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사자들
1. 최초의 중편소설. 어느정도 만족한다. 그러나 계속 만족하지는 못하리라. 벌써 일종의 후회 같은 것이 뇌리에 밀물처럼 밀려들어오고 있다. 어서 다음 소설을 구상하고, 지금보다 더 높은 완성도로 그것을 이뤄내야하리라는 욕망. 더 완벽한 단순함. 더 풍부한 표현. 더 내밀한 깊이. 더 진중한 주제. 섬광처럼 빛나는 아름다움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 그리고 언젠가는 그것을 내 손에서 탄생시킬 수 있으리라는 근거 없는 믿음. 오직 이것만이 살 길이다.
익사자들
제1부
K는 매일 그가 사는 도시를 돌아다니며 전단지 따위를 붙이는 일을 하여 먹고 살았다. 누구나 알듯이 썩 벌이가 좋은 일은 아니었으나 K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는 몇 시간이고 연달아 도시를 죄 휘젓고 다닐 수 있을 만큼 자신이 젊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K에게는 큰돈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딱히 누구에게랄 것은 없지만 K는 그 점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굳이 감사의 대상을 정하자면 그것은 아마도 K에게 어느 건물의 옥탑방을 빌려준 중년남자가 될 것이다. K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아버지의 장례식 때였는데, 당시 K는 아직 어렸고 학생신분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시발점으로 하여 속속 가족과 친척들이 하나둘씩 죽어나가는 바람에 K는 몇 번이나 온갖 장례식에 참여해야했고, 그때마다 식장에는 그 중년남자가 있었다. 그리하여 꽤 얼굴이 익게 되었으나 사실 K는 그가 자신과 정확히 어떤 관계에 있는 친척인지도 알지 못했다. 다만 그는 K가 혈혈단신에 일찍도 부랑자가 되어 거리를 헤매고 다니던 어느 겨울날 우연히 만나, K의 비참한 꼴을 보고 다가와 그의 트고 갈라져 피가 배어나오는 입술 사이로 사정을 전해 듣고는, 자신의 건물에 쓰지 않고 버려둔 방이 있는데 그리로 와서 살지 않겠느냐고 제안한 사람이었다. 그를 만난 것은 굉장한 행운이었다. K는 심지어 그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제의는 물론 K에게 있어 몹시 기쁜 일이었다. 당시의 계절은 막 겨울의 공기가 덮쳐오려는 태세여서, 그대로 부랑자 생활을 계속하기에는 너무나 혹독했던 것이다. 만약 그때, 촌수가 어떻게 되는지도 알지 못할 그 중년남자와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해 겨울 K는 자신이 길거리에서 얼어 죽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새하얗게 얼어붙은 하늘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줄 지붕과 겨울의 냉풍에 대하여 방패처럼 굳건히 세워져있는 벽돌 벽을 갖게 된 이후에나 생각한 것이었고, 남자에게서 방을 제의받았을 때에는 그저 이제 추운 곳에서 자지 않아도 되겠다며 오직 그것만이 기쁠 뿐이었다.
그런데 K가 남자에게서 방을 제의받았을 때, 그가 아무런 인사치레도 없이 덥석 남자의 선의를 받아든 것은 아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이상한 고집이 있었는데, 그것은 자존심이라고 할지 억지라고 할지, 하여간에 자기 체면에 대한 아집 같은 것이었다. 물론 K는 그때 남자의 선의를 순순히 받아들여야만 자신이 얼어 죽지 않고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받으며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아무런 보답도 하지 못할 것이면서 자신만 좋은 일을 받아먹는 것이 창피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처음에는 괜찮다며 그저 손사래만 쳤던 것이다. K는 더 이상 차가운 땅바닥에서 자고 싶지 않았고, 남자의 제의대로 벽과 지붕이 있는 방으로 가서 살고 싶었지만 자신이 무작정 받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남자에게 자신이 남의 도움 없이도 건실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인간처럼 보이기를 바랐다. 그래서 K는 누더기 같은 외투와 반쯤 뜯어진 털모자를 입고 쓴 채 이런 부랑생활은 피치 못할 실수 때문에 벌어진 유감스러운 일이고 또 일시적인 것이며, 곧 알아봐둔 기업체에서 직업을 얻고 예전처럼 당당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되지도 않는 거짓부렁을 늘어놨던 것이다. 그러나 그 선량한 친척이 곧 겨울이 올 텐데 거리에서 살다간 큰일이 날 것이라고 억지로 팔을 잡고 일으켜 세우자 그제야 K는 타인의 호의를 냉담하게 저버리는 것도 신사다운 태도는 아니라는 둥 주절주절 혼잣말을 늘어놓으며 그를 따라 나섰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K는 털 뭉치 밖에 들어있지 않은 외투의 호주머니를 뒤지면서 「내가 당신에게 보답으로 줄 것이 있을 텐데」하고 씨알도 안 먹힐 체면치레를 하는 것이었다.
중년남자가 K에게 내준 방은 벽으로 나뉘어있지도 않은 직육면체의 공간이었다. 전등도 없고 보온도 되지 않아 그야말로 창고 같은 곳이었으나 수도는 연결되어 있었고 수도 옆에는 양변기도 하나 놓여있었다. K를 데려온 남자는 구석에서 두텁게 먼지가 쌓인 매트리스를 꺼내어 펼쳐놓으며 지저분하고 좁지만 겨울을 보내기에는 적합할 것이라고, 또 더 좋은 방을 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했다. K는 미안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이렇게 좋은 방을 내주다니 감사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둥 남자의 손을 붙잡고 정신 나간 듯이 그를 칭찬하며 늦가을 태양빛이 비추는 방의 구석구석을 곁눈질로 훑어보았던 것이다. K의 눈이 닿는 곳에는 어디에나 갑작스런 방문자에게 놀라 그늘 밑으로 도망치는 벌레와 쥐떼가 보였고 천장에는 사방에 거미줄이 쳐져있었다. 그래도 K는 벽이 있는 곳에서 자게 된 것이 기뻐서 붙잡은 남자의 손을 더욱 세게 움켜쥐며 놓을 생각도 안하고 위아래로 흔들기만 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와중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들어 K는 문뜩 흔들던 손을 놓고 쭈뼛거리며 남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음, 그런데, 제가 지금은 그다지 가진 것이 없어서요. 방세는…… 물론 언젠가는 갚을 수 있을 겁니다만…… 아니, 언젠가가 아니라, 아마 곧 갚을 수 있을 겁니다. 저도 이제 금방 일자리를 잡을 것이고, 그러면 돈도 벌게 될 것이니까.」
그러나 K의 말은 남자에 의하여 중간에 허리가 잘렸다. 남자는 K에게 자신이 방세나 받으려고 K를 데려온 것이 아니며, 순전히 친족 간의 호의로 방을 내준 것이니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은혜라는 것이 있는 법이죠. 제가 지금 단 한 푼도 가진 것이 없기는 합니다만……」
K는 다소 당황한 듯이 그렇게 말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자 중년남자는 약간 미소를 띠우며 그렇게 깊게 생각할 것은 없다고 말한 뒤 계단을 내려가 K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K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있었다. 바람을 막을 수 있는 곳에서 자게 된 것이 기쁘고 안심도 되었지만, K의 마음속에서는 그보다 초조함과 불안이 더 크게 파도치고 있었다. 저 남자가 내가 한 말을 믿었을 것인가? 저자가 나를 쓸모없고 지저분한 부랑자로만 보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는 절대로 내가 직장을 찾아서 돈을 벌어 오리라고 믿지 않을 것이다! 내 주머니에 지폐 한 장이라도 들어있었더라면. 그러면 내가 그것을 꺼내서 그의 손에 쥐어주며 감사를 표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도 나를 더 괜찮은 사람으로 보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게 무슨 꼴인가! 나는 벌써 일주일이 넘게 씻지도 못했고 길거리에서 주운 모자를 뒤집어썼으며 단 한 푼도 가진 돈이 없다. 혹시 저 남자가 나를 저능자로 보는 것은 아닐까? 물론 멀쩡한 사람이라면 다 해진 옷을 입고 길바닥에 며칠이고 웅크리고 앉아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내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구걸을 해본 일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나도 자존심과 신념이 있는 것이다! 어떤 저능자가 그런 것을 가질 수 있겠는가! 내가 비록 부랑자였어도 그는 내가 정신머리가 올바로 박혀있는 부랑자라는 것을 알아야했다. 나는 결백한 사람인 것이다! 흠, 그러나 그는 이미 계단을 내려가고 없다. 내가 은혜 운운한 것을 그는 제대로 이해했을까? 나는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염치도 있고 받은 것에 대하여 보답할 줄도 아는 사람이란 말이다. 등등……
그는 한참이나 선채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중년남자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헤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K는 씩씩거리며 인상을 쓰더니 현관문을 냅다 걷어차고 매트리스 위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 바람에 섬유 속에 쌓여있던 먼지가 붕 떠올라 공기 중을 까맣게 덮었다. 그러나 K는 코를 막거나 숨을 멈추지도 않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여전히 흥분된 호흡을 하는 것이다. 그는 가만히 앉아 조금씩 화를 삭이며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K는 내일이 되면 거리를 좀 걸어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마침 여기에 수도가 있으니 오랜만에 씻고 깔끔해진 얼굴로 거리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직장도 구할 것이다. 그러면 전부 완벽하지 않은가? 나는 친척인 남자의 호의로 살 곳도 마련했으니 이제 직장을 갖기만 하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K는 그렇게 생각하며 먼지투성이의 매트릭스 위로 머리를 뉘였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벌써 해가 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조금 추위가 느껴지는 것 같아 K는 외투의 옷깃을 한층 더 세게 여몄다. 그래도 밖에서 자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K는 눈을 감았다.
다음날 K는 괜찮은 일거리를 찾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그런데 K가 사는 이 도시는 기묘할 정도로 길이 복잡하고 모든 거리들이 전부 비슷비슷하게 생겨서 그 길을 걷는 보행자들조차도 자신이 도시의 어느 구역쯤을 지나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길을 걷던 K도 다른 행인들과 마찬가지로 어느새 자신이 어디에 와있는지도 모르게 되어버렸다. 즉 길을 잃은 것이다. 모든 거리들은 그 끝이 나뭇가지처럼 샛길과 골목들로 산발하여 나뉘고 엉켜있어서 어느 방향으로 가야 목적지가 나오는지 가늠할 수가 없었고, 무턱대고 걷다보면 왜인지 처음 출발했던 장소로 돌아와 있는 상황까지 발생하곤 했다. 모든 건물들은 회색이었고 구름 낀 하늘은 정수리에 닿을 듯이 낮게 깔려있었다. K의 머릿속에서는 이 도시가 어디로도 빠져나갈 수 없도록 만들어져있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지형의 고저차 때문에 만들어진 시멘트 건축물들의 능선은 그 너머로 시선을 던지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고, 하늘은 굳게 닫혀 무엇 하나 시원스럽게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걷는 수밖에 없었다. 하다못해 지도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러나 그런 바람은 완전히 헛된 것이었다. 이곳에 사는 공무원들도 이 도시의 지리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러니 누가 지도를 만들 수 있겠는가. K는 최선을 다해 자기가 걷는 거리와 골목들의 특징을 파악해서 길과 길 사이의 연계성을 알아내려고 했으나 계속 같은 자리를 돌고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마침내 K는 이 원형도시―실제로 원형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의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자기 주변에 있는 건물들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곧 건물들의 간판과 표지판 따위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K가 발견한 것들 중에서는 지역신문이 잔뜩 꽂혀있는 철제 구조물도 있었다. 아무래도 무료로 배포하는 신문인 듯하여 그는 신문 한 부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몇 장 넘기자 구인란이 나왔다.
상점에서 회계사 구함. 외식업체에서 보조 요리사 구함. 장례식장 관리자 구함. 운송업체에서 택배기사 구함. 택배기사라! K는 운송업체에서 실어놓은 구인 광고에서 시선을 멈췄다. 그는 육체노동도 나쁘지 않은 일이라고 중얼거리며 사업체의 위치나 전화번호, 그리고 임금 따위가 적힌 조그마한 항목을 읽었다. 퍽 다행으로 거기에는 작은 약도도 그려져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같은 길을 계속해서 뱅뱅 돌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K는 약도를 보고 자신의 위치를 가늠하며 택배 회사를 찾아 걷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꽤 길을 잘 찾게 되어 이십여 분 만에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건물들이 온통 비슷하게 생겨먹은 바람에 몇 번 헤매기는 했지만 그래도 성공적인 길 찾기였다고 할 수 있었다. 택배 회사는 2층짜리 건물을 통째로 사용하고 있었다. K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려다가 잠시 주춤하며 자신의 복장 따위를 살펴보았다. 무엇보다도 외투가 너무 낡았고 머리카락이 지저분했다. 현관의 옆쪽에는 회사가 사용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커다란 창고가 문이 활짝 열린 채로 놓여있었는데, 그 문으로 제복을 입은 사원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행동하기에 편하도록 머리를 짧게 잘랐으며 건장한 몸을 갖고 있었다. K는 자신의 지저분하고 길게 흘러내려있는 머리칼을 한 손으로 쓰다듬어 보았다. 또 자신의 외투를 다시 한 번 점검하다가 그냥 그것을 벗어 들고 말았다. 외투 안쪽에 입고 있던 셔츠도 물론 깨끗한 것은 아니었지만 외투보다는 보기에 낫다고 생각되었다. K는 셔츠 자락에 묻은 얼룩이나 흙먼지 따위를 침을 발라서 긁어낸 뒤 좀 더 활발한 사람처럼 보이기 위하여 앞머리를 전부 뒤쪽으로 눌러 붙여 이마가 드러나게 하였다. 그리고서야 마침내 K는 현관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는 마침 지나가던 직원에게 구인 광고를 보고 왔는데 어디로 가야하느냐고 물었다. 직원은 친절하게 사장실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것은 2층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K는 계단을 올라가야했다. 계단을 오르던 와중 K의 뇌중에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이 오늘 한 끼도 먹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부랑자 생활을 할 적에도 굶기를 밥 먹듯이 하여 허기에는 꽤나 익숙해져있었지만, 식사를 하지 못하면 속이 쓰리고 자세가 다소 구부정해져 겉보기에 안쓰럽게 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K는 그 점이 걱정되었다. 아무래도 사장이 어디서 죽도 못 얻어먹고 다닌 것 같은 말 뼈다귀를 대뜸 채용할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허리를 쭉 펴고 가슴을 약간 내민 자세를 하고서 계단을 올라 사장실에로 찾아들어갔다.
노크를 하고 방안에 들어서자 K의 눈에 들어온 것은 중앙에 당당하게 놓인 커다란 탁자와 그 양 옆의 벽에 붙어서있는 책장들이었다. 그리고 사장으로 보이는 자는 그 탁자 뒤에 앉아 서류 따위를 검토하고 있었다. K가 방안으로 들어오자 그는 문 쪽으로 시선을 향했는데, K는 그 남자의 벗겨진 이마와 굵은 눈썹에 인상을 받은 참이었다. 다소 강인한 인상을 가진 사장은 K를 보고 인사를 건네며 무슨 일로 오셨느냐고 물었다. K는 여전히 자기 복장에 대한 불안 때문에 다소 초조해하며 구인 광고를 보고 찾아왔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사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K를 향해 다가와, 그의 몸을 찬찬히 훑어보는 것이었다. 사장이 지금 자신을 평가하고 있는 것이리라고 알아차린 K는 더욱 의식적으로 가슴을 내밀고 당당한 체구를 가진 것처럼 자세를 잡았다.
「너무 말랐는걸.」
사장이 한 말이었다. 실제로 K는 굉장히 말라있었다. 게다가 사실은 마른 것뿐만이 아니고, 오랜 부랑 생활로 인하여 내장도 여기저기 상해있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도무지 육체노동을 할 만한 기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의 몸은 멀쩡히 작동하는 것만으로도 큰 곤란을 겪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사장의 ‘너무 말랐다’는 말이 부정적인 평가인 것을 알아들은 K는 여전히 당황하여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제가 마른 것은 사실이지만 젊고 건강합니다. 한때는 운동선수이기도 했습니다. 써주시기만 한다면 한 사람 몫은 할 수 있으리라고……」
「그렇지만 너무 말랐어요. 실은 썩 건강해보이지도 않는군. 매일같이 짐을 올리고 내리고 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닌데. 보세요, 당신 다리가 풀려있군. 이렇게 되면 못쓰지.」
거절! K는 사장의 이러한 말이 거절임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는 밖으로 내비쳐보이지는 않았으나 좌절하여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K는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거짓웃음을 약간 띠우며 사장실에서 돌아 나왔다. 등 뒤에서 사장이 미안하다며 인사를 하는 것이 들렸다. K는 다소 비척거리는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와 건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제기랄! 내가 너무 말랐다고? 그의 눈에는 내가 택배 상자도 하나 못 들만큼 부실하게 보였나? 하지만 어느 정도는 사실이기도 하다…… 그래도 나는 일을 시키기만 한다면 잘 할 수 있었을 텐데! 아까운 일이다. 내 하체가 풀렸다고…… 이것은 조금 모욕적이기도 하다. 못쓰겠다니! 그는 이후에 나 같이 잘 된 일꾼을 놓쳤다면서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때 가서 보라지. 너무 말랐다니, 터무니없다!
K는 계속 그렇게 불만에 찬 혼잣말을 지껄이며 다시 거리 한복판으로 나왔다. 이제 별 수 없었다. 다른 일거리를 찾아야 했다. 웬만하면 매일 일당을 주는 일이 나을 것이다. 왜냐하면 K의 호주머니는 여전히 텅 비어있고, 뱃속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K는 이미 일자리를 구하러 다닐 마음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한참이나 도시를 맴돌던 것이 그의 의욕을 깎아먹은 후였고, 또 그 운송업체 사장에게서 ‘안 된다’는 말을 듣고 난 직후라서 자존심도 상하고 허탈감을 느끼던 중이었던 것이다. 어디를 가든 사람들은 나의 추레한 옷차림과, 앙상하게 말라붙어 척추뼈가 전부 드러나 보이는 구부정한 목을 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니 K는 도무지 다른 직장을 찾으러 나설 의욕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잠깐 도로 위에 멈춰 서서 신문 생각을 했다. 분명 거기에는 장례식장 관리자를 찾는다는 광고도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나에게 딱 맞는 일은 아닐까? 왜냐하면, 이미 시체가 주인공인 무대에서 굳이 생기발랄하고 건강하게 살집이 붙은 사람이 있어야 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곧 K는 자신이 그 신문을 구겨 택배회사 건물 앞에 던지고 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 신문을 찾겠다고 다시 거기까지 가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한참 걸어온 이후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곳에서 일하던 건강한 신체를 가진 제복 입은 직원들의 눈에 띄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내가 억지로 가슴께를 내민 자세로 걸어 다니는 것을 보고 한참이나 비웃었을 것이 분명하다! 나는 너무 말랐고 병들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그들 눈앞을 얼쩡거리면서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고 싶지는 않다…… 운송업체의 직원들이 부랑자처럼 지저분하게 차려입은 자신에 대해 험담하면서 조소하는 장면을 상상하고 있자니 K는 울컥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젠장! 그들이 나를 거지 따위로 생각하다니! 나는 이래 뵈도 집도 있다. 물론 생긴 지 얼마 안 된 집이지만, 그래도 멀쩡한 집이다. 벽지도 장판도 없지만 창문만은 사방으로 활짝 열려있어 얼마나 햇빛이 잘 들어오는지. 나는 그렇게나 좋은 집을 갖고 있는, 엄연한 사회인이란 말이다. 내가 거지꼴이라고? 누구든 거지꼴이 될 수 있다! 누구나 실패할 수도 있고 실수로 발을 헛디디는 일도 있는 것이다. 나처럼 미래 유망한 젊은이도 까딱 쓰러지는 수가 있단 말이다. 그런 것은 사실 전부 운에 달린 일이니 내 책임이라 할 수는 없다. 그들은 그것을 알아야 한다. 암, 그렇고말고, 그 멍청한 택배기사들에게 말해주고 싶군. 누구나 돌부리에 발이 걸려 넘어질 수도 있는 법이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사납게 발걸음을 옮겨대던 K는 또 한 번 멈춰 섰다. K의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는 여자가 한 명 보였는데, 그는 계속 K의 얼굴을 직시하며 걸어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K도 그 눈빛이 자신을 향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지만 K 주변에는 다른 보행자들도 없고, 그녀는 K를 향해 직선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K와 여자 사이의 거리가 아직 충분했기 때문에 K는 도보 위에 선 채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저 여자는 누군가? 누군데 마치 아는 사람처럼 나를 쳐다보고 내 쪽으로 걸어오는 걸까? 혹시라도 내가 어느 여성에게 원한이 될 만한 일을 저지른 과거가 있던가? 그는 열심히 생각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누군가에게 원한 살만한 일을 저지른 기억은 없었다. 애당초 K에게는 남에게 못할 짓을 할 배짱조차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가 죄악에 있어 자유로운 인간이라는 뜻은 아니지만, 하여튼 K는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원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K는 좀 더 자세히 여자를 살펴보았는데, 그녀 역시 복장이 꽤나 초라했다. 그녀는 말라서 볼이 쑥 들어가 있고 얼굴에 궁상맞은 주름들이 늘어서 있었으며, 입술도 하얗게 갈라져 있었고 눈에는 생기가 없었다. 또 그녀는 지저분한 회색 옷 위에 어디 길바닥에서 주워온 것 같은 누더기를 바람막이용으로 턱 언저리까지 감싸 놓았던 것이다. 퍽 가난해 보이는 여자였다. 아니, 가난할 것이 틀림없었다. 어쩌면 길거리에서 먹고 사는 여자일지도 모른다. 늙고 병든, 슬픔으로 새겨 넣은 것 같은 주름을 갖고 있는 여자라! K는 특히나 그녀의 눈에 인상을 받았다. 반투명한 장막에 가려진 것처럼 흐릿한 그녀의 눈은 안구 밑으로 무겁게 가라앉아 은근한 원망의 감정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런 눈을 K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욕지기가 날 것 같았다. 늙고 불행한 여자.
그녀의 눈 때문에 어지러워진 생각들 사이에서 K가 가까스로 정신을 추스르고 있었는데, 여자는 어느새 K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런데 순간 그녀의 얼굴에 후회의 빛이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늙은 여자는 고개를 들어 K의 얼굴을 쳐다보다 뭔가가 잘못 되었다는 듯이 시선을 내리깐 채 멈칫거리곤 했는데, K가 그녀에게 말을 걸자 당황하여 손을 내저었다.
「무슨 일입니까?」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라고? 늙은 여자는 그렇게 내뱉고서는 마치 도망치려는 듯이 성급히 방향을 틀어 K로부터 멀어지려고 하였다. 이상하게 생각한 K가 그녀의 팔을 불쑥 움켜잡고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라니, 당신은 이상한 여자로군! 볼일도 없이 남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걸어와서는 그냥 간다는 거요?」
팔이 붙잡힌 여자는 전보다 더욱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K를 몹시 짜증나게 만들었다. K를 두려워하는 것 같은 여자의 동작이 계속 성질을 긁는 것이었다. 화가 난 K가 약간 성난 목소리로 무슨 볼일로 왔느냐고 마구 다그치자 노파는 곤욕스러워하면서 마침내 고백했다.
「돈을! 배가 너무 고파서, 우윳값을 좀 구걸하려고!」
「우윳값? 안될 것 없지! 그런데 왜 도망치려고 한거요?」
그러자 여자는 또 입을 다물고 도망가려고만 하는 것이었다. 어지간히 성질이 난 K는 재차 노파를 붙잡고 앞뒤로 흔들 듯이 하면서 물었다. 동냥하러 와서 그대로 가는 건 또 무슨 짓이냐고 말이다. 잔뜩 겁에 질린 노파는 거의 자포자기하여 대답했다.
「눈이 안 좋아서!」
「뭐요?」
「늙어서 눈이 침침해요. 멀리서 봤을 때는 몰랐는데 가까이 와서 보니까.」
「가까이 와서 보니까 뭐가 어쨌기에?」
「가까이 와서 보니 같은 신세인 것 같아서 그냥 가려고 했지요! 제발 이 손 좀 놔 줘요!」
같은 신세! 이 여자가 우스운 말을 하는군. 내가 그렇게나 비루해보인단 말인가! 우선 K는 그때까지 꽉 붙잡고 있던 팔을 놓았다. 그리고 큰 소리로 노파에게 도망가지 말고 서있으라고 외쳤다. 이대로 이 여자를 보낼 순 없었다. 그녀는 K를 죽도 못 얻어먹은 비렁뱅이로 본 것이다. 그런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K가 풍족하고 자비심도 많은 훌륭한 인간이라는 것을 노파에게 알려주어야만 했다. 겁에 질리고 또 어리둥절하기도 하여 불안하게 서있는 노파 앞에서 K는 잠깐 생각을 시작했다. 그런데 어떻게? 내겐 지금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주머니는 텅 비었고, 정작 나부터가 마지막으로 밥을 제대로 먹어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운송업체 사장이 날 더러 너무 말랐다고 했었지! 밥을 못 먹지만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마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장 어디론가 가서 이 노파가 원하는 우윳값을 어떻게든 변통해올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이 도시에서 아는 사람이라고는 내게 방을 빌려준 그 남자밖에 없다. 방까지 무상으로―물론 나중에 사정이 나아지면 반드시 갚을 것이다!― 내준 사람에게 돈푼이나 구걸하러 갈 정도로 내가 염치없는 인간은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이대로 놔뒀다간 이 여자는 그대로 도망가 버릴 것이다. 우윳값이나 좀 얻으려다가 정신 나간 거지새끼한테 잘못 걸려 욕을 봤다면서 침을 뱉으며 도망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그런 자가 아니다! 그런 취급을 받아도 되는 인간이 아닌 것이다. 그것을 분명히 이 여자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그러다가 K는 문뜩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이 박수를 치며 이렇게 말했다.
「자, 이거 받으시오! 내가 비록 지금 사정이 넉넉지 못하여 돈을 줄 수는 없지만, 당신은 내게 감사해야 할 거요!」
그러면서 K는 자신의 외투를 벗어 노파가 목을 감싸고 있던 누더기 위에 덧입히는 것이었다. 그래, 이거면 충분하다. 이제 곧 겨울이 올 계절이 아닌가? 아무렇지도 않게 입고 있던 외투를 건네주는 사람을 누가 비렁뱅이로 생각하겠느냔 말이다. 옷장에 외투 서너 벌쯤은 넉넉히 있는 사람이어야만 보여줄 수 있는 호의다! 갑자기 외투까지 겹쳐 입게 된 노파는 여전히 얼떨떨하여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한 노파를 등 뒤에 두고 K는 자신의 호탕함에 몹시 만족하여 자리를 떠나는 것이다.
「안녕히! 열심히 사시오!」
날씨는 점점 차가워졌다. 날이 갈수록 하늘은 더욱 하얗게 탈색되고 있었다. 공기가 전부 얼어붙어버린 듯 새하얀 아침에, K는 자신의 매트리스 위에서 마치 태아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K는 이미 일찌감치 눈을 뜨고 있었지만 일어날 수가 없었다. 난방도 되지 않는 방에서 셔츠바람으로, 심지어 변변한 덮을 것도 없이 잠을 자는 바람에 밤새 온몸이 얼어버린 것이다. 관절 마디마디에 냉기가 들어차 쑤시고 움직일 수가 없었다. K는 파랗게 질린 입술로 무어라고 중얼거리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천천히 피가 돌고 몸이 녹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제길, 그놈의 외투만 있었더라도! K는 감각이 없는 손가락 하나를 움직여보려고 계속 애를 쓰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그 늙은이에게 외투를 건네준 것은 실수인 것 같았다. 애당초 그런 뻔뻔한 낯짝으로 구걸을 하러 오다니. 얼마나 염치없는 여자란 말인가. 게다가 내가 외투를 주니 아무런 감사도 없이 얼빠진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나 있었지 않은가! 그런 여자에게 호의랍시고 하나뿐인 외투를 줘버린 것은 정말이지 잘못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하여 내가 그 상황에서 달리 어떤 선택이 가능했단 말인가? 나는 누더기나 칭칭 감고 있는 늙어빠진 노파에게 거지 취급을 받고도 괜찮을 인물이 아니다! 외투 외에 뭐라도 내 자비심을 나타낼만한 것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꽁꽁 언 몸은 어지간히 녹지를 않았다. K는 아까부터 계속 다리를 좀 펴보려고 노력하고 있었는데, 무릎이 풀리기는커녕 감각도 돌아오지를 않는 것이었다. 우선 몸이 풀리면 외투나 이불 대용으로 쓸 만한 것을 찾으러 가봐야겠다. 어쩌면 도시 변두리에서 짚 따위를 좀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지, 그러고 보니 어제 길을 헤매는 도중에 의류 수거함을 보았던 것도 같다. 비럭질이나 다름없는 일이긴 하지만 적어도 나를 향해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여주인은 없을 것 아닌가. 구걸보다는 수거함이나 뒤지는 것이 훨씬 위신이 서는 일이다. 물론 남들이 보지 않을 때 해야 할 것이다. 새벽이나 혹은 거리가 한산해지는,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간이 좋겠다. 나라고 기쁜 마음에서 그런 짓을 하는 건 아니다. 남이 버린 옷이나 뒤져야한다니, 이 얼마나 굴욕적인 일이란 말인가. 그러나 어쩔 수가 없다. 아직 겨울이 다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나 춥단 말이다. 무엇이라도 껴입지 않으면 틀림없이 한 달 안으로 얼어 죽을 것이다. 그런 죽음은 사양하고 싶다. 죽는 방식에도 모두 미학이 있기 마련인데, 내 미학으로 보기에 옥탑방 구석에서 얼어 죽는 것은 그다지 미적인 죽음으로 분류되지 않는 것이다.
K는 한참을 그렇게, 배를 중심으로 하여 몸을 말고 있었다. 그러자 느리기는 해도 체온을 담은 피가 몸 곳곳으로 흐르며 조금씩 창자가 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K가 처음으로 느낀 감각은 허기였다. 위장이 냉기로부터 벗어나자마자 먹을 것을 달라고 빽빽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K는 철저하게 그 요구를 무시했다. 당장 들어줄 수도 없는 소원일뿐더러 뭔가를 먹고 싶은 마음도 없었기 때문이다. 공복감이 있다고 하여 무조건 식사를 해야만 하는 법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사실 K는 오래전부터 무언가를 먹는다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거식증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는 끼니를 해결할 능력이 있을 때에도 밥 굶는 것을 예사로 해왔던 것이다. 무엇보다 식사라는 행위가 강제되는 것이 K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K라는 인간에게는 자존심이 있다. 식사를 하고 말고는 순전히 자신이 상황을 보아 선택해야할 문제란 말이다. 그러나 굶주림은 K의 의향을 아는지 모르는지, 항상 제멋대로 찾아와 그를 괴롭히곤 했다. K는 그것이 싫었다. 자신의 감각임에도 불구하고 통제되지가 않는다는 것이 말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빈곤상태는 K에게 흡족한 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 손에 빵 덩어리가 들려있으면 먹지 않으려고 해도 허기가 그것을 탐하곤 하는 법인데, 적어도 이 빈곤상태에서 K의 손에 빵 덩이가 쥐여있을 일은 없었던 것이다.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K는 만족스러웠다. 며칠씩 물만 마시며 사는 바람에 현기증이 나고 신물을 토해도 그는 괜찮았다. 오히려 K는 자신의 피치 못할 단식행위를 즐기기까지 했다. 수행자들도 뭔가 추상적인 것을 얻기 위해 밥을 굶는다지 않는가? K의 단식행위에 그런 정신적인 목적 같은 것은 없었지만 하여간에 그는 밥 굶는 것을 다소 자랑스럽게 여기기까지 했다. 먹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몸 밖으로 내보낼 것도 없었고, K의 내장들은 멀끔하게 말라붙어 기름만 흐르고 있었다. 오래 굶으면 굶을수록 K는 자신이 깨끗하다고 느꼈다. 덕분에 그의 걸음걸이는 휘청거리고 매일같이 무력증에 시달렸지만 여하튼 K의 괴상한 결벽증만은 만족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도 해는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K의 방은 유난히 창문이 넓어서, 해가 지붕에 가려지는 정오 때가 아니면 항상 태양광이 직선으로 들이닥치곤 했다. 태양빛의 온기에 힘입어 K의 몸도 점점 풀리고 있었다. K는 온몸의 뼈다귀를 송곳으로 파내는 것처럼 아픈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는 냉기에 얼어있던 통증들이 햇빛에 녹으면서 감각 위로 쏟아져 내리는 것이었다. 곧 사지가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기 시작하고 피부의 감각도 돌아오자 K는 한숨을 쉬며 약간 안심했다. 밤새 다리나 팔 한 짝이 얼어서 죽어버린 것은 아닌지 걱정을 했던 것이다. 제대로 된 옷가지를 갖춰 입기 전까지 다시는 이 매트 위에서 잠들지 않으리라. K는 그렇게 다짐하며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앉았다. 맨바닥이 아닌 곳에서 자게 되었다고 너무 안심했었던 것이다. 계절은 철저하게 겨울을 향해 한발씩 나아가는 도중이다. 까딱하다가는 목숨이 위험하단 말이다. K는 창문너머 하늘을 보았다. 이미 완연히 해가 뜬 뒤였다.
목숨이라! K는 벌떡 일어서며 그렇게 소리쳤다. 그의 머릿속은 동트기 직전의 하늘처럼 깨끗했다. 그리고 그의 피는 너무 젊었다. K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죽음이 걱정되기는 뭐가 걱정된단 말이냐. 제대로 살아있지도 못한 주제에…… K는 약간은 화가 난 듯, 혹은 약간은 체념한 듯이 벽을 향해 지껄였다. 벽은 벽지도 바르지 않아 거칠거칠하고 석회 알맹이가 전부 드러나 보였다. K는 그것을 손가락 끝으로 쓰다듬어 보았다. 검지 끝에 까만 얼룩이 묻었다.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얼룩을 문질러 지우며 방 바깥으로 나섰다. 유난히 햇살이 밝은 날이었다. K는 공연히 옥상을 서성거렸다. 여전히 뼈마디 깊이 박혀있는 통증들이 신경에 거슬렸다. 아직 벌건 대낮이었는데도 불구하고 K의 마음속에서는 정체불명의 불만족이 미친 듯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목적이 불분명한 손짓 따위를 하며 무언가를 망설이는 사람처럼 같은 자리를 반복해 걸었다. 한동안 그러다가 K는 문뜩 무언가가 떠올랐다는 듯이 옥상의 난간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내려다보니 3~4층 정도의 높이였다. 밑에는 막다르고 후미진 골목에 쓰레기나 낡은 가구 따위가 방치된 채 버려져있었다. 만족스러운 높이는 아니다. K가 중얼거렸다. 그의 마음속은 현재 불만족과 함께 자기 자신에 대한 반항심으로 가득했다. 이런 일은 종종 있는 일이었다. 말하자면 일종의 발작과도 같다. 어느 날 갑자기 머릿속이 깨끗해지고, 시선은 명징해지며 모든 사물들의 진면목이 포탄처럼 날아와 K의 정신 한가운데에 박힌다. 그러면 K는 도무지 견딜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무엇에 대하여? 그건 모른다. 다만 세상과 정면으로 대치하고 있는 것 같은 감각은 무엇보다도 위력적으로 그의 감정을 헝클어 놓는다. 그의 머릿속은 반항심으로 가득 찬다. 그러나 그 뿐, 출구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 것이다. K는 눈 깜짝할 사이에 난간 위로 올라서더니, 곧바로 눈앞의 허공을 향해 뛰어내렸다.
짧은 비행. 그리고 중력의 법칙에 따라 K는 커다란 소리를 내며 쓰레기더미 위로 떨어지고 골목 바닥을 나뒹굴었다. 발부터 떨어진 탓인지 발목과 무릎 관절에 싸한 느낌이 들었다. 콘크리트 바닥에 뒹구는 바람에 셔츠의 팔꿈치가 찢어지고 피부도 벗겨져 피가 흘렀다. K는 한참 동안을 그대로 엎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시큰거리기만 하던 관절이 시간이 지날수록 격렬하게 아파왔다. 뼈가 어긋나거나 금이 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다. K는 자신의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요란하게 뛰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공중에서 추락할 때의 불안과 공포가 뒤늦게 심장을 자극한 것이다. 그 충격으로 말미암아 조금 전까지만 해도 K의 내면에서 사납게 파도치던 감정들은 위세를 잃고 움츠러들어 어딘가로 숨고 없었다. 그는 길바닥에 자빠진 채 정신없이 웃었다.
한동안 웃고 나서 K는 몸을 뒤집어 하늘을 향해 대자로 누웠다. 눈부신 초겨울 햇살이 화살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오른쪽 다리가 염병하게 아팠다. 하늘은 너무 창백하고 맑았다. 선명한 겨울의 냄새를 머금은 빛 조각들이 유성처럼 떨어져 내렸다. K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처지가 거짓처럼 느껴졌다. 삶 따위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K의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K를 향해 천한 공상가라며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골목 안에 찬바람이 불었다. K는 추위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그렇지, 옷이나 구하러 가야겠다. K는 그렇게 생각하며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른쪽 다리에 무게를 실을 수가 없었다. 조금만 그쪽으로 몸을 기울여도 격통이 느껴졌다. 별 도리가 없었다. K는 절뚝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그날 K는 하루 종일 다리를 절며 온 도시를 돌아다녔다. 의류 수거함이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거의 저녁때가 다 돼서야 그는 목적하던 것을 찾아냈고, 그 속을 뒤져 여기저기 실밥이 터졌지만 충분히 입고 다닐만한 외투를 두어 벌 구했다. 그는 만족스러워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외투 하나는 매트리스 위에 놓고 이불로 쓸 것이다. 이번 겨울은 충분히 희망적이라고 K는 생각했다. 이 도시는 풍족하고 재화가 넘친다. 덕분에 빈민 꼴로도 외투를 두 겹씩이나 입을 수 있지 않은가. 어쩌면 그 노파에게 외투를 벗어준 것이 잘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나는 따뜻한 외투를 두 벌이나 구했다. 노파에게 준 외투를 벗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도 셔츠 위에 그 지저분한 웃옷 하나만을 걸치고 있었을 것이다. 심지어 내게는 무상으로 집을 빌려주는 친척도 있다! K는 만사가 다 잘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 그는 과거의 어떤 저녁보다도 흡족한 마음으로 매트리스에 누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심하게 부어가는 오른쪽 다리가 신경 쓰이고 고통스럽긴 했지만 잠이 들고 나면 그런 것도 전부 잊을 수 있을 것이라고 K는 생각했다. 그리고 모든 일이 다 잘 되어가니 어쩌면 다리도 내일 아침쯤엔 붓기가 전부 가라앉고, 또 통증까지 없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런 호운도 충분히 기대해볼만한다고 허공을 향해 내지껄였다. 캄캄한 천장의 한구석에서 누군가가 호쾌한 목소리로 ‘그렇다’고 동의하는 소리를 낸 것을 들었다고 K는 확신했다. 그는 소리 내서 웃었다. 누군가와 악수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다리의 붓기 때문인지 해골 안쪽이 열에 들뜬 것처럼 약간 어찔했다. 유쾌함과 아득함이 뒤섞인 정신으로 K는 곧 잠에 들었다.
다음날 새벽 일찍부터 K는 격한 고통 때문에 헐떡거리며 잠에서 깨어나야만 했다. K는 눈을 뜨자마자 심한 욕지기를 느껴 매트리스 밖으로 목을 내밀고 구역질을 했다. 머리가 핑글핑글 돌고 위장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제일 끔찍한 것은 아무리 구역질을 해도 약간의 신물밖에는 내놓을 것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굶었다! 위장이 텅 비어서 구토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토악질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탓에 K의 머리는 두개골이 쪼개질 정도로 아파왔다. 그는 성난 듯이 비명을 지르면서 재차 벽에다 머리를 박아댔다. 이마가 깨지고 피가 흘러도 그는 멈추지를 않았다. 피부가죽이 찢어지는 정도의 통증은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두통이 너무 심했던 것이다. 그는 정신없이 울면서 입으로는 위액과 신음을 뚝뚝 흘려댔다. K는 비척거리며 수도 쪽으로 기어가 수돗물을 몇 모금 삼켰지만 그마저도 바로 토해냈다. 창자까지 토해낼 기세로 구역질을 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K는 자신이 토해낸 물웅덩이 위에 엎어져 나지막하게 울었다. 욕지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혼미한 정신으로 K는 생각했다. 밥 달라고 지랄을 하는군. 그렇다, 굶주림 때문임이 틀림없었다. 육체란 늘 이렇게 한 박자 늦게 소란을 피운다. 몸이 허기를 견딜 수 있는 한계치를 넘은 것은 아마도 수일 전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이제 와서 발악을 하는 것이다. 이대로는 죽을 것이라고 K를 붙들고 위협적으로 소리를 지른다. 온 창자와 뇌수를 뒤집어엎으며 죽음을 K의 눈앞에 들이밀고 을러대는 것이다. 당장 뭐라도 위장에 구겨 넣지 않으면 너는 죽는다고 말이다 K는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말했다. 그러나 내게는 가진 돈이 없다. 그럼 훔쳐라!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법 따위가 다 무어냔 말이다. 훔치라고? 좋다. 하지만 지금 같은 꼴로는 무얼 씹어 삼켜도 도로 토해낼 것이다. 정말이지 너무 오래 굶었다. 나는 길을 걷다가 어느 가게로든 들어가서 빵을 집어 들고 도망칠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나는 차라리 내장도 가죽도 없는 해골바가지가 되고 싶었다. 목숨 없는 꺾인 나뭇가지가 되고 싶었다. 나는 생명도 필요 없다. 생명을 짊어짐으로써 딸려오는 것들이 내게는 너무도 무거웠다. 그렇다면 네 단식행위는 숫제 자살과도 같다! 두통으로 지글거리는 시야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K에게 그렇게 말했다. K는 소극적으로 그 말에 동의했다. 그렇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럼 너는 죽고 싶으냐? 누군가가 K에게 물었다. K는 고개를 휘저으며 한동안 침묵하다가 소리쳤다. 나도 모른다! 단지 이 두통과 구토증이 가라앉을 때까지 내가 살아있다면, 나는 먹을 것을 구하러 갈 것이다. 그는 자신이 말한 그대로 행동했다. 그는 조용히 신음하면서 고통이 가시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것들은 드디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어지럼증은 여전히 있었지만, 구역질과 두통이 줄어들면서 K의 피투성이가 된 이마와 부어오른 오른쪽 다리의 통증이 점점 선명하게 느껴지는 와중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시야가 밝아지고 있었다. 비단 두통의 감소 때문만이 아니라 창문 너머에서 해가 떠올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K는 시척지근한 물웅덩이에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들어보았다. 평형감각이 돌아왔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일어서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조금 비틀거리기는 했지만 아무런 장애물도 없는 땅 위에서 넘어질 정도는 아니었다. K는 다소 불안한 걸음걸이로 수도로 다가가 물을 틀고 얼굴을 씻었다. 날씨 때문인지 물이 더욱 차가웠다. 그는 세수를 마치고 피가 흐르는 이마를 더듬으며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통증의 소강상태는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다시 한 번 허기가 그의 울퉁불퉁한 손아귀로 K의 몸속을 쥐어 비틀기 전에 무엇이든 먹을 것을 뱃속에 채워 넣어야 했다. 그러나 기름지거나 거친 음식은 안 된다. 분명 전부 토해버릴 것이다. 죽이나 우유가 좋겠다. 수분이 많고 소화하기 쉬운…… 제기랄, 다 죽어가는 몸뚱이가 따지는 것도 많군! 그런데 그것들을 도대체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그러나 우선은 밖으로 나가자. 분명한 것은 이 먼지구덩이의 집구석에는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K는 절뚝거리며 현관 밖으로 나왔다. 햇빛 때문에 어지럼증이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질 뻔한 몸을 곧추세우며 그는 두 손을 얼굴로 가져가 흐리멍덩한 눈을 비볐다. 식사를 해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그는 옥상의 난간 너머로 눈길을 돌렸다. 그냥 죽어버리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고작 음식 따위나 얻어 목숨을 부지하자고 이렇게 수치스럽게 살 수는 없다. 저번에는 비록 다리 한쪽만 망가지는 것으로 끝났지만, 머리를 아래로 하고 떨어지면 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흠, 그러나, 아니다! 그만두자. 이미 말했다시피 나는 내가 죽고 싶어 하는지 어떤지도 잘 알지 못한다……
K는 건물의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시야가 어른거려 까딱하면 허공을 밟고 넘어질 것 같았다. 그래서 K는 난간에 달라붙어 조심스럽게 한 발짝 한 발짝을 내딛었다. 계단에서 구르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잘못하면 구르다가 계단 모서리 따위에 머리를 부딪치고 해골이 깨질지도 모른다. K는 혼자서 그렇게 중얼거리며 계단 위에 발을 디뎠다. 거의 난간을 껴안듯이 하고 봉사처럼 다리를 지팡이 삼아 휘둘러대며 내려가자니 자연히 몹시 속도가 느려졌다. 그러나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한참을 내려가다 보니 계단 위에 누군가가 앉아있었다. 서른 살은 먹었을 법한 남자가 계단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도 K가 계단을 밟으며 내려오는 소리를 들었는지 자신의 뒤쪽으로 고개를 돌려 K를 바라보고 있었다. K는 그가 앉아있는 자리를 지나가야했기 때문에 그에게 비켜달라고 말해야했다. 물론 아무 말 없이 계속 내려가도 그 남자가 도리에 맞게 알아서 비켜줄 것 같긴 했지만, K는 정신없는 와중에 사람을 만난 것이 반가워 그에게 말을 붙여보고 싶었다.
「안녕하시오!」
K는 대뜸 그렇게 말했다. 밝고 경쾌한 어조였다. 실제로 K는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살을 고민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저 괜찮았다. 아마도 담배 피우는 남자의 잘 정돈된 머리가 자신의 기분을 좋게 만든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K는 생각했다. 그의 머리는 정말로 잘 정돈되어 있었다. 짧게 정리된 그의 검은색 머리칼은 그가 어엿한 직업을 가진 사회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K는 그러한 번듯한 사람에게 경쾌하게 인사를 거는 자기 자신이 마음에 들었다. 하여간에, K의 인사를 받은 남자는 다소 놀란 표정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를 털더니, 놀라서 크게 뜬 눈으로 K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맙소사, 어쩌다 그 꼴이 된 거요?」
「그 꼴이라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당신의 그 이마! 온통 피투성이로군!」
K는 한 손을 들어 이마를 쓰다듬어 보았다. 찌릿한 통증이 이마에 느껴졌다. 손에는 새빨간 피가 묻어 있었다.
「아! 이 상처! 별거 아닙니다. 그냥 좀 부딪쳤을 뿐이죠.」
「하지만 그렇게 피가 많이 나는데. 그리고 그 옷이며 얼굴……」
남자는 문뜩 입을 다물었다. K는 ‘얼굴……’ 뒤에 무슨 말이 나올지 알 수 있었다. 담배 피우던 남자는 아마도 자신이 앞으로 할 말이 K에게 실례가 되는 말일 것을 알아차리고 말하던 와중에 입을 다문 것일 터였다. 그가 하려던 말은 초췌한, 지독한, 끔찍한 등등일 것이 틀림없었다. K는 조금 창피한 기분이 들었다. 옷이나 얼굴, 상처뿐만이 아니라 그의 머리도 담배 피우던 남자에 비해서 너무나 지저분하고 초라했다. 그는 창피한 기분을 숨기려고 자신의 덥수룩한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런 것은 됐고, 여기에 사십니까? 저는 이 건물 옥상에 있는 방에서 살고 있는데.」
「예에. 네. 여기 2층에서 살죠. 잠깐 담배나 태우려고 나온 김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남자는 건물 복도에 난 문을 가리켰다.
「그럼 우린 이웃이로군요!」 K가 말했다.
「네. 이웃. 그런 셈이군요.」
남자는 K와의 대화를 어리둥절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는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로 얼굴이 흥건한 거지꼴의 남자와 어떤 대화를 해야 좋을지 좀처럼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K가 왜 계속 자신에게 말을 붙이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짧은 고민 끝에 K를 평범한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일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예를 들자면 날씨가 아주 좋은 어느 날 그 날씨 탓에 기분이 들떠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화창한 하늘과 신선한 공기 때문에 인류에 대한 호의와 애정으로 마음속이 가득 찬 것이다. 그래서 그는 길을 가던 남자에게―서로 완전히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기분 좋게 인사를 한다. 안녕하시오!
담배 피우던 남자는 현재의 상황을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는 자신 쪽에서 먼저 회화를 시작해보자고 생각했다.
「그래, 옥상에서 사신다고요!」
「정확히는 옥상에 있는 방이죠.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웃이라면, 앞으로도 종종 만나게 되겠군요.」
「글쎄요. 오늘 같은 날이면 모를까, 평일에는 이 시간이면 직장에 나가기 때문에.」
「평일이라고요?」
「네. 오늘은 휴일입니다. 모르고 계셨나보군요.」
「아!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휴일이라!」
K는 그 사실이 경탄스럽다는 듯이 계속 되뇌었다. 휴일이라! 휴일이라! 그런데 사실 그의 머릿속은 다른 생각을 하느라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K는 이 남자에게서 돈을 조금 빌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절대로 구걸하는 것은 아니다. 같은 건물에 살고 있는 이웃지간이니 돈을 조금 빌릴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그 돈으로 배를 채워 한동안 오늘 새벽 같은 꼴을 당하지 않아도 된다. 조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긴 하지만, 누구든 먹어야 살지 않는가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말을 꺼낸다?
「그런데 나는 그 이마의 상처가 계속 신경 쓰입니다.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상처 얘기는 됐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보다 초면에 굉장히 실례입니다만,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K의 말에 담배 피우던 남자는 문뜩 불안을 느꼈다. 굉장히 실례가 될 만한 부탁이라니, 나는 이 남자의 언행을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다. 애당초 평소처럼 계단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이런 피투성이의 초췌한 남자가 나타난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었다. 어쩌면 쓸데없는 대화를 지속하지 말고 일찌감치 그가 지나갈 수 있도록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비켜줘야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는 이 걸인처럼 보이는 남자와 이웃지간이 되고, 실례가 될 만한 부탁까지―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들어줘야하다니? 사실 담배 피우던 남자는 K와 한두 마디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을 때부터 줄곧 K가 미치광이인지 아닌지를 분간하기 위하여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좀처럼 답을 내기가 어려웠다. K의 절룩거리는 걸음걸이나 불안하게 흔들리는 몸의 무게중심, 그리고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힘든 제스처와, 또 그의 괴상한 악센트 따위는 K의 이상성을 충분히 입증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 그는 몹시 예의를 차리며 남자와의 의사소통을 성립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부탁인지 들어나 보죠.」
「감사합니다! 사실 저는, 보시다시피 아주 가난합니다. 너무 가난한 탓에 격식 있는 옷차림을 유지하기도 힘들죠. 그렇다고 하여 저를 격식도 없는 인간으로 보시는 것은 안 될 일입니다…… 가난은 최소한의 예의조차 차리기 힘들게 만든답니다. 하여간에, 저는 벌써 일주일 이상을 굶었습니다. 도무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무엇이라도 얻을 수 없을까 싶어 거리로 나가려던 참입니다. 그런데 계단을 내려가던 도중에 선생과 만났지요. 염치없지만 저는 선생께서 돈을 좀 꾸어주셨으면 합니다! 많은 금액은 아닙니다. 그저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는 액수면 충분합니다!」
K의 장황한 이야기를 듣고 담배 피우던 남자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정도라면 못 들어줄 것도 없는 부탁이다. 남자는 오히려 K가 그런 부탁을 한 것이 고맙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비록 세든 것이긴 하지만 자신의 집도 있고, 번듯한 직장까지 있는 30대 독신남자가 배를 곪는 이웃에게 고작해야 담배 두 갑 값 정도나 될까 싶은 돈을 내어주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남자는 K가 그 자신의 꼴만큼이나 황당한 부탁을 하지는 않을지 그것이 걱정이었는데, 한 끼니를 때울 돈푼이나 빌려달라니 몹시 쉬운 일로만 생각되는 것이었다.
「아! 물론 구걸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렇게 뻔뻔한 인간은 못 됩니다. 빠른 시일 내로 갚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맹세합니다! 오히려 이자를 쳐서 두 배로 돌려드리겠습니다!」
K는 지금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혀가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사실 K는 ‘부탁’ 운운하며 말을 꺼냈을 때부터 이미 담배 피우던 남자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K의 머릿속에는 모든 것이 실수였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필사적으로 자신이 내뱉은 말을 무마시키려고 끊임없이 떠드는 것이었는데, K의 혀는 K의 의향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물론 돈이 필요하기는 하다! 돈을 구하거나 혹은 도둑질이라도 하지 않으면 얼마 못가 굶어죽을 것이 빤했다. 먹을 것이 차고 넘치는 이 비만의 시대에 아사라니! 그렇지만 만난 지 채 3분도 되지 않은 생면부지의 남자에게서 돈을 꾸는 것은 너무 비참한 일이다. 수치스러운 일이고 전혀 체면도 서지 않는다! K는 이야기를 전부 무르고 싶었다. 그는 그냥 도망쳐버리고 싶었다. 그의 좁고 지저분한 옥탑방으로 돌아가 외투를 뒤집어쓰고 굶어죽고 싶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치욕을 겪으면서 꾸역꾸역 먹고 또 살아야 한단 말인가. 그럴 가치가 있기나 한가? 저주받을 놈의 위장 같으니! 애당초 방에서 기어 나오는 게 아니었다. 내 멀건 토사물 위에서 그저 먼지처럼 죽어버려야 했다. 조금 전까지의 경쾌한 기분이 그야말로 거짓말 같았다.
K의 얼굴이 점점 좌절과 패배주의적인 분노의 색깔로 물들어가는 것을 담배 피우던 남자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는 K에게 빌려주기 위한 지폐를 찾느라고 호주머니를 뒤지는 중이었다. 마침 그에게는 적당한 액수의 잔돈이 있었다. 남자는 흔쾌한 표정으로 K의 손에 지폐 몇 장을 쥐어주며 말했다.
「별로 힘든 일도 아닌 것을 너무 어렵게 말씀하시는군요! 여기 받으시죠. 이자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갚는 것은 언제라도 좋으니 천천히 하시고, 우선은 가서 식사라도 하시죠.」
그런데 정작 돈을 받아든 K는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그는 초점이 풀린 눈으로 담배 피우던 남자의 얼굴을 멀거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K의 마음속에서는 문뜩 손에 쥐여진 지폐와 함께 남자의 호의까지 내팽개쳐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끓어올랐다. 하지만 그것은 이치에 맞는 일이 아니었다. 애최 돈을 빌려달라고 사정한 것이 K 자신이었다. K가 해야 할 일은 남자의 호의에 감사하며 꾸벅꾸벅 절을 한 뒤에 얼른 뭐라도 먹으러 절뚝거리는 다리를 끌고 거리로 나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K는 무슨 말이든 내뱉으려고 했지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제멋대로 돌아가던 혀가 이번에는 완전히 얼어붙어버렸다. 그는 자신의 얼굴근육이 조금씩 경련하는 것을 느꼈다. 위장이 또 밥을 달라고 사납게 울부짖고 있었다. K는 자신의 창자가 증오스러웠다. 배를 갈라서 그 속에 든 것들을 전부 끄집어내고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는 지폐를 쥔 손을 세게 움켜쥐었다. 남자는 아무 말도 없이 서있는 K를 어리둥절한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는 K의 안구 내부에서 혼란이 물결치는 것을 볼 수 없었다. 그가 보기에 K는 마치 전원이 나간 기계 같았다. 손에 지폐를 쥔 이후부터 계속 말이다.
돌연 K는 소리 없이 울기 시작했다. 마치 깨진 수도관에서 새어나오는 물처럼 K의 눈물샘에서는 눈물이 줄기차게 쏟아져 내렸다. K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세상의 온갖 모순이란 모순은 모조리 K의 정신 속으로 비집고 들어온 것 같았다. 빌어먹을, 눈물이나 흘리고 계집년처럼 굴다니! K는 모든 것이 다 수치스럽고 화가 났다. 그는 당장이라도 돈을 남자에게 돌려주고 어디로든 나가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담배 피우던 남자가 보여준 친절은 K를 너무나도 비참하게 만들었다. 차라리 그가 내게 침을 뱉고 돌아서버렸으면 이런 꼴은 나지 않았을 텐데. K는 아무 말도 못하고 원망스럽다는 듯이 이를 잘근잘근 씹어댔다. 눈물은 잠금장치가 고장 난 수도꼭지에서 흐르는 것처럼 도무지 멈출 줄을 몰랐다. K가 눈물 흘리는 것을 보고 누구보다 당황한 것은―물론 관객이라고 해봤자 한 사람이 전부였지만 말이다― 바로 담배 피우던 남자였다. 그는 당황해하면서, 아무래도 K는 미친 사람인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눈물을 뚝뚝 흘려대면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 K와 남자 사이의 대치상황이 길어질수록 남자는 더욱 더 속이 탔다. 도무지 상황을 통제할 방법이 없다! 이제는 오히려 그가 더 이 자리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했다. 광인과의 커뮤니케이션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다시 내가 살던 안전한 언어의 영역으로 돌아가고 싶다! 남자는 이제 피우던 담배나 마저 피우고 싶었다. 평소처럼 직장동료들과 영양가 없는 대화나 나누면서 아무런 드라마도 없는 공기 속에서 숨 쉬고 싶었다.
K도 담배 피우던 남자가 적잖이 불편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도 남자의 불편을 해결해주고 싶었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있을 수는 없다. 돈을 돌려주든지 아니면…… 글쎄, 아무튼 어떻게든 해야 할 일이다. K는 눈물로 번질거리는 눈을 남자에게로 향했다.
「미안합니다!」 K가 말했다.
「미안합니다. 선생은 좋은 사람입니다! 내가 견딜 수 없는 건 나 자신입니다. 이 돈이 당신의 친절과 호의의 증명이자 상징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내가 선생께 감사한다는 것만 알아주십시오!」
그 외에도 온갖 혼란한 감정들이 내 혀 위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지만, 그것들을 입 밖에 꺼낸다고 하더라도 아무것도 해소되지 않을 것입니다. K는 말끝에 객설을 붙이며 웅얼거렸다. K의 손에는 여전히 지폐들이 구겨진 채 쥐여져있었다. 그는 그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지도, 남자에게 내밀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하게 주먹을 쥐고 있었다. 또 뱃속이 요란하게 울부짖었다. 그것은 마치 일종의 경보처럼 간헐적으로 K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는 현기증이 나는 것을 느꼈다. 시야 주변으로 죽음이 뛰어다니는 것이 보일 지경이었다. K는 마침내 돈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외친다. 내가 졌습니다!
「나는 패배했습니다!」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몰라 곤란해 하는 남자를 뒤로 하고 K는 비틀거리면서 계단을 내려갔다. K는 일종의 체념상태였다. 그는 불안하게 발을 내딛으면서 하나의 공상을 하는 중이었다. 날카로운 날붙이로 자신의 몸을 온통 절개해 우선 창자와 위장을 꺼내 둥글게 말아 바닥에 쌓고, 심장을 도려내 그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두 개의 안구를 뽑아 심장의 양옆에 치장해두고 날아갈 듯이 가벼워진 K는 다시 한 번 옥상 난간 너머로 도약하는 것이다. 그러면 완전히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러나 K는 그것이 무용한 공상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드디어 건물 밖으로 나온 그는 발을 절며 거리로 빠져나왔다. 공기는 서늘했고 약간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K는 차갑게 식어가는 눈물을 옷소매로 훔쳐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거리에는 그리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는 종종걸음으로 길을 따라 걸으며 두리번거렸다. 칙칙한 색조의 건물들에는 온갖 색상의 요란하고 번쩍거리는 간판들이 붙어있었다. K는 먹을 것을 사야했다. 조금 걷다보니 쇼윈도 안쪽에 오만 가지 빵들을 진열해놓은 빵집이 눈에 들어왔다. K는 급히 그 점포 안으로 걸어 들어가, 커다란 흰 빵과 우유 한 병을 사가지고 나왔다. 구겨지고 손바닥에서 흐른 땀으로 축축해진 지폐를 점원에게 내밀 때, 날 선 송곳으로 흉부를 찔러대는 것 같은 죄책감이 그를 괴롭혔지만 K는 더 이상 망설일 수가 없었다. 그는 최대한 점원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그리고 단 한 마디의 쓸모없는 발언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성급히 계산을 마치고 가게 밖으로 나온 것이다. 그는 종이봉투에 싸여진 흰색 빵을 좀 들여다보다가 성큼성큼 거리를 걸었다. 먹을거리를 눈으로 확인하고 나자 위장은 한층 더 미친것처럼 지랄을 떨기 시작했다. 허기는 거의 통증에 가까웠다. 조금만 기다려라! K는 냅다 소리를 질렀다. 마침 옆을 지나던 행인이 깜짝 놀라 K를 쳐다봤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발걸음만 계속 했다.
K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달리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집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담배 피우던 남자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K가 찾고 있는 것은 앉을만한 장소였다. 그리고 그는 곧 벤치를 하나 발견했다. 나뭇잎이 한 장도 달려있지 않은, 앙상하고 뒤틀린 가로수 밑에 놓여있는 벤치였다. K는 그곳에 털썩 주저앉아 빵과 우유가 담긴 봉투를 열었다. 그는 걸신들린 듯이 매섭게 그것들을 먹고 마시기 시작했다. 무슨 맛인지는 잘 알 수 없었다. 하여튼 그는 계속해서 음식을 씹어 삼켰다. 위장에 빵 덩이를 구겨 넣으면 넣을수록 K의 마음속에서는 자기혐오라고 부를 정도로 강렬하지는 않지만 자기혐오의 찌꺼기라고는 부를 수 있을 만한 감정이 울컥울컥 솟아올랐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먹는 것을 멈춘 것은 아니다. K는 계속 먹었다. 그는 역겨움을 느끼면서도 정신없이 빵조각을 입안에 우겨넣었다.
초점마저 잃고서 빵을 씹고 있는 K의 호주머니에서는 빵집 점원에게 받은 거스름돈이 짤랑거리고 있었다. 앞으로도 흰 빵을 두 덩이는 너끈히 살 수 있을 금액이었다. 담배 피우던 남자가 빌려준 돈은 K가 기대하던 것보다 배는 많은 액수였던 것이다. 그의 목숨이 또 며칠간 보장된 셈이다.
빵과 우유로 피와 살을 채운 뒤에 K는 생각했다. 이 도시에 온 이후부터 내 목숨은 순전히 타인의 호의로만 유지되고 있다. 의식주 세 가지가 모두 누군가의 찌꺼기 혹은 선심에 전적으로 의지한 채 위태롭게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K에게 있어 퍽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자존심? 아니, 자존심 같은 부르주아적인 감정이 내게 있기나 할까. 나의 사회적 의식이란 차라리 자존심을 갖고 싶어서 몸부림치는, 병든 노인이나 가질 법한 감정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내 자아(self)란 완벽하게 무근하다. 그리고 공허하다. 공갈로만 가득하다. 속이 텅 빈 종이 공예품처럼.
K는 다시 한 번 일자리를 찾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어느 새벽, K는 아무도 없는 밤거리를 걷고 있었다. 밤이 된지가 한참이 지났는데도 K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는 늘 극도의 굶주림과 어지럼증 속에서 기절해버리듯이 잠들었었는데, 요 며칠간 매일 빼놓지 않고 식사를 했더니 약간의 체력이 생겨 가끔은 졸음이 오지 않는 밤까지 맞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덕분에 K는 자신의 하루하루가 얼마나 무의미하고 정적으로 흘러가는 지를 자각할 수 있었다. 그는 하루 종일 거의 움직이지도 않고 사는 것이었다. K는 오전이고 오후고 하늘에서 뻗어 내려온 빛으로 흘러넘치는 방 안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살았다. 특별한 용무가 없으면 외출하지도 않았다. 그 이전에 직업도 소속도 없는 K에게는 특별한 용무 따위가 생길 기회조차도 없었다. 그가 하루 동안 하는 일이라고는 기껏해야 딱딱하고 값싼 빵을 사러―그는 얼마간의 경제적 사고를 이용하여, 매일 흰 빵을 먹으면 이틀도 안 되어 주머니가 바닥날 것이라는 사실을 지각할 수 있었다― 거리로 나가는 것뿐이었다. 매일을 그런 꼴로 시간만 낭비하며 살고 있으니 밤이라고 졸릴 리가 없었다. 그것은 K가 여전히 만성적인 영양실조에 시달리고는 있지만, 그래도 전에 비하여 다소 건강해졌다는 증명이기도 했다. 아무튼, 그리하여 K는 잠도 오지 않는 밤에 길거리를 걷고 있었다. 산책을 좀 하다보면 쉽게 잠들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K는 자신에게 정말로 직업이 필요하다고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직업이 있으면 스스로 밥값을 벌 수도 있고, 또 매일같이 일정량의 체력을 소비할 수도 있다. 그러면 매일 밤 아무런 장해도 없이 잠에 들 수도 있으리라. K는 이렇게 아무 가치도 없이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싫었다. 권태 속에서 침묵하며 낭비되는 시간들은 아무도 보상해주지 않는다. K는 정말이지 강렬하게 무언가를 원했다. 말하자면, 자신의 시간들을 가치 있게 만들어줄 무언가를 말이다.
사실 이런 생각들은 그가 매일 식사를 할 수 있게 되면서 생겨난 것이었다. 그 이전에는 시간이고 가치고, 그 따위 것들은 전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늘 K의 한쪽 손을 죽음이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K가 굶주리면 굶주릴수록, 그리고 추위 속에서 떨면 떨수록 그는 죽음을 더욱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생명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가? 생명은 ‘나’의 소유가 아니다. 생명의 주인은 바로 생명 자신이다. 생명력이란 인간이성과 동떨어져있는 별개의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명령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생명력이 움직이는 것은 오직 죽음을 감각했을 때뿐이다. 우리들 자신이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생명은 전혀 관심이 없다. 그것은 오직 죽음으로부터 더 멀리 도망치려고 하는 본성 하나밖에 가진 것이 없다. 생명력은 사고를 마비시키고 이성을 억누르며 자유의지의 목을 잘라 버린다. 매일 죽음의 손을 잡고 살던 K는 바로 그 점 때문에 그동안 인생의 가치에 대해서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생명은 끊임없이 K의 목덜미를 잡아채서 끌고 다니며 죽지 않는 방법에 대해서만 골몰하게 만들었다. 가끔은 너무 심한 굶주림 때문에 감각에 날이 서고 미치광이 같은 짓을 저지르기도 했지만, 하여간에 그가 길바닥에서 얼어 죽거나 아사하지 않은 것은 순전히 생명의 강압 때문이었던 것이다.
여하튼, 이제 한동안은 굶어죽거나 얼어 죽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상황이 되자 K는 곧바로 자기 삶에 대한 회의를 시작했다. 인생이 불꽃이고 시간이 불꽃을 위한 연료라면, 그 불꽃은 어떠한 목적을 위해 쓰여야 했다. 물론 불꽃이 혼자 타서 사라지건 냄비 밑에서 물을 끓이건 누가 신경을 쓰겠느냐만, K는 빵으로 속을 채우고 외투를 두 겹 씩이나 입고 있었기 때문에 그 불꽃이 공기 중에서 그저 흩어져버리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K는 자신이 성실한 인간이라는 생각 때문에 기분이 좋았다. 나는 항상 직업을 가질 준비가 되어있는 성실한 인재다. 돈을 계획적으로 쓸 뿐만이 아니라 독립심도 강하다! K는 소리 내서 웃었다. 텅 빈 밤거리에 K의 웃음소리가 메아리쳤다. 가로등 불빛에 물들어 그의 웃음소리도 노랗게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한참을 걷던 K는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다리가 아팠기 때문이다. 그의 오른쪽 다리는 아직도 낫지를 않아서 한걸음 걸을 때마다 절룩거려야만 했다. 이래서야 그 사장 말대로 물건 옮기는 일은 못하겠군. 자신을 퇴짜 놓은 운송업체 사장을 생각하며 K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다리를 다친 것이 그 이전부터던가 이후던가? K는 늘 기억을 회상하는 일이 서툴렀다. 그의 기억력은 마치 그의 건강만큼이나 병들어 있었다. 그래서 과거에 있던 일을 떠올릴라치면 언제나 시간순서와 꿈과 현실 따위가 뒤섞여서 도무지 믿을만한 것이 되질 못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의 기억을 그다지 신용하지 않았다. K는 자신의 기억력이 고장 난 이유가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했다. 기억력이라는 것도 어떤 종류의 영양소를 연료로 하여 작동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느새 동이 터오고 있었다. K는 어서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리가 시큰거릴 정도로 걸었으니 자리에 누우면 곧바로 잠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정오까지 잔 뒤에 일자리를 구하러 나가볼 것이다. 상가를 돌아보거나 이전처럼 일간지를 읽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K는 발걸음을 돌려 여태껏 걸어왔던 길을 밟으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해가 점점 높이 떠오름과 함께 거리에도 사람들이 늘어났다. 정장을 입고 서류가방을 든 남자들, 은행원 같은 차림으로 핸드백을 들고 지나가는 여자들, 가방을 매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다니는 학생들. K는 조금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거리에는 그 혼자밖에 없었는데, 이제는 햇빛 아래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K와 함께 걷고 있었다. 그들 중 K만이 눈에 띄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깨끗한 옷을 입고 단정한 차림으로 어딘가를 향해 당당히 걸어가고 있는데, K는 이발조차 못한 머리와 지저분한 외투를 입고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듯이 절룩거리며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K는 행인들이 가끔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훔쳐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회인들의 이 깨끗한 아침에, K 혼자만이 이질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는 그것이 창피했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자 발걸음을 빨리 했지만 걷는 속도를 의식하자 오른쪽 다리의 관절이 유난히 더 아파오기 시작했다. K가 빨리 걸으려고 하면 할수록 그의 걸음걸이는 절뚝거리는 것에서 기우뚱거리는 것으로 정도가 심해지고 있었다. 염병할, 어디서 지팡이라도 하나 구해야 하나? K는 욕지거리를 하듯이 작게 내뱉었다. 이 젊은 나이에 지팡이라니. 분명 우습게 보일 것이다. 그리고 지팡이를 살 돈은 차치하고 아픈 다리를 낫게 하기 위해 병원에 갈 돈조차 그에게는 없었다. 애당초 그래서 지금까지 발을 절고 있는 것 아닌가! K는 비틀거리면서 계속 걸었다. 그는 얼른 집에 가서 자고 싶었다. 태양 밑의 사물들이 전부 번쩍이면서 하얗게 빛나는 아침이 그는 싫었다. K는 햇빛 때문에 발가벗겨진 채 길거리로 내쫓겨진 기분이 들었다. 그는 외투 속으로 목을 움츠리며 걸었다. 지나가는 행인들이 자신을 욕하고 비웃는 소리가 K의 귓가에서 맴돌았다. 지저분한 인간 같으니! 어서 네 굴로 기어들어가서 평생 나오지 마라! K는 갈수록 화가 났다. 나는 이런 대접을 받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다! 그의 추악한 부분만을 환하게 밝히는 태양빛 때문에 K의 머릿속은 분노로 출렁이고 있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런 꼴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K는 신경질이 나서 구둣발로 길바닥을 걷어차고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걸었다. 남들 눈에 자신이 순전히 미치광이 꼴로 보일 것이라는 사실을 K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는 자신의 시야를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표정과 사회화 된 눈빛 때문에 화를 낼 수밖에 없었다. K는 오히려 더 크게 욕설을 하기 시작했다. 아침이라니! 도대체 누가 아침을 좋아하겠느냔 말이다. 누구도 그더러 얼른 오라고 말하지 않았다. 한참 행패를 부리며 길을 걷자 마침내 K가 사는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난폭한 몸짓으로 계단을 걸어 올라가 자신의 옹색한 방 앞에 다다랐다. 분노 때문인지 열병을 앓듯이 가슴이 답답하고 뜨거웠다. 그리고 여전히 방에 붙은 창문들은 너무 크고 투명했다. 태양빛이 그의 방을 완전히 점거하고 있었다. 그는 햇빛에 질식할 것 같았다. K는 더 이상은 못 참겠다며 얼마 되지도 않는 자신의 소지품들을 걷어차고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비명을 지르며 벽을 향해 옷가지들을 던지고 매트리스를 뒤집어엎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폐부가 콱 막힌 것 같은 답답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K는 거칠게 외투와 셔츠를 벗어던졌다. 그리고 그는 오랫동안 먼지가 수북이 쌓인 채로 방구석에 놓여있던 시멘트 조각을 하나 집어 들었다. K는 중간 중간 「나를 조롱하지 말라」고 소리치며 그 돌덩이로 자신의 맨가슴을 내려찍고 찢어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가슴과 시멘트 조각 양쪽이 모두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그 짓을 계속했다. 피부 위에 남겨진 상처가 아프면 아플수록 가슴속의 갑갑한 통증은 그에 반비례하여 줄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만족할 만큼 가슴팍에 많은 상처가 새겨지자 K는 시멘트 조각을 집어던지고 매트리스 위에 엎어졌다. 하하! K는 일부러 소리 내서 웃어보았다. 사실은 울고 싶었지만 혼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어쩐지 부끄럽게 여겨졌기 때문에 울지 않았다. 그는 문뜩 한손을 들어 자신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전에 생긴 상처 위에 딱지가 앉아 있었다. K의 가슴에서 배어나오는 피가 매트리스의 한쪽 면을 검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는 상처가 아주 상쾌하다고 짐짓 입속말을 지껄였다. 그리고 통증과 출혈에 등 떠밀려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그날 오후 K는 추위에 떨면서 눈을 떴다. 새벽에 윗옷을 전부 벗어부친 채 잠든 것이 화근이었다. 그는 파랗게 얼은 자신의 피부를 문질러대며 방 곳곳에 너부러져있는 셔츠와 외투를 주워 모은 뒤 입었다. 다행히도 해가 뜬 뒤에 잠든 덕분에 동상이 걸릴 정도는 아니었다. 유난히도 햇빛이 잘 드는 그의 방은 벽으로 스며들어오는 냉기만 없다면 비닐하우스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옷을 입을 때 셔츠자락이 가슴팍에 닿아 상처가 쓰라렸다. K는 반쯤 넋을 놓은 채 왜 자기 가슴이 상처로 가득한지를 떠올리려고 애썼다. 새벽에 있었던 일들이 전부 꿈인 것만 같았다. 당시 K의 내면에서 휘몰아치던 감정의 폭풍들은 이미 완전히 사라져 흔적조차 없었다. 수면과 아직 가시지 않은 졸음 때문에 K는 굉장히 냉철한 입장으로 새벽에 자신이 저지른 광기어린 행위들을 평가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광대처럼 행동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소가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아무리 커다랗고 강한 감정이라 하더라도 잠에서 깬 직후에는 아무것도 아닌 법이다. 순간의 감정을 놓치고 결백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두렵다면 잠에 들지 말아야만 한다. 영원히, 영원히 말이다. 그것은 영원히 막이 내리지 않는 연극의 주인공이 되겠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과 같다. 사람이 믿는 그 어떤 고귀함도 실재하지 못한다. 그것은 저급한 코미디에서 주장하는 개똥철학 같은 것이다. 나? 나는 그냥 병자다. 술 취한 부랑배고 충동의 들판 위에서 뒹구는 짐승새끼다. K는 이상과 같이 벽에 대고 연설을 하고 몹시 만족하여 박수를 쳐댔다. 그는 자신이 ‘고귀함은 실재하지 못한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이 흡족했다. 실제로 그는 고귀함은커녕 고귀함과 닮은 그 무엇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만 그 자신도 고귀함에 목이 말라 갈증을 호소하며 사막 위를 기는 짐승이라는 사실을 K는 대충이나마 알고 있었다. 그는 수도로 다가가 쭈그려 앉은 채로 세수를 한 뒤에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이 수염으로 까슬까슬한 턱을 매만지며 방안을 맴돌기 시작했다. 그는 철학자 흉내를 내면서 고귀함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고자 했다. 확실한 것은, 그는 고귀함이라는 것을 손톱만큼도 믿지 않지만 그 누구보다도 고귀함을 갈망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참으로 내가 원하는 것은 무어란 말인가? K는 자문하면서 습관적으로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짤랑하고 동전 몇 개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담배 피우던 남자에게서 빌린 잔돈이 아직은 조금 남아있었다. 문뜩 그는 생각을 멈추고 동전 하나를 집어든 뒤 그것을 진지하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지저분하고 손때가 탄 납작한 금속덩어리. 그는 그것의 표면을 더듬고 공중에 던졌다가 되받는 등 손장난을 치더니 다시 주머니 안에 넣어버렸다. 노동하지 않아도 음식을 구할 수 있으면 괜한 회의만 생기는 법이지. K가 중얼거렸다.
「습관화 된 삶!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그는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 노기는 섞여있지 않았다. K는 고함을 친 뒤에 자신의 옷매무새를 손보더니 집밖으로 걸어 나갔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당당한 걸음세로 하려고 했으나 한 쪽 다리를 저는 바람에 생각만큼 위세 있는 발걸음이 되지는 못했다. 그 사실이 K의 기분을 조금 상하게 만들었으나 그는 충분히 쾌활한 기분으로 계단을 내려갈 수 있었다. 맑은 날씨였다. 거리는 겨울 햇살 특유의 냉랭한 선명함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바구니를 들고 돌아다니는 아낙네들과 거리를 뛰노는 어린아이들이 보였다. 자신과 같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가진 일상의 단면을 발견한 K는 문뜩 자신에게 모럴리스트로서의 굉장한 소질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유쾌한 기분이 되어 이렇게 말했다. 나의 인류애라는 것도 대단한 감정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K의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대답을 하려고 했지만 K는 그의 발언을 무시한 채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길을 거니는 사람들의 삶에 찌든 얼굴을 보고도 유쾌한 기분을 유지할 수 있는 자신이 퍽 인간적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어쩌면 날 휴머니스트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상, 나만큼이나 순수한 영혼을 가진 이가 달리 얼마나 있겠는가? K는 일종의 자기도취에 빠져 히죽거리며 걸었다. 나는 썩 괜찮은 인간이다. 그러니 이제 직업만 갖고 경제적 안정을 얻기만 하면 뭐 하나 빠진 곳 없는 훌륭한 양민이 되는 것이다. 노동의 대가로 돈을 받는다. 이 얼마나 건전한 일이란 말인가. 무슨 일이든 해서 급료를 받으면, 제일 먼저 2층에 사는 그 담배 피우던 남자에게 가겠다. 그리고 이자를 듬뿍 얹어 그에게 돈을 돌려줄 것이다. 그러면 그는 나를 어엿한 사회인으로 생각하고 내게 신뢰도 갖게 될 것이다. 매번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그와 마주치지는 않을까 걱정하게 되는 일도 없어질 것이다. 이웃에게 신뢰를 받는다는 것은 퍽 좋은 일이다. 그러면 그는 나를 의심하지도, 어딘가 위험한 구석이 있는 부랑자로 생각하여 꼬투리 잡을 것이 없는지 적대적인 시선으로 관찰하지도 않을 것이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도 굉장히 유쾌한 일이다.
그러한 온갖 생각들을 하며 걷던 K는 드디어 전에 보아두었던 무료 신문 배치대에 도착하였다. 아침시간에 출근하는 사람들을 위한 신문인 탓인지 정오가 조금 지난 지금은 거의 다 바닥나고 몇 부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K는 신문을 한 부 집어 들고 그 주변에서 일없이 서성거리다가 벤치를 찾아 앉았다. 그는 신문을 펴들고 읽기 시작했다. 구인 광고란은 이전과 그다지 다를 게 없었다. 여전히 K를 거절할 사람들이 일꾼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K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하며 광고를 하나하나 자세히 읽었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인력을 필요로 하는데 직업을 갖지 못할 이유가 없다. 비록 내가 다리를 절고 초라한 옷매무새에 머리칼이 지저분한데다가 만성적인 영양실조로 고통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더라도, 그런 사람이 세상에 나 혼자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들도 모두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죽지만 않으면 삶은 계속되는 것이다. 온갖 악조건들이 딸려오긴 하겠지만……
이 시점에서 K는 아리송하여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그런데 내가 삶을 계속 살기를 바랐던가? 흠,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자살이라는 것도 특정 계층만의 특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으레 자신의 소지품을 버릴 때에는 그것이 자신에게 무용하다고 생각하여 버리는 것인데, 그렇다면 삶을 버리는 일에도 ‘삶은 무용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분석력과 강력한 주관이 필요한 것 아니겠는가. 물론 모든 사람들이 논리에 맞게 행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K는 대뜸 웃기 시작했다. 내가 논리를 말하다니! 그는 여전히 통증이 심한 오른쪽 다리를 들어서 허공을 향해 발길질을 했다. 감전이라도 된 듯 K의 오른쪽 하반신 전체에 고통이 퍼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아팠지만 K는 미간을 찡그리기만 하고 여전히 웃고 있었다. 이 통증도 논리 때문인가? 그는 누군가를 조롱하듯이 희극적으로 말했다. 내가 감정에 대해서 생각해본 일이 있지. K는 혼잣말을 계속 했다. 옆에서 보면 마치 그가 신문지에 대고 대화를 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폭풍처럼 나타나서 폭풍처럼 사라지는 것! 감정의 천적은 다름 아닌 시간이다. 자살자들에 대해서, 만일 그들이 감정에 떠밀려서 사는 것을 그만 뒀다면 그들의 자살 역시 시간과 함께 희미해지기만 하다가 결국에 가선 존재하지도 않는 허구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들 중 누군가가 철벽같은 이성과 객관에만 근거하여 자살할 수 있었다면? 예를 들어 자신의 예언을 위해서 분화구로 뛰어든 철학자는 어떤가? 그러나 그의 행위도 짤막한 문장으로 단정 짓기는 쉽지 않다. 하여간에, 만약 논리와 이성으로만 성립된 자살이 있다면 그 자살의 주인은 굉장히도 반항적인 철학자일 것이다. 그는 분명 세상이 자신에게 내놓은 조건들에 대하여 단 한 번도 긍정한 일이 없는, 그야말로 금속으로 만든 것 같은 남자이리라. 새빨갛게 달궈진 금속 말이다!
그런데 K의 말은 여기에서 멈췄다. 그가 신문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남에게 돈을 빌려주지 못해서 안달이 난 대출회사들의 광고 사이에 K의 눈길을 끈 문구가 있었다. 연령, 성별, 학력 등 모든 사항 무관. 그것을 읽고 K는 생각했다. 돼지가 걸어 들어가도 일을 시켜주겠군. 문구 밑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업무 내용과 전화번호, 위치 따위가 억지로 구겨 넣은 것처럼 꽉꽉 들어차 있었다. 상업 광고지나 전단 따위를 배포하는 일이라고 적혀있었다. 그런 일을 전문으로 맡아서 하는 회사도 있나? K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곧 생각을 접었다. 실제로 그런 회사가 존재하든지 존재하지 않든지 K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는 다만 누가 가도 일을 줄 것 같은 뉘앙스의 문구가 마음에 들었다. K는 신문에서 그 광고 부분만을 찢어내 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남은 신문을 접어 벤치 위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찢어낸 신문지 조각에 인쇄되어있는 내용에 의하면 회사는 K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걸어서 삼십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는 전화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일자리를 구하자면 직접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K는 곧바로 그리로 향하지 않고, 일어선 자세 그대로 얼마간 멈춰있었다. 그는 새삼 자기 주변의 환경을 의식했다. 눈부신 햇살이 번쩍거리는 널찍한 대로변에는 K 혼자밖에 없었다. 햇빛 때문에 새하얗고 유독 고요한 거리였다. K는 어딘가에서 잉잉거리는 음악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했다. 마치 태양빛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벌레 한 마리 날지 않는 얼어붙은 공기를 타고, 빛의 입자 하나하나가 미세하게 진동하며 노래하는 음악이 들려왔다. K는 꿈쩍도 않고 서서 그 노래를 듣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단순한 귀울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K에게는 그것이 들렸다. K는 그 음악이 여자의 눈동자를 연상시킨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전에 자신이 외투를 건네준 노파를 떠올렸다. 정확히는 그녀의 눈을 말이다. 그리고 그 뒤에 또 누군가가 있었다. 노파의 눈을 보면서 생각했던 것. 불행이 새겨진 슬픈 눈동자. K의 죄책감. K의 깊은 죄책감. 그는 자신이 행복해지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고 중얼거렸다. 그것은 운명적이고 필연적인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나는 좋은 것들은 절대로 얻지 못하리라. 그 노이즈 같은 음악 때문에 K는 순식간에 직장을 구할 맘이 사라졌다.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직업을 가질 수도 없었고 돈을 벌수도 없었으며, 하물며 살아갈 수도 없었다. 집도 빵도 이웃도 외투도, K는 아무것도 가져서는 안됐다. 해일 같은 탈력감이 덮쳐들어 온몸과 정신의 구석구석까지 그것이 스며들고 쓸려나가는 것을 느꼈다. 파도에 밀려 K는 비척비척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K는 그저 잠들고자 했다. 햇빛으로 포화된 방안에서 죽은 듯이 잠만 자고 싶었다. 한 백년쯤. 어쩌면 천년쯤.
조용한 거리를 지친 발걸음으로 걸으며 K는 생각했다. 전 세계의 늙은 여자들은 전부 사라져버려야 한다. 하필이면 그 노파의 눈을 통해서 떠올리다니. 다시 한 번 그 노파와 만나게 되면 기필코 그녀의 듬성듬성한 머리채를 붙잡아 땅바닥에 처박고 짓이겨버리리라고 K는 입속말을 해보았다. 그러나 분노조차도 지금 K의 온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무력감을 이겨내지는 못했다. 그는 화를 내보려고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해서 중얼거렸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K는 자연히 입을 다물게 되었다.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고 한적한 날이었다. 지금껏 K는 길에서 단 한 번의 인기척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는 흰 페인트로 칠해놓은 신기루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그 고요의 한복판에서 K의 정신은 몹시 느슨해져있었다. 까딱하면 영혼마저 육신을 빠져나와 어디까지고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그는 위태로운 정신으로 드디어 집 앞에 도착했다. K는 계단을 올랐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는 모래성이 무너지듯 매트리스 위에 쓰러졌다.
그리고 K는 삼 일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삼 일 내내 잠을 잤다. 그의 영혼에 누적된 피로 때문인지, K는 질리지도 않고 계속해서 잠을 잘 수 있었다. 가끔 태양빛이나 너무 오랜 잠 때문에 눈이 뜨여지기도 했지만 그는 그저 다시 눈꺼풀을 닫을 뿐이었다. 그러면 K는 또 잠들 수 있었다. 그는 정말 죽은 사람처럼 잠을 잤다. 일어날 기력이 없었던 것이냐고 물으면 한편으로는 그렇기도 하다고 대답할 수도 있겠지만, 더 분명한 대답으로는 K가 그 삼 일 동안 일어나고 싶지 않았던 것이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매트리스에서 벗어나지 않은지 삼 일 째 되던 날 K는 강한 욕지기를 느껴 눈을 뜨고 말았다. 그는 수도 밑에 있는 하수도 구멍으로 기어가 그곳에 토악질을 해댔다. K는 또 자신의 입에서 희멀건 위액이 쏟아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구역질을 마친 후 찬물로 입을 헹구고 다시 매트리스로 돌아갔다. 그는 힘없이 그 위에 몸을 뉘였다. 지금이 몇 시지? 완전히 빛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창문 밖은 이미 상당히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그러나 겨울엔 해가 빨리 지기 때문에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의 양 만으로는 시간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시간 따위를 알아서 무엇하게? K는 시간을 알아보려는 노력을 그만 두고 천장으로 눈을 향했다. 머리가 어찔어찔 했다. 너무 오래 자서 그런 것 같았다.
햇빛에서 음악이 들리던 날 그의 정신을 점거한 무력감은 이미 거의 다 사라지고 없었다. 사라졌다기보다는, 그런 감각을 느껴야할 근거를 요 삼 일간 잊어왔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내가 말했지. K가 중얼거렸다. 전부 시간과 함께 흐려지기 마련이라고. 만일 내게 엽총 한 정만 있다면 모든 일이 더 쉬워질 텐데. 그는 돌연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사흘 전 받은 탈력증이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K의 마음속은 여전히 공허하고 창백했다. 시간은 여전히 미래로 흐르고 있었으며―지금이 몇 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K는 가진 것 없이 부유하는 낙엽조각처럼 살고 있었다. 그는 참으로 가진 것이 없었다. 그는 무언가를 가지고 싶었다. 어지럼증을 좀 진정시켜보려고 K는 양손으로 두 눈을 문질렀다. 이미 누워있는데도 넘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기 존재의 껍질 안쪽이 텅 비어있는 것을 그는 정말이지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K는 두 눈을 꽉 누른 채 나지막하게 소리쳤다. 비렁뱅이 같으니! 게다가 그 껍질은 마치 유리막으로 되어있는 것처럼 약하고 쉽게 금이 가는 것이었다. K는 여전히 어떻게 해야 좋을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을 밀치는 파도가 없으면 어디로도 움직일 수 없는 썩은 물웅덩이 같았다.
그때 K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누군가가 옥탑방의 현관문을 두드린 것이다. K는 깜짝 놀라서 벌떡 상체를 일으키며 현관으로 눈을 향했다. 그가 아무 소리 없이 앉아있자 현관문 건너에 있는 누군가가 다시 문을 두드렸다. K는 여전히 놀라서 얼어붙어 있었다. 뭐라고 반응을 하긴 해야 할 텐데, 그런 생각조차 K의 머릿속에서 달아나버린 것이었다.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얼마간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깬 것은 문 너머의 사람이었다. 그가 문손잡이를 돌린 것이었다. 그는 그대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K에게는 문을 잠가 두는 습관이 없었던 것이다. K는 예상치 못한 방문객 때문에 바짝 긴장하고 있었지만 문이 완전히 열리고 서로 얼굴을 확인하자 다소 긴장을 풀었다. 방문객은 다름 아닌 K의 친척, 그에게 이 방을 빌려준 중년남자였던 것이다. 매트리스 위에 주저앉아있는 K를 보고 남자가 인사를 겸해 말을 걸었다. 노크를 해도 아무 소리가 없기에 외출한 줄 알았노라고 말이다. K는 여전히 정신없는 얼굴로 꾸벅 인사를 했다. 잠을 자던 중이었다고 변명을 할까 싶었지만 지금이 몇 시인지도 알 수 없었고, 무슨 용무인지는 몰라도 남자의 방문이 자신의 수면을 방해했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K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돌연 소리치듯이 K가 말했다. 중년남자도 그렇다고 동의했다. 그는 마침 건물관리 문제로 왔는데, K가 어떻게 사는가 싶어 들렀다고 사정을 설명했다. 얼굴 꼴이 영 아니군. 남자가 말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K는 3일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잠만 잤으니 말이다. K는 딱히 할 말이 없어 멀뚱멀뚱 남자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앉은 채로 대화를 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어날 기력이 없어 그냥 앉아있기로 했다. 곰팡이투성이의 매트리스마저도 남에게 빌려서 써야하는 K에게 누가 예의 같은 것을 강요하겠느냔 말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K는 괜한 배짱이 생겼다. 내 처지에 격식 따위 알게 무어냐. K가 마음속으로 누구에게든 한번 무례하게 굴어보겠다고 쓸데없는 다짐을 하고 있을 때 중년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는 K더러 같이 식사나 하러 가자고 말했다. 자신이 한 끼 대접하겠노라고. 그는 초췌한 K의 얼굴을 보니 K와 알고 지내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밥 한 끼 사주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K는 반사적으로 사양하려고 했지만 방금 한 결심이 생각이 났다. 뻔뻔하게 밥 한 끼 쯤 얻어먹는다고 무슨 일이 생기겠는가. 자다 굶어죽지 않으려면 밥을 먹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뜩 K는 주머니에 잔돈이 남아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런데 지금이 몇 시죠?」
K의 물음에 중년남자는 오후 8시쯤 되었다고 대답했다. 마침 딱 저녁시간이었던 것이다. 사흘을 내리 굶었으니 저녁시간이고 새벽시간이고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아무튼 그랬다. 남자는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K는 현기증 때문에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그를 따라 나섰다.
바깥 공기는 폐가 차갑게 식어버릴 정도로 쌀쌀했다. 새까만 밤 아래 점포 간판과 가로등들이 유독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겹쳐 입은 외투의 옷깃 사이를 찌르며 스며드는 깜깜한 겨울공기와 냉기로 빙결된 밤하늘 속의 소음 때문에 K는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눈 덮인 벌판, 단단하게 얼어붙은 어두운 하늘, 천천히 동사해가는 K. 만일 그런 풍경 속이라면 얼어 죽는 것도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닐 것이라고 K는 생각했다. 연극무대에서는 배경 역시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들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꿈꾸는 것처럼 중심을 못 잡고 비척거리는 K를 은근히 부축하며 남자는 그를 식당으로 데려갔다. 의자에 앉아서야 드디어 K는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그들은 식탁을 가운데 두고 서로 마주본 채 앉았다. K가 도무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 같아 중년남자는 자기 임의대로 음식을 주문하고, 그 주문으로 괜찮겠느냐고 K에게 눈짓을 보냈다. K는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는 사실 남자가 무엇을 주문했는지조차 듣지 못했다. 점포 천장에서 깜빡거리는 형광등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곧 뜨거운 국과 음식들이 나왔다. 남자는 K에게 지쳤을 때에는 뜨거운 음식을 먹어야 힘이 생긴다고 말했다. K는 또 한 번 말없이 긍정했다. 넋 나간 눈빛으로 K가 음식들을 떠먹기 시작하자 중년남자도 식사를 시작했다. 그들은 조용히 식사를 했다. 식사 도중 중년남자가 K에게 물었다. 그런데 자네 어머니는 건강하신가? 「아니요. 돌아가셨습니다. 죽었어요.」 K가 대답했다. 남자는 놀라면서 재차 물었다. 아니, 돌아가셨다니? 도대체 언제?
「꽤 됐어요. 아마 다른 친척들도 모를 겁니다. 장례식을 안 했거든요. 물론 부고도 안 돌렸죠. 저 혼자밖에 없었으니까요.」
중년남자는 꽤나 충격을 받은 것 같았지만 K는 그저 묵묵히 수저만 계속 날랐다. K가 아무렇지도 않게 어머니의 죽음을 이야기하자 중년남자는 혼자 놀라고 있는 것이 무안했던지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는 몹시 유감이라고 말했다. K는 다시 한 번 끄덕였다. 그는 일부러 식사에만 의식을 집중시켰다. 쓸모없는 감상을 일으키지 말라. K는 머릿속으로 계속 되뇌었다.
식사가 거의 끝났을 때쯤 중년남자는 「혹시」하며 말문을 열었다. 혹시 무언가 고민이 있다면, 남들처럼 살아보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지. K는 그 말을 듣고 남자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한동안을 아무 말도 않고 그를 바라만 보다가 K는 입을 열었다.
「네.」 K가 말했다.
「옳은 말씀입니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고민하듯 잠시 침묵하던 K는 벌떡 일어나더니 식탁 모퉁이를 돌아 중년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는 자기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잡히는 동전들을 전부 그러모아 남자에게 내밀었다. 얼마 안 되는 돈이었다. 분명 방금 식탁 위에서 먹어치운 음식들의 절반 값도 못될 액수다. 그러나 K는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에게 거의 강요하듯이 동전들을 쥐어주고 꾸벅 인사를 한 뒤에 도망치듯이 가게를 나왔다. 그것이 최선이었다! K가 밤공기 사이에서 외쳤다. 그는 소리를 지르고 다리를 절면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K는 밤새 목청 높여 울면서 비좁은 방 안을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다. 서러워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헛구역질을 하다가 하수구에 두어 번 토를 하기도 했다. 기껏 먹은 음식들이 전부 되돌아 나왔다. 그는 아침이 돼서야 겨우 잠들었다. 눈물과 위액으로 범벅이 된 K의 얼굴에서는 역한 냄새가 풍겼다.
오후에 눈을 뜬 K는 비몽사몽간에 호주머니를 뒤져 신문지 조각을 하나 찾아냈다. ‘그날’ 신문에서 찢어낸 그 조각이었다. 그는 그것을 서너 번 반복해서 읽더니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고, 수도로 다가가 세수를 하고 씻었다. 그리고 외투를 벗어 공기 중에 몇 번 털고 물을 칠해 얼룩을 문지르다가 다시 입었다. K는 밖으로 나왔다. 계단을 내려가고 거리를 건너 신문지 조각에 적혀있던 그 주소를 향해 걸었다. 그곳은 어느 건물 구석에 딸린 작은 사무실이었다. 종이상자와 묶여있는 전단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K는 그 사이에 앉아서 무언가 작업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사장님이 계시느냐고 물었다.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묻기에 K는 신문에서 구인광고를 보고 왔노라고 대답했다. 그는 채용에 대해서는 자신이 책임자라고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가 크고 마른 남자였다. 그는 K를 잠시 훑어보더니 다리를 저느냐고 물었다. K는 사실 그렇다고 대답했다. 다리가 문제가 되겠느냐고 K가 묻자 남자는 무심한 목소리로 아마 괜찮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K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한 뒤 사무실 구석으로 가서 무언가를 뒤적거리더니 이천 장은 될 법한 전단 묶음을 들고 왔다. 남자는 무거우니까 우선은 천 장만 들고 가서 배부한 뒤 다시 돌아와서 나머지 천 장을 가지고 가라고 말했다. K는 상황을 이해하기가 어려워서 잠시 주춤거리다가 남자에게 자신이 채용된 것이냐고 물었다. 남자는 이상한 눈으로 K를 쳐다보더니 그렇다고 했다. 그는 혹시 K가 이런 일을 처음 해보는가 싶어 나름대로 친절하게 K가 해야 할 작업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온 도시에 전단을 붙이고 다니거나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직접 나누어주면 되는데, K가 지금 맡을 일은 전자에 해당한다고 남자는 말했다. K는 조금 얼떨떨한 채였지만 알겠다며 전단지 천 장을 손에 들고 남자가 준 접착테이프 다발을 주머니에 넣은 뒤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그 남자는 K의 이름조차 묻지 않았다. 그리고 K는 일을 얻은 것이었다.
이상이 K가 이 도시에서 직업을 갖게 되기까지의 과정이다.
제2부
여름이 되었다. 겨울은 태양광선과 냉기로 K의 몸을 온통 난도질하더니 어느새 가버리고 없었다. 봄은 확실한 경계선도 남기지 않고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두 계절이 흐르는 동안 K가 겪은 일 중에서 특별하다고 할 만한 사건은 그리 많지 않았다.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우선 K가 첫 번째 일급을 받은 날의 일이다. 그날 일을 마치고 일당을 받으니 시간은 마침 늦은 저녁이었다. K는 일이 끝나기도 전부터 벼르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는 수중에 돈이 생기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사무실의 키 큰 남자에게서 삯을 받아들자마자 K는 건물을 빠져나와 뛰듯이 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절룩거리며 계단을 올라 2층에 도착한 뒤, 전에 본 일이 있는 현관문을 미친 듯이 두드려댔다. K의 마음속은 희열로 뜨겁게 달궈져있었다. 그가 유난히도 요란하게 문을 두들기는 바람에 집주인은 놀란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맙소사,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문을 열고 나온 것은 전날 K에게 돈을 빌려준, 계단에 앉아 담배를 피우던 남자였다. 그의 얼굴을 보자 K는 통쾌함이 만발하다 못해 눈과 입으로 넘쳐흐르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하며 남자에게 지폐다발을 내밀었다. 그날 K가 일해서 번 돈 전부였다. 그는 그것이 얼마인지 세어보지도 않고 무작정 들고 와 남자에게 내놓은 것이었다. 담배 피우던 남자는 어리둥절하여 돈과 K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들여다보았다. 이 돈을 어쩌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당신 돈입니다!」
K가 의기양양하여 외쳤다. 남자는 잠시 곤혹스러워하다가 ‘아!’하고 감탄사를 발하며 이제야 알겠다는 듯 K와 시선을 맞췄다. K는 돈을 갚으러 온 것이었다. 그리고 담배 피우던 남자는 고맙다며 그것을 받아들더니 지폐를 한 장 한 장 세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 번 센 것으로는 성에 안 찬다는 듯 그는 액수를 다시 세는 것이었다. 이내 남자는 고개를 기웃거리더니 K에게 말했다.
「많은데! 생각보다 많아요!」
사실 그 돈이 얼마가 되던 담배 피우던 남자의 생각보다 많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애당초 그는 K에게 돈을 내어주면서, 그 돈을 다시 받게 될 것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선행이나 베푼다는 기분으로 K에게 돈을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K가 별안간 찾아와 빚을 갚겠다고 내민 돈은 오히려 남자가 그에게 빌려준 액수보다 훨씬 많았다. 원금의 배는 넘는 금액이었다.
「제가 전에 그렇게 말했었지요.」K가 말했다.
「이자를 쳐서 배로 갚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K는 자신의 돈 씀씀이를 자랑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K는 그런 역할이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남에게 꿀릴 것 없는 훌륭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담배 피우던 남자는 이자 같은 건 필요 없다며 원금을 제외한 돈을 K에게 돌려주려고 했지만, 물론 K는 받지 않았다. 그는 지폐를 내미는 남자의 손을 억지로 밀어내고 옥상을 향해 절뚝절뚝 걸어 오르며 마지막으로 외치는 것이었다.
「이제 내가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K에게 있어 썩 기분 좋은 기억이었다. 하루 일급을 전부 써서, K는 매일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그 남자와 마주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해야할 이유를 깨끗이 없애버린 것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담배 피우던 남자에게 일당을 전부 줘버린 이유로 K는 그날도 굶어야했다. 하지만 이미 하루쯤 더 굶는 건 별일도 아니었다. 허기 따위보다도, K는 자신이 그 돈을 조금도 셈하지 않고 전부 남자에게 줘버린 일이 퍽 만족스러웠다. 2층에 사는 남자보다 자신이 더 궁색한 생활을 하고 있음이 분명했음에도 불구하고 K는 자신을 위해 지폐 몇 장을 빼내거나 하지도 않고 그 돈을 송두리째 남자에게 준 것이다. 하하! 그도 놀랐을 것이다! K는 흡족한 기분 때문에 흥분되어 그 후로도 한참이나 옥상 위를 이리저리 걸어 다녔다. 그날 그는 잠들 때까지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지 못했다.
다른 기억으로는 보다 심각하다면 심각하달만한 사건이 한 건 있었다. 겨울이 거의 다 지나 날씨가 따뜻해질 무렵, K가 강도를 당했던 것이다. K는 아직까지도 그 사건이 정확히 무슨 일이었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어느 날 저녁 K가 봄기운에 만취하여 구석진 골목을 걷고 있었는데, 웬 사내 두 놈이 뒤에서 달려와 K를 넘어뜨리고 꼼짝 못하게 붙잡더니 그의 외투를 벗겨서 가지고 도망쳐버린 것이었다. 그 일련의 행위들이 진행되는 동안 K는 그저 어리벙벙하여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그 강도 두 놈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넋을 놓고 있다가 몸을 일으킨 K의 머릿속에는 그저 의문밖에 없었다. 내 외투를 훔쳐가다니. 도대체 뭣 때문에? 외투 주머니에 돈이 있긴 했지만, 그건 K가 음식을 사고 남은 잔돈을 넣어뒀을 뿐인 것으로 동전 몇 푼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외투는 모두가 알다시피 K가 의류 수거함에서 꺼내온 것으로써, 무척 낡고 지저분하며 여기저기 실밥이 터져있는 쓰레기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K는 어쩌면 시간이 저녁이기도 하거니와, 어둠과 가로등 불빛 때문에 그 강도들이 외투의 품질까지는 확인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하고 생각했다. 그 외의 가설로는 그들의 강도행위가 실은 초행으로, 몹시 긴장해 있던 바람에 K의 겉으로 빤히 드러나는 경제 사정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무작정 일을 저지른 것이라는 안도 있었다. 만약 후자라면 그들은 굉장히도 가난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아마 K보다 더 말이다. 아무튼 K는 얼떨떨한 채로 자리에서 일어서 강도들이 사라진 골목 구석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고 가던 길을 계속 걸었다. 하긴 이제 겨울도 다 갔고 하니 외투쯤은 없어도 괜찮은 일이었다. 게다가 전에 K가 다리를 절며 도시를 뒤지고 다녔을 적의 결과물인 외투가 아직도 두 벌이나 남아있는 것이다.
겨울과 봄이 다 지나가는 동안 K에게 일어난 일들 중 인상이 남을만한 일은 위의 두 가지가 전부였다. 그 외에는 모두 매일같이 엇비슷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는 여전히 감정의 물결에 흔들리면서 하루하루를 우울로, 혹은 광적인 흥분으로 보내왔다. K가 맡은 직업이 책임자나 관리자 따위에게 감시를 당하며 해야 하는 일이 아님은 퍽 다행인 사실이었다. 덕분에 그는 전단지 다발을 들고 거리를 돌아다닐 때 얼마든지 ‘K처럼’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K가 업무 중에 혼잣말을 지껄이거나 신경질적인 비명을 지른다고 언짢게 생각할 상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떻게 보면 K는 자신에게 아주 적합한 직업을 찾은 것이었다. 특히 아무 때에나 어디로든 마구 걸어가고 싶어 하는 그의 충동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나가자! 밖으로 나가자! 그러나 K는 이미 하루의 반수 이상을 밖에 지낸다. 그는 어디로든 내키는 대로 걸어간 뒤 전봇대나 게시판 따위를 찾아서 전단을 붙여놓으면 그만이었다.
가끔 K는 중년남자에 대해 생각하기도 했다. 그 겨울밤 K에게 식사를 사준 이후로 K는 그 남자를 단 한 번도 만날 수 없었다. 아무래도 그는 K가 사는 건물을 소유하고 있을 뿐이지 그곳에서 사는 건 아닌 듯 했다. 분명 더 깨끗하고 고급스런 건물에서 살겠지. K는 멋대로 그 남자의 거주지를 상상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친척 중에 부자가 있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기도 했다. 그 중년남자를 제외하면 K가 아는 친척들은 전부 가난 속에서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가 궁핍 속에서 자신이 왜 사는지도 잊은 채 하루의 삶을 위해 하루의 노동을 하며 살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 모두에게는 가족이 있었으니, 그들의 인생은 가면 갈수록 맹목적이 되는 것 외에는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사람은 물질적으로 풍족해져야만 자기지각을 시작할 수 있는가? K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러한 감정이나 인지들은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K는 생각했다. 몇몇 사람들이 기형이거나 괴상한 종양이 달린 몸을 갖고 태어나듯이 말이다. 눈이 없거나 혹은 팔다리가 하나씩 더 달려서 태어나는 새빨간 아기들. 그 아이들은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자신의 괴이함을 더 잘 알게 된다. 남들에게 없는 것만큼 더 잘 보이는 것은 없다. 그들은 자신의 열한 번째 손가락이 점점 비대해지다가 결국엔 자기 자신을 먹어치워 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은연중의 예감으로 알고 있다. 비정상을 규정하는 것은 바로 다수에 다름 아니다. K는 정신에도 그러한 기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신의 종양이 항상 사고회로의 한가운데 버티고 앉아서 생각에 간섭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통증과 같은 감각으로 주장하고 있으리라고 말이다.
하여간에 요는, 저 혼자 옥상을 헤매다가 길바닥으로 뛰어내린 전과가 있는 K라는 남자는 근 반년 간을 별다른 문제없이, K답게 잘 흘려보냈다는 것이다. 그는 매일 일을 하여 먹고 살기에 충분한―집주인인 중년남자의 호의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경제활동이었지만― 돈을 벌었지만 여전히 식사는 거르기를 습관처럼 하였다. K는 하루에 한 끼보다 더 먹는 일이 없었다. 그는 늘 아침 점심을 연이어 거르고, 일을 마치고 받은 일당으로 저녁을 먹었다. 그마저도 안 먹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말이다. 남은 돈은 그저 주머니에 쑤셔 넣어두거나 가끔 생필품을 사는 데에 쓰곤 했다. K가 제일 먼저 산 생필품은 바로 비누였다. 그는 비누를 사서 수도 옆에 두고 씻을 때마다 쓰곤 했다. 비누만은 꼭 필요하다 싶어 사두긴 했지만 사실 그가 몸단장에 적극성을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K의 이는 오랜 방치로 이미 누렇게 변색된 지가 수년전의 일이었고, 머리는 부스스한 것이 늘 지저분했으며 새 면도칼을 구하지 못해 덜 잘린 수염이 언제나 거뭇거뭇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들이 K에게 어떤 문제를 안겨주거나 하지는 않았다. 일을 하는 데에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저녁마다 K에게 봉급을 주는 사무실의 키 큰 남자도 K의 복장이나 행색에 대해 아무런 지적이 없었다. 즉 청결 같은 것은 K가 일하거나 먹고 사는 데에 있어 그다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요소였던 것이다. 가끔 거울을 볼 때면 K는 아직도 알코올 중독 탓에 재활원에서 살고 있을 어느 친척의 얼굴을 떠올리곤 했다. 그도 늘 면도하지 않은 얼굴에 산발한 머리였다. K는 재활원에서 주는 약 때문에 살집이 올라 눈두덩 살에 파묻혀버린 그의 가는 눈동자를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의 얼굴을 볼 적마다 그를 떠올린다는 건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K는 거울을 볼 때마다 수염이나마 정리해보려고 낡아빠진 면도칼을 들었지만 이내 턱이나 윗입술 주변에 새빨간 상처를 내고 신경질적으로 면도칼을 집어던지는 일만 반복되었던 것이다.
사실은 그도 깨끗한 외견을 갖고 싶었다. 너무나 청결하고 완벽해서 그 누구도 트집 잡을 수 없는 껍질을 원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사람들은 K를 얕잡아보거나 경멸하지도 않을 것이고, K는 자신이 원하는 존중이라는 것을 사람들로부터 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 점에 대해서, K는 여전히 욕망은 갖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자포자기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K가 깔끔하고 세련되게 차려입고 다닌다면 그것은 순전히 K가 만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이유로 하리라. 하지만 그것은 너무 성가신 일이다. 거지같은 꼴로 다니더라도 사람들의 눈 밖으로만 피하면 되는 일 아니겠는가. K는 자신의 순결한 영혼을 증명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늘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이 가능하기만 하다면 옷이고 얼굴이고 아무 것도 없이 살아도 좋을 텐데. 그렇지, 차라리 가죽을 벗어버리는 것이 더 낫다. 기준으로부터의 탈피…… K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하면서 거울 속의 자신을 쳐다보곤 했다.
비교해보자면 근 반년은 퍽도 이렇다 할 것 없는 나날들이었다. 이제 하늘에서 쏟아지는 태양빛은 황금색의 농도 높은 액체 같았고 열기로 달구어진 포도에서는 콜타르 냄새가 늪처럼 끈적거렸다. K는 셔츠의 소매를 걷어붙인 채 전단지를 뿌리고 다녔다. 그는 항상 햇빛 때문에 어지러웠고 비틀거렸다. 햇살은 쏟아진 잼처럼 도시 위를 뒤덮었다. 어디를 가나 여름의 냄새가 농밀하게 골목 구석구석을 메우고 있었고, 그 공기를 흡입하고 다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영혼을 조여 두는 나사 하나가 녹아 사라진 것 같았다.
K의 옥탑방. 그곳은 여름이 되자 햇빛에 점령당해 버렸다. 넓고 사방으로 나있는 창문들 때문에 방은 그야말로 태양이 통째로 흘러들어온 것 같았다. 방안에서는 어디로 가도 햇빛을 피할 수 없었다. 방을 송두리째 집어삼킨 태양빛 때문에 K는 숨도 쉬기 힘들었다. 겨울에는 사방팔방이 흰빛으로 번쩍거려 숨이 막히더니 이제는 마치 햇빛 속에서 익사해버릴 것 같았다.
그렇다. 한여름이 되었다. K는 아직도 살아있었다.
어느 여름날, K는 길에서 주은 가방에 전단지를 한 가득 넣고 온 도시의 화장실을 순회하는 중이었다. 그는 눈에 보이는 모든 건물에 설치되어있는 모든 화장실을 찾아 들어가 사람들의 시선이 닿을만한 곳에 전단을 붙이고 있었다. 전단지에는 ‘당신’의 건강과 아름다움을 생각한다면 반드시 본지에 표기되어있는 체육관의 회원이 되어야만 한다는 주장이 강렬한 원색 텍스트로 인쇄되어 있었다. K는 이런 체육관의 회원증과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동떨어져있는지 따위의 상념을 초점 없는 시선으로 쫓으면서 접착테이프를 뜯었다. 이 도시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그들의 대다수는 K가 전혀 현실감을 느낄 수 없는 인생을 살고 있으리라. 혹은 K는 어떤 인생에 대해서도 현실감을 느낄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K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말이다. 그는 지금까지 온갖 수모와 고통을 당해왔지만 묘하게도 늘 타인의 불행을 관조하는 것 같은 기분이 없지 않았다. 그 이유를 K는 자신이 스스로의 생명과 화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리라고, 다소 불분명한 관념으로 추측하곤 했다. 그에게는 ‘자신’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그대로 자신의 소유인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K는 변기들을 둘러싸고 있는 칸막이 안쪽에 전단을 붙이기 위하여 하나씩 문을 열며 들락거렸다. 이윽고 마지막 칸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손잡이를 당겨보니 잠겨있었다. 굳이 모든 칸에 전단을 붙여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안에 누가 있는가보다 싶어 발걸음을 돌리려던 순간, 안쪽에서 기괴한 신음소리가 들리는 것을 K는 들었다. 그리고 발밑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숙여보니 칸막이 안쪽에서부터 은근한 핏빛을 띄는 혼탁한 액체가 스멀스멀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정체불명의 액체는 K가 발을 떼면 철벅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흘러넘치고 있었다. 또 한 번 신음소리가 들렸다. 안에 사람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K는 통상적인 인간의 배변활동에 핏빛 액체를 한 바가지나 분비하는 과정이 포함되어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무심코 문을 두드렸다. 호기심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한 감정이 K를 움직이고 있었다. K의 노크 때문인지 순간 신음소리가 멎었다. 그러나 이내 칸막이 안쪽에 있는 아무개는 다시 고통스러운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K는 칸막이 너머로 짙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아주 깊고 비린 냄새였다. 사람의 살점으로 만든 하수구가 있다면 그곳에서나 풍길법한 냄새였다. 그 냄새 때문에 K는 왠지 모르게 몹시도 감정이 동하는 것을 느꼈다. K는 넋 놓은 사람처럼 그 칸막이 앞에서 엉거주춤 서있었다. 안쪽에서는 신음과 철벅거리는 물소리, 그리고 불안한 침묵이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K는 계속 문을 두드릴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기다렸다. 칸막이 안쪽에서 끊임없이 부산스러운 소리들이 들려왔다. 가끔 신음소리 속에 흐느낌이 섞여 들리기도 했다. 혹은 급하게 숨을 내쉬면서 습관처럼 내뱉는 욕설도 들렸다.
부산한 소음들은 한참 뒤에야 멎었다. 이제 칸막이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한바탕 달린 뒤의 육상 선수가 내쉬는 것처럼 격렬한 심호흡 소리뿐이었다. 날씨는 퍽도 더웠다. 벽 높은 곳에 난 작은 창문에서는 직선으로 곧게 뻗은 황금빛 뱀이 화장실의 타일 위로 45도의 각도를 유지한 채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수명이 다 된 형광등 때문에 어둑어둑한 화장실에는 창문에서 흘러내려온 노란 빛이 얇은 막처럼 조용하게 덮여있었다. 그것은 아주 느리게 움직였고, 또 살아있는 것 같았다. 햇빛은 수도 없이 많은 황금색 환형동물들이 뭉쳐서 만들어진 것 같았고, K는 열기를 품은 그 벌레더미를 손으로 헤집어 볼 수도 있었던 것이다. 더위 때문에 사방이 고요했다. 여름은 그런 방식으로 유난히 침묵을 강조하곤 했다. 여름이 되면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잘못된 장소에 버려진 쓰레기 같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모든 사물들이 태양색깔로 달궈진 땅 위에 혼자서 생각하며 서있다는 것은 정말로 이상한 일이다. 그래서 K는 늘 자신이 아직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하곤 했다. 태양은 언제든지 K를 치워버릴 수 있었다. 청소를 하다가 바닥에 떨어진 휴지뭉치를 주워 들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K는 망가진 장난감처럼 쓰레기통에 처박힐 수도 있었다. 죽는 것과는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 K는 완전무결하게 제거될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햇빛과는 다른 색깔을 유지한 채 포도 위의 아지랑이 사이를 걸어 다녔던 것이다. 그럴 때마다 그가 느끼던 것과 거의 비슷한 감정으로 K는 변기 칸막이 앞에 서있었다. 칸막이 안쪽에서 벌어지던 모종의 사건이 이제 매듭지어졌음을 K는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렸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더니 곧 덜그럭하고 자물쇠가 풀리는 소리가 화장실 안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K의 눈앞에는 여자가 한 명 서있었다. 젊은 여자였다. 정확한 나이를 짐작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녀의 어떤 부분들은 학생의 것으로 생각될 정도로 젊고 앳된 느낌이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눈, 눈물과 땀 때문에 흉측하게 번진 검은색 마스카라 한가운데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녀의 눈. 그것은 혼탁하고 흐릿했으며 핏발이 서고 부어올라서 붉게 보이기까지 했다. 그 눈망울을 보고 K는 또 누군가의 눈을 떠올렸다. 눈동자 깊숙한 곳에 가라앉은 원망과 불행의 색조. 곧 무너질 것처럼 불안하게 흔들리는 초점. 억울함을 억지로 참는 것 같은 눈빛. 그녀의 앳된 얼굴에 깊고 병든 눈이 두 개 박혀있는 광경은 가히 그로테스크를 말 할만 했다. 여자에게서는 피와 눈물의 냄새가 풍겼다. K는 말없이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 또한 아무 말도 없었다.
그녀의 옷은 피와 점액 따위로 온통 범벅이 되어있었다. 여자가 안고 있는 고깃덩어리 때문이었다. 그렇다, 여자는 새빨간 고깃덩어리를 품에 안고 있었다. 고깃덩어리는 빨간 체액과 점액으로 번질거리고 있었고, 가끔 끈적이는 액체를 뚝뚝 흘리곤 했다. K는 그것을 좀 쳐다보다가 다시 여자의 얼굴로 눈길을 돌렸다. 흑연색 화장품을 함유하고 흘러내린 눈물의 길이 광대뼈와 볼 위에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은 피로와 닳아빠진 감정 때문에 단단하게 닫혀 있었고 K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K는 왠지 모를 향수 같은 것을 느꼈다. 아마도 그의 코앞에 서있는 여자 때문인 것 같았다. 그는 여자와 악수를 하고 싶었다. 그녀에게 어떠한 종류의 친근감을 표현해보고 싶었다. 여자에게서는 병든 짐승 냄새가 났다.
「울지를 않아요.」
갑자기 여자가 말했다. 친밀함에 대해 온갖 생각을 하던 차에 뜬금없이 그런 말을 듣자 K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여자를 보았다.
「울지를 않아요. 죽었나 봐.」
여자는 반복해서 말하며 K에게 품에 안고 있던 고깃덩어리를 내밀었다. 여자의 옷과 고깃덩어리 사이에 들러붙어 있던 액체들이 질퍽거리며 길게 늘어졌다. K는 어정쩡한 자세로 서서 그 고깃덩어리를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여자에게서 병든 짐승의 냄새가 난다고 머릿속으로 되뇌는 중이었다.
「당신을 보니까 내 어머니가 생각나.」
K는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다. K가 말했다기보다는, 생각이 무심결에 혀끝에서 흘러내린 것이었다. 「내 어머니.」K는 다시 한 번 읊조리듯이 말했다. 그녀에게서도 병든 짐승의 냄새가 났었다. 피곤에 찌든 표정 깊숙한 곳에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눈을 가지고 있는, 한없이 가난한 늙은 여자였다. 모래에 쓸려 닳고 닳은 조약돌처럼. 늘 그랬지만 K는 죽은 어머니를 떠올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미 생명조차 잃은 그녀였지만 어머니는 늘 K의 감정을 뒤죽박죽으로 섞어놓고 물고문을 하듯이 그의 머리를 상념의 욕조 속으로 처넣을 수 있었다. K에게 구걸을 하러 다가온 노파도, 흰빛으로 번쩍거리는 겨울의 대로에서 들리던 음악소리도 전부 마찬가지였다. 그것들은 그 어떤 언어보다도 분명하게 K의 어머니를, 더 정확하게는 어머니의 가난한 영혼을 연상시켰다. K는 차라리 자신의 입으로 「어머니」라고 껍질뿐인 문자의 나열을 늘어놓는 것이 더 참을만했다. 그러나 그 노파의 눈에 새겨진 감정들은, 그리고 눈부신 빛 속에서 환청처럼 들리던 새된 음악소리는 K가 갖고 있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의 가장 깊은 부분을 찌르고 자극해 그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 K의 눈앞에서 피비린내를 풍기고 있는 여자. 그녀는 K로 하여금 ‘어머니’를 입으로 말하게 만들 정도로 K의 어머니와 닮아있었다. 특히나 그녀의 눈은 K 어머니의 눈만큼이나 인상적이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눈은, 그리고 그녀의 눈은 바라보고 있으면 한없이 깊은 무저갱을 내려다보는 것만 같았다. 그녀들의 눈은 그야말로 허무의 증명이었으며 아무런 목적도 없이 버려진 인간존재의 표현이라고 부를 만했다.
「당신은 아주 젊고 어린데.」
사실 K는 자신에게서도 병든 짐승의 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필연적인 일이었다. 그는 알았다. K는 여자와 자신이 똑같은 체취를 풍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신은 아주 젊고 어린데. 그녀가 자신의 동족이라는 것을 K는 처음 그녀의 눈과 마주쳤을 때부터 뭉뚱그려진 감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K는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고깃덩어리에게 팔을 벌렸다. 그는 그의 유일한 동족이 자신에게 내민 것을 받아들었다. 속이 꽉 찬 육질의 묵직한 무게감. 끈적거리고 은근한 온기. 체액으로 뒤덮인 그 추한 고기뭉치는 갓 태어난 인간이었다.
여자는 아이를 K에게 들려주고 지친 발걸음으로 그를 지나치더니 화장실 타일 위에 주저앉아버렸다. 화장실은 주기적으로 물 흐르는 소리만 들릴 뿐 굉장히 고요했다. 태양빛으로 달궈진 공기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여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희미하게 울고 있었다. K는 자기 손에 들린 갓난아이의 얼굴을 뒤덮은 체액 따위를 손으로 걷어냈다. 잘라낸 돼지고기의 단면처럼 새빨간 얼굴은 여기저기가 온통 부어있었다. 두 눈꺼풀이 들러붙은 듯이 닫혀있는 눈은 생고기에 새겨 넣은 조각 같았다. K는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울지도 않는 자그마한 고깃덩어리를 쳐다보고 있자니 채식주의자가 되고 싶다는 멍청한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K는 왜 여자가 자신에게 이런 것을 안겨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서 여자를 봤는데, 그녀는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아 넋 나간 사람처럼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냥 변기에 처넣고 물을 내려버릴까? K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칸막이 안쪽에 있는 양변기는 갓난아이만한 변을 흘려보낼 수 있도록 설계된 것 같지는 않았다. K는 어쩌지도 못하고 그저 엄지손가락으로 그 갓난애의 피부를 문지르고 있었다. 그런데 K는 아이의 연약한 갈비뼈 안에서 무언가가 박동하는 것을 손끝으로 느낄 수 있었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살아있는 모양인데.」
그러면서 K는 아이의 뺨을 후려갈겼다. 철썩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아이는 죽었다 살아난 것처럼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아기의 입에서는 비명과 함께 끈적거리는 점액 덩어리가 튀어나왔다. 앵앵. 고요하던 화장실에는 신경질적이고 삶에 대한 탐욕으로 속이 꽉 들어찬 비명이 울려 퍼진다. K는 짜증이 날 것 같았다. 아이의 여린 입술 가장자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K의 따귀 때문에 살이 찢어진 것이다. 그는 고개를 돌려 여자를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주저앉아 있었다. 죽은 줄 알았던 아이가 되살아나 울고 있는데도 여자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K는 눈짓으로 여자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여자는 흔들리는 초점으로 K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대신 죽여줄래요?」
K는 잠시 침묵한다. 그는 자신이 왜 여자를 보고 어머니를 떠올렸는지 점점 더 잘 알 것 같았다. 그녀는 희망을 완전히 거부하고 있었다. 그녀와 어머니, 두 여자에게는 미래에 대한 그 어떠한 기대도 없는 것이다. 심지어 그녀들에게 있어 미래란 악의로 만들어진 허구처럼 느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당신을? 아니면 이걸?」
손에 들린 아기를 들어 올리면서 K가 말했다. 어느 쪽이 죽던지 상황은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K는 생각했다. 이 좁고 뜨거운 화장실에서 벌어지는 살인극은 세계에게 있어 완전히 배제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여자가 죽으면 미래 없는 갓난아이가 남는다. 아이가 죽으면 미래를 거부하는 텅 빈 눈의 짐승만 남는다. 온몸의 털이 빠지고 가죽위로 앙상하게 뼈만 드러난 병든 암컷짐승. 여자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고개만 푹 숙인다. 다리를 모으고 앉은 그녀는 마치 자신의 뱃속으로 말려들어가려는 것 같다. K는 다시 아기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아이는 여전히 공포와 탐욕으로 만들어진 비명을 내지르고 있다. 그 새빨간 고깃덩어리는 화장실이 울릴 정도로 시끄러운 소리로 짖는다. 내놔. 내놔. 내놔. 아기는 무엇인가를 강렬하게 원하고 있었다. K가 말하기 시작한다.
「나는 집이 있어.」
그가 계속 말한다.
「남한테 빌린 것이지만 말이야. 좁기는 하지만 살만해. 사방팔방으로 창문이 나있어서 늘 태양에 가장 가까운 집이지.」
K는 말을 멈췄다. 그는 마치 라디오의 전원이 끊기듯이 갑작스럽게 말을 끊었다. 그의 눈은 귀청이 떨어져나가도록 공격적으로 울고 있는 아이의 벌려진 입 속에 시선을 두고 있다. 손톱만한 목젖이 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기는 가죽부터 입 안까지 전부 새빨갛다. K는 한 손으로 아기의 목을 쥐었다. 울음소리가 더욱 새되어진다. K는 나머지 한 손도 아기의 목을 쥐는 데에 사용했다. 이제 아이는 울음소리도 내지 못한다. 그것은 콜록거리며 고통스럽게 숨을 삼키는 소리밖에 낼 수 없다. K는 양손에 힘을 주었다. 그의 두 엄지손가락은 아기의 목 한가운데를 깊숙이 누르고 있다. 이미 피처럼 새빨간 아기의 얼굴은 점점 더 짙은 색을 띄기 시작한다. K는 아이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눈도 뜨지 못하는 갓난아이는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어떻게든 자신의 생명을 낚아채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K는 자신이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는 정말로 화나 있었다. K는 아기의 몸짓이며 표정, 숨넘어가는 침묵으로 들어찬 입, 너무나 작아서 비현실적인 손발, 그리고 그것이 갖고 있는 체온 따위가 전부 미치도록 싫었다. 그는 양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힘을 주어 아이의 목을 졸랐다. 「그 무엇도 태어나서는 안 돼.」 K가 흥분이 스며든 정신으로 뇌까린다. 입 밖으로 내지는 않고 그저 머릿속으로만 조용히 중얼거린다. 그는 입술도 뻥끗하지 않는다. 경련하는 근육의 떨림이 K의 엄지손가락에 전해져온다.
그리고 아기는 죽었다.
K는 자신의 손 안에서 축 늘어져있는 아기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이제 생명마저 잃어버린 그것은 시체라기보다는 차라리 고약한 취향을 가진 수집가의 태아 모양 밀랍인형 같았다. K는 곧 그것을 변기 안쪽에 떨어트렸다. 죽은 아기의 두개골이 쿵 하고 변기 내벽에 부딪히면서 가죽이 찢어진다. 시체는 붉은 등가죽을 드러내고 변기에 고인 물속으로 처박혔다. 찢어진 상처에서 스미어 나오는 피 때문에 빨간 잉크를 떨어뜨린 것처럼 변깃물의 빛깔이 점점 짙어진다.
이제 K는 몸을 돌려 여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웅크리고 앉은 자세에서 멀건 눈만 위로 하여 K를 쳐다본다. 돌연 그녀가 먼저 입을 연다.
「간단하게 죽이네요.」
「그래.」
처음 해보는 일이 아니니까.
여자의 목소리는 마치 그르렁거리며 위협하는 야수의 목청 같았다. 목감기에 걸린 것처럼 그녀는 몹시 쉰 목소리로 말했다. K는 앳된 얼굴의 여자가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목소리를 갖고 있는 것이 무척 인상적이라고 생각했다.
「이름이 뭐죠?」 그녀가 물었다.
「K.」
「나는 T예요.」
T. 그녀는 T다. T는 자기 이름을 밝히면서 또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늘어진 머리카락과 모으고 앉은 다리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T는 고개를 숙인 채로 작게 몸을 들썩였다. 아마도 웃고 있는 것이리라고 K는 생각했다. K는 그녀 앞으로 다가가 쭈그리고 앉았다. 무릎 사이에 머리를 파묻고 있는 T는 터무니없이 작아보였다. 실제로도 그녀는 꽤 체구가 작은 편이었다. K는 모든 것으로부터 숨으려는 듯 작게 움츠리고 앉은 그녀를 보면서 생각에 빠져있다. 그의 어머니도 작고 마른 사람이었다. 조금만 힘을 주어 쥐어도 깨져버릴 것 같은 작은 유리세공품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유리세공품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전 인생에 걸쳐서 일어난 온갖 불행들 사이에서도 입술을 깨물고 살아남았던 악착같은 영혼이었다. 그리고 이 여자 T도 비슷한 영혼의 소유자이리라고 K는 생각했다. 너무나 닮았다. 그는 그 사실에 대해서 어떤 감정을 가져야할지 혼란스러웠다. K는 한참동안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T도 몇 번인가 몸을 들썩인 뒤로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봐.」
마침내 K가 입을 연다.
「만약 갈 곳이 없다면, 내 집으로 와.」
K의 말에 T는 고개를 든다. 그녀의 눈에는 K에 대한 의문 같은 것이 담겨있다. 사실 말을 내뱉고 가장 놀란 것은 K 자신이었다. 여전히 황금빛 햇살이 넘실거리고 있는 화장실에서는 뜨겁고 느리게 물결치는 정적이 흘렀다. K는 무어라고 해명을 해야만 하리라고 생각했지만, 어쩐지 그럴 마음이 나지 않았다. 자신이 내뱉은 말 때문에 T가 어떤 오해를 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사실인 것 아니겠는가. 늘 사람들 앞에 서면 변명하고 장광설을 늘어놓기 바쁜 K였지만 T를 앞에 두자 굳이 주절주절 변명을 떠들어댄다는 것이 무척 귀찮게만 여겨졌다. 그것은 아마도 냄새 때문일 것이라고 K는 생각했다. 그는 T의 영혼 역시 무척이나 피로하고, 닳을 대로 닳아 너덜너덜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 점이 K에게는 위안이 되는 것이었다. 그는 그녀를 보고 있으면 안도할 수 있었다. K에게는 T가 이 세상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만나는 동족처럼만 느껴졌다. 그녀도 K만큼이나 별 볼 일없고 외로우며 또한 존재 깊숙한 곳에서부터 골병이 들어있는, 병을 앓고 있는 짐승이라는 것을 K는 직감할 수 있었다―그것도 사실은 K가 제멋대로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이지만 말이다. T에게는 퍽이나 실례인 직감이다―. 그러한 기분으로 타인을 대한다는 것은 K에게 있어 굉장히 익숙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 자신의 생각을 돌아볼 틈도 없이 말을 내뱉어버린 것이다. 자신의 집으로 오지 않겠느냐고.
T는 빨갛게 부어오른 눈으로 K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녀의 눈매에서는 약간의 냉소가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K에 대한 냉소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녀의 오래된 습관 같은 것이었다.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냉소. 그러나 그것도 그다지 선명한 것은 되지 못했다. K는 다시금 확신했다. 가진 것이라고는 결핍밖에 없는 여자다. 자신의 심장에 뚫려있는 구멍의 벽면으로 동맥혈이 흐르는 것을 항상 쓰라리도록 명백하게 느끼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의 뜨거운 살덩어리가 그 구멍을 채워 주리라고 믿지도 않는다. 어쩌면 그녀도 과거에는 그녀의 결핍을 메워주겠다고 다가오는 사람들을 믿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T의 습관화된 냉소는 경험주의의 산물이리라. K는 마음속으로 자신의 상상력에 감탄했다. 마치 소설가 같군! K는 T와 시선을 맞췄다. 그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T의 존재라는 비극 때문에 가슴이 아릴 것 같았다. 특히 그녀의 냉소 역시 완전무결하지 못하다는 점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그 무엇도 태어나서는 안 돼.
「왜 마음에 틈이 있지?」
K가 대뜸 말한다. 그는 어리둥절한 기분이다.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보이기에?」
K는 그것이 이상한 질문임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의문을 그 외에 어떤 방식으로 말해야했을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K는 T도 K 자신을 동종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했다. K가 냄새를 맡았듯이, T도 냄새를 맡았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K는 아직 T가 느끼는 감정의 근거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여자의 애매한 냉소. T는 아직 K를 경멸하거나 그를 향해 본격적인 비웃음을 던지지도 않았다. 그녀는 뭐라고 대답할까? K는 자신의 어머니가 인간을 사랑했던가, 혹은 사랑하지 않았던가에 대해서 돌이켜보고 싶었다. 수천 번의 불행과 거절 후에도 그녀는 인간에 대한 애정을 인정할 수 있었던가. 「심지어 당신은 그녀보다 훨씬 어리니까.」 K가 입속말로 중얼거린다.
T는 여전히 말이 없다. 그녀는 K가 혼자서 이러쿵저러쿵 지껄이는 것을 가만히 쳐다만 본다. T는 K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던져 자신의 아이가 죽어있는 양변기를 흘깃거리며 쳐다보기도 한다. 하얀 유리로 되어있는 매끈한 모양의 공중화장실 양변기. 사람들이 대소변을 흘려보내는 그곳에 지금은 T가 배설한 생명이 죽어있다. 화장실 타일바닥에 앉아있는 T의 눈높이에서는 아기의 시체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K에게로 눈길을 돌린다. 그는 불과 몇 분 전만해도 자신이 갓 태어난 아기 하나를 죽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벌써 잊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K는 계속해서 맥락을 파악하기 힘든 문장의 단편들을 T에게 들려주려 애쓰고 있다. K의 말에는 전혀 귀 기울이지 않고 힘 빠진 시선으로 그의 동공만을 들여다보던 T가, 돌연 입을 연다.
「나 좀 일으켜줘요.」 그녀가 이어서 말한다. 「어디로든 가서 좀 자고 싶어요. 당신 집으로 데려가줘요.」
그녀의 말을 듣자 K는 곧 아무리 떠들어봤자 어느 누구에게도 의미를 가지지 못할 말들을 내뱉는 것을 집어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난 뒤 T의 손을 잡았다. 그는 절뚝거리지 않는 한쪽 발에 체중을 싣고 T의 팔을 위로 잡아당긴다. 그녀가 비틀거리면서 일어난다. 아직도 T의 다리에 설마른 양수와 체액들이 엉겨붙어있는 것이 보였다. K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은 채로 절룩거리며 세면대로 다가가, 그녀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수도꼭지를 열고 T의 몸을 어설프게 닦아주기 시작했다. T는 거부하거나 피하지 않고 K가 하는 짓을 그냥 내버려두었다. 대강의 세척을 끝내자 K가 <그래>하고 입을 열었다.
「집으로 가서 잠이나 한잠 자자고. 질릴 정도로 실컷.」
그야말로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것처럼 말이다. 생명을 낳는다는 것은 너무 끔찍한 일이니까, 당신은 몹시 피로할 거야.
K와 T는 서로의 몸에 기댄 채 화장실 밖으로 나선다. 남자는 다리를 절고 여자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한다. 두 사람은 서로를 부축하며 햇빛 넘치는 거리를 걷기 시작한다.
T는 어영부영 K의 집에 눌러앉게 되었다. 그녀는 그 뜨거운 방에서 하루 종일 거의 움직이지도 않았다. 늘 방 한구석 벽면에 등을 기대고서, K가 사온 새로운 매트리스 위에 앉아 창문 너머의 하늘을 힐끗거리다가 밤낮에 관계없이 소르르 잠드는 것이 그녀가 하는 일의 전부였다. T는 외출조차 하지 않았다. 매일 저녁 K가 집에 돌아와서 보면, 아침에 그가 문밖으로 나서며 보아두었던 자세 그대로 그녀는 앉아있었다. 그녀는 말도 많이 하지 않았다. K가 돌아와도 T는 소리를 내 반기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다만 그녀는 저녁노을에 잠긴 눈동자로 K를 지긋이 바라보며 <왔느냐>는 듯이 눈짓을 할 뿐이었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K 앞에서 T가 가장 많이 말했던 것은 처음 만난 그날뿐이었다. K는 마치 인형 하나를 집에 들여놓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침마다 K는 T의 식사를 위하여 잔돈푼을 그녀의 매트리스 위에 얹어놓고 나가곤 했다. 그러나 그 돈도 집에 돌아와서 보면 늘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이다. K는 T에게 어째서 밥을 먹지 않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는 그냥 매트리스 위에 돈을 올려놓기만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간에 T가 식사를 거부한다면 거부하는 것이고, K 자신이 그런 거식행위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참견할 권리는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무엇보다 K도 식사를 거부하는 것이 얼마나 원초적인 병폐인지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도 지금은 매일 저녁 한 끼씩 식사를 하긴 하지만, 일 년 내내 햇빛으로 넘쳐흐르고 하늘에 닿을 것처럼 한없이 고독하기만 한 자신의 방안에 앉아있노라면 도무지 음식을 씹어 삼킬 기분이 들지 않는 것이 사실이었다. 공기 중에 포화해있는 빛살은 사람의 본능과 삶에의 욕구를 마비시키고 육체와 영혼의 연계마저 흐릿하게 지워놓는 것이었다. K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안 그래도 건강한 체형으로는 보이지 않는 T가 급속도로 말라가는 것이 눈에 띄자 K는 가끔 빵과 우유 따위를 사들고 오곤 했다. 그것을 T에게 내밀면 그녀는 순순히 받아들었다. 그리고 결코 적극적인 모습은 아니었지만, 조금씩 그 식감 없는 빵 덩어리를 뜯어먹는 것이었다. T의 식사는 그런 식으로 성립되었다. 이틀이나 삼 일에 한 번. 효모 냄새가 나는 빵 몇 조각.
실리콘으로 만든 인형처럼, T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행동과 말이 없어지고 그녀의 존재성 또한 건조하게 말라갔다. K가 눈이 아플 정도로 쨍쨍한 태양빛 아래서 전단지를 돌리기 위하여 거리를 걸어 다닐 때, T가 그 좁고 고요한 방 안에서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추측은 할 수 있었다. 그녀는 분명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려는 것 마냥. 치명적인 태양의 열파 속에서 땀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가끔 K는 뭔가가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T가 K의 집에서 살게 된 이후부터, 그는 자신이 세계와 맺고 있던 관계가 서서히 바뀌어가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니 바뀌었다기보다는 차라리, K와 세계의 관계 사이에 무언가가 끼어들어온 것 같았다. K는 이름도 붙이지 못할 무엇인가가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것을 지각할 수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T 때문이리라고 K는 생각했다. 확실하게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녀는 K에게 은밀하면서도 치명적인 방법으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K는 심지어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까지 했다. 내가 무얼 잃어버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종종 그렇게 되뇌었다. 그의 생활자체는 T와 만나기 전이나 후나 별다를 게 없었다. K는 일거리를 갖게 된 날부터 그랬듯이 늘 아침에 일어나 거리로 나섰고, 사무실의 키 큰 남자에게서 이천 장 가량의 전단지를 받아 가방에 넣고서 온 도시를 돌며 그것들을 오만 가지 벽과 전봇대 따위에 붙이고 다녔다. 그리고 이른 저녁 무렵이 되면 아직 손에 남은 백 장 하고도 수십 장의 전단을 들고 사무실로 돌아가 남자에게서 품삯을 받고, 그 돈으로 저녁 끼니를 해결한 뒤 집으로 가는 것이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잠을 자기 위해 돌아가는 집에 인형 같은 여자 하나가 머무르고 있는 것뿐이었다. 대화조차 하지 않는 말 없는 두 사람. 그런데도 K에게는 그의 생활 심장부에 있는 가장 중요하고 무거운 것이 뒤바뀐 것처럼, 사라진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K는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집으로 돌아오면 깊디깊은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는 T와 함께 말이다.
가끔 저녁 해가 긴 날이면 K는 자신의 매트리스 위에 앉아, 거의 쓰러져있다시피 하며 벽에 기대고 있는 T를 노곤한 눈동자로 뜯어보곤 했다. 그녀의 시선은 창문에 붙박여 있었다. 하기야 어디를 봐도 다 창문 아니면 벽이니 K를 정면으로 노려보지 않고서는 창문에 시선을 두는 수밖에 없었다. K는 새삼 그녀가 아주 조용하다고 생각했다. T를 옆에 두고 있으면 침묵마저도 일종의 백그라운드 뮤직처럼 느껴졌다. 공기가 침묵의 밀도로 가득 차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K는 혼잣말도 되뇌지 않고, 밤의 장막이 창문을 가리기도 전에 어느새 잠들어버리는 것이었다. 홀로 눈을 뜨고 있는 T는 새까만 밤에도 창문을 내다본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눈꺼풀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졸음 덕분에 희미해진 정신으로 K는 생각한다. 그녀는 무엇을 보고 있을까. 그리고 어머니는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T의 존재는 K에게 있어 한없이 특별한 것이었다. 최초의 동족이자 어머니의 쌍둥이 영혼. 나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K는 잠결 속에서 쏜살같이 지나가는 사고의 편린들을 힘겹게 쫓는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나를 낳지 않은 어머니. 그가 울지 않는 것은 이미 잠들어버렸기 때문이다.
K가 잠들고 나면 이제 T가 그의 얼굴로 시선을 향한다. K의 잠든 얼굴은 납처럼 무거운 갖가지 감정들에 짓눌려 흉하게 일그러져있다. 창밖에는 하얀 달빛이 비친다. 유리창이 은색의 액체적인 광선을 발하고 있었다. T는 자신이 완전히 혼자라는 생각을 한다. 여름철의 축축한 밤공기 속에서 그녀는 K라는 남자에 대한 여러 가지 의구심을 떠올리며 그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한다. 그는 그녀의 아기를 죽였다. 왜냐하면 T 자신이 그것을 바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T의 몸을 씻겨주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주었으며, 그녀를 위해 매트리스도 사주었다. K는 T가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돈과 식사를 주고 잠자리까지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그는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대화조차 없이 그들의 동거는 성립되었던 것이다. 수동적이고 동시에 꿈같은 몸짓과 침묵으로. T는 생각했다. 생각하는 기척조차 내지 않으면서, 그녀는 자기 자신과 K에 대해서 생각했다. 이미 절벽 끝자락까지 내몰린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 수 있을 것인가? 아무런 미래도 기대되지 않는 세상은 곧 멈추고 굳어져 영원히 그 순간의 그 모습 그대로 남을 것이다. 세상은 화석처럼 경화되어, 언제까지고 우주 한구석을 부유할 것이고, 영원히 어느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못할 것이다. 모든 것이 포화되고 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올라, 비대해진 모습으로 세계는 정지할 것이다. 한여름의 태양처럼. 끓어오르는 연기처럼. 새빨갛게 녹아버린 금속처럼. 아, 이 공상들이 전부 진실이라면! 그녀는 미래가 그녀에게로 오는 것을 느낄 수 없었다. 쏟아지는 폭포수처럼 시간이 흘러간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T가 가진 것들은 전부 한계까지 부풀어 올라 딱딱하게 응고되어버렸다. 낮과 밤은 의미를 잃었고 ‘내일’이란 허구와 다름없었다. T는 자신의 내분비샘에서 임신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온갖 격정적인 호르몬이 분비되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억눌린 심정으로 육체를 저주한다. 그녀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단 한 줄의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좋겠느냐>고? 이제 그녀는 <좋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대답할 수 없다. 그래서 T는 말라죽어가는 짐승처럼 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움직이지 않는다. 그녀는 웅크린 벌레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 자신의 깊고 공허한 가슴속으로 잠수하는 것이다. 점점 더 깊이. 그녀가 세계를 잊어버릴 때까지. 혹은 세계가 그녀를 잊어버릴 때까지. 그렇게 T는 움츠러든 채로 눈을 감는다. 만약 이대로 잠든다면, 영원히 깨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신께 기도하며.
아침이 되면 K가 가장 먼저 잠에서 깬다. 아마도 그는 이 도시의 누구보다도 일찍 일어나는 사람일 것이다. K는 비몽사몽간에 몸을 일으킨다. 아직 자신이 누구고 또 어디에 있는지 잘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그는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해뜨기 직전의 새벽빛 때문에 방안은 짙푸른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매트리스 위에 주저앉은 채로 K는 조금씩 잠들기 전의 자신으로 되돌아간다. 자기 자신과 그 외 잡다한 것들에 대한 기억이 무작위하게 떠오른다. 기억해낼 수 있는 모든 것을 떠올리자 그는 약간 부어올라있는 자신의 양쪽 눈을 손바닥으로 짓누른다. K는 이제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하여 대부분 파악할 수 있었다. 그의 눈에서는 아직 완전히 털어내지 못한 잠기운과 눈물샘을 비벼대는 손바닥 때문에 눈물이 한두 방울 스미어 나온다. 「제기랄!」 K가 혀 꼬부라진 소리로 욕설을 내뱉는다. 거의 자포자기에 빠진 어조다. 그는 한참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말라붙은 눈물 때문에 눈가가 찐득거렸다. K는 손등으로 눈을 비비고 힘겹게 눈꺼풀을 열었다. 그의 눈에 잠든 T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녀는 마치 앓고 있는 어린아이처럼 웅크린 채로 잠자고 있다. K의 머릿속에는 무미건조한 상념이 흐른다. 그는 곧 자리에서 일어난다. 몸을 세우자 눈앞이 번쩍거리며 어지러운 것이 빈혈기가 있는 것 같았다. K는 생각했다. 그야 제대로 먹고 다니질 않으니 피가 부족할 만도 하다. 오늘 저녁으로는 철분이 많은 음식을 먹으면 어떨까? 그는 잠시 생각해 보았으나, 그런 잡념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머릿속에서 깨끗이 사라졌다. 빈혈 따위 어찌 되든 상관없는 일인 것이다. 그의 육체는 구역질을 곁들인 하루 한 끼의 식사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허기는 늘 K에게 먹을 것을 더 내놓으라고 으르렁거리기만 한다. 허기는 K의 기분이나 취향 따위에 아무런 관심도 없다. 그것은 그저 사납게 식탐을 표현하기만하는 짐승처럼 단순하고, 또 탐욕스러웠다. 그래서 K는 자신의 허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반항심 때문에 일부러 허기의 목소리를 묵살하기까지 했다. 그러한 면에서, 말했다시피 K에게는 자신의 영양실조 상태를 만족스럽게 생각하는 부분도 있었다. 과잉의 시대에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아사해가는 남자. 심지어 무관심과 반항으로 말미암아. 하하하! K는 시답잖다는 듯이 웃었다. 나는 일종의 사회적 심벌이라도 되고 싶은 것인가? 그의 심장 속은 고통의 감정으로 파도치고 있었으나, K는 의식적으로 그것을 억누르며 웃었다. 이제 일을 하러 나가야 했다. K는 세수를 한 뒤, 헝클어지고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현관 밖으로 나섰다. 또 하루가 시작되었다. 잠이 덜 깨어 피로한 눈을 문질러대면서 K는 되뇐다. 그는 오늘도 T를 위해 먹을 것을 좀 사와야겠다고 결심했다. 물론 그녀는 그것을 기뻐하며 받아들지는 않을 것이다. 언제나와 같이, T는 무표정한 얼굴로 음식을 한두 조각 씹어 삼킨 뒤에 당연하다는 듯이 남은 음식―손대지도 않은 것이나 다름없는―을 한구석으로 밀어놓을 것이다. 그래도 K는 그녀를 위해 음식 따위를 사들고 오고 싶었다. 그것이 K가 T에게 느끼는 감정을 표출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죽은 어머니의 앙상하던 팔을 떠올렸다. K는 그녀의 팔에 드러난 골격 때문에 생기는 음영과, 팔 거죽의 매끄럽지 못한 촉감, 파랗게 불거진 정맥 따위를 생생하게 기억해낼 수 있었다. 작은 체구와 비쩍 마른 팔다리를 가진 어머니는 보고만 있어도 생명이 지닌 선험적 비극을 지각하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었다. K는 언제나 그것이 견딜 수 없었다. 어머니의 깊고 아득한 눈. 불행을 증명하는 살갗. 벽돌색의 생활 사이에서 마모되어버린 그녀의 입 꼬리. 그가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떠올리는, 수백 수천 번도 더 보아온 이미지들. 수도 없이 보아왔고 또 느껴왔지만 그것들은 지치지도 않고 여전히 K의 정신에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그것들은 마치 낙인과도 같았다. 언제까지고 통증이 사라지지 않는 완벽한 낙인.
아침나절부터 어머니 생각이라니, 오늘도 일진 한번 좋겠군. K가 자기 자신을 향해 비아냥거리며 지껄인다. 그는 어머니의 얼굴과 함께 떠오른 죄악감을 지우려고 애를 쓰며 신경질적으로 발을 내딛는다.
「나는 죄 같은 것은 믿지 않아!」
아직 해가 완전히 뜨지 않은 탓에 그늘져있는 공기에다 대고 K는 그렇게 내뱉었다. 그는 자신이 지껄인 말이 참으로 마땅하다는 듯이 또 한 번 반복해서 말했다. 그렇다. 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스팔트가 깔린 포도 위로 쉼 없이 발걸음을 재촉하면서 그는 약간 유쾌한 기분이 되었다. K는 죄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걸핏하면 죄책감에 빠지는 자기 자신이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완전무결할 정도로 아무것도 믿지 않는데 말이다…… 양심이란 퍽도 멍청하다. 그것도 어머니가 남겨준 글러 먹은 유산 중 하나였다. 어머니가 남기고 간 발자국들 속에서 돋아나 K의 심장으로 스며든 뒤 혈액 속에 고통을 불어넣는, 제멋대로 작동하는 기계장치. 심지어 K는 그런 것을 원한 적도 없는데, 그것은 언제부터인가 당연하다는 듯이 K의 정신 깊숙한 곳에 뿌리박혀 있었던 것이다. K에게는 그것이 오로지 고통만을 목적으로 하여 존재하는 고약한 장치로만 생각되었다. 그래서 그는 늘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노력하며 살았다. 거부. 도대체 몇 천 번이나 계속해서 반복되어온 거부였는가! K는 자유롭고 싶었고 또 자연스럽고 싶었던 것이다. 아아! 그는 돌연 나지막하게 신음소리를 냈다. 그의 발걸음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은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K는 생각했다. K는 거의 뜀박질하다시피 걸으며 양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K의 입에서는 맹렬한 웃음소리와 절망스러운 신음이 뒤죽박죽으로 혼돈되어 산발했다. 어느새 지평선에서는 태양이 빠끔히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K는 이상한 눈으로 그를 곁눈질하는 통행인들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도무지 언어화되지 못하는 비명을 내지르며 자신의 얼굴을 그러쥐었다. 이제 그는 바로 사무실로 가지는 못할 것이다. 화산처럼 폭발하고 분출하는 감정을 웬만큼 추스를 수 있을 때까지 K는 사무실 주변의 거리를 맴돌며 심장에서부터 올라오는 분열된 문장들을 혼잣말로 지껄여대야 한다. 아마도 오늘 그는 평소보다 조금 늦게 업무를 시작할 것이다.
마침 K의 옥탑방에서는 T가 눈을 뜬 참이었다. 눈부신 태양빛 때문에 잠에서 깬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매트리스 위에 누워있었다. 그녀는 짜증스럽게 몸을 뒤척거리더니 방의 모퉁이를 향해 돌아눕는다. 그나마 태양빛을 등질 수 있는 위치였다. 곧 T는 찡그린 표정인 채로 다시 잠든다. 그녀는 아직 얼마든지 더 잘 수 있었다. 그녀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은 신을 원망하는 것은 앞으로 수 시간 뒤에나 일어날 일이다.
그래, T는 신을 믿었다. 그녀의 신은 잔혹하고 무관심하며 야만스러웠다. T가 신이란 마땅히 그래야만 하리라고 믿고 있는 덕분이었다. 그녀의 신은 인간들의 행복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그저 그 누구보다 강력하고 경외할만한 권능을 가졌을 따름이다. 그런데 T는 그러한 신을 당연하다는 듯이 따르고, 그의 존재를 확신하는 것이다. T는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 자신의 육체로 말미암아 알고 있었다. 인간이 손대는 곳에는 어디든 악의와 우둔함이 만개하고, 그 추악한 꽃봉오리들에게서는 불행의 꽃가루가 날린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 꽃가루들은 바람에 실려 허공을 떠돌다가 결국은 또 다른 악의와 우둔함의 꽃에 안착하여 슬프고도 역겨운 생식을 하고 씨를 만든다. 그리고 그 씨가 떨어진 땅에서는 또 하나의 절망적인 새싹이 돋는 것이다. T는 그것이 대단히 놀랍고 체계적인 순환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더 깊은 고통만을 향하여 영원히 달음박질치고 있었다. 그것은 완벽한 사이클이었다. 어떤 사악하고 뛰어난 지성이 아니라면 그러한 순환 과정은 만들지 못할 것이라고 T는 생각했던 것이다. 그녀는 아주 강력하고 초월적인 힘을 가진 보이지 않는 손을 상상했다. 상상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는 그 존재를 느낄 수도 있었다. 우주 어딘가에는 인간들을 불행의 쳇바퀴 속으로 밀어 넣은―아니, 인간 그 자체가 바로 불행의 쳇바퀴였다, 그러한 인간을 건축하고 생명과 의지를 불어넣어 대지와 천공 사이의 비좁은 틈에 끼워 넣은 누군가가 있었다. 그녀는 그의 취향이나 사고방식 따위는 조금도 이해할 없었지만, 아무튼 그에게 완전한 권력이 있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나의 머리 꼭대기 위에서, 모든 것을 창조하고 불행을 뿌려놓은 뒤에 무심한 얼굴로 관조만 하고 있는 주(主)여! T는 자신이 신을 발견했음을 알았다. 그녀는 신에게 기도를 드릴 수도 있었다. 비록 그가 T의 소망 따위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세상의 고통을 창조하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더라도 말이다. T는 온 누리에 신의 악의에 찬 숨결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신의 권능을 느낄 수 있었고, 세상 모든 일이 그의 잔악하고 심술궂은 마음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보고 경탄했다. T는 신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신에게 기도를 올리고 자신의 신앙으로 삼았다. 그는 절대로 내 행복을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통상적인 종교인들이 하듯이 신에게 자신의 소망을 읊고 그 절대자를 찬양했으며 자기 삶의 의지로 삼았다. 기묘하게도, 모든 불행의 근원이 저 하늘 위에 있고 그것이 절대적인 권력자라는 생각은 T에게 모종의 위안이 되는 것이었다. 신은 T에게 그 어떤 영광도 행복도 약속하지 않았다. 그 신이야말로 그녀의 아버지였고 상전이었으며 또한 세상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녀는 너무나도 광막하고 구분지어지지 않는 문제를 단순화시킴과 동시에 절대화시킴으로서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 역시 여자였던 것이다. T는 아침 특유의 불안하게 흔들리는 공기의 냄새 때문에 몇 번이나 수면과 기상의 경계선에서 정신없이 눈을 뜨긴 했지만, 매번 잠기운에 휩쓸려 다시 잠들고 말았다. 자는 것이 가장 나았다. 통제조차 되지 않는 무의식의 한복판에 의식을 던져 넣는 것이 가장 마음 편한 일이었다. 맨 정신으로 세상과, 다시 말하자면 ‘T의 세상’과 마주보고 있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 그 무엇보다도 힘든 일이었다. 고통이 자신의 정신을 좀먹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녀는 눈을 뜨고 있고자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세상 앞에서 T가 할 수 있는 것은, 운명적이고 절대적인 패배를 똑똑히 알면서도 그저 버티고 서있는 것 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 점에 있어서 K와 T는 확실히 닮은꼴이었다. 이제는 모두가 알듯이 K 또한 너무나도 무거운 비극 밑에 내려눌린 사람인 것이다. 그 꽉 막히고 조금도 다리 펼 곳이 없는 관념 속에서 K가 찾을 수 있었던 유일한 숨구멍은 오직 광기뿐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T는 어떤가? 그녀는 잠을 자고 있다. 그녀는 꿈속에서 살고 있었다. 괴로운 기억도 적의로 가득한 세상도 꿈속에서는 전부 얇고 쉽게 부스러지는 비현실에 지나지 않았다. T는 꿈이 현실을 먹어 치워버리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녀는 깨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신에게 기도하고, 또 조금의 저항도 없이 수많은 시간을 뜨뜻미지근한 잠기운에 흘려보내는 것이었다.
그때 K는 자신의 얼굴 위로 흠뻑 쏟아져 내리는 액상의 태양광선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그는 요즘 자신의 몸에 피가 모자란 것 같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마치 납덩이로 내려치는 것 같은 햇빛이 K의 두 눈과 골통을 두들겨대자 도무지 견딜 수가 없는 것이었다. 까딱하면 쓰러져버릴 것 같다는 생각에 K는 비틀거리고 절룩거리면서 앉을 곳을 찾아 허공을 더듬으며 걸음을 옮겼다. 이미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농후한 햇빛이 그의 시야를 가로막아버린 것이다. K는 전단지가 가득 들어있는 가방 하나를 어깨에 메고 있었는데, 태양빛 때문에 몸에 힘이 빠져 그것마저도 놓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의 눈에는 햇빛이 만들어낸 암적색 그늘 속에서 빨갛고 노란 별들이 사방팔방으로 폭발해대는 것만 보였다. K는 마침내 자신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 햇볕으로 된 쓰나미가 K의 정신을 송두리째 쓸어 가버린 것 같았다. 그는 당장이라도 주저앉아버릴 것 같았지만 시간감각조차 마비되어서 자신이 얼마나 서있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폭염! 불에 달군 철판처럼 하얗게 백열하는 하늘과 열기로 아우성치는 돌들의 틈바구니에서 K는 그 무엇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여기가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K는 빛으로 틀어 막힌 어둠 속에서 손을 휘저으며 되뇌었다. 그러다가 그는 드디어 앉을만한 반석을 하나 찾아냈는데, 손으로 짚어보니 화상을 입을 정도로 뜨겁게 달궈져 있었다. 그래도 K는 그 위에 무너져 내리듯 주저앉았다. 바지를 투과해 올라오는 열기 때문에 엉덩이가 화끈거렸지만 일어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이제 가만히 앉아서 시야와 제정신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K의 귓바퀴에서는 햇빛이 발광하는 소리가 쨍쨍거리며 맴돌았다. 그는 비 오듯이 흘러내리는 땀들이 이마와 광대뼈, 그리고 입가를 거친 뒤 턱 끝자락에 모여서는 방울지며 마구 떨어지는 것을 촉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 피부 위에 찰싹 달라붙어있었다. 이러다가 미라처럼 수분이 전부 빠져나가버린 채로 말라죽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로 땀이 매섭게 흘렀다. K의 눈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그는 봉사가 된 기분이었다. 아니 실제로 그는 지금 봉사나 다름없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미 말했다시피 K는 열파의 소용돌이 속에서 시간감각마저 잃었던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K는 자신의 눈 안쪽에서 흰색과 붉은색의 빛이 깜빡거리며 점멸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머릿속을 울려대던 날카로운 소음들도 점점 기세가 약해지고 있었다. 그는 신선한 바람이 아주 잠깐 자신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땀으로 젖은 옷은 조금씩 식어가고 있었고, 열기 때문에 미친 듯이 튀어대던 땅바닥도 이제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었다. K는 시야가 돌아온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눈에는 짙은 주황빛으로 물든 세상이 보였다. 시간은 어느새 백열하던 정오를 지나 저녁으로 접어든 것이었다. 황혼이 도시의 지붕 위로 밀려들고 있었다.
K는 자신이 지금까지 어느 주택의 현관 앞에 깔린 두 단짜리 돌계단 위에 앉아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딱딱한 곳에 앉아있었던 탓인지 둔부의 뼈들이 지끈거렸다. 그는 머쓱한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을 뛰어넘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K는 살인적으로 쏟아지는 햇빛 때문에 눈앞이 아뜩해지는 것을 느끼며 비틀대고 있었는데, 그 중간과정은 전부 잘려 나가버리고 어느새 자신은 저녁노을 속에서 멀거니 앉아만 있는 것이었다. 비척거리면서 일어서자 K는 한쪽 어깨에 묵직하게 무게가 실리는 것을 느꼈다. 어깨에 멘 가방 때문이었다. 그 안에는 본래 지금쯤이면 도시 곳곳에 붙어있어야 했을 전단지들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K는 곤혹스러웠다. 그는 오늘 오전밖에 일을 하지 못한 것이다. 감시자가 없는 일이기 때문에 이런 일도 생길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의도적으로 농땡이를 친 것은 아니지 않은가? K는 생각했다. 그렇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햇빛 때문에 눈 깜빡하는 사이 반나절이 지나가버린 게 어떻게 내 탓이 될 수 있겠는가. 불가항력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항력적이었든 아니었든 K는 상황을 해결해야만 했다. 그는 낡은 가방 안에서 전단을 전부 끄집어냈다. 약 천 부가 좀 덜 되는 양이었다. K는 그것을 전부 어딘가에 묻어버리거나 불태워버린 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사무실의 키 큰 남자에게 갈 수도 있었다. 아니, 전부 없애지는 않고, 한 팔십 부 정도를 남겨서 그 남자에게 돌려주며 <오늘은 이만큼 남았습니다>라고 뻔뻔한 얼굴로 거짓말을 한 뒤 일당을 챙겨 나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K는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도덕이라든가 양심이라든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는 그저 돈 때문에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만일 K가 그러한 야비한 거짓말로 보수를 챙긴다면, 그는 필시 자기 자신을 고작 재물 따위에나 집착하는 노랑이로, 너절한 속물로 느끼게 될 것이었다. 그것은 불쾌한 일이다. 사실, K는 사무실에서 일당을 받고 나올 때도 늘 약간의 불쾌감이랄까 죄책감 같은 것을 미약하게, 윤곽이 있는 감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뉘앙스만으로 만들어진 근거도 논리도 없는 감정으로 느끼곤 했던 것이다. 무엇이 마음에 덜 차는 것인지는 명확하게 말할 수 없었다. 다만 그는 자신이 돈을 챙겨 나올 때마다 <이것은 아니다>라고 막연하게 느낄 수만 있었다. 그 돈으로 음식을 사 먹을 때도, T를 위해 빵을 살 때도 그러한 감정은 끈질기게 K의 심장 한구석에서 꿈틀거리며 자기 존재를 의식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돈을 벌고 또 그것을 써야만 했다! 모든 사람들이 살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 K는 자신이 대체 무엇에 대해 불만을 가진 것인지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고고해지고 싶은 것일까?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건들에 K가 그리 쉽게 가담하는 편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말할 수 있겠다. 그가 고독하다는 것 또한 명백한 사실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그것은 K 자신의 의지 때문은 아니었다. 그것은 생득적이고 선험적인 조건들 덕분에 강제로 조성된 상황이었다. K가 세상과 함께 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세상으로 향할 때마다 결국에는 하릴없이 튕겨져 나와야만 했기 때문이고, 고독 또한 마찬가지였다. 말하자면 그는 부적격자인 것이다. 그는 달팽이처럼 자신의 추하고 부서지기 쉬운 껍질 속으로 움츠러드는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K는 그 속에서 더듬이처럼 예리한 시각을 얻을 수 있었지만, 그의 정신에 선 날이 날카로워지면 날카로워질수록 동시에 껍질의 두께도 두꺼워지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광기라고 부른다. 그가 ‘바깥으로부터 온’ 지폐를 손에 쥘 때마다 당혹스러워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들이 그 종이 조각을 생명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K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주어진 규칙이 도대체 무엇에 근거하는지도 알지 못하고 강제로 게임에 참여하게 된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는 게임을 진행하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이 왜인지는 절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K는 꺼내든 전단지들을 짐짓 장수를 세는 척하며 팔락거리다가 다시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는 묵직한 황혼의 파도가 넘실거리는 공기 중에서 소리도 내지 않고 입속말을 중얼거린다. 오늘, 빛의 장막 속에서 오후시간을 전부 잃어버린 오늘을 어떻게 끝맺어야 할 것인가? 내가 타인에게 받아야만 하는 것들이 유난히 귀찮고 진절머리 나게 느껴지는 날들이 있다. 나는 사실 빈손이라도 괜찮은데 말이다. 전부 억지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던가? 그러고서 K는 사무실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발걸음을 뗄 때마다 절룩거리게 되는 오른쪽 다리가 유독 뻑적지근하니 아파왔다.
사무실에 도착하자 그곳에는 언제나처럼 키 큰 남자가 있었다. 그는 여느 때와 똑같이 사무실 구석에 놓인 책상에 달라붙어 서류 위에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끼적이고 있었는데, 인기척이 들리자 문 쪽으로 힐끗 시선만을 향했다. 사무실은 온통 천장에 닿을 듯 높게 쌓인 전단지와 광고지들로 가득했는데, 문간에 엉거주춤하게 서있는 K를 발견한 남자는 벌떡 일어나더니 그 사이를 위태위태하게 건너와 K 앞에 섰다. 그리고 그 키 큰 남자는 전날에도 그랬고 전전날에도 그랬듯이 재킷 속주머니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 무심한 태도로 K에게 건네는 것이었다. 전날에도 전전날에도 K는 고개를 꾸벅거리며 그것을 받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는 남자가 건네는 지폐다발에 눈길도 주지 않고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벗어 남자에게로 내밀었다. 그리고 남자가 어리둥절하여 가방을 받아들자마자 K는 곧바로 몸을 돌려 도망치듯이 바쁜 잰걸음으로 사무실 밖으로 절뚝절뚝 걸어 나가는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등 뒤에서 K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는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발걸음만 재촉할 뿐이었다. K는 건물에서 빠져나온 뒤에도 한동안 뛰듯이 걸었다. 키 큰 남자가 쫓아올 가능성이 있는 거리로부터 얼른 멀어지려는 것이었다. 그는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 키 큰 남자에게 한마디쯤 변명을 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곧 그 생각을 깡그리 털어버리려는 듯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 사람을 대하는 요령이 없다는 것은 K 자신도 동의하는 사실이었다. K는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옥탑방의 현관은 일종의 국경이나 마찬가지라고 K는 어스름한 황혼 속에서 생각했다. 매일 아침 방에서 걸어 나올 때마다, 그는 자신이 공기의 냄새마저도 낯선 외국으로 내동댕이쳐지는 것 같다고 느꼈던 것이다. 도시의 대기는 마치 네온사인처럼 금속적인 빛으로 번쩍거렸고, 도무지 익숙해질 수 없는 불안한 냄새가 사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언제는 안 그런 적이 있던가? 없었다. K가 거리에서 살 때에도 도시는 지금과 마찬가지였다. 단 한 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고, 무언가에 기대어 잠들 수도 없는 낯선 땅. 도로 위에 즐비하게 늘어선, 시멘트로 만들어진 얼굴들은 K를 향해 위협적인 무표정을 내보이고, 그들의 시선은 K를 영원한 이방인으로 만든다. 불투명한 유리로 덮어씌운 건물들은 사람들을 향해 메마른 빛을 마구 뿌려대며 이 도시를 지배하고 있는 멸망이라는 결말을 증명한다. 하루 종일 거리 곳곳을 맴도는 공허한 소음은 K에게 마치 버릇과도 같은 불안과 불신을 안겨준다. 그렇다, 도시는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었다. 이곳은 여전히 당장이라도 부서지고 무너져 사라질 것처럼 위태로웠으며, 소용돌이치는 용암처럼 혼탁하고 모든 것이 끈적끈적하게 뒤엉켜 있었다. 바뀐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K 자신이었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K 말이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니? K는 깜짝 놀라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것이 언제부터 나의 <집>이었던가? 그는 분수처럼 솟구칠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열광적인 감정을 심장의 그늘 밑에서 발견했다. 자칫하면 감정이 눈을 통해 뿜어져 나올 것이다. K는 자신의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의 뇌리에는 돌연 T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의 입술 속에 파묻혀있는 절망을 K는 사진처럼 명백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T가 나에게 집을 만들어 주었는가? K가 중얼거렸다. 태양으로부터 해방된 지면이 이제는 써늘하게 식은 공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저무는 햇빛과 푸르스름하게 빛나기 시작하는 어둑한 공기의 교차점에서 K는 문뜩 나지막하게 고함을 질렀다.
「T!」
이곳은 외국이다. 낯모르는 토지다. 휑뎅그렁한 세계다. K는 주문을 외우듯이 혼잣말을 중얼대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집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 어느 곳도 아니었다. K는 걸음에 취한 것처럼 걸었다. 그에게는 시간이 필요했고, 또한 충분한 공간도 필요했다. K는 계속 걸었다. 정말이지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처럼 그는 광적으로 걸었다. 절뚝절뚝거리면서 미친 듯이 말이다. K의 눈은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쫓듯이 뒤룩거렸다. 누구든 지금의 K와 마주친다면 단숨에 그를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 정도로 그는 열중해 있었다. K는 말로 다하지 못할 감정이 가슴 속에서 철장에 갇힌 맹수처럼 사납게 몸부림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 자신의 심장부를 움켜쥐었다. 할 수만 있다면 양손으로 늑골을 잡고 뜯어내어 문처럼 활짝 열어버리고 싶었다. K는 오직 감각하기만 할 뿐, 명백하게 형태 지어진 ‘말’을 내뱉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는 되다만 언어들만 계속 허공을 향하여 외쳐대는 것이다.
하늘은 이미 짙은 보랏빛이 되어 있었다. 황금빛 그늘 속에 숨어있던 햇살조각들도 자취를 감추었고, 이제 땅 위에 빛나는 것이라고는 울적한 빛살을 내뿜는 가로등의 필라멘트뿐이었다. 어지간히도 정신없이 걷는 바람에 자신이 도시의 어디쯤에 와 있는지도 알 수 없게 된 K였지만, 지금은 그따위 것에 신경 쓸 처지가 아니었다. 그는 폭발할 것 같은 마음을 끌어안고 걷느라 너무나도 바빴던 것이다. 만일 그가 발 디디고 있는 곳이 옥상이었다면 K는 또 한 번 전처럼 뛰어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딱딱한 포장도로 위를 걷고 있는 것이었다. 자해? 자해도 좋다. 나는 또 벽에 머리를 박아대거나 스스로의 가슴을 난도질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걷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양쪽 갈비뼈를 움켜쥔 열 개의 손톱들이 가죽을 파고들었지만 그런 하잘 것 없는 통증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밤바람에 가로수의 잎사귀들이 사락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다. 가로등의 노란 불빛은 나무 그늘의 틈새로 스며들어 녹진하게 빛살을 흘리고 있었다. K는 그림자와 빛을 밟으며 도시 속을 헤매었다. 광적인 감정과 지독한 피로가 칵테일처럼 뒤섞여 그의 몸속을 흘렀다. K는 도무지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지만 그와 동시에 당장이라도 다리가 풀려 쓰러질 것 같았다. 밤은 점점 깊어갔고, K의 내면에 새겨지고 있는 상처들도 점점 더 진한 피를 내뿜었다. 집으로, 집으로. 그가 되뇌었다. 집으로, 집으로. 피로 때문에 가라앉고 갈라진 목소리였다. 내 고향. 내 왕국. 내 피가 흐르는 땅. K는 갈구하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목마른 개처럼 헐떡거렸다.
공기 중에서는 여름밤 특유의 눅눅한 냄새가 풍겼다. 무척이나 사람을 우울하게 만드는 냄새였다. K는 여름밤의 냄새를 맡을 때마다 매번 자신의 어린 시절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이제는 죽어서 없어진 아버지와 어머니가 젊은 모습으로 살아있고,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였던 시절 말이다. 그것은 굉장히 오래된 과거였다. 그러나 그마저도 행복한 기억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에 대한 K의 기억은 전부 습기가 차고 모서리가 뭉개져 있어서 명료한 것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시절을 지배하던 하나의 뉘앙스만은 지금도 느낄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우울이었다. 그토록 젊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신은 아직 아무런 죄악도 저지르지 않았던 때였는데, 그 시절도 K의 머릿속에서는 말 없는 슬픔으로만 기억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K는 여름밤을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의 유년을 떠올리게 만드는 그 냄새는 동시에 절망의 불변성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어느새 K의 걸음걸이는 눈에 띄게 느려져있었다. 치명적인 피로가 그의 심신을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게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게다가 그 울적한 여름밤의 냄새가 끊임없이 K의 입과 코를 통해 기어들어와 정신을 좀먹고 있었다. K는 <아아>하고 탄식하며 힘없이 고개를 휘저었다. 그의 영혼은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너무도 예민했다. K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알고서 살아가는 것이었다. 이 더운 계절, 그는 매일을 그렇게도 고통스러워하면서 살아간다. 마침내 K는 어느 지저분한 골목 구석에 쓰러지고 말았다. 아직도 정신은 계속해서 어딘가를 향해 달음박질하고 싶어 안달이었지만 이제 K에게는 그럴 힘이 없었다. 그는 불만족하면서 쓰러졌다. 울퉁불퉁한 돌바닥이 K의 엉덩이에 배겨왔다. 그는 등 뒤에 벽을 두고 기대어 앉아있었는데 곧 상체마저 옆으로 넘어지며 누워버렸다. 땅에서는 돌멩이와 물의 냄새가 났다. K는 무표정한 채로 땅에 누워 초점 없는 눈을 껌뻑였다. 그는 아무런 생각도 하고 있지 않았다.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그저 불만족과 슬픔을 막연하게 느끼면서 눈만 껌뻑거렸다. 한마디의 욕지거리도, 한 방울의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K는 이내 눈을 감아버렸다.
T는 불안하게 방 안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잠에서 깨어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일이었다. 그녀는 밤이 깊어서야 드디어 잠에서 깬 것이다. 창문을 통해 어둠과 뒤섞인 도시의 불빛이 방 안으로 기어들어오고 있었다. 달빛은 보이지 않았다. 먹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있는 것이었다. 여하간 T는 잠에서 깨었을 때, 무엇인가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K의 부재였다. 지금까지 K는 해가 지는 시간이면 늘 집 안에 있었다. 그는 자신의 매트리스 위에 앉아서 반쯤 감긴 눈으로 창밖의 노을을 내다보거나, 공허한 눈동자로 T를 스쳐보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미 밤이 깊은지 오래 되었는데도 K는 돌아오지 않은 것이었다. T는 불안한 기분이 되어 현관 주변을 서성거렸다. 그녀는 자신이 왜 이토록 불안한 감정에 빠져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는 자신이 이 밤에, 달도 별도 뜨지 않은 묵직한 심야에, 자신의 아기를 죽여준 남자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무척이나 마음에 걸렸다. 생각해보면 그녀는 매일 저녁마다 빵을 사들고 옥탑방으로 돌아오는 K를 보며 일종의 안도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도 같았다. T는 자신이 임신을 하기에는 너무나도 어렸던 시절을 K와의 동거생활에서 어슴푸레하게나마 발견했던 것이다. K가 특이한 사람이라고 T는 생각하였다. 그는 결코 T에게 무언가를 캐묻는 일이 없었다. K는 오로지 T의 침묵을 긍정하고, 자신 또한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그녀가 그녀 좋을 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는 임신에 대해서도, 자기 손으로 죽여야만 했던 아기에 대해서도, T가 왜 아무 말 없이 그의 집에 눌러앉아 살기로 결정했는지도 묻지 않았다. T가 말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된 것이었다. K는 거의 무관심이라고 불러도 좋을만한 태도로 T에게 그 어떠한 영향력도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한 태도는 T에게 굉장히 신선한 것이었다. 그녀가 알기로는, 모든 남자들은 여자를 자신의 조각물로 만들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K는 T에게 그 무엇도 요구하지 않았고 또 그녀에 대하여 알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그것은 T에게 있어 완전한 긍정이나 다름없게 느껴졌다. 그녀는 그 점이 감동적이라고 생각했다. T가 온종일 하는 일이라고는 침묵하는 것과 잠을 자는 것밖에 없었지만, K는 점차 확실하게 그녀의 생활 속 일부로 자리 잡아 왔던 것이다.
아무튼 T에게 있어 K의 존재란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K를 그녀는 잃어버린 것이다. T는 무턱대고 겁부터 집어먹었다. 또 주님의 장난질이다! 그런 것이 틀림없다. T는 산만한 발걸음으로 방 안을 헤매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의 신은 늘 그것이 마치 취미라도 되는 듯이, T가 절망하도록 하거나 무언가를 상실하게 만들곤 했던 것이다.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 그녀는 무슨 사건만 생기면 버릇처럼 신의 이름을 공포와 함께 부르곤 했다. 아무래도 신은 T를 훼손하고 절망적인 구렁텅이 속으로 밀어 넣는 짓에 재미를 붙인 것 같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늘 그랬던 것이다. T는 이미 잃어버리고 빼앗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T의 가슴은 답답하게 죄어오고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그녀는 조급해진 마음으로 손톱을 물어뜯으며 발을 동동 구를 뿐이었다.
T는 혼잡한 머릿속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그저 앉아서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럴 수 있을 만큼 차분하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직접 찾아 나서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T는 그렇게 쉽게 문을 박차고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맡길 수 있는 모든 것을 K에게 맡겨버리고 인형처럼 살아온 그 짧은 기간 새에 그녀의 마음에는 두려움이 피어버린 것이다. 저 바깥세상이란! K가 만들어준 울타리 속에서 T는 굳이 바깥으로 나갈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살 필요조차 없었다. 그래, 그것이 K가 해준 일이었다. T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살기위해 발버둥치거나 사방팔방에서 화살처럼 쏟아져 내리는 고통들 사이에서 이를 악물고 견디지 않아도 되었다. K는 T에게 햇살로 된 정신의 마비를 제공했고 한계 없이 나태할 공간을 주었다. 그렇다. 그녀는 생각했다. K는 T를 그녀의 신으로부터 빼돌려준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T는 K를 잃어버리고 심지어 자신의 발로 현관문 밖으로 나서야만 했다. 그녀의 눈에는 창문 밖에 드리운 어둠 속에 온갖 위협과 날을 세운 악의들이 우글우글하게 도사리고 있는 것처럼만 보였다. T는 신경질 가득한 목소리로 째지듯이 외치고 싶었다. 도대체 내게 뭘 바라는 것이냐고. 그녀는 발전도 진보도 변화도 다 필요 없었다. 그녀는 다만 쉬고 싶었다. 자신의 그늘진 눈을 감고 언제까지고 쉬고 싶었다. 그러나 도무지 내버려두지를 않는 것이었다. 그녀의 신이, 세상이, 온갖 조건들이 말이다.
경계선 한복판에 내던져진 시점에서 이미 고통은 찾아온 셈이다. T는 이제 울어야할지 화내야할지 곤혹스러운 기분으로 현관 앞에 서있었다. 다시 바깥세상으로 발을 들이는 것은 죽기보다 두려웠다. 죽음? 그래, 차라리 죽음이 더 나았다. 그것이 참으로 종언이라는 확신만 있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흔쾌한 마음으로 죽었을 것이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목을 매달고 건물 꼭대기에서 뛰어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무슨 일에나 그녀의 신이 능청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죽음도 믿을 수 없었다. 그것도 신의 악의 가득한 함정이 아니리라고 누가 확언할 수 있으랴? 정말이지 T는 어쩔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하여간 그녀는 이제 선택을 해야 했다. 아니, 선택을 해야만 하도록 강제당하고 있었다. 비참. 그러한 한마디의 단어가 그녀의 가슴 속을 가득 메웠다. T는 손을 내뻗어 철제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까맣게 물든 하늘에서는 이따금 철판이 우그러질 때나 날법한 소음이 나직하게 울려 퍼지곤 했다. 비가 오려는 것이었다. 중량감이 느껴지는 먹구름들은 곧 쏟아져 내릴 듯이 머리 위에서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T는 겁먹은 발걸음으로 한 발짝 한 발짝 어두운 거리 위를 걷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오로지 걷는 수밖에는 없는 것이었다. 도시를 전부 이 잡듯이 뒤져서라도 K를 찾아내야 했다. 그런데 그 뒤에는 어쩔 것인가? 그것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T는 계속 발걸음을 옮기는 수밖에 없었다.
T가 한참을 걷고 있자 새까만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몇 번 나더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가 오는가 하고 생각할 틈도 없이 날씨는 순식간에 폭우의 기세로 변했다. 마치 누군가가 하늘 위에서 양동이로 물을 쏟아 붓는 것처럼 비는 거세게 내렸다. T는 눈 깜짝할 새에 머리고 몸이고 할 것 없이 흠뻑 젖어버렸다. 여름인데도 오한이 들고 살점이 떨어져나갈 듯이 추웠다. 차갑게 식은 피부를 빗방울이 때려댈 때마다 망치로 얻어맞는 것처럼 통증이 느껴졌다. 그런데도 T는 발을 땔 적마다 철벅거리는 물소리를 내면서 계속 걸었다. 땅과 건물 위에 쏟아져 내리는 빗소리 때문에 다른 소리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어둠과 뒤섞여 내리는 비가 시야를 답답하게 틀어막고 있었다. 비의 장막 너머로 가로등의 노란 불빛만이 아득하게 눈에 비쳤는데, 그마저도 곧 사라질 듯 불안하게 흔들렸다. T는 이제 방향감각마저 잃고 말았다. 그녀는 자신이 어디로 걷고 있는 것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시각과 청각이 전부 차단당해버린 것이었다. 사방이 까맣게 막혀, 비와 밤으로 된 입방체의 상자 속에 갇혀서 걷는 것 같았다. 이제 T의 걸음은 목적하는 곳조차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K를 찾아낸다는 것은 그야말로 드넓은 사막에서 한 알의 조약돌을 찾는 것이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물소리만이 가득한 밤거리에는 인적도 없었다. T는 혼자서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땅만 보며 걸었다. 그녀의 볼과 턱에서는 끊임없이 차가운 물줄기가 흘렀다. 가끔 가로등 밑을 걸을 때면 도로 위에서 마구 튀어대는 노란 빛살을 볼 수 있었다. 땅바닥에는 꽤 두께가 있는 수면이 형성되어 있었다. 폭우로 거리의 골목골목마다 작은 하천들이 생겨난 것이었다. 그것들은 T의 발치에서 하얀 물살을 일으키며 마구 흘러넘쳤다. T는 자신이 도시규모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 잠겨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그녀는 빗줄기 사이로 보이는 저 길모퉁이를 아까도 본 것 같았던 것이다. 거리 곳곳을 핥으며 도시를 휘감는 물줄기와 빗살에 이끌려 T는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도는 기분이었다. 흙탕물과 역류하는 하수도의 오물이 그녀의 발길을 잡아끌며 점점 더 오리무중의 골목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절망하고 있었다. 이제 그녀의 머릿속에는 K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없어진지 오래였다. 그래도 T는 계속 걷는 것이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게 뭐란 말인가? 이것이 삶의 본모습이다. T는 빗물에 흠뻑 젖은 정신으로 자포자기해서 그렇게 생각했다. K는 어디에 있을까? 그리고 나는 왜 그를 찾아 헤매고 있는가? 비오는 여름밤의 습기 찬 추위 때문인지 몹시 혼미해진 머리로 T는 방황했다. 세찬 물살이 그녀의 맨발을 훑으며 더 낮은 지역으로 쓸려 내려가고 있었다.
그랬기에 길거리에 쓰러져있는 K를 발견했을 때 누구보다 놀란 것은 다름 아닌 바로 T 자신이었다. 이것이 최초의 기적이로구나. 그녀는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내어 말했다. K는 빗물이 흐르는 콘크리트 바닥에 한쪽 볼을 묻고 누워있었다. 지저분한 물결이 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그의 반신을 계속해서 씻어내고 있었다. 빗물은 반쯤 벌려진 K의 입속으로 소용돌이치며 드나들고 있기도 했다. 그는 옆으로 쓰러진 탓에 간신히 익사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계속되는 폭우로 포장도로 위에 형성된 하천의 수위가 점점 높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 K의 콧구멍 속으로 빗물이 내리 닥칠지 모르는 일이었다. T는 어둠과 물의 홍수 속에서 불안한 얼굴로 K를 향해 급히 달려왔다. 그녀는 차갑게 식은 손으로 마찬가지로 파랗게 얼어붙은 K의 얼굴을 받쳐 들었다. 빗물로 번질거리는 그의 얼굴은 오랫동안 물속에 잠겨있던 탓으로 당장이라도 뼈에서 살점이 떨어져나갈 듯 냉랭했다. 그 꼴이 되도록 깨어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T가 보기에 K는 가늘게 눈을 뜨고 있는 듯도 싶었으나 실제 그는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K의 심장이 있는 곳은 벌써 돌처럼 단단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T는 바닥에 주저앉아 그의 상체를 안아들었다. K의 몸과 옷이 머금고 있던 빗물들이 일제히 T에게로 흘려내려 스며들어왔다. 그녀는 힘없는, 그러나 추위 때문에 단단하게 오그라든 K의 몸이 무엇인가를 거의 완전히 포기해버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T는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깜깜한 밤, 어둠 속에서 비는 계속해서 후둑후둑 떨어지는데 그들은 완전히 격리되어 있었다. 마침내 T는 정신없이 K를 껴안았다. 차디찬 살들이 맞부딪히고 부대꼈다.
「뛰어라, 뛰어라, 박동해라. 다시 한 번 한여름 폭염처럼 울려 퍼져라.」
그녀가 중얼거렸다. 세게 휘둘러 친 징처럼, 새빨갛게 달궈진 철판처럼 울려라. 그대의 심장은 항상 미치광이처럼 펄떡거리지 않았는가? 늘 광증으로 가득하여 주체할 수 없이 사방으로 내달리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런데 지금 K의 가슴은 너무도 딱딱하게 잠들어 있었다. 그는 죽었는가? 그것은 아니다. 그러나 K의 생명은 틀림없이 좌절해있었다. T는 그저 하릴없이 그를 안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K의 가슴 속에 매듭지어진 돌로 된 밧줄이 풀릴 때까지 말이다.
어느새 빗발이 약해지고 있었다. 여름의 소나기가 그러하듯 갑자기 시작된 폭우는 기세를 잃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이제 하늘에서 내리는 것은 엷은 안개처럼 미세한 빗방울뿐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포도 위에는 급류가 휘몰아치고 있었고, 또 혼란스러운 물소리가 사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아직 밤이었다. 비 내린 후의 구름 때문에 하늘에는 별도 보이지 않았다.
「무얼 하고 있어?」
그 와중에 가느다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미약한 목소리가 피어올랐다. K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들은 T는 잠에서 깨듯 퍼뜩 고개를 쳐들고 감탄이 담긴 눈빛으로 K의 두 눈을 쳐다보았다. K는 여전히 T의 두 팔 안에 안겨 있었고 몸에 힘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가슴은 다시 박동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당신이 죽는 줄 알았어요.」
T의 말에 K는 다소 느린 템포로 웃더니 읊조리듯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치광이의 장점은 죽지 않는다는 것이지.」
그리고 그들은 침묵한 채로 가만히 있었다. 가랑비가 그들의 옷소매를 계속해서 적셨다. 흠뻑 젖어서 무겁게 흘러내려있는 K의 머리칼을 문뜩 T가 한손으로 쓸어 넘겼다.
「우리, 이야기를 해야겠군.」
K가 침묵을 깨며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 체온이 느껴지거든.」
그러면서 그는 T의 눈동자를 보았다. 깊은 좌절과 절망적인 애정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K의 가슴 속에서 애잔한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 결국에는 파멸하고 말 것이다. 그는 그녀가 무언가를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줘야만 했다. 그러나 K의 표정은 아직 굳건하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이윽고 그는 입술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중년남자가 있어.」
「네?」
「중년남자. 당신은 보지 못했던가? 내 친척이야. 내게 집을 빌려준 사람. 좋은 사람이지. 친절한 사람이야. 친척이라는 이유만으로 돈 한 푼 없는 내게 집을 주었거든.」
T는 K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인지 짐작할 수 없었지만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었고, 그 위를 흐르는 물살 덕분에 발과 무릎 따위가 시렸다. 그 때문인지 K는 사이사이 나직한 기침을 내뱉으면서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 남자에게 거짓말을 했어. 그가 내게 어머니에 대해 물어봤는데, 거짓말을 했지. 겁이 나서 그랬을까? 나도 잘 모르겠어. 당시에는 무척 담담하게 말했거든. 사실, 내가 한 말만 두고 보자면 거짓말은 아니었지. 다만 나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숨긴 채로 말했고, 그는 그게 무엇인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겠지. 그러니까 거짓말을 한거나 다름없는 거야.」
「당신 어머니가 어떻게 되었는데요?」
곧이어 K가 몇 번인가 입술을 뻐끔거리다가 마침내 내뱉었다.
「내가 죽였어.」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적막 속에서 철썩거리는 물소리만 흘렀다. 그리고 이번에 침묵을 깬 것은 T 쪽이었다.
「왜요?」
그녀의 질문에 K는 약간의 간격을 두고 대답했다.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고민하다가 억지로 말을 내뱉는 어조였다.
「그때도 동네 사람들은 나를 미치광이라고 불렀지.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는 놈이라고.」
「어머니를 증오했나요?」
「사랑했던 만큼이나.」
「어떻게 죽였죠?」
「목을 졸라 죽였지. 당신 아이를 죽였을 때처럼. 그리고 되는대로 집안에 시체를 숨기고 도망쳤어. 무작정 도망쳤지. 그리고 이 도시에 왔어.」
K는 추위 속에서 한숨을 쉬었다. T의 눈동자는 여전히 부드러움을 품고 K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신은 내 어머니를 닮았어. 특히 눈동자 속에 뿌리 깊게 박힌 원망의 감정이.」
「그 이야기는 처음 만났을 때도 들었어요.」
「그래. 그리고 그날 나는 당신의 아이를 죽였고.」
「왜 그랬죠?」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나 자신을 목 졸라 죽일 유일한 기회. 그리고 어머니인 당신이 그것을 원하기도 했고. 그 아이는 어머니를 퍽 잘 만난 셈이지.」
말하면서 K는 바지 위로 자신의 다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거품을 일으키며 하수도 속으로 쏟아져 들어가고 또 역류해 올라오기도 하는 차가운 빗물 속에 오랫동안 잠겨있던 탓으로 그의 다리에서는 감각이 거의 느껴지지를 않았다.
「당신에게는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K가 혼잣말을 하듯이 중얼거렸다. 그의 눈은 여전히 철썩이며 휘몰아치는 거리 위의 급류에 붙박여 있었다. 그는 한 가지 생각에 빠져있었다. 그것은 K가 아이를 목 졸라 죽일 때에 그의 손끝에서 펄떡거리던 생명의 박동에 대한 것이었다. K는 그것을, 죽고 싶지 않아서 세차게 반항하는 어린아이의 생명을 온전히 감각할 수 있었다. 그 감각은 퍽 감동적이기도 하고 절망스럽기도 한 것이었다. 그것은 과연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겠는가. K는 쓸쓸한 마음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것도 모를 때 죽는다는 것은 축복이다. 삶에 대해서, 그리고 세상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뒤부터는 좌절하더라도 쉬이 죽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고집 때문일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요.」
T가 말했다. 「왜 나와 섹스하려고 하지 않았죠?」
K의 눈은 이제 T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조금 당황한 듯이 보였다.
「그런 것은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K는 그녀가 무엇을 바라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T는 관계와 합일이라는 환상을 보고 있었다. K는 그녀를 충족시켜줄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었다. 그는 T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T.」
「네?」
「당신과 나는 같은 사람이 아니야.」
K의 말이 끝나자 T의 무표정한 얼굴에 하나의 표정이 퍼져갔다. 그녀는 울음을 참듯이 웃었다.
제3부
K는 사흘 밤낮을 앓았다. 그는 심한 열과 환상 속에서 자신의 몸이 헬륨풍선처럼 부풀어 방안을 둥둥 떠다니는 것을 보았다. K는 어두운 방안을 부유하며 천장에 등을 댄 채, 하늘로 날아가지도 못하고 방 속에 갇혀 초점 없는 눈으로 옥탑방 구석의 그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씩 두통 때문에 눈을 떠서 그것이 꿈이었다는 것을 깨닫기도 했지만 그 사실을 재차 생각해볼 틈도 없이 그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방안은 텅 비어 있었다. K에게는 그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방에는 K 이외에 아무도 없었다. 그는 열 때문에 부글부글 끓는 머리로 이 고독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려고 애썼으나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폭우가 그친 밤 T의 어깨에 기대어 비틀거리며 옥탑방까지 부축되어 온 것이었다. 차갑게 젖은 몸을 먼지구덩이의 매트리스에 뉘이자 마자 뒤늦은 한기가 몸속을 얼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K는 어지럼증을 느끼며 흐릿한 시야로 T의 얼굴을 바라보다 맥없이 잠에 빠져든 것이었다. 다음에 눈을 떴을 때―또 천장에서 내려다보았을 때― K의 눈에 들어온 또 하나의 매트리스에는 아무도 누워있지 않았다. 그 하얀 시트 위에는 먼지와 말없는 공허만이 묵묵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창문은 내내 어두컴컴했다. K는 사지에 힘이 빠져서 일어나 앉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고개만을 틀어서 창문 밖을 내다보았는데, 하늘은 회색조였고 그 아래도 마찬가지였다. 열에 들뜬 머리로 그는 가끔 이유도 없이 소리 내서 웃었다. 웃음소리와 함께 내쉬어진 숨결이 얼굴 위로 쏟아지면 그 이상할 정도로 뜨거운 열기를 느낄 수도 있었다. 그러다가 또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는 여전히 어디로도 가지 못하는 몸뚱이가 천장에 부딪히면서 부유하고 있었다. 환각과 오한, 그리고 열병으로 뒤범벅이 된 사흘 밤낮은 그렇게 흘렀다.
마침내 자연히 열이 내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K가 처음으로 생각한 것은 몹시 목이 마르다는 것이었다. 그는 벽면에 튀어나온 수도꼭지를 틀어 흘러나오는 냉수를 냅다 들이마시고 그대로 세수까지 했다. 여전히 어지럼증이 남아있었고 뱃속에서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공허가 느껴졌다. 목에서 위장으로 이어지는 장기가 뭉텅 잘려나가고 하얀 공백이 대신 그곳에 틀어 앉은 것 같았다. 배가 고프기도 했다. 틀림없이 그는 처참한 몰골이었다. 사흘 동안 열병을 앓는데 간병해주는 사람도 물을 떠다주는 사람도 없었고 음식이라고는 쌀 한 톨도 먹지 못했다. 살아있는 것이 용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K는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것이 신기하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정해져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는 조금 서글퍼졌다.
그 뒤 K는 몇 번이나 엉덩방아를 찧거나 앞으로 고꾸라지다가 드디어 두 다리로 일어서는 데에 성공했다. 걸음걸이가 꼬이고 보이는 것이 온통 뒤죽박죽이었지만 그는 밖에 나가고 싶었다. K는 현관문을 젖히고 바깥으로 나섰다.
하늘은 여전히 회색이었다.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었다. 그래도 물기 먹은 공기는 후덥지근하고 열기가 있었다. 그날 이후로, 비는 그쳤고 공기는 또 다시 여름의 뜨거운 열기로 달구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하늘에는 여전히 두터운 구름이 남아서 태양의 모습을 가리고 있었다. 답답한 더위가 온 도시를 짓누르고 있었다. 숨을 내쉬는 일도 어쩐지 하늘의 방해를 받고 있는 것 같았다. K는 하늘을 바라보며 옥상을 조금 서성거리다가 계단을 내려갔다. 먹을 것을 좀 구하고 싶었다.
그는 건물을 나오며 바지주머니를 뒤적였다. 기억으로는 잔돈이 몇 푼 남아있었을 터인데 손에 잡히는 것은 온통 축축한 실뭉치들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유난히 옷이 무겁게 느껴졌다. 비에 흠뻑 젖은 뒤로 제대로 말리지 않아 습기가 차있는 탓이었다. 게다가 빗물에 젖은 것을 세탁도 하지 않고 그대로 입고 있었던 덕분에 몸에서는 끔찍한 냄새가 났다. 며칠은 상한 채로 내버려둔 음식에서나 날법한 냄새였다. 자신에게서 지독한 악취가 난다는 것을 자각하자 K의 기분은 더욱 처졌다. 이대로는 길거리에서 누군가와 마주치는 것도 두려웠다. 하긴 언제는 깨끗하게 입고 다닐 수 있었느냐만, 적어도 겨울에는 옷에서 뭔가가 썩는 냄새가 날 일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건물 안에만 틀어박혀 있을 수도 없었다. 뱃속에서 계속 무언가를 먹어야만 한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돈이 한 푼도 없는데 어떻게? 도둑질이라도 하란 말인가? 그러고 보면 사흘 굶고서 담 못 넘을 놈 없다는 말도 있기는 하다. 마침 K도 딱 사흘을 굶었던 것이다. 그러나 K에게는 자기 자신을 위해 도둑질을 할 정도의 결단력이 없었다. 그렇게 필사적일만한 의지도 갖지 못하는 인간이 바로 그였던 것이다. 또한 죽는 편이 낫다 싶을 정도의 굶주림은 지금까지도 몇 번이나 겪어왔던 일 아니겠는가? 지금껏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또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K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늘진 거리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K는 한동안을 목적 없이 걸었다. 하늘은 어두웠지만 시간은 아침이었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깨어나서 거리로 나오고 있었고, 건물과 점포들에 불이 밝혀졌다. K가 자주 들리던 빵집을 스쳐지나갈 때는 뜨겁게 익은 효모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는 재차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별 도리가 없는 노릇이었다. K는 그저 길을 걸었다. 축축하고 더운 공기가 젖은 길바닥 위에 눌러앉아있는 것을 촉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문뜩 T에 대한 생각을 했다.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다시 돌아오기나 할까? 기대하기 힘들 것이라고 K는 생각했다. 자신이 밀어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T는 영리한 여자니까 자신의 의도를 전부 이해했을 것이라고 K는 막연히 추측해보았다. 그렇다, 그런 종류의 여성들은 불행한 만큼 영리하다. 비록 그녀들이 자신의 영리함을 불행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에 사용하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이해력과 절망적인 통찰력까지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런 것을 머릿속으로 중얼거리며 길을 걷는 K의 표정은 완벽하게 무표정했다. 그의 얼굴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K의 사고는 유별나게 무감각했고, 자신의 생각이 아무 의미도 없다는 또 하나의 생각으로 덧씌워져 있었다. 그는 스스로로부터 한 발짝, 혹은 두 발짝 내지 세 발짝은 떨어져서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해서 은근히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도 무표정할 수 있는 것이었다.
길을 가다보니 한명의 노인이 보였다. 머리가 온통 하얗게 새고 얼굴에 검버섯이 핀 그 늙은이는 작고 말라빠진 개를 한 마리 안고 서있었다. 개는 자신의 체중을 온전히 노인의 팔에 맡긴 채 무관심한 시선만 멀리로 던지고 있었다. 노인은 절대로 개를 놓치지 않았다. 자신의 두 팔로 개를 들어 안고서,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이나 자동차 따위를 다소 경계심이 깃든 눈빛으로 지켜보면서 이따금 눈길도 주지 않은 채 한 손을 들어 개의 머리통을 쓰다듬곤 했다. 서로 들러붙어 있는 그 두 생물을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K는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이 들었다.
옥탑방으로 돌아가던 K는 건물 계단에서 담배 피우는 남자를 만났다. 그는 이번에도 계단에 걸터앉아 연초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돌바닥에 시선을 내리깔고 담배연기를 뿜고 있던 그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더니 K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뜨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이군요.」
K는 그의 그러한 호의적인 행동에 꽤 놀란 표정이었다. 늘 불쑥 찾아가기만 하는 입장이라서 먼저 인사를 받기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는 얼떨떨해서 인사를 받았다.
「이제 이마는 괜찮습니까?」
「이마요?」
「네. 지난번에…… 큰 상처가 났었죠.」
「아, 그 상처 말이군요. 괜찮습니다. 이제는 전혀 신경도 안 쓰고 있어요.」
「그거 다행이로군요. 그런데, 신문 보셨습니까?」
담배 피우던 남자는 갑자기 화제를 돌리며 그렇게 말했다. 마치 처음부터 그 얘기를 하려고 말을 건 것 같았다. 신문이요? K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러면서 그는 혹시라도 자신의 악취가 상대에게 들킬까봐 몰래 한걸음 뒷걸음질을 쳤다.
「예에. 지난번에 이 동네 공중화장실에 아기 시체가 버려져서 크게 기사가 났었는데.」
「아!」
「무서운 일이죠.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전부 미쳐버린 것 같은 시대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K가 중얼거리듯이 대답했다.
「그런데 그 화장실에 시체가 또 하나 생겼다는군요.」
「그래요? 어떤 시체가요?」
「어느 여자가 손목을 긋고 죽어있었더랍니다. 이렇게 변기를 얼싸안고…….」
담배 피우던 남자는 말하면서 두 팔을 벌려 허공에서 무언가를 껴안는 동작을 해보였다. K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는 그 시체가 누구의 것일지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저런.」
K가 말했다.
그 뒤로도 담배 피우던 남자는 계속해서 신문 기사나 가십 따위를 떠들어댔지만 K는 거의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남모르게 약간의 정신적 마비 같은 것을 느꼈다. 생각할 것이 수도 없이 많았지만 잘 생각이 되질 않았다. <흠>하고 일부러 소리를 내보았지만 그다지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정신이 멀리 떨쳐진 듯이 사고가 둔감했다.
마침내 담배 피우던 남자는 말을 마치고 사람 좋은 얼굴로 K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아무래도 그는 지난번 K가 이자를 듬뿍 올려서 돈을 갚은 이후로 그에게 호감을 갖게 된 것 같았다. 나쁘지 않은 일이라고 K는 생각했다. 그리고서 그는 야트막하고 이상한 우울을 느끼면서 옥상으로 걸어 올라갔다.
집에 당도한 K는 자신의 매트리스 위에 올라앉아 잠시 동안 멍하니 넋을 잃고 있었다. 이제 누구의 것도 아니게 된 또 하나의 매트리스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저것을 어떻게 처리해야하나 싶었지만 곧 그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그만 두었다.
생각해보니 K는 자신이 배가 고프다는 것을 어느 사이엔가 잊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다지 배가 고프지 않았다. 하지만 곧, 또 한 번 뱃속에서 사납게 먹을 것을 요구해댈 것이다. 지금은 잠깐의 소강상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K는 알고 있었다. K는 조금 뒤에 층계를 내려가 담배 피우는 남자에게 돈을 약간 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는 흔쾌히 돈을 빌려줄 것이다. 그리고 내일이나 혹은 그 다음날 쯤, 새로운 일자리를 구해봐야겠다고 K는 결심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