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사는 집
1. 적당한 길이의 단편소설. 이야기의 흐름보다는 장면 장면의 뉘앙스에 신경을 쓰느라 스토리텔링의 부분에 있어서는 부족한 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2. <익사자들>에서부터 연결되는 주제의식을 갖고 쓴 것. 삶의 인간이 죽음을-동시에 생명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삼부작을 쓰려고 했고, 이것은 그 중 두번째 소설이다.
3. 나름대로 만족한다. 최근에는 창작의욕이 높아져서 기분이 나쁘지 않다. 퇴고하는 것을 귀찮아하지 말아야 할텐데.
홀로 사는 집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남자는 창문가에 놓인 의자에 앉은 채 유리창 너머로 눈송이들이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앉아있는 의자는 인조가죽으로 덮인 황갈색의 나무의자였는데, 집을 구할 때 창고형 가구매장에서 헐값에 가져온 것이었다. 창문을 거쳐서 남자의 손등 위로 쏟아지는 직선의 하얀 빛살들은 계절의 냉기를 품고 있었고 화살촉처럼 날카로웠다. 남자의 시선은 무표정하게 창문 너머로 향하고 있었다. 그의 두 손에는 책이 한권 들려 있었는데, 이미 3분의 1정도가 읽혀진 책은 아무런 의미도 없이 남자의 허벅지 위에 펼쳐져 있었다. 의자 옆 햇살이 들지 않는 자리에는 다탁이 하나 자리 잡고 있었다. 역시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다탁 위에는 투명한 유리잔이 놓여 있었다. 유리잔에는 맑은 액체가 반 정도 담겨 있었다. 화주였다. 남자는 가끔 창문 너머로 시선을 붙박은 채 손을 뻗어 그것을 홀짝이곤 했다. 그가 난방도 하지 않은 방에서 가벼운 차림으로 있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술 덕분이었다. 심지어 그는 나무판자를 이어 붙여 만든 차디찬 바닥 위에 맨발을 올려놓고도 아무렇지 않았다. 남자는 아침에 눈을 뜨고서부터 계속 술을 마셔왔던 것이다. 정신만큼이나 육체도 뜨겁게 느껴졌다.
그는 얼핏 보기에 삼십대 후반 즈음으로 보이는 마른 남자였다. 까만 머리칼이 지저분하게 자라 있었고 며칠간 면도를 하지 않은 턱은 수염으로 거뭇거뭇했다. 여전히 창가에 앉아 하얀 빛살과 하얀 눈과 하얀 구름으로 뒤덮인 풍경만을 내다보는 그의 눈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무척이나 조용했다. 남자는 다시 한 번 유리잔을 집어 안에 든 것을 전부 입안에 털어 넣었다. 뱃속에서부터 화끈하고 열기가 올라왔다. 그는 몸속에서 휘몰아치는 취기와 열을 찬찬히 감미하려는 듯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남자는 알코올이 좋았다. 그는 인생에 있어서 늘 그것을 필요로 했다.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모두 술이 무슨 독약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휘발성의 음료를 매도하고 깎아내리느라 바쁘게 입을 놀려댔지만, 남자 입장에서는 술이라는 것이 도무지 나쁜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그것은 인생을 감내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가끔 너무 심하게 취하면 자기도 모르게 울어버리는 일이 일어나곤 했다. 그것은 그리 좋은 일이 아니었다. 알코올이 몰고 온 정신의 혼란과 침잠 속에서 남자는 표정도 변하지 않은 채 그저 눈물만 뚝뚝 흘려댔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멈출 방법이 없었다. 그는 열린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수돗물처럼 눈물을 흘리며 당황해서 온 집안을 헤매곤 했다. 그가 잃어버린 것과 마음속 깊이 알고 있는 것들 때문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럴 때면 남자는 눈알이 쪼그라들 때까지 울면서 더 독한 술을 마시고, 마침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잤다. 그리고 다음날 두통과 함께 깨어나서, 부어오른 눈두덩을 문지르며 화창한 아침 햇살―때로는 붉은 노을빛 속에서 하품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 일은 종종 있었다. 그런데 그런 경험도 오직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만취 속에서의 눈물과 잠은 시간을 잊게 해주는 데에 탁월한 효과가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남자는 이러한 일상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유감스러울 일이 없는 것이다.
남자에게는 친구가 한명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사귀어온 친구였다. 그는 어느 운수회사의 사무원으로, 가족으로는 아내와 딸아이가 하나 있었다. 그는 이따금 자신의 검정빛 자가용을 몰고 남자를 찾아오기도 했다. 친구가 찾아올 때면 남자는 늘 그렇듯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친구는 그를 만날 때마다 남자의 음주습관에 대하여 꼭 한소리씩 하곤 했다. 「자네 그러다가 결국 병원 신세를 지게 될 거야. 두고 보라고.」 이렇게 말이다. 그럴 때면 남자는 그저 조용히 웃었다. 실상 친구의 말이 맞았다. 알코올이 간에 안 좋은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남자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별다른 반론이 없는 것이었다. 「알코올중독자 재활센터 같은 곳에 가게 될지도 모르지. 그런 생활을 하고 싶은가?」 친구는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그다지 달갑지는 않은걸.」 남자는 언제나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재활센터라니? 누가 남자를 그런 곳에 보낸단 말인가? 그에게는 가족도 없었다. 이미 오래전에 전부 죽었다. 남자의 아버지는 플라스틱 제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었다. 그는 일터에서 피어오른 유독성 공기를 너무 많이 마신 탓에 죽었다. 어머니는 신경질적인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주 자신의 공격적인 감성을 이기지 못해서 감정적으로 고통스러워하곤 했다. 어머니가 일찍 죽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그렇다, 남자에게는 가족이 없었다. 말했다시피 친구에게는 가족이 있었다. 그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것이었다. 친구는 결혼을 결정했을 때 남자에게 와서 기쁜 낯으로 그 소식을 알렸다. 남자는 약간 쓸쓸한 눈빛으로, 그러나 웃는 얼굴로 친구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그리고 수년이 지난 뒤에는 친구가 아내의 임신 소식을 알려왔다. 그때 남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슬픈 기분을 느꼈다. 그것은 정말로 슬픈 일이었다. 그러나 만면에 화색이 가득한 친구에게 그러한 슬픔을 말로 전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남자는 또 한 번 축하의 말만 전했던 것이다. 그 때 친구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바보 같은 짓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나는 내 아이가 생기는 것이 정말로 기뻐.」 남자는 대답했다. 「그래. 축하하네.」
남자는 아직 한 번도 친구의 아이를 본 일이 없었다. 햇수를 따져보면 지금쯤 그 여자아이는 다섯 살 즈음 되었을 것이다. 친구는 굳이 남자에게 자신의 아이를 소개시켜주거나 사진을 보여주려고 하지 않았다. 남자도 그다지 아이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친구는 이해는 할 수 없었지만 어림짐작으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도 오랫동안이나 남자와 지내온 것이다. 그래서 친구는 그에게 아이를 보여주지 않았다. 남자는 그 점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그런 이해심 때문에 남자는 자신의 친구를 더욱 사랑하고 친밀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는 술과 열기가 뱃속을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낀 뒤에 눈을 떴다. 창문 밖에서는 계속 희미한 눈발이 휘날리고 있었고, 그의 눈은 술기운과 졸음 때문에 반쯤 감겨있었다. 그는 다탁 위에 텅 빈 유리잔을 다시 되돌려놓았다. 나무와 유리가 부딪히며 ‘딱’하는 소리가 고요한 집안에 울려 퍼졌다. 손에는 펼쳐진 책이 들려있었다. 남자는 그것도 다탁 위에 덮어놓았다. 그는 두 손을 깍지 끼고 허벅지 위에 놓았다. 날씨는 차가웠다. 계절은 겨울이었고 공기는 적막했다. 창밖 풍경은 눈으로 덮인 대지와 구름이 뒤섞여 지평선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하나의 커다란 면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한동안 의자에 앉아있던 남자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비틀거렸다. 그러나 많이 취하지는 않았다. 그는 맨발로 목제 바닥을 조금 서성거려보았다. 딸아이라. 남자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까칠까칠한 턱수염을 문질렀다. 그의 머릿속에는 딱히 이렇다 할 감상이 없었다. 창문 밖의 풍경만큼이나 이차원적이었고 공허했다. 알코올이 그의 감성이라고 부를만한 것을 마비시켜놓은 것이었다. 남자는 그러한 상태가 좋았다. 그래서 그는 조금 웃었다.
남자의 집은 도시 중심부로부터 멀리 떨어진 교외에 있었다. 그것은 회색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지어진 2층 집으로, 너무 크지도 않고 너무 작지도 않았다. 1층에는 거실과 부엌이 있었으며 2층에는 벽을 따라 둘러쳐진 복도와 방들이 있었다. 사실 남자 혼자 살기에는 비교적 큰 집이었다. 남자는 세 개나 되는 방들 중 서쪽을 향해 창문이 난 방 하나를 골라 침실로 쓰고 있었다. 나머지 방들은 마지막으로 문을 열어본지도 한참 오래전 일이었다. 그는 많이 움직이지 않았다. 혼자 지내기에는 너무 큰 그 집에서, 남자가 사용하는 공간은 한정되어 있었고 늘 엇비슷했다. 그가 찍고 다니는 발걸음만을 따라 도로를 닦을 수도 있을 정도였다. 그는 부엌에서 식사를 했고, 침실에서 잠을 잤으며, 나머지 시간은 창가에 앉아 술을 마시거나 책을 읽거나,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지냈다. 그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일을 하지 않아도 좋았다. 그에게는 더 이상의 노동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충분한 돈이 있었다. 그것은 남자가 젊을 때 벌어둔 것들이었다. 그 시절 그는 사업을 했다. 그에게는 사업에 재능이 있었다. 실상, 그 남자는 뭘 시켜도 그 일에 대한 탁월한 재능을 보여줄 것만 같은 그런 인간이었다. 아무튼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가난하게 자랐던 그는 사업의 성공과 번영으로 말하자면 경제적 성공이라는 것을 한 손에 거머쥐었다. 그러나 자신의 발밑에 수많은 사원들이 늘어서고 한 손으로 다 꼽아볼 수도 없는 통장들의 잔고가 점점 늘어나고 사업의 범위가 더욱 확장되어도 그는 웃지 않았다. 다만 어느 정도의 돈이 손 안에 들어왔을 때, 남자는 이제 더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말했다시피 그의 아버지는 공장에서 일하며 근근이 가족을 먹여 살렸던 가난한 남자였다. 남자 역시 어렸을 적부터 가난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사치하는 취미라는 것이 없었다. 애당초 그는 사치의 즐거움이라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아마도 날 때부터 그랬으리라. 그는 회사의 지분을 전부 팔아넘기고 집을 하나 샀다. 조금만 걸어 나가면 멀리 펼쳐진 밭이 보이는, 교외에 세워진 집이었다. 그리고 남자는 은둔자처럼 그곳으로 숨어들어갔다.
사업가 시절의 동료도 가깝게 지내던 거래처 사람들도 남자가 어디로 갔는지, 그리고 왜 갑자기 일을 그만뒀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가 가진 대부분의 관계들은 그의 직업으로 말미암은 것들이었고, 그 직업을 그만둠과 동시에 칼로 잘라낸 듯이 잘려나갔다. 사실 어느 정도는 남자가 의도한 일이기도 했다. 그는 더 이상 사람들과 만나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과 만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독 속으로 스며들어서 원래 살던 사회에서는 형체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이제 남자가 만나는 사람은 단 한명의 친구뿐이었다. 그마저도 남자 입장에서는 수동적인 관계이기는 했다. 남자를 찾아오는 것은 늘 친구 쪽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것은 유일하고 또 중요한 관계였다. 친구는 거의 일주일에 한번 꼴로 남자를 찾아왔다. 남자도 그것을 반겼다. 그들은 오랜 친구였고, 둘 다 그 사실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친구는 남자에 대해서 아는 것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도 왜 남자가 갑자기 일을 그만뒀는지 몰랐다. 남자는 그것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이나 변명도 없었다. 그는 그냥 그만뒀고, 그의 조용하고 고독한 집으로 걸어 들어갔다. 남자는 더는 정열적으로 일하고 사람들을 만나며 그의 매혹적인 화술로 계약을 성사시키던 그 시절의 인간이 아니었다. 아니, 정말로 그 때의 남자라는 것이 있기는 했던가? 이제 와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이제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그가 모든 것에 만족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다만 그는 침묵했다.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그는 적게 먹고 적게 썼다. 검소한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습관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언젠가 남자가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한 일이 있었다. 「나는 음식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내가 무언가를 먹으면, 그것으로 인해서 나의 내면이 어지럽고 지저분해진 느낌이 든단 말이야. 나는 깨끗한 것이 좋아. 아무것도 먹지 않고 오랫동안 허기진 상태를 유지하면 나는 내가 깨끗해진 것만 같은 기분을 느껴.」 친구는 말없이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말랐고, 눈이 퀭했다. 얼굴에 진 그늘은 울적한 냄새를 풍겼으며 메마르고 세찬 눈빛은 삶에 대한 기쁨을 전부 포기한 사람의 것처럼 보였다. 친구는 자신의 벗이 그렇게도 윤기 없이 건조한 영혼의 소유자라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따뜻한 가정을 만들고 가족에 대한 사랑을 갖고서 살아가는 사람인 그는 자신의 친구가 좀 더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자는 행복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는 안타까워했다. 이따금 남자에게 기쁨을 찾는 삶이라는 것을 권하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친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었다. 남자는 공허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만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는 무언가를 갈구하는 것도 아니었다. 남자의 상태는 완전히 ‘필연적인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어도 그런 것이리라고, 친구는 조용히 납득했다.
「뭐라도 하고 싶은 일은 없는가?」 어느 날 친구가 남자에게 물었다. 「글쎄, 잘 모르겠는 걸.」 남자가 대답했다. 「하지만 늘상 그러고 있으려면 심심하지 않아?」 「괜찮아. 뭘 하든 별다를 건 없으니까.」 그러면서 남자는 슬쩍 웃어보였다.
남자는 술을 마셨다. 음식은 잘 입에 대지 않았지만, 술은 상관없었다. 자신이 영적으로 더럽혀졌다고 믿는 사람들 중에는 종종 끊임없이 물을 마셔대는 이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언젠가 들은 기억이 있었다. 어쩌면 자신의 한계를 모르는 음주도 그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하고 남자는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것은 정화작업인 것이다. 불타는 휘발성 음료. 내면의 찌꺼기들을 전부 불사르고 새하얀 본질만을 남겨 놓는다. 어쩌면 이렇게도 초현실적일 수 있을까. 남자는 자신의 손이 벌벌 떠는 것을 보았다. 전부 실없는 생각이다. 어쩌면 나는 한낱 알코올중독자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진단 말인가? 그의 눈은 계속 자신의 거칠고 뼈가 불거진 손에 붙박여 있었다. 남자는 순간 자신이 나이를 먹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소년시절을 떠올려보았다. 그 손이 아직 깨끗하고 매끈매끈하던 시절을 생각했다. 그 아득한 과거. 그는 그 시절의 어느 여름날 저녁을 기억했다. 오후 여덟 시인가 아홉 시 즈음 되었을 시각. 일찍부터 해가 져서 하늘은 이미 깜깜했다. 그러나 지상은 네온사인과 가로등, 그리고 간판의 불빛들로 요란하게 번쩍이고 있었다. 남자는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앞에서 걷던, 머리가 벗겨지고 반팔 셔츠를 입은 뚱뚱한 사내가 갑자기 쓰러졌다. 딱딱한 보도블록 위로 그대로 쓰러져버린 것이다. 그는 쓰러져서 움직이지 않았다. 남자는 그 움직임 없는 몸뚱어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힘없이 입을 벌린 얼굴이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오십대 정도 되어 보이는 늙은 사내였다. 남자는 정말로 그가 늙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곧이어 그 사내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주변에는 구경꾼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소란스러웠다. 몇 분인가 지나 사이렌 소리가 들리더니 경광등을 번뜩거리며 경찰차가 도착했다. 누군가가 신고를 한 모양이었다. 경찰들은 차에서 내리더니 쓰러진 채로 움직이지 않는 그 사내를 붙잡고 흔들며 말을 걸었다. 그래도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들리는 것 같지도 않았다. 어린 남자는 그 꼴을 잠시 지켜보고 있다가 가던 길을 다시 걷기 시작했다. 쓰러진 사내와 경찰, 그리고 구경꾼들은 남자의 뒤편으로 점점 멀어졌다. 그는 그대로 버스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잠을 잤다. 쓰러진 늙은 사내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죽었을지도 모르고,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남자의 시선은 현재로 돌아왔다. 그의 거친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남자는 자신이 늙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술잔을 들어 올려 술을 한 모금 들이 삼켰다.
남자는 잠에서 깨었다. 밤이었다. 방안은 어두컴컴하고 나무로 된 바닥은 미광으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창문은 어둠으로 새까맣게 칠해져 있었다. 시리도록 투명한 밤 속에서 별들이 보석조각처럼 남몰래 빛나고 있었다. 남자는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그는 꿈을 꾸었다. 이상한 꿈이었다. 남자는 손끝으로 자신의 입가를 더듬었다. 무심결에 한 행동이었다. 그가 깬 것은 꿈 때문이었다. 꿈속에서 남자는 어느 낡고 오래된 자동차의 앞좌석에 앉아 있었다. 창문으로 보이는 주변 풍경에는 채도가 없었고 가뭄이 든 것처럼 메말라 있었다. 그는 영문 모른 채로 그저 자리에 앉아만 있었다. 자신이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누군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돌아올 것 같지 않았다. 그럴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대시보드와 시트 밑에서 시뻘건 액체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사람의 혈액 같기도 했고 녹슨 쇳물 같기도 했다. 그 액체는 창문을 통해 비쳐 들어오는 회색의 건조한 햇살 밑에서 광물성의 빛깔로 번쩍였다. 창문 밖으로 향한 남자의 눈에는 무채색의 나무들이 들어왔다. 엽록소를 잃은 잎들이 팔락이고 있었다. 붉은 액체는 자동차 안쪽에 나있는 모든 틈새에서 멈추지 않고 뿜어져 나왔다. 밀폐된 차내에서, 그 액체는 점점 높이 차올랐다. 남자는 수위가 올라가는 것을 표정 없는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발목까지 잠겨있었다. 액체는 계속 흘러나왔고 남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 기다리기만 했다. 기다리는 것이 도착하지 않는다는 씁쓸한 감정만이 남자를 지배하고 있었다. 꿈속에서도 시간은 흘렀다. 수면은 점점 더 높아져 허벅다리를 지나 허리, 가슴께가 잠기고 마침내 목둘레까지 차올랐다. 남자는 그대로 있었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밖에서 본다면 검붉은 빛깔의 거대한 젤라틴이 자동차 안에 가득하게 들어차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었다. 그리고 젤리 속에 박힌 사람 모양의 플라스틱 장식물. 목 아래로 신체 곳곳에 묵직하니 수압이 느껴졌다. 남자는 눈을 껌뻑거렸다. 그리고 잠에서 깨었다.
악몽이었는가? 이렇다 저렇다 단정 지어 얘기할 수가 없었다. 침대 위에 이불을 덮고 앉은 남자는 아무런 흥분된 감정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목까지 차오른 무거운 핏빛 액체. 광물질의 수액. 그러나 어쩌겠어? 남자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나 어쩌겠어?
곧 그는 침대 밖으로 나와 일어섰다.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달빛으로 된 안개가 덮인 것 같은 밤. 그는 맨발로 나무 바닥 위를 서성거렸다. 창문가로 다가갔다. 밤하늘에서 흘러내리는 부드러운 미광으로 하얗게 보이는 목제 의자의 등받이를 쓰다듬었다. 가벼운 어둠. 겨울밤의 침묵. 남자의 눈은 반쯤 감겨있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눈 덮인 땅은 어둠과 밤의 빛으로 단조로운 색을 하고 있었고 모난 곳 없이 부드러워 보였다. 대지는 기복도 솟아오른 돌출부도 없었고 깜깜한 어둠 속으로 그 형태가 사라져버릴 때까지 완만한 선을 그리며 내달리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눈밭. 터무니없이 멀고 아득하다. 남자는 한참 동안 밖을 내다보았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형언하기 힘든 감정이 남몰래 울렁이고 있었다. 추운 계절이었다. 남자는 자신의 꿈틀거리는 욕망을―욕망! 그것을 욕망이라고 불러도 좋은 것일까?―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늘 술을 마시고 감정의 셔터를 내려버리는 것이 아니었던가. 고뇌, 안타까움, 못다 한 감정, 그에 대한 체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는, 울컥하고 솟구치는 반항적 의식. 그러나 도무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남자는 생각했다.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그는 필연이라는 단어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명백한 진실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욕망을, 감정을, 안타까움을, 이미 오래전에 눈이 멀어버렸지만 여전히 빛을 갈구하는 깊은 동굴 속의 짐승 같은 마음을, 자신이 빤히 의식하고 있는 필연이라는 이름의 강철 같은 절대성으로 억눌러버리기 위하여 알코올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고독. 고립. 세계의 진면목을 발견했을 때 취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태도.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때 나는 이미 죽어있었다.
손발이 시렸다. 공기가 찼다. 몸이 으스스 떨렸다. 가끔 이렇게 자신의 내면이 요동치는 것을 남자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부엌으로 내려갔다. 부엌의 찬장에는 온갖 알파벳과 인장들이 새겨진 술병이 장사를 해도 될 만큼 많았다. 남자는 그 중 하나를 골라 들어 마개를 땄다. 그는 술잔도 찾지 않고 병째로 그것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열기를 품은 독주가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자다 깬 빈속에 알코올을 퍼부으니 속이 타는 것 같았다. 추위로 떨리던 사지는 차츰 진정되어갔다. 뱃속에 불덩어리를 하나 품은 것 같았다. 차가운 바닥 때문에 얼어붙을 것 같던 발에서도 점차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감각이 마비되어가고 있었다. 그칠 줄 모르고 마셔대는 독주로 인해 초점이 흔들리고 균형 감각이 꼬이기 시작했다. 남자는 더 이상 저 멀리 시선 끄트머리에서 전차처럼 밀고 들어오는 그 무엇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지 않았다. 이미 모든 것이 둘로 보일만큼 취했기 때문이다.
그는 유리로 된 내벽에 증류주가 찰랑거리며 부딪히는 술병의 목을 부여잡고 계단층계를 디디며 올라갔다. 문뜩 밖에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취하면 늘 그런 충동을 느꼈다. 어딘가로 끊임없이 걸어가고 싶은 충동. 밖으로, 밖으로. 더 이상 걷지 못하게 될 때까지. 그러나 남자는 나서지 않았다. 그는 이미 전부 다 알고 있었다. 그가 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목적하는 곳도 없었고 부르는 곳 또한 없었다. 남자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그것이 내게로 다가올 때까지, 오직 기다리는 것 뿐. 아무리 걸어봤자 눈밭은 끝나지 않을 것이고 새로이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없을 것이었다. 그는 모두 다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말이다. 내려쳐지는 단두대의 도끼날 같은 세상. 불변성. 운명이라는 단어의 견고함. 그리고 내 정신의 자유여! 내 심장을 옭아매는 끔찍한 자유여. 남자는 솟구치는 술기운 때문에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남자는 복도를 지나 침실에 다다랐다. 밤의 빛이 반투명한 비단처럼 방을 감싸고 있었다. 너풀거리는 은빛. 남자는 비틀거렸다. 그는 병의 주둥이를 입에 대고 병을 기울였다. 남자는 문뜩 지금쯤 친구가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는 잠을 자고 있겠지. 자신의 아내와 한 이불을 덮고 말이다. 그의 작은 딸도 그녀의 침대에서 곤히 자고 있을 것이다. 달빛이 그들을, 그 가정을 돌보기를. 남자가 한 손을 들어 자신의 혼란스러운 눈을 비볐다. 그는 흐흐거리며 웃었다. 몸속에서는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지만 그는 방이 얼마나 추운지 살갗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한겨울에 난방도 하지 않고 내버려둔 채인 그의 집은 온통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 집에서 살아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남자 혼자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연한 일이다. 남자가 허공에 대고 말했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연대. 한때 남자에게도 연인이 있었다. 그때 그는 외로웠고, 여자 또한 외로웠다. 그들은 함께 지냈다. 서로의 고독을 쓰다듬고 육체를 부대끼며 그들 사이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찾으려고 애를 썼다. 남자는 여자의 피부를 어루만지는 것이 좋았다. 그녀의 냄새를 한가득 맡는 것도 좋았다. 어쩌면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는 것도 같았다. 남자는 그 시절을 똑똑히 회상할 수 있었다. 여자의 모습은 고독만큼이나 뚜렷했고 손을 뻗으면 닿는 거리에 있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탐닉했고 퇴폐주의자들의 그것에 비길 정도로 상대의 내면에 침투한 채로 지냈지만, 그 관계는 어딘지 모르게 위태위태한 점이 있었다. 언제나 주변에, 바로 곁에 고독이 도사리고 있었다. 향락의 손끝은 무감각으로 덧씌워져있었고 서로를 갈구하는 얼굴에는 무표정의 그늘이 드리워져있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남자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 이상의 무언가를 기대하지도 않았다. 남자가 아는 최대한의 관계란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만족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끝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갑작스러웠다. 어느 날 남자는 여자의 잠든 옆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어쩌면 그들이 결혼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결혼해서 하나의 가정을 꾸리고, 서로가 늙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끝’까지 함께 지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자마자 남자는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그는 격렬하게 몸서리를 쳤다. 남자는 공포에 질린 채로 일어나서 급히 자리를 떴다. 그리고 다시는 그녀를 만나지 않았고 연락도 하지 않았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런 일도 있었다. 남자는 별빛이 비치는 창가 주변을 휘청대면서 서성거리다가 침대 시트 위로 고꾸라졌다. 손에는 여전히 술병이 쥐여져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심한 알코올 냄새가 풍겼다. 남자는 침대 위에 엎어진 채로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입을 뻐끔거렸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자의 부엌 찬장에는 유리병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술병들 사이, 찬장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었다. 보르도 와인 병의 모가지만 잘라낸 듯한 모양의 그 병은 투명했고 알루미늄 마개로 뚜껑이 닫혀 있었다. 투명한 병에는 엷은 푸른색의 알약이 가득 들어있었다. 치사량을 훌쩍 넘는 수면진정제. 남자는 그것을 오랫동안이나 보관해왔다. 불면증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는 쓰러질 때까지 술을 마시면 그만이었다. 그렇다고 남자가 당장 자살할 요량인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냥 그 약 더미를 찬장 속에 처박아뒀을 뿐이었다. 그리고 가끔 술병 사이로 손을 뻗어 약병을 끄집어내서 그것이 확실히 거기에 있다는 것만을 확인하고 다시 집어넣곤 했다. 그것은 일종의 상징이었다. 남자는 늘, 자신이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다. 스스로의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지성의 증명이고 자유의지의 결정이라고. 그래서 남자는 죽음을 찬장에 넣어두고 언제나 그것을 인식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었다. 사실 중요한 것은 약이 아니었다. 죽음은 언제나 삶의 바로 옆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단지 그것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있는 것 뿐. 남자는 그것을 알고 있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보다는 한번 알아버리게 되면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인지란 간단히 내버리거나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절대로 풀리지 않는 영혼의 족쇄 같은 것이다. 잠들어있던 노예가 눈을 뜬 순간 자신의 처지를 완전히 인식해버리는 것처럼, 남자는 자신이 언제든지 죽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도 말이다. 게다가 그는 심지어 죽음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그에게는 의식과 자유로운 양손이 있었기 때문이다. 죽음! 그 얼마나 절대적이고 낯설면서도 동시에 친근한 것인가. 오히려 죽음은 남자의 삶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살할 생각도 없으면서 그 약병을 버리지 못했다.
그날 남자는 찬장에서 약병을 꺼내와 침실의 다탁 위에 두었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한동안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은 오후였다. 태양빛이 약병의 표면에서 산산이 부서지고, 병의 표면은 내용물로 인하여 푸르게 보였다. 「무엇이 그리 대단하단 말인가?」 문뜩 남자가 내뱉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한 번 더 반복해서 말했다. 무엇이 그리 대단하단 말인가?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삶이? 죽음이? 이 하루하루가? 내 집의 현관문은 어째서 그렇게 단단하게 닫혀있는가? 바깥 세상에 뭐가 있지? 사람들? 내일도 해가 뜰 것이라는 믿음? 그는 한 모금 더 마셨다. 정신이 나간 것처럼 돈을 긁어모으던 그 시절의 나는 무엇을 믿었던가? 이제 와서는 도무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그때 믿었던 것을 이제 더는 믿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때 나는 이따금 떠나버리고 싶다고 생각하곤 했다. 사시사철 춥고 건조한 바람이 부는 이 척박한 땅에서 벗어나, 하늘에서는 구름이 걷히고 눈 대신 빛줄기만이 쏟아져 내리는 바다 건너의 땅으로. 나는 그곳에 가고 싶다고 생각 했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것도! 지중해의 태양. 삶의 단맛. 생명의 힘줄이 느껴지는 바닷바람. 육체의 생기. 그것들을 내가 어떻게 향유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아무런 의미도 없다.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는 손을 뻗어 다탁 위의 약병을 열었다. 병 안의 알약들이 달그락거렸다. 남자는 그 푸른 알약을 서너 알 집어 잔속의 독주와 함께 목으로 넘겨버렸다.
괜찮아. 아직 약은 충분해. 남자가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그는 잔을 내려놓고 약병으로 손을 뻗었다. 서너 알 쯤 줄어든다고 티가 나지도 않을 양이었다. 그는 별 의미도 없이 약병을 달그락 소리가 나게 흔들었다. 그때 현관문 쪽에서 벨소리가 들려왔다. 방문자였다. 남자는 약과 알코올 때문에 뒤죽박죽이 된 머리로 정신없이 일어났다. 그는 휘청거리면서 계단을 내려갔다. 졸음이 몰려와서 까딱하다가는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았다. 남자는 거의 온몸을 난간에 밀착시키다시피 하며 1층으로 내려왔다. 머리가 어지럽고 정신이 없었다. 남자는 약을 많이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이러다가 기억이 끊기는 것이다. 약을 먹고 처음 이십 분 가량은 구역질이 나올 것 같고 휘청거리는 정신과 두통 때문에 제대로 서있지도 못하다가, 어느 순간 툭하고 기억이 끊긴다. 그리고 여덟 시간 내지 열다섯 시간 후, 끔찍한 두통과 함께 침대에서 눈을 뜬다. 그동안 자신이 무얼 했는지는 도무지 알 도리가 없다. 어떻게 멀쩡하게 사지가 붙어있는지, 어떻게 창문 밖으로 떨어지지 않았는지, 어떻게 벽 따위에 머리를 찧지 않았는지, 어떻게 바닥에 쓰러져서 그대로 잠들지 않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냥 두통을 느끼면서 침대에서 일어난다. 아, 살아있구나, 하고 어리둥절해하면서.
남자는 현관문에 달린 렌즈로 문 건너를 내다보았다. 친구였다. 친구가 두꺼운 코트를 입고서 현관에서 벨을 누르고 기다리고 있었다. 하필이면 이럴 때. 남자는 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현관문에 머리를 처박았다. 철제 문짝에서 쿵하는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그는 잠금장치를 풀고 문을 열었다. 하얀 겨울 냄새와 함께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쳐 들어왔다. 「자네로군, 웬일이야?」 남자는 최선을 다해 또박또박 말하려고 했지만 이미 혀가 꼬부라져 있었다. 「지나가는 길에 들렸지. 그런데 자네 또 술 마셨나?」 「조금. 별 거 아니야.」 남자가 과장되게 손을 내저으면서 말했다. 「취한 것 같은데.」 「괜찮다니까. 아무튼 들어오게.」 친구는 현관을 넘어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안으로 들어와서도 코트를 벗지 않았다. 「썰렁하군. 난방을 좀 켜놓고 살지 그래.」 「괜찮아. 벽도 있고 지붕도 있는걸. 옷만 제대로 챙겨 입으면 돼. 올라오게. 거실엔 아무것도 없으니.」 그들은 2층으로 올라갔다. 남자가 휘청거리고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해 친구는 걱정스러워하며 그를 부축했다. 「늘 이렇군. 왜 늘 이렇게 망가져 있는 건가?」 친구의 질책 같은 물음에 남자는 그저 싱긋 웃기만 했다. 눈꺼풀이 자꾸만 닫히려고 했다.
친구는 남자를 부축하고 침실로 들어와 그를 침대 위에 앉혔다. 아무래도 영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어지간히 마시지 않으면 이렇게 될 리가 없는데. 그는 주변을 둘러봤다. 곧 그의 눈에는 다탁 위에 놓인 약병과 술잔이 보였다. 친구는 남자를 향해 고개를 휙 돌리더니 놀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맙소사! 자네 약 먹었군!」 남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한쪽 눈이 잘 뜨이지 않아서 윙크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손을 들어서 열리지 않는 눈꺼풀을 억지로 열어 보았다. 시야가 흐릿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얼마나 먹었나?」 「아니야, 괜찮아. 괜찮다니까.」 「괜찮기는 뭐가, 당장 가서 토해야겠어!」 「괜찮다니까. 얼마 안 먹었어.」 친구는 남자를 억지로 화장실까지 끌고 가려고 했지만 그는 침대에 붙어 움직이지 않으려고 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건가? 죽고 싶은 거야?」 「죽으려고 먹은 게 아니야. 그건 잘 알아둬야 하네. 난 죽으려고 한 게 아니야.」 남자가 발음이 불분명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친구는 이제 남자를 옮기려는 것을 포기하고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붙잡고 있었다. 「일도 그만두고 두문불출하더니 이젠 약까지 집어먹는군.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친구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졸고 있었다. 그는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눈은 반쯤 감겨 있었고 고개는 연이어서 끄떡거렸다. 한동안을 그러고 있었다. 친구는 아무 말도 않고 남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남자가 스윽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이봐」 그가 약에 취해 괴상한 억양으로 말했다. 「이봐, 자네는 자신이 늙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나? 자네의 아내는? 딸은 어떤가? 그 아이가 점점 커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어? 절대적인 중량이 자네와 자네 가족들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고 있느냔 말이야. 그걸 견딜 수 있어? 이보게, 나는 내가 얼마나 얻을 수 있는지 알고 있다네. 또 얼마나 잃을지도 말이야. 자네는 알고 있나? 우리는 찰나야. 찰나에 불과해. 더 이상 무얼 바랄 수 있겠는가?」
하하하. 남자가 힘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몸도 가누지 못하면서 죽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얼 더 바라야 하지?」
무얼 더. 무얼 더 바라야 하나. 남자는 이제 눈을 감고서 조용히 읊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의식을 잃으면서 앞으로 거꾸러졌다. 나무 바닥에 호되게 머리를 박을 뻔 한 것을 친구가 잡아 일으켰다. 그는 남자를 침대 위에 뉘였다. 그리고 약에 취해 엉망으로 잠든 자신의 친구를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불쌍한 친구 같으니.」 그는 그 한마디를 남기고 방을 나섰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남자의 집을 나와 차를 타고 떠났다.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집으로 말이다.
남자가 일어났을 때 그의 입주 변에서는 하얀 거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위장에서부터 수면제의 공허한 냄새가 올라왔고 심장 한 구석을 썩둑 도려낸 것 같은 감각이 가슴 속을 맴돌았다. 밤이었다. 또 밤이었다. 여전히 밤이었다. 최근 그는 늘 어둠 속에서만 눈을 떴다. 기상과 함께 아침을 맞아본 일이 터무니없이 오래 전인 것처럼 느껴졌다. 남자는 손등으로 입가의 거품을 닦아냈다. 「집으로 가고 싶다.」 캄캄한 밤 속에 퍼지는 혼잣말. 집? 그런데 그 집이 어디란 말인가?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침묵하는 천장을 흐리멍덩한 눈으로 멀거니 쳐다보았다.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친구가 왔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는 돌아가고 없다. 남자는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기억해내려고 노력해보았지만 아무것도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시간을 세어보았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의 시간들. 지금까지 자신이 시간에 새겨온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죽은 일. 친구를 만난 일. 대학을 졸업한 일. 사업을 시작한 일. 여자와 만난 일. 그리고 도망친 일. 가진 것들을 전부 팔아치우고 교외로 숨어든 일. 그리고 지금.
시간에 새겨온 것들이라고? 남자는 코웃음을 쳤다.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다. 시간은 나를 그저 스쳐지나갔다. 내 피부에 닿지도 않고, 내가 만져볼 틈도 없이 나를 통과해버렸다. 나는 살지 못했다. 살아본 일이 없다.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절대의 늪이 그리도 당당하게 눈앞에 놓여있는데. 내륙지방에서 차고 건조한 공기와 함께 성장한 남자는 인생을 소진하는 방법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그는 불타는 태양을 모르고, 삐걱거리며 열기를 뿜는 근육과도 친하지 않았으며, 차디찬 알코올 속으로만 침잠하고 있었다. 남자는 한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그러쥐었다. 공허 속에서 심장이 두근거리며 박동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처절하게. 죽음을 앞둔 병자의 마지막 호흡처럼 가쁘게.
그는 일어났다. 몸의 균형이 잘 잡히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아래층으로 걸어 내려가 찬장을 뒤적였다. 그는 또 술을 한 병 꺼내왔다. 침실의 다탁에는 여전히 약이 담긴 유리병이 별빛을 받으며 놓여있었다. 남자는 그 옆에 술병을 내려놓았다. 기운이 나질 않는군. 그가 중얼거렸다. 속이 쓰리고 폐부가 죄어오듯이 아팠다. 마지막으로 제대로 된 식사를 한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러고 보면 남자의 옛 연인, 그 여자도 늘 식사를 제대로 하라며 남자에게 걱정 담긴 충고를 하곤 했다. 그러면 그는 알았다면서 맥없이 웃었다. 결국 충고는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때 남자는 자신을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조금 기쁘게 느껴졌던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 남자는 지금 불이 꺼진 집에 홀로 살고 있다.
그는 술잔에 술을 따랐다. 약간 노란빛을 띄는 투명한 액체가 잔속으로 흘러들어갔다. 밤의 미광으로 보석처럼 빛나면서 조용히 차올랐다. 그리고 남자는 그것을 마시기 시작했다. 쓴맛.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남자는 머릿속으로 뇌까렸다. 그런데 갑자기 가슴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치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목구멍을 역류해 올라오더니 기침과 함께 터져 나왔다. 술잔에 새빨간 잉크가 흩뿌려졌다. 남자는 놀란 눈으로 그것을 보았다. 잔속에 퍼진 붉은 물감은 알코올 속에서 천천히 흩어지며 묽어지고 있었다. 그는 한참동안 그것을 내려다보더니 피가 묻은 술잔을 다탁에 올려놓고 일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탁자 위에 놓인 전화기를 집어 들고 친구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한밤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친구는 의사를 찾아다가 남자의 집으로 차를 몰고 왔다. 남자는 침대에 앉아있었고 의사는 끌어온 의자에 앉아서 그를 진찰했다. 「목에 뭐가 걸린 것 같아요.」 남자가 기침을 해대면서 말했다. 의사는 방안에 수도 없이 늘어선 커다랗고 빈 술병들을 둘러보았다. 늙고 마른 그 사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곧 큰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 보는 게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친구는 남자 대신 어디가 잘못된 거냐고 물었다. 의사는 아마도 간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정확한 것은 병원에 가서 몇 가지 검사를 받아봐야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의사는 돌아갔다. 남자는 초점 없는 시선으로 방구석을 쳐다보고 있었고 친구는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은 채로 그 옆에 서있었다. 둘 다 아무 말이 없었다. 그들은 아침이 오기를 기다렸다.
아침이 되자마자 그들은 차를 타고 병원을 찾아갔다. 친구가 차를 몰았고 남자는 조수석에 앉아있었다. 가는 길에 친구가 말했다. 「여행을 가보지 않겠어?」 「모르겠어. 어디로?」 「어디든. 공기가 맑고, 태양이 뜨겁고, 몇 걸음 나가면 바다에서 수영도 할 수 있는 그런 곳 말이야.」 「그런데 왜?」 「글쎄.」 그리고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환한 아침햇살이 자동차 유리창에 부딪혀 부서지고 있었다.
늙은 의사의 말이 맞았다. 병원에서는 남자의 간이 ‘썩어버린 것이나’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그 외 온갖 잡다한 장기들도 더 이상 제구실을 못할 것이란다. 간 이식을 하면 당장은 나아지겠지만 다른 장기들의 상태가 이미 한계에 다다라서 또 몸에 독소가 쌓일 것이라고 했다. 남자는 얼마 못 가 죽을 것이다. 병원의 의사는 그렇게 말했다. 남자는 침묵했다. 옆에 있던 친구도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들은 조용히 남자의 집으로 돌아왔다. 한참 동안이나 그들은 말이 없었다. 몇 시간 뒤 친구는 돌아갔다. 그는 나서면서 몸에 이상이 생기면 언제든지 전화하라고 당부했다. 남자는 알았다고 했다. 그리고 남자는 침실로 올라가서 아침에 두고 나간, 피가 섞인 술을 마저 들이켰다.
며칠 뒤 친구가 어떤 덩치 큰 사내와 함께 남자의 집을 방문했다. 그 사내는 신부복을 입고 있었다. 「아내가.」 자신의 눈을 쳐다보는 남자를 향해 친구가 변명하듯이 말했다. 「아내에게 자네 얘기를 했더니, 이러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더군.」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 커다란 신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신부님, 나는 신을 믿지 않습니다.」 신부가 말하기를 그는 그저 이야기를 들어주러 온 것뿐이라고 했다. 무슨 이야기든 좋으니 대화를 나눠보고 싶다고 신부는 말했다. 남자는 잠시 발밑을 내려다보다가 그들을 집안으로 들였다. 세 사람은 남자의 침실로 올라갔다.
남자는 평소처럼 침대 위에 앉았고, 신부는 남자와 마주보고 의자에 앉았다. 친구는 의사를 데려왔을 때처럼 옆에 서있었다. 신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남자에게 무언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없느냐고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라.」 남자가 되뇌었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하기 시작했다.
「신부님, 나는 달리 믿는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단 하나만은 분명하게 믿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죽음입니다.」 죽음이라구요. 신부가 말했다. 「네. 죽음. 제가 틀림없이 죽어서 썩어 없어질 것이라는 투명하고 명징한 진실만을 나는 믿습니다. 아마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무언가를 의식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끔 나는 종교에 귀의하는 것이 더 없이 편안한 길일 것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을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무언가 형식이 있는, 정해진 것을 믿고 따르는 것만으로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삶은 얼마나 보람된 것이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종교인들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늘 호의가 담긴 마음으로 그들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을 믿지 못합니다. 종교뿐만이 아니라, 나는 도덕도 윤리도 법도 믿지 못합니다. 내가 믿는 것은 오직 죽음뿐입니다. 내 시간의 끝에서 한 치의 틀림도 없이 버티고 앉아있는, 그 절대적인 운명 말입니다. 나는 나의 필멸만을 믿습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나는 늘 죽음만을 보면서 살아왔습니다. 죽음은 분명한 형태로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면서 내 정신의 핵심을 차지하고 지금까지 나와 같이 살았습니다. 나는 다 타버린 재처럼 스러집니다. 아침이슬처럼 증발해버릴 것입니다. 나는 죽어서 사라집니다. 그것이 내 삶을 지배하는 모든 것입니다. 인생에서 이 이외에 무엇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삶은 죽음을 위한 기회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 친구에게는 가족이 있습니다. 아내가 있고 어린 딸이 있습니다. 그들은 생명을 상징하고 삶의 가치를 의미합니다. 내 친구는 삶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아닙니다. 나는 여행을 떠나지도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눈밭을, 오직 새하얗고 산도 하늘도 없는 땅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신부님, 보십시오. 나는 지금 숨 쉬며 살아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나는 오히려 죽음으로 인하여 삽니다. 죽음이야말로 나를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자는 힘없는 목소리로 소리 내어 웃었다.
그는 며칠 뒤 숨이 끊어져 죽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