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뿌리다. 며칠 전부터 끊임없이 비가 내리고 있다. 더는 빗물을 마시고 싶지 않지만 나는 뿌리인지라 계속 마셔야만 한다. 이대로 가면 내 위에 뻗은 나의 몸체와 머리가 썩어버릴 것이 분명하지만 나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나는 뿌리라서 물을 마시도록만 설계되었고 입을 다무는 방법은 알지 못한다. 절망적인 마음에 내 몸체나 머리와 대화를 하고 싶었지만 나는 그 방법을 모른다. 나는 계속 물을 마시기만 하는 것이다. 내 모두가 썩어버릴 것을 알면서도 내게는 방법이 없다. 가끔 내가 있는 곳까지 잔뿌리를 뻗은 다른 뿌리들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 「그러나 우리는 뿌리일 뿐이지 않은가」라는 대답만 돌아올 뿐 전혀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는 없다. 익사할 것 같은 기분 속에서도 계속 물만 마시는 고통을 공유하는 이들이건만 사실 우리에게는 달리 할 말이 없다. 도대체 며칠 째 계속 비가 오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비가 오다보면 불어터져 썩기 전에 흙 째로 떠내려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만일 그런 날이 온다면 난 죽기 전에 한 번은 바깥세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되건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난 뿌리로 태어난 뒤 단 한 번도 흙 속을 벗어나 본 일이 없다. 물론 당연한 이야기다. 게다가 사실은 바깥세상이라는 것에 별 관심도 없다. 왜냐하면 나는 뿌리이기 때문에 땅 속에만 있는 것이 숙명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떠한 또 다른 운명이 숙명을 밀어내는 일도 자주 있는 일이다. 그래서 삶이라는 것은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다. 너무 많은 운명들이 혼돈의 모습을 하고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운명이라는 것이 운명이 아니라 단순히 무질서한 우연들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여하간 그것을 운명이라고 부를지 우연이라고 부를지, 나로서는 판단할 도리가 없다. 나는 그저 물을 마시고 줄기로 올려 보내는 뿌리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깊은 사색이나 철학은 나와 그다지 관련이 없는 일이다. 그런데 너무 오랫동안―도대체 며칠간인지 몇 주 간인지는 모르겠으나― 익사의 고통에 시달리다보니 생각하는 능력이 점점 비대해지고 있는 것 같다. 생명을 위해 설계된 나의 존재조건이 아이러니하게도 날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으니 이런저런 고민이 떠오르는 것이다. 애당초 비란 왜 오는 것인가? 우리 식물들이 살기 위해서 비가 내리는 것은 축복과 같은 일이지만 이렇게 몸체가 썩어버릴 정도로 비가 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치에 맞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비가 오고 오지 않고 하는 것은 이치랑은 별 상관이 없는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것은 그냥 무작위하게 퍼붓거나 퍼붓지 않거나, 아무 당위성도 없이 마구잡이로 일어나는 일인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다보면 내가 오로지 물을 마시게만 설계된 것도 아무런 정당성이나 계획도 없는 우연한 일이 아닌가 싶다. 나는 본능적으로 계속 살기를 원하지만 이 세계의 환경이나 심지어는 나의 존재형태조차도 내가 살고 말고 하는 것과는 연관이 없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나를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사건들은 참으로 우연하고 무자비한 것이다. 원론적으로 파고들자면 애당초 내가 태어난 것에조차 이유가 있기나 하느냔 말이다.
이러한 생각들을 하는 와중에 퍼붓는 빗물로 인하여 이미 나의 몇 가닥의 뿌리는 썩어서 기능하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내 위로 솟은 줄기와 잎들이 죽음의 고통에 신음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것 같고 나는 몹시 심란하다. 나는 내 유일한 동료인 내 가까이로 잔뿌리를 뻗은 다른 뿌리에게 짧고 툭툭 끊어지는 한탄을 해보았다. 그러자 그는 「세상의 생명들이 죄를 지으면, 이 세상에 사는 것들이 전부 홍수 속에서 휩쓸려 죽어버린다고 한다」고 처음 듣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점점 썩어가면서 과연 내가 지은 죄라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하고 골똘히 생각해 보았으나 기억에 있는 것은 아무 근거도 없이 무차별하게 일어나버린 나의 탄생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