릴 것 같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타조가 나무를 탈 수 있는 지 어떤 지는 현태의 지식 밖의 일이었다. 아무튼 현태는 마지막으로 타조를 봤던 기억을 되살리면서 그 조류의 머리가 어떻게 생겼었는지에 골몰하고 있었고, 그래서 점장과 영운이 자신에 대한 뒷말을 하는 것에 대해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봐, 이거 어떤가?” 영운이 마침내 웃옷 하나를 골라들고 현태에게 물었다.
“응?” 현태는 드디어 타조 생각에서 벗어났다. “그래, 괜찮네.” 그는 굉장히 건성으로 말했다.
영운이 고른 것은 약간 남색이 도는 어두운 빛깔의 정장풍 재킷이었다. 더블 버튼으로 앞을 잠글 수 있게 되어있었고, 봄바람이 불어도 춥지 않을 정도의 두께였다. “그럼 이걸로 하지.” 영운은 가격표를 다시금 확인하며 말했다. “그리고 셔츠. 셔츠는…… 흰색으로 사이즈만 맞으면 되겠지.”
“그래.” 현태의 말이 유난히 짧아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실제로 그는 오랜만에 거리를 너무 많이 돌아다녀서 몹시 피곤한 상태였다. 거리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많았고, 그 숫자는 현태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숫자였다. 그는 사람들의 얼굴만 보고 있어도 피로를 느꼈다. 왜냐하면 인간의 얼굴에는 온갖 난해한 흔적과 상대에 대한 조롱들이 지뢰처럼 숨겨져 있는데, 현태는 그런 것을 기가 막히게 잘 찾아내는 까닭이었다. 그는 사람의 낯짝을 보면 상대의 거의 모든 페르소나와 트라우마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러면 마치 상대의 상처투성이 인생이 현태의 영혼으로 쏟아져 내리는 듯 했고, 누구나 그런 일을 겪는다면 필연적으로 기진맥진하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현태가 종종 비이성적으로 화를 낸다는 것은 전에도 설명한 바가 있다.
“셔츠를 너무 오래 입으셨군요.” 점장이 현태에게 말했다. 정말로 현태의 셔츠는 너무 오래된 것이었다. 낡아서 깃은 전부 닳았고, 곳곳에 피와 물감 얼룩이 가득했다. 셔츠에 묻은 피가 붉은 물감 얼룩으로 오인될 수도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지만 말이다.
“네, 이건……―그는 한참 동안이나 말을 끌었다. 자신의 셔츠를 내려다보며 무어라고 대답해야할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더럽죠.” 현태가 대답했다. 굳이 냄새도 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자신이 자주 세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두에게 알릴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셔츠는 이걸로 하자고.” 영운은 벽에 걸린 수많은 셔츠들 사이에서 하나를 집어서 들고 오며 말했다. 그는 말을 마친 뒤 옷깃 안쪽에 적힌 사이즈를 확인했다. “이게 이 친구에게 맞는 치수인가요?” 영운이 점장에게 물었다.
“네. 딱 맞는 걸 골라오셨군요.”
“그럼 이제 바지를 골라야겠군!” 영운은 만족한 얼굴로 크게 말했다. “방금 고른 재킷과 어울리는 정장 바지면 뭐든지 좋은데요.” 그가 점장에게 말했다.
“마침 짝이 맞는 바지가 있죠.” 그렇게 말하며 점장은 가게 안쪽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현태는 여전히 피곤한 눈동자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운아, 난 피곤해.” 현태가 거의 신음이나 다름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래, 그래 보여.”
“오늘은 아무래도 저녁에는 그림을 그리지 못할 것 같아…… 하지만 화실에는 들리는 게 좋겠지. 왜냐하면, 지금 집에 가서 잠들어버리면 분명 새벽에 깨어날 테니까. 새벽에 깨는 건 좋은 일이 아냐. 난 또 아무도 없는 거리를 몇 시간씩 배회하면서 영원히 찾지도 못할 무언가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겠지. 그리고 아침 해가 뜰 때 즈음에는 내가 <그것>을 찾아내지 못했다는 생각 때문에 절망해서 마구 화를 낼 거고, 사람들이 출근하기 시작하면 그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피해서 도망치듯이 집에 와야 할 거야. 그건 너무 끔찍한 일이야. 그래, 끔찍하고말고. 게다가 밤에는, 밤에는 수없이 많은 달이 뜨지. 그건 내 영혼에게 안 좋아. 왜냐하면 달이 뜨지 않는 시간을 저주하게 되거든. 마치 마약 중독자가 마약에 취해있지 않은 시간을 저주하는 것처럼 말이야. 아, 아무튼 그래. 난 너무 피곤하지만, 쇼핑이 끝나면 너와 함께 화실에 가야겠어…….” 현태는 반쯤 죽어가는 목소리로 갑자기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그러면 그렇게 하자고.” 영운은 꽤 놀라워하는 눈동자로 대답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현태가 하는 말의 반 정도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꽤 정상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때 점장이 정장 바지를 하나 들고 돌아왔다.
“이게 그 재킷과 맞춤옷입니다.”
“그래, 한 번 입어보지 그래?” 영운이 현태에게 말했다. 현태는 알겠다고 말했고, 점장은 그를 탈의실로 안내했다. 현태는 재킷과 셔츠, 바지를 들고서 탈의실 안으로 들어갔고, 사방이 거울이었다.
전신 거울을 앞에 두자 그의 눈에 머리를 세련되게 깎은 현태가 들어왔다. 현태는 한동안 애매모호한 기분으로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몇 번이나 말하는 것이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야수의 눈동자 같았고 기분 나쁜 이질감이 느껴졌다. 아무리 꾸미고 연기를 해도 그의 머리가 돌아있다는 사실이 눈에서 흘러나왔다. 흠, 하지만 그것은 현태에게만 보이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가 생각하기에, 사람들은 현태만큼 남들의 얼굴에서 보이는 광란의 감정들을 잘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어쩌면 몸을 씻고 머리를 깎고 옷을 새로 해 입는 것만으로도 그가 모두를 속여 넘길 수도 있었다. 거의 완벽하게 말이다. 현태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셔츠를 벗자 거울에 흉터 자국 가득한 그의 몸이 드러났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도 그의 흉터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적어도 그가 스스로 보여주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는 옷을 전부 갈아입고 탈의실 밖으로 나왔다.
“이거 보게, 누군지 못 알아보겠군, 현태!” 영운이 현태의 모습을 보고 과장되게 외쳤다. 점장은 그의 옆에서 만족스러운 얼굴로 현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하지만 그 옷은 그림 그릴 때는 입지 마. 분명 물감이 묻어서 지저분해질 테니까.”
“알겠어.” 현태가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면서 한숨 쉬듯이 대답했다.
“다시 갈아입고 나와. 계산해야 하니까.” 영운이 말했다. 현태는 아무 말도 없이 탈의실로 되돌아갔다.
영운은 점장과 마주보면서 말도 없이 웃었다. 그는 퍽 만족스러웠다. 이제 고등학교 시절의 동창들 앞에서 현태를 자랑해도 될 것 같았다. 사실, 현태는 영운이 키우는 야생 동물이나 마찬가지가 아니던가? 영운은 현태의 이상성과 광증을 아껴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영운은 현태에게 밥을 사주고 옷을 입히면서 한 마리의 아주 귀중하고 희귀한 짐승을 키우는 기분이었고, 그것이 설령 우정의 형태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아무 문제도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현태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영운은 현태에게 거의 아무런 제제도 가하지 않고 그를 먹여살려주는 까닭이었다. 그리고 현태는 늘 그림을 그렸다. 그 그림들은 영운의 소유나 마찬가지였다! 현태는 이미 완성한 자신의 그림에 대해 아무런 집착이나 욕심도 없었고, 그도 자신이 쓰는 캔버스나 물감 따위가 전부 영운의 돈으로 사들인 것이라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현태는 명예욕도 없었고 미래지향적이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그릴 뿐이었고, 영운은 가끔씩 현태에게 동의를 구하고 그 그림들을 자신의 집으로 가져가곤 했다. 대부분의 그림들은 화실에 쌓여있었지만, 그것은 이미 영운의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러한 사실에 대하여 현태는 아무 불만도 없었다. 불만이 없다기보다는, 아예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친구라는 이름의 관계 하에서 지금까지 잘 지내왔던 것이다. 현태는 원래의 더러운 옷으로 갈아입고 탈의실에서 나왔다.
영운에게 새로운 옷들을 건네주고 현태는 가게 현관에 가 기댔다. 영운은 계산대에서 점장과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지갑에서 만 원짜리가 다섯 장은 넘게 나오는 것이 얼핏 보였다. 현태는 마음이 아팠다. 왜인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그랬다. 그래서 그는 가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바람을 쐬면서 영운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는 삐딱한 자세로 서서 길 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담배가 피우고 싶었지만 그가 스스로 담배를 사는 일은 없었다. <오늘 그 소연이라는 소녀가 올지 안 올지 모르겠군.> 현태가 생각했다. 하지만 오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소연을 기다리는 이유라고는 오직 담배 한 개비, 그것뿐이 아니던가.
영운이 가게 밖으로 나왔다. 그는 양장점의 이름이 인쇄된 종이봉투를 하나 들고 있었다. 그리고 현태에게 이제 가자고 말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날 믿어. 그 지저분한 셔츠를 벗고 이 옷만 입으면, 너는 희망이 있는 훌륭한 젊은이처럼 보일거야.”
그거 잘 됐군. 현태가 들리지도 않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작게 얘기한 것은 심정에 어떤 불편함을 느껴서가 아니라 단순히 피곤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넌 나를 위해서 돈을 너무 많이 써. 그게 나에겐 슬프게 느껴지는데.” 현태가 걸으면서 말했다.
“아, 신경 쓰지 마. 넌 그런 건 신경 안 써도 돼.” 영운은 별 것도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신경 쓰지 말라고 해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지. 하지만 당사자가 신경을 쓰지 말라고 말하고, 실제로 내가 그 점을 걱정한다고 해도 어떻게 할 도리도 없으니, 영운의 말대로 해야겠군. 현태가 생각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돈을 벌어본 것이 언제였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군. 그런 시절이 있었는지조차 모르겠어. 한때 내게는 부모가 있었고, 그들이 나를 길렀지. 그리고 내가 거리로 나온 뒤로는, 가끔 사람들이 내게 돈을 던져줬고, 얼마 안 가 영운이 이 마을에 살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지…….> 그는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런 생각들 때문에 말이다. 그렇지만 그 <생각들>도 곧 잊혀져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현태는 너무 피곤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걷는 것조차 힘들어지고 있었다. 영운은 현태가 비틀거리면서 걷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의 곁에서 걷고 있었다. 현태의 발걸음을 보기만 하면 그가 얼마나 오랜 시간동안 망가져왔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옛날에는 이런 친구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영운이 굉장히 모호한 기억을 떠올리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에게도 젊음이 있었던 시절이 있었지. 아마도 말이야…… 잘은 모르겠지만. 그렇지만 누구나 신에게 생명의 숨결을 받고 태어나니까 한때는 기세 좋게 울부짖기도 하는 법 아닌가? 그런데 지금의 현태를 보면 마치 연옥에서 영원히 고통 받으며 방황하는 정신병자나, 혹은 철학자를 보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현태의 오랜 과거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현태의 기억에도 거대한 공백이 있었다. 사실 현태는 그 기억의 공백에 대해 신경 쓸 정신적 여유도 없었고,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동굴 같은 다락방, 오렌지 빛으로 떠오르던 아침 해, 칼, 상처, 밧줄, 알약 같은 것들 밖에 없었기 때문에 기억해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시절에 몇 개의 달을 보았던 것 같다고 그는 가끔 생각하곤 했다.
그들은 마침내 화실에 도착했다. 현태는 거의 죽어가는 사람처럼―혹은 이미 죽은 사람처럼― 계단을 기어 올라갔고, 영운은 말없이 그 뒤를 따라 올라갔다. 현태는 피로와 환각 때문에 눈앞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그의 머릿속에서는 악마들이 캠프파이어를 하고 있었다. 그는 온전히 몸의 기억만으로 화실까지 걸어가서 문을 열어젖히고, 쓰러지듯이 아무 의자 위에나 주저앉았다.
“이봐, 현태, 보라고. 나는 잠깐 아버지한테 갔다 올 거야. 할 얘기가 있거든. 그러니까 너는……” 영운이 종이봉투를 현태 옆에 내려놓으면서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무어라고든 말을 끝맺어야했지만 뭐라고 해야 할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말을 고르고 있었는데, 대뜸 현태가 입을 열었다.
“난 최근에 네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본 일이 없는 것 같아.” 그의 목소리는 굉장히 괴상했다. 거의 신음소리 같기도 하고 비명 같기도 했다. 그는 분명히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겠군.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대학에 다니면 그렇게 되지. 자기 작품 활동을 할 시간이 없어.” 영운이 입맛을 다시면서 얘기했다.
“아.” 현태는 이미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가슴속에서 몇 가지 안타까운 말마디들이 맴돌고 있었지만 정확하게 언어가 되지는 못했다.
그때부터 현태는 반쯤 잠을 자기 시작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형형색색의 색깔들이 음악처럼 울려 퍼졌고, 어떤 늘어지는 발라드가 다리가 다섯 개 달린 뱀처럼 그의 몸을 휘감는 듯 했다. 현태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사이에 영운은 발걸음을 죽이며 화실 밖으로 나갔고, 나가는 길에 그는 화실의 전등을 켰다. 덕분에 현태의 뇌내에서는 징이 울린 것처럼 어떤 세찬 쇳소리가 사방을 찢어발겨놓았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낮에 거리에서 본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씩 산산이 분해되어 시야에서 뛰놀고 있었다.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현태가 환각 속에서 놀고 있을 때 누군가가 화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소연이었다. 그녀는 문을 열면서 <아저씨>라고 외치려고 했지만 의자 위에 죽은 것처럼 쓰러져있는 현태의 모습이 곧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그녀는 현태 곁으로 살금살금 다가가서 그의 코 밑에 손가락을 대어보았다. 숨을 쉬고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현태는 숨을 쉬고 있었고, 자세히 보니 그의 감은 눈동자는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움찔거리고 있었다. 소연은 머리를 갸우뚱 기울인 채로 현태를 잠깐 내려다보다가, 갖가지 잡다한 물건들이 가득한 화실 안을 맴돌며 이것저것 구경하기 시작했다. <이 아저씨 머리를 잘랐네. 까딱하면 못 알아볼 뻔했어.> 소연이 생각했다. 왜 머리를 자른 것인지, 누구 돈으로 자른 것인지 궁금하긴 했지만 현태를 깨울 수는 없었다. 그녀는 화실 안을 어슬렁거리다가 마침내 창가에 놓인 이젤 위의 그림을 발견했다. 영운과 함께 화실을 나서기 전까지 현태가 그리고 있던 그림이었다. 거의 채색이 되어있지 않았지만 푸른 색조의 바탕색이 깔려있었고, 유화의 거친 감각 속에 어떤 원시적인 적막함이 감돌고 있었다. 소연은 한동안 그 그림을 보았다. 그리고 곧 옅게 웃음을 띠면서, 짧은 감상을 내뱉었다.
“마음에 드는데.”
6. 위장된 욕망들에 대하여
현태가 깨어났다. 그는 한동안 자신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사방이 어두웠고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현태는 손을 뻗어 어둠 속을 더듬어보았다. 모노륨 장판 특유의 잘 미끄러지지 않는 촉감이 손에 닿았다. 그제야 현태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냈다. 그는 어제 비몽사몽간에 집으로 돌아와서 그대로 쓰러져 잠든 것이었다. 그는 더듬거리며 일어나서 형광등 스위치를 찾았다. 불을 켜자 창백하고 지저분한 방이 깜빡거리며 나타났다. 현태는 여전히 잠에 취해 정신이 깨끗하지 못했고 방안의 역한 곰팡이 냄새가 더욱 그렇게 만들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불이 방 한쪽 구석에 제대로 접히지도 않은 채로 쌓여있었고, 책상 위에는 손목시계가 너부러져있었다. 그는 그것을 집어서 손목에 찼다. 열두 시 사십오 분. 오후였다. 책상 옆에는 종이봉투가 놓여있었다. 그것은 어제 영운이 사준 옷들이 들어있는 봉투였다. 현태는 자신이 그것을 들고 왔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분명 화실을 나오기 전에 영운이랑 무슨 말을 했었는데.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군. 그래, 그리고 소연이라는 아이도 있었지. 그 아이가 왜 있었던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있었어. 그 증거로…… 봐라, 내 주머니에 담배가 한 개비 있군……. 그러면서 현태는 바지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들었다. 그는 머리를 흔들면서 잠에서 좀 깨어나려고 노력했다. <담배를 피워야겠어. 담배를 피우면 잠이 조금 깨겠지. 하지만 나는 라이터가 없는데. 이런, 라이터가 없어. 우선 나가봐야겠군…….> 현태가 생각했다. 그는 먼저 거울을 보았다. 머리를 깎은 자신이 보였다. 자는 동안 자신이 머리를 잘랐다는 것을 잊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순간 거울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못 알아볼 뻔했다. 평소보다 훨씬 머리가 짧았기 때문에 자고 일어난 직후인데도 머리칼이 산발이 되어있지는 않았다. 하기는 머리가 까치집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신경이나 썼겠느냐만, 아무튼 그랬다. 현태는 현관문을 열었다. 복도에 내팽개쳐져있는 슬리퍼가 보였다. 아마도 현태의 것이었다. 현태는 복도로 내려가서 슬리퍼를 신고 한 손에는 담배를 쥐고 있었다. 라이터가 있는 사람을 찾아야 했다. 왜냐하면 현태는 돌과 나무를 가지고 불을 피우는 방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태는 우선 연립주택을 나와 골목거리에 발을 디뎠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더라? 그렇지, 어제가 수요일이었다. 현태가 중얼중얼 읊어댔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라이터를 빌려야 했다. 편의점에 가서 라이터를 살 수도 있었지만, 그런 일에 돈을 쓰기에 현태는 너무 가난했다. 그리고 담배도 한 개비밖에 없는데, 뭐 하러 라이터를 산단 말인가. 그는 절약정신이 있었다. 현태는 골목을 어슬렁거리다가 큰길로 나갔다. 큰길에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여자는 피해야겠어.> 현태가 생각했다. 그것은 옳은 생각이었다. 현태의 경험에 따르면 여자들은 낯선 남자에 대해 비이성적일 정도의 공포감을 갖고 있었다. 어쩌면 낯선 남자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현태에 대한 공포일지도 몰랐지만, 여하간 말을 걸 상대로 여자는 좋지 않았다. 게다가 비율로만 따져 봐도 담배를 피우는 남자가 여자보다 많을 것이었다. 기껏 말을 걸었는데 라이터가 없다고 하면 실망스럽지 않겠느냔 말이다. 현태는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을 하나씩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런 사람이 필요했다. 말하자면, 행색이 초라한 누군가가 라이터를 좀 빌려달라고 하더라도 겁에 질리지 않을만한 사람 말이다. 적당한 차림을 하고, 나이가 좀 있으며 친절해 보이는 사람. 어떤 사람들은 낯모르는 타인에게 담뱃불을 좀 빌려주는 것만으로도 뿌듯함을 느끼곤 한다. 현태는 사람들의 그런 심리를 잘 알고 있었다. 워낙에 선행을 하기 힘든 시대다보니 그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잘 보이지 않았다. 다들 바빠 보였고 걸음이 빨랐다. 현태는 삼 분 정도 거리를 헤매다가 결국 포기하고, 아무 가게나 들어가서 라이터를 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가까운 편의점을 찾아서 들어가며 대뜸 외쳤다. “실례합니다!”
편의점 안에는 젊은 남자가 카운터를 보고 있었다. 그는 현태를 보더니 어서 오시라고 인사를 했다. 현태는 그에게로 다가가서 차분한 목소리로, 최대한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도록 노력하며 말을 꺼냈다. “여쭐 것이 좀 있는데, 사실 전 물건을 사러 온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점원은 현태의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되물었다.
“제게 지금 담배가 한 개비 있는데, 안타깝게도 라이터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불을 좀 빌려야합니다. 만약에 당신께서 담배를 피우시고, 또 라이터가 있으시다면, 불을 좀 빌려주신다면 감사하겠는데…….”
점원은 웃었다. 다소 당혹이 섞인 웃음이었다. 그러나 그는 직업상 모든 손님들에게 친절해야했고, 또 운이 좋은 것인지 그는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었다. 점원은 기꺼이 라이터를 빌려주었다. “하지만 밖에 나가서 불을 붙이셔야 합니다. 점포 안은 금연이거든요”
“아! 물론이죠. 감사합니다.” 현태는 라이터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그는 편의점 밖으로 나가 담배에 불을 붙인 뒤에, 재빨리 점원에게로 돌아가 라이터를 돌려준 후에 꾸벅 인사를 하고 나왔다. 그는 가게를 나와 거리를 어슬렁거리면서 담배를 피웠다. 그는 담배를 거의 하루에 한 개비밖에 피우지 않았는데, 덕분에 담배를 피울 때마다 니코틴이 뇌 안에서 날뛰고 심장박동을 빠르게 하는 것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담배를 피우면서 생각했다. <그림을 그리고 싶군. 아직 이르긴 하지만 화실 열쇠는 나에게 있으니까 지금이라도 갈 수 있다. 그리고 지금 그리는 그림을 어서 완성하고 싶어. 그러니까 그 그림말이다. 어두운 파란색이고 언덕이 있고 냇물이 흐르는,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이 서있는……. 명명하자니 너무 길군. 제목을 붙여도 좋을 것 같다. 그런데 내가 그림에 제목을 붙인 적이 있기나 하던가? 그래, 있었지. 예를 들자면, <나무1>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나무를 그릴 때마다 그런 식으로 제목을 붙였지. <나무2>, <나무3>…… 아마 <나무27>까지 있었던 것 같다.>
사실이었다. 그리고 <하늘>은 <12>까지 있었고 <겨울>은 <49>까지 있었다. 그는 작명에 그다지 재능이 없었다. 그리고 제목 같은 것은 그다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기 자신의 그림마저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왜 그림의 제목을 중요하다고 생각하겠는가? 바람이 불어서 담배연기가 현태의 왼쪽 눈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인상을 찡그리며 왼쪽 눈꺼풀을 감았다. 그는 춤을 추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춤을 출 줄 몰랐다. 현태의 뇌는 치명적으로 움찔거리고 있었는데, 아마 니코틴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사실 분간하기가 힘든 것이, 그는 담배를 피우지 않아도 하루에 수십 번은 그런 기분을 느끼기 때문이었다. 담배나 술은 일종의 촉매였다. 그러나 그는 돈이 없었기 때문에 담배나 술을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발적으로 뇌에서 알코올이나 니코틴, 혹은 헤로인 따위를 생산해내는 방법을 익혀야했다. 그리고 그는 그런 일에 재능이 있었다. 현태의 뇌수에서는 늘 뭔가가 부족하거나 과잉되어 있었다. 아, 만약에 그가, 좀 더 즐거운 일을 상상한다면, 그는 얼마든지 일을 벌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우리 안에 갇혀있는 미친 고릴라나 다름없었고, 아직은 밖으로 나올 생각도 하지 않았다. 현태는 화실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래, 하지만 나는 구속되어 있지는 않아. 왜냐하면 내 손에 열쇠가 들려있거든. 다만 바깥세상의 혼돈과 무차별하게 떨어지는 빗방울 같은 부조리들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문제지. 나는 사실 무언가를 두려워하기는 하지만, 내 생각만큼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나도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사는지 알고 있지. 그들의 양심과 선의라는 것은 스스로 채운 수갑 같은 거야. 스스로라는 점이 중요하지. 그렇지만 대개, 그들 자신의 수갑을 풀 수 있는 것 또한 자신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어. 나는 잊어버리지 않았지.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내 안의 악마 같은 광증들과 아노미 상태에의 향수를 아슬아슬하게 붙잡고 있는 나의 빈약한 이성을 인지하고 있단 말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너무 약해서 자꾸만 상처를 받고 고통스러워하거든. 하지만 언젠가, 만약 일이 내 생각대로 잘 풀린다면, 그 이성마저도 내 편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성이라는 것도…… 나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까닭이야…….> 그런 생각을 하면서 현태는 화실 쪽으로 걸어갔다. 어느새 담배는 다 피워 필터밖에 남지 않았고, 그는 꽁초를 길거리에 집어던졌다.
학원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서 그는 몇몇의 학생들을 보았다. 현태는 자신의 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그들을 곁눈질했고, 학생들은 현태가 그 자리에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한 듯이 그를 지나쳤다. 현태는 무언가를 생각하면서 웃었다. 불분명하고 모호한, 어떤 유쾌한 상태 같은 것을 말이다. 그러면서 그는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현태는 아마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 억제된 힘들이 말이다. 그는 목이 말랐고 물을 마시고 싶었다. 그래서 현태는 2층의 화장실로 가서 수도를 틀고 입을 댔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마치 몇 십 년 동안이나 목말라했던 사람처럼 말이다. 그러나 갈증은 사라지지 않았고, 그는 수도를 잠그고 거울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별안간 세수를 하기 시작했다. 늘 그랬듯이 자신의 얼굴에 달라붙어있는 단 한 조각의 피지도 남기지 않고 전부 비누칠을 해서 씻어냈다. 그리고 그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거울을 마주보았다. 현태는 가끔씩 초점을 잃고 흔들리는 눈동자로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무언가를 말했다. “너는 아주 머리가 좋아.”
“넌 잊어버리면 안 되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고 있지. 아, 하지만 그건 비단 네가 명석하기 때문만은 아니야. 다행히도 너는 아주 민감한 감각을 가지고 태어났지. 마치 가죽이 전부 벗겨진 갓난아기처럼. 그래서 너는 알 수 있는 거야. 그렇지, 너는 알 수 있어……. 너는 이십…… 몇 년간 그것들을 계속 되새기며 살아왔고, 마침내 하나의 형태로 만들어내기 시작했어. 하지만 그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했지. 그럼. 물론이야.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을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은 없으니까. 그렇고말고……. 그래서 너는 어떤 우연을 빌미삼아 계획을 하기 시작했지. 네 인생 최초의 계획이라고 부를만한 것을…….” 현태는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읊조렸다. 자기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무언가를 다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둘 다 맞는 말일지도 몰랐다. “네가 가지고 싶은 게 뭐지?”
현태는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그는 한 손을 거울에 부딪치면서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네가 가지고 싶은 게 뭐냔 말이야.”
그는 웃고 있었다.
얼마 뒤에 현태는 젖은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면서 화장실을 나왔다. 그의 눈동자는 바짝 말라붙어 있었고 입 꼬리에서는 구역질 같은 웃음기가 비실거리고 있었다. 그는 다소 비척거리면서 화실로 들어가 불을 켰다. <이제야 나도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 이전까지의 과거는 모조리 엉망으로 뭉쳐진 진흙덩어리 같았지. 분간할 수 없고 분리할 수도 없는……. 하지만 목표가 생긴다는 것이 시간을 파악하게 해주지. 나는 토요일을 기다리고 있고, 그 후의 나날도 기다리고 있어. 그래서 나는 이제 시계를 보고 날짜를 파악하며 하루하루를 계획하지 않는가? 이것이 그들처럼 된다는 것이지. 아주 짧은 시간이긴 하지만, 나는 《그들》처럼 되는 거야. 그리고 나는 내 시간을 위해서, 그림을 그려야겠군.> 현태가 생각했다.
현태는 창가에 놓인 이젤 앞에 앉아서 자신이 그린 그림을 바라보았다. 채색이 필요했고 더 많은 물감과 절제된 감정이 필요했다. 현태의 돌아버린 머리가 무언가에 가장 집중을 할 때는 그림을 그릴 때뿐이었다. 그는 억지로라도, 안 된다면 허벅지에 페인팅 나이프를 박아 넣어서라도 폭죽처럼 터져대는 상념들을 가라앉히고 가장 간결하고 결정화된 영감만을 남겨 놔야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영감이란 늘 광기 속에서 나오기 마련이라서, 광기라는 파도에 휩쓸리면서 어떻게든 수면 위에서 헤엄을 치려는 사람처럼 그림을 그려야했다. 그리고 집중…… 그렇다. 집중을 해야 했다. 해일 같은 파도를 가라앉히고 수면을 잔잔하게 만들어서 자신이 내키는 대로 그 수면 위에서 헤엄칠 수 있도록 만들어야했다. 설령 발밑에서는 거대한 아나콘다 같은 해류가 굉음을 내면서 꿈틀거리고 있더라도 말이다. 그것이 그림을 그리는 데에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이었다. 그것은 광증과의 격투였다. 공수병에 걸린 야수처럼 날뛰는 광기를 붙잡아서 팔다리에 못을 박고 칼로 배를 갈라 조용히 박동하는 심장을 꺼내는 일과 같았다. 그러나 일이 늘 계획한 대로 풀리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그림을 그리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괴성을 지르고, 뇌에서 엔도르핀을 분비하기 위해서 자해를 하고, 그마저도 안 될 때에는 창문 밖을 향해서 광신도들이 방언을 하듯이 욕설을 마구잡이로 내뱉다가 좌절하여 의자 위에 쓰러지는 것이었다. 그러다보면 그에게는 다시 힘이 돌아 붓을 잡을 수 있게 되고 자신이 원하는 색깔이 무엇인지 찾아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현태는 왜 자신이 그런 험악한 꼴을 보면서까지 그림을 그리는지 알지 못했다. 그것은 욕망 때문도 아니었고 어떤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그는 그림을 그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누구든 인간은 죽거나 혹은 무언가를 할 수 밖에 없도록 생겨먹지 않았던가. 그는 ―적어도 지금은―죽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 때문에 무언가를 해야만 했고, 그는 그림을 그릴 줄 알았다. 그것은 병적인 집착이었다. 왜냐하면 결말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저 그렸고, 그 뒤에 또 그렸고, 그리고 또 그렸다. 자신이 무언가를 창작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어떻게 될 지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래도 현태는 늘 최선을 다해 그림을 그렸다. 그에게는 항상 시간이 넘쳐흘렀고 그의 광증은 분출구를 찾아서 몸속을 사납게 날뛰었다. 미술이 분출구가 되었냐고? 글쎄, 그건 확언할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예술이 광기의 승화를 돕는다고 말하지만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방도가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광증은 <무언가를 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현태는 십 수 년 동안 계속 그림을 그려왔지만, 그의 병은 나아질 줄을 몰랐다. 오히려 점점 더 심화되어 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의 그림 그리는 기술이 좋아질수록 현태는 더욱 더 체계적으로 미쳐갔다. 그의 광증은 점점 몸집을 불려갔고 힘을 키웠으며, 혼돈으로 가득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물이 되어갔다. 언젠가 그의 무질서한 에너지가 너무 비대해져서 더 이상 그림을 그리는 일조차 못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림에 대한 현태의 집착은 애당초 광기의 산물이었고 악마의 선물이었다. 그 광기가 너무 강해져서 현태가 더 이상 <미쳐있는> 일 밖에 하지 못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는 잃을 것이 없었다. 적어도 그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정도로 미친다면, 그림에 대한 집착은 자연스럽게 다른 무언가로 옮겨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제 그림을 그릴 필요조차 없을 것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이나 신문에서 간첩들의 비밀 메시지를 알아내는 일이나 별로 다를 바도 없었다. 현태는 자신이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일반인들의 예술에 대한 외경심은 그가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영운에게 동창회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때, 그는 그 이상한 외경심을 이용할 수는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비열한 생각이었지만 현태에게는 상관이 없었다. 애당초 그의 삶부터가 비열한 것이었다. 누구에게든 들러붙어 빈대처럼 지내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무능력자의 삶. 그는 고귀함을 따지기 이전에, 고귀함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아!” 한창 그림을 그리던 현태가 갑자기 외쳤다. 그러더니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었다. 조용했고, 가끔씩 자동차가 굴러가는 소리가 창밖에서 들려올 뿐이었다. 그는 괜히 기분이 좋았다. 말하자면 유쾌했다. 왜냐하면 현태가 생각하기에 그의 그림은 잘 되어가고 있었고, 중요한 것은 그림뿐만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기대가 있었다. 자신의 유쾌하면서도 이상한 삶을 <판단>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말이다. 사람과 만나는 것은 두렵고 화가 나는 일이었지만 그만한 값어치는 있었다. 왜냐하면 어떤 기회들을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을 어떤 형태로 고착시키느냐에 대한 기회 같은 것 말이다.
그는 어떤 생각을 했다. 외경해야할 것은 그녀였다. 완벽했던 그녀. 웃는 모습이 모든 선하고 옳은 것들의 상징인 듯 보였던 그녀. 현태의 일그러진 정신과는 정반대로, 가장 온전하고 수학적인 정신의 소유자였던 그녀. 어떻게 그러한 인간이 태어날 수 있었는지 현태로서는 늘 경외할 따름이었다.
“하하!” 현태가 웃었다. 그는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그는 공포를 극복했다. 어떤 끔찍한 사건이 그에게 덮쳐온다고 하더라도 그에게는 견딜 준비가 되어있었다. 이성조차 그의 편이었다. 그는 무작위하게 떨어지는 불평등을 웃어넘길 자신이 있었다. 세상이 얼마나 부조리하게 돌아가든 그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그는 그 부조리를 받아들이고, 심지어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세상이 돌아가는 혹독한 꼴을 즐길 수도 있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든 그것은 전부 유쾌한 일이리라고, 현태는 웃으면서 생각했다.
현태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서 화실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불합리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가 처음부터 인간의 편에서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일들은 인간의 사유와, 사상과, 양심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벌어진다. 그것은 그야말로 아노미 그 자체다. 그렇다면 인간은…… 그 아노미를 받아들이던지 아니면 보잘 것 없는 양심으로 끝까지 그것에 대항하면서 아침 이슬처럼 덧없이 사라지던지 둘 중 하나를 고를 수밖에 없다. 인간이란 엄청난 사고의 에너지를 담고 있지만, 우주의 무작위성에 비하면 그것은 개미 새끼의 발악과도 다를 것이 없다. 빗방울은 쏟아지고, 심술궂은 권력자의 무자비한 주먹이 그들 머리 위로 마구 떨어진다. 그것을 오히려 이용할 줄 알게 되면 오히려 세상의 작법이 유쾌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또…… 자신의 손으로 세상의 법칙 없는 혼돈을 가중한다면…….> 현태는 킬킬거리면서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즐거웠다. 모든 일이 그의 예상대로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예상이란, 아무런 규칙도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세상은 그야말로 그의 예상대로 흘렀다. 현태는 마른기침을 토하듯이 벽을 보고 마구 웃어댔다. 기쁨이 그의 내면에서 미쳐 날뛰고 있었다. 그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그는 좀도둑이나 회사원이 될 수도 있었고, 아니면 사회도덕의 정반대에 있는 그 무언가가 될 수도 있었다. 위대함은 무작위성에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이 너무 우스웠기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고, 마침내 벽에 머리를 박아대기 시작했다. 통증도 쾌락으로 느껴졌고 인생의 모든 가능성들이 반(反) 소시민적인 희망으로 느껴졌다. <우리에겐 희망이 넘친다.> 현태는 벽에 머리를 맞댄 채로 생각했다. 찝찔한 혈액이 입안으로 흘러내렸다.
<그렇고말고, 우리는 자유다. 완전한 자유야. 왜냐하면 오래 전에 그가 죽었기 때문이다. 나의 어머니는 나를 임신했을 때 배에 창을 박아 넣어 아직 태어나지도 못했던 나를 죽일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그 구속된 상태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나는 완전한 자유를 손에 넣은 것이다. 그녀는 어떨까? 그녀는 자신이 자유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 나는 광증의 끝에서, 세상에 아무런 규칙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규칙 따위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치명적인 자유는 미치광이에게만 느껴지는 것일까? 그 완벽한 정신의 소유자는, 그 아름다운 그녀는 자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사실 나는 그녀가 인간인지조차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내 머릿속에서, 망각과 환각 속에서 그녀는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라, 나에 대한 안티테제의 심벌이 되어버렸으니까. 더 이상 그녀의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아……. 그녀가 이름을 갖고 있기나 했을까? 나는 나의 이름을 알고 있다. 그것은 나를 별개의 것으로 만들고, 나의 광기를 특정화한다. 그것은 커뮤니케이션의 뿌리다. 마치 육체와 같이…… 분명 나의 이름에도 흠집이 수도 없이 새겨져있겠지.> 현태는 입안으로 흘러드는 피를 혀로 핥았다. <분명 나에게도 체계적인 과거가 있었겠지. 내가 기억하지 못하기는 하지만, 세계를 파악할 수 있다고 믿었던 때가 말이야. 누구나 그런 시절은 있기 마련이야. 왜냐하면…… 글쎄, 기억이 나질 않는군. 아마도 영혼이나 신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인 믿음 때문이겠지. 하지만 눈이 잘 보이는 사람들은 결국 자신 앞에 보이던 세계가 일종의 암막이었음을 깨닫게 돼. 그리고 어떤 암담한 하루가 지나고 나면, 그 암막을 찢어버리는 거지. 그러면 비가 내리는 오물투성이 도시가 보이고……> 현태는 벽에서 머리를 떼었다. 그리고 웃는 얼굴로 두 손을 마주 잡은 채 창가로 다가갔다. 밝은 햇살이 그의 얼굴 위로 무자비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마치 현태가 무슨 짓을 해도 반드시 해가 떠오른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하듯 말이다. 그는 창가에서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우울증과 절망 끝에 미쳐버릴 듯한 자유와 축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지.”
현태는 자신이 평소보다 흥분해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기대 때문이었고 희열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닦았다. 손에 피가 묻었다. 그는 그것을 바지자락에 닦아버렸다.
그는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리고 화실 구석으로 가서 잡동사니 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얼마 뒤에 현태는 찾던 것을 찾아냈는데, 그것은 패널 따위를 자를 때 쓰는 짧고 날카로운 단도였다. 그는 주변에 있던 신문지로 그것을 감싼 후에 자신의 바지 뒷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그는 조금 안심했다. 봄의 햇살이 그의 마음을 가라앉혔고 심지어 나른하게 만들었다. 현태는 이젤 앞으로 가서 의자에 앉았다. 평온한 기분이 그의 가슴 속에서 넘실거렸다. 모든 일이 다 잘 될 것이었다. 그렇다. 모든 일이 다 잘 될 것이었다. 그는 반쯤 감은 눈으로 자신의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림은 완성되어 있었다. 그 그림의 푸른 바탕색 속에는 과거의 편린처럼 화이트 노이즈가 가득 담겨 지지직거리고 있었고, 윤곽뿐인 사람은 검푸른 나무 밑에 서서 표정 없는 얼굴로 보랏빛 시냇물을 빠질 듯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밤하늘에는 별들이 생기를 잃은 눈동자처럼 빛나고 있었다. 현태는 만족했다. 그것은 이제 과거였다.
영운이 돌아왔다. 현태는 의자에 앉은 채로 막 화실에 들어서고 있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일찍 왔군.” 현태가 말했다.
“아니, 평소대로 왔는데.”
현태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네 시 삼십 분 가량. 그는 벌써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군.” <내가 그동안 계속 그림만 그린 것인가?> 현태가 생각했다. 그림을 그리는 데에 시간을 쓴 것인지 혼잣말하고 흥분하는 데에 시간을 쓴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영운은 가방을 내려놓더니 터덜터덜 현태 옆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그는 이젤에 걸린 그림을 보았다. “보아하니 다 끝난 것 같군.”
“그래.” 현태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제목은 뭐로 할 거야?” 영운이 물었다.
“제목? 글쎄, 모르겠어…… <나무와 시내가 있는 풍경> 같은 건 어떨까.”
“괜찮은데. 내키는 대로 해.” 영운은 그림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쁘지 않군.”
“그래? 그거 잘 됐네.” 현태는 무덤덤하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뒷주머니에 쑤셔 넣은 칼이 보이지 않도록 조심하며 이젤 건너편으로 가서 섰다.
“너 이마는 왜 그래?” 영운이 현태를 보더니 말했다. 그는 현태의 이마에 난 상처와 멍 자국을 말하는 것이었다.
“아, 이거.” 현태가 손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 “별 거 아냐.”
“나 참, 머리도 잘라주고 옷까지 사줬는데, 중요한 얼굴을 망쳐놨군. 어쩔 거야?” 영운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됐어. 토요일까지는 낫겠지.”
그럴 리가 있나. 영운은 속으로 말하며 혀를 찼다. 현태는 도무지 안심할 수가 없는 야생동물이었지만, 그래도 그림은 괜찮군. 영운은 다시 그림으로 시선을 옮기면서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어딘가에 출품할 수도 없지. 현태 자신에게 그런 마음이 없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그림의 성질 자체가 말이야. 늙고 가족이 있는, 그러한 심사위원이나 기성 화가들은 절대로 이 그림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현태의 그림은 어느 것이던 간에 보는 사람을 다소간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딱히 그가 그리는 그림의 형식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태의 형식은 매우 클래식하고 고전적이다. 그의 인간성을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이지. 하지만 색상 선택, 선의 흔들림, 구도라든가 모든 것이…… 간단하게 말하자면 기분이 나쁘다. 마치 보는 사람의 《양심》을 위협하는 것처럼.>
영운은 현태에게 있어 훌륭한 비평가였다. 비록 영운이 현태에게 자신의 감상을 늘어놓거나 비평을 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영운은 늘 훌륭하게 현태의 그림을 <파악>했다. 만약 그가 현태의 과거를 전부 알고 있었다면, 그의 분석력은 더욱 능동적으로 발동하여 현태라는 인간 자체를 거의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현태의 과거는 현태 자신에게조차 모르는 것이었다. 그것은 반쯤은 자연적으로, 나머지 반쯤은 인위적으로 지워져있었다. 현태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는 나른했고, 즐거웠으며, 피곤했고, 또 유쾌했다. 그에게 남은 것은 현재의 감정밖에 없었다. 현태의 허리를 잘라내면 그 단면에는 나이테가 있어서,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분석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허황된 생각이었고 이제 그의 과거는 완전한 망각 너머에 있었다.
현태는 은근한 미소를 지으면서 화실 안을 느린 발걸음으로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영운은 현태가 앉아있던 의자에 앉았다. 영운은 바쁜 사람이었지만 늘 현태에게는 관대하게 시간을 투자했다. 현태를 관찰하는 일은 늘 그에게 어떤 감명을 주었다. 시계를 분해하면 어떤 톱니바퀴가 초침을 돌리는 것인지 알 수 있는 것처럼, 현태라는 인간은 너무도 복잡하고 동시에 단순해서 관찰하면 인간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분명한 것은 영운에게 있어 현태가 흥미로운 인간이라는 것이었다. 그도 현태가 늘 자해를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었다. 그의 상처를 확인하거나 벗은 몸을 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늘 어딘가 다쳐있기 마련이었고, 그의 마음속에 파괴적인 에너지가 넘실거린다는 것은 며칠만 현태와 지내봐도 알 수 있었다.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그가 <미쳤다는> 것.
“오늘은 뭘 할 거야? 이제부터 뭘 할 거지?” 현태가 갑자기 영운을 돌아보면서 물었다.
“글쎄, 사실은 네 상태를 좀 확인하고 집으로 가려고 했어. 과제가 있거든. 하지만 너, 분명히 밥을 안 먹었을 것 같아서 말이야.”
“그래, 그러고 보니 오늘은 아무 것도 안 먹었군.” 현태는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영운이 말을 꺼내기 전까지, 그는 자신이 식사를 해야 한다는 것조차 완전히 잊고 있었다. 배도 고프지 않았고, 마치 자신에게 위장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럴 줄 알았지. 그래서 널 데리고 밥을 먹으러 가려고.” 영운이 말했다.
“하지만 애매한 시각인데.” 현태가 다시금 자신의 손목시계를 확인하면서 말했다.
“상관없어. 나도 점심을 부실하게 먹었으니까. 너랑 같이 먹으려고 했지. 나가자고. 오늘도 육식을 할 기분이 아닌가?” 영운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물었다.
“아니, 오늘은 뭐든지 먹을 수 있을 것 같군. 날뛰는 소도 산 채로 잡아먹을 수 있을 것 같아.” 현태가 입이 찢어지도록 웃으면서 대답했다. 영운은 그의 과장된 말에 픽하고 웃어보였다.
그들은 식사를 하러 나갔다. 물론, 돈은 영운이 지불했다.
저녁에 소연이 찾아왔다. 영운은 돌아가고 없었고, 현태 혼자 화실에 앉아서 창문 밖을 보면서 낙서를 하듯이 크로키를 하는 중이었다. 현태는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소연을 보고도 신경질적으로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문을 들어서는 소연을 힐끗 보더니, 다시 종이에 연필 선을 긋는 것이었다.
“오늘은 괜찮아 보이네요. 아저씨.” 소연이 발랄하게 말했다.
“무슨 소리야?” 현태는 그녀를 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어제는 완전히 넋이 나가 있었잖아요. 살아있는 사람 같지도 않았어요.”
“아, 그랬지. 그땐 내가 피곤했거든.” 현태가 별 것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오늘도 그림 보러 왔냐?”
“그것도 있고.” 소연이 말했다. “어제는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얘기도 못 했잖아요.”
현태가 피식 웃었다. “너랑 무슨 얘기를 해?” 그는 여전히 소연에게 등을 돌린 채로 앉아있었고 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면서 연필을 놀리고 있었다. 그는 정말로 소연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현태에게 상당한 흥미를 갖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런 것은 현태가 알 바가 아니었다. 활발하고 행동력 좋은 계집애는 현태의 관심대상이 아니었다. 소연도 그것을 눈치 채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계속 현태를 만나러 왔다. 소연이 현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지는 자세히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영운과 비슷한 감정일지도 몰랐다. 희귀한 인간에 대한 호기심 말이다. 아니면 그저 단순히 그의 그림이 마음에 들어서, 그 그림의 작자와 아는 사이가 되고 싶다는 욕구 때문일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라면, 혹시 모르지 않는가? 그녀가 어렸을 때 그녀의 아버지가 죽었는데 현태가 그 아버지와 닮았을 수도 있는 법이었다. 물론 이런 것은 전부 공상에 지나지 않지만 말이다. 사실 소연의 아버지는 멀쩡하게 살아있었고 고등학생 딸을 둔 것 치고는 젊었으며, 건강했고 건실한 회사원이었다. 뭐 그런 것은 이야기와 아무 상관없는 것이지만 말이다.
소연은 대답하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현태에게 물었다.
“전에 그리던 그림은 어디 갔어요?”
“어떤 그림?” 현태가 되물었다.
“그 푸른색 풍경화 말이에요.”
“아, 그거. 저기, 화실 구석에 있어. 내 그림들 쌓여있는 곳…… 아마 맨 오른쪽에 있을 거야.” 현태가 심드렁하게 설명했다.
소연은 현태가 말한 곳으로 걸어가서 쌓여있는 캔버스들을 뒤지더니 그림을 하나 꺼내들었다. 현태가 <나무와 시내가 있는 풍경>으로 명명한 그 그림이었다.
“완성하자마자 구석에 처박아둔 거예요?” 소연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물었다.
“안 그러면 어떻게 하라고.”
“주변 사람들한테 보여준다던가, 화상한테 팔수도 있잖아요.”
“내 그림을 살 사람이 어디 있어.” 현태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팔릴 것 같은데.” 소연이 그림을 보면서 말했다.
“그럼 네가 사던가.” 현태가 혀를 차면서 말했다. 그는 이미 말했다시피 완성한 그림에 대해서는 아무런 애착도 없었고, 빨리 다음 그림을 그리고자하는 욕구뿐이었다. 그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생명줄이 끊어질 때까지 붙잡고 있다가, 그것이 낡아서 끊어지면 다른 줄로 넘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그림이 재산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해보지도 못했다. 고로 그는 화상들과도 면식이 없었고, 현태의 그림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영운과 그의 아버지, 그리고 소연 정도 밖에 없었다.
“난 돈이 없어요.” 소연이 말했다.
“담배 한 개비에 주마.” 현태가 실실거리면서 대답했다. 그는 이제 몸을 돌려서 소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이에요?”
“그래. 쌓아둬 봤자 나중에 버리거나 영운이 가져가기 밖에 더 하겠어?”
소연은 한동안 그림을 들고 가만히 서있었다. 현태가 그토록 완성된 자신의 그림에 애착이 없다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놀라운 일이었다. 소연은 자신이 그림을 그릴 때에 쏟아 붓는 애정만큼이나 자신의 그림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현태를 이해할 수 없었다. 현태를 이해하려면 그에게 있어 미술이라는 것이 예술이나 창작활동이 아니라 숨을 쉬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점을 알아야 했다. 아무도 내뱉어버린 공기를 아까워하지 않는 법이다. 그는 살아있는 짐승의 심장이 박동하는 것처럼, 단순히 살기 위해, 어쩌면 무의식적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만큼, 그렇게 그림을 그렸다. 소연은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입을 열었다.
“아녜요. 무슨 작품이든 마땅한 가격에 팔려야 하는 법이예요.”
“아, 그래.” 현태는 같잖다는 듯이 내뱉었다.
“나중에 내가 돈이 생기면 사러 올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함부로 버리지 말아요. 그리고…… 담배는 그냥 드리겠어요.” 소연이 그림을 내려놓고 현태에게 다가오면서 말했다.
현태는 한 손을 소연을 향해 내밀었다. 소연은 주머니에서 담뱃갑과 라이터를 꺼내더니, 담배 한 개비를 빼내서 현태에게 라이터와 함께 넘겨줬다. 현태는 받아들자마자 그것을 입에 물고 불을 댕겼다.
현태로서는 소연의 진지함이 우스울 뿐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진지해야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평소에도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 일종의 현상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하는 남자였다. 흘러가는 구름이나, 갑자기 부는 바람이나, 태풍이나 혹은 지진 같은 돌연하고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자연현상 말이다. 그것이 그의 바람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단 말인가? 현태의 꿈은 헛된 것이었고, 다만 그는 최대한 아무런 가치도 믿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현태는 그때 자신의 뒷주머니에 단도가 들어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는 그것이 아직 얌전히 잠들어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꺼내서 감싼 신문지를 펼쳤다. 단도는 여전히 날이 번쩍이고 있었고 잠든 사자의 이빨처럼 날카로웠다. 그는 그것을 조금 쳐다보다가 손잡이를 잡고 흔들어본 뒤, 다시 신문지로 감쌌다.
“그 칼은 뭐예요?” 소연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 것도 아냐. 네가 알아서 어쩔 건데?” 현태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아저씨가 칼을 소지하고 다닌다는 게 불안해 보이는데요.”
“신경질적으로 생각하지 마. 내 기억 속에 항상 함께 있는 것이 단도와 나이프였으니까.”
소연은 입을 다물었다. 현태는 웃었다. 그는 갑자기 아무런 이유도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서 그는 신문지로 감싼 단도를 다시 뒷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몇 번이나 말한 것이지만 그는 기분이 좋았고 운명이 자신의 생각대로 흘러가고 있다고―그것은 굉장히 놀랄만한 일이었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소연을 보았다. 아, 저런 당찬 소녀라니. 분명 그녀의 세계와 현태의 세계는 모든 것이 달랐다. 세상의 구도부터 시작해서, 공간의 깊이를 만드는 색깔까지 모든 것이. 그래서 현태는 또 웃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현태와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 <나에게는 광증이 필요해. 그것은 필요조건이지. 내가 하고자 하는 모든 행위들에 대한 필요조건. 내가 양심을 해체하기 위해서 지난 십 수 년간 얼마나 노력해왔던가? 그것은 다소 광기의 덕을 보기도 했다. 광기야말로 양심을 해체하는 일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것들 중 하나지.> 현태는 맥락 없이 생각하며 싱글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소연에게 말을 걸었다.
“너는 왜 그림을 그리지?”
“그림을 좋아하니까요.” 소연이 대답했다.
“그게 전부야?”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 즐거우니까.”
“즐겁다. 그거 좋지. 모든 일은 즐거운 것이 좋아. 쾌락이야말로 인간이 탐할 수 있는 유일한 삶의 단맛이니까.” 현태가 여전히 웃으면서 말했다.
“아저씨는 왜 그림을 그리는데요?” 소연이 순진하게 물었다.
“나도 그림을 그리는 게 즐거우니까. 그림을 그린다는 일 자체는 굉장히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지. 나의 모든 광기와 관념을 억제하고 붓질 하나하나에 온 정신을 집중해야하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거워. 그 괴로움이 즐거운 거야. 내가 아직 살아있어도 된다는 기분이 들게 만들거든.” 현태가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소연에게 이렇게 길게 말한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았다. 그것은 단순히 지금 그가 기분이 좋기 때문일 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림이 내 본성을 대체할 수는 없어. 그림은 그냥, 내가 간신히 사람 꼴을 유지하도록 만들어주는 일종의 일상적 억제제인 것이나 마찬가지지…….”
늘 그렇듯이, 현태는 자신의 말을 듣는 사람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의 <설명>은 자기 자신의 사유를 더욱 체계화시키기 위한, 자기 자신에 대한 논증이나 마찬가지였다. 소연이 그의 말을 얼마큼이나 이해하고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절반 정도는 이해했겠지. 그는 그렇게 가볍게 생각했다.
“내가 칼을 갖고 있다는 것을 영운에게는 이야기하지 마. 그 녀석은 또 온갖 상상을 부풀리면서 내게서 칼을 빼앗아가려고 할 테니까.” 현태가 덧붙이듯이 당부했다.
“알았어요.” 소연은 그때까지 들고 있던 그림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소연이 간단하게 수긍하는 것을 보고 현태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자신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상처가 아팠다. 그러나 문제는 벗겨진 표피가 아니라, 그의 내부에서 출렁거리고 있는 미스터리였다. 그는 지금 어떤 음악을 듣고 있었다. 음악소리가 그의 주변을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 음악소리는 오히려 현태의 내부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 소리를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는데. 뭐였더라. 그래, 아마도 그 밴드였어. 비치 보이즈였던가…….> 그러나 아무런 음악소리도 흐르지 않고 있었다. 현태가 듣는 것은 왜곡된 통증이었다. 소연은 머리를 붙잡고 빙글빙글 돌고 있는 현태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왜 그래요?” 소연이 물었다.
“아니, 어디서 동물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리는데…….” 현태가 혼란한 채로 대답했다.
“난 아무 것도 안 들리는데요.”
“어쩌면 오늘 너무 오래 깨어있었던 걸지도 몰라…… 내가 피곤하다는 증거일 거야.” 현태는 한숨을 내쉬면서 발을 멈췄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괴상한 멜로디와 동물 울음소리 따위가 울리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고 느꼈다……. “아아아!”
느닷없이 현태가 괴성을 지르는 바람에 소연은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현태에게 왜 그러냐고 묻고 싶었지만 오만상을 찌푸린 현태의 표정을 보면 무슨 말을 하든 들을 것 같지도 않았다.
“제기랄! 머리가 아파! 머리가 아프다고!” 현태가 잔뜩 성이 난 채로 눈을 감고 외쳤다. 그는 두 손으로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었다.
소연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고 있었다. 현태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리면서 화실 안을 맴돌고 있었고, 여전히 입술 사이로는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소연은 그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녀가 현태를 황망한 눈으로 바라만 보고 있을 때, 현태는 갑자기 소연을 향해 분노가 섞인 소리를 질렀다.
“나가!”
그것은 증오와 혐오가 가득한 노성이었다. 왜 현태가 그렇게 화가 나 있는지 소연으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그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다는 점은 잘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거의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현태는 분명히 화가 나 있었고, 머릿속의 고통과 파도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나가>라고 말했다. 소연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현태를 바라보며 슬금슬금 화실 문 쪽으로 향했다.
“나가라고!” 현태가 더욱 크게 외쳤다. 소연을 노려보는 그의 눈은 석유에 불을 붙인 것 같았고 온통 핏발이 서있었다. 소연은 마침내 화실 밖으로 나가서 문을 닫았다. 그러나 그대로 도망치지는 않고, 문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가만히 엿듣고 있었다.
소연이 나가자 현태는 자신의 머리를 붙잡고 그르렁거렸다. 그는 분노로 가득 차있었고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망할 자식! 또 방해질이야! 오랜만에 내 생각대로 일이 풀려간다고 생각했는데, 네놈은 언제나 그렇지!” 현태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 소리 질렀다. 그가 누구에게 말하는 것인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다만 그는 굉장히 화가 나있었고, 현재의 상태에 대해 불만이 가득했다. 현태는 성큼성큼 창가 쪽으로 걸어가더니, 몇 시간 동안 그려온 수 십 장의 크로키를 들고 발기발기 찢기 시작했다. 그리고 창문을 활짝 열고, 온통 조각난 종이들을 밖으로 흩뿌리며 외쳤다. “네가 바라는 게 이런 거지? 그렇지?” 그의 얼굴은 일그러진 채로 웃고 있었다. 현태는 계속 머리에 극심한 고통을 느꼈고, 자신을 방해하는 <그>에게 욕지거리를 하면서 일종의 이상한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신음을 흘리면서 화실 구석으로 걸어갔고, 그곳에 쌓여있는 자신의 그림들을 힘껏 걷어찼다.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네놈 방식대로 말이야! 내가 아무것도 통제하지 못하도록! 하지만 두고 보라고……” 그러면서 그는 뒷주머니에서 단도를 꺼내 신문지를 벗긴 뒤에 허공에 대고 마구 흔들어댔다. “나한테는 칼이 있어! 적어도 이번만큼은 내 생각대로 해결할 거란 말이다! 하! 하!”
현태가 이러한 일련의 미친 짓을 하면서 내는 소음들을 소연은 문밖에서 전부 듣고 있었다. 그녀는 놀라움과 공포 때문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현태가 그렇게까지 발광하는 것을 본 것은 그녀로서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 인생은 내 거야! 난 자유라고!” 또 한 번의 외침이 문 안쪽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뭔가가 부서지고, 또 무너지는 굉음이 들렸다. 현태가 안에서 가구 따위를 상대로 난동을 부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소연은 어떻게 생각해야할지 난감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이기는 했지만, 현태는 미쳐있었다. 그러나 그의 상태를 <미쳤다>는 단순한 어휘로 표현해도 되는 것일까? 그에게는 혼란한 감정이 있었고 왜곡된 신념이 있었으며 파괴적인 욕망이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어떤 믿음이, 그리고 분노가 있었다. 또한 그에게는 유쾌함도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반죽처럼 뒤엉켜서 하나의 혼돈을, 현태라는 인격을 형성하고 있었다. 소연으로서는 그를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녀는 현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절대로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7. 행동주의에 대하여
한 차례의 광란이 있은 후, 현태는 오히려 굉장히 얌전해졌다. 다음날 영운이 화실에 왔을 때, 그는 엉망이 된 화실 꼴을 보고 놀랐으나 현태에게 책임을 묻지는 않았다. 사실 간간히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현태의 파괴적인 욕망은 주로 바깥으로 나타나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향해있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그는 무언가를 부수는 일도 제대로 할 줄 몰랐다. 영운은 현태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고 물어봤지만 제대로 된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물론 현태도 구체적인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도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항상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내면에는 이성이 따라갈 수 없는 난해하고 복잡한 관념의 덩어리가 있어서, 그것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다보면 무엇 때문에 그러한 행위가 나타난 것인지 잘 알 수 없는 일이 많았다. 물론, 사후에 이성을 이용하여 그것들을 분석해볼 수는 있었다. 현태의 기저에 깔려있는 믿음들이나, 감정에 대한 이해를 사용해서 말이다. 그러나 현태는 굳이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이성이라는 것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감각보다도 뒤떨어져있었고, 광기를 앞설 수도 없는 것이었다. 현태는 감각적이며 순간적인 인간이었고, 체계성을 믿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감정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달군 냄비와 같아서, 한 차례 발산하고 나면 거짓이었다는 듯이 식어버리는 것이었다.
아무튼 그는 의례적으로 영운에게, 조용한 목소리로 화실을 망쳐놔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영운은 현태가 그렇게 순순히 사과하는 것을 보고 의아한 생각이 들었으나, 사실 그는 현태의 본성적인 <얌전함>에 대해서는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화실을 정리하고 부서진 물건들을 소각장에 내다버렸다. 영운은 현태의 그림 몇 점이 전혀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되었다는 점에 대해서 크게 낙심했다. 그러나 현태는 항상 그렇듯 아무 생각도 없었다. 다행인 것은 바로 전날 완성한 <나무와 시내가 있는 풍경>은 소연이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덕분에 현태의 주먹과 발길질을 피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영운은 더 이상 현태에게 잘못을 묻지 않았고, 현태도 아무런 죄책감 없이 그 일을 약 한 시간 만에 잊어버렸다. 그들은 평소처럼 그곳에서 그림을 그렸고, 현태는 주로 스케치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그림을 그릴 때 그의 집중력이란 무서운 것이어서 하루 종일 화실에 앉아서 현태는 수십 장도 넘는 스케치들을 그려내곤 했다. 그가 그림을 그리러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에 의문을 가질 사람도 있을 텐데,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바깥에서 현태는 도무지 안심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감정을 안정시키면서 그림을 그릴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주로 기억에 의존해서 그림을 그렸다. 그 방식에 대해서 미학적인 비판을 가하는 사람도 충분히 있을 수 있으나, 적어도 현태의 주변엔 없었다. 아무튼 그래서 현태의 그림은 거의 대분이 고전적인 풍경화나 정물화였지만, 동시에 추상화이기도 했다. 가끔씩 그의 이해할 수 없는 모순의 관념들이 붓 끝에서 드러나 그림의 어떤 부분을 초현실주의적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현태는 자신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미술사조들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그것들을 인지하려고 들지도 않았다.
저녁마다 소연이 찾아왔다. 현태가 이따금 발광한다는 것을 알고서도 그녀가 여전히 찾아온다는 것은 꽤 놀라운 일이었다. 소연은 뱃심이 있는 아이였고 자신이 흥미를 가진 대상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애착을 보이는 타입이었다. 현태는 그날 동물 울음소리를 들은 후로 소연의 얼굴을 보는 것이 다소 껄끄러웠지만,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소연에 대한 그의 태도는 여전히 담담하고 무관심한 것이었다. 소연은 화실에 오면 늘 그랬듯이 현태에게 담배를 주고, 그가 그날 그린 스케치들을 훑어보곤 했다. 현태는 소연이 그러든 말든 별다른 관심도 없었지만 질리지도 않고 계속 찾아오는 이유에 호기심을 느끼기는 했다. 자신의 그림이 타인에게 흥미의 대상이 된다는 것도 그로서는 꽤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아무튼 시간은 그렇게 흘러가 금요일 저녁이 되었고, 현태는 소연에게 받은 담배를 피우면서 무색조의 눈동자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연은 이미 돌아가고 없었다. 다만 그날은 영운이 늦은 시간까지 화실에 남아서 현태와 함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담배를 다 피운 현태는 꽁초를 창문 밖으로 집어던진 뒤에 기지개를 켜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태가 그러는 것을 영운은 아무 감상도 없이 그저 보고 있을 뿐이었다.
“가야겠어.” 현태가 말했다.
“그래.” 영운이 연필을 쥔 채로 대답했다.
“내일이지?” 현태가 물었다.
“맞아. 내일이야. 잘 기억하고 있군.”
“어디로 가면 돼? 몇 시까지지?” 현태가 연이어 물었다.
“그냥 내일 오후 네 시까지 화실에 있어. 내가 데리러 올 테니까. 넌 교통비도 없으니까 내가 약속장소까지 데리고 가야 하잖아.” 영운이 현태의 얼굴을 올려다보면서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래…… 맞아.” 현태는 여전히 창밖에 눈을 둔 채로 대답했다.
해가 진 거리는 남색 어둠과 노란 조명이 뒤섞여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현태는 피곤한 눈으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는데, 밖이 어두웠기 때문에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도 겹쳐보였다. 어느새 그의 시선은 창문 밖이 아니라 창문에 비친 자신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일들이 바로 내일을 위해 준비되어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가슴 속에서 피어오르는 기대감과 희열이 불꽃의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그러나 현태는 더 이상 흥분해있지 않았고, 겉보기에는 차분해보였다. 아마 근 몇 개월 사이에서는 지금의 현태가 가장 정상인처럼 보일 것이다. 그의 얼굴에는 구역질이나 조소가 달라붙어있지도 않았고, 눈동자는 녹이 섞인 물처럼 침착하게 가라앉아있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현태는 충분히 바빴다. 그는 원래 계획적인 인간이 아니었지만,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늘 다소의 계획은 필요한 법이었다. 현태는 창문에 비치는, 슬며시 웃고 있는 자신을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해?” 영운이 물었다.
“나도 잘 몰라.” 현태가 대답했다. 그는 정직했다. 그러면서 현태는 웃는 얼굴로 영운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모든 게 다 잘 될 거야. 그렇지?”
영운은 현태의 말에 어리둥절했으나, 무어라고든 대답을 해야 했다. “그래…… 아마도.” 영운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현태는 왜 갑자기 일반인의 흉내를 내기 시작했을까? 무엇을 목적으로 그런 짓을 하는가 말이다. 왜 그는 순순히 머리를 깎고 새 옷을 입었을까. 누구를 속이려고? 현태에게 어떤 계획이 있다는 것은 분명해보였다. 그러나 그것이 비열한 음모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애당초 그의 본성 자체가 불분명했다. 현태와 가장 가까운 사이인 영운조차 현태의 광기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알지 못했다. 현태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진짜 얼굴을 영운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어쩌면, 현태 자신도 <진짜 얼굴>이라는 것이 자신에게 있는지 아닌지 모를 수도 있었다. 이미 말했다시피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지력이 그다지 대단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관심도 없었고 말이다. 그리고 사실, 그 누가 자기 자신의 진짜 얼굴을 알 수 있겠는가? 그러나 현태의 경우는 일반인들과 조금 달랐다. 보통 사람들은 복잡하고 난해한 사회생활 속에서 너무 많은 페르소나를 생산하는 바람에 본성이 혼돈 속에 묻혀버리고 마는 것이지만, 현태의 경우에는 본성이 광기 속을 헤매다가 그 늪에 녹아들어 너무 광범위해진 것이었다. <우리는 자신이 이런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있다>고 했던 까뮈의 말은 옳았다. 현태는 그 어떤 사람도 아니었으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몰랐다. 그는 자신의 참된 얼굴이 어디로 흘러가버렸는지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덕분에 그는 이제 보다 복잡한 욕망과 충동의 덩어리에 지나지 않았으며, 살아있는 불안이나 마찬가지였다.
“혹시 긴장하고 있어?” 영운이 현태에게 물었다.
“조금은 그럴지도 몰라. 왜냐하면 이런 가면을 쓰고 아는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은 처음이니까.” 현태가 천천히 늘어지는 어조로 대답했다.
“가면이라!” 영운이 과장되게 반응했다.
“그래…… 가면. 하지만 가면도 엄연한 얼굴이야…….” 현태가 혼잣말을 하듯이 읊조렸다.
“그 친구들은 여전히 널 알아볼 거야. 넌 정말이지 잊을 수가 없으니까.”
“하!” 현태가 비웃듯이 내뱉었다. 그는 그런 것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현태의 기억으로는, 옛날에 그의 아버지가 이렇게 말한 일이 있었다. 남들에 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지에 대해 고민하지 말라고. 현태는 그 충고를 훌륭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는 그 누구보다도 기억에 잘 남는 인물이 되었다.
“아무튼 가야겠어. 내일을 위해 잠을 자둬야지.” 현태가 그렇게 말하며 문 쪽으로 향했다. “먼저 간다.”
“잠깐, 나도 나가지. 같이 가자고.” 영운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현태는 아무 말도 않고 문 앞에 서서 영운이 짐을 정리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함께 나왔다. 영운이 화실 문을 잠갔다. 그들은 계단을 내려갔는데, 위층에서 학생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학생들인 것 같았다. 현태는 머리를 긁적이며 계단을 내려갔다. 영운은 그를 따라갔다.
밖으로 나오자 선선한 밤공기가 느껴졌다. 현태는 자신의 집을 향해 걸었다. 영운이 가야하는 방향은 다른 방향이었지만, 그는 현태를 따라 걸었다. 왜냐하면 현태의 모습을 좀 더 자세히 봐둬야겠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왜인지는 몰랐다. 아무튼 오늘의 현태는 뭔가가 달랐다. 어떤 차분한 결의 같은 것이 그의 광증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듯이 보였다. 현태는 언제나처럼 비척거리며 걸었지만, 그의 눈은 평소처럼 땅바닥에 박혀있지는 않았다. 그는 가늘게 뜬 눈동자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곁눈질하고 있었다. 마치 그 얼굴들 속에서 어떤 암시를 찾아내려는 듯이 말이다.
“왜 동창회에 나갈 생각을 했지?” 영운이 현태의 곁을 걸으면서 물었다.
“왜? 왜냐고? 글쎄…… 아마 과거를 이용하여 현재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겠지.” 현태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해결해? 무엇을?”
“내 인생 전부를.” 그러면서 그는 웃었다.
영운도 따라 웃었다. 그러나 그는 현태가 왜 웃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같이 웃을 따름이었다.
얼마 뒤에 그들은 어떤 골목 앞에서 헤어졌다. 영운은 왔던 길을 되돌아갔고, 현태는 자신의 작은 방을 향해 걸었다. 그는 피로를 느꼈다. 그러나 유쾌한 피로였다. <내일 그녀를 만날 것이다. 그리고 무엇이든 간에, 결판이 날 것이다.> 현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바지 뒷주머니에 꽂힌 단도를 쓰다듬어보았다.
그는 자신의 <관짝>으로 들어가서 옷을 벗고 잠이 들었다. 세상은 죽은 듯이 고요하고 새까맸다. 마치 폭풍이 일어나기 전처럼 말이다.
현태는 어둠 속에서 슬며시 눈을 떴다.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눈을 뜨나 감으나 그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것은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매일 아침마다 현태는 그런 새까만 공기 속에서 눈을 떴다. 그리고 그의 정신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 둥지 속에서 천천히 깨어나는 것이다. 그는 머릿속으로 무언가를 정리하기 시작한다. 그가 누구였는지부터 시작해서, 지금이 언제인지까지 말이다. 그래서 아침에는 늘 죽음이 그리운 법이다. 망각의 수면 밖으로 얼굴을 내밀면 끔찍한 과거들이 폭력적인 햇살처럼 피부를 찌르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태는 웃었다. 그는 누운 채로 소리 내어 흐흐거리고 웃었다. 왜냐하면 오늘이 어떤 날인지 그가 기억해냈기 때문이다. 현태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손을 뻗어 더듬거리며 형광등 스위치를 찾았다.
형광등 불빛이 불안하게 흔들리며 불이 켜지고, 현태는 앉은 채로 방구석에 서있는 거울을 보았다. 바지만 입은 채 더러운 이불 위에 앉아있는 자신이 보였다. 거울이 비치는 단색조의 이미지에서 현태는 더는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절대적인 절망을 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웃었다. 모든 것이 곧 끝날 것이었다. 가장 명쾌하고 단순한 대답은 그것이다. 끝난다는 것. 물론 무슨 일이든 간에 끝내는 것이 가장 어렵기는 하지만, <끝>이라는 것은 참으로 완전하고 좋은 것이다. 그보다 더 안정된 것이 무어 있겠는가? 그래서 현태는 이 더러운 아침시간이 유쾌했고, 그의 가슴팍에 새겨진 흉터들도 유쾌했으며, 서랍 속에 감금당한 이 세계도 유쾌했다. <모두에게 다 똑같이 주어진 자유 아닌가?> 현태가 히죽거리면서 생각했다. 그는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앞으로 갔다. 앙상하게 마른 몸이 길게 비쳐보였다. 그는 가늘게 뜬 자신의 눈을 보면서 머리를 긁적거렸다. 지금이 몇 시지? 현태는 책상 위에 너부러져있는 손목시계를 집어 들었다. 열두 시. <굉장히 오래 잤군! 오랜만에 잘 잤다는 느낌이 든다. 미래에 대한 아무런 불안도 없이, 잊어버려야할 과거도 없는 갓난아기처럼. 아, 하지만 그래도 잠을 자고 나면 잡스러운 피로가 남는단 말이야. 완전히 상쾌한 기분으로 깨어나 본 것이 언제 적 일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군. 왜냐하면 일어난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꿈속에서는 언제까지고 정신을 잃은 채로 지낼 수 있는데……. 그러나 오늘은 좋은 날이다. 드디어 내 현실까지도 꿈의 일부분이 되지 않겠는가? 흐흐!> 현태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책상 옆에 놓아두었던 종이봉투를 집어 올렸다. 그 안에는 잘 접힌 셔츠와 바지, 그리고 재킷이 들어있었다. 현태는 바지를 벗고 그것들을 입었다. 그리고 거울을 한 번 보았다. 별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영운은 괜찮다고 했다. 영운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벗은 바지 주머니를 뒤져 지폐와 동전을 꺼낸 뒤에 지금 입고 있는 바지 주머니에 넣었고,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신문지로 감싼 단도를 뒷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는 구두를 신고 밖으로 나왔다. 강렬한 햇빛이 얼굴 위에 쏟아져 내렸다. 요 며칠 사이에 가장 화창한 날이었다. 구름 한 점 없어서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 푸른 하늘이 머리 위에 드리우고 있었다. 현태는 하늘 언저리 어딘가에서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현태는 기가 죽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향해 코웃음을 치기까지 했다. 나는 당신이 뭐라고 하든 개의치 않을 거야. 그는 당돌하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현태는 거리로 나섰다.
우선 몸을 씻자는 생각이 들었다. 미용실에 간 날 이후로 단 한 번도 목욕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오늘 같은 날 목욕을 하지 않으면 언제 하겠는가? 그래서 그는 전에 갔던 목욕탕으로 향했다. 주머니에 얼마가 들어있는지는 확인하지 않았지만 사천 원은 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뭔지 모를 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전에도 카운터에 앉아있던 늙은이가 그곳에 있었다. 현태는 지폐를 몇 장 꺼내서 카운터 위에 올려놓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신발을 신발장에 넣고, 로커 열쇠를 하나 집어 들고 탈의실로 들어가서…… 옷을 벗고, 로커를 잠그고, 그리고 목욕탕에 들어섰다.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더욱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현태는 먼저 샤워를 하면서 며칠 간 몸에 쌓인 먼지와 기름기를 씻어낸 뒤에 탕에 들어갔다. 그가 첫 입욕자인지 물은 깨끗하고 맑았다. 현태는 한동안 목욕을 즐기다가 다시 샤워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는 바지와 셔츠를 걸치고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면서 거울을 보았다. 요새는 어디를 가나 거울이 있었다. 현태에게 그 자신의 모습을 각인시키기라도 하려는 듯이 말이다. <흠, 말하자면, 일종의 농간이지.> 그가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머리를 다 말린 뒤에 그는 빗질을 좀 하고, 옷을 마저 입고서 바깥으로 나왔다.
시계를 보니 한 시가 좀 넘어있었다. 당장 화실로 갈 수도 있었지만, 그는 무언가를 먹어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현태가 자발적으로 식사를 하기로 한 것이 도대체 얼마만인가? 하룻밤 사이에 그라는 인간이 환기되기라도 한 듯이, 현태의 몸은 능동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그는 주머니 속의 동전을 짤랑거리면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돈이 얼마가 남았지? 얼마 전에 영운에게 새로 받은 돈이 꽤 남아있을 것이었다. 지폐가 여섯 장 정도 있었다. 그는 그것을 세어본 후에 도로 주머니에 찔러 넣고, 화실을 향해 걷기 시작하면서 식당 따위를 찾았다. 뭔가 먹고 싶은 것이라도 있는가? 아니, 없다. 나는 아직 탐미를 할 정도로 성숙하지는 못했다. 나는 이제야 육체를 건축하는 데에 성공한 풋내기인 것이다. 당장 뱃속에 쑤셔 넣고 하루 동안 내 행동의 원동력이 되어줄 무언가가 필요할 뿐이다. 딱히 허기가 지는 것도 아니었다. 현태는 굶으면서 지내는 일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요즘 들어서는 음식이 인간의 생활에 꼭 필요한 것인가 하는 회의조차 느끼고 있을 지경인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무엇이든 먹어둬야만 했다. 왜냐하면 현태에게 있어서 오늘은 그 어느 날보다 힘이 절실한 날이었으니까. 그는 입맛을 다시면서 학원가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재킷 자락이 바람에 나부꼈고 봄바람은 푸근했다. 흐하하하. 현태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봐라, 이것도 농간이지. 나를 더욱 부추기고 있지 않은가?” 그는 킬킬거리면서 호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고 계속 걸었다. 길을 가다보니 작은 일식집이 보였다. 일식이라, 그래, 간단한 게 좋지. 그는 중얼거리면서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현태가 들어가자 종업원들이 그를 반겼다. 현태는 싱글거리며 어느 테이블 앞에 앉았다. 앞치마를 두른 30대 여자 종업원이 물과 메뉴판을 들고 현태가 앉은 테이블로 다가왔다. 그녀는 손에 든 것들을 현태 앞에 늘어놓더니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현태는 메뉴판을 좀 뒤적이더니 종업원을 불러서 고기 덮밥을 하나 시켰다. 그것이 가장 싸고, 또 먹기도 간단해 보였다. 종업원이 물러가고 음식을 기다리고 있을 적에, 현태는 통유리로 된 가게 정면을 내다보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살피고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다리를 꼰 채 위태로운 자세로 의자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무언가 이해하기 힘든 기분이 그의 행동을 대범하게 만들고 있었다. 현태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앞으로 그가 벌일 일들도 전부, 대범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유리 밖을 내다보면서 소리도 없이 입이 찢어지도록 웃었다. 그는 자신이 축복을 받은 것 같다고 느꼈다. 축복이란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인간이 가고자 하는 길을 환하게 비춰주는 빛인 것이다. 확실히 현태는 축복을 받고 있었다. 새빨간 입 꼬리를 말고 있는 광기에게 말이다. 그를 비추는 빛은 광기를 방해하는 것들의 목을 자르는 시퍼런 낫이었고, 통제 불능의 우연이었다.
곧 식사가 나왔다. 일본식 밥그릇에 밥과 고기, 계란 노른자, 그리고 소스 따위가 담겨있었다. 현태는 그것을 젓가락으로 휘휘 휘저은 뒤에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무언가를 <먹고 있다>는 사실마저도 기분이 좋았다. 틀림없이 그는 유쾌했다……. 그의 날이 선 웃음들이 자꾸만 입이나 눈구멍, 코, 귀 따위를 통해 바깥으로 기어 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들을 잘 붙잡아둬야만 했다. 왜냐하면, 글쎄, 무슨 극이든 하나의 클라이맥스가 있는 법이니까. 모든 장면을 클라이맥스로 만들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런 법칙을 언젠가 악마가 가르쳐준 일이 있다고, 현태는 기억했다.
현태는 순식간에 밥그릇을 비우고, 물을 한 잔 따라 마신 뒤에 <딱>하는 소리가 나도록 세게 물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는 값을 치루고 나왔다. 그는 은연중에 자신이 만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대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종업원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현태는 지폐를 건네면서 종업원에게 알게 모르게 웃음을 지어보였고, 그녀를 야비한 눈동자로 뜯어보았다. 그것은 일종의 호감의 표시였다. 현태는 지금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다 사랑할 수 있었다. 사랑? 아, 사랑이라! 그것은 굉장히 난해하고 포괄적인 단어라서 사용하기가 쉽지 않지만, 사랑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그래, 그는 분명히 이 엉망진창인 세계 전부를 사랑하고, 잔인무도하며 난잡하고 무지한 인간들도 모두 사랑했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그에게 칼이 있었기 때문에.
“흐음.” 가게 문 앞에 서서 현태가 나직하게 내뱉었다. 그는 주머니에 든 동전들을 짤랑거리면서 손장난을 치고 있었다. 화실로 갈까? 아니다. 몇 번이나 말하지만, 그는 기분이 좋았다. 오늘은 마치 새로 태어난 기분이었다. 이런 유쾌한 기분으로 어둑한 화실에나 처박혀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강가로 가기로 했다. 여기서 이십 분 정도만 걸으면 작은 강과 다리가 하나 나왔다. 어느 동네에나 있을 법한, 그런 개천. 현태는 구두소리를 내면서 거리를 성큼성큼 질러갔다. 당당하고 대담한 본새였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고 있는 음악은 묵직한 금속성의 로큰롤이었다. “왜냐하면, 프로그레시브니 아트 록이니 하는 것들만 듣다보면 우울증에 걸리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가 누군가에게 설명하는 것처럼 중얼댔다.
그는 개천에 도착해서 세 시가 넘을 때까지 강가에 앉아 있었다. 가끔 자갈을 집어 내에 던지기도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리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러는 내내 현태는 계속 싱글거리고 있었다. 이따금 참지 못하고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곧 그것들을 가라앉혀야만 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화실에 가자 영운이 기다리고 있었다. 영운은 화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현태를 바라보며 인사를 건넸다. 그날따라 영운은 옷매무세가 괜찮았다. 그도 동창들을 만나기 위해 신경을 써서 차려입은 것이다. 현태는 영운을 보고 히죽 웃어보였다. “좋아, 좋아. 지금이 몇 시지?” 현태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세 시 사십오 분이었다. “내가 늦지 않게 왔군.”
“그래, 좀 여유 있게 가자고.” 영운이 말했다.
현태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더듬으며 화실을 휘 둘러보았다. 지금까지 몇 년이나 이 구석진 곳에서 그림을 그려왔던가? 모든 것이 다 영운의 덕분이다. 내가 굶어 죽지 않은 것도, 겨울에 길거리에서 동사하지 않은 것도,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었던 것도…… 전부 말이다. <아, 그래서 물론 나는 영운에게 감사해야하지.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현태가 누군가에게 변명하듯이 중얼댔다. 그가 화실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것은 지금이 그의 인생에 있어서 어떤 심각한 변환점이 될 것 같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사람을―정확히 말하자면 완전히 새로운 사람은 아니었지만― 만나보는 것이 얼마만이던가? 요 몇 년간 그의 인간관계는 영운과 길 가는 사람들, 그리고 이제 얼굴조차 기억하지 않는 부모와의 혈연, 그런 것들뿐으로 매우 단순하고 변동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적극적으로 누군가와 관계를 만들려고 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현태의 습성과도 같은 것이었는데, 말하자면 그는 길 가는 행인들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를 건네면서 다가가 말을 걸 수는 있었지만, 역으로 그들이 자신에게 어떤 호의를 표시하기 시작하면 반사적으로 발을 뺐다. 그것은 신뢰의 문제라기보다는 차라리 경험주의적인 것이었다. 현태의 불행한 과거를 가져다가 그의 그러한 습성을 분석하는 일도 가능하겠지만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요점은 그가 매우 야트막한 개울만을 건넌다는 점이었다. 그는 깊은 강물에 몸을 담그는 위험은 감수하지 않았다. 영운은 예외였다. 이미 모두가 알다시피 영운과의 관계는 굉장히 기괴하고 모순이 많은 것이었고, 사실 그 안에 우정이 있는지 어떤지도 판별할 수가 없었다. 현태가 갖는 인간관계라는 것은 전부가 이런 것이었다. 그는 남들처럼 정통적인 방법으로 사람을 맞이할 줄 몰랐다. 그것이 또 그의 이상성이었다. 그 점에 대하여 그를 탓할 수도 있지만, 정작 현태 자신은 그러한 자신의 습성을 문제로 삼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 이 상태가 편했던 것이다. 안 그래도 난잡하고 혼란투성이인 그의 내면에 타인들까지 발을 딛기 시작한다면 더는 견딜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태는 고등학교 시절의 동창들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어떤 목적이 있었고 그를 위한 수단도 있었다. 그의 이상성 위에 건설된 야비한 페르소나가 있었다. <왜냐하면, 나를, 과거의 자신까지 통틀어서, 《확인》하는 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현태가 스스로 그렇게 다짐했다.
“그럼 출발할까.” 영운이 일어서며 말했다.
“어디로 가야 하는데? 얼마나 멀어?” 현태가 물었다.
“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이십 분 정도…… 별로 먼 거리는 아니지. 다들 도시에 살고 있으니까.” 영운이 답했다.
“아, 그렇군. 생각해보면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도 바로 옆 동네에 있었지.”
“그래.”
그러면서 그들은 화실을 나왔다. “점심은 먹었나?” 영운이 현태에게 물었다.
“물론이지.” 현태가 대답했다.
“그거 별일인데…….”
“기계를 잘 돌아가게 하려면 기름을 쳐줘야지. 그래야 만사가 다 제대로 풀리는 법이야.” 현태가 싱글거리면서 말했다. 그의 말대로, 육체뿐만이 아니라 정신도 음식을 원동력으로 작동하는 것이었다. 그는 평소에는 그림을 그리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거의 무의식적으로 식사를 거부했지만, 행동력이 필요할 때는 다른 법이었다. 사실 현태는 언제나 자신이 무언가를 먹는다는 일에 대해서 죄책감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 죄책감은 이상한 것이었고 아무런 근거도 없는, 일종의 편집증적인 집착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현태가 그 편집보다 더 강한 욕망을 갖게 되자 죄책감은 연기처럼 사라져버린 것이다. 욕망은 항상 권력 있는 감정이었다. 현태에게는 그 욕망이라는 것이 뚜렷한 형태로는 그리 자주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한 번 얼굴을 비치기 시작하면 모든 것을 자기 손아귀 안에서 조종하는 독재자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왜냐하면 욕망 역시 광기와 맞닿아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욕망은 광기의 발원지였고, 때로는 광기가 욕망의 발원지이기도 했다. 그 두 가지 치명적인 의지는 마치 한 몸에서 태어난 살덩어리처럼 가까웠고 흡사했다.
그들은 버스를 탔다. 영운이 현태의 몫까지 지불했다. 현태는 자신이 자동차에 타본지가 굉장히 오래되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는 항상 걸어서 이동했고, 교통수단을 이용할만한 여유도 없었다. 그리고 금전적인 문제와는 별개로, 그는 멀리 나다니지 않았다. 그의 행동반경은 다세대 주택의 다락방을 중심으로 5km를 넘어서는 법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그가 변화나 새로운 것을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몇 년이나 매일 같이 정해진 일상만을 행해왔던 것이다. 그러한 그의 일상 속에는 늘 충동과 광기가 괴상하고 기이한 일들을 벌이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현태의 커다란 틀은 바뀌는 일이 없었다. 오히려 그의 광증들조차도 그 <틀> 안에 있었다. 현태가 주기적으로 자해를 하고 물건을 때려 부수고 죽음에 이를 정도로 곡기를 끊는 일들도 전부 그의 정해진 일상이었다. 필요한 일인 것이다. 그런 일들이 무엇에 필요한가 하면, 말하자면 그가 <죽지 않기 위해> 필요한 일들이었다. 현태가 가장 불안하게 생각하는 것은, 인간은 누구나 허무주의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미 현태의 염세적인 면들이 허무주의자의 그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그는 허무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어떤 방식으로든 생명을 즐기고 있었다. 반드시 즐겁고 유쾌해야만 인생을 즐기는 것은 아닌 것이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현태는 타락한 수도승처럼 생명에 탐닉하고 있었다. 그러나 허무주의자가 된다면, 나태하고 무한정한 시간 속에서 정신이 썩어버린다면 언제든지 사람은 자살<당할> 수 있었다. 현태는 그것이 싫었다. 구역질이 나도록 싫었다. 자살하는 것은 자유의지가 있는 것들의 특권이지만, 허무주의에게 목이 졸려서 죽는 것은 운명에게 패배했다는 증명이나 마찬가지라고 현태는 생각했다. 그에게도 반항의지라는 것이 있었다. 비록 시궁창 속의 들쥐처럼 구정물로 온몸을 적신 채 살아가고 있었지만, 싫은 것은 싫은 것이었다. 철학이니 정의니 하기 이전에 현태에게는 자신의 혀가 느끼는 맛들이 더 중요했다. 허무주의자들의 죽음에서는 혀가 썩을 만큼 지독한 맛이 났다. 감상주의적이고 무기력한, 계집애의 눈물 같은 맛이 났다. 그것은 참으로 무가치한 것이 아닌가? 자살이라는 것은 보다 완벽한 논증으로 이루어져야하는 것이라고 현태는 생각했다. 그것은 운명에게 승리하고 난 뒤에나 나타날 수 있는 철학적이고 절대적인 현상이었다. 그러나 현태는 운명에게 승리하는 방법을 몰랐고, 그래서 초원에 맞불을 놓듯이 운명만큼이나 무작위한 혼돈을 기반으로 하여 살아가고 있었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살아가기 위해 미쳐있었고, 미쳐있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버스에 탄 채로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면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버스 안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고, 영운은 현태의 옆 좌석에 앉아있었다. 불현듯 현태는 자신의 모든 물질적인 요소들이 거추장스럽다고 느꼈다. <육체가 있는 까닭에 사람은 관계를 가질 수 있고, 덕분에 나는 온갖 웃기지도 않는 연극을 하면서 절정을 찾아야한다. 빛이나 물 같은 것들은 얼마나 간단 하냔 말이다. 그저 번쩍이고, 흘러가고……. 대단원에 이르기 위하여 문맥 하나하나를 살피며 발을 디뎌야하는 것은 인간 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어쩌겠는가? 나도 나에게 주어진 조건을 받아들여야 한다. 어쩌면 이런 연극 끝에 맞이하는 클라이맥스가 더욱 만족스러울 지도 모르지. 어린 아이의 심장을 베어 무는 것처럼.>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영운이 그를 쳐다보았으나 어떤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버스 안의 지루한 시간 때문에 현태는 자칫하면 유쾌한 기분을 잃어버릴 뻔했으나, 지나가는 차들의 지붕에 부딪혀 번쩍이는 빛살들을 보면서 그는 자신의 기분을 북돋았다. 어쩌면 너무 오랜만에 자동차에 타는 이유로 속이 나빠진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이제야 길고 길었던 과정들이 끝나가고, 현태는 문제의 해답을 손에 거머쥘 수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에게 최면을 걸듯이 가벼운 기분을 유지하라고 당부했고, 한시도 웃음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웃음과 함께 끝나야하기 때문이었다.
얼마 뒤에 그들은 버스에서 내렸다. 현태가 평소 다니던 거리보다 몇 배는 더 복잡하고 활기찬 거리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 마천루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으며, 거리는 네온사인으로 번쩍이고 젊은이들의 높고 새된 목소리로 시끌벅적했다. 사실 현태는 이런 거리는 질색이었다. 그는 이러한 젊음과 에너지를 보면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질러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는 그저 눈을 비비면서 작게 혀를 찰 뿐이었다.
“여기서 만나기로 한 거야? 너무 정신이 없는데.” 현태가 말했다.
“저쪽에 있는 카페에서―그러면서 영운은 거리 안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우선 모이기로 했어. 그 뒤에 사람이 모두 모이면 자리를 옮길 거고. 걱정 마. 너무 시끄럽지 않은 곳으로 갈 것 같으니까.” 영운이 손을 들어 보이면서 답했다. “사람이 많으니까 기분이 안 좋은 모양이지?”
“그래.” 현태가 다른 곳을 보면서 한숨 쉬듯이 대답했다. 실제로 그의 얼굴에는 아까보다 웃음기가 많이 사라져있었다. “벌써 피곤하군.”
현태가 피곤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평소에 이처럼 멀리까지 돌아다니는 일이 없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으면 좋겠다고 현태는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금세 말을 바꾸었다. <아니지. 너무 게을러지면 안 돼. 오래 전부터 꿈꿔오던 것들이 드디어 현실에 얼굴을 드러내려고 하는데, 평소 같은 생활을 기대해서는 안 되지. 앞으로는 늘 지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하고 행동해야한다! 있는 힘을 다해서 말이다. 나의 자유를 위하여.> 그는 눈을 껌뻑거리면서 그렇게 다짐했다. 그리고 현태는 영운을 따라 화려한 거리의 한 구석으로 따라 들어갔다.
8. 현실과 연극의 경계에 대하여
그들이 카페로 들어가자 카페 한 구석에 앉아있던 덩치 큰 남자가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그들을 보고 무언가를 떠올리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현태는 거리의 인파 때문에 기운이 빠진 나머지 아무 생각도 없었고, 유지하고 있던 약간의 긴장조차 풀어버린 상태였다. 영운은 그 옆에서 카페 안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를 찾는 것이었다. 그때 구석에 앉아있던 덩치 큰 남자가 영운을 향해 걸어왔다. 육중한 몸체가 구두소리를 내면서 뚜벅뚜벅 다가왔다. 현태는 남자가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영운보다 먼저 눈치 채고 그와 눈을 맞췄다. 그 남자는 키가 굉장히 컸기 때문에 그와 눈을 맞추려면 현태는 고개를 들어야만 했다. “오랜만인데…….” 현태가 혼잣말을 하듯이 중얼거렸다. 그제야 영운도 그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영운!” 남자가 다가오며 외쳤다. 그는 골격이 크고 생김세가 다부졌으며, 스포츠 컷으로 머리를 짧게 깎은 젊은 남자였다. 그의 목소리는 호의적이고 명랑했다. 그 남자는 두 팔을 벌리면서 영운에게 웃음 짓고 있었다.
“이봐, 오랜만이야!” 영운도 그 남자를 보고 웃으며 대꾸했다. 영운은 말하면서 반사적으로 한쪽 손을 내밀었고, 남자가 그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그 남자는 현태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말했다.
“너 현태구나. 그렇지?”
“그래. 바뀐 게 없군, 반장.” 현태가 희미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리고, 그렇다. 그 남자가 반장이었다. 전교 일 등을 도맡아서 하던 현태네 반의 반장 말이다. 그는 학생시절에도 이렇게 다부지고 명랑한, 건장한 청년이었다. 현태는 그러한 그를 보면서 늘 인간의 조건에 대한 의구심 따위를 느끼곤 했지만, 그것이 적개심이나 질투로 진행되지는 않았다. 다만 그렇게 갖출 것을 다 갖춘 인간이 주변에 있다는 것이 감탄스러웠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현태가 그러한 인간을 부러워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아니었다. 현태는 자신이 그런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으로 족했다. 그래서 반장에 대해서는, 학창시절에 가끔 현태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여, 전교 일 등!>하고 인사를 건네는 것으로 관계가 성사되었던 것이다. 반장은 현태를 늘 다소 특이한 인간으로 생각하곤 했다. 그는 다른 학생들처럼 성적이나 친구들 패거리 따위로 분류되는 인간이 아니었고, 언제나 이방인 같은 위치에 불안하게 걸터앉아 있었다. 그러나 친구관계에 있어서 현태는 공기처럼 가볍고 편한 존재였다. 자칫하면 멀리까지 날아가 버릴지도 모를 만큼 말이다.
“이리 와. 우선 앉아! 너희들이 일 등이야. 제일 먼저 도착했다는 말씀이지. 약속시간까지는 아직 십오 분 정도 남았지만.” 반장이 그들을 테이블로 안내하면서 말했다.
“그래? 전부 해서 몇 명이 오기로 했는데?” 영운이 물었다.
“열 명 정도.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이 전부 모일 수는 없었어. 지방에 나가있는 친구들도 꽤 있고. 다들 이런저런 사정이 있으니 말이야. 열 명이나 모인 것도 많이 모인 거지.” 반장이 주절대면서 의자에 앉았다. 현태와 영운도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열 명이라. 누가 오는데?” 현태가 다리를 꼬고 앉은 채로 물었다.
“글쎄, 그러니까……” 그러면서 반장은 기억 속의 이름들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사실 현태는 다소 불안한 심정이었다. 어쩌면 <그녀>가 오지 않을 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그가 여기까지 올 이유가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해왔던 준비들이, 그리고 정신적인 다짐들이 전부 헛것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행이도 반장은 <그녀>의 이름을 말했다. 그 이름을 들은 순간 현태는 <그렇다, 그녀는 그런 이름이었다>고 속으로 뇌까리면서 슬며시 웃었다. “……이렇게. 너희와 나까지 합하면 모두 열네 명이로군.” 반장이 말을 마쳤다.
“그래. 아주 좋은데.” 현태는 희희거리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는 이제 어느 정도 기운을 되찾은 상태였다. 카페 안의 점잖은 분위기와, 또 그녀가 확실히 올 것이라는 정보가 현태에게 힘과 안정을 주었다.
“그래서, 어떻게 지냈어? 영운이는 학생 때와 별로 차이가 없지만, 너는 많이 달라졌군!” 반장이 대화 거리를 꺼내면서 현태와 영운에게 물었다.
“하!” 현태가 웃었다. 많이 달라졌다고? 그야 그렇겠지. 왜냐하면 그렇게 보이도록 준비했으니까. “달라지긴, 난 학생 때부터 변한 게 없어.” 여전히 3학년 1반의 정신병자지. 현태가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달라진 게 없다는 말은 거짓말이지.” 영운이 핀잔을 주듯이 말했다. 영운의 말이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현태는 학생 때보다 곱절은 미쳐있었으니 말이다. 사실 그는 어제 저녁부터 현태에 대한 무언가가 몹시도 불안했다. 그가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영운은 달리 무슨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며 자신을 안심시키려고 했지만, 잘 되지가 않았다. 그는 그런 심정으로 현태를 데리고 약속장소로 오게 된 것이었다. 불안한 것은 현태가 종잡을 수 없는 미치광이라는 사실이었다. 그의 광기는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었고―물론 예측할 수 있다면 그것이 광기라고 불리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때로는 너무나 파괴적이었다. 영운은 그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기대로 일렁거리는 상태였다.
그들은 별 것 아닌 얘기를 하며 다른 친구들을 기다렸다. 친구들이 하나 둘 씩 도착하기 시작했고, 현태는 그 사이에 영운의 돈으로 커피를 주문했다. 사람이 많아져서 테이블을 몇 개 붙여서 앉아야했으며, 오는 사람들마다 서로 오랜만에 만난다고 난리법석이었다. 현태는 노상 웃는 얼굴로 그들과 인사를 했고 가끔은 감격어린 악수까지 나눴다. 어떤 이는 현태가 자신을 누구누구라고 소개하기 전까지 그를 못 알아보기도 했다.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다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수도 없이 많았지만, 모두가 모일 때까지 아껴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대체로 웃고 있었고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현태는 자신이 이러한 패거리 속에 속해있다는 것이 신기해서 더욱 입 꼬리가 찢어지게 웃어보였다.
그리고 그녀가 왔다.
현태는 긴장하지 않았다. 유별난 반응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의자 위에 앉아서, 카페 출입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녀를 보며, <아, 그녀가 왔다>라고 생각하며 싱긋 웃었을 뿐이었다. 그녀는 테이블로 다가와서 먼저 여자들과 살갑게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현태가 기억하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생글생글 웃으며 다른 모두에게도 인사를 건네는 것이었다. 그녀는 모든 동창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현태에게도 인사를 했는데, 그 맑은 눈동자에는 정말로 재회를 기뻐하는 감정이 가득해서 현태는 가슴이 아플 정도였다.
“현태구나! 정말 오랜만이네. 졸업하고 다시는 너 못 볼 줄 알았는데.”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래. 그렇군.” 현태는 쓰게 웃어 보이며 손을 내밀었다. 현태는 그녀와 악수를 했다. 그녀는 전혀 싫어하는 기색도 없이 현태의 손을―그 병자의 손을!― 맞잡았다. 그 점이 현태에게는 몹시도 놀랍고 경이로운 일이었다. 그는 속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그녀는 도대체 무얼 알고 내 손을 맞잡는 것이란 말인가? 고작 일 년 나의 광기를 경험한 것 뿐 아닌가……. 그러나 이것이 바로 그녀의 특질이다. 두려워하지 않는 것 말이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 나는 그것을 확인해볼 것이다. 이 선한 여왕의 밑바닥에, 어떤 공포의 늪이 깔려있는지를…… 헤헤!
그리고 그녀는 의자를 끌어와서 현태로부터 다소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도착하고 얼마 뒤에 모든 동창들이 모였고, 그들은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저녁을 먹으러 가기로 한 것이다. 돼지고기 따위로 저녁식사를 하면서 술도 함께 마실 예정이었다. 그러면서 간만에 만난 회포를 풀기로 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술을 마셔본 지도 퍽 오래 됐어.” 현태가 카페를 나서며 영운에게 말했다.
“그래? 그러고 보니 네가 술 마시는 건 본 적이 없어. 이상한 주사라도 있는 건 아니지?” 영운이 물었다.
“걱정 마. 일을 망치고 싶지는 않으니까.” 현태가 의미심장하게 답했다.
<그럼, 아직은 때가 아니야.> 현태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때라는 것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는 그 단어를 너무 중의적으로 사용해서 지금 그가 말하는 <때>가 어느 <때>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현태만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다른 친구들 무리 사이로 끼어들어가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까, 너 아직도 그림 그려?” 한 친구가 현태에게 물었다.
“그림? 아, 그럼. 물론이지. 나 미대 들어갔잖아.” 현태가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맞아, 그런 소식을 들은 기억이 있어. 학교는 어때?”
“몰라. 때려치웠거든.” 현태가 희희거리면서 대답했다.
“때려치워? 왜?” 그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아, 다 이유가 있지. 하지만 별 거 아닌 이야기야. 그리고, 대학을 다니지 않아도 그림은 얼마든지 그릴 수 있더라고.” 영운이 재료비를 전부 대주긴 하지만. 그가 중얼거렸다.
“현태 너 대학 그만 뒀어?” 여자들 무리에서 함께 걷고 있던 <그녀>가 갑자기 끼어들면서 물어왔다.
“그래. 그만 뒀지. 몇 년 전에.” 그는 웃었다.
“왜 그랬어. 아깝게. 너 그림도 잘 그리잖아.”
현태는 습관적으로 코웃음을 치려다가 가까스로 막았다. 그는 그때서야 조소가 습관이 되어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았다. 이런 것들은 자신을 일반인처럼 보이게 하는 데에 방해였다. 너무 냉소적이었고 오해의 여지도 많았다. <물론이지, 그건 인정해야해.> 현태가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그는 자신의 그러한 냉소적인 면들을 고칠 생각이 없었다. 그저 감출 뿐이었다. 필요한 때에만 말이다. “내가 그림을 잘 그린다고?” 현태가 거의 쥐어짜내듯이 말했다.
“그래, 너 옛날에 우리 학교 다닐 때 항상 종이에 그림 그리고 있었잖아. 나한테 한 장 준적도 있는데, 기억 안 나?” 그녀가 즐겁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내 그림을 그녀에게 준 적이 있다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내가 그럴 리가 없다……. 왜냐하면, 아무리 사 년 전이라고 해도 나는 나였을 것 아닌가?> 현태가 속으로 중얼댔다. “난 기억이 안 나는데.” 그가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네가 전에 연필로 학교 화단 그렸던 거, 내가 예쁘다고 하니까 네가 줬었어. 정말로 기억 안 나?” 그녀는 여전히 맑은 얼굴로 묻고 있었다. 현태는 난감했고 당황했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확언하지는 못하겠지만, 정말로 기억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 기억에 없어.”
“나 그 그림 아직도 벽에 붙여놨는데.” 그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현태는 또 한 번 코웃음을 칠 뻔했다.
“그것 참……” 놀라운 일이군. 현태가 그렇게 말했다.
그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사실 현태는 사 년이나 된 자신의 그림 따위는 손톱만큼도 기억에 담아두지 않았지만 말이다. 생각해보라. 현태는 언젠가 자신이 그녀를 <사랑했던 것 같다>고 외친 일이 있었다. 마땅히 그는 지금 기뻐하거나 낯을 붉혀야했다. 그러나 현태의 심장 속에서는 여전히 냉각수처럼 차가운 불꽃이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날름거릴 뿐이었다. 실상, 현태는 자신이 이제 그녀를 무엇으로 생각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현태 앞에서 웃고 떠드는 그 여자는 더 이상 그가 사랑했던 <인간>이 아니라, 해답을 요구하는 수학문제와 같았다. 말하자면 <현태의> 수학문제였다. 답을 찾고 나면 자기만족과 성취감이 몰려오는―어쩌면 탈력감일지도 몰랐다― 그러한 문제 말이다. 보통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현태는 자신이 그녀와 어떤 특별한 인간관계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따위는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런 기대는 성립될 수조차 없었다. 현태는 어서 이 연극을 마치고 자신이 며칠을 걸쳐 다듬어온 계획을 실현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옛 친구들과의 만남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물론 그들을 보니 그리움이나 반가움 같은 어떤 감상이 일어나기는 했으나, 그보다 먼저 느껴지는 것은 추를 매단 채 바다 속으로 끌려들어가고 있는 듯한, 허파의 고통이었다. 그렇다, 고통. 현태가 광기의 문 뒤에 넣고 닫아버린 것들을 그들이 다시 꺼내려고 하고 있었다. 웃음을 잃지 말아야했다. 희열과, 기쁨으로 날뛰는 광증으로 그의 모든 분노와 적의를 눌러놓아야만 했다. 계획은 그에게 완벽한 연기를 요구하고 있었다…….
영운도 나름대로 동창회를 즐기고 있었다. 그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환담을 나누며 몇 가지 주제에 대해 늘어놓거나 웃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계속 현태가 신경이 쓰였다. 헛된 걱정이리라고 자신을 격려했지만 쉽사리 걱정이 가시지 않았다. 그는 친구들에게도 자꾸만 현태에 대한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영운이 현태를 돌봐주고 있으며, 그가 매일 자신의 화실에 와서 그림을 그린다는 등의 이야기들 말이다. “현태는 항상 내가 없을 때 그림을 그리지. 그가 화실에서 뭘 하면서 지내는지는 잘 모르겠어. 다만 저녁에, 수업이 다 끝나고 화실로 돌아오면 현태가 그린 그림들이 이젤이나 테이블 위에 흩어져있지. 나는 그것들을 좀 정리하고, 혼이 빠져나간 것 같은 현태를 데리고 밥을 먹으러 가거나 화실의 문을 잠그는 거야. 너희들도 현태가 그림을 어떻게 그리는지 보면 좋을 텐데. 그는 정말 신들린 것처럼 그림을 그리지. 꼭 붓질 한 번만 더 하고 죽을 것처럼 말이야…….” 그는 자신의 옆에서 걷고 있는 옛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거의 변한 것이 없군. 현태가 학교 다닐 때 일들을 기억해? 그는 수업을 듣지도 않았지. 항상 책상 위에 종이를 펼쳐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선생들조차 그에게 주의를 주지 않았어.” 친구가 말했다.
“하하! 그래. 너희들도 기억 할 거야. 선생들이 현태를 피하게 된 이유 말이야.” 영운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자 영운 주변에 있던 동창들은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소리가 현태에게도 들릴 정도였다.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던 중간에 반장의 안내를 따라 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들은 넓은 좌석을 차지하고 각자 자리에 앉았는데, 우연히도 영운은 현태의 왼쪽에, 그리고 <그녀>는 현태의 맞은편에 앉게 되었다. 현태에게는 참으로 잘 된 일이었다. 그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자리에 앉았다.
“맞아, 그 일은 정말 잊을 수가 없지.” 반장이 영운의 무리가 나누던 대화에 끼어들면서 웃었다.
“현태의 별명도 그때 생긴 것이었어. 그리고 전교에 퍼져나갔지. 3학년 1반에 정신병자가 산다고.” 어느 친구가 말했다. “넌 기억 하고 있어?” 그는 현태에게 물었다.
“아니. 무슨 얘긴지 잘 모르겠는데.” 현태는 덤덤하게 말했다.
“나도 기억나. 아마 아무도 잊어버리지 못할 걸.” 그녀가 끼어들면서 말했다.
“기술 시간이었지 아마? 그때 기술 선생은 뭔가에 대해서 굉장히 열변을 하고 있었는데, 그게 무슨 내용이었는지까지는 기억나지 않는군. 아무튼 우리는 쥐 죽은 듯이 조용했고, 선생 혼자서 열심히 무언가를 떠들어대고 있었지. 그때 갑자기 현태가 벌떡 일어나더니…….” 영운의 말이었다. 그는 말허리를 자르면서 씩 웃어보였다.
“대뜸 의자를 집어 들어서 선생에게로 던졌지!” 반장이 영운의 말을 이어받으면서 외쳤다. 그러자 열 명이 넘는 동창들이 모두 와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어. 현태가 던진 의자는 천만다행으로 선생을 빗나가 칠판에 맞아 큰 소리를 내면서 교단 위를 굴렀고, 기겁한 선생을 쳐다보면서 현태는 입맛을 쩝쩝거리며 다시다가 교실 밖으로 휙 나가버렸지!”
“그 선생은 그 뒤로도 한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어.” 어느 친구가 말했다.
“내가 그때 현태의 뒤를 쫓아 따라 나갔었는데, 현태는 그대로 화장실로 들어가서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고 있었어. 그런데 갑자기 그의 코에서 코피가 주룩하고 흘러내리더군.” 영운이 말했다.
“왜인지는 몰라도 굉장히 화가 났던 거겠지.” 누군가가 덧붙였다.
“그 기술 선생은 그 뒤로 계속 현태를 피해 다녔어. 아마도 상대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든 거겠지.” 또 누군가의 말이었다.
“너 정말 기억 안 나니?” 그녀가 현태에게 즐거운 낯으로 물었다.
“아니, 나는 정말 모르겠는걸……. 내가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징계를 받지 않은 거야?” 현태가 우습다는 듯이 물었다.
“그래, 왠지는 몰라도 너한테는 아무런 제제도 가해지지 않았어.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는 소문이 전교로 퍼져나가고, 교사들이 너한테 손을 대지 못하게 된 것 뿐이었지.” 반장이 말했다.
“이상한 일이군.” 현태가 말했다.
“그래, 정말 이상한 일이었어.” 누군가가 말을 받았다.
“아마 평소부터 네가 평범한 학생이 아니라는 인식이 있었던 탓도 있을 거야.” 또 누군가의 말이었다.
“평범한 학생이 아니라고? 그럼 난 무엇이었는데?” 현태가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면서 같잖은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되물었다.
“아, 글쎄. 이름을 붙이긴 힘들지. 다만 너는 늘 학교 안에 있으면서도 학교의 통제를 받지 않는 것처럼 보였어…….” 현태의 물음을 받은 한 친구가 그렇게 말했다.
<제기랄! 친구들이 나에게 관심을 주고 있군. 모두가 나에게 친절하고, 나의 옛 기행들을 이야기하면서 즐거워하지. 망할, 망할. 어렸을 때 이런 미래를 바랐던 것 같기도 해. 나에게 호의를 갖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나는 모임의 중심이 되어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그리고, 그리고…… 그러나 전부 다 부질없는 일이야. 나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걸어가 버렸어. 이런 것들은 이제…… 의미가 없어. 나는 더 이상 내가 되고 싶어 했던 어른이 아니야. 내 과거는 광기 속에서 녹아버렸어. 이제야 알겠군. 나는 인간조차 아니야.> 현태는 고개를 숙이고 웃고 있었다. 눈가와 입 주변에 주름이 짙게 새겨졌다. 그는 격렬하게 체념하면서, 동시에 강하게 자신의 의지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이제 사건들이 터질 것이었다. 그는 말했다. 더 이상 자신은 과거에 자신이 되고 싶어 했던 인간이 아니라고. 그는 너무 많이 벗어나버렸다. 그는 이제 돌아가는 길을 몰랐다.
곧 음식과 술이 나오고, 친구들은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현태는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짧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자기 앞에 놓인 술병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알칼리 이온수로 만든 18.9도의 부드러운 프리미엄 소주. <이것은 에탄올에 물을 탄 것이다…….> 그가 중얼댔다. 술을 마시는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왜냐하면 전에도 말했듯이 그는 알코올 같은 것에 돈을 낭비할 여유가 없었던 까닭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사치였다. 아, 그러나 아무리 가난해도 술이랑 담배 값은 어떻게든 조달한다고들 하지. 그것들은 사치가 아니라 필용품이 될 수도 있는 법이었다. 어쩌면 현태도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었다. 만약 영운에게 좀 더 많은 돈을 요구할 배짱이 그에게 있었고, 또 그림을 그리기 위해 술을 마셔야만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더라면 말이다. 아무튼 그는 고기가 다 구워지기도 전에 술병을 집어 들고 흔들다가 마개를 열었다.
“잔들 들어.” 현태가 나지막이 말했다. 다들 아직 이르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순순히 잔을 들었다. 현태로부터 멀리 앉은 친구들은 각자 소주병을 따고 잔을 채웠다.
“그러니까……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축배사는 반장이 해.” 현태가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들의 만남과, 밝은 미래를 위하여!” 반장이 준비해두고 있었다는 듯이 외쳤다.
위하여. 그리고 친구들은 모두 건배를 하고 술잔을 들이켰다. 밝은 미래를 위하여. 현태는 쓰게 웃으면서 잔을 비웠다. 오랜만에 알코올이 식도를 흐르자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내장이 짜릿했다. 싸구려 희석식 소주의 에탄올 향기가 뇌까지 올라왔다. 그리고 현태는 갑자기 소리 내어 웃으면서 모두를 둘러보았다. 그는 만족하고 있었다.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었다. 처음으로 운명이 현태를 위하여 움직여주는 것 같았다. 그는 곁눈질로 <그녀>의 얼굴을 훔쳐보며, 이번에는 소리 없이 작게 웃었다.
현태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열 시 삼십 분이었다. 다들 취기가 적당히 올라 있었고, 목소리들은 시끌벅적했으며 모두가 즐거워보였다. 한 친구가 담배를 좀 피워야겠다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그의 이름이 무엇이었더라? 현태는 생각했다. 그러나 잘 기억나지 않았고, 그런 것은 사실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기다려, 나도 같이 가지.” 현태가 따라 일어서며 말했다. 그들은 가게 밖으로 나갔고, 영운은 그런 현태의 뒷모습을 술에 취한 눈빛으로 슬쩍 훑어보았다.
친구는 가게 밖으로 나오자 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그리고 담배를 한 개비 뽑아 물었다.
“네가 담배를 피우는 줄은 몰랐는데.” 현태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로 말했다.
“고등학생 때는 안 피웠으니까. 너도 피워?” 그가 입에 담배를 문 채로 물었다.
“그래, 한 대 줘봐.” 현태가 말했다.
그들은 가게 앞에 선 채로 담배에 불을 붙였고, 취기가 돌아 약간 어질어질한 상태로 담배연기를 빨아들였다. 밤의 가로등 불빛 밑에서 하얀 담배연기가 짙게 피어올랐다. 곳곳에서 네온사인 불빛이 번뜩였고, 술 취한 행인들의 높은 목소리와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오랜만에 보니까 좋은데. 정말 좋아.” 친구가 현태를 곁눈질하면서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그래.” 현태는 담배연기를 뿜으며 낮게 대답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난 사 년 전의 일들이 거의 기억이 안 나. 너와 내가 친한 사이였는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고. 그냥 네 얼굴만 기억할 뿐이지.”
“넌 모두와 친했어. 우리 반 모두와 친했다고. 다들 널 좋아했어. 아무도 너와 대화하는 것을 거리껴하지 않았지. 왜 그랬을까? 네 성격이 특이하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이지. 하지만 넌, 어느 누구와도 <특별히> 친한 관계는 아니었어. 모두의 호감을 사고 있었지만, 네 쪽에서 먼저 누군가와 절친한 친구가 되려고 하지는 않았지. 어떻게 보면 그게 벽으로 느껴졌을 수도 있지만, 의외로 그렇지도 않았어. 적당한 거리감이었지. 아주 적당하고 적합한…….” 친구가 말했다. 그는 술에 취한 탓인지 말이 많았다. 현태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자신의 인간관계에 대한 믿음 따위를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지만, 그다지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다.
친구는 담배를 피우다가 종종 바닥에 침을 뱉었다. 현태는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담배연기를 뻑뻑 뿜어내면서 말이다. 문뜩 그는 자신이 이상한 곳에 와있다고 느꼈다. 원래는 절대 와서는 안 되는, 말하자면 현태가 있어서는 안 되는 그런 곳에 말이다. 그는 별세계에 던져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나라고 언제까지 그런 곳에서 썩고 있을 수는 없어. 누구나 욕구가 있다고. 나의 욕구는 결말에 대한 욕구였지…….” 현태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도록 작게 중얼거렸다. 그의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입안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뭐라고?” 친구가 그의 중얼거림을 듣고 물어왔다.
“아무 것도 아니야.” 현태가 짧게 대답했다.
그들은 담배를 다 피우고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동창들이 있는 자리는 유난히 시끌벅적했고 활기가 넘쳤다. 현태와 친구는 각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서 앉았다.
“현태 너 담배도 피우니?” 현태가 자리에 앉자 맞은편에 있는 그녀가 약간 술에 취한 어조로 그렇게 물었다. 알코올 때문인지 전보다 더욱 명랑해진 말투였다.
“가끔.” 현태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 다들 나이를 먹었구나.” 그녀가 배시시 웃으면서 그렇게 감탄하듯이 내뱉었다. 현태는 다시 한 번 웃어보였다. 그녀의 얼굴은 술 때문에 약간 붉어져있었고, 계속 웃는 얼굴이었다. 현태는 그 웃음을 보면서 항상 복잡한 기분을 느꼈다. 동경 같기도 하고 분노 같기도 한,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이 묵직하게 아파오는 그런 기분이었다. 그것은 통증이었다. 현태는 그녀의 얼굴 가죽을 벗기는 상상을 했다. 나이프로 얼굴 윤곽을 따라 가죽을 잘라내서, 껍질을 벗겨버리는 것이다. 그래도 그녀는 웃을 수 있을까? 세상에 대한 그녀의 선한 신뢰는 여전할까? 그녀라고 해서 현태가 발을 디디고 있는, 가장 광막하고 무자비한 <땅>에 떨어지지 않으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그러나 모르는 일이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현태에게 있어서, 그녀는 불가해의 존재였다. <어떻게 해야 그렇게 빛날 수 있지?> 현태가 머릿속으로 물었다. 그러나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때 그녀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더니 갑자기 모두에게 말했다.
“얘들아, 미안. 나 이만 가봐야겠어.”
그러자 한 여자 동창이 그녀에게 왜 이렇게 일찍 가느냐고, 무슨 일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가방을 챙기면서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통금 시간 때문에. 이제 들어가 봐야 해.”
통금 시간이라. 현태가 자신의 손목시계를 확인하면서 생각했다. 이 시간이군. 이 시간이야. 잘 기억해 두라고. 그는 머릿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모두에게 한 명씩 작별인사를 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태는 그녀가 가게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급하게 영운에게 속삭였다.
“영운아, 돈 몇 푼만 다오. 지금 당장 필요해.”
“뭐? 갑자기 왜?” 영운이 당황하여 말했다.
“너도 눈치 채고 있었겠지만, 이게 계획의 시작이야. 내가 세운 책략의 시발점이 바로 지금이라고. 무슨 소린지 알겠지? 그래서 나는 지금 돈이 필요하다. 조금이면 돼. 그냥 버스비 정도…… 알겠지?” 현태가 여전히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영운은 잠깐 현태의 눈을 보면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갑자기 환하게 웃어보였다. 그 웃음을 보자마자 현태는 생각했다. <이 친구가 뭘 오해하고 있군.> 하지만 오해를 한다면 그냥 오해를 하게 두면 될 일이었다. 오히려 그것이 더 편했다.
“그래, 알았어. 이거 의외로군. 네가 그런 생각을 하다니 말이야. 여기…… 일단 이 만원만 받아. 잘 해보라고.” 영운이 실실대면서 돈을 건넸다.
현태는 영운의 오해가 한심하게 느껴졌지만 군말 없이 돈을 받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는 친구들에게 무성의하고 재빠르게 작별인사를 한 뒤 영운의 귀에 속삭였다. “내일 화실에서 보자고.” 그리고 그는 급히 식당을 나갔다.
“저 친구가 계획이 있는 모양이야. 그러니까…… 여자관계에 대해서 말이지.” 현태가 나간 뒤에 영운이 희희거리면서 친구들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서로를 곁눈질하다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현태가 그런 줄은 몰랐는데.” 누군가가 웃으면서 말했다. 다들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동창들이 무슨 오해를 하며 즐거워하고 있든 신경 쓰지 않고 현태는 가게를 나왔다. 그리고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그녀를 발견했고, 씩 웃은 뒤에 뒤쫓아 갔다.
“즐거워 미치겠군.” 그녀를 뒤따라가면서 현태가 혼자서 말했다.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웃지도 않았고, 머릿속에는 오직 미친개처럼 결말로 돌진하는 하나의 의지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세운 계획에 완전히 홀려있었다. 다른 일들은 더 이상 그의 안중에 없었다. 현태는 다른 어느 때보다 침착했지만 동시에 열광의 감정으로 날뛰고 있었다. <이제 내 인생에 하나의 점을 찍는 거야. 지금까지는 점은커녕 선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지. 그것은 윤곽조차 지어지지 않은 하나의 불투명한 그러데이션이었다. 바람이 불면 흩어지고 태양빛이 내리쬐면 증발하는, 아무런 자의성도 지니지 않은 불확실한 면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십 년이 넘는 세월동안 산발하며 지면에 나뒹굴던 나의 시간을, 시간을! 시간을 말이다. 시간을 하나의 클라이맥스에 집중하고, 그로써 극은 대단원에 이르게 되며, 막이 내리는 것이다…….> 현태는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것 같은 머릿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앞서가던 그녀의 뒷모습에 말을 걸었다. “이봐!” 그는 외쳤다.
그녀가 뒤돌아봤다. 그녀는 술 때문에 약간 흐트러진 모습이었고 얼굴이 붉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웠으며 찬란하게 빛나는 영혼을 가지고 있었다. 현태는 그녀의 턱 선에서 여름날 나뭇잎 위를 미끄러지는 태양의 한 조각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과연 찬탄하며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멈춰선 그녀의 곁에 도달했다.
“무슨 일이야? 내가 뭐 놓고 간 거라도 있어?” 그녀가 물었다.
“아니, 아니야! 놓고 간 것은 아무것도 없어. 그냥 내가 따라 나온 거지. 왜냐하면 널 배웅해주고 싶어서! 그 정도는 허락해주겠지?” 현태가 비굴한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는 남몰래 흥분해있었고 자칫하면 그녀가 계획을 망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다소 초조한 상태였다.
“배웅? 안 그래도 되는데. 아직 친구들이 안에 있잖아?” 그녀가 웃음기가 도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 그렇긴 하지. 그것은 맞는 말이야. 하지만……―이 시점에서 현태는 적절한 변명거리를 찾기 위해 잠시 말을 멈췄다― 늦은 시간이잖아? 게다가 너는 술을 마셨고! 여자가 혼자 밤거리를 걷는 것은 위험하지. 그렇지 않아? 너도 그렇게 생각할 거야. 그래서 나는 네가 안전하게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 널 배웅하기로 한 거지…….” 사실 현태의 말은 굉장히 구차했다. 현태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현태는 늘 인간관계에 서툴렀으며, 특히나 여자들에 대해서는 더욱 그랬다. 그는 어떤 어휘가 지금 상황에 알맞을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책이나 영화 따위를 보면서 획득한, 간접경험이 알려준 회화를 더듬더듬 내뱉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책을 읽는 것처럼 말하네!” 그녀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현태는 상황을 얼버무리기 위해서 따라 웃었다. “좋아, 같이 가자. 잘 바래다줘. 신사양반.”
현태는 아무도 모르게 쾌재를 부르며 비열하게 웃었다. 그들은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현태는 이미 완전히 술이 깬 상태였고―사실 그는 취한 적도 없었다― 온전한 정신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왜 갑자기 날 바래다줄 생각을 했어?” 그녀가 걸으면서 물었다.
“왜냐고? 아, 그것은 말이지, 너도 알 거야. 나는 원래 충동적인 사람이거든. 그래서 나의 행동이라는 것은 대부분 앞뒤가 맞지 않고 근거가 없지. 나는 그냥 널 바래다주고 싶었던 거야! 그리고 너와 좀 더 대화를 했으면 싶었고. 무슨 말인지 알겠지?” 현태는 드디어 자신의 페이스를 되찾았다고 생각하면서 말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은 그다지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학생에게 공식을 가르치는 선생처럼 천천히 설명하고 있었다.
“굉장히 솔직한데!” 그녀는 또 웃었다. “네가 나한테 이렇게 친절하게 대하는 게 처음인 거 알아?”
“뭐라고? 친절 말이지. 글쎄, 사실 나는 모르겠군. 왜냐하면 사 년 전에 내가 널 어떻게 대했는지 거의 기억하고 있지 않거든.” 현태가 띄엄띄엄 말했다.
“너는 나한테 먼저 말을 거는 일도 거의 없었어. 너는 무뚝뚝했고, 여자애들한테는 더욱 그런 것처럼 보였어. 게다가 너는 표정 변화도 거의 없었지. 하지만 아무도 너를 싫어하지는 않았어. 신기한 일이야!” 그녀가 즐거운 어조로 얘기했다. 현태는 비슷한 얘기를 아까도 들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왜 나를 미워하는 이들이 없었던 것인가?> 현태가 혼자서 생각했다. 그것은 아마도 그의 공포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공포심! 거의 십여 년간 변하지 않은 그의 천방지축인 행동 속에는 어쩌면 인간에 대한 비굴함 따위가 깔려있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현태가 그렇게 명확하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가능한 일이었다. 현태라는 인간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 그의 분노와 열등감과 자학과 광기로 형성된 괴상한 자아 따위를 말이다. 이것은 정신분석학적으로 생각하면 굉장히 간단한 산수나 마찬가지였다. “현태 너는 변하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많이 변했구나.”
“내가 변했다고? 그래, 그렇지. 나는 아주 많이 변했어. 변할 수밖에 없었지. 하지만 변할 수 없는 부분도 분명히 있었고. 이건 굉장히 어려운 얘기야. 나는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잘 모르겠군. 하지만 너는 변하지 않았어. 아, 정말로! 너는 전혀 변하지 않았군. 나는 네가 변하는 것이 상상조차 되지 않아. 변한다면, 과연 어떠한 방향으로 변할 것인지 말이야.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불가능한 일이지.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야…….” 끝에 가서 현태는 거의 중얼거리고 있었다. 마치 자신에게 말마디 하나하나를 각인시키려는 듯이 말이다. 그는 손으로 자신의 바지 뒷주머니에 꽂힌 단도를 만지작거렸다.
밤거리에 노란 조명이 넘실거렸다. 현태에게는 그것이 더러운 길거리에 울려 퍼지는 팡파르처럼 느껴졌다. 그는 웃음이 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내가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나의 완벽한 계획을 위해서 말이다. 현태는 조명 속에서 한 마리의 빛나는 나비를 보았다. 아니,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 나비는 빛살 속에서 날개를 파닥이다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는 잠깐 동안 나비의 잔상에 홀려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제정신을 차린 것은 다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네가 말하는 건 꼭 미친 사람 같아!” 그녀는 그것이 농담거리라도 된다는 듯이 깔깔거리면서 말했다.
현태는 순간 가슴이 뜨끔했지만 진정해야만 했다.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는 그저 그녀를 따라 웃으면서, 혼잣말처럼 주절거렸다. “그래, 그건 정말이야. 사실이지…….”
그들은 어느새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있었다. “몇 번 버스를 타지?” 현태가 물었다. 그녀는 버스의 번호를 말했다. 현태는 그 번호를 머릿속에 새겨 넣듯이 몇 번이고 입속말로 되뇌었다.
“세 정거장만 가면 돼. 아주 가까워.” 그녀가 말했다.
“세 정거장. 그렇군. 그래. 그런데 말이야……” 현태는 뭔가를 주저하면서 말했다. “내가 계속 널 바래다줘도 될까? 내 말은, 네 집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버스 정류장 바로 앞에 있지는 않을 거란 말이지. 네가 부담스럽다면 여기서 돌아가도 되겠지만, 예를 들자면 너희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까지 말이야. 내가 널 바래다줄 수도 있지 않겠어? 어디까지나 네가 허락하면 말이지. 왜냐하면 너에겐 거부할 권리가 있으니까. 그 왜, 네가 말했듯이 나는 미치광이처럼 보이기도 하고…….” 현태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머리 한쪽에 손가락을 대고 빙빙 돌리면서 미쳤다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녀는 웃었다. 소리 내서 웃었다. 그러나 결코 비웃음이나 조롱은 아니었다. 현태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남을 비웃는 방법을 몰랐다. 아마 그녀는 누군가를 의심하는 일도 하지 못할 것이라고 현태는 생각했다. 그녀는 웃더니, 웃음을 멈추고, 그러나 여전히 빙글대는 얼굴로 현태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그녀는 말했다. “현태 너 나를 어떻게 생각해? 말해줘.”
현태는 당황했다. 그런 것을 물어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녀의 질문은 의미심장했고 어떤 목적이 있었다. 현태는 조금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생각 하냐고? 그건, 그러니까 네가 어떤 의미로 그런 것을 묻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글쎄……” 그리고 그는 말을 고르다가 다소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네가 아름답고 신비롭다고 생각하는데.”
그녀는 현태의 대답을 듣고 다시 웃기 시작했다. 그녀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너 정말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구나!” 현태는 다소 당혹스러운 감정이었고 그녀의 웃음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웃다가 웃음을 멈추고, 갑자기 정색을 하며 말했다. “내가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너 혹시 나한테 반했니?”
반했냐고? 현태는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반했냐고? 글쎄, 그게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는데. 내가 오히려 묻고 싶은데, 그게 무슨 뜻이야?” 현태는 정말로 <반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그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는 뜻이야.” 그녀가 또박또박 말했다.
현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중이었다. 진지하게 그녀의 대답에 대해 생각해봐야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그것은 굉장한 골칫거리였고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물론 현태가 자신의 입으로 <사랑>이라는 단어를 내뱉은 적이 있긴 하지만, 그건 일종의 옹알이 같은 것이었다. 현태는 생각 끝에 자신이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 결론을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현태의 말을 듣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더니, 잠시 뒤에 입을 열었다.
“좋아. 골목까지 같이 가자. 하지만 골목까지만 이야. 왜냐하면 모든 일에는 순서라는 것이 있는 법이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예쁘게 웃어보였다. 현태로서는 그녀가 자신의 말을 듣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현태는 참으로 오랜만에 자신이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기비하적인 평가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객관적으로 자신이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지금 자기 앞에 서있는 그녀에 대하여, 현태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성이 이토록 아무짝에 쓸모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그는 다만 상황을 따라가기로 했다.
곧 버스가 왔고 그들은 버스에 탔다. 자리가 하나 비어있었기에 그들은 그리로 갔다. 그녀가 자리에 앉았고 현태는 그 옆에서 손잡이를 잡고 서있었다. 그녀는 버스를 타고 가면서 어떤 이야기들을 했다. 자신이 대학을 다니면서 경험했던 연애에 대한 얘기였다. 그녀는 자신이 성인이 된 후 처음으로 누군가를 사랑했었던 것과, 결과적으로 상처입고 슬퍼했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현태는 아무에게도 상처를 입히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그건 잘못된 평가야. 그건 잘못된 평가임에 분명하다.> 현태는 그녀의 말을 듣고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을 말하지는 않았다. 말해봤자 좋을 일이 없었다. 현태는 그저 무채색의 풍경으로 기억되는 자신의 흐리멍덩한 과거 속에서, 끔찍하게 상처 입은 수많은 사람들의 지독한 얼굴표정들을 흐릿하게 떠올렸을 뿐이었다.
얼마 뒤에 그들은 버스에서 내렸고 어떤 골목으로 들어갔다. 현태는 길을 걸으면서 자신이 지나치는 가로등들의 숫자를 하나씩 정확하게 세고 있었다. 하늘에는 달이 보였다. 그러나 현태는 달을 보지 않으려고 했다. 그는 그저 가로등들의 숫자를 셌다. 한 번 오른쪽으로 꺾고, 그 뒤에 한 번 왼쪽으로 꺾었다. 그리고 가로등이 비추는 골목어귀에서 그녀는 현태를 향해 <자, 여기까지!>라고 외쳤다. 현태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정말로 의심할 줄을 모르는군. 그는 생각했다.
“안녕. 바래다줘서 고마워. 나중에 또 보자.” 그녀가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
“그래.” 현태도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어두운 골목 사이로 사라져갔고, 현태는 가로등 밑에 홀로 남았다. 더 이상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현태는 팔을 내렸다. 그리고 가만히 무언가를 생각했다. 모든 것이 다 잘 되어갔다. 모든 희망을 포기한 덕분이리라고 현태는 생각했다. 이제 그는 자신이 세상의 혼돈과 하나가 되어있음을 느꼈다. 야비하고 사악하며 철저하게 무가치한 혼돈 말이다. 그는 웃었다. 그리고 왔던 길을 정확히 되짚어가서 버스 정류장에 도달했고, 버스를 탄 뒤에 그의 집으로 향했다. 그가 사는 동네로, 영운의 화실이 있는 그 동네로 말이다. 그는 돌아가는 길에 누군가에게 감사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지만, 끝내 누구에게 감사해야할지 몰랐다. 그래서 그는 집으로 가서 옷을 벗고 잠을 잤다.
9. AND
다음날 현태는 잠에서 깨어 거리로 나왔다. 그는 더 이상 영운이 사준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더러운 셔츠에 지저분한 바지를 입고, 슬리퍼를 질질 끌며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는 시내로 나가 상점가로 내려갔다. 그는 찾고 있는 것이 있었다. 파티 용품점이었다. 현태는 이십 분 정도 거리를 헤맸다. 그리고 마침내 파티 용품점을 하나 찾아냈는데, 그 가게는 지금 막 문을 연 참이었다. 현태가 그 안으로 들어가자 선반 따위를 정리하고 있던 가게 주인이 그를 맞이했다. 현태는 건성으로 맞인사를 하며 가게 안을 휘적휘적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그는 가면 코너에서 걸음을 멈췄다. 온갖 가면들이 벽에 걸려있었다. 서양 귀신들의 얼굴을 그린 가면이나, 만화나 영화에 나오는 캐릭터들의 가면도 있었다. 그러나 현태의 눈을 끈 것은 미국의 대통령 얼굴이 그려진 가면이었다. 그는 그 가면을 좀 들여다보다가 집어 들고 카운터로 갔다. 가게 주인은 이런 이른 시간부터 가면을 사러 시내로 나온 현태가 이상스럽다고 생각했지만, 장사를 하는 데에 그런 감상은 필요하지 않은 법이었다. 현태는 별 문제 없이 돈을 지불하고 가면을 샀다. 그리고 그것을 들고 다시 자신의 다락으로 돌아갔다. 현태는 방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은 채로 이불 위에 가면을 던졌다. 그리고 도로 방문을 닫은 뒤에 화실로 향했다.
현태는 굉장히 무표정했다. 그리고 그의 가슴 속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그는 마치 해탈한 인간처럼 무감정했고 정오의 빛살에도, 길거리에서 벌어지는 온갖 마스크들의 향연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지금의 현태는 마치 정해진 일만을 수행하는 기계와도 같았다. 일부러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기분이 그랬다. 현태는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은 채 화실로 걸었고, 얼마 뒤에는 학원 건물에 도착했다. 그는 계단을 올라가서 화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커튼을 친 뒤에 의자에 앉았다.
현태는 그림을 그리지도 않았다. 그는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길거리의 소음이 창문을 통해 화실 안으로 흘러들어왔고, 현태는 가끔 눈을 껌뻑이며 벽의 한 구석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몇 시간이 그렇게 흘렀다.
영운이 왔다. 현태는 그를 보고 왜 이렇게 일찍 왔느냐고 물었다. 영운은 오늘이 일요일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당분간은 학업이나 과제 따위로 바쁠 예정도 없다는 것이었다. 현태는 알았다고 말했다. 영운은 현태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나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표정 따위가 마음에 걸렸다. 그는 현태에게 어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현태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하려다가, 마음을 바꾸고 이렇게 말했다.
“전부 다 잘 됐어.”
전부 다 잘 됐다고? 영운이 되물었다. 현태는 그렇다고 다시금 말했다. 그리고 앞으로 예정된 일들도 모두 잘 될 것이었다. 현태는 실쭉 웃었다. 영운은 어쩐지 어리둥절한 기분이었다. 최근 현태의 기분변화는 평소보다 너무 급격했고 종잡을 수 없었다. 원래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긴 했지만, 요즘 들어 더욱 그랬다. 그러나 신경을 써봐야 어쩔 수도 없는 것이 바로 현태였다. 영운은 그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영운은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질문에 대한 답이 제대로 돌아올 것 같지 않았기에, 그만두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현태는 영운이 그림 그리는 것을 앉은 채로 조금 구경하다가, 자신도 종이를 꺼내들고 낙서하듯이 뭔가를 끼적끼적 그렸다. 화실에는 연필이 사각대는 소리만이 나직이 흘렀다.
저녁에 현태는 영운과 함께 식사를 하러 나갔다. 그는 그다지 식욕이 없는 까닭으로 밥을 조금 남겼다. 그리고 그들은 화실로 돌아왔다. 얼마 뒤에 소연이 찾아왔다. 현태는 그녀에게 오늘은 그린 것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소연은 실망하는 것 같았으나 금세 원기를 되찾았다. 그녀는 영운과 현태에게 오늘 학교나 학원에서 있었던 일들을 즐거운 듯이 늘어놓았다. 영운은 웃는 얼굴로 그 당찬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끔 맞장구를 쳤고, 현태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의자 위에 늘어져있었다. 그는 이따금 시계를 확인했다.
소연이 돌아가고, 저녁 아홉 시가 되자 현태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그는 영운에게 가보겠다고 말했다. 영운은 이상한 기분을 느꼈지만 별 말 없이 현태를 보내주었다. 현태는 화실을 나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서, 가면을 꺼내들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사는 동네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삼십 분 정도 그는 버스에 몸을 맡겼다. 가끔 버스가 덜컹거리며 상하로 흔들렸고, 현태는 가면을 떨어트리지 않으려고 그것을 손에 쥐었다. 얼마 뒤에 현태는 버스에서 내렸다. 이미 하늘에는 어둠이 내려있었고, 밤이었다. 현태는 전날 <그녀>와 함께 걸었던 길을 그대로 걸었다. 걷는 와중에 그는 가면을 썼다. 미국 대통령의 얼굴이 현태의 목 위에 덧씌워졌다. 그는 가로등을 피해서 걸었다. 되도록 어두운 곳으로만 말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어둠 때문에 현태의 괴상한 꼴을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현태는 그녀와 헤어졌던 골목어귀에서 가장 어둡고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현태가 서있는 곳에서 아주 가깝게 걷지만 않으면 그곳에 현태가 있다는 것조차 눈치 채지 못할 것이었다. 현태는 기다렸다. 다만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귀가하는 것을 현태는 보았다. 그녀는 현태가 주변에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도 못한 채 골목을 통해 지나갔다. 현태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열 시 오십육 분. 그리고 그는 오 분 정도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가, 가면을 벗고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에도 현태는 같은 일을 반복했다. 그날 그녀가 귀가한 것은 열 시 이십 분이었다.
그 다음 날에는 열 시 삼십사 분이었다.
수요일 아침이 밝았다.
현태는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몸이 이미 죽어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정말로 시체 같았다. 예를 들자면 지진 따위가 일어나서, 흉하게 상처입고 곳곳이 터진, 구제할 도리가 없는 죽은 몸뚱이 말이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에는 죄악이 물들어있었다. 죄악이라고? 현태는 자신의 생각에 감탄했다. <내가 죄악이라는 단어를 알고 있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왜냐하면 나는 죄악이 어떤 것인지 실제로는 모르면서, 다만 남들이 죄악이라고 부르는 개념을 코끼리를 더듬는 장님처럼 파악하려고 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 그렇다. 나는 죄인이 될 것이다. 《죄》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로 말이다. 이것은, 우스운 일이다. 실로 코미디다. 그러나 세상의 거의 모든 일들이 코미디처럼 이루어지고 결말을 맞는다. 수수께끼…… 오직 그것뿐이다. 사람은 늘 사방에 산재한 수수께끼들을 풀어보려고 노력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저 답을 추측해볼 뿐이다. 문제는 아무도 답을 가르쳐주지 않고, 실제로 답이라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점에 있다. 그래서 나는 죄악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나는 그냥 한 자루의 칼날이다. 어떤 측정할 수 없는 혼잡한 힘에 의해서 내려쳐지는 한 자루의 칼날 말이다.>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새까만 눈동자를 쳐다보면서 머릿속으로 지껄였다. 그리고 그는 셔츠를 입었고, 바지 뒷주머니에는 단도를, 한 손에는 가면을 든 채 밖으로 나왔다.
거리에 개나리가 피어있었다. 현태는 그것을 보고 신비한 감정을 느꼈다. 그는 마치 평생 살면서 개나리를 처음 보는 것 같았다. 현태는 늘 주변에 무관심했고 거리에 마구잡이로 피어있는 꽃들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봄이, 봄이 드디어 활개를 치며 벌어지고 있었다. 꽃들이 사방에 피었고 약하게 부는 바람에서는 새싹과 나무의 향기가 났다. <곧 모든 사람들이 깨닫게 될 거야.> 현태가 중얼거렸다. 그는 손에서 땀이 나는 것을 느꼈다. 여름이 온 것이 언제였더라? 그리고 여름이 간 것은 또 언제였는가. 계절들이 거센 바람에 휩쓸리는 구름처럼 엄청난 속도로 현태를 지나쳐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몹시 추웠다는 것을 현태는 기억했다. 그러나 봄이 피어나고 있었다. 또 한 번 생명이 빳빳이 고개를 들고 광휘가 번뜩이는 눈동자를 뜨려고 하고 있었다. 미친 세상 같으니……. 그가 자기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그러고 나서 자신이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에 놀라, 현태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거의 구르다시피 거리를 걸으며 화실로 걸어갔다. 오늘도 사람들은 정장과 교복을 입고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현태는 처음으로 사람들의 표정에서 분노를 발견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안정되어있었고, 말하자면 행복했다. 그는 실쭉 웃으면서 사람들 사이를 휘청휘청 지나쳤다. “내 자유……” 현태는 개미 목소리처럼 작은 소리로 뭐라고 말을 하려 했지만, 끝내 마치지 못했다. 무어라고 말을 이어가야할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안타깝게 입을 뻐끔거리다가, 다시 한 번 되다만 말마디를 내뱉었다. “내, 자유…….”
학원 건물에 도착해서 현태는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그러나 오늘 그는 이 층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계속 걸어 올라갔다. 왜 그랬는지는 현태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만 그는 누군가를 만나야한다는 기분이 들었을 뿐이다. 현태는 삼 층까지 올라가서, 복도 한 구석에 있는 원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곳에는 영운의 아버지가 테이블 뒤에 앉아있었다. 그는 신문을 읽고 있었다. 현태가 들어오면서 인기척을 내자 영운의 아버지는 고개를 들어 문 쪽을 살펴보았다. 현태가 비칠대면서 벽을 짚고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영운의 아버지는 놀란 표정이었다. 왜냐하면 현태가 원장실로 들어오는 일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던 까닭이다. 그는 엄격하면서도 당황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무슨 일인가 현태군?”
“그게…… 오랜만입니다 아버님.” 현태가 테이블 앞까지 다가와서 의미 없이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래, 오랜만이군. 그런데 나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어.” 영운의 아버지가 안경을 고쳐 쓰면서 다시 물었다.
“네, 사실 말씀이죠, 여쭤볼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지금 인생을 오래 살아온 누군가의 의견이 필요합니다.” 현태는 여전히 엷은 미소를 띠면서 말하고 있었다.
“내가 지금 바쁜 것도 아니니 잠깐이라면 시간을 내줄 수는 있지. 내 의견이 필요하다고?”
“맞습니다! 저는 아버님이 적임자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늙고 연륜이 있으며, 인생 경험도 풍부하고, 또 한편으로는 교사이기도 하니까 말입니다.” 현태가 주절주절 말했다.
“요점만 얘기하게.” 영운의 아버지가 딱 잘라서 말했다.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아버님. 제가 여쭤볼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아버님은 누군가를 사랑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현태는 자신이 묻고 있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로 물었다. 그의 억양은 자신의 의문에 대한 의문 때문에 이상하게 꼬여있었고, 적절한 제스처를 찾지 못한 손은 얼굴을 무의미하게 문지르고 있었다.
“갑자기 와서 뭘 묻는가 했더니만……. 아직도 사춘기가 안 끝났나?” 영운의 아버지는 같잖다는 듯이 혀를 차면서 내뱉었다.
“그럴지도 모르죠.” 현태가 고개를 휘적휘적 저으면서 툭 말을 던졌다.
“아무튼 내가 지금 시간이 있으니 자네 상대를 해주지. 누군가를 사랑해본 일이 있냐고? 그것은 물론이지. 나는 내 아내를 사랑하고, 또 내 아들도 사랑해. 답변이 되었나?”
“아! 그것은, 그것은 굉장히 놀라운 일입니다.” 현태가 감탄하듯이 말했다. 사실 그의 말은 문맥에 맞지 않는 것이었으나 영운의 아버지는 현태가 원래 다소 나사가 빠진 것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제 말은, 아버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말입니다, 그 사람들이…… 언젠가…… 혹은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불완전하다는 생각을 해보신 일은 없습니까?”
“물론 있지. 왜냐하면 다들 사람이니까 완전할 수는 없는 법이야. 하지만 사랑한다는 건 상대의 불완전한 면까지 포용한다는 거라네.” 영운의 아버지는 현태를 이상스럽게 쳐다보며 말을 받았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만약에 그들이 완벽하다면 어떻겠습니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군.”
현태는 입을 다물었다. 사실 그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분명히 뭔가 물어볼 것이 있었다. 그는 답변을 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뭐라고 물어야 그것이 제대로 된 물음일지, 그리고 제대로 된 답변을 얻을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꾸만 허공에 혀를 돌리고,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면서 힘겹게 말을 하는 것이었다. 현태는 갑자기 비참한 표정이 되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그늘이 지고, 말로 할 수 없는 좌절이 표정 위에서 맴돌았다. 영운의 아버지는 현태의 그러한 급격한 표정변화를 보고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그는 고통스럽게, 그리고 끔찍하게 웃었다. 그는 억지로 웃는 사람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고, 그러면서 말했다.
“하지만 저는 계획을 끝까지 밀어붙일 것입니다.”
“뭐라고?” 영운의 아버지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감사합니다…… 저는 이만 내려가야겠어요.” 현태가 갑자기 고개를 숙이면서 일방적으로 작별을 통보했다. 그리고 그는 비척비척 원장실 밖으로 향하더니, 문을 닫고 나갔다.
영운의 아버지는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원래부터 현태가 괴상한 청년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말을 섞어보니 그는 예상보다 훨씬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영운의 아버지는 현태가 나간 문을 쳐다보며 한 번 혀를 차더니, 지금까지 원장실에서 벌어졌던 대화를 송두리째 정리하듯이 내뱉었다. “미친 녀석!”
현태는 원장실을 나와서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는 이 층의 화실로 갔다. 화실은 언제나와 같이 조용하고 깔끔했다. 매일 영운이 정리를 해둔 덕분이었다. <나는 깨끗한 것을 보면 슬퍼져.> 현태가 생각했다. 그러면서 그는 테이블 위에 그간 쥐고 있던 가면을 내려놓고, 캔버스를 하나 가져와서 이젤 위에 걸었다. 그리고 그는 한동안 테이블 위의 가면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화구 따위를 들고 와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현태는 몇 시간 정도 조용히 앉아서 그림을 그렸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작업이 끝났다. 완성된 것은 작은 인물화였다. 그것은 지저분한 셔츠와 바지를 입고서 웃고 있는 미국 대통령이었다. “이게 뭐야?” 완성된 자신의 그림을 살피던 현태가 갑자기 말했다. 그의 얼굴은 몰이해와 의문으로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이게 뭐야……. 이건 마치 동창회 날 보았던 그 소주병 같군. 18.9도의 프리미엄 소주 말이야. 내가 도대체 무엇에다 물을 섞은 거지?> 현태가 혼자 중얼거리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그때 화실 문이 열리고 영운이 들어왔다. 현태는 고개를 들어 영운을 보며 눈을 껌뻑였다.
“지금이 몇 시야?” 현태가 대뜸 영운에게 물었다.
“몇 시냐니…… 너 시계 있잖아.”
“맞아, 그렇지.” 현태는 수긍하면서 자신의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일곱 시 사십 분 경이었다.
들어오자마자 뜬금없는 질문을 받은 영운은 입맛을 다시더니 테이블 옆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가면을 발견했는데, 그것을 보고 현태에게 물었다. “이건 웬 거야?”
“아, 그거. 필요한 거야.” 현태가 침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현태의 대답이 썩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영운은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그는 현태 옆으로 다가오더니 지금 막 완성된 그림이 그려진 캔버스를 보았다.
“미국 대통령이군.”
“그래.” 현태가 말했다.
“정치적인 그림인가?”
“아닐 것 같은데…….” 현태가 애매하게 대답했다.
영운이 그림을 살피는 중에 현태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눈을 비비더니 화실 안을 뚜벅뚜벅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내 생각에 그건 그냥 낙서야. 물론 내가 그리는 모든 그림이 낙서나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그건 다른 그림들보다 더욱 장난스러운 낙서야……. 요즘 내 상태가 좀 이상해. 도무지 제대로 된 그림을 못 그리겠단 말이지.” 현태가 영운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사실 그는 자신이 최근에 그림을 제대로 그리지 못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에게 더 이상 그림이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이 바로 이유였다. 현태는 자신의 계획에 너무 몰두해있어서, 그림을 그리는 데에 쓸 에너지마저도 그 계획에 쏟아 붓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능동적으로 그림을 그릴 필요조차 없었던 것이다.
“슬럼프인가?” 영운이 물었다.
“아니야. 슬럼프는 무슨. 그런 건 예술가들이나 겪는 거지.” 현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나는 슬슬 가봐야겠어. 갈 곳이 있거든. 오늘은 아주 중요한 날이야.”
“너 요새 어딜 그렇게 돌아다녀?” 영운이 현태를 바라보면서 의심쩍다는 듯이 물었다.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냐고? 그야, 전에도 얘기한 적이 있지 않나? 클라이맥스가 거의 다가왔어. 난 이제 <해결>을 해야 해.” 현태가 덤덤하게 말했다.
“무슨 해결? 전에 얘기했던 거? 네 인생을 해결한다는 거 말이야?”
“맞았어. 아주 잘 기억하는군.” 현태는 웃었다.
“그러고 보니 너, 걔랑은 어떻게 됐어?” 영운이 물었다. <걔>라 함은 <그녀>를 말하는 것이었다. 현태도 그것을 알아들었다.
“내 생각엔 잘 될 것 같아. 무엇보다도 바로 그녀가 계획의 핵심이니까 말이지.”
영운은 의아했다. 그가 얼마 전 동창회에서, 현태가 말하던 계획이란 연애질일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긴 하였으나 그것은 알코올 때문에 비약된 추측이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현태가 연애를 시도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영운이 아는 현태라면 그랬다. 현태는 영운 이외의 그 누구와도 지속적인 관계를 갖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부모와도 벌써 몇 년간이나 일방적으로 관계를 끊어놓은 상태였던 것이다. 영운이 현태의 부모의 연락처를 알고 있기는 했으나, 현태가 절대로 그들에게 연락하거나 자신의 거주지 따위를 알려주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해놓은 터라서 그들과 대화를 해본 것은 학생 때가 마지막이었다. 아무튼 영운이 생각하기에 현태는 굉장히 의심스러웠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영운의 이해능력 바깥에서 현태의 괴기스러운 손아귀가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걱정하지 마. 어차피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난 간다.” 그러고서 현태는 가면을 손에 들더니 화실 밖으로 휙 나가버렸다.
“너 밥 안 먹어?” 영운이 문 밖을 향해 불안한 목소리로 외쳤다.
“배 안 고파.” 복도를 질러가며 현태가 나직하게 말했다.
현태는 골목의 어두운 구석에서 가면을 쓴 채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날카로운 단도가 들려있었고, 그는 뒷짐을 지고 서있었다. 현태는 수시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시간이 있었다. 그의 생각으로는 말이다. <오늘이다. 오늘이 클라이맥스야. 바로 이 시간을 위해서 내가 그토록 헤매왔던 것이다. 내가 언제부터 미치게 되었을까? 내가 언제부터 미친 사람이었지? 나는 잘 모르겠다. 다만 처음으로 내가 《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바로 그녀의 얼굴을, 그녀의 웃는 모습을 보았던 순간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녀처럼 웃을 수 없었으니까. 나는 절대로 그녀처럼 웃을 수 없었으니까 말이다. 내가 하려는 일이 뭘까? 나는 뭘 하고 싶은 거냔 말이다. 나는 그녀를 소유하려는 것인가 혹은 파괴하려는 것인가 혹은…….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녀가 심벌이라는 것이다. 그녀의 세계에는 틀림없이 신이 있다. 공정하고 선한 신이. 내 세계에서는 아무도 권위를 갖지 못한다. 내 세계는 흙탕물이 소용돌이치는 우주의 혼돈이고, 그것만이 나의 믿음이다. 아무것도 가치를 가지지 못하고 절대로 영원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되었다! 나는 이렇게 되어버렸다. 후회 하냐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 나는 쥐꼬리만큼도 후회하거나 슬퍼한 일이 없다. 애당초 내가 후회한다고 해서 무언가가 바뀌는 것도 아니란 말이다. 그건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세계는 원래 이렇게 생겨먹었다. 말하자면 사실 나는 미친 것도 아니고, 내 상태야말로 이 세계에 적응하기 위한 최적의 상태란 말이다! 동의하겠지? 그럼, 물론이다. 그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그런데, 그런데 그녀가 있다. 그녀는 오류다. 내 생각에 그녀는 오류야. 오류라고 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 나는 모르겠다. 다만 그녀의 존재는 너무나도 이질적이고, 내가 믿는 모든 실재들을 부정한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던 것 같다고 말했었지. 그것은 동경이었다. 동경? 아니야! 동경일 리가 없다! 내가 왜 그녀를 동경하겠는가? 그녀는 그냥…… 그냥 백치다! 그렇고말고! 그래서 그렇게 깨끗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물론이지. 나야말로 이 우주에 태어난 인간의 가장 필연적인 모습이다. 그녀가 빛나는 것은 그저 그녀가 권력자들이 말하는 일종의 모델이기 때문이다. 세계에 적용되지 않은 인간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허구다. 내가 뭔가를 착각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나는 확인할 것이다. 확인하고야말 것이다. 그녀의 내면 깊숙한 곳에도 나와 똑같은 혼돈의 웅덩이가, 공포와 증오로 만들어진 뱀들이 똬리를 틀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아아! 이것도 거짓말은 아닌가? 나는 한때 그녀를 사랑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사랑이라니? 어떻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지? 내가 《괴상》하다고? 그렇다면 그녀가 옳다는 말 아닌가? 모든 선하고 올바른 것들의 상징. 그렇다. 그렇다. 그렇다면 내가 오류인가? 그런데 옳은 것 따위는 없다. 옳고 그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현상만이 존재할 뿐. 그럼 그녀는 뭐지? 나는 왜 그녀를 사랑했던 것인가? 그런데, 이것은 아마도 영원히 풀리지 않을 문제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그녀가 앞으로도 계속 존재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면, 이 문제는 송두리째 사라져버린다. 봐라, 저기 그녀가 오는군…….> 현태의 머리는 미쳐 날뛰고 있었다. 그는 모순의 덩어리였고, 혼란과 불만족, 그리고 몰이해의 표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있어서 논리만큼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없었다. 그래서 믿을 것은 감각과 충동뿐이었던 것이다. 그는 오른손에 다시 한 번 칼을 고쳐 잡고 그녀가 자신의 눈앞을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현태가 골목 구석에서 가면을 쓴 채 칼을 쥐고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현태 앞을 지나치는 순간이 왔다.
현태는 순식간에 왼손으로 그녀의 팔을 부여잡고 비틀어서 그녀가 현태 쪽을 바라보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목덜미에 칼날을 들이댔다. 그녀는 미국 대통령이 자신한테 칼을 들이대는 것을 보고 놀라 소리를 지르려고 했지만, 현태가 칼을 들이밀면서 <아무 말도 하지 마>라고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바람에 비명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현태는 그녀가 꼼짝할 수 없도록 칼끝을 그녀의 살갗에 들이대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드디어 날이 왔다. “아무 말도 하지 마.” 현태가 말을 되풀이했다.
그녀는 공포와 충격으로 하얗게 질린 눈동자로 현태의 가면을 쏘아보며, 숨조차 쉬지 않고 얼어붙어 있었다. 현태에게는 그 모습이 너무나 우습게 보였다. 그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아하!” 그는 가면을 쓴 얼굴을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그녀의 면전에 가까이 대며, 폭포가 쏟아지는 것처럼 말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드디어 때가 왔어.” 현태가 이토록 여자에게 가까이 다가간 것은 어렸을 때 어머니에게 안긴 이후로 처음이었다.
“어리고 나약하던 내가 꾸던 꿈이 실현되는 순간 말이야! 아, 한때 나는, 네가 나의 아이를 낳아준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었지. 우리가 결혼을 할 수도 있었어. 만약에 내가 그런 것을 믿는다면 말이지. 그리고 우리는 가정을 꾸리고, 아들이나, 혹은 딸과 함께 살아갈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그건 안 돼. 아이를 갖기에 나는 너무 미쳐있으니까 말이야. 안 그래?” 여기까지 말하고 현태는 자지러질 듯이 웃어댔다. 그는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유쾌했고 정신이 공기 중을 떠다니는 것 같았다. 그때 공포에 질려있던 그녀가 <당신……>이라며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자 현태는 칼날을 그녀의 살갗에 더욱 깊숙이 찔러 말을 막았다. 붉은 피가 한 방울 칼끝에 맺히더니 흘러내렸다. “어이쿠,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했지. 만약에, 만약 여기가 어떤 조용한 지하실이었다면, 난 네가 말하도록 내버려뒀을 거야. 나도 폴리가 크래커를 원한다고 지저귀는 걸 듣고 싶어. 정말이야! 하지만 언제 누가 올지 몰라. 날 방해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그러면서 현태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쯤 되어 그녀는 자신을 위협하고 있는 미국 대통령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녀는 얼어붙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려고 했다.
“너 현태……” 그러나 그녀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현태가 칼로 그녀의 목을 찔러버렸기 때문이다. 울컥하고 피가 솟구쳤다. 그녀의 목구멍 안에서는 가래 끓는 소리가 났고, 덕분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도망치려고 허우적거렸으나 안타깝게도 현태보다 힘이 약했다. 곧 그녀는 다리에 힘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현태는 무릎을 꿇고서 그녀 위에 올라탄 채 두어 번 더 그녀의 목을 찌르고 그었다. 목덜미가 완전히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말이다. 사방에 피가 튀었고 현태의 셔츠도 온통 피로 물들었다.
그리고 현태는 이미 죽은 것처럼 보이는 그녀의 가슴팍 옷자락을 찢고, 어둠과 가로등 불빛 아래 하얗게 드러난 그녀의 흉부를 칼날로 마구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 작업에 굉장히 열중한 채로 중얼거렸다. “고로 나는 살인자가 아니야.” 그는 몇 번이나, 몇 번이나 그녀의 가슴을 칼로 그었다. 가죽이 좍좍 찢겨나가고 상처는 속이 망가진 취객처럼 혈액을 토해댔다. 그리고 마침내 현태는 손목을 들어 단도로 그녀의 심장부를 푹푹 찔러대기 시작했다. 가끔씩 갈비뼈에 칼날이 부딪혀 빠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 분이나 삼 분 정도 그는 계속 그러고 있었다. 현태가 뒤집어쓴 미국 대통령 가면은 여전히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리고 작업을 끝낸 현태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곤죽이 된 그녀의 시체를 한동안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흥분감은 거짓말처럼 사라져있었다. 아마도 백정들이 소나 돼지를 도축하고 나면 이런 기분이 들 것이라고 현태는 추측했다. 탈력감과 뭔지 모를 성취감이 가슴에 한가득했다. 그는 가면의 뚫린 눈구멍을 통해서 흉하게 난도질당한 그녀의 죽은 몸뚱이를 바라보며, 가만히 중얼댔다. “그냥 로맨스를 좀 원할 뿐이지.”
현태는 온통 피로 범벅이 된 단도를 뒷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그리고 가면을 벗은 뒤, 그것을 그녀의 시체 위에 던졌다. 플라스틱으로 된 가면이 그녀의 몸체 위로 떨어지더니 미끄러져 바닥을 굴렀다. 그는 소매를 들어서 이마의 땀을 닦았다. 한바탕 운동을 하고 나니 온몸이 후끈거렸다. 그리고 현태는 그녀의 시체를 뒤로 한 채, 터덜터덜 골목 저편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이런 꼴로 버스를 탄다면 경찰이 올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집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버스로 삼십 분도 더 걸리는 거리를 걸어갈 것을 생각하니 한숨이 나왔다. 그러나 별 수 없는 일이었고, 게다가 지금은 기분도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현태는 산책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갔다. 어둠 덕분에 현태의 셔츠가 피범벅이라는 것을 눈치 챈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았다. 아마 핏자국을 발견하더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셔츠의 무늬라고 생각할 것이었다. 그는 자정이 좀 넘은 시각에 집에 도착했고, 자신의 <관짝>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기절하듯이 잠들었다.
10. 우리들의 결말에 대하여
다음날 현태는 일어나자마자 영운이 사준 셔츠와 바지로 갈아입고 목욕탕으로 향했다. 피 때문에 온몸이 찐득거렸기 때문이었다. 그날도 목욕탕에는 손님이 없었고, 현태는 마음 놓고 몸에 묻은 피를 씻어냈다. 뜨거운 물로 목욕까지 즐기자 몸이 한층 더 가뿐해진 기분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빨래를 해야 하는데. 그 옷을 언제까지고 그냥 둘 수는 없지.> 현태가 물속에서 생각했다. 아마 연립주택의 공용 화장실에서 빨래를 할 수 있을 것이었다. 현태의 기억에 의하면 그곳에는 빨랫비누도 있었다. 그러나 당장 할 필요는 없었다. 그것은 귀찮은 일이었고, 그리 급한 일도 아니었다. 아마 내일 해도 될 것이다. 현태는 물 밖으로 나왔다.
그는 로커에서 깨끗한 옷을 꺼내 입었다. 이제 그는 지저분하지 않았다. 죄악의 피로 젖어있지도 않았다. 물론 현태는 그 피들을 <죄악>의 피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는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이제 남겨진 일들을 해결해야했다. 단 한 번의 살인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는 않는 것이다. 그것은 준비된 절정이었고 하나의 과정이었다. 현태는 이제 대단원으로 걸어 들어가는 중이었다. 훌륭하게 클라이맥스를 통과했으니 이제 철저한 결말이 현태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려야했다. 현태 자신이 그렇게 생각했다. 무미 무취하던 인생을 하나의 스펙터클한 연극으로 만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것은 충분히 보람이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모든 연극에는 끝이 있다는 것을 현태는 알고 있었다. 다만 결말을 보다 확실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현태가 해야 할 일들이 좀 있었다. 그는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면서 거울에 비치는, 전보다 또렷해진 자신의 눈동자를 보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현태는 목욕탕을 나와 화실을 향해 걸었다. 길거리에 사람들이 다소 있었다. 현태는 신비로운 기분이었다. 왜냐하면 자신의 첫 살인 이후로, 사람들의 얼굴을 보자, 전과는 다른 어떤 경험주의적 사고방식이 그의 내면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현태는 내키기만 한다면 그들 중 하나를, 혹은 모두를 죽일 수도 있었다. 그것은 금지된 일이 아니었고,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 그는 몇 번이나 자유에 대해서 되다 만 생각들을 뇌까리곤 했다. 그리고 그는 드디어 자유가 얼마나 무자비하며 무지막지한 것인지, 자신의 손으로 만져서 알게 된 것이었다. 물론 그 전에도 알고 있기는 했다…… 물론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행동력이 결여된 희뿌연 사상덩어리였고 실제성이 없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현태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이제 아무도 없었다. 파란 하늘과 뜯어진 천 조각 같은 구름들뿐이었다. 현태는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손이 움직이고 발이 내디뎌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절대로 통제될 수 없는 세상 속에서, 모든 인간들은 자유였다. “사실 말하자면 어떤 사람들이 윤리나 계명을 믿는 것도 그들의 자유지. 그리고 그들이 그 믿음을 기반으로 하여 나의 목을 베는 것조차도 그들의 자유야.” 현태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것이 중요한 사실이었다. 법과 규칙은 손해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끼리 은연중에 맺은 합리성에 기반을 둔 약속이었다. 문제는 손해보고 싶어 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가 가진 자들이었다는 것이었다. 현태는 잃을 게 없었다. 자신의 목숨조차 오래 전에 내던져버렸던 것 같은 기억이 있었다. 그에게는 다만 욕망만이 있었다. 줄곧 충족되지 못했던 욕망. 그리고 이제 그에게는 결말에 대한 욕망만이 남아있었다.
<미친 사람은 배제 당한다. 그러나 세상의 진실한 면을 본 사람들은 모두 미치게 되어있다.> 현태가 길을 걸으면서 생각했다. 그는 철학자가 될 생각은 없었지만, 적어도 사고는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모든 믿음들은 현태의 처참한 경험과 그의 세상을 쥐고 흔들었던 인간들의 심술궂은 손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그는 논파 당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에게 논리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오직 자신이 겪은 사실만이, 경험주의의 산물만이 있었다. 모든 악당들은 영웅의 주먹 아래 쓰러지지만, 그들은 그저 처벌 받을 뿐이다. <죄>를 저지른 사람이 <벌>을 받는 것. 벌어지는 현상은 그것 밖에 없다. 그리고 그 법칙은 생각보다 아주 훌륭하게 작동하는 것이었다.
물론 죄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수많은 주장들이 존재한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었다. 현태는 전에도 말했듯이 죄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개념을 말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의 머릿속에서는 아무것도 금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이 동의하는 <죄악>이라는 것이, 굉장히 불투명하긴 하지만 있기는 있었다. 그래서 굉장히 불투명한 <처벌> 역시 있을 수 있는 것이라고 현태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여 현태는 자신의 결말을 구성해야했다.
어느새 화실 앞에 도착해있었다. <내 생각대로 일이 따라준다면 좋을 텐데.> 그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현태의 희망대로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그는 보다 많은 수고를 해야 할 것이다. 아무튼 다소의 조작은 필요한 법이다. 현태는 입맛을 다시면서 건물 계단을 올라갔다. 건물은 전체적으로 조용했고, 아직 이른 오후인지라 학생들도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음정을 알 수 없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화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서 춤을 추듯이 빙글빙글 돌더니 의자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안 된 일이야. 퍽 안 된 일이지. 하필이면 내 기억 속에 있었으니……. 만약 망각이 조금 힘을 썼더라면 그녀가 죽지 않아도 됐을 지도 모르지. 물론 그건 나한테는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니지만, 왜, 나는 동정심도 있지 않는가 말이야. 혹은 우연이 내 편을 들어주지 않았을 수도 있었지. 하지만 그렇지 않았어. 내 생각엔 이게 전부 나의 결말을 위한 하나의 포상 같아.” 현태가 허공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혹은 조건이거나.”
현태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세상은 아직도 어제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갑자기 그의 마음속에 한 가지 희망이 떠올랐는데, 그것은 저 더러운 도시 어딘가에 아직 혼돈 속을 헤매고 있는 현태의 닮은꼴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모르는 일이었다. 현태가 미친 것만큼 어느 누군가도 미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슬퍼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부터가 모든 기회의 시작이었으니까.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살다가 가는 것이다. 무엇을 보고 어떻게 사느냐가 다를 뿐이지.> 현태는 늘어져 앉은 채로 손톱을 씹어대면서 머릿속으로 떠들었다. 삶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목숨을 버릴 수는 있어도 삶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순간이야말로 모든 이들이 그토록 찾아다니는 절대의 편린이니까.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모두들 깨닫게 될 거야…….>
그러더니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캔버스와 화구를 집어왔다. 그리고 그것을 이젤 위에 걸더니 스케치도 없이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마지막 계획까지는 시간이 꽤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현태는 남는 시간에 그림을 그리는 수밖에 없었다. 별달리 할 줄 아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는 언제나 그랬듯이 그림을 그렸다. 태양이 하늘에 길을 남기면서 흘러가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물감을 짜고 팔레트에 붓을 찍고 붓질을 하는 것만을 계속 반복하며 그는 시간을 잊었다. 이제 곧 막이 내릴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의 마음에는 예전처럼 거센 폭풍우가 휘몰아치지 않았다. 그저 일렁거리면서 오르락내리락하는, 잠든 야수의 심박 같은 파도만 일 뿐이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영운이 화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현태는 눈동자를 올려 영운과 눈을 마주쳤고, 말없이 인사했다. 그리고 다시 작업으로 돌아갔다. 현태는 그림을 그리면서 가끔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그린 과정을 확인하고, 이것이 제대로 되어가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본 뒤에 다시 붓질을 하는 것이었다. 영운은 평소처럼 가방을 테이블 옆에 내려놓고 현태에게로 다가갔다.
“셔츠가 깨끗해졌는데.”
“그래. 네가 사준 거야.” 현태가 그림을 그리며 말했다.
“그림 그릴 때는 입지 말라고 했잖아.”
“어쩔 수 없었어. 입고 있던 셔츠가 너무 더러워져서 빨아야 해.”
“네가 빨래를 한다고?” 영운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너무 지저분해졌어. 입고 다니지도 못할 정도로.”
영운은 입을 다물었다. 이 친구가 어젯밤에 럭비라도 하고 온 것인가 싶었다. 물감이 튀기거나 자신의 피로 젖는 일을 제외하면 현태는 옷이 더러워질 만큼 활동적인 일을 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싶었지만 추측할 수도 없었고 물어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영운은 현태가 밤에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영운의 눈을 벗어난 곳에서 그는 무얼 하고 다니는가? 어디를 돌아다니며 어떤 미친 짓들을 하는가 말이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현태에 대한 것은 대부분이 수수께끼 투성이였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캐고 다닐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잘은 모르지만, 아마 그랬다가는 지금 현태와의 관계마저 깨지고 말 것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친구라고는 하지만, 영운은 현태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의 대외적인 활동―대외적인 활동이라고 부를만한 것도 별로 없었지만― 이외의 그 무엇도 현태는 남들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아마 의도적으로 현태가 그런 것들을 숨기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렇다고 남들에게 대놓고 알려줄만한 것도 아닐 것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는 숨겨야할 것들이 있었다.
“이 그림은 뭐야?” 영운이 물었다.
“글쎄…….” 현태가 애매하게 답했다.
“평소에 그리던 것들과는 다르군. 이건 너무……” 영운은 무어라고 평을 내리려고 했지만 적당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로테스크하다? 아니다. 현태의 그림은 평소에도 늘 그로테스크했다. 심지어 풍경화나 정물화마저도 말이다. 그는 사과 한 개를 그려도 보는 사람의 기가 죽게 만드는 괴기한 재능이 있었다. 이따금 영운은 현태가 색맹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왜냐하면 채색에 대한 그의 선택들이 일반적인 것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태는 색맹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에게는 세계의 색깔들이 남들과는 전혀 다르게 보이는 것일지도 몰랐다. 혹은 직선적이다? 그러나 그의 그림이 직선적이지 않은 적이 있기나 했던가? 현태는 무엇이든지 빙빙 꼬아서 표현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의 행동이나 말투를 보면 그 정도는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마치 개념이나 감정 따위를 포장하는 방법을 아예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고 그로 인해 그를 떠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현태는 자신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너무, 뭐?” 현태가 물었다.
“몰라. 모르겠어. 아무튼 뭔가 달라. 굳이 말하자면 너무 적나라해…….”
현태는 코웃음을 쳤다. 그의 그림이 적나라한지 적나라하지 않은지는 현태 자신도 모르는 일이었다. 영운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었다. 그가 웃는 이유는 영운이 사용하는 단어들이 현태에게 있어서는 너무 피상적인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난 이 그림을 마저 끝내야겠어. 너도 과제라도 하지 그래.” 현태가 내뱉듯이 말했다.
“그래, 알았어. 방해하지 말라 이거지.”
영운은 테이블 뒤에 앉더니 가방에서 종이뭉치 따위를 꺼냈다. 그리고 서류 같은 것을 계속 체크하면서 뭔가를 작성해나가기 시작했다. 현태는 신경 쓰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그는 붓질을 하면서 그림 안에 어떤 붉은 꽃 같은 것을 그려 넣었다. 그것이 정말 꽃인지는 현태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몇 시간 뒤에 화실 문이 다시 열렸다. 소연이었다.
“또 왔군. 이봐, 현태. 네 팬께서 오셨어.” 영운이 웃으면서 현태에게 알렸다.
“그래, 나도 알아.” 현태는 그림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소연은 영운에게 인사를 하더니 화구통을 고쳐 매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현태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는 현태의 그림을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현태는 여전히 소연에게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은 채 그림에 열중해있었다. 그때 영운이 기지개를 켜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잠깐 아버지한테 다녀와야겠어.” 영운이 말했다.
“그렇게 해. 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너희 아버지랑 대화를 했어.” 현태가 무심결에 대답하더니 영운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우리 아버지랑? 무슨 얘기를?”
“나도 잘 몰라.” 현태가 무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그래…… 아무튼 다녀오라고.”
영운은 뒷짐을 진 채로 화실 밖으로 나갔다. 화실에는 소연과 현태만이 남았다.
“아저씨, 이 그림은 뭐예요?” 소연이 물었다.
“알 게 뭐야.” 현태가 소연을 쳐다보지도 않고 내뱉었다.
“왜 항상 그렇게 무뚝뚝해요?” 소연이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무뚝뚝하지 않으면 내가 어쩌길 바라는데.”
“난 매일 아저씨한테 담배를 제공하고 있다고요. 좀 더 살갑게 대해봐요.”
그럼 오지 말던가……. 현태는 그렇게 말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서 소연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당차고 자신만만한 눈이었다. 현태는 자기도 모르게 혀를 찼다. 그리고 그는 한숨을 내쉬더니, 소연을 향해 몸을 돌려 앉았다. 그는 소연에게 할 얘기가 있었다.
“너, 도대체 뭘 믿고 자꾸 나한테로 오는 거냐?” 현태가 진지한 어투로 물었다.
“무슨 소리예요?”
“내가 위험한 사람으로 보이지도 않느냐고.” 현태가 짜증이 치민다는 듯이 말했다.
“자기가 위험하다고 하는 위험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소연이 별 것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현태는 다시 혀를 찼다. 이 여자애는 어딘지 모르게 <그녀>와 닮은 구석이 있었다. 물론 <그녀>만큼 순진한 백치는 아닌 것 같았지만, 어딘가가 닮았다고 생각되었다. 그것이 현태의 마음을 힘들게 했다. 소연의 앞에서 유독 현태가 무뚝뚝하고 퉁명스럽게 행동하는 것이 그러한 이유에 있었다. 그는 이 정의의 소녀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곤혹스럽기만 했다. “그리고 내 생각에 아저씨는 겉으로는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본성은 선한 사람 같아요.”
그 말에 현태는 코웃음을 쳤다. 이 소녀에게는 확실히 일러둬야겠다. 현태의 가슴속은 다시 혼란스러운 물결로 파도치기 시작했다. “내가 선한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넌 나한테 접근하지 말아야 해. 왜냐하면 나는 내가 손댈 수 있는 사람 모두에게 끔찍한 상처를 입히기만 하니까! 나는 그렇게 생겨먹었다고.” 현태의 목소리는 흥분해있었다. 그는 마치 화난 사람처럼 보였고 목소리 톤은 높아져있었다. 현태가 흥분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자 소연은 약간 움츠러든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 뒷걸음질을 치거나 도망을 갈 정도는 아니었다.
“왜 그렇게 외로워해요?” 소연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이 잘못이었다. 소연의 말에 현태의 정신은 징을 친 것처럼 요란하게 울렸고, 그는 드디어 제정신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그는 성이 나서 혼잡한 머리로 뒷주머니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피투성이인 단도를 슥 빼내어 쥔 채로 소연 앞에 들이밀었다. “이제야 내가 확신하게 된 게 있는데.” 그는 거의 고함을 치듯이 말했다. 피투성이의 단도를 보자 소연은 놀란 것 같았고 움찔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현태는 그것을 보고 더욱 기세가 등등하여 외쳤다. “그건 바로 내가 미쳤다는 거야.” 그렇게 외치면서 현태는 그리던 그림에 힘껏 칼을 박아 넣었다. 눈동자는 소연을 향한 채로. 소연은 불길이 타오르는 것 같은 현태의 눈동자와 캔버스에 박힌 칼을 보고서 겁을 집어먹은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몇 걸음 뒷걸음질을 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가!” 현태가 사납게 소리쳤다. 그 목소리에 떠밀려 소연은 화실 문 쪽으로 다시 뒷걸음질을 쳤다. “가 버려, 다시는 오지 마.” 그 말과 함께 현태는 으르렁거리면서 꽉 깨문 이빨을 내보였다. 소연은 혼란과 공포 때문에 화실 밖으로 밀려나갔다. 그리고 여전히 한껏 성이 나있는 현태의 괴물 같은 얼굴표정을 보면서, 문을 닫았다.
문 밖으로 복도를 급하게 질러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현태는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 같았고 분노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그는 캔버스에 박힌 단도를 빼내서 도로 뒷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한참을 고개를 숙인 채로 언어가 되지 못한 처참한 신음을 흘리다가, 캔버스의 찢어진 천을 손으로 힘껏 움켜쥐었다.
널 두 번 죽이게 하지 마.
현태는 이상한 꿈을 꾸다가 깨어났다. 꿈속에서 현태는 단도로 자신의 가슴을 찢어서 흉골을 뜯어내고, 늑골을 하나씩 바깥으로 꺾어 열었다. 열린 가슴 속에는 새까만 공간이 있었다. 현태는 그 공간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서 손에 잡히는 것을 한 움큼 집어 끄집어냈다. 붉은 돌멩이들과 벌레의 알이 잔뜩 잡혀 나왔다. 현태는 그것을 바닥에 뿌렸다. 투툭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돌과 벌레의 알들이 바닥을 굴렀다. 그는 다시 가슴의 공간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내용물들을 꺼냈다. 여전히 붉은 돌과 벌레의 알들이었다. 그는 몇 번이고 그 짓을 되풀이하며 자신의 속을 비웠다. 꿈속은 고요하고 풍경이랄 것은 전혀 없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이 돌과 벌레의 알로 되어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괴기한 감상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의 <관짝>은 어둡고 습기로 가득했다. 현태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이미 흐려지기 시작한 꿈에 대한 기억을, 그리고 그 뒷맛을 음미했다. 애벌레가 고치에 틀어박혀있는 것처럼 현태는 자신의 이 더럽고 동굴 같은 다락에서 몇 년이고 살아왔다. 습기와 불결함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들은 현태에게 딱 어울리는 것들이었고 그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만약 가능하기만 하다면 현태는 언제까지고 그의 다락에서 나가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드디어 현태의 인생이 대단원으로 접어들고 있는데, 갑자기 모든 것을 팽개치고 은둔자가 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작용 반작용의 법칙처럼 철저하고 확고한 필연이 그를 덮쳐올 것이었다.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바로 현태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불을 켜고 셔츠와 재킷을 입었다. 그리고 구두를 신고서 바깥으로 나갔다.
거리를 걸으면서 현태는 세상의 피상적인 면만을 보고 신에게 복종하며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했다. 그는 사실 소시민들이나 종교인들을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호감을 갖고 있었다. 세상에 규칙이 있다고 믿는 자들, 그들은 얼마나 소박하며 노력가이고 정당하게 분노하는지. 이제 그 분노는 현태를 향해 덮쳐올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도 계획의 일부였다. 그들이 현태를 <심판>하게 하는 것. 그로서 종지부를 찍을 것이라고 현태는 처음 그녀의 목에 칼을 찔러 넣었을 때부터 생각해두고 있었다.
날씨는 화창했고 바람은 온화했다. 더 이상 구할 것이 없었다. 현태는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근거를 알 수 없는 애정을 느꼈다. 아직 눈을 뜨지 않은 자유인들에 대하여, 그는 인류애라고 할 만한 것을 가슴 한가득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동질감이었고 유대였다. 만약에 그들이 현태와 똑같은 현실의 <땅>에 떨어져 혼란과 공포 속에서 미쳐가기 시작한다면, 현태는 그들에게 더욱 깊은 사랑과 유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파괴적인 망상이었고 당분간은 실현될 기미가 없었다. 그는 흐느적흐느적 걸으면서 화실까지 걸어갔다.
그는 계단을 올라가 화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찬란한 물결 같은 햇살이 화실 안을 비추고 있었다. 그는 화실을 둘러보았다. 이곳에서 나는 몇 년이나 그림을 계속 그려왔던가. 아무 목적도 없이. 아무 명분도 없이. 그저 죽지 않기 위해. 그러나 그러한 일상도 이제 끝을 앞두고 있었다. 현태는 의자 위에 앉았다. 이제 소연이라는 소녀는 이곳에 오지 않겠지. 절대로 오지 않을 것이다. 내가 다시는 오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으니까. 현태는 생각했다.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아, 그러나 생각한다는 것도 사치스러운 일이다. 모든 현상은 그저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세계는 단 한 번도 인간에 의해 해석되어진 일이 없다. 그저 벌어지고, 휘몰아치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거짓말처럼 잠잠해지기만 했을 뿐.
현태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명징하고 맑았다. 이제 그는 모든 것을 직시할 수 있었다. 자신의 머리 위 높은 곳에서 인간을 조롱하듯이 카오스 상태로 벼락 치던 운명도, 자신의 범죄도, 자신의 결말도 전부 말이다. 지금부터 필요한 것은 대단원의 성립을 위한 기계적인 조작들뿐이었다. 그것은 다소의 우연을 필요로 하는 일이지만, 아마도 잘 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테이블 위에 찢어진 캔버스가 있었다. 현태는 어제의 일을 기억해냈다. 그는 소연을 쫓아낸 뒤 한동안 괴로움 때문에 몸부림치다가 그 어떠한 종류의 구원도 포기하고 집으로 가버렸다. 그때 떨어트린 그림이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있는 것을 보니, 그 뒤 영운이 화실에 왔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리고 영운은 단도에 찔려 찢겨진 그 그림을 보고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을 것이다.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것 또한 현태의 종잡을 수 없는 광기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했을 것인가? 현태는 자신을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영운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이 말이다. 영운은 현태의 유일한 친구였고 조력자였으며 마지막 남은 인간관계였다. 현태는 왜 자신이 그와 정상적인 친구가 될 수 없었는지, 왜 보다 친절하게 그를 대하지 못했는지 가슴이 아플 따름이었다. 그러나 현태는 미친 사람이었다. 그의 모든 행위들을 그 한 마디로 변명할 수는 없겠지만, 그는 미친 사람이었고 남들과 살갑게 악수하는 방법을 몰랐다. 영운이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든, 현태는 그에게 있어서 하나의 짐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설령 영운이 그 짐을 내려놓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무겁고 부담스러우며 위험한 것이었다. 영운은 오랫동안이나 그 짐을 기꺼이 짊어 매주었다. 어떤 불평이나 군소리도 없이, 상자 속의 괴물이 어떻게 날뛰든 그저 자신의 두 다리로 지탱해주었다. 현태는 찢어진 그림의 표면을 손으로 더듬었다. 마른 유화물감의 거칠거칠한 촉감이 느껴졌다. 그는 눈물을 흘리고 싶었으나 이미 그에게는 흘릴 눈물이 없었다. 그는 메마른 나무나 마찬가지였다. 마녀의 손아귀처럼 하늘을 움켜쥐려고 가지를 뻗고 있는 죽어가는 나무 말이다. 그는 이미 끔찍한 범죄와 광기의 물감들로 자신을 온통 물들여서 더는 슬퍼할 수도 감상에 젖을 수도 없었다. 이제 와서 후회를 하거나 무언가에 대해 슬퍼하는 것은 구차한 변명이라고 현태는 생각했다. <어쩌면 누군가가 나를 위해 기도를 할 수도 있다. 어떤 동정심 많은 성직자나 면사포를 쓴 여자들이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 기도하는 손들을 전부 물어뜯고 내 이빨자국을 남길 것이다. 나는 어떠한 종류의 용서나 위로도 구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광인이었고, 자연재해였고, 힘껏 내리치는 한 번의 칼질이었다.> 그는 아무에게도 하지 않을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사실 현태는 오늘이나 내일 영운을 죽이려고 했다. 극의 막을 내리기 위한 수단으로 그 불쌍하고 자비로운 친구를 죽여, 그 시체를 영운의 아버지에게 선물하는 것으로 끝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그도 인간이었다. 혹은 마지막 남은 실낱같은 인간성이 있기는 있을 것이었다. 현태는 자신이라는 지독한 수수께끼를 머리에 담아둘 누군가가 남아있었으면 했다. 비록 그런 것이 아무 의미도 없고, 어떤 결과도 남기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현태는 영운을 죽일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어머니를 죽이는 일에 실패했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 누군가가 화실 문을 두드렸다. 현태는 어리둥절하여 화실 문을 열었다. 어떤 여자가 서있었다. 분홍색으로 염색한 단발머리가 몹시 인상적인 젊은 여자였다. 여자는 현태를 보고 인사하며 웃음 지어 보였다. 그러나 현태는 여전히 그녀가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누구시죠?”
현태의 반응에 여자는 당황하며 자신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 그렇지, 이 여자는 미용사다. 현태는 드디어 그녀가 누군지 떠올렸고 멋쩍게 웃으며 그녀를 화실 안으로 들여보냈다. 마침 잘 왔습니다. 나는 옛날 기억에 잠겨있을 여유가 없거든요. 현태가 그녀에게 들리지 않도록 나지막하게 중얼댔다.
“여기가 손님의 화실이군요! 아, 지금은 제가 손님인가요?” 그녀가 화실 안으로 들어와 웃으면서 말했다. 현태도 따라서 웃어보였다. 사실 현태는 이 미용사가 정말로 화실에 찾아올 줄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현태의 생각보다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미용사는 화실 구석구석에 쌓여있는 화구나 캔버스 따위를 두리번거리면서 말했다. “근사한데요.”
“제 화실은 아니지만, 예.” 현태가 말했다. “그림을 좀 보시겠습니까?”
“네, 그러시면 감사하죠.” 미용사가 말했다.
현태는 구석으로 가서 쌓여있던 그림들을 한 아름 들고 왔다. 대충 열 개는 되어보였다. 그 그림들은 대부분 최근에 그린 것들이었다. 그리고 현태는 테이블 위에 그림들을 올려놓고, 미용사에게 손짓했다.
“제 그림을 보려고 굳이 여기까지 발걸음 하시다니, 영광이군요.” 현태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아니에요. 저는 늘 가까운 사람 중에 예술가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왔는데, 오히려 제가 운이 좋았던 거죠.” 미용사가 흥미로운 눈길로 캔버스들을 보면서 말했다. 현태는 의자를 하나 끌어와서 그녀가 테이블 앞에 앉도록 도와주었다.
미용사는 테이블 위에 쌓인 그림들을 하나씩 손에 들고 감상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림 하나당 일 분에서 이 분씩 시간을 들여 꼼꼼히 살폈는데, 현태는 그 뒤에서 뒷짐을 지고 무표정으로 그녀가 하는 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가끔 작은 탄성이나 신음소리를 내면서 그림들을 보았다. 현태로 말하자면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마침내 그림을 모두 감상한 미용사가 현태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려다가 테이블 위에 놓인 찢어진 그림을 발견하고 말을 멈췄다. 그녀는 굉장히 흥미로워하며 그 그림을 집어서 살피더니 현태에게 물었다. “이 그림은 뭐죠?”
“아, 그건 말이죠, 살인자의 그림입니다.” 현태가 단조롭게 설명했다.
“그림 제목이 <살인자의 그림>인가요?”
“아뇨, 아뇨. 살인자가 그린 그림이라는 뜻입니다.” 현태는 웃으면서 말했다. 미용사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현태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현태는 그녀가 눈치 챌 순간도 주지 않고 뒷주머니에서 단도를 빼내 미용사의 목을 찔렀다.
피가 분수처럼 솟았다. 현태는 경악하는 미용사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그녀의 목에 꽂힌 칼을 뽑아 목덜미를 한 번 더 찔렀다. <이런 광경을 전에도 본 것 같은데.> 현태가 피가 튀는 것을 보면서 생각했다. <그래, 맞아. 바로 엊그제 있었던 일이지…….> 미용사는 자신의 목을 붙잡고 도망치려다가 등에 칼을 맞고 쓰러졌다. 현태는 쓰러진 미용사 옆에 주저앉아서 그녀의 목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작은 단도로 여자의 목을 자르려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너덜너덜해진 살점들이 떨어지고 피가 강처럼 흘렀다. 목둘레를 거의 잘라내는 일에는 성공했지만 목뼈가 드러나자 현태는 곤란에 처했다. 단도로 목뼈를 내려치자 빠득거리는 소리만 날 뿐 잘릴 것 같지가 않았다. 현태는 연골 부분을 몇 번이나 칼끝으로 찍어대다가, 결국 한쪽 발로 미용사의 쇄골을 밟고 두 손으로 목뼈를 뜯어내야했다.
드디어 미용사의 몸과 머리가 분리됐고, 현태는 한숨을 내쉬면서 잘린 머리를 안아들었다. “미안합니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어요. 내 범죄의 결말을 좀 더 확고하게 만들기 위한 수단이 필요했거든요.” 현태가 잘린 머리를 내려다보면서 중얼댔다. 그리고 그는 테이블 위의 캔버스들을 전부 치우고, 빈 테이블 위에 미용사의 목을 올려놓았다.
현태는 창가로 의자를 끌고 가서 앉았다. 태양빛이 눈부셨다. 얼마 뒤면 여름이 올 것이었다. 현태는 담배가 피우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 소연은 오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입맛을 다시면서 손으로 무릎을 비볐다. 영운이 사준 바지에 피가 묻었다. 그는 이제 기다리는 것밖에 할 일이 없었다. 가끔 테이블 위에 올려둔 미용사의 목이 눈에 들어왔는데, 분홍색 머리카락이 너무나 이질적이어서 그것은 마치 마네킹의 잘린 목처럼 보였다.
저녁에 영운이 화실로 돌아왔다. 현태는 의자에 앉은 채로 그를 반기며 말했다.
“아! 영운이. 왔군.” 그는 피투성이의 얼굴로 웃고 있었다.
영운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경찰을 불렀고, 현태는 도망가지 않았다. 경찰이 올 때까지 그는 창가의 자리에 앉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경찰들이 와서 현태를 끌고 갔다. 현태는 어떤 혐의도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백을 하듯이 자신이 저지른 일들을 책을 읽는 것처럼 하나하나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는 얼마 전에 옆 동네 골목에서 일어난 부녀자 살인 사건도 자신이 벌인 일이라고 말했다. 경찰의 수사력보다 그의 자백 쪽이 더 빨랐다. 현태는 자백하면서 자신의 피 묻은 셔츠를 아직도 빨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경찰들에게 그것을 확인해보라고 건의했다. 경찰들은 현태의 방에서 피 묻은 셔츠를 발견했다. 모든 정황이 확실하고 현태의 자백에는 거짓이 없었다. 다만 그는 범행 동기에 대해서는 굉장히 모호하고 추상적인 대답을 했다. 경찰들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결국 의사를 불러와야했다. 정신검사 결과 현태는 틀림없는 광인으로 확정이 났다. 그에게 붙여진 병명들을 하나씩 나열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피상적인 명칭들만 가지고는 현태를 이해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 아닌가? 우리는 이미 그가 끔찍하게 미쳐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데 말이다. 현태는 며칠 뒤에 법원으로 끌려가서 재판을 받았다. 검사는 공격적인 어투로 그에게 수많은 질문들을 했는데, 현태는 모두 협조적인 자세로 질문에 대답했다. 그는 검사가 자신에게 그토록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 신기했고 또 그의 얼굴생김이 호남 형이었기 때문에 호의를 가지기 까지 했다. 현태는 가끔 대답을 하다가 너털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그것이 배심원들의 분노를 자극했다. 배심원들은 현태가 그렇게나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정상인처럼 웃는다는 것에 대해서 화를 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증인석에 현태가 아는 사람들이 올라왔다가 내려가곤 했다. 그 중에는 물론 영운과 영운의 아버지도 있었고, 미용실에 갔을 때 보았던 다른 미용사들도 있었으며, 현태와 영운이 옷을 사러 갔던 양장점의 사장과 현태에게 방을 빌려준 집주인도 있었다. 그리고 현태의 동창들 가운데 몇 사람도 증인으로서 재판에 참가했는데, 특히 반장은 현태가 저지른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서 무척 유감이라는 표현을 하며 슬픈 눈으로 현태를 쳐다보았다. 현태는 그의 동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곤란했기 때문에 그저 슬쩍 손을 들어 인사를 해보일 뿐이었다. 아무도 현태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판사에게 요청하지 않았다. 심지어 현태의 변호사조차도 말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현태의 변호사는 이번 사건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국가가 그에게 현태의 변호인이 될 것을 명령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맡은 것뿐이었고, 재판에서 승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손톱만큼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현태에게 가해질 형량을 줄이려는 노력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변호인의 자리만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판사에게 피력한 주장은 오직 한가지뿐이었는데, 그것은 현태가 중증의 정신병자라는 점을 확실히 고려해야할 것이라는 말뿐이었다. “그러나 피고를 담당한 의사는 피고의 분열증이 사고장애로까지 나타날 정도는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고로 피고는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온전히 책임져야만 할 것입니다.” 이것은 변호사의 변론에 대한 검사의 반박이었다. 그 말에 변호사는 입을 다물었고, 검사는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피고가 여전히 자신이 저지른 범죄의 심각성에 대해 이해하고 있지 못하며, 물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도 않는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러한 괴물 같은 범죄자를 우리 선량한 시민들의 사회에서 철저하게 격리하고 또 피고의 실종된 양심을 대신하여 그에게 벌을 주기 위해서는 가장 무거운 형벌이 집행되어야만 할 것이라고 큰 소리로 주장했다. 검사가 말을 마쳤을 때 즈음에 변호사는 현태의 옆자리에 앉은 채로 현태의 어깨를 툭 치며 이렇게 말했다. “미안합니다. 별다른 도리가 없군요.” 현태는 변호사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운은 재판이 진행되는 내내 증인석에 앉아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그로서는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비록 현태가 옛날보다 나아지지는 않았더라도, 그는 한 사람의 화가로서 성공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매일 같이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예술 활동에 매진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제 현태는 판사가 법봉을 두드리고 마지막 한 마디를 내뱉는 것만을 기다려야하는 처지다.> 영운이 절망적으로 생각했다.
재판이 끝나갈 때쯤에 판사는 현태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다. 그 중 하나는 어째서 미용사를 죽였냐는 것이었는데, 그 질문에 대해서 현태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은 제가 사형을 선고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법관 나리.”
“그저 당신이 사형 당하기 위하여 그녀를 죽였다는 겁니까?” 판사는 자신의 귀를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
“예, 물론이죠. 사실대로 털어놓자면 그녀의 목을 자른 것도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목을 잘라놓으면 잘라놓지 않는 것보다 사형을 선고 받기에 유리할 것 같아서 그랬습죠.” 현태는 그렇게 말하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이와 같은 문답이 두어 차례 반복되고, 그 뒤에 배심원들이 각자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그 결과가 판사에게로 전달되었으며 마지막으로 판사가 최종 판결을 내렸다.
현태는 사형을 선고 받았다. 영운은 아무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고 변호사는 무성의하게 현태의 어깨를 두드렸다. 현태는 표정조차 변하지 않았지만 사실 그는 웃음을 참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있는 중이었다. 배심원들이나 판사는 현태에게 사형을 선고해 놓고도 무언가 찝찝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의 범죄를 후회하며 절망하거나 미치광이처럼 욕지거리를 내뱉어야할 살인자가 능글맞게 눈동자를 껌뻑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상황을 제대로 납득하지 못한 채 재판은 끝났고, 현태는 정식으로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에게는 독방이 하나 주어졌다. 쇠로 된 침대와 변기, 그리고 수도가 연결된 작은 감방이었다. 현태는 자신이 언제 사형 당할지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지만, 이제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왜냐하면 그는 여태 자살을 선택할 수도 없었기에 그저 비참한 꼴로 살아오기만 했는데, 이제 죽음이 그에게 다가오고 있는 까닭이었다. 그는 감방에서 주로 잠을 자면서 시간을 보냈다. 식사시간이나 운동시간을 제외하고서는 거의 잠만 잤다. 이제야 그는 삶에 여유를 가지고 내키는 대로 지낼 수 있었다. 현태는 외롭지도 않았고 자유가 그립지도 않았다. 애당초 그의 사고방식에 의하면, 감옥에 갇혀있든 거리에서 활개를 치고 다니든 모든 사람은 강제적으로 자유였다. 강제적으로 말이다.
현태는 식사를 거의 하지 않았고 운동시간에는 뜰에 앉아서 구름들의 숫자를 셌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지금 그는 행복했다. 그것은 삶에서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더 이상 머리끝까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죽음을 피해 내일을 향해 기어가야할 이유가 없었다. 드디어 그는 사형을 선고 받고 <여유>라는 것을 갖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처음 맛보는 그 여유라는 것을 기반으로, 현태는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았는데, 그것은 나쁜 것이 아니었다. 퍽 만족스러운 인생이었다고 현태는 생각했다. 그는 모든 것을 이루었다. 인간이 갈 수 있는 극한까지 그는 자신을 밀어붙였고, 그리고 결과를 얻은 것이었다. 현태는 이 정도면 훌륭한 삶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원체 명예나 물질에 대한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못 다한 감정도 없었다. 그는 자신이 가졌던 것들만으로도 만족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이 시간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하루 종일 감옥에 갇혀, 그는 꿈속을 뛰놀았다. 꿈속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매일 같이 벌어졌고 그 꿈들은 대체로 즐거웠다. 사실 꿈 자체가 즐거웠다기보다는, 꿈이나 꾸면서 시간을 헛되이 낭비할 수 있는 현태 자신의 상태가 즐거웠다. 그는 이제 걱정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것은 왜인가하면 죽음이 자신의 발로 현태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까닭이었다. 현태는 이따금 꿈에서 <그녀>를 만났는데, 꿈속에서는 그녀를 죽이지 않아도 되었다. 어떤 꿈에서는 현태와 그녀가 부부사이이기도 했다. 그런 꿈을 꾸다가 깨어나면 현태는 한동안 꿈과 현실을 분간하지 못하다가 이내 혼자서 웃어댔는데, 그의 웃음소리는 복도를 통해 감옥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날 자정에, 간수들은 잠을 자던 현태를 깨우고 그의 머리에 자루를 씌운 뒤에 어디론가 끌고 갔다. 현태는 속으로 드디어 때가 왔다고 생각하면서 다소 초조하고 흥분된 마음으로 어딘지도 모르는 길을 걸었다. 몇 분 정도 걸은 뒤에 간수들은 현태를 교수대 밑에 세웠고, 밧줄을 그의 목에 걸었다. 현태는 죽는 것은 처음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떨렸으나, 전에도 몇 번 자신이 죽어본 일이 있는 것 같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웃었다.
“드디어!” 현태가 자루를 뒤집어쓰고 교수대에 선 채로 혼자서 외쳤다. 그의 목소리는 고요한 사형실 안에서 메아리쳤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말에 관심이 없었고, 아무도 듣고 있지 않았다.
사형집행인들은 세 명이었다. 그들은 사형실 옆방으로 들어가서 각자 어떤 버튼 앞에 섰다. 그리고 사형집행을 알리는 전자음이 울렸고, 그들은 동시에 세 개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현태의 발밑이 덜컥하고 떨어졌고 밧줄과 중력이 그의 목뼈를 부쉈다. 누가 현태를 죽인 것인지, 어떤 버튼이 발판을 떨어트렸는지는 현태는 물론 사형집행인들 자신도 몰랐다.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현태는 어느 누구에게도 살해당하지 않고 살해당했다.
죽기 직전에, 현태는 <나를 향해 발사>라고 머릿속으로 중얼거렸던 것 같다.
현태의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사실은 신문을 타고 사회로 퍼져나갔다. 영운도 그 기사를 읽었다. 기사를 쓴 기자는 이번 사형이 집행된 것에 대해, 얼마 전 새로 출범한 정부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현태를 사형시킨 것은 사회에 경각심을 주는 한편 현 정부의 정체성을 보다 강화하려는 수단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기사를 읽은 뒤에 영운은 현태의 아버지에게 전화했다. 그러나 받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현태의 어머니에게 전화했다. 그녀는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하기는 했으나 영운은 무어라고 대화의 첫 마디를 떼야할지 곤혹스러웠다. 그녀의 아들이 사형 당했다는 것은 그녀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었다. 영운은 고민하다가 결국 이렇게 말했다.
“잘 지내십니까?”
몇 달 뒤에, 소연이 영운을 찾아왔다. 그녀는 전에 비해 힘이 없고 고민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영운은 그녀에게 인사하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소연은 주저하다가 영운에게 현태가 그린 그림을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다. 영운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는 물론 그것들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그 그림들은 현태가 체포 되었을 때 국가에서 가져갔다가, 얼마 전에 도로 영운에게 되돌려준 것이었다. 영운은 소연에게 왜 그런 것을 묻느냐고 물었다. 소연은 그림을 사고 싶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영운은 턱을 괴고 앉아서 한동안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영운은, 그 그림들은 원래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팔수는 없지만, 현태와 소연은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고, 만약 현태라면 소연에게 아무 조건 없이 그림을 주었을 것 같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돈은 주지 않아도 괜찮으니 마음대로 그림을 가져가라고 소연에게 말했다. 그러나 소연은 돈을 내고 정식으로 사고 싶다고,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고 말했다.
영운은 소연의 마음을 이해할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그 이해는 동시에 어떤 쓰라린 감정을 몰고 왔다. 영운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좋다고 말했다. 영운은 소연을 현태의 그림들이 쌓여있는 화실로 데려갔고, 소연은 얼마 안 되지만 값을 지불하고 몇 점의 그림들을 사갔다.
그것이 현태의 그림이 처음으로 팔린 순간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