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鄕愁)
1. 약 3~4주만에 완성한 글. <태양 아래서>를 완성한 뒤 약 3개월 가량 소설의 오락성에 대해 재탐구해보고자 SF소설을 집필하고 있었는데 완성하지 못한 채로 보류시켜두었다. 그리고 새로 집필하여 완성한 것이 본 작품이다.
2. 너무 노골적이고 단순한, 안이한 글이 되어버리지 않았나 하는 후회가 남는다.
향수(鄕愁)
Y시의 중심부를 벗어나 도시 변두리로 가면 그 지역을 둘러싸고 있는 산맥이 있다. 그 산맥을 이루는 어느 산봉우리의 능선에는 넓고 깨끗한 이 층짜리 건물이 하나 지어져있다. 건물 자체도 넓지만 그 부동산이 포함하고 있는 부지 또한 굉장히 넓다. 이곳은 사람 사는 곳으로부터 몹시 멀다. 가장 가까운 도시인 Y시의 시내까지 들어가려면 차로도 두 시간은 넘게 걸린다. 부지는 높은 철망으로 둘러싸여있다. 바깥에서 들어오려는 자와 안에서 나가려는 자 양쪽을 모두 막기 위함이다. 그것을 세운 것은 썩 잘 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부지에는 산책로처럼 여기저기로 길이 나있고 풀과 나무가 봄다운 초록빛으로 화창하게 피어있다. 건물은 전체적으로 흰색이고, 도어나 창문들은 잘 깨지지 않는 단단한 재질로 되어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성질 때문이다. 아무튼 간에, 현관을 열고 들어가면 접수창구가 있고, 간호사가 한쪽 복도로 안내한다. 그리로 들어가면 기다란 복도가 나오는데, 벽면에는 다섯 발짝 간격으로 철제문이 하나씩 나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병원식 싱글베드가 두 개씩 놓여있는 살풍경하고 단조로운 방이 나타난다. 방에서 나와 복도를 계속 걸어가면 갑자기 탁 트인 공간이 나온다.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낮에 주로 생활하는 <거실> 같은 공간이다. 벽붙이 TV가 있고, 기다란 의자들이 있고, 커다란 시계가 있으며, 창문이 많아 빛이 잘 든다. 그리고 그 거실 한쪽에 이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또 다시 복도가 나온다. 일 층과는 달리 보다 다채로운 색깔과 고급스런 자재로 벽과 바닥이 깔려있고 벽면에 난 문들 또한 철제가 아닌 목제로 되어있다. 그 문들 중 하나가 소장실로 들어가는 문이다. 나는 대략 한 시간 전 소장으로부터 호출이 있어서 그곳으로 들어간 참이었다. 소장은 내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생활은 어떠냐는 등의 인사로 시작해 주로 내 가족들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나는 듣고 있었다.
몇 십분 뒤 소장은 말을 마치고 내 눈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나는 그가 말을 하는 내내 그저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만감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 쳤다. 그러나 실제로 나는 그것에 휘말려 들어가지 않고, 한걸음 떨어져서 그 복잡한 감정들을 관찰하는 기분이었다. 마음 한 구석이 단단하게 굳어있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굳게 닫힌 철문처럼 말이다. 나는 관조하는 입장으로, 마침내 입을 열며 <그래서 가족들은 뭐라고 합니까?> 하고 소장에게 물었다.
“그들은 당신이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부인 분께서는 아이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셨어요.” 소장이 나를 설득하듯이 대답했다. 그는 나의 담담한 표정을 보고 약간 당황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의자에 앉은 채 손으로 두 눈을 문질렀다. 소장실의 창문으로 봄날의 빛살이 비쳐 들어오고 있었다. 바람소리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오후였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내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딸아이의 얼굴도. 나는 돌연 불쾌감을 느꼈다. 부조리한 불행을 어쩔 도리도 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사람의 분노 같은 것이 가슴속을 스멀스멀 기어 다니고 있었다. 나는 불쾌감 때문에 내뱉듯이 말했다.
“나는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소장은 당장 대답하지는 않았다. 그는 한 손을 입가에 대고 나를 바라보며 다른 한 손으로는 검지로 탁자 위를 규칙적으로 두들기고 있었다. 서로가 침묵하고 있는 동안에도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소장은 가족들에게는 자신이 잘 설명해두겠다고 말했다. 나는 평소처럼 이곳에서 지내면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알겠다고 했다. <나가봐도 좋습니다.> 하고 그가 말했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소장실을 나왔다. 복도로 나온 뒤에 계단을 한 층 내려갔다. 넓은 거실이 나왔다. 열댓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한 구석에서 TV를 보거나, 창가에서 햇볕을 쬐는 등의 소일거리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계단을 내려오는 것을 보고 누군가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쪽으로 다가왔다. V였다. 그는 마르고 멀쑥한 몸에 머리만 단정하게 빗고 다니는, 안경을 쓰고 얼굴이 갸름한 30살 즈음 된 남자였다. V는 이곳 요양소에서 나를 ‘형님’이라고 부르며 따르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묻는 것이었다. “형님, 소장이 뭐라고 합디까?”
“가족들이 내가 퇴소하기를 원한다던데.”
“아하! 또! 그래서 뭐라고 했어요?”
“싫다고 했지.”
그러자 V는 유쾌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무표정한 얼굴로 생각했다. <V도 가족과 무슨 일이 있었음이 틀림이 없다…… 결혼을 해서 아내가 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나는 약간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그가 수다스럽게 말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이곳을 나가지 않는 게 오히려 더 나아요! 그렇고말고요…….” 그는 과연 자신의 말이 옳다는 듯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쓰게 웃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데?”
“배제당한 사람들…… 예를 들어 저기 저 녀석 같은 경우에는(그렇게 말하면서 V는 손가락으로 복도 한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앳되어 보이는 남자를 가리켰다.) 부모가 억지로 이곳에 집어넣었다더군요.”
“왜?”
“남색가라서요. 듣기로는 가족들이 전부 크리스천이랍디다. 저 녀석 자신도 그렇고요.”
나는 V의 말을 듣고 그 젊은 남자를 쳐다보았다. <젊은 남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어린애 같아 보였다. 20대 초반 즈음 되었을까. 그는 우리가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에 침울한 기운이 가득했다. “그런 건 어떻게 알았어?” 나는 여전히 그 남색가와 눈을 마주치고 있는 채로 V에게 물었다.
“저 애가 입소한지 얼마 안 되어 다들 알게 됐어요. 형님은 남들한테 관심이 없으니 그런 정보를 모르지.” V가 질책하듯이 말했다.
<사생활이라는 것이 없군.> 내가 말없이 생각했다. 하기야 이런 좁은 공간에 열 몇 명밖에 안 되는 인간들이 모여서 몇 주고 몇 달이고 살다보면 억지로 숨기려고 하지 않는 한 웬만한 것은 다 소문이 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다들 그런 것을 알고 있다. 알고서도 만족한 채 사는 것이다. <모두들 별 것도 아닌 프라이버시를 지키기보다는 바깥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채 사는 것을 더 좋아하기 때문에 이곳에 있는 거지.> 나는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늙은이 하나가 복도를 뱅뱅 돌며 연신 뭐라고 중얼대고 있었다. 벽시계를 보았다. 오후 세 시가 막 넘은 시각이었다. 나는 창가로 가서 의자에 주저앉았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태양빛이 몸을 포근하게 감쌌다. 나는 어쩐지 슬픈 기분이 들었다. <흠, 자유라. 나는 어서 이런 것에 익숙해져야한다…… 정말로 나는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그 어떤 책임도 지고 있지 않다. 이것은 굉장한 일이다. 과연 현재의 나에게는 시간의 흐름마저도 의미가 없다. V는 무얼 하고 있지…… 그 늙은이와 대화를 나누고 있군. 저 녀석은 끊임없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려고 하는 습성이 있다. 이런 곳에서는 보기 드문 유형이다. 대부분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벅차하는 사람들이기에 그렇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자살 소동이 있었지…… 의식(意識)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다들 평화를 좋아하니까. 그런데 V가 이쪽으로 오는군…….>
“무슨 얘기를 했어?” 내가 V에게 물었다.
“그냥 요새 어떠냐고 물었죠. 하지만 저 영감은 언제나 하는 얘기가 똑같아요. <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아! 매일매일이 비슷한 나날들이지! 그런데 내 옷에서 지독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생선 눈알 냄새가 나! 자네는 모르겠나? 생선 눈알 냄새가 난다고! 옷을 갈아입어야하는데 아들이 더 이상 새 옷을 보내주질 않아. 몹쓸 놈이지. 그런데 이상하게 아들놈이 보내주는 옷들은 전부 다 냄새가 난단 말이야!> 하고요. 그러면 나는 무슨 종교의식처럼 영감의 옷소매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아보죠. 그런데 냄새라고는 구질구질한 영감 냄새밖에 안 난단 말예요. 그래서 내가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요!> 하고 말하면 그는 <아니야! 자네는 모르는군!> 하고 입을 다물어버린단 말이죠.”
“저 늙은이는 항상 그렇잖아,”
“그렇죠.”
“그런데 왜 매일 말을 걸지?”
“그냥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거죠.”
“커뮤니케이션이라!” 그리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V는 내 옆자리에 앉았다. 나는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V와 대화하는 것은 그리 싫지 않았다. <저 영감님도 고생이에요.> 하고 V가 말했다. “늘상 실재하지도 않는 악취랑 씨름을 해야 하니 말입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나 저런 사람들은 오히려 낫지. 말하자면 아직도 저 구석에 앉아서 무릎 사이에 머리를 박고 있는 남색가처럼 말이다. 적어도 문제가 눈에 보이니까. 흠. 크리스천이라! 신이 금지한 것을 타고 났으니 죄책감으로 칠갑이 되어있겠지. 하지만 몇 달만 있으면 여기에서는 신 같은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저 늙은이가 간호사에게로 가는군.>
<세탁은 아직 멀었나?> 하고 늙은이가 외치는 것이 들려왔다. 간호사는 방금 새 옷을 꺼내 입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하지만 냄새가 난단 말이야. 이러면 사람들이 날 지저분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겠어?” 늙은이가 불만스럽게 외쳤다. 사람은 청결해야만 최소한의 예의를 지킬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영감님에게서는 아무 냄새도 안 나는 걸요!” 간호사가 늙은이를 설득하려는 것처럼 말했다.
“아니야! 제기랄! 다들 날 속이려고 작정을 했군! 노인이 하는 말은 아무도 믿지 않아!”
“그렇다면 환자복을 꺼내드릴까요?”
“됐어. 그것들도 마찬가지로 고약한 냄새가 난다고.”
나는 그들이 한동안 실랑이를 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V는 그 모습이 재미나다는 듯이 히죽거리며 그들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복도 한 쪽에서 TV를 보고 있던 사람들도 실랑이하는 소리 때문에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 머리 너머로 보니 TV 스크린에서는 초원에서 동물들이 풀을 뜯는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금세 그 모든 일들에 흥미가 없어졌다. 늙은이와 간호사도, 하루 종일 TV 앞에만 붙어있는 사람들도, 죄책감에 빠져 망연자실해 있는 남색가도, 끊임없이 무어라고 떠들어대려는 V도 전부 부질없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나는 고개를 위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햇빛이 얼굴에 부드럽게 쏟아졌다. 감은 눈꺼풀 너머로 이지러진 빛조각들이 보였다. 나는 소장이 했던 말을 생각해보았다. 가족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나는 마음속으로 침을 뱉듯이 코웃음을 쳤다. 나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나는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다……. 몸이 노곤했다. 따뜻한 햇볕 때문에 더욱 그랬다. 옆에서 V가 뭐라 뭐라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내 의식은 이미 마음속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 중이었다. <과연 수면만이 정신건강에 도움이 된다…….> 무의식중에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앉은 채로 잠이 들었다.
V가 어깨를 부여잡고 흔드는 바람에 잠에서 깨었다. 눈을 뜨자 코앞에 그의 얼굴이 보였다. 내가 눈 뜨는 것을 보고 V는 외쳤다. “형님, 왜 그래요?” 나는 비몽사몽 중에 그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이해하지 못하고 <뭐? 왜? 뭐가?>라고 의문문만 연달아 되뇌었다.
“왜 울고 있느냔 말이오.”
“울어? 누가? 누가 우는데?” 내가 정신없이 대답했다.
V는 말없이 내 얼굴을 가리켰다. 나는 얼이 빠져 있다가 손을 들어 얼굴을 더듬어보았다. 미지근한 물방울이 손끝에 닿았다. 물방울은 내 눈 안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나는 손으로 눈물에 젖은 광대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젠장, 나이는 먹을 대로 먹어서 이게 뭐람.” 그러자 V가 <왜 운거예요?>라고 물어왔다.
“나도 몰라. 기분 나쁘군.” 나는 손을 털며 대답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무슨 꿈이라도 꾸었나 싶었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축축하고 불쾌한 감정의 잔재만이 어슴푸레하게 가슴 속에 남아있었다. 나는 눈가를 닦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V의 외침 때문인지 몇 사람이 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와 눈이 마주치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다들 그러려니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V도 더 이상 소란을 떨거나 묻지 않고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곳에서는 아무도 서로의 사정에 대해 캐묻지 않는다. <나는 특별한 사정이랄 것도 없긴 하지만…….> 아마도 그 남색가의 경우에는 좌절하는 바람에 주변 사람에게 제멋대로 털어놓았기 때문에 소문이 돈 것일 터였다. V는 옆자리에서 멀거니 허공을 쳐다보며 다리를 떨고 있었다. 나는 눈동자만을 굴려 그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내가 울다니! 도대체 무엇 때문에? 썩 불쾌한 일이다. 나는 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나 남 앞에서는 더욱…… 하여간에 비록 꿈속이라고는 하더라도 나를 울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는 사실이 영 심기가 불편하다. 음…… 나는 나무껍질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 모든 것이 여전히 자연스럽지 못하다. 그런데 내가 몇 시간이나 잠을 잔거지?> 나는 고개를 들어 벽시계를 보았다. 네 시 반. 시간을 확인하고 나는 몸을 일으켰다. 앉은 채로 잔 탓에 몸이 찌뿌둥했다. 기지개를 켜고 복도를 따라 조금 걸었다. 뒤편에서 V의 눈길이 따라오는 것 같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쭉 걸어 나가자 정원으로 나가는 문이 보였다. 나는 다가가서 문에 난 창으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문손잡이에 손을 올려놓았지만 그것을 돌리지는 않았다. 약간 노랗게 색이 입혀진 빛살이 초록빛 정원 위에 미끈거리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한참동안 그 좁은 창으로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밖에 나갈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고 있자니 어느새 V가 등 뒤에 다가와 있었다.
“왜 그러고 있어요? 나가려고?”
“안 나가.” 내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나가면 안 돼.”
“왜 나가면 안 돼요? 저렇게 날씨가 좋은데.”
“나가려면 자네나 나가. 난 나가면 안 돼.”
내가 그렇게 잘라 말하자 V는 알았다는 듯이 입을 다물었다. <나도 별로 산책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하고 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는 창에서 고개를 돌려 V의 얼굴을 좀 들여다보다가 복도를 따라 왔던 길을 돌아갔다. 하얗게 회칠이 된 복도에는 몇몇 사람들과 제복을 입은 간호사들이 있었다. 복도를 거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초점이 없는 눈으로 발을 질질 끌며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 가려는 듯이 느릿느릿 걷거나 혹은 너무나 취해서 당장이라도 쓰러질 사람처럼 벽에 어깨를 기댄 채 고개를 푹 숙이고 달팽이처럼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말을 걸어도 소용이 없다. 그들은 <좌절한> 사람들인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보고만 있어도 그 존재의 절망성 때문에 십자가에 박히는 듯한 고통을 공감하게 된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은 순진한 피해자들인 것이다! <그 점에서 그들이 《바깥》에서 교묘한 낯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보다는 훨씬 낫다.> 나는 냉철한 이성으로 스스로를 다잡으며 그들을 지나쳤다.
복도를 걷다가 빈 방을 하나 거쳤다. 지금은 아무도 쓰지 않는 방이었다. 얼마 전에 자살소동이 일어난 것이 바로 이 방이었다. 방의 주인과는 몇 번인가 대화를 나눠본 적이 있는데, 섬세한 용모에 머리가 긴 젊은 사내였다. 이름은 모른다. 묻지 않았다. 그는 늘 수첩과 연필을 들고 다니면서 복도나 의자에 주저앉아 뭔가를 쓰거나, 혹은 아무데나 돌아다니면서 초점 없는 눈으로 혼잣말을 하곤 했었다. 건물 안을 거닐고 있자면 일정한 구역을 계속 반복해 걸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그와 쉽게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커뮤니케이션은 가능한 친구였다. 대화를 하는 와중에 너무 빈번하게 주제가 바뀐다거나 문맥에 맞지 않는 말들을 마구 쏟아내기도 했지만 웬만한 회화는 성립했고, 무엇보다 그는 사람과 대화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그 쪽에서 먼저 내게 말을 건 일도 있었다. 그는 우리를 <형제>라고 불렀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칼을 든 형제>들이라고 했었던 것도 기억한다. 아무튼 어느 날 그는 찢어낸 스웨터로 문고리에 목을 맸다. 바닥에 몸을 늘어트려 체중으로 목을 졸라 죽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처 죽기 전에 간호사에게 발견되었고, 정신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이곳 요양소에서 사고를 일으키면 정신병원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정신병원과 요양소를 몇 번이나 왕복하는 사람들도 꽤나 있었다. <말하자면 이곳은 광인들의 세계와 정상인들의 세계의 틈바구니에 끼인 경계 지대 같은 것이다…….> 나는 음울한 기분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자살소동 때문에 사람들 사이의 공기가 흥분되려는 기세도 있었지만 얼마 못가 수그러졌다. 그 정도는 간간이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나는 왜 그가 죽으려고 했는지 알지 못한다. 알 도리가 없다. 모두들 각자의 신념…… 그렇다, 신념이 있기 마련이다. 아무튼 그는 그 <신념> 때문에 정신병원으로 끌려갔다. 아마도 몇 달간은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자살. 쉬운 일은 아니다. <쉬운 일은 아니지.> 내가 굳이 되뇌었다. 이른바 충동과의 싸움이다. 가슴이 메어오는 것 같았다. 나는 손을 들어서 심장을 탕탕 두드렸다. 끊임없이 복도를 걷고 있자니 이제 석양이 지기 시작하는 태양빛이 창문을 통해 얼굴에 비쳤다. 나는 스치는 눈길로 창을 내다보았다. 오직 창으로만 나타나는 바깥세상. 하늘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창문에 엷게 내 얼굴이 비치는 것이 하늘 풍경에 겹쳐보였다. 나는 창문에 비친 내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황급히 눈길을 돌렸다. 마치 화를 내는 어린아이처럼.
요양소에는 거울이 없다. 화장실과 세면대에도 거울은 설치되어있지 않다. 유난히 거울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나도 거울은 좋아하지 않는다. 수십 년 동안이나 보면서 살아온 얼굴인데, 어느 날 부터인가 그 모습을 견딜 수가 없었다. 악마 같이 새까만 눈동자부터 시작하여 기괴하게 자리 잡고 있는 뼈대, 윤곽들이 하나같이 내 정신을 미치게 만들었다. 어느 밤 화장실에서 거울에 수조를 집어던져 큰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깨지고 산산조각이 났을 때, 자다 깬 채 달려와 나를 쳐다보던 아내의 당혹과 공포가 뒤섞인 얼굴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러나 그것도 현상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마치 도미노가 쓰러질 때 블록 하나가 넘어가는 것처럼…….> 나는 마음이 갑갑했다. 창문으로부터 도망치다시피 눈길을 돌리며 하얀 회벽에 얼굴을 묻었다. 눈을 감았다. 차가운 벽이 이마에 와 닿으며 우둘투둘한 석회 알갱이들이 느껴졌다.
“와장창.” 내가 소리 내어 말했다. 유리로 된 수조가 거울과 부딪힐 때 나던 소리를 나는 입으로 재현하고 있었다. <와장창.> 하고 나는 다시 한 번 말했다. 사방으로 튀기는 유리조각과 담겨있던 물의 형태가 수조와 함께 무너지는 모습. 나는 눈을 감은 채 꽉 쥔 주먹으로, 망치를 내려치기 전에 못이 자리를 잡게 하도록 두들길 때 하듯이 벽을 살살 두드리면서 그 때의 그 장면을 계속해서 머릿속으로 반복 재생했다. 충격이 닿으면서 거울에 선명한 금이 그어지는 순간. 밤의 정적 속에서 갑자기 폭발하듯이 소음이 터지는 순간. 모든 것이 다 잘게 부서져 쏟아져 내리고 엉망진창이 되는 순간. “와장창!” 나는 압착기로 씨앗에서 기름을 짜내듯이 웃음 지었다. 질끈 감은 눈꺼풀 사이로 감정이 새어나올 것 같았다.
<우리들 세계에는 색깔이 너무나도 많다. 그래서 우리들을 이렇게 무채색한 건물 안에 격리시켜둔 것이다. 나는 감긴 눈꺼풀로도 온갖 빛나는 섬광들과 다채로운 색깔들을 본다…… 어떤…… 물속에 빠진 수백 개의 잉크방울처럼…….> 그때 종이 울렸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보았다. 각자 내팽개쳐진 걸레조각처럼 늘어져있던 사람들이 종소리를 듣고 모두들 일어나 한 곳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나도 그들을 따라갔다. 우리들은 규칙을 지킬 줄은 안다. <그리고 규칙을 만들기도 한다…….> 요양소 안의 모든 사람들이 식당으로 향하고 있었다. 작은 행렬 속에서 나는 V와 다시 만났다. 우리는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어떤 사람들은 간호사의 부축을 받으며 식당으로 들어왔다.
우리들은 말없이 줄을 섰다. 식당은 10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을만한 너비의 공간이다. 기다란 식탁과 의자들이 줄지어 놓여있고, 한쪽 벽면으로는 배급용 창구가 있다. 우리들은 늘 이곳에서 식사를 한다. 지금은 요양소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은 시기라서 식당이 꽉 차는 일은 없다. “별로 식욕이 없어요.” 내 뒤에서 V가 중얼거렸다. <그래도 규칙이잖아.>라고 내가 말했다. V는 대답하지 않았다. 식사 시간에는 식사를 하는 것이 요양소의 얼마 안 되는 규칙 중의 하나다. 가끔 거식증 환자가 입소하는 일도 있지만…… 흠, 그들의 문제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알아서 해결한다. 아무튼 간에 그들은 그것이 직업인 것이다. 차례가 오자 우리는 식사를 받아들고 한쪽 식탁으로 가서 앉았다. 식사를 시작하려는데 시야 한편에 그 남색가의 모습이 보였다. 식탁 구석 사람들 사이에 앉아서 젊고 음침한 얼굴로 식판을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그것에 담긴 음식들이 자신의 부모를 죽이기나 한 듯이……. 나는 무심한 눈으로 그를 잠시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리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들은 맥없이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되자 간호사가 사람들을 불러 약을 나눠주었다. 우리들은 받아든 약을 물과 함께 삼킨 뒤에 간호사를 향해 입을 벌려 그것을 깨끗이 삼켜버렸다는 것을 증명한다. 나는 내가 먹는 약이 내게 무슨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 그다지 잘 알지는 못한다. 다만 그것이 나를 조금 더 평화롭게 만들어준다는 것만 알고 있다. 모두들 비슷할 것이다. V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약 먹는 것을 싫어했다. 몇 번인가 간호사를 속이려고 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그런 약을 먹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도 그것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는다. V는 간호사가 내민 것을 군말 없이 집어삼킨다.
“음…….” 약을 삼키고 나서 V가 조용히 신음했다.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도 나를 쳐다보더니 씨익 하고 패배감 어린 웃음을 짓는 것이었다. 그리고 말했다. “형님도 내가 왜 여기에 들어왔는지 알게 되면 이해할 거예요.”
“뭘?”
“이 약들…… 이런 약리학 따위가 내게 적용될 이유가 없다는 것 말이에요.”
나는 웃지도 않고 그의 말을 받아넘겼다. 굳이 물을 필요는 없었다. 연질 캡슐에 든 약들이 식도를 거쳐 위장에서 소화되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곧 졸리기 시작할 것이다. 몹시도 부자연스럽게 말이다…….>
우리들은 일찍 잠든다. 그리고 오래 잔다. 그리고 우리는 그만큼 광증에 빠져있을 시간을 잃어버린다. 모든 것이 다 계획된 대로다. V와 나는 얼마간 시간을 보내다가 각자의 침대가 있는 방으로 가기 위해 헤어졌다. 룸에는 싱글베드가 두 개 놓여있고 나는 그 중 하나를 사용한다. 다른 하나는 룸메이트가 쓰는 침대다. 나는 그와 대화를 해본 일이 없다. 그가 매일 밤 자신의 침대로 가서 잠드는 것을 관찰할 수는 있지만, 그는 절대 누군가와 말을 나누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에게 억지로 말을 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의 폐쇄를 존중해줘야 하는 것이다.
나는 넋을 놓고 침대 위에 앉아 있다가 뱃속에서 꿈틀거리며 올라오는 공허한 졸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 이상한 졸음은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비인간적인 것이다. 나는 침대 위에 지푸라기처럼 쓰러졌다. <금세 내일이 오겠지. 또 내가 신경도 쓰지 않는 내일이 올 것이다…… 그래도 《바깥》에서 맞는 내일보다는 훨씬 견딜만하다. 왜냐하면 이곳에서는 경계라고 할 만한 것이 굉장히도 희미하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반드시 밤에만 잠을 자야할 이유도 없다. 나는 벗어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마치 늪 속을 헤매는 것 같구나! 지평선까지 펼쳐진 늪을 말이다. 어쩌면 나는 자유로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굴러 떨어지고 있는 중인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내 가슴속에는 여전히 무겁고 지독한 혼돈이…… 날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졸음이 생각할 기운을 전부 먹어치워버렸군…….>
다음날 나는 아침식사를 마치고 V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매일처럼 반복되는 별다를 것 없는 오전이었다. 햇살은 깨끗하고 어딘가 구멍이 뚫린 것 같은 공허한 소음들만이 복도를 울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간호사 한 명이 우리에게 다가오더니 V에게 말을 했다. 그 남자 간호사는 무뚝뚝한 얼굴로 천천히 입을 움직였다.
“소장님이 찾으십니다.”
“나를?” V가 반문했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더니 이상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다시 간호사에게로 시선을 향하는 것이었다. “나를 왜?”
“그건 저도 모르죠. 가보세요.”
간호사의 말에 V는 <그럼 그러지.> 하고 대답하더니 실실거리며 이 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걸어갔다. 그러면서 그는 나를 힐끔 쳐다보며 눈짓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V는 한 걸음씩 계단을 오르더니 마침내 층계 위로 사라졌다.
혼자 남겨진 나는 할 일이 없었다. 나는 그저 건물 안의 하얀 공기를 눈으로 쫓으며 의자에 앉아있었다. 주변에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 벌레처럼 느리고 기묘한 동작으로 천천히 움직이거나, 나와 마찬가지로 앉아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제 곧 아침 약을 먹을 시간이었다……. 모든 것이 느리고 투명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 누군가가 힘없는 걸음걸이로 터벅터벅 걸어오더니 내 옆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는 <누구지?> 하고 생각하며 그를 보았다. 그는 바로 젊은 남색가였다. 그리고 그는 구부정한 자세로 내 바로 옆에 앉아있었다. 나는 그의 초점 없는 눈이 바닥을 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우리들은 말이 없었다. 나는 그가 왜 내 옆으로 온 것인지 궁금했지만 그런 것을 물어볼 마음은 들지 않았다. 한동안 그러한 침묵상태가 이어졌다. 남색가는 처음 봤을 때와 똑같은 절망적인 눈으로 맥없이 땅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기운 없이 반쯤 열린 입으로 옅은 숨을 내쉬는 것이 보였다. 그는 도무지 살아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그에게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가 문득 말을 내뱉었다…….
“식당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지요.”
그 말에 나는 다시 그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흠. 이 젊은이는 내게 뭔가 용건이 있는 모양이다.> 나는 즉각 대답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나를 향하지 않고 있는 그의 눈을 쳐다보며 나는 천천히, 처―언―처―어언히 대답했다.
“그래. 그랬지.”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그가 갑자기 외쳤다. 순간 주변이 조용해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은근슬쩍 이쪽으로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무릎 위에 얹혀있는 그의 손이 작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조용히 말했다.
“난 아무 말도 안했어.”
그러자 그는 조금 진정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잠시 동안 입을 다물었다. 나는 참을성 있게 그가 다시 말하기 시작하기를 기다렸다. 그는 두려워하는 듯한 눈초리로 힐끗 나를 흘겨보더니 다시 시선을 땅바닥에 처박고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가족들은 나 같은 죄인이 살아있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그래.” 내가 간단하게 말을 받았다.
“그렇다고 내가 죽는 것을 바라지도 않아요…….”
“그랬겠지.”
“나는 그냥 태어났어요…… 갑자기…… 그냥 태어나버렸어요…….” 남색가는 말끝을 질질 끌면서 혼잣말을 하듯이 말했다. 나는 그가 중얼거리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가 혼란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나님!> 하고 그가 작게 탄식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말했다…….
“이봐.” 나는 은근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아.”
내 말에 그는 기겁하듯이 고개를 쳐들었다! 이마 위로 흘러내린 그의 짧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빛이 날아와 부서졌다. 그는 나를 쳐다보았다. 아주 깊게……. 그의 눈동자는 공포에 질려있었다. 마치 유령을 본 사람처럼 말이다. 그러더니 그는 도망쳤다. 벌떡 일어나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쳐버렸다. 그는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나는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고 의자에 앉은 채로 남색가가 사라진 모퉁이에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점점 멀어지고 있는 발소리만이 귓가에 울렸다.
V는 약 배급시간이 되기 전에 돌아왔다. 나는 계단을 내려오는 그를 보았는데, 그의 표정이 평소 같지 않았다. 그의 얼굴 표정이란 언제나 일부러 그러기라도 하는 듯이 경박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V는 마치 절망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그는 터덜터덜 내게로 다가오더니 내 눈을 보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마도 웃는 것이리라.> 내가 생각했다. 우리 둘 사이의 거리가 충분히 가까워지자 내가 물었다.
“무슨 일이야?”
V는 새까만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더니 느리게 대답했다. “아내가 전화를 했어요…….”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V는 입을 다물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가까운 거리에서도 들릴락 말락 한, 아주 낮고 작은 신음소리 같은 한숨이었다. “……괜찮으냐고…….” 그가 중얼거렸다.
“뭐라고?”
“이제 괜찮으냐고 하더군요…… 이제 괜찮으냐고…….” V는 단어들을 입에서 떨구듯이 말했다. 그는 무언가 불만이 있는 것 같았다. 손으로 가려진 그의 얼굴이 자조적인 웃음으로 물드는 것이 보였다.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저 그가 계속 말하기만을 잠자코 기다렸다.
“형님.” 갑자기 그가 얼굴에서 손을 떼더니, 무언가 결단을 내린 것처럼 말했다. “잠깐 따라와 보세요. 형님에게 말할 것이 있어요.” 그리고 <약을 먹기 전에…….>라고 조그맣게 덧붙였다.
V는 복도 저편으로 걸어갔고, 나는 그를 따라갔다. 그는 점점 사람들이 적은 곳으로 향했다. 우리는 마침내 건물 한 구석의, 조용하고 희미하게 햇살이 드는 창문가에 도달했다. 그리고 V는 걸음을 멈추더니 벽에 기대서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말을 시작하는 그의 눈은 둘 곳을 찾지 못해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다. 그는 몹시 망설이고 있었다. <형님, 나는 형님에게 말해두고 싶은 것이 있어요…….> 하고 그가 중얼거렸다. V는 말을 이었다. “나는 성도착자예요.”
그는 그렇게 말했다. 마치 원한이 서린 것 같은 눈으로, 그렇게 내뱉어버렸다! 나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뭐라고 말을 받는 것이 좋을까? 나는 그냥 입을 다물고 있었다. V는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에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떠들기 시작했다.
“나는 생명이 없는 것들을 좋아해요. 더 이상 자발적 의지를 갖지 못하고 내 뼈와 근육에 의해서 덜렁거리며 움직여지는 수동적인 살덩어리들을 좋아해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람이 아닌 것, 말하자면 경계가 모호한 것이라고 해두죠…… 나는 모호한 것에 욕망을 느껴요. 생명이 빠져나간 인형 같은 육체에 얼마나 수많은 관능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지 형님은 모를 거예요. 나는 시체와 <그 짓>을 하고 싶어 해요. 나는 시체성욕자예요…….”
V는 숨도 쉬지 않고 연달아 내뱉었다. 그는 말을 마치고도 다시 한 번 되뇌었다. <나는 시체성욕자예요.> 하고. 나는 그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
“그럼 자네는 시체와 <그 짓>을 한 적이 있는 거야?”
그러자 갑자기 V가 <바로 그게 문제예요!> 하고 소리쳤다. 그는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내가 정신병동으로 가지 않고 요양소로 오게 된 이유도 거기에 있어요. 나는 평생 내 욕망을 억누르면서만 살아왔어요. 단 한 번도, 단 한 번도 내 꿈속의 여인(그러니까 죽은 여인이죠.)과 몸을 섞을 수 있었던 적이 없어요. 나의 사회화 된 의식 때문에! 기껏해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스너프 필름을 보면서 자위행위를 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어요.”
나는 그가 갑자기 울기 시작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울지 않았다. V는 다만 굉장히 흥분해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그냥 어느 날 갑자기 새어나와 버린 거예요. 마개를 단단히 잠그지 않았기 때문에…… 아내와 잠자리를 하다가…… 목을 졸랐죠. 내가 사정하고 나서도 계속…… 나는 오르가즘 속에서 그녀를 죽이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러나 다행히 죽지는 않았어요. 제때 정신을 차렸으니 망정이죠. 아무튼 아내는 굉장히 놀랐고, 또 겁에 질렸어요. 지금까지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내가 그런 짓을 할 사람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테니까 말입니다!(이렇게 말하면서 V는 같잖다는 듯이 웃었다.) 그리고 그녀는 모든 일들이 웬만큼 진정된 뒤에…… 내가 <스트레스 때문에> 그랬을 거라고, 조금 쉬는 게 좋을 것이라고 말했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부 받아들였어요. 그리고 이곳에 보내졌죠. 아내와의 <정당한 합의>에 의해서……!”
V는 또 일그러진 웃음을 터트렸다. 내 머릿속에서는 순간 남색가가 내게 했던 말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그냥 태어났어요…… 갑자기…… 그냥 태어나버렸어요…….> 내 가슴 속에서 무엇인가가 두근거리면서 박동하고 있었다. 나는 어떤 생각에 집중했다. V는 지금까지 정열적으로 말들을 쏟아낸 것 때문에 지쳤는지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그리고 그는 거의 호소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악인이 아니에요 형님.”
“그래. 그렇고말고.” 내가 그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걱정하지 마. 우리는 조만간 돌아갈 수 있을 거야.”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V는 어리둥절하여 나를 쳐다보았다. <어디로요?> 하고 그가 물었다. 그러나 나는 설명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워준 뒤에 왔던 길을 다시 따라서 돌아갔다. 이제 약을 먹을 시간이었다. 그러나 나는 V의 말을 들으면서 한 가지 결심한 것이 있었다. 그날 나는 간호사에게 약을 받은 뒤 그것을 삼키는 척 하면서, 혀와 잇몸 사이에 알약들을 숨겨두고 물만을 삼켰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그것들을 다시 뱉어낸 뒤에 변기에 넣고 물을 내렸다. 반쯤 녹은 알약들이 변기 속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어가는 것을 나는 입을 다문 채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우리>들을 위한 어떤 행위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그 날부터 계속 나는 간호사들을 속이며 약을 먹지 않았다. 가슴 속의 광증을 억제하던 것이 사라지자 나의 마음은 동면에서 깨어난 짐승처럼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손발이 떨리거나 근육이 경련하고 눈알이 뒤집어지는 등의 금단증상이 생겨서 그것들을 간호사에게 숨기느라 조금 애를 먹었다. 그러나 그런 증상들은 일주일 내외로 대부분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예전처럼 온몸에 가시를 세우고 원망스러운 눈동자로 웅크리고 있는 나의 정신뿐이었다……. 다시 한 번 세계가 내게 진면목을 드러냈다. 약을 끊자 동시에 세계가 뒤집어쓰고 있던 껍질이 벗겨지고 그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온갖 의미심장한 관념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내가 지금까지 반쯤 잠들어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다시 예민하고 날이 선 시야를 갖게 된 것이다…….> V도 나의 변화를 알아차렸다. 그는 우선 내가 예전에 비해 잠을 자지 않게 되었다고 지적했다. 그것은 타당한 말이었다. 나는 낮에는 물론 밤에도 거의 잠들지 않았다. 모든 시간을 생각하고 감각하는 데에만 사용했다. V는 내가 뭔가 달라졌다고 말했다. 그는 내 변화 때문에 다소 불안한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저 그에게 불안해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고만 말해주었다. 요양소에서의 생활은 변한 것이 없었다. 변할 필요조차 없었다. 매일 복도를 방황하는 그 늙은이는 여전히 상상 속의 악취와 싸우느라 기력을 낭비하고 있었고, 젊은 남색가는 내게서 도망친 그 날 이후로 계속 날 피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그에게 <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것이 더 좋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렇다고 내가 한 일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도 결국은 전쟁을 치러야하는 종류의 인간이다. 승리하거나 패배하거나, 두 가지 길밖에는 남지 않은 것이다…….> 나는 생각했다.
V는 내게 그 <고백>을 한 날 이후로 그다지 변한 것이 없었다. 며칠간은 내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해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평소와 다름없이 그를 대하고 행동하자 그러한 두려움은 간단히 수그러든 것 같았다. 그러한 용기를 만드는 데에는 이곳의 공기가 또 한몫 했을 것이다. 나. 나는 말했다시피 많은 것이 변했다. 나는 밖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평소에도 나를 자세히 관찰하던 사람이 아니면 알아차릴 수 없는 변화였지만, 아무튼 커다란 변화였다. 나는 가끔 요양소의 뒷문을 열고 나무와 풀들이 돋은 정원으로 나가, 철조망 안쪽을 맴돌며 걸어 다니곤 했다. 유리창을 통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태양빛을 맞고, 바람을 쐬고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러한 와중에도 나는 늘 칼날처럼 날카로운 관찰력으로 주변을 쏘아보며 다녔다……. 이따금 나는 철조망 저편을 바라보기도 했다. 나무가 빽빽이 솟아 길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철조망 너머의 숲을 나는 몇 분이고 가만히 쳐다보곤 했다. 그러다가 나는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어느 날 V가 내게 물었다. 형님은 분명 바깥에 나가면 안 되는 것이 아니었느냐고. 나는 <그랬지.> 하고 대답했다. “상황이 달라졌어.” 내가 말했다. “이제는 더 멀리까지도 갈 수 있어. 우리는 돌아갈 거야.”
“어디로요? 도대체 어디로 돌아간단 말입니까?” V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외치듯이 물었다. 그러나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기만 했다. 그리고 그날 나는 V에게, 내가 몇 주 전부터 간호사들이 주는 약을 전혀 먹지 않고 있다는 것을 밝혔다. <남들에게는 말하지 마.> 하고 내가 덧붙였다. V는 작게 입을 벌리고 나를 보았다. 그는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형님은 변하고 있어요.”
“그래. 어쩌면 본격적으로 미치는 중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런 건 아무 의미도 없어.”
그것이 그날 우리가 한 대화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창가 의자에 앉아서 태평함을 연기하며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하나씩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걷는 사람이나 한곳을 계속 맴도는 사람, 혹은 필요 이상으로 똑바른 간호사들의 걸음걸이 따위를 말이다. 어떤 면으로 생각해보면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의 기저에 있는 심리를 표현하는 상징일 수도 있다……. 그들의 걸음걸이 하나에서도 그들 정신의 한켠이 비쳐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과연 <거짓>이라는 개념은 성립될 수 있는 것일까? 우리들의 모든 행동과 몸짓들이 개인의 진실의 표상이라면, 인간은 과연 총체적으로 보았을 때 <거짓될 수 있는 요소>를 가질 수 있겠느냔 말이다. 거짓말조차도 진실의 한 단면이 아니던가! 카뮈의 익사자인 클라망스가 말했던 것처럼……. 문제는 다만 우리들 인간의 지각능력의 한계이며, 진실은 항상 도처에 노골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아무도 속일 수 없고 속을 수조차 없는 것이다. 나는 마음이 뛰었다. 진실이란 찾아야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은 마치 공기처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지만 자신의 존재성을 당당히 과시하며 사방에서 흐르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내 생각 때문에 탄성을 지를 것 같았지만 억지로 참았다. 내 두뇌가 다시 <활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들켜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때 어디선가 커다란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향했다. 그것은 복도 저편의 어떤 룸에서 간호사가 외친 소리였다. 그리고 그 간호사는 재차 뭐라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거실 한쪽에 있던 V가 그리로 시선을 향한 채 내 곁으로 다가왔다. 곧바로 다른 간호사들이 구급용품이 담긴 카트를 끌고 소리를 지른 간호사 쪽으로 달려갔다.
“가보자고.” 내가 V에게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와 V를 포함한 몇 명의 사람들이 소동이 일어난 장소로 모여들었다. 카트에서 구급용품들을 내려 뭔가 처치를 하고 있는 간호사들 사이에 누군가가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다. 둘러싼 간호사들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의 틈새로 얼핏 새빨간 핏빛이 보인 것 같았다……. 나는 모여든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까치발을 들어 바닥에 누운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려 했다. 이유모를 강한 호기심이 나를 움직이고 있었다. 등 뒤에서 다른 간호사들이 들것을 가져오고 있었다. 그들은 다른 입소자들에게 물러나라고 외치면서 이쪽으로 향했다. 나는 소란 중에 누워있는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그것은 젊은 남색가였다……. 그는 바닥에 대(大)자로 드러누워 천장으로 얼굴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눈을 뜨고 있었지만 눈동자에는 거의 색깔이 없었다. 희멀건 동공으로 천장을 쳐다보고 있는 그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있었고 생명의 낌새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오른손에는 피투성이의 만년필이 한 자루 쥐여져있었다. 왼팔 손목에는 커다란 자상이 나있고, 거기서 피가 솟고 있었다. 손목 주변은 이미 흘러내리고 굳은 피로 검붉게 물들어있었다. 그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간호사에게 제지당해 뒤로 물러났다.
구토감을 느꼈다. 그리고 지독한 혐오감이 위장에서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간호사들은 지혈을 하고 상처를 싸매더니 들것 위에 남색가를 실어올렸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들고서 복도 저편으로 바쁘게 뛰어갔다. 사지가 축 쳐진채로 실려가는 남색가의 눈동자가 문득 내 시선과 마주친 것 같았다. 그 순간 나는 그의 새하얀 얼굴이 웃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구역질이 올라오고 화가 났다…….
“더러운 게이자식.” 나도 모르게 나지막히 내뱉었다.
옆에 있던 V가 그 말을 듣고 놀랐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분노 때문에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V에게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고 나는 그저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래. 오늘이다!> 내가 날뛰는 감정 때문에 혼란한 머리로 생각했다. <바로 오늘이다. 더 이상은 지체할 수 없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수장되어가는 시체와 같다. 꼴보기도 싫은 남색가놈…… 저것이 바로 <너희>들의 결말이다. 나는 오늘 생각해둔 일을 이루고야 말리라…….>
모여있던 사람들은 서서히 흩어지고, 복도에는 핏자국을 닦고 있는 간호사와 나, 그리고 V만이 남아있었다. V는 멍한 눈으로 서있었다. 나는 손톱을 물어뜯다가 V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간호사에게 들리지 않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밤에 잠들지 말고 깨어있어.”
V는 이상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네? 왜요?> 하고 그가 물어왔다.
“할 일이 있어. 아무튼 말한대로 해. 그리고 오늘 저녁에는 약도 먹지 마…….” 내가 거의 강요하듯이 말했다. V는 조금 주춤거리더니, 대걸레질을 하고 있는 간호사를 힐끔 쳐다보고서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는 내가 하는 말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정도면 됐다고 말했다.
그리고 밤이 되었다. 나는 침대 위에 눈을 뜬 채로 누워서 모두가 잠들기를 기다렸다. 룸메이트는 자신의 침대에서 등을 돌린 채로 자고 있었다. 소등이 되어 사방이 깜깜했다. 높은 곳에 난 창문으로는 미약한 달빛만이 비쳐들어오고 있었다. 방 안은 조용하고 적막했다. 룸메이트의 규칙적인 숨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나는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조용히 신발을 신고 문 쪽으로 다가갔다. 철문이 열릴 때 최대한 소음이 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나는 문을 열었다. 낮은 조명이 켜진 복도가 나타났다. 나는 우선 문을 살짝만 열어둔 채 복도를 내다보며 기다렸다. 야간에는 건물 안을 돌아다니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그리고 그 규칙은 모두가 먹는 약 덕분에 굉장히 효율적으로 지켜지고 있다……. 나는 복도를 순회하는 간호사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감시카메라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그런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모든 일은 순식간에 일어날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한동안 기다린 뒤에 아무런 발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복도로 나와 조용히 문을 닫았다. V의 방이 어딘지는 알고 있었다. 나는 주변을 경계하고 발소리를 내지 않으면서 걸었다. 복도는 어두웠고 음산한 그늘이 사방에 드리워져 있었다. 광인들의 집. 모두가 자고 있다……. 내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계속 걸었다. 다행히 아무도 만나지 않고 V의 방 문 앞까지 올 수 있었다. 나는 천천히 손잡이를 돌리고 문을 밀었다.
방의 구조는 내가 자던 방과 똑같았다. 마주하는 벽면에 침대가 하나씩 있었고, 그 중 하나가 V의 침대였다. 그는 시트 위에 앉은 채로 문을 여는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룸메이트는 자는 것 같았다. 나는 문을 열어둔 채로 V에게로 다가가 속삭였다.
“따라와.”
이제 그는 내 행위의 의미를 묻거나 따질 생각도 없는 것 같아 보였다. V는 조금 불안한 얼굴로 나를 따라 복도로 나왔다.
나는 우선 건물 뒷문으로 향했다. 따라오는 V가 계속해서 <어디로 가는 거죠? 어딜 가는 거예요 형님?> 하고 물어왔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는 뒷문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야간 당직을 서고 있어야 할 간호사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신기했다. 나는 뒷문의 손잡이를 돌려보았다. 잠겨있지 않았다. <아마도 철조망을 믿고 있는 것이리라.> 나는 생각했다. 하기야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애당초 도망칠 일이 없다. 이곳은 강제수용소가 아니다. 모두 자신의 의지로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로 격리당한 채, 자신의 의지로 정신을 침잠시키는 약을 먹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가족과 세계, 그리고 나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이 요양소를 선택했다. 그러나 이곳은 썩은 뻘이었다. 내 정신은 내달리기를 원했다. V를 그가 있어야할 곳으로 되돌려주고 말이다……. 아무튼 정문으로 정면 돌파를 하거나 창문을 깨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문을 열었다.
밤의 정원이 달빛 아래 드러나 보였다. 고요하게 부는 밤바람에 나뭇잎들이 사락거리고 있었다. 조명이라고는 단 한 점의 불빛도 없었다. 오직 하늘에서 흐르는 달빛뿐이었다. 풀잎 위에 달빛이 물결치며 번져 있었다. 우리는 정원으로 나왔다. V는 뭔가를 두려워하면서 내 뒤를 따라왔다. 밤이슬에 젖은 잔디를 밟자 푹신한 느낌이 신발 밑창을 통해 전해져왔다. 나는 똑바로 철조망까지 걸었다. 우리가 철조망 바로 앞까지 도달하자 나는 V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우린 이걸 넘을 거야.”
그러자 V는 넋 빠진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나를 향해 외쳤다.
“도대체 어디로 갈 건데요? 무슨 짓을 하려는 거예요 형님?”
“돌아갈 거라고 말했잖아.”
“집으로요? 안 돼요! 나는 돌아갈 수 없어요. 안 갈 겁니다!”
“집이 아니야. 나를 믿어. 자네를 위해 이러는 거야. 그냥 따라 와주면 안 되겠나?” 내가 그의 팔을 잡고 호소했다. V는 고민하는 것 같았다. 지금의 나를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V에게조차 내가 미치광이로 보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내 가슴 속은 생각한 바를 반드시 실행하고자하는 마음으로만 가득했다. 지금 나는 그저 앞만 보며 내달리는 미친개나 다름없었다.
“나는 자네 집이 어딘지도 몰라.” 내가 말했다. 그는 흔들리는 것 같았다. 설득이랄 것도 없었지만 V는 나를 따라가도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여전히 그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말했다.
“제기랄.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나는 형님이 이 요양소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이라고 믿어요.” 그러면서 그는 내 손을 팔에서 떼어놓고 철조망 쪽으로 한 발짝 내딛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작게 웃어보였다.
그리고 우리는 철조망을 넘기 시작했다. 먼저 내가 얼기설기 얽힌 철망을 움켜쥐고 위로 올라갔다. 철조망의 꼭대기에는 하나의 틈도 없이 가시 철선이 둘러쳐져 있었다. 나는 거리낌 없이 철선을 맨손으로 잡았다. 쇠로 된 가시가 손바닥에 박히며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잡아당기고 늘어뜨려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만한 틈을 만들었다. 손은 피투성이가 되고 옷소매는 온통 찢겨졌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고 작업을 계속했다. 밑에서 V가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핏방울이 그의 얼굴 위로 떨어지기도 했다. 그는 소매로 피를 닦았다.
내가 충분히 커다란 틈새를 만들자 우리는 그곳을 통해 철조망을 넘었다. 나는 아직도 계속해서 피가 흐르는 두 손을 힘껏 마주잡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통 나무였다.
“우선 정문 쪽으로 가자고. 길을 찾아야 해.” 내가 말했다. V는 알겠노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철조망의 바깥을 둘러서 걸었다. 어느 정도 걷자 요양소 정문이 나왔다. 이 차선 포장도로가 깔려있었고, 그 위에 쇠창살로 된 커다란 문이 굳게 잠겨있었다. 우리는 지금 그 <바깥>에 있었다. 나는 쇠창살 틈새로 보이는 요양소 건물을 조금 쳐다보다가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도로는 내리막길이었다. 산에서 내려가는 길인 것이다.
“이 길이 어디로 이어지죠?” V가 옆에서 걸으며 물었다.
“병원. 큰 종합병원이 있어. 요양소를 일부러 가깝게 지었지. 거긴 정신병동도 있으니까.” 내가 대답했다. 나는 예전에, 그러니까 요양소에서 살지 않았을 때 그 병원에 서너 번 정도 가본 일이 있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묵묵히 걸었다. 요양소에서는 점점 멀어졌다. 도로에는 가로등도 없었기 때문에 오직 달빛에만 의지해서 길을 따라가야 했다. 그리고 사십 분 정도 걷자 드디어 길가에 세워진 가로등들이 나타났다. 길 주변을 뒤덮은 나무들이 점점 적어졌고, 마침내는 멀리서 도시의 불빛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까지 걸어갈 필요는 없었다. 한 시간 쯤 더 걷자 길이 넓어지고 커다란 병원 건물이 눈에 보였다. 우리는 그쪽으로 향했다. V는 이제부터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전혀 알고 있는 바가 없었다. 그는 그저 따라왔다.
병원 건물까지는 그냥 걸어올 수 있었다. 담장이나 빗장이 걸린 문 따위는 없었다. 그저 도로에 연결된 길을 쭉 따라오기만 하면 되었다. 병원은 ㄴ자 모양의 건물로 크고 높았다. 어떤 층의 창문들로부터는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낮은 층들은 전부 깜깜했다.
“건물 뒤편으로 가야 해.” 내가 말했다. V는 순순히 따라왔다.
건물 뒤편에는 <OO병원 장례식장>이라고 간판이 붙은 별채가 있었다. 별채는 병원 본 건물과 연결되어 있었고, 무엇보다도 불이 켜있었다. 게다가 드문드문 사람들도 보였다. 대부분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가끔 장례식장 건물의 문으로 드나들며 바깥에 서서 담배를 피우거나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나는 V를 잡아당기며 그들 사이에 끼어 자연스럽게 장례식장 정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우리는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건물 안에서는 향냄새가 풍겼다. V의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뭔가를 예감하고 있는 듯 했다. 나는 딱히 그에게 무어라고 말을 주지는 않았다. 우리는 건물 안의 복도를 걸었다. 복도에는 다섯 개의 뚫린 문이 있었는데, 그 중 세 군데 정도의 문 안쪽에서 사람들이 엄숙한 분위기로 밤을 새고 있었다. 초상을 치루는 중인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는 관심을 주지 않고 계속 복도를 따라 걸었다. 본 건물로 이어지는 길을 찾아야 했다.
조금 걷자 별채의 모든 복도가 이어지는 커다란 문이 나왔다. 문은 병원에 나있는 문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위급할 때에는 병실침대 째로 밀고 들어갈 수 있도록 잠금장치나 손잡이가 없는, 가벼운 여닫이문이었다.
“여기야.” 내가 혼잣말을 하듯이 말했다. V는 점점 더 말이 없어졌다. 우리는 그리로 들어갔다.
길고 넓은, 어둑한 복도가 눈앞에 나타났다. 이것이 아마도 별채와 본 건물을 잇는 통로이리라. 우리는 복도를 따라 걸었다.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점점 짙어졌다. 조용하고 음침한 복도였다. 우리들은 아무 말도 없이 걸었다.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V 또한 예감하고 있었다. 마침내 우리들은 <영안실>이라고 패가 붙은 문 앞에 도달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안을 확인했다. 아무도 없었다. V는 문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를 끌어당기면서 영안실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커다란 공간이 있었다. 그리고 벽면에는 모두 천장까지 닿은, 철제 사물함 같은 것이 세워져있었다. 그 <사물함>에는 폭과 높이가 세 뼘 정도 될법한 사각형의 작은 문들이 무수히 많이 나있었다. V는 얼어붙은 듯이 서있었다. 나는 <사물함>으로 다가가서 거침없이 문들을 열어젖히고, 안에 있는 손잡이를 당겨 속에 든 것들을 죄다 꺼내놓았다. 한 개, 두 개, 세 개, 네 개……. 손이 닿는 문은 모조리 다 열어서 내용물을 꺼냈다. 바퀴 달린 기다란 찬장 같은 것들이 내용물을 담고 바깥으로 굴러 나와 <텅>하는 금속성의 소리를 내며 멈췄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냉장 보관된 시체들이 우리 눈앞에 나타났다.
남자, 여자, 늙은이, 젊은이, 아기. 사지 멀쩡한 것부터 복부가 터지고 머리가 날아간 것까지……. 온갖 송장이란 송장은 모조리 다 우리 앞에 있었다. 혈액이 깨끗이 제거되고, 차갑고 신선하게 보존된 채로. 감긴 눈꺼풀. 창백하게 질린 얼굴. 희미한 조명 아래 곧 바스러질 듯이 굳은 피부들……. V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는 그가 이 광경을 어떻게 느끼고 있을지 상상해보았다. 숨을 죽인 관능의 도가니. 파랗게 얼어붙은 채 뒤끓는 욕망…….
그리고 나는 V에게로 갔다. 그의 눈동자에서 깊고 사나운 혼돈이 보였다. 그는 말도 못하고 그저 그 시체들을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자.” 내가 말했다. “이제 자네 선택이야.”
그리고서 나는 시체들을 향해 그를 가볍게 밀었다. V는 힘없는 발걸음으로 몇 발짝을 내딛었다.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잠깐 바라보다가 영안실 문을 통해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 문을 닫았다.
십 분 정도 침묵이 흘렀다. 나는 영안실 문 앞에서 묵묵히 서있었다. 그러다가 문 안쪽에서 <덜컹>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아주 긴 간격을 두고, 끼익 거리는 소음이 작게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끼익 거리는 소음은 점점 간격이 짧아졌다. 그것은 더욱 빨라지더니, 마치 폭풍처럼 거칠고 둔탁한 소리로 변해갔다. 나는 웃기 시작했다. <그렇지!> 하고 나는 웃으면서 소리를 질렀다. 문 안쪽에서는 <오! 아아!>하는 야수의 울음소리 같은 괴성이 울려 퍼졌다. 나는 손으로 바닥을 치면서 미친 듯이 웃었다. 복도 바닥에 피로 된 손도장이 찍혔다. 나는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나는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눈물이 광대를 타고 내려와 볼과 턱선을 따라 흘렀다. 나는 울면서 웃고 고함을 쳐댔다. 우리는 미친 사람들이다! 우리는 미친 사람들이다. 문 안쪽에서 나는 소리는 더 소란스럽고 격해져갔다. 웃음도 눈물도 멈추지를 않았다. 감정이 너무나도 광란발작을 하여 내 목에서 나오는 소리는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모를 히끅거리는 소음으로 변했다. 그런데도 나는 계속해서 언어가 되어 나오지 않는 말들을 외쳤다. 나는 흐흐거리면서 바닥에 찍힌 새빨간 손도장에 눈을 박고 있었다. 눈물은 끊임없이 흘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