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네 타는 남자
1. 그간 장편소설을 하나 집필하고 있었다. 그것이 완성 된 뒤에 쓴 첫번째 단편소설.
2. 시점을 좀 보편화해야 독자들이 주인공과 감정을 교류할 수 있다는 조언을 기반으로 하여 썼다.
3. A4용지 16페이지.
그네 타는 남자
그는 그네를 타고 있었다. 그 남자는 겉보기에 이십 대 후반 혹은 서른 살 즈음 되어보였다. 그러나 확신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밤이 깊은 시간이었고, 나와 그 사이에는 십 미터 정도 되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도 온전히 가로등 덕분이었다. 나는 회사 동료들과 술을 마시고 왔기 때문에 다소 어지러운 상태였고 만일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건다면 아무런 의심도 없이 나오는 대로 입을 놀릴 것 같았다. 그러나 내 주변에는 그 남자밖에 없었다. 그는 몹시 열중해서 그네를 타는 것 같았다. 어린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그네였기 때문에 남자의 발은 계속 바닥에 질질 끌리고 있었는데, 때문에 그네가 흔들리는 속도가 느려지면 그는 몸을 뒤로 빼서 다시 그네가 흔들리게 만들었다.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는 계속 뭐라고 혼잣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남자도 술을 마셨는가 하고 추측해보았지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손목시계를 확인해보니 새벽 두 시 가량이었다. 어둠은 약간이지만 푸른색을 띄고 있었고 비오기 전의 습기 같은 것이 공기 중을 떠돌고 있었다. 나는 술기운 때문에 멍한 상태로 남자가 그네 위에서 흔들리는 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곳은 놀이터였고, 나는 벤치에 앉아있었다. 사실 그 남자가 나에게 어떤 강인한 인상을 남긴 것은 아니다. 그저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남자가 이 늦은 시간에 그네 타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는 것이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을 뿐이다. 남자는 앞뒤로 흔들리며 가끔 낮은 신음을 흘렸다. 몸이 안 좋은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에게 말을 걸어볼까 싶었지만, 그러지는 않았다. 가끔 멀리서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가 가로등의 불빛을 타고 흘러들어와 귓가에 울렸다. 그러나 그 남자에게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에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고, 오직 그네 타는 일에만 온 정신을 집중해서, 주변의 사건들 따위는 절대로 그를 자극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이렇게까지 그 생면부지의 남자의 상태에 대해 추측하고 있는 것이 과장된 상상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그것은 사실이다. 나는 남들보다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은 편이다. 비록 그것이 적극적인 인간관계로 나타나지는 못하더라도 말이다. 나는 모든 면에서 남들과 그리 다를 것이 없다. 다만 상상력이 조금 풍부할 뿐이다. 그것은 내 직업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나는 신문기자다. 신문기자라고는 하지만 신문을 읽는 사람들이 모두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내 이름은 신문의 4페이지, 혹은 5페이지쯤에 실린 작은 기사 밑에 더욱 작게 인쇄되어있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으로 만족한다. 더 욕심을 부려서 좋을 것도 없는 것이다. 아무튼 남자는 계속 뭐라고 입을 뻐끔거리고 있었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앞뒤로 흔들거리며 고개를 푹 숙인 채 혼잣말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는 것 같기도 한 모습으로 어둠 속에서 삐걱거리고 있었다.
나는 삼십 분 정도 벤치에 앉아있었다. 담배를 피우고 싶어서 주머니를 뒤져봤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상점에 가서 담배를 하나 사올 수도 있었지만, 그러려면 점원과 대화를 나눠야할 것이 아닌가. 돌연 모든 일이 다 귀찮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그냥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때 그네 타는 남자가 내 쪽을 돌아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분명히 그랬다는 것은 아니고, 그냥 그런 느낌만 들었을 뿐이다. 내가 그의 눈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했을 때 이미 그의 시선은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지만 대수롭지 않은 것이려니 하고 넘겨버렸다. 이제 자러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내일도 출근을 해야 한다. 아니, 내일이 아니지. 이미 자정을 넘었으니 출근을 해야 하는 것은 오늘이다. 약 다섯 시간 뒤에 말이다. 그 남자가 언제까지 계속 그네를 탈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다가는 피곤 때문에 오늘 업무에 집중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입맛을 다시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집 쪽으로 향했다. 몇 걸음 걷다가 뒤를 돌아보니 그 남자는 아직도 그네를 타고 있었다. 마치 내가 자리를 떠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는 것처럼. 그야 그렇겠지. 그에게 있어서나 나에게 있어서나 이 잠깐의 만남은―이것을 만남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지도 의문이지만―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나는 고개를 흔들고 놀이터를 떠났다. 앞으로 다섯 시간 밖에 잘 수 없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침울해졌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모든 일이 다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바다에 가고 싶었다. 아니면 북아프리카의 어떤 해변 마을이라던가. 언젠가는 그런 곳에 갈 수 있을까?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만일 세상 모든 일이 내 욕심대로 풀린다면 나는 이미 알제 같은 도시에 집을 짓고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평화롭고, 아무도 굶주리지 않고, 나는 결혼을 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집으로 돌아가서 잤다.
얼마 잔 것 같지도 않은데 알람시계가 울렸다. 머리가 아팠다. 모든 게 다 술 때문이다. 나는 술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술자리에 가면 항상 지나치게 마신다.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나에게 알코올중독자의 기질이 있을지도 모른다. 흠. 아무튼 나는 씻었다. 그리고 옷을 입은 뒤에 출근길에 나섰다. 길을 가는 김에 놀이터에 들렸다. 아무도 없었다. 물론 그렇겠지. 그 그네 타는 남자도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언제였을지는 몰라도, 아무튼 그랬을 것이다.
회사에 도착해 사무실로 들어가자 동료들이 나를 반겼다. 그리고 그들 중 한명이 내게 다가오더니 말을 걸었다. 동료 기자인 박이었다.
“이봐, 어제는 잘 들어갔나?”
“그래, 물론이지. 하지만 잠을 잘 못 잤어.”
“그러면 안 되지.”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내 어깨에 손을 탁 짚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내 자리에 앉아 서류가방을 풀고 짐들을 꺼냈다. 어제에 이어서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다. 빌어먹을, 기자라고 해서 늘 기사만 쓰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쓸 데 없는 서류정리를 하는 데에만 업무시간의 태반이 소요된다. 설문 조사지들을 묶는 일이라든가, 오래된 서류철들을 새로 정리하는 일이라든가 그런 일들 말이다. 이런 잡다한 일들은 차라리 아르바이트를 쓰면 좋을 텐데. 하지만 사람을 뽑는 것도 돈을 지불하는 것도 전부 상부에서 하는 일이니 어쩔 도리가 없다. 내가 접촉할 수 있는 가장 윗사람은 데스크 정도인데, 그도 결국은 월급쟁이인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랑 비슷한 감상을 느끼면서 살아간다. 왜, 거대한 기계 안에서 돌아가는 톱니바퀴로 활동하면서, 정작 이 기계가 어떤 구조인지도 모르는 그런 감상 말이다. 심지어는 이 기계가 어디에 쓰이는 기계인지도 모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안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아무튼 나는 거의 두 시간 정도를 스테이플러만 찍으면서 보냈다.
하지만 나는 주간 근무라서 그나마 나은 것이다. 야간 근무를 하면 시도 때도 없이 신문의 편집 구조가 바뀌어서 하룻밤 내내 편집국과 사무실을 들락거려야한다. 직급이 높아질수록 신경써야할 일도 많아지고 발품도 더 팔아야한다. 그래서 나는 직장의 사소한 부조리들에 대해서 가끔 불평을 하기는 하지만 야망은 없는 것이다. 나는 내 생활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는 벌고 있다. 혹은 내 벌이에 적합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그러면 된 것이다. 야망 같은 것을 가져서 어디다 쓰겠는가. 세계 최고의 신문기자가 되면 세계 최고의 노이로제에 걸릴 것이다. 나는 신경증 환자가 되는 것만은 사양하고 싶다. 나는 늘 내가 건강한 사람이라고 자부한다. 그 까닭은 바로 내가 욕심이 없기 때문이다.
서류 정리를 마쳤을 때 즈음에 데스크에서 나를 불렀다. 할 얘기가 있다는 것이었다. 데스크는 항상 귀찮은 일감들을 가져와서 나를 괴롭히기 때문에 나는 한숨을 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국장은 나더러 취재반에 다녀오라고 했다. 바로 삼십 분 전에 신촌역에서 누가 철로에 떨어지는 바람에 열차 운행이 중지되고 난리가 났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니 그것으로 짤막한 기사를 하나 쓰라는 것이었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하면서 생각했다. 대낮부터 누가 술에 취해서 떨어진 모양이군.
취재반에 가자 김 기자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나를 맞이했다. 그는 편집된 사진 몇 장을 보여주면서 메모가 지저분하게 적힌 노트 한 페이지를 건네주었다. 그러면서 그가 말했다.
“술이 아니야. 약에 취해있었어. 지금 그 사람은 병원으로 옮겨진 모양인데, 아직도 제정신이 아니라나 봐.”
“약이라고? 또 마약인가?” 내가 물었다.
“아니, 검사 결과 합법적인 약물이라던데.”
“그건 또 뭐야…… 그나저나 이 정도 사건으로 사진까지 찍어올 필요는 없었잖아.”
“그냥 절차상 찍어온 거지.” 김 기자가 픽 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그가 건네준 사진들을 무성의하게 훑어보았다. 남자 한 명이 철로에 엎어져있는 사진 한 장. 그 남자가 코에 붕대를 감고 병원 침대 위에 누워있는 사진 한 장. 두 번째 사진을 살펴보다가 나는 무심결에 내뱉었다.
“어디서 본 적 있는 얼굴인데.”
“아는 사람이야?” 김 기자가 물었다.
“아니, 몰라. 이름이 뭔데?”
“서른두 살 이 모 씨.” 그가 실실거리면서 대답했다.
나는 혀를 찼다.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는 얼굴인 것은 분명했는데, 모르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길을 가다가 스쳐지나갔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같은 서울 사는 사람이면 그럴 수도 있겠지. 나는 자료를 받아들고 사무실로 돌아갔다.
<오늘 오후 열두 시 삼십 분 경 신촌역 시청 방면 철로에 이용객이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 씨부렁씨부렁. 기사를 쓰는 일은 딱히 창조력이 필요한 일은 아니다. 말하자면 퍼즐 맞추기 같은 것이다. 노트 위에 단편적으로 흩어진 정보들을 조합해서 읽기 쉬운 문장으로 만드는 일. 그 정도 작업이다. 그리고 완성한 뒤에 내가 굳이 검토를 할 필요도 없다. 데스크에 제출하면 알아서 검토해주고 퇴짜를 놓거나 통과시키는 것이다. 물론 자꾸 퇴짜를 맞으면 짜증이 도지니 데스크로 갖고 가기 전에 몇 번 정도 손을 보곤 한다. 그러나 이 일이 무슨 백일장 참가하는 것도 아니고, 속된 말로 ‘와꾸’만 맞으면 충분한 것이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되어 나는 식사를 하러 나갔다. 점심시간에는 늘 박과 함께 점심을 먹는다. 나는 회사 사람들 대부분과 친하지만 박과는 특별히 붙어 다녔다. 그에게 무슨 매력이 있거나 더 좋은 점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가깝게 지낼 사람이 한 명 있으면 마음이 편한 까닭이었다. 박은 키가 작고 딱 바라진 몸매의 스물여덟 살 편집 기자였다. 그는 성격이 호탕하고 또 말투가 천박했는데, 나는 그런 것을 특별히 싫어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점심을 먹고 나면 늘 회사 건물 앞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잡담을 나누곤 한다. 나는 거의 말하지 않고 박이 떠드는 식인데 그의 대화 주제라는 것은 거의 매일 같이 여자 얘기다. 그는 자기 말로는 자신이 무척 여자 경험이 많다는 식으로 얘기를 하는데, 사실 그것은 신빙성이 별로 없다. 왜냐하면 겉보기에도 그는 잘 생긴 얼굴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나는 굳이 그런 점을 지적한 일은 없었다. 왜냐하면 잘 생긴 남자에게만 여자가 꼬이라는 법은 없고, 설령 그의 말이 거짓이더라도 그것은 별 문제가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박은 자신의 그 천박한 말투로 여자 경험에 대한 얘기를 몇 년이나 계속 늘어놓았기 때문에 그 말들이 만약 거짓이더라도 그의 내면에서는 이미 사실이 되어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담배를 피우면서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리는 것이다. 가끔 그는 가래 끓는 소리로 웃기도 하는데 나는 그 웃음소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것을 지적해서 무얼 하겠는가? 나는 그냥 잠깐 인상을 찡그리고 또 담배연기를 뿜을 뿐이다.
오후에는 일을 많이 했다. 점심을 먹고 나면 시간이 몹시 빨리 간다. 마치 내가 시간이라는 개념을 인지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그저 손을 움직여서 연필을 놀리고 서류를 묶고 데스크로 갔다가 편집부로 갔다가 사무실로 다시 돌아와서 하던 작업을 계속 한다. 그러다가 국장이 박수를 치면서 “자, 퇴근들 하시죠.”라고 하면 내가 일을 많이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사실 그것만이 국장의 좋은 점이다. 가끔 학창시절의 친구들 얘기를 들어보면 상사라는 것들은 하나 같이 잔업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시키려고 발버둥을 친다는데, 우리 국장은 시간에 대해서 결벽증이라도 있는 것처럼 퇴근 시간을 딱 맞춰서 사원들을 돌려보낸다. 덕분에 나는 저녁 시간에 여유롭게 집에 돌아갈 수 있으니 좋은 일이다. 이따금 박이나 동료 기자들이 저녁을 함께 먹자고 나를 부르기도 한다. 그러면 나는 거의 거절하는 일이 없다. 오늘도 역시 몇몇 동료 기자들이 저녁 식사에 나를 불렀다. 함께 모이게 되면 당연히 술도 마시게 된다. 우리는 회사 근처의 고기 집으로 가서 식사를 하며 술잔을 들었다.
술기운이 적당히 올랐을 무렵 나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가게 안은 시끌벅적하고 연기로 가득했다. 나는 갑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직 일어날 때가 아닌 것 같았다. 박은 동료 기자들과 떠들면서 호방하게 웃고 있었다. 분명히 시답지 않은 얘기를 하면서 낄낄거리는 것이리라. 나는 담배연기를 뿜고 나서 혼자 술을 한 잔 더 마셨다. 어젯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인지 피로가 슬금슬금 눈 밑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 내 옆에는 김 기자가 앉아있었는데 그가 나에게 물었다.
“더 안 먹나?”
“나 소식하는 거 알잖아.” 내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나는 담배 한 개비를 다 피울 동안 연거푸 술을 석 잔이나 마셨다. 아버지를 닮은 탓에 쉽게 술에 취하지 않는 것이 나의 장점이었다. 내 아버지도 타고난 술꾼이었다. 그러나 결국 술 때문에 죽었다. 이 년 쯤 지난 일이다. 그는 어느 겨울 날 밤에 한껏 술에 취해서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는데, 빙판을 잘못 밟는 바람에 미끄러져서 갈비뼈가 부러졌다. 그리고 지나가던 사람이 신고해 부른 구급차가 도착하기도 전에 죽었다. 장례식장에서 어머니가 눈이 빨개진 채로 눈물을 참고 있던 것을 기억한다. 그녀는 끝까지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그것이 그녀의 고집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어머니가 가엾기는 했으나 별 수 없는 일이었다. 나에게는 내 생활이 있었고, 내가 성인이 되었을 때부터 나와 어버이는 따로 살았다. 그래서 그녀는 혼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다지 비극적인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어머니에게는 늘 고독이 어울리기 때문이다. 비록 나만의 주관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 뒤 삼십 분 정도 더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술자리는 파장했고 나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택시를 타고 가는 동안 운전기사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가 내 아버지뻘 되는 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다소 어지러운 기분으로 택시기사들이 고된 생활을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 점을 인지하더라도 택시비가 너무 비싸다고 말했다. 그도 내 말에 동의하면서, 하지만 사실 택시비가 싸든 비싸든 자신들이 받는 수당은 거의 동일하다고 덧붙였다. 나는 알겠다고 말했다.
집 주변에 도착해서 시계를 확인하자 열두 시였다. 나는 길가에 잠시 서 있다가, 뭔가 못 다한 기분이 들어서 주변의 가게로 들어가 맥주를 한 캔 사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그것을 들고서 나도 모르게 놀이터로 발걸음을 향했다. 전날처럼 놀이터 옆 벤치에 앉아서 맥주를 따고 그것을 홀짝이면서 담배를 피웠다. 과연 오늘도 그 그네 타는 남자가 올 것인가 하는 궁금증이 날 붙잡아두고 있었다.
과연 그는 왔다. 열두 시 삼십 분 쯤 되어서 어떤 남자의 형체가 어둠 속을 기웃거리는 듯 하더니 불안한 발걸음질을 하며 그네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제대로 그의 얼굴을 보았는데, 그는 다쳤는지 코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나는 저 얼굴을 어디선가 보았다는 기분이 들어서 깜짝 놀랐다. 내가 기억을 더듬는 동안 그는 그네에 앉더니 사납게 고개를 흔들고, 욕지거리 같은 것을 내뱉으면서 힘차게 발로 땅을 밀었다. 쇠사슬이 끼익 거리는 소리가 놀이터의 적막 속에서 울렸다. 그리고 나는 기억해냈다. 그는 <서른두 살 이 모 씨>였다. 나는 놀라움 때문에 박수를 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럴 수가! 내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술기운과 흥분 때문에 달리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그네로 다가가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만, 선생님. 저는 당신이 누군지 알 것 같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네 타는 일을 멈추더니, 벌겋게 충혈 된 눈을 들어 올려 나를 쳐다보았다. 가까운 곳에서 보니 그는 퍽도 피부가 창백했고 코를 중심으로 감아놓은 붕대 주변에도 자잘한 상처가 가득했다. 그는 무언가를 생각하는가 싶더니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나는 당신을 모르는데……. 다만 어젯밤에 당신이 나를 보고 있었다는 것은 압니다.”
그의 목소리는 실로 괴상했다. 목소리 톤은 죽어가는 사람처럼 지글거렸고 사용해서는 안 되는 곳에 이상한 악센트가 붙어있었으며, 어조는 들쭉날쭉했다. 나는 그의 목소리만 듣고도 그가 정상적인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말씀 드리자면, 저는 신문기자입니다. 그런데 오늘 당신에 대한 기사를 썼죠.” 내가 설명했다.
“내가 신문에 나왔다고?”
“네. 오늘 신촌역에서 선로에 떨어진 것이 당신이시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네에 앉은 채로 한참이나 바닥을 내려다보더니, 창백한 얼굴을 들어 내 눈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담배 하나 주시겠소?”
나는 조금 놀랐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그러죠.” 내가 담배를 건네자 그는 앙상한 손으로 그것을 받더니 입에 물었다. 내가 불을 대주었더니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깊게 빨았다. 그리고 연기를 내뱉더니 돌연 다시 그네를 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네 위에서 앞뒤로 흔들거리며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나는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자고 일어나보니 코가 부러져있고 붕대가 감겨있더군요. 그래서 이 상처가 어쩌다 생긴 것인지 누구에게 물어봐야할지 곤란해 하던 참이었습니다…….”
그의 말마디는 그네가 흔들리는 금속음에 뒤섞여 중간 중간 끊겨 들렸고 분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문맥상 그렇게 말한 것 같았다. 나는 이 인물을 어떻게 생각해야할지 당황스러웠다.
“약에 취해 계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약이라.” 그가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그는 계속 그네를 타고 있었다. 나는 그 옆에서 멀거니 서있었고, 그에게는 대화를 지속할 의지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면 그가 사람과 대화하는 법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튼 간에, 그는 한참이나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약을 먹긴 먹었지.” 그리고 그는 다시금 담배연기를 뿜었다. “그리고 그 뒤로 기억이 없소. 일어나보니 내 방 이불 위였지.”
그렇다면 그는 약에 취해 정신이 없는 채로 길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지하철 역 안으로 들어가 선로에 떨어진 것이다. 무얼 하는 사람이기에 밤에는 혼자서 그네를 타고 낮에는 약에 취해 일도 없이 돌아다니는 것인가? 내 머릿속에는 의문이 들끓었고 이 남자에 대한 호기심이 마구 치솟았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제껏 내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괴상한 사람과 만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항상 약을 드십니까?”
“항상.” 그가 대답했다.
무슨 약을 먹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사실 기사 내용만 생각해봐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모르핀이나 뭐, 그런 것들이겠지. 그는 그네에 앉아서 초점이 없는 눈동자로 자신이 내뱉은 담배연기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한 줄기 담배연기가 될 수 있다면…….” 그가 갑자기 중얼거렸다.
“뭐라고 하셨죠?”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네를 흔들다가, 거의 다 타들어가 필터만 남은 담배꽁초를 던져버렸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한동안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내게 말을 걸었다.
“왜 내게 관심을 갖는 거요?”
나는 짧은 시간이지만 고민을 했다. 왜 그에게 관심을 갖느냐고?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나는 그에게서 거울에 비춰진 내 얼굴의 뒷면을 본 것일 수도 있겠다. 그의 피폐한 눈동자와 앙상한 뼈대, 그리고 회의로 물든 창백한 얼굴에서 말이다. 하지만 자신이 쓴 기사의 장본인을 직접 만나는 것 자체가 충분히 흥미로운 일이다. 나는 결국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런 시간까지 잠을 자지 않고 있으면 다음 날 지장이 생길 텐데.” 그가 말했다.
“내일은 휴일입니다. 내키는 만큼 잘 수 있죠.”
“아, 내일이 휴일이라고? 나는 몰랐소. 나는……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잘 인지하지 못해요.”
이 남자는 직업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기는 이런 사람이 어떻게 사회생활을 해나갈 수 있을 것이란 말인가? 길거리에서 이러한 얼굴을 하고 걸어 다니는 사람을 보게 되면 누구라도 길을 피해갈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표정은 너무나도 우리의 마음을 위협한다. 누구나 안고 있는 죽음에 대한 불안, 삶에 대한 회의, 나락 밑바닥에서 생활하는 비실재자들의 감정을 그의 표정은 너무도 쉽게 자극한다. 모든 본질적인 정신의 위협을 가까스로 잊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의 눈동자는 지극히 위협적인 것이다. 그의 표정 위를 감도는 걷잡을 수 없는 공허를, 말로 표현하기 힘든 그 염세의 향취를 어떻게 형언해야할지 모르겠다.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될 수도 있다. 나는 이 사람이 철학자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읽었던 고흐의 편지집 가운데에서, 철학은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는 글귀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서 도망치지 않았다. 내 마음속에서는 정체불명의 형제애 같은 것이 피어나고 있었다. 왜 이런 생면부지의 인간에게 형제애를 느끼는 것일까? 모르겠다. 어쩌면 내 마음 속에도 이 남자와 똑같은 병든 인간이 잠들어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누구나 느껴보았을 그런 감정들, 거지나 길거리 벤치 위에 누워서 자고 있는 부랑자들을 볼 때마다 느끼는 부조리한 동질감. 그런 것들이 있을 수 있다. 병든 사람들에 대한, 한없이 죽음에 가까운 사람들을 볼 때마다 느끼게 되는, 마찬가지로 죽음을 향해 전진하고 있는 우리들이 느끼게 되는 <인간으로서의> 유대. 그러나 정신 속에서 익사하기를 거부하고 사회체제의 일부가 된 우리가 그들의 형제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다. 그것은 오히려 그들에 대한 모독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나는 이 남자의 손을 잡고 싶다고 느꼈다.
내가 감상적이거나 동정심이 많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도 그저 가끔씩 부랑자들에게 천 원짜리 지폐를 쥐어 주며 값싼 자기만족을 느끼는 누구나와 다를 바 없는 이기주의자일 뿐이다. 그러나 이 남자는, 자신이 내가 보아온 그 누구보다도 피폐하다는 것을 첫인상만으로 깨닫게 만든 이 남자는 나의 흥미를 자극하고 또 내 안의 양심을 자극했다. 양심? 그게 무엇인지는 아직도 잘 알지 못한다. 굉장히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인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내가 언어철학자가 아닌 이상 그 개념을 언어화하는 데에 커다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그런 단어들을 쉽게 사용한다. 양심, 사랑, 경외, 희망 등,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사용하는 단어들 말이다.
“왜 밤마다 이곳으로 오십니까?” 내가 물었다.
“태양빛을 견딜 수가 없으니까.” 그가 죽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낮에는 무얼 하십니까?”
“약을 먹지. 가끔 주사를 놓기도 하고. 그러면 푸른 하늘과 빛나는 태양을 보아도, 끔찍한 기분이 덜하다오. 그리고 잠을 자지. 다시 해가 저물 때까지.”
“낮을 두려워하십니까?”
“그렇소.”
나는 어째서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것은 너무 추상적인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두려워하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공포라는 것은, 논리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다. 혐오와 마찬가지다. 그가 낮을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자신도 이해하지 못할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을 캐묻는 것은 그리 좋은 일이 아니다. 나는 담배를 한 개비 꺼내서 입에 물었다. 이 사람에게는 세계가 어떻게 보일까? 분명 나의 세계와 이 남자의 세계는 모든 것이 다를 것이다. 나의 세계가 무미무취하고 건조하다면, 이 남자의 세계는, 아, 내가 어떻게 추측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와 몇 가지 무의미한 대화를 간간히 나누다가 작별인사를 하고 놀이터를 떠났다. 그는 손을 들어 인사에 답한 뒤 다시 그네 타는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내가 놀이터를 떠날 때까지 그는 그네 위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다소 어리둥절하여 집까지 걸어간 뒤, 문을 열고 들어가 외투를 벗은 뒤에 얼굴을 씻었다. 그리고 나는 침대 위에 누워서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며 담배를 한 대 더 피운 뒤, 혈관 속을 흐르는 알코올의 감촉을 느끼며 잠에 빠져들었다.
정오에 즈음하여 잠에서 깨었다. 이상한 꿈을 꾼 것 같았는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는 매일 아침 하듯이 얼굴을 씻고 테이블 의자에 앉았다. 그다지 배가 고프지 않아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아침은 먹지 않았다. 창밖에서는 봄 특유의 잔물결 같은 햇볕이 대지 위로 내리쬐고 있었다. 휴일에 나는 달리 하는 일이 없다. 저번 주에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책장을 조금 넘기다가 산책을 하고, 점심을 먹은 뒤에 낮잠을 자고, 저녁이 되면 혼자서 술을 몇 잔 마신 뒤에 잠에 들 것이다. 나는 한동안 의자에 앉아서 손톱을 물어뜯다가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걸쳤다. 날씨가 좋은 것 같아서 산책을 나가려는 까닭이었다. 나는 주머니에 담배와 라이터를 챙겨 넣고 집 밖으로 나갔다.
건물 밖으로 나서자 같은 동에 사는 늙은이가 벤치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에게는 가족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나는 가끔 그와 대화를 나누곤 한다. 가족이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보다 독거노인과 대화하는 것이 훨씬 편하다. 내가 그를 향해 고개를 꾸벅하고 숙여보이자 그도 끄떡하고 화답했다. 그러고 보면 어머니도 지금 혼자 살고 계실 것이다. 어머니가 더 늙게 되면 양로원에 보내드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어머니는 언제나 누구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으면 몸이고 정신이고 약해지기 마련이지만, 나는 어머니가 그렇게 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강철 같은 인물로 존재할 것이다. 아니면, 자신이 약해지리라는 예감을 느낄 때 즈음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 알겠는가. 나는 모른다. 시간이 어머니를 어떻게 바꿔놓을지. 사실은 별로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내 삶만 유지하면 된다. 내 삶은 지금도 퍽 만족스러운 것이다. 그 이유는 전에도 말했듯이 내게 욕심이 없는 까닭이다. 아무튼 나는 담배를 입에 물고 가벼운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아직은 가끔 냉랭한 바람이 불었다. 그래서 담배에 불을 붙이는 데에 조금 고생을 했다. 나는 놀이터로 가보았다. 몇 명의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사람이 없었다. 그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하기는 그럴 테다. 이미 완연한 낮이 아닌가. 나는 돌계단을 내려가 주택가의 골목으로 들어갔다. 들 고양이들이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도망가곤 했다. 어릴 적에 고양이 시체를 가지고 놀다가 어머니에게 혼이 났던 것이 돌연 기억났다. 그 고양이 시체는 외상은 없었으나 들어 올리면 몸체가 축 늘어지고, 눈알이 뒤집혀있었다. 생각해보면 그 지저분한 것을 잘도 만졌었다.
담배를 피우며 골목을 돌아다니고 있는데 낯익은 사람을 만났다. 그 남자였다. 그는 골목 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는데 나를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내가 그와 자주 만난다는 것을 자각하고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아무튼 나는 길 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는데, 아무래도 그는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산발한 머리를 푹 숙이고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리며 걷고 있었다. 그러다가 주차된 자동차 위에 엎어지기도 하고, 멀어서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끊임없이 무어라고 혼잣말을 외고 있었다. 약을 먹었군. 내가 생각했다. 그는 가끔 고개를 번쩍 들어서 하늘을 쳐다보다가 무슨 질 나쁜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인상을 찡그리며 다시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 나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내가 바로 지척까지 다가왔는데도 그는 주변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도무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서 나는 그의 흔들리는 어깨를 잡고 말했다.
“선생님.”
그는 눈동자를 들어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눈동자는 구렁텅이에 빠진 것처럼 쑥 들어가 있었고 흰자위에는 온통 핏발이 서있었다. 그리고 그의 입술은 바싹 말라서 허옇게 갈라져있었고, 그 입술 사이로는 계속해서 낮은 신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한동안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더니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 그러니까…… 반갑소. 하지만 괜찮습니다. 그런데 여기가 어디요?”
“상태가 안 좋아 보이시는군요. 여기는 저희 집 주변입니다.”
남자는 내 말을 들으면서 목을 가누지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계속 고개를 덜렁거렸다. 그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고 목소리는 다리가 부러진 바퀴벌레를 연상케 했다.
“거짓말이야…….” 그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중얼거렸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여기는 우리 동네인데요…….”
“아니, 아니오. 당신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지. 그런데 나는, 안 돼……”
그렇게 말하더니 남자는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또 내일이 왔어>라고 읊조렸다. 당연한 얘기지만 나는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약에 취한 사람과 어떻게 커뮤니케이션을 한단 말인가. 그때 그가 또 말했다. <집에 가고 싶어>라고 말이다.
“집? 집까지 부축해드릴까요? 집이 어디십니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그는 거의 내게 온몸을 기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때 나는 그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왼쪽 눈에서는 투명한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가 왜 울고 있는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어째서 우는 것이냐고 물어볼까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제대로 된 대답이 돌아올 것 같지 않았기에 그만 두었다.
“돌아갈 곳은 어디에도 없소. 그러니까, 아, 아아, 전부 허구야…… 그들의 약속을 믿어서는 안 돼요…… 구원은, 그런 것은…… 통제할 수 없는, 운명만, 그렇습니다. 꿈도 현실도 끔찍한 것은 매한가지야…… 어디로……” 그는 연속되지 않는 말마디를 마구잡이로 내뱉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는 계속 눈물이 흘렀고, 말마디 사이사이에는 지독한 금속성의 신음소리가 섞여 들렸다. “어디로 가야 하지?” 그는 한숨을 쉬듯이 그렇게 말했다.
나는 이 남자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곤혹스러웠다.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은 집이 없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 남자를 어디로 데려가야 한단 말인가? 이렇게 엉망으로 약에 취한 사람을 내버려두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내가 당황해하고 있을 때, 그는 자신의 외투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더니 종잇조각과 열쇠를 하나 꺼내서 내게 내밀었다.
종잇조각에는 주소가 쓰여 있었다. 이 동네의 어느 주택을 표시하는 주소였다. 나는 그것이 남자의 집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열쇠를 주머니에 넣고서, 남자를 부축하며 종잇조각에 쓰여 있는 주소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가는 길에도 남자는 계속 뭐라고 말마디를 중얼거렸으나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유일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은 내게 거듭 사과하다가 갑자기 담배를 한 대 줄 수 있겠느냐는 말 뿐이었다. 나는 그의 입에 담배를 물려주고 불을 붙여주었다. 그는 담배연기를 빨아들일 기력조차 없는 것 같았지만 조금씩 담배를 피우며 내 어깨에 기댄 채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종잇조각에 쓰여 있는 곳에 도착했다. 내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주소가 표시하고 있는 것은 어느 낡은 연립주택의 지하층이었다. 나는 그를 거의 짊어 매다시피 하고 계단을 내려가 열쇠로 현관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지독한 곰팡이 냄새가 끼쳐왔다. 안으로 들어가자 집의 구조를 대강 알 수 있었다. 거실은 없었고, 부엌에서 바로 이어지는 작은 방과 화장실이 하나 있을 뿐인 좁고 어두침침한 집이었다. 나는 신발을 벗고 그의 신발도 벗긴 뒤에 그를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방 안에 이불이 깔려있기에 나는 남자를 그리로 끌고 가서 눕혔다. 이제야 갈 수 있겠군. 내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는 호기심이 동해 좁은 방 안을 두리번거렸는데, 책상이 하나 있었고, 방의 여유 공간은 거의 다 책장이 차지하고 있었다. 온통 책들뿐이었다. 책상 위에는 노트가 하나 펼쳐져 있었는데 작은 글씨로 빼곡히 무어라고 써놓은 것들이 보였다. 그러나 실례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읽지 않았다.
이제 돌아가야 했다. 나는 이불 위에 정신없이 누워있는 남자를 한번 슥 쳐다본 뒤에 방을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남자가 작은 소리로 흐느끼며 무어라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망할, 죽여줘…… 아니야, 죽이지 말아줘…….”
내가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까? 알 도리가 없었다. 입 안에 씁쓸한 맛이 느껴졌다. 나는 눈을 감고 우는 그의 얼굴을 한동안 쳐다보다가 열쇠를 책상 위에 놓고 밖으로 나갔다. 현관문을 닫았으나 잠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냥 건물 밖으로 나가서 담배를 하나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그 남자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몇 명이나 있을까? 문뜩 그런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담배를 피우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뒤늦게 허기를 느껴서 식사를 했다. 절인 채소와 밥이 전부였다. 나는 음식을 그다지 가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미식가가 아닌 것이다. 사실 나는 맛있는 음식이 어떤 것인지 잘 알지 못한다. 배가 고프면 먹고, 배가 고프지 않으면 먹지 않는다. 그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맛있는 음식을 찾거나 만들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투자하곤 한다는데, 그것은 그들의 특성일 것이다. 이해는 하지만 공감할 수는 없다. 나는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한 뒤에, 베란다에 앉아서 담배를 피웠다. 닫아놓은 유리창 안에서 내다보는 대지는 평화로웠고 날씨가 좋았다. 아이들이나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온 여자들이 가끔 눈에 띄었다. 그러나 그러한 장면들은 내 마음을 아프게 하기 때문에 나는 바로 눈을 돌렸다. 하늘을 보는 것이 가장 편했다. 흰 구름들이 적당한 그늘을 만들어주는 푸른 봄 하늘 말이다. 가끔 이렇게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휴일을 보내고 있으면, 취미를 하나쯤 만들어보는 것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곤 한다. 하지만 실천해본 일은 없다. 무얼 해야 좋을지 모르는 까닭이다. 어쩌면 국장과 함께 골프를 치러 다닐 수도 있고, 박처럼 취미의 일환으로 여색을 즐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든 간에 그다지 입맛이 당기지 않았다. 일주일 간 많이 일을 한 뒤에 휴일에는 사치스럽게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내게 가장 잘 맞는다. 나는 담배를 다 피우고 의자에 앉아서 창밖을 내다보다가 눈을 감았다. 따스한 햇볕이 몸 위로 내리쬐었고 밖에서 들리는 소음들은 창문을 통과하면서 부드러운 울림이 되었다. 가끔 그 남자에 대한 생각이 뇌리에 떠올라서 나를 슬프게 만들었지만, 이미 나는 졸음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깨어나니 저녁이었다.
나는 자면서 꾼 꿈에 대해 생각하면서 부스스 눈을 떴다. 어머니와 만났던 것 같다. 어머니는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원망하는 눈 같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가슴이 아팠고, 동시에 작은 분노를 느꼈다. 이상한 노이즈가 꿈속에서 울려 퍼졌던 것 같다. 고요가 감정을 진정시켰고, 마침내는 근육조직마저 잠들게 만들었다. 나는 손을 뻗어서 어머니의 손목을 잡으려고 했지만 팔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어머니가 내게 말했었다. “어째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어째서라니요? 무슨 말입니까?” 그러나 어머니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나는 잠에서 깨었다. 그런 꿈이었다.
나는 여전히 잠에 취해 비틀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냉장고 문을 닫았다. 바깥은 이미 어두컴컴했다. 아직 하늘에 붉은 노을의 색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거의 밤이나 마찬가지였다. 아, 너무 오래 잤군. 내가 중얼거렸다. 나는 시계를 확인했다. 일곱 시.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했다. 아직도 약에 취해있을까? 지금쯤이면 약기운이 다 날아가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화장실로 가 다시 얼굴을 씻었다.
침대 위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박이었다. 그는 내게 술 한 잔 하러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자네도 참 술 좋아하는군.” 내가 말했다. 그러자 그는 웃었다. 나는 좋다고 했고, 그가 우리 집 근처로 오기로 했다. 나는 책을 덮어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은 삼십 분 쯤 후면 도착할 것이었다. 나는 외투를 꺼내서 입고 지갑과 담배를 챙겼다. 삼십 분 정도는 금세 지나가버린다. 어둠이 깔린 땅 위에서 담배라도 물고 있으면 삼십 분이고 한 시간이고 화살과 같다. 나는 기분이 좋았다. 오늘이 아직 휴일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내 생활은 여전히 평화롭고 고요했다. 그래서 가끔 나는 내게 직업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감사한다. 주중에 바쁘게 일을 하기 때문에 내게 휴일이 있을 수 있고, 또 나태한 시간이 있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집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오자 마지막 남은 태양빛이 하늘 끝자락에서 부서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낮에 늙은이가 앉아있던 곳에 앉아서 담배를 물었다. 풀과 봄 냄새가 났다. 생명들이 깨어나는 냄새. 농밀한 물의 냄새. 그러나 담배에 불을 붙이자 그 냄새들도 전부 담배 향에 지워졌다. 한동안 나는 그곳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날씨가 좋았고 나는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세상이 지속된다는 것은 참으로 괴상한 일이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 아침에 해가 떴다는 이유만으로 내일도 해가 뜨리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다들 그런 의심을 갖지 않고 살아간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삼십 여 년 가까운 세월동안 해가 뜨지 않는 아침을 본적이 없으니, 사실 인간의 사고방식이라는 것은 대부분이 귀납적이다. 그러나 귀납적 추론이라는 것은 언제나 부서지기 마련이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솟아오를지도 모른다. 거대한 바퀴벌레가 하늘을 날아다니며 사람들을 채어갈지도 모르는 것이다.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것을 걱정한다고 무슨 수가 있담? 실상 세계의 불확정성을 인지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어떤 사람들은 큰돈을 들여 방공호를 짓고 지하실에 통조림을 쟁여놓기도 하지만, 글쎄,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미래가 전개되어가는 방식에 의미를 부여할 수도 없다.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그냥 톱니바퀴다. 만일 누군가가 망치로 기계를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고 해도 어떻게 막을 방법이 없다. 게다가 나로 말하자면 의욕도 없다. 지금까지 내 인생은 꽤 즐거운 것이었다. 그러니까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없이 끝나버리더라도 아쉽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나는 방공호를 짓거나 권총을 들고 다니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어느새 박이 골목 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담배꽁초를 쥔 손을 들어 그에게 인사를 해보였다. 그가 웃음 짓는 것이 보였다. 나는 꽁초를 바닥에 버리고 박을 향해 걸어갔다.
“일찍 왔군.” 내가 말했다.
“가까우니까. 차가 필요 없으니까 참 좋군.”
“날씨도 좋으니까.” 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박은 내게 저녁을 아직 먹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는 잘 됐다면서 근처의 가게로 가자고 했다. 나는 아무 말도 없이 그를 따라나섰다. 박은 길을 가다가 고기집 하나를 가리키며 어떠냐고 물었다. “또 고기야?” 나는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박에게 국밥이랑 함께 소주나 마시러 가지 않겠냐고 했다. 그는 좋다고 말했다. 우리는 가까운 해장국 가게로 들어가서 메뉴판을 좀 들여다보다가 식사와 술을 주문했다.
“내가 요새 만나게 된 사람이 있는데.” 식사가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내가 입을 열었다.
“만나게 된 사람? 누군데? 여자야?”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어쩌다보니 알게 된 거야. 그리고 남자야.”
“재미없군.” 박이 콧방귀를 뿜었다.
“얘기 들어보면 재미있을 걸. 얼마 전에 내가 기사를 썼잖아. 신촌역에 떨어진 남자 말이야. 그 사람이 같은 동네에 살더라고.”
“흠.” 의외로 박은 심드렁했다.
“신기한 사람이었어.”
더 이야기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애당초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식사가 나왔다. 우리는 식사를 시작했다. 박이 소주병을 따서 내 잔을 채워주었다. 우리는 시답지 않은 대화를 하며 술을 마시고 밥을 먹었다. 술이 좀 들어가자 박은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그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나는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아마 그가 데스크에 대한 불평을 이야기했던 것 같다. 나는 그저 수긍하고 말 뿐이었다. 우리는 밥그릇을 다 비우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박은 자신이 나를 불러냈으니 계산은 자기가 하겠다고 했다. 나는 내 몫을 내려고 했지만 그에게 저지당했다. 우리는 가게 밖으로 나왔다. 공기에서 물방울 냄새가 났다. 비가 오려는 모양이었다. 박은 이미 얼근히 취해있었지만 더 마시고 싶은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2차는 내가 낼 테니 내가 알고 있는 술집에 가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는 박수까지 치며 좋다고 말했다. 우리는 조금 걸었다. 내가 향하는 술집은 골목가의 카페들 사이에 있는 작고 어두운 바(bar)인데, 나는 거의 오 년 전부터 그곳의 단골이었다. 나는 항상 소주를 마시면 슬프다. 우리가 간단히 구입하고 취할 수 있는 것이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는 희석식 소주 밖에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돈을 조금 더 쓰더라도 술이 마시고 싶을 때면 혼자서 양주 따위를 마시곤 한다. 내가 비가 오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이에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구석진 곳이군.” 박이 말했다.
“맞아. 그래서 손님도 별로 없지.”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바는 지하층에 있었기 때문에 계단을 내려가야 했다. 박이 조금 비틀거리는 것 같기에 나는 그의 팔을 잡아주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머리가 길고 안경을 쓴 사장이 내 쪽을 보더니 웃으면서 나를 반겼다. 그는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언제 알려주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그의 이름을 모른다. 그저 사장이라고 부를 뿐이다. 손님은 한 명도 없었다. 어두컴컴한 조명만이 텅 빈 가게를 비추고 있었다. 우리는 테이블을 하나 잡고 앉았다. 나는 박에게 무얼 마시고 싶으냐고 물었는데, 그는 자신은 양주에 대해 그다지 아는 것이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내 독단으로 브랜디 한 병과 과일을 주문했다. 사실 어른이 되어서 좋은 점이라고는 이것 하나뿐이다. 술을 마실 때 지갑 속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 말이다. 게다가 나는 평소에도 거의 돈을 쓰지 않고 살기 때문에, 술 한 병에 십여 만원을 소비하는 것을 낭비라고 할 수도 없다.
나는 주문을 하고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그것을 보고 박이 자기 주머니를 뒤지더니, 담배를 놓고 왔다면서 내게 한 개비만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기꺼이 내주었다. 얼마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박과 나의 담배에 불을 붙이고 의자 등받이에 기대면서 연기를 내뿜었다.
곧 술과 안주가 나왔다. 사장이 직접 브랜디의 병마개를 열어주었다. 우리는 서로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고, 나는 그것을 단숨에 마셨다. 독한 알코올이 기름과 연기로 찌든 내 내장을 나무 향내로 씻어냈다. <나는 한 모금의 지독한 독을 꿀꺽 삼켰다…….> 나는 어딘가에서 읽었던 구절을 혼자서 중얼거렸다. 아까 마신 소주 때문에 다소 취기가 올라있는 것 같기도 했다. 박도 잔을 다 비웠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술이 들어가니까 여자 생각이 절실하군.”
하! 나는 웃었다. 그는 어쩌면 그렇게 정력적일 수 있을까? 아니면 퇴폐적이라고 할까? 사실 둘 다 똑같은 말이다. 나는 내가 여자와 자본 지가 너무 오래 되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면 안 되지. 자네 같은 친구가 말이야…….” 박이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그다지 내키질 않는 걸.”
“이상한 녀석!” 박은 그렇게 말하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너는 이상한 녀석이야.”
그의 말에 나도 따라 웃었다. 우리는 계속 술을 마셨다. 지금 이 순간만은 나는 알코올이 좋았다. 술을 많이 마실수록 내 몸과 영혼이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누구나 깨끗한 것을 좋아한다. 스스로 지저분해지려는 인간은 없다. 없을 것이다. 적어도 나의 귀납적 추론에 의하면……. 하지만 그는 어떨까? 나는 문뜩 그 그네 타는 남자의 피폐한 눈동자를 떠올렸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는 없다. 그런 방법은 없는 것 같다. 어쩌면 행복의 총량이라는 것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고로 누군가가 행복하다면 지구 반대편의 누군가는 반드시 불행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들에게 죄악감을 가지라고 설파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전 세계 사람들이 동일한 양의 행복만 갖고 살아가야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행복한 사람에게 불행하라고 말할 수는 없다. 부자에게 가난하라고 할 수는 있어도, 행복은 별개다. 그런데 나는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가? 내가 행복하기 때문에? 그런데 나는 행복한가? 나는 딱히 불행하지는 않다. 사는 것은 즐겁다. 괴로운 일도 물론 있지만, 괴로운 만큼 즐거운 것이다. 고로 나는 행복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자네는 행복한가?” 나는 갑자기 박에게 물었다.
“뭐야? 왜 갑자기 그런 걸 물어봐? 취했나?”
“모르겠는데.”
“흠, 글쎄. 지금도 충분히 지낼 만 한데. 하지만 아내가 생긴다면 더 행복해질지도 모르지.”
“아내라고?” 나는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그래.”
“그럼 자네가 늘 말하는 그 많은 여자들은 다 어떡하고?”
“언제까지고 여색만 즐기면서 살 수는 없지. 왜냐하면 나도 언젠가는 나이를 먹을 것 아닌가.”
나는 웃었다. 박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어쩐지 우스웠다. 나는 담배를 꺼내서 테이블 위에 놓고 술을 한 잔 더 마셨다.
“결혼은 힘들어.” 내가 말했다.
“알지. 하지만 자네도 미혼자잖아?”
“그렇긴 하지.” 나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피울 텐가?”
“됐어.” 내가 담배를 내밀자 그가 거절하면서 말했다.
우리는 이런저런 얘기들을 했다. 나는 술을 마시는 일에 집중해있었기 때문에 굉장히 건성으로 대화를 했지만, 박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얼마쯤 지나자 그는 굉장히 취했고, 더 마시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나는 조금 남은 브랜디를 전부 해치우고 그를 자리에서 일으켰다.
“괜찮나?” 내가 물었다.
“그래, 좀 취하는군.” 그는 내 쪽을 보고 웃으려고 하면서 말했다. “양주 한 병을 둘이서 마시는 일은 자주 없으니까.”
나는 그를 부축하면서 계산대로 갔고, 지갑에서 돈을 꺼냈다. 박이 취한 와중에도 지갑을 꺼내려고 하기에 나는 그의 지갑을 도로 주머니에 억지로 집어넣었다. 사장이 나에게 호의적인 미소를 보이면서 다시 오시라고 인사를 했다. 나는 그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았다. 나에게 호의를 갖고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참으로 괴상한 일이다. 이해하기 힘들다는 말이다. 나는 입맛을 다시다가 박과 함께 가게 밖으로 나갔다. 그를 부축하면서 계단을 오르는 데 좀 애를 먹었다.
거리로 나오자 선선한 공기가 얼굴에 끼쳤다. 나는 기분이 좋았다. 술을 살 돈이 있고, 함께 마실 친구가 있고, 거리에는 비도 내리지 않는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 이미 자정이 지나있었다. 나는 박에게 집까지 어떻게 갈 것이냐고 물었다. 그는 걸어가고 싶지만 너무 취한 것 같아서 택시를 타야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차가 다니는 큰길까지 걸어 나왔다. 새까만 하늘은 습기를 머금고 당장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매일 밤 하늘에서는 종말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맴돈다. 나는 그 냄새가 좋다. 언젠가는 이 모든 일들도 완벽하게 끝날 것이다. 밤의 하늘에는 그런 예감을 들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그래서 나는 노래를 부를 것 같았고 시야 주변에서는 가끔 섬광의 다발이 뛰놀았다. “죽음이 있기 때문에 행복이 있는 거야.” 나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것 같은 작은 목소리로 노래하듯이 중얼거렸다. 박은 내 혼잣말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비틀거리면서 내게 기댄 채로 걷고 있었다. 문득 모든 것이 다 꿈과 같은 것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깨고 나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 거품 방울 같은 꿈 말이다. 그래서 나의 가슴은 환희를 느꼈다.
큰길에서 택시를 잡았다. 박을 태워 보내고, 나는 집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리에는 술 취한 사람들과 손을 맞잡은 연인들이 봄의 밤 냄새를 즐기면서 걷고 있었다. 하늘이시여, 부디 종말을! 내가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취기 때문이었다. 나는 안타까울 것이 없었고 모든 것이 다 만족스러웠다. 내게는 미래를 사고할 여유가 없었다.
어느새 나는 예의 그 놀이터에 와있었다. 그곳에는 이미 그가 있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그네를 타며 지친 눈으로 가로등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불현 듯 나의 환희를 그에게도 전해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솟아올랐다. 형제여, 형제여. 그러나 나는 그가 어떤 혼돈 속에서 발버둥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뿐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남자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우리 둘은 잠시 동안 서로 바라보았고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낮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십니까?”
“낮에?” 남자는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저 앞에서…… 당신은 몹시 약에 취해있었어요.”
“낮에…… 그래,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군요. 낮에 당신을 만났었어…….”
“제가 댁까지 모셔다드렸죠.”
“내 집에 들어왔다고?” 그는 이제 고개를 숙인 채로 말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당신은 열쇠를 자물쇠에 꽂아 넣을 기력도 없었으니까요.” 내가 변명하듯이 말했다.
“그래, 뭐, 아무래도 좋소. 당신에겐 감사인사를 해야겠군.”
“아닙니다. 그런데 다만, 왜 당신은 항상……”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무얼 물어보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왜 내가 그에게 형제애 같은 것을 느끼는지도 알지 못한다. 분명히 해둬야 할 것은 이것은 동정심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동정심 같은 것은 절대 아니다. 나는 그를 동정할 수 없다. 어떻게 동정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의사라도 된단 말인가? 아, 나락 밑바닥에 빠진 사람들을 보고 한숨짓는 사람들은 저주받으라. 우리는 모두 똑같은 진창 속에 있다. 아마도 말이다.
“항상…… 당신은 왜……” 나는 더듬거렸다. 내가 무슨 답을 찾으려고 하는 것인지, 나 자신도 한심하게 느껴졌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아마도 인생은 무엇이냐는 것이거나 사람은 왜 고통 받느냐는 것 따위의 턱없이 추상적이고 대답할 수도 없는 질문일 것 같았다. 그런 것을 묻는 것은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증명하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 아마도 술이 나를 우둔하게 만들었나보다. 나는 입술을 뻐끔거리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엇이 궁금한 거요?” 그가 말했다.
“아닙니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어.” 그는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소. 왜냐하면 언어란 유령과 같은 것이니까.”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분명 아무것도 믿고 있지 않았다. 그는 내던져진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에게는 두 발을 디딜 대지조차 없을지도 몰랐다. 나는 취기와 입안에서 느껴지는 씁쓸한 맛 때문에 눈을 감았다. 닫힌 눈꺼풀 사이에서 어둠이 알코올을 타고 출렁거렸다. 그네의 연결 부위가 끼익 거리는 소리만 귀 주변을 맴돌았다.
나는 다시 눈을 뜨고 그 남자를 보았다. 다시 보니 그는 낮에 보았던 차림새 그대로였다. 그런데 그의 셔츠에는 피가 묻어있었고, 손에도 말라붙은 핏자국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 그에게 그것이 누구의 피냐고 물었다. 그러자 남자는 그네 타는 것을 멈추더니, 아나키스트의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해가 저물고 나서, 갈보집에 찾아갔소.” 그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내가 말한 일이 있던가? 나는 성불구자요. 살면서 단 한 번도 절정을 맞이해본 일이 없소. 나는 짐승이 느낄 수 있는 가장 저차원적인 쾌락을 맛보는 것조차 금지 당했소.”
나는 어떤 생각을 했다. 내가 그에게 형제애를 느낀 이유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의 눈동자를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했지. 만약 섹스를 하는 것이 직업인 여성들이라면, 내게 쾌락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나는 갈보집에 갔소. 가서 여자를 샀지. 그러나 내 눈에는 그 나체의 여인이 통나무와 다를 바 없이 보였고, 관계를 시작하고도 내 마음에는 어떠한 흥분도 고동치지 않았어. 그래서 나는 울 것 같았고, 고함지를 것 같았고, 욕지거리를 내뱉을 것 같았소. 그러나 그런 것은 끔찍해. 내가 인간조차 아니라는 생각이 나를 잡아먹을 것 같았소. 내 메마른 눈물샘에는 눈물 대신 절망이 끓어올랐고, 내 심장은 차갑게 얼어붙어서 불꽃같은 냉기가 혓바닥을 날름거렸지.”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재떨이를 들어 그 여자를 때려죽였지.”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했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놀라지도 않았다. 영원 속에서 사유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이다. 그는 필경 십 년 전에 이미 그 살인을 저질러야만 했을 것이다……. 너무 늦게 찾아온 일이었다.
“당신은.” 나는 띄엄띄엄 말했다. 명확하지 않은 언어가 혀끝에서 억지로 기어 나오려고 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얻었습니까?”
그러자 그는 웃었다. 나는 그가 웃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는 소리도 내지 않고 입을 길게 찢으면서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아무것도.”
나는 그를 끌어안고 싶었다. 그의 손을 온 힘을 다해 마주잡고 그의 등을 두들겨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그런 것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는 영원 속에 있었다. 나는 그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이것은 모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들은 도무지 손 댈 수조차 없는, 완전하고 끊임없는 혼돈이며, 그가 태어날 때부터 깊이 새겨져있던 끔찍한 흉터였다.
나는 광막한 대지를 보았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서 모래를 파먹으며 지평선을 향해 기는 사람도 보았다. 나는 그에게 팔을 뻗으려고 했지만 닿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는 굶주린 개의 눈동자처럼 뿌옇게 번져있었고 하늘에서 내리쬐는 치명적인 태양빛에 눈이 멀어있었다. 나는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비틀비틀 벤치로 걸어가 앉았다. 남자는 계속 그네를 탔다. 나는 토할 것 같았고, 혹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누군지도 모르는 누군가를 저주하다가, 벤치에 앉은 채로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니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나는 그 남자가 이미 돌아갔는가 싶어서 고개를 들었다. 그는 여전히 놀이터에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그네를 타고 있지 않았고, 그네 앞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피폐한 눈동자에 새벽하늘이 비쳤다. 빛이 다시 대지 위를 비추기 시작하려고 하고 있었다. 남자는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도무지 이 세상의 인간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비참한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안 돼.”
그리고 그는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도망치듯이 어디론가 빠르게 걸어갔다. 그는 놀이터를 벗어나서 정신없는 발걸음으로 주택가 쪽으로 향했다. 그의 뒷모습은 공포에 질린 것 같았고, 한편으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절망에게 짓눌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갔다. 가버렸다. 나는 잠기운 때문에 몽롱한 상태로 그 사라져가는 뒷모습을 보았고, 얼마 뒤에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다.
그 뒤로 단 한 번도 그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 그는 더 이상 밤에 그네를 타러 놀이터로 오지도 않았고, 약에 취한 채로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나와 마주치는 일도 없었다. 나는 그를 잊으려고 했다. 그의 존재는 인생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너무 커다란 위협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휴일이 끝나자 평소처럼 회사를 나갔고, 일을 많이 했으며, 가끔 박이나 김 기자와 식사를 했다. 그리고 담배를 피웠고 술을 마셨다. 밤이 되면 잠을 잤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창부를 죽인 30대 남성이 사형되었다는 기사를 쓰게 되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