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식 혹은 죄와 악
1. 내가 뭘 쓰려고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리고 내가 뭘 써놓은 건지도 파악이 안 된다. 만약 자신의 글이 쓰던 와중에 제멋대로 살아움직이며 깽판을 놓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면 같은 글에 6개월 이상 붙어있지 말아야만 할 것이다.
2. 언제쯤에야 스스로 만족할만한 소설을 쓸 수 있을까? 감정을 좀 더 미니멀리즘하게 깎아내야한다. 나는 아직도 너무 과도한 충동의 덩어리다. 오늘 뿐만이 아니라 내일도 만족할 수 있을 글을 쓴다는 것이 가장 어렵다.
3. 수정할 곳이 분명히 있긴 있는데 될대로 되라는 기분이 되어버려서 도무지 손을 못 대겠다. 수정을 해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하면서 곤란해하고 있느니 차라리 어서 이후에 쓸 소설의 구상에 들어가는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4. 혹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읽어보면 무언가가 보일지도 모른다.
질식
혹은 죄와 악
얼마 전 나는 관리에게 부탁하여 종이뭉치와 펜을 한 자루 얻었다. 그것은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기록을 위하여 필요한 것들이었다. 사실 지금에서야 무언가를 기록한다는 행위가 무슨 의미를 가지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지만, 그래도 내 정신이 온전히―확신하지는 못하더라도― 남아 있는 지금 나는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나의 이 수기가 어떠한 가치를 가지게 되는 일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이곳의 공기는 너무 뜨겁고 내 마음은 비탄으로 가득하다. 또 울다 지쳐 쓰러지기 전에 본문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탄생과 실패.
지형이 평탄하지 못하고 건물들로 둘러싸여 햇빛조차 잘 들지 않는 주택밀집지역의 반지하층에서 내 인생의 전반기를 보냈다. 이미 그때부터 나는 도무지 즐거움이라는 것을 알 수 없었던 것 같다. 내가 태어난 도시 빈민층 가정과 그 주변의 이웃들에게서 나는 인생이 얼마나 기쁘지 못하고 메마른 것이며 또 신경질적인 것인지를 배웠다. 그들은 모두 가난 속에서 허덕이며 해가 지날수록 늘어가는 온갖 고통과 부담들 아래에서 하루하루를 보낼 것을 강요당하고 있었고, 항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주어진 책임으로 말미암아 삶을 그만둘 수도 없는 그런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것은 마치 고문과도 같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나 또한 당연히 고문을 당하는 입장에 있었다. 나 역시 그들의 자손이었던 것이다. 우리들의 삶이란 것에서 즐거움이나 행복은 찾기 어렵기 때문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모든 것을 그만두거나 혹은 덜 고통스럽기 위한 길을 찾는 것뿐이다, 그러한 <법칙>이 어린 내 머릿속에는 일찍부터 들어서 있었다.
그리고 내게 그 법칙을 가르쳐준 사람들 또한 그 법칙에 의지하여 살아가고 있었다. 대다수의 어른들은 죽는 것보단 덜 고통스러워지는 것을 택했고, 그들은 그 방법으로 돈을 버는 일에만 몰두하거나 혹은 술로 정신을 마비시켰다. 알코올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나는 내 조부가 만취상태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골반 뼈가 부서져 죽는 장면과 외삼촌이 알코올 중독으로 병원에 강제입원 당하는 것을 보았고, 외조부가 가족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지독한 알코올 중독자였다는 이야기를 어머니의 불행한 얼굴로부터 들었다. 구차한 변명으로밖에는 들리지 않을 테지만, 어쩌면 후에 나타나게 된 나의 알코올 의존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불행한 얼굴. 어머니는 내게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심하게 술에 취한 그가 지저분한 골목에서 넋을 놓고 앉아있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다는 것이나, 자신의 딸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어머니에게 술값을 빌려달라고 했다는 것도 덩달아 어린 내게 말해주었다. 어째서 어머니가 그런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잘 알 수 없다. 다만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런 일련의 비극들을 이야기하는 어머니의 표정이 더없이 담담했다는 것이다. 아니, 담담한 표정이기는 했으나 거기에는 이미 말했듯 깊은 불행이 초석처럼 깔려있었다. 그것은 주름처럼 깊이 새겨진 불행 위에 쌓아올려진 담담함이었다. 그리고 내 탄생과 삶의 근원인 그 표정은 나에게 있어 모든 가난한 이들의 표본이 되어버렸다. 가난한 이들에게는 사소한 불행에 하나하나 슬퍼할 여유가 없다. 그들에게 있어 불행과 절망이란 그야말로 일상과도 같은 것이자 존재의 핵심처럼 당연하고 필연적인 것이었기에, 인생을 짓누르는 대부분의 불행에 대한 그들의 반응이란 무뚝뚝한 얼굴과 물기조차 없는 슬픈 눈을 들어 올리는 것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내 어머니의 표정이었다.
백지상태의 어린아이들이 모두 그렇듯이 나는 내 주변의 공기를 여과 없이 전부 받아들였다. 가난과 그로 말미암은 불행. 언제 덮칠지 모르는 더 큰 절망에 대한 불안으로 긴장된 하루하루. 그리고 공포. 그렇다, 공포. 공포 또한 삶 그 자체였던 것이다. 우리들의―어쩌면 나의― 생활에는 안정이라는 것이 없었다. 잦은 이사와 잦은 다툼, 잦은 경제적 실패와 잦은 히스테리. 자기 신체의 일부와도 같은 가족들에 대한 말없는 원망과 눈물. 머리 위에 짊어진 수많은 빚으로 인한 위태로운 생활. 심지어 지금의 가난조차도 안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야말로 공포였으며, 그 공포는 현상에 대한 불신을 내 정신 속에 깊숙이 박아 넣었다. 지금의 생활은 유지되지 않는다. 가족 간의 관계도 유지되지 않는다. 내 건강 또한 유지되지 않는다. 언젠가 또 문제가 일어날 것이다. 큰일이 나고야 만다. 그것이 필연이다. 모든 일들은 은근슬쩍 점점 나쁜 방향으로만 흘러갈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항상 그래왔기 때문이다. 불쾌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이야말로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린 시절의 내가 자연히 알게 된 믿음이었고 내 정신의 근간을 이루게 될 사고방식이었다.
그래서 그 시절의 내 꿈은 과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것도 특히 무기를 만드는 과학자 말이다. 책에서 읽은 얄팍한 지식으로 만들어낸 물리학자와 병기공학자에 대한 이미지는 내 어린 시절을 완전히 휘어잡았다. 순진한 지적열정으로 원자폭탄을 만들고 <적>들의 머리 위에 그것을 떨어트린 그들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리하여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행성을, 할 수 있다면 이 세계를―세계라! 이때의 내게 세계란 물리적인 의미의 세계였을 것이다― 송두리째 없애버릴 폭탄을 만들고 말리라고 결심했다. 그 위대한 폭탄에 불을 붙여 가면 갈수록 심해지는 불행과 공포의 연쇄를 영원히 끊어버리는 것이다. 아마 열 살 즈음이나 혹은 열 살도 되기 전에 나는 그렇게 결심했던 것 같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게 있어서의 적(敵)은 세계라는 분명한 대상이었고, 나의 적개심은 순수했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마치 불행한 환경 때문에 내가 어린 시절부터 세계에 대한 병적인 적개심을 갖게 되었다는 듯이 서술하고 있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그저 지극히 평범한 빈민가정의 비극을 겪으며 자랐을 뿐이다. 밤이면 밤마다 이웃의 부부가 싸우며 질러대는 새된 분노의 목소리들과 사기그릇 따위가 깨지며 나는 소음, 그리고 어린아이의 신경질적인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메마른 빈민촌에서 태어나 자란 이가 비단 나 뿐만은 아닌 것이다. 그런 곳에서 자랐다는 이유만으로는 항상 마음속이 원망으로만 들끓고 쾌락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이 되지는 않는다. 차라리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사물에서 불행밖에 발견하지 못하는 끔찍한 눈을 가지고 있었고 심장에서는 피와 함께 새까만 비관이 뿜어져 나와 온몸의 혈관을 순환하는, 천성적으로 저주받은 인간이라고 하는 편이 더 합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영혼의 부품 하나가 썩어버린 채로 태어난 인간. 나 자신의 이상성을 조금씩 객관화 시킬 수 있게 된 시점부터 나는 스스로를 그렇게 느끼기 시작한 것 같다. 내 첫사랑의 대상인 소녀가 차에 치여 산산조각 나는 장면을 상상하며 발기했던 일, 가족들의 귀가가 늦어지는 날 그들이 전부 길거리에서 죽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절반은 기쁨으로, 절반은 불안으로 흥분된 채 홀로 거실을 뱅뱅 돌던 일,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 가면 괴로워하며 구토하던 일, 낯모르는 행인들의 목을 잡아 비틀고 돌 벽에 그 얼굴들을 짓이기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서글피 울던 일, 칼과 가위로 내 배꼽을 도려내려던 일, 매일 밤 내 갈비뼈를 잡아 열어젖히면 새빨간 금속덩어리―아마도 어떤 종류의 독극물에 물들여진 것으로 보이는―들이 허파 속에서부터 쏟아져 내리는 꿈을 꾸던 일, 기타 등등, 기타 등등. 내 비일반적인 면모들을, 혹은 선험적인 괴물성을 자각하면서 나는 청소년이 되었다. 내 가슴 속에 죄책감과 불안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며 나는 성장했다. 그리고 나는 이 모든 것이 적의에 기인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머니의 불행한 얼굴. 그리고 내가 마주친 모든 이들의 얼굴에 덧씌워져있는 기만어린 표정들. 나는 그것들을 전부 다 증오했다. 그래서 나는 학교도 제대로 다닐 수 없었으며 마음 편히 거리를 돌아다닐 수도 없었다. 아무도 내 욕망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내가 고립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고립을 자각하는 이들이 모두 그렇게 되듯 자연히 개인의 힘이 터무니없이 약하고 공허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나에게는 이 세계는커녕 내가 속한 작은 조직체들을 파괴할 능력도 없었던 것이다. 모든 것을 깡그리 없애버리리라는 유치한 장래희망은 일보도 내딛기 전에 좌절당했다. 나는 거울을 보았다. 나는 내 얼굴마저도 증오했다.
이단자.
학창시절을 떠올려보자. 나는 학업에 그다지 열정적이지 못했다. 수업도 제대로 듣지 않았다. 신경증을 핑계로 거의 매일 조퇴와 결석을 반복했다. 사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돌이켜보면 나는 오랜 시간을 모범생으로 지내왔었던 것이다. 항상 좋은 성적을 냈으며 행실도 나쁘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모든 일에 성실하게 임하는 척하며 모범생으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그렇다고 해서 내 이상성이 완전히 감춰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는 성적이 좋고 예의가 바른 학생이었기 때문에 가끔씩 나도 모르게 새어나오는 괴상한 언행들은 교사에게나 학생에게나 좋은 의미의 개성으로만 비춰졌던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소위 ‘멀쩡한 사람’처럼 보이기 위하여 모범생을 연기했던 것은 아니다. 아마도 그것은 타성과 공포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나는 좋은 성적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만약 내가 학업에서 성공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한다면 어머니는 나를 자신의 그 원망 깊은 눈으로 바라볼 것인데, 그것은 정말이지 두려운 일이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거의 모든 가난한 부모들이 그렇듯이 교육만이 자신의 아들을 가난의 연쇄로부터 구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언제나 억지로 화를 참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의 눈빛은 늘 나에게 스스로에 대한 경멸감을 가지게 만들었다. 내가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은 어머니 앞에서는―설령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더라도 죄악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그녀의 무자비한 시선 앞에 내던져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분명 그 시절의 나는 학업에 성실히 임하는 것밖에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이 없다고 생각했었던 것이다!― 나는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노력했으며 매일같이 학교에 나가 수업을 들었다. 그것은 내가 바꿀 수 없는 상황에 대한 굴종이자 어머니에 대한 나의 수동적인 애증의 잔재였다. 그러나 나는 세상을 지워버릴 폭탄을 만들 수가 없다. 나는 어머니의 눈에서 원망을 지워버릴 수 없다. 인생은 죽거나 불행해지거나 둘 중 하나. 모든 것은 점점 나쁜 방향으로만 흐른다. 나이를 먹을수록 절망과 수치는 늘어나기만 할 것이다. 어머니의 꽉 다문 입술을 닮아가며 나도 나이를 먹을 것이다. 나는 포기를 알게 되었다. 가장 간결한 형태의 허무주의가 내 내면에서 파도치기 시작한 것이다. 기껏 좋은 성적을 받아 어머니의 시선으로부터 잠시나마 안전해진다고 해봤자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아니 오히려 삶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내 부모도 열심히 살았다. 그들은 불행한 태생 속에서 정말로 열심히 살았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 살며 서로를 만나 결혼하고, 그리고 나를 낳았다. 아마도 그들은 열심히 살아서 나쁠 것이 없다고 생각해 그렇게도 오랫동안 살아왔거나, 혹은 별 생각 없이 관성에 의하여 살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간에, 내가 태어났다. 어머니의 눈은 여전히 육중한 감정들로 말미암아 도저히 마주볼 수 없다. 그러면 나는 어쩔 것인가? 학업에 매진하고, 먹고 살기 위해 일하다가 누군가를 만나 결혼하고 생식한 뒤에 늙어갈 것인가? 아니다. 고작 그런 기대를 위해 수십 년이나 불행을 씹어 삼켜가며 살아갈 수는 없다. 누군가는 내게 인생에는 그래도 살아갈만한 가치가 있으며 행복이나 즐거움 또한 삶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내게 있어 그러한 주장들은 단 한 번도 꿈을 꿔본 적이 없는 이에게 꿈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느껴졌다. 나는 그러한 근거 없고 막막하기만 한 희망들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 이제 와서 감상적인 어조로 내가 비극적일 수밖에 없었다고 역설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글이 보다 객관적인 수기가 되기를 원한다―내가 ‘객관’이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던 기회가 일생 단 한 번도 없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어쨌든, 나는 지독한 비관주의로 정신을 잠그고 삶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려는 노력마저도 하지 않게 된 것이었다. 나도 쾌락을 피상적으로나마 알고 있기는 하다. 그것은 상쾌함도 없고 만족감도 주지 않지만 자연히 마음이 기울어지는 것이었다. 그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본성이었다. ‘폭탄’을 만들 수도 없었고 긍정을 믿을 수도 없었으며 아이를 낳을 수도 없었던 나는 이미 말했듯 점점 학업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나는 어머니의 눈을 감기는 대신 그녀와 마주보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
나는 친구도 만들지 못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학교에서 주로 고립되어있거나 혹은 적대적인 관계들만을 만들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내가 만날 수 있었던 모든 종류의 집단에게서 미지근한 호의를 받았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쉽게 생기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그들을 미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들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나는 그들을 미워했다. 왜냐하면 내가 그들을 미워하는 것을 그들이 알아차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은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가 그저 조용하고 조금 별난 구석이 있으며 잘 웃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친절한 성향을 가진 괜찮은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은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다. 그들 앞에서의 내 침묵과 친절과 조심스런 언행들은 순전히 공포심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공포심! 나는 도저히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두려워하고 또 동시에 미워했다. 그들의 유동적인 감정과 쉽게 변하는 표정, 무리지어 다니는 습성과 쾌락에 대한 순진무구한 열망 따위에 대해 전부 그런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만약 그들이 조금만 더 예리한 직관과 타인에 대한 의심어린 눈초리, 또 진지한 관찰력을 가지고 있다면 순식간에 내 이상성이 발각당해 내가 혐오스러운 정신의 소유자라는 것이 그들 사이에 소문처럼 퍼지고, 곧 나는 다시는 살아갈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짓밟혀 사라지리라고 생각했다. 항상 말이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그들 사이에서 불안을 느끼고 두려워했다. 그리고 이미 말했듯이, 불량품인 채로 출하된 나의 영혼을 그들에게 들킨 일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또한 한없이 그들을 증오했다. 나의 친절하고 조심스러운 얼굴로.
차라리 그들이 나에게 돌을 던졌더라면! 나는 그들 앞에서 굳이 연기를 하지도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내 기분 나쁜 진실과 거무죽죽한 욕망들을 그들 눈앞에 내보이고 혐오의 대상으로 사형당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용기도 행동력도 없었다. 나는 활동하지 않았다. 내가 능동적으로 하는 일이라고는 곰팡이 냄새가 나는 좁고 어두운 집에 틀어박혀 가끔 웃거나 혹은 가끔 우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마땅히 내가 언제까지고 그런 삶만을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출구가 없는 한계상황에 걸려들었으니 나는 곰팡이의 운명에 종속되어버렸다고 말이다.
그러나 나의 구역질나는 유전자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코올과 약물에 대한 열망이 새겨져있었던 것이다.
의존과 중독.
언제부터인가 나는 슬그머니 알코올로 시간을 지우기 시작했다. 나는 술에 심하게 취하면 으레 울곤 했다. 술에 취하지 않았을 때에는 수 시간 내지는 수일에 걸쳐 진행되며 나를 괴롭혔을 것들이 알코올에 반응하면 무질서하게 뒤섞인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로 뭉쳐진 채 내게로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시간을 압축해버리기도 했다. 나는 오랜 시간동안 씹어 삼켜야만 했을 감정들을 한 번에 분출하며 시간 역시 같은 비율로 지나쳐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아직 성인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사람을 사귀는 데에 도움을 주기까지 했다. 알코올이 혈관을 타고 온몸을 돌기 시작하면 나는 평소보다 덜한 겁쟁이가 될 수 있었다. 한층 대담해졌으며, 그 대담성으로 인하여 인간에 대한 공포도 무책임한 퇴폐적 감각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었다. 나에게는 의무적으로 만나야할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걸핏하면 그들과 함께 술을 마셨다. 울지는 않을 정도로. 그러나 두려움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될 정도로 마셨다. 그들은 나를 친구라고 불렀다. 나의 괴이하고 정직한 말들이 술기운 탓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기만, 기만이라! 그때서야 나는 기만이니 정직이니 하는 것들이 나의 의도와는 아무런 상관관계도 없이 벌어지는 현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수도 없이 많은 주체들로 이루어진 이 세상―인간군집―에서는 그 어떤 개인의 의지도 손상 없이는 표출되지 않는 것이다. 소위 예술가나 정신병자라고 불리우는 결벽증 걸린 정신의 소유자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혹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양심을 세계 전체에 적용하려고 날뛰지만 결국에는 모조리 실패하여 불행하게 죽어버린다. 아무도 양심과 정직을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그들은 양심에 짓눌려 산산조각이 나고 마는 것이다. 나도 그들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닮아 ‘있었다.’ 만일 내가 계속해서 그들과 닮을 것이었다면 나는 혼자 방구석에 앉아 고독하고 망가져가는 예술가처럼 술을 들이부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두려움을 묻어버린 채로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들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고, 알코올에 절여진 채 소통의 진실을 보았다. 소통이란 실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환각이다.
나는 이러한 생각을 하였다. 누가 나에게 ‘소통’이라는 개념을 가르쳤을까? 나는 내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기어 나왔다. 누군가가 나에게 소통이라는 것을 가르쳤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 내게는 소통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느낀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다.
소통[疏通]. 명사. 막히지 아니하고 잘 통함. 혹은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음.
국어사전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음. 그렇다면 소통의 단수는 정직이다. 그런데 나는 정직이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는 개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알코올로 감각을 죽이고 사람과 말[言]들의 한복판에서, 아무도 정직이니 기만이니 하는 것은 신경 쓰지 않고, 모두들 관계의 표면에서만 쾌감을 좇는 것을 나는 보았다. 단언컨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정직에 목이 졸려 질식해가는 사람들은 타인과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게 ‘소통’이라는 두 글자를 가르친 것은 누굴까? 누가 사람들은 서로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으며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을까. 나는 알았다. 그런 가상의 것을 마치 실존하는 것인 마냥 내게 가르친 건 바로 내 불행을 바라는 어떤 의도였던 것이다.
생각해보라. 소통의 근거는 모든 인간이 동종이라는 전제에 세워져있다. 단 하나의 설계도면으로 건축된 같은 종족들이니 서로를 이해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으리라는 전제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내게 죄책감과 불행한 태생을 박아 넣은 종교적 기만이었다. 이 사회에서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고 당연시되는 그 전제들은 나를 죄인으로 만들어놓았다. 불량품이라는 것은 완성품이 있을 때에만 성립되는 개념인 것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이 사회에 살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완성품이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고 정답게 지낼 수 있으며 소통 또한 가능하다고 말했던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는 내가 소녀의 처참한 죽음에 정욕하고 어느 누구의 호의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없으며 음산한 적의로만 가득한 인간이 되리라는 것을 미리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리라. 그는―그것은― 내가 나 자신에 대해서 죄책감과 이질감을 느끼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것은 사회일 수도 있고 도덕일 수도 있으며 부모일 수도 있다. 그리고 심지어는 수천 년간 유전자 속에 쌓여온 사회성일지도 모를 일이다.
소통이란 없다. 그것은 환각이다. 그것은 오직 내가 그들의 설계도면에 맞추어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넌지시 알려주는 것만을 위해서 짜여 진 가상의 개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엇이 변하겠는가. 나는 여전히 친절하고 겁에 질려있었다. 여전히 사람들은 언어의 껍질 위에서 뛰놀며 탐욕적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어떤 사람들은 전혀 눈치도 못 채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하여간에 그들은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었다. 사람과 개인들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든 없든, 코앞에서 36.9도의 열기를 내뿜고 있는 누군가가 자신과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더 확신하고 싶어서 말이다. 자기 자신과 그 주변을 뒤덮은 이해할 수 없는 사물들로만 가득한, 황량한 세상에서 외롭지 않다고 느끼기 위하여. 그러나 그것도 결국에는 눈속임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마지막 순간까지 그 눈속임에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의 수가 적은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어느 순간 자신이 살과 뼈로 된 벽 안에 갇혀있으며 단 한 번도 아내의 살갗을 만져보거나 친구의 슬픔에 공감해본 일이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하지만 천만다행으로도 그들은 곧 자신이 본 날카롭고 새하얗게 빛나는 진실을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망각이야말로 생존에 필수적인 특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처음>부터 그것을 보아왔고, 잊어버리지도 못하도록 모든 인간과 사물들이 내게 그 진실을 강요하고 각인시켜왔다. 나는 외롭다. 그래서 나는 항상 구역질이 날 때까지 끊임없이 술을 마시고 뼈와 살에 갇힌 허상들 사이로 기어들어갔던 것이다.
분류작업.
어느 날 나는 자살을 시도했다. 어머니의 장례식이 끝난 다음날이었다. 그때 즈음엔 이미 단 하루도 술에 절어있지 않은 날이 없는 생활을 영위 중이었으나 죽음을 결정할 때만은 정말이지 그 누구보다 명징한 정신이었다고 자신할 수 있다. 어머니의 죽음에 어떤 유별난 감상이나 자극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당신의 죽음으로 인해 어머니는 더 이상 불행한 얼굴을 갖고서 살아가지 않아도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당연한 사실이 더욱 당연하고 명백해진 것이었다. 나는 죽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굉장히 이성적인 귀결이었다. 보다 덜 고통스러워지는 것. 도대체 누가 나에게 비겁을 말하겠는가? 나는 그런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물어볼 수 있는 단 하나의 가치 있는 질문은 어째서 자살하지 않느냐는 것이고, 이미 죽은 자에게는 아무것도 질문할 수 없다.
어머니의 서랍 안에는 이제는 유산이 된 진통제와 수면제 따위가 들어있었다. 그녀는 아주 오랫동안이나 불면증과 편두통으로 고생해왔었던 것이다―어머니는 해방되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것들을 사용했다.
정신을 차리자 병원침대의 하얀 시트 위였다. 복용량이 부족했던 것이다. 내 곁에는 바로 며칠 전에 아내를 잃은 늙은 남자가 앉아있었다. 아버지의 얼굴은 아주 끔찍했다. 세상 모든 고통과 당혹감이 아교처럼 끈적끈적하게 뒤섞여 그의 표정을 이루고 있는 것만 같았다. 흠, 이젠 아버지 차례로군. 나는 잠이 덜 깬 채 그런 생각을 하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혀가 갈라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입안이 쩍쩍 말라붙어있었다. 나는 무언가를 말해야만했다. 아버지의 그 비참한 얼굴에게, 하지 않으면 안 될 말이 있었다. 그것은 나의 충혈 된 심장에서 터지기 직전의 거품덩어리처럼 부풀어 오르고 있었으나, 구체적인 언어의 모양으로 형태지어지지도 않았고 게다가 내 혀는 너무 건조해져있었다. 나는 소화된 수면제의 냄새가 나는 숨들을 짧고 연속적으로 내쉬며 무언가를 말해내려고 애썼다. 나는 죽으려고 했지만 실패하였고 시간은 계속 흐른다. 누구의 동의도 얻지 않고 내일은 뻔뻔스럽게 또 한 번 찾아올 것이다.
마르고 갈라진 목소리로, 나는 아버지에게 ‘도와 달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나를 도와주었다. 그는 내가 오래 전부터 술독에 빠져 살고 있던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나를 병원에 집어넣었다. 나로서도 그것은 잘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내가 노력해서 이루어야할 일이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미치광이에게는 권리가 없었고, 또 그렇기 때문에 책임 또한 없었다. 나는 아무도 내게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는다면 내게는 권리가 필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늙은 아버지가 그들에게 계속해서 병원비를 지급하는 한 나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한명의 의사와 여러 명의 간호사들을 만났고, 그들에게는 ‘밖’에서 누구에게나 으레 그랬던 것처럼 친절하게 굴 필요가 없었다. 내가 하루 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고 병실 구석에 앉아 움직이지 않더라도 그들은 나에게 행동을 요구하지 않았다. 나는 바깥 생활보다 병원에서의 생활이 더 마음에 들었다. 병동의 비일상적인 공기는 약간 들뜬 듯 하면서도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바깥세상의 선정적이고 강렬하며 신경계를 온통 휘저어놓는 듯 자극적인 공기는 병실의 창문까지 다가오지도 못했다.
의사는 거의 일주일에서 이주일 간격으로 나를 자신의 사무실로 불렀다. 나는 그 늙은 남자에게서 그가 항상 인공적인 침착성 뒤에 숨어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안경알 너머 그의 눈에서는 서슬 퍼런 통찰력이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내가 사무실로 들어서면 그는 친절한 목소리로 자기 앞에 놓인 의자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권하곤 했다. 그 뒤부터는 내 차례인 것이다. 의사는 내가 무언가를 말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대화의 형식은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말상대를 두고 하는 혼잣말이나 다름없었다. 의사가 ‘혼잣말’의 주제가 될 만한 화두를 내놓으면 나는 그에 맞춰 끊임없이 내 얘기만을 하는 것이다. 사실 그것은 ‘바깥’에서 통용되는 대화방식보다는 훨씬 편안하고 쉬운 것이었다. 나는 내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 혹은 내가 온갖 사물들에게서 느끼는 감정 따위를 떠벌리며 ‘이제 이 방에서 의사만 사라져준다면 정말 완벽한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에게 사적인 이야기들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다소 재미있기까지 했다. 의사는 내가 혀를 놀리는 내내 자신의 차트에 무언가를 계속해서 적고는 했던 것이다. 그는 분명 내 말과 행동들을 분석하고 정리해서 ‘나’라는 인간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다! 그것을 읽을 기회는 없었지만 나는 내가 말을 더 많이 하면 할수록 보고서의 완성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어림짐작으로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심리학적으로 혹은 정신분석학적인 공식에 대입되어 정리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현재진행형으로 느끼는 것은 꽤나 흥미로운 일이었다. 심지어 나는 가끔 사소한 거짓말로 보고서의 방향성을 조금씩 조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악의나 목적이 있는 행위는 아니었다. 나는 단순히 흥미와 호기심으로 말미암아 의사의 보고서 위에서 건설되고 있는 ‘나’에게 특정한 요소들을 가감했던 것이다. 소재가 부족해지는 일은 없었다. 나는 아무 할 일도 없는 병동에서 십 수 명의 미치광이들과 함께 생활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하여간에 의사는 직업적 소명에 근거하여 나를 분석하고 규정짓는 데에 시간을 쏟고 있었지만 내게는 그것이 그다지 중요한 일로는 여겨지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감명을 느낀 것은 일정시간마다 간호사가 내게 물 한 컵과 함께 쥐어주는 알약 쪽이었다. 그것이 내 정신에 미치는 영향을 경험하는 것은 확실히 유물론적 감명을 받을 만한 일이었다. 작지만 위력적인 온갖 색깔의 정제들은 내 감각과 의식에 작용하여 하루의 대부분을 잠을 자는 데에만 사용하게 만들거나 우울조차 느끼지 않을 정도로 나를 둔감하게 만들었다. 매일 아침과 저녁에 배급되는 그 약들은 일단 집어삼키면 최소한 여섯 시간 정도는 내 정신과 감각을 지배했다. 모든 관념과 감정들이 평면으로 보이게 되는 느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여간에 나는 약기운에 취하면 마치 카펫처럼 깔린 그 평면에 주저앉아 머릿속을 느릿느릿 기어 다니는 유쾌함과 조심스러운 혼돈들을 즐기곤 했다. 그것들은 마치 어떠한 종류의 환형동물처럼 매끄럽게 서로 뒤섞이다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슬그머니, 조금씩 아래로 향하는 것이었다. 그 털 없는 짐승덩어리가 마침내 심장부근에 도달할 때 즈음이면 이미 나는 나의 하얀 침대시트 위에 너부러져있었다. 그 버러지들! 잠에서 깨어나고 나면 나는 항상 그것들이 파먹은 가슴 속의 공간을 느낄 수 있었다. 내 심장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그야말로 주먹만 한 크기의, 갉아 먹힌 공허가 남아있는 것이었다. 그 속에서는 양약(洋藥) 색깔의 거품이 인다. 마치 태어난 지 몇 분도 되지 않은, 세상의 온갖 냄새와 바람들을 생애 처음으로 느껴보는 신선한 살덩어리처럼 그 거품들은 예민하고 어리둥절해있다. 나는 그 거품을 담은 가슴속 공허의 한 구석을 손으로 움켜쥐어보면서 느릿느릿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한 수면과 기상의 반복들. 그 사이에서 나는 간호사들이 내게 약을 주는 의미를 알아차렸다. 그것은 놀라울 정도로 실용적인 메커니즘이었다. 사고의 마비. 미치광이들에 대한 최선의 처방은 다름 아닌 그들의 사고를 정지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다. 길고 연속되는 수면들로 인하여 내 머릿속의 난해한 관념들은 어느새 걸쭉한 죽처럼 풀어져 아무런 지각도 일으키지 못하는 혼돈된 무정부상태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내 안의 쾌락주의는 그것을 매우 기쁘게 받아들이고 또 취했다. 사고의 정지. 사고의 정지. 내 정신을 위협하여 막다른 골목 안으로 밀어 넣는 칼끝처럼 날카롭고 공격적인 의식(意識)들은 관념의 무정부상태 속에서 완전히 녹이 슬어버렸고, 덕분에 그것들은 더 이상 나를 위협하지 못했다. 나는 자살을 향해 끊임없이 돌진하기만 하는 사고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언제고간에 그것이 다시 날을 세우려고 하는 기미만 보이면 나는 그저 약의 힘을 빌어 잠 속으로 뛰어들기만 하면 되었다. 나는 고뇌하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고통스럽지 않았다. 나태의 극단으로 인하여 말이다. 세계를 이루는 온갖 사물들의 표피 안쪽에 내제되어있는 적의와 부조리, 자살과 파멸을 가리키는 화살표들은 더 이상 내 눈에 보이지 않았다. 병실의 하얀 벽은 아무런 관념도 숨기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그저 벽에 지나지 않았다. 아니, 그것은 심지어 벽조차 아니었다. 그것은 ‘벽’이라는 관념조차도 가지지 못했고, 존재도 하지 않았다. 모든 현상들은 존재성과 형태를 잃어버리고 권태롭게 녹아 흐르고 있었다. 내 의식은 이제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둔마되어있었다. 이렇게나 멍청하기에 사람들은 자살하지 않는 것이로구나. 나는 약기운 속에서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시간은 계속 흘렀다. 나는 강제된 안정―혹은 침체― 속에서 점점 몸이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약기운은 이미 근육에까지 퍼져있었다. 정신뿐만이 아니라 육체도 날이 가면 갈수록 행동력을 잃고 있었다. 병동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루 종일 ‘보는’ 것뿐이었다. 창문을 넘어 들어온 차가운 태양 광선들이 침대 시트와 라디에이터 위에서 하얗게 부서지는 것을 보거나, 같은 병동에서 생활하고 있는 환자들의 걸음걸이나 경련처럼 흔들리는 그들의 표정을 보는 것. 그것이 내 하루일과의 전부였다. 입원초기에는 알코올에 대한 욕망 때문에 작은 사고를 저지른 일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러한 욕망도 전부 잃어버린 뒤였다. 내가 단 하나 한결같이 주시하고 있는 것은, 매일 밤 잠들고 깨어날 때마다 점점 깊어지는 가슴 속의 공허였다. 이것은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다. 나는 실제로 그 텅 빈 공간 속에서 무엇인가가 당장이라도 깨질 듯이 조용하고 차갑게 진동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의사에게는 그것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의사와 말장난을 하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질린 참이었다. 간호사는 내게 모든 것이 점점 나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별다른 생각 없이 그녀에게 동의했다. 실제로도 나는 점점 덜 히스테릭하게 되어가고 있는 듯도 싶었다. 의사는 내가 긍정적인 과정을 진행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나는 의사에게도 간호사 때와 마찬가지로 심드렁하게 동의했다. 그리고 약 석 달 뒤, 의사는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단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기쁜 낯으로 내게 악수를 청했고 나는 퇴원했다. 병원 문 앞에서는 아버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스스로에게 하는 질문에 나는 대답할 수가 없다. 지금까지 단 한 번이라도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었던 적이 없었다. 나는 다시 병실의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등과 엉덩이로 하얀 시트를 깔아뭉개면서. 울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옛날에는 툭하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울곤 하던 내가 지금은 눈물을 흘릴 수가 없었다. 지난번에는 아버지가 앉아있던 자리에 지금은 의사가 앉아있었다. 병동에서 나와 일주일 간격으로 대화를 하던 그 의사 말이다. 안경알 너머에서 나를 쏘아보고 있는 눈은 내게 이렇게 묻는 것 같았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입니까?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어 대답해버렸다. 나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말없는 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왠지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의사에 대한 호의가 울컥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당장이라도 그의 손을 단단히 잡고 인간에 대한 내 모든 믿음과 애정을 그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내가 다음으로 어렵사리 입에서 꺼낸 말이라고는 이런 것이었다. 선생님께는 잘못이 없습니다. 당신은 좋은 의사입니다. 내가 좋은 환자가 아니었을 뿐입니다.
문뜩 내 상황이 몹시 우습게 느껴졌다. 마음속은 마치 사막에 열풍이 부는 듯이 황량하게 말라붙어가고 있는데, 몸은 제멋대로 희극이라도 연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두 번씩이나 실패하다니, 바보 같은 놈. 그렇게도 내일로부터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쳤는데, 나는 또 오늘을 살고 있었다. 가엾은 광대 같으니. 폐 깊숙한 곳에서부터 깔깔거리며 웃음이 기어 나오려는 것 같았다. 그것이 기도를 타고 올라와 목의 입구에서 가래처럼 칵하고 걸리는 것이 느껴졌다. 의사에게 쟁반이나 그 비슷한 것을 좀 건네 달라고 손짓을 했다. 그가 손짓만으로는 내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 나는 직접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침 침대 옆의 탁상에 U자 모양의 철 쟁반이 놓여 있기에 거기에 뱉고 보니, 내 웃음은 새빨간 핏덩어리 같았다.
난폭한 세상. 아이러니한 세상. 적의, 혹은 무관심. 의사가 불러온 또 다른 의사는 내 피부 아래로 침을 찔러 이런저런 내장 조직들을 뜯어가더니 내게 ‘간이 망가졌다’는 결과를 들고 왔다. 얘기는 대강 이랬다. 병동입원 전부터 포악하게 마셔댔던 알코올과 또 죽기 위해 들이 삼켰던 약들의 악영향이 결국 한계치를 넘어섰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순 자업자득인 것이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는―입원한 병원에서 새로 만난 의사 말이다― 간 이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런 것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나는 알코올중독 경력이 있는, 벌써 두 차례 째인 자살시도 현행범이었던 것이다. 그런 인간쓰레기에게 주기에 간은 너무도 소중하다. 훨씬 희망적이고, 또 삶을 열망하는 선량하지만 병든 시민들은 이 양민들의 사회에 수도 없이 많은 것이다. 나는 내 케이스를 장기이식심사위원회에게까지 올릴 필요도 없다고 판단 내리고 그대로 의사에게 내 결론을 전했다. 의사는 내가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미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하려 노력했지만, 분명 내 체념에서는 엉망진창으로 뒤섞인 자멸적 감정의 역겨운 냄새가 노골적으로 풍기고 있었을 것이다.
일단락.
이렇게 된 것 병원 따위가 다 무엇이냐 싶어 나는 만류하는 의사에게 침묵으로 응대하고 퇴원했다. 얼마 안 되는 짐을 싸들고 병원 건물 밖으로 나온 나는 현관에 멈춰 서서 생각했다. 이제 어디로 간다? 누구 만날 사람이라도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만나도 그만이고 안 만나도 그만인 값싼 술친구들 외에는 생각나는 사람이 한명밖에 없었다. 그렇지, 아버지가 계셨지. 별 수 있나, 겨우 하나 남은 혈육인데. 병실에 얼굴 한 번 안 비친 것을 생각하면 분명 나 따위는 꼴도 보기 싫다는 뜻임에 틀림이 없겠으나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몇 마디 대화라도 나누러 가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가 내 어깨를 턱하고 잡는 것이었다. 뒤돌아보니 경찰 제복을 입은 장년 남자다. 이것 봐, 안색이 창백한데. 그의 말이다. 그야 요 며칠간 몇 번이나 피를 토했으니 창백할 만도 하다. 그렇게 대답할까 생각하다 그만두고 찬찬히 보니 이 사람도 구면이다. 이 경찰은 내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신고를 의사로부터 받고 내게 찾아온 사람이다. 그는 내가 병원 침대 위에서 눈을 뜨자마자 온갖 질문을 퍼부어댔다. 그 질문이란 것들이 하나같이 너무나도 사소한 것뿐이어서 자세히 기억하고 있지는 않으나, 그가 마지막으로 내뱉었던 말만은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다. 그는 내게 다른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짓은 이제 그만두라고 말했었다. 성가심. 그렇다, 나는 주변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경찰에게서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약간의 죄책감과 함께 내 자살행위가 성공하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서 창피함을 느꼈다. 성공하지도 못하는 자살행위로 나는 도대체 얼마나 사람들에게 성가시게 굴어온 것일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사죄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니 애당초 사죄할 대상이 없다. 오히려 나는 누군가로부터 사죄 받고 싶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떠올렸다. 누가 나에게 사죄를 해야 할까? 누가 나에게 미안해해야 할까. 근거를 알 수 없는 억울함으로 목이 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문뜩 공격적인 감정이 가슴 속에서 파도치기 시작했다. 나는 내 눈앞에 서있는 경찰의 따귀를 때리고 넘어뜨려 마구 걷어차고 싶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 원망이 서린 눈으로 나는 그의 파란 제복을 말없이 쏘아보았다. 그는 당당하게 땅위에 두 발을 딛고 서있었다. 그의 근육과 뼈들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덜거덕거리며 살아 있었다. 자살이 범죄인 건 알고 있어? 그가 말했다. 나는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면 어지간히 하고 그만두라고. 그의 말에 나는 잠깐 침묵하다가 담담한 어조로 알았다고 말했다. 알겠다. 아무래도 이 세상에서는 내가 성공할 수 있는 일이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다. 나는 경찰에게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 봐야겠다고 말하고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그렇다, 집으로. 내 고향, 내 혈육, 내 땅. 아버지를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해야 좋을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해서 대화를 나눌까. 어느 골목으로 들어가야 나는 내 <집>에 도착할 수 있을까. 나는 이미 한번 아버지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아버지는 내게 나름대로의 도움을 주었으나 결과적으로 그것은 실패했다. 그리고 나는 내 발로 삶으로부터 도망치려고도 했었다. 무려 두 번이나. 그러나 그것도 실패했다. 어느 골목으로 들어가야 나는 내 집에 도착할 수 있을까. 지금 나는 한손에 옷가지 따위가 들어있는 가방을 들고 길을 걷고 있다. 그리고 실패뿐인 내 인생을 어떻게 해야 돌이킬 수 있을지에 대해서 누군가와―그 ‘누군가’는 아버지 밖에 없을 테지만― 대화해야할 것이다.
길 건너에 있는 버스정류장으로 가기 위해 나는 건널목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런데 길을 건너던 와중 날카로운 마찰음이 귓속으로 파고들었고, 그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서는 집채만 한 트럭이 내 안면을 향해 정면으로 돌진해오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산산조각이 나서 죽었다.
존재의 굴레.
순간 나는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아니 이상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잘못되어있었다. 시간은 정오였다. 하늘 높이 뜬 태양은 겨울의 차가운 공기 사이로 새하얀 빛살을 내리쬐고 있었다. 그 태양빛이 너무나도 선명했다. 나는 회색 콘크리트와 철근들로 세워진 도시의 한 가운데에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물들이 너무나 밝은 흰색으로 번쩍이고 있어 눈이 부셨다. 그 노골적인 겨울의 빛은 마치 수술용 메스처럼 태양 밑의 세계를 가르고 해체하여 모든 것의 진면목을 드러내기 위한 것 같았다. 빛, 빛, 빛. 모든 것이 빛으로만 가득했다. 나는 무심결에 눈을 감았다. 그래도 태양광선은 눈꺼풀을 투과하여 내 영혼의 가장 깊은 부분까지 가차 없이 비치는 것이었다. 그로 인하여 나는 내 영혼의 어두컴컴한 부분들이 유난히 강조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썩고 악취가 나는 것일수록 깨끗한 공기 중에서는 더 눈에 띄는 법이다. 아무튼 간에, 나는 그 강렬한 빛줄기들에 의하여 약간 어리둥절해진 머리로 내가 느낀 이질감의 뒤꽁무니를 쫓고 있었다. 무언가가 잘못 되었다. 문제가 있다. 그 문제가 바로 무엇인가 하면, 내가 인지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에게는 빛을 감지할 시력이 있었고 숨을 삼킬 때마다 기도를 스치고 지나가는 공기의 존재를 느낄 촉각이 있었다. 발밑에서부터 기어 올라오는 비릿한 피 냄새를 맡을 후각과 요란한 군중 사이에서 들려오는 나지막한 비명소리를 들을 청각 또한 있었다. 당장 뭔가를 집어먹어 볼 수는 없지만 미각 역시 있을 것 같았다. 이것은 커다란 문제였다. 새삼 나는 내가 평생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 단 한 번도 고민한 적이 없는 채로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심지어 무신론자라고 불리우기도 민망할 정도로 <그런> 것들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없었던 것이다. 참으로 나는 삶 이외의 것에 대해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고통과 빈곤은 천상계나 초경험적 세계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단단한 대지에서 실물로서 피어오르고 정수리를 빛 조각으로 온통 적셔놓는 태양 광선처럼 강렬한 실재에서 쏟아져 내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어머니에게는 종교가 있었다. 그녀는 신을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어머니가 신을 믿었는지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확언할 수 없다. 빈민가에서 생활하는 이들에게 종교란 희망이 아니라 습관과 같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녀의―그리고 그들의― 기도에서는 절대자에 대한 경의나 은총에 대한 욕망보다는 조각조각 분열되고 메마른 일상을 하나로 이어붙이기 위한 조임쇠나 나사못과도 같은 성격이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다. 사실 그것이야말로 도시의 빈민이 할 수 있는 삶에 대한 최대한의 긍정일지도 모른다. 참으로 빛나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는 이 희뿌연 인공물의 늪지대에서 사람은 그러한 열정도 없는 희망에 목까지 잠겨버리는 것이다. 나는 문뜩, 항상 매캐한 연기에 가려진 것 같던 어머니의 까만 눈동자를 떠올렸다. 나는 그녀의 영혼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가난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임종에 들 때마저도 그녀 특유의, 부정의 뉘앙스가 흐르는 입꼬리를 단단하게 닫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누구의 손도 잡지 않은 채로 죽었다. 단 그녀의 손 안에는 십자가 한 개가 고고하게 쥐여져있었지만, 글쎄, 나는 그만큼이나 비종교적인 표정으로 죽는 사람을 본적이 없다. 말하자면 빈민의 종교란 그런 것이다. 특히나 가난의 화신과도 같던 어머니는……
나 또한 그녀의 살점에서 태어났다. 그 점이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당황의 상당부분을 설명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우선 피와 내장 따위가 어지러이 흩어져있는 콘크리트 바닥을 중심으로 작은 원을 그리면서 걸어보았다. 땅을 밟는 느낌이 어쩐지 어색했다. 내 발바닥을 마땅히 짓눌러야할 자신의 질량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무심결에 잃어버린 내 질량들을 찾아 새빨갛게 얼룩진 거리 위로 시선을 향했다. 내가 놓쳐버린 질량들은 터지고 찢어진 가죽 사이에서 끈적끈적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원을 따라 돌면서 그 살덩어리들에 눈을 박고 있었다. 한 발짝 한 발짝 발을 옮길 때마다 내 머릿속에서는 관념의 기계장치들이 철컥거리며 바쁘게 돌아갔다. 이 상황을 어쩌면 좋은가? 나는 내 곤란 속에서 작지만 치명적인 절망이 박동하며 한숨과 함께 통증을 흘리고 있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삶보다 더 나쁘다. 이건 도무지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상황이다. 내가 세상에게 합리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정도로 엉망진창이라니? 마침내 나는 내가 어떤 초월적일 정도로 사악한 장난에 말려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거의―아니, 확실히!― 고의적인 수준이다. 문뜩 나는 수학자 파스칼이 익살스러운 어조로 늘어놓았던, 한 가지 내기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러나 내기에 걸 판돈을 단 한조각도 가지지 못한 사람을 억지로 노름에 참여시켜도 되는 것인가? 이런 말도 안 되는 게임의 룰을 정한 건 대체 누구냐. 부조리에게 있는 힘껏 얻어맞는 바람에 일종의 탈력상태에 빠져있던 관념 속에서 돌연 짜증이 솟구치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다,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이것 밖에 없다. 세상의 구조와 맞대면할 때마다 가슴 밑바닥에서 울컥거리며 솟아오르는 가장 단순한 감정, 신경질이나 짜증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가시 돋친 부정의 감정뿐이란 말이다. 나로 하여금 ‘이건 아니다!’라고 외치게 만드는, 그 아우성치는 감정밖에 나는 세상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것이 없다.
꽤나 거창하게 말했지만 사실 이것은 내가 세상에 대해 취할 수 있는 행위가 신경질적인 감정을 불태우는 것 정도밖에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종말에 대한 욕망마저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 어린 시절부터 주욱, 나는 너무나도 거대하고 막막한 세상에 대하여 아무런 영향력도 끼칠 수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그러한 반항의 감정 뒤에는 으레 지독한 무력감이 몸을 지배하곤 하는 법이다. 나는 은근히 요동치고 있는 짜증을 어금니로 씹으며 사지의 관절들을 축 늘어뜨렸다. 나는 한손을 들어 심장박동이 울리고 있을 터인 왼쪽 가슴에 가져다 댔다. 아니, 심장박동은 더 이상 뛰지 않았다. 심장은 질량들과 함께 내버려두고 온 것이다. 그러나 그 가슴속에는 여전히 깊은 구렁텅이가 파여 있었다. 오래전부터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깊어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그 예리한, 마치 통증과도 같은 깊고 깊은 공허가 말이다. 그것은 사라지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야말로 영혼에 새겨진 흉터처럼. 언젠가 병원의 침대 위에서도 이 공허에 대하여 새삼스럽게 생각해본 일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애초부터 짊어지고 있었던 십자가인 것 마냥 그것은 죽음에도 불구하고 내 존재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참으로 병원이고 의사고 어머니의 수면제고 아버지의 손이고 모든 것이 아무런 소용도 없었던 것이다. 나는 한동안 내 텅 빈 왼쪽 가슴을 한손으로 꽉 붙들고 서있었다.
별달리 도리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아스팔트 위에 주저앉아 맞은편에 서있는 건물에 멍하니 시선을 꽂고 있었다. 시간에 대한 감각이 몹시 혼탁하게 어그러져있었기 때문에 얼마나 그러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여간에 꽤나 오랜 시간동안 넋을 놓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동시에 아주 짧은 시간만을 졸음에 빠져있었던 것 같기도 하였다. 흉측하게 뭉그러진 내 시체 주변에는 어느새 경찰이 쳐놓은 접근금지 표지가 서있었고, 그것을 중심으로 스무 명은 될법한 군중들이 몰려들어 있었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몹시 집중하여 한때 내 것이었던 살 더미들을 관찰하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욕지기가 난다는 듯이 한손을 입에 가져다 댄 채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혹은 연민어린 눈길로 이미 반쯤 굳어버린 피 웅덩이에 시선을 내리까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지금 서술하였듯이 내 시체를 위한 관객들을 하나하나 뜯어보고 있었다. 그러고 있자니 한 가지 연상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차에 치여 죽은 비둘기나 시궁쥐 따위의 시체가 거리에 내버려져있는 것을 발견한 행인들의 표정이었다. 부러진 날개에 싸인 눈구멍과 코에서 흘러나온 핏덩이들이 부리 주변에 걸쭉하게 엉겨 붙고, 부패해 부풀어 오른 새빨간 안구가 초점 없는 시선을 허공에 던지고 있는 그런 사체들 말이다. 행인은 그것들을 혐오하거나 혹은 동정한다. 참으로 값싼 감정으로 말이다. 그들은 한때 그 지저분한 시체들의 근육 하나하나에 짐승적인 열기가 흘렀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한다. 그 열광적인 열파가 하늘을 날고 땅위를 기었으리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아니, 그들은 그것을 알기 위한 의욕조차 갖지 못하는 것이다!
아아, 하지만 그런 것들이 전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돌연 초연한 회의가 일어나 머릿속의 상념들을 전부 쓸어버렸다. 그리고 백짓장 같이 되어버린 사고가 정신의 오감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하늘 높은 곳에서부터 떨어지는 화살촉 같은 빛살들을 머리와 어깨가 흠뻑 젖을 정도로 받으며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내 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내 귀 또한 아무것도 듣지 않았다. 새하얀 빛으로 가득 찬 공기의 밀도가 너무 높아서 나는 그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광휘! 나는 시각뿐만이 아니라 청각과 후각, 그리고 촉각까지 번뜩이는 광휘로 눈이 부셔오는 것을 느꼈다. 무언가가 변하려고 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상황이 말이다. 나는 내 영혼이 격렬하게 진동하며 어떤 절정점에 닿으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한계선 위에서 새하얗게 폭발하려는 순간, 나는 내 눈앞에 천사가 강림하는 것을 보았다.
은유나 암시가 아니라, 진짜 천사를 말이다.
허구와 실재에 대하여.
그것은 정말로 천사였다. 두부 전체에서 끊임없이 성스러운 후광이 뿜어져 나오고, 등 뒤에는 몸통을 감싸듯이 커다란 날개가 펼쳐져있는, 새하얀 옷을 걸친 불꽃처럼 아름다운 인형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천사’ 같았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내가 어떠한 종류의 종교적 희곡에 참여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여하튼 그것은 정말로 성스럽고 아름다워서, 나는 그것이 세간에서 말하는 천사라는 것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하기야 천사가 정말로 존재한다면, 그 수많은 화가들이 그린 천사의 이미지가 진짜 천사와 닮아야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앉아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천사가 내려오는 것을 본 뒤부터 내 머릿속에는 그의 얼굴을 좀 더 자세히 보고 싶다는 욕망이 파이프의 균열에서 새어나오는 액체처럼 느릿느릿 쌓이며 점점 수위를 높이고 있었다. 나는 홀린 듯이 천사의 눈부신 안면에 시선을 꽂고 마침내 손까지 들어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향해 들어올렸다. 그 아름다운 빛 덩어리 같은 얼굴에 손끝을 조금씩 가까이 할수록 내 마음속에서는 일종의 희열 같은 감정의 파도가 점점 거세어지고 있었다. 천사! 천사다! 비록 내가 죽어서도 사라지지는 못했지만, 내 앞에 천사가 있지 않은가? 어쩌면 나는 도무지 상상도 할 수 없는 형태의 구원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병원의 하얀 침대시트도 의사의 목소리도 어머니의 죽음도 아버지의 거친 손도 내게 주지 못했던 구원을 이 천사가 내게 주려는 것은 아닐까? 정말이지 염치없는 소리지만 마지막에는 종교와 신비주의가 내 공허한 영혼을 구해줄지도 모른다. 나는 무심결에 그런 기대를 떠올리고, 그 덕분에 흥분하고 있었다. 내 정신과 감정이 마구 튀어 오르고 진동하며 주변을 둘러싼 공기처럼 하얗게 탈색되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데 황홀한 광채로 인하여 이목구비도 잘 구별되지 않던 그의 안면에서 순간 눈의 윤곽이 보였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나는 천사의 시선과 확실히 마주볼 수 있었다. 새하얀 동공이 가차 없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희디희다 못해 창백하고 투명해보일 정도로 깨끗한 눈빛은 무감정한 수준을 뛰어넘어 차라리 광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기질의 빛살처럼 차갑게만 느껴졌다. 죽은 개미의 사체를 내려다보는 인간의 눈빛도 그보다 무뚝뚝하지는 않으리라. 천사의 얼굴을 쓰다듬을 듯이 뻗어나가던 내 한쪽 손은 그의 눈 아래에서 우뚝 멈추었고, 당장이라도 터질 듯 날뛰던 내 감정은 냉각수라도 끼얹은 듯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천사란 모두 이런 눈으로 인간을 내려다보는 것일까? 그리고 어떻게 움직일 엄두도 내지 못하고 멈춰서있던 내 가슴 한복판에 어느새 천사의 손끝이 닿아있었다. 양옆으로 갈비뼈가 솟아나있는, 단단하게 맞물린 복장뼈 한가운데에 말이다. 나는 이제부터 무슨 일이 벌어질지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다만 그 상황에서 내가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것은, 일이 어찌되건 내게 구원 같은 것은 없으리라는 사실이었다.
그러한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서 말 한마디도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얼어있던 와중에, 천사는 참으로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손끝으로 나를 밀쳤다. 나는 그 무자비한 힘에 저항하지도 못하고 몸체 째로 뒤로 넘어졌다. 곧 방금 전까지 앉아있던 콘크리트 바닥에 하릴없이 부딪히리라는 생각에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충분히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등과 엉덩이에 아픔을 느끼고 있어야 할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느 것에도 충돌하지 않고 계속 넘어지고 있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에 눈을 뜨자, 천사와 나 사이에는 이미 수직으로 5미터 정도의 거리가 벌어져있었고 나는 계속해서 등 뒤로 추락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넘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는 지금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내 뒤에 절벽이나 깊은 구멍 같은 것은 없었는데. 그런데 절벽 같은 것이 있었든 없었든 하여간에 나는 계속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천사의 모습은 시야 저편으로 점점 멀어지고, 나는 도대체 어디로 향하는 건지도 알지 못한 채 끊임없이 추락하고, 추락하고, 또 추락하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토끼 굴에 빠진 앨리스처럼, 나는 정말로 오랫동안 떨어져 내렸다. 그 시간이 너무나도 길었기 때문에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것이 정말 오랜 시간이었는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는지도 단언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시선 저 끝에 남아있던 하늘색 파편이 계속해서 작아지다 결국엔 점이 되어 사라진 후에도 나는 새까만 어둠 속에서 시간감각도 잊어버리고 한참을 추락했다. 나는 어둠 때문에 시각도 차단당한 채, 오직 내 몸―아니 영혼을 잡아당기는 불가사의한 중력의 힘만을 느끼면서 온갖 생각을 다 했었다. 그러나 그 생각이라는 것들이 하나같이 추락 중인 내 자신보다 부피가 컸던 탓인지 결국에는 단 하나의 사유도 결말을 짓지 못한 채 전부 생각 중에 놓쳐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수십 수백 개의 생각들을 캄캄한 허공에 놓아버린 뒤에야 나는 땅바닥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나는 이미 어느 정도 짐작을 하고 있었다. 이야기의 흐름상 나는 필시 지옥에 떨어진 것이리라고 말이다. 말하자면 나는 계속 내 머리를 깨부술 듯이 파도쳐오는 세상의 구조 덕분에 반쯤 넋을 놓고 있었다. 나는 그야말로 거의 포기상태였던 것이다. 내가 반항의 감정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던가? 세상에 대하여 내가 보일 수 있는 단 하나의 행위라고 말했던 그것 말이다. 내 심장을 구성하는 성분들 중 가장 뜨거운 것이었던 그 감정마저도 천사를 만난 뒤로는 점점 차갑게 식어가고만 있다고 나는 고백해야겠다. 정말이지 나는 그 뒤로부터 계속 웃기지도 않은 코미디 무대에 끌려올라와 연극에 동참하고 있는 기분인 것이다. 파스칼의 내기라고? 그것이 도대체 무슨 상관인가! 지금 나는 내가 필사적으로 거부하고 부정했던 것에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야말로 내 체념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필요한 사실들 중 가장 효과적인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다, 나는 체념하는 중이었다. 이 미쳐 돌아가는 희극무대에서 약간의 우울을 혼자 품에 안고, 도대체 이 극이 어떻게 흘러갈지, 내가 알지 못했던 무대장치의 구조는 어떻게 되어있는지. 체념의 기분으로 그저 시선만을 굴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손을 뻗어 땅을 쓰다듬어 보았다. 후끈한 열기가 마른 모래들 사이에서 손바닥으로 흘러들었다. 고개를 들자 어둠은 어느새 어느 정도 걷혀있었다. 주변의 공기에는 약간의 붉은색이 산란한 빛살처럼 어지러이 헤매고 있었고, 사막처럼 넓게 펼쳐진 대지의 지평선 한구석에서는 다른 곳보다 더 뜨겁고 육중해 보이는 빛이 감돌고 있었다. ‘지평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내게 보이는 광경이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내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는 하늘이 없었던 것이다. 빛은 머리 위가 아니라 발밑에 놓인 모래사막의 안쪽에서부터 붉은 기운을 머금고 춤추듯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지평선이라고 부를만한 것은, 붉은 사막과 그 위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새까만 어둠 사이의 불분명한 경계선뿐이었던 것이다. 하늘이 있어야 할 곳에서는 텅 빈 암흑이 공기를 짓누르듯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내 눈에는 마치 이 세계의 풍경이 캄캄한 밤에 지펴놓은 모닥불과 어둠 간의 은밀한 애무처럼 보여 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발견한 ‘더 뜨겁고 육중해 보이는 빛’은 하늘거리는 불꽃의 정상(頂上)처럼 시야에 꽂혀 들어왔다. 그리고 나는 내가 그리로 가야만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밟고 있는 불꽃의 꼭대기를 향하여 한 발짝씩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것이다.
불꽃의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가면 갈수록 덥고 뜨거웠다. 모래는 빨갛게 달아올라 맨발로 철판을 밟는 것 같았고, 코와 입으로 들락거리는 공기는 흡사 끓는 기름을 들이마시는 듯 했다. 이 땅은 말 그대로 불지옥이었다. 열기는 묵직한 중유처럼 출렁거리며 사방으로 파도치고 있었고, 나는 파도의 흐름에 반항하는 것처럼 힘겹게 한발 한발을 앞으로 내딛었다. 땅 위의 모든 것이 무자비한 열파에 수천수만 번씩 씻겨나가고 있었다.
나는 내 영혼의 살갗이 불타고 내장까지 소각되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계속 걸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으나 나는 울고 있었다. 열파와 정면으로 맞대면 하고 있는 얼굴은 눈물범벅이 된 채로, 있는 힘을 다해 이를 악물고, 입 꼬리를 얼굴 양쪽으로 찢어 당겼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에게 신신당부하듯이 끊임없이 입속말을 중얼거렸던 것이다. 불꽃이 내 영혼을 씻어내고 있다. 불꽃이 내 영혼을 씻어내고 있다. 불꽃이 내 영혼을 씻어내고 있다. 나는 눈알이 증발할 듯이 뜨거운 공기 중에서 눈을 번쩍 뜨고 울면서, 도무지 형언하지 못할 고통 속에서 기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있었다. 불길이 내 정신의 가장 깊숙한 구석까지 핥고 들어가 사고의 관절과 영혼의 뿌리에 덕지덕지 끼어있는 죄악과 패배주의의 찌꺼기들을 불사르는 이미지가 마치 꿈처럼 눈앞에서 아른거리고 비대하게 부풀어 요동쳤다. 마침내 그러한 상상과 온몸을 지지는 고통이 절정에 닿을 무렵, 나는 내가 완전히 깨끗해졌으리라는 근거 없는 믿음에 감격하여 비명까지 지르며 오열하는 것이었다.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구원이 아닌가? 나는 열파 속에서 외마디 소리를 치며 그렇게 생각했다. 어릴 적부터 머릿속 한구석에 단단하게 웅크리고 있던, 내가 끔찍한 괴물이고 야수의 새끼이리라는 믿음 때문에 나는 단 한 번도 내 영혼이 깨끗하다고 생각해본 일이 없다. 내게는 곰팡이가 피어있었고, 구석구석이 썩어 문드러져 있었으며, 내 정신은 불량품이었고 악취가 풍겼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었기 때문에 멸시받고 사형당해야 함이 마땅했다. 그리고 세계는 참으로 지당하게도 나를 죽이고, 지옥에 떨어뜨린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지옥불 속에서 구원과 흡사한, 어떤 지고지순한 악의를 느낀다. 내 병든 영혼에 대한 악의, 뿌리부터 썩어있는 내 인간존재에 대한 악의를 말이다. 불꽃은 자신의 아름답고 무자비한 혀를 날름거리며 내 심장을 깡그리 불태우고 재조차 남기지 않았다. 나는 고통이 필요했던 것이다! 내가 삶과 존재에게서 받았던 진흙처럼 질척거리고 비열한 고통들을 송두리째 깨뜨리고 없애버릴, 가장 절대적이고 무작위한 고통이 나는 필요했던 것이다.
이것으로 모든 일이 끝난 것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내 의식은 여전히 존재했고, 죄와 악으로 얼룩진 내 영혼은 여전히 지저분했다. 내가 느꼈던 완전무결하고 결정적인 구원은 고작해야 환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사정(射精)의 순간은 쾌락과 희열로 가득하지만 사정이 끝난 뒤에는 누추한 육체와 진저리나는 존재의 염증이 남는다. ‘끝’이라는 것은 아름답고 유혹적이지만 결코 쉬이 손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나는 그날 이후로 불꽃의 정상을 발견한 일이 한 번도 없다. 그것은 단 한번 내 영혼을 불살라준 뒤 그대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내게 주어진 것은 그저 끊임없이 펼쳐져있는 모래사막과 열파의 미지근한 잔해들뿐이었다. 어쩌면 다시 그 불꽃과 만나,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불타 증발해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만을 갖고서 몇 번이고 반복하여 사막의 지평선을 넘었지만 그것은 나타나지 않았다.
모래들은 붉게 달아올라있었지만 충분히 뜨겁지 못했다. 공기 또한 열기로 들떠있었으나 그것도 충분하지는 못했다. 나는 그 더운 사막을 그저 헤매기만 했다. 어떻게 해야 증기처럼 산산이 흩어질 수 있을지 골몰하면서. 그렇게 맥없이 사막 위를 걷다보면 가끔 눈물이 흐르곤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때의 그 열파 속에서 흘렸던 눈물과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눈물이었다. 내 울음소리로 말미암아 나는 자신이 지쳐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나는 계속 걸었다. 별다른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정장을 입고 한 손에 서류가방을 든 남자를 만났다. 내가 그에게 누구냐고 묻자 그는 자신을 ‘관리’라고 소개했다.
마지막 장.
나는 그가 어떤 ‘관리’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어떤 관직에 있으며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 물었다. 그는 이 사막을, 그러니까 지옥을 관리하는 게 자신의 일이라고 말했다. 아하, 그러니까 당신은 그 천사와 비슷한 것이로군.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나는 관리에게 무언가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딱히 궁금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할 말을 고르고 있던 와중에 문뜩 그의 서류가방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나는 괜한 호기심이 동하여 그에게 가방 안을 좀 보여줄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관리는 어려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서류가방을 열어 내 눈앞에 들이밀었다. 가방 안은 종이뭉치들로 꽉꽉 들어차있었다. 어떤 것들은 무어라고 문자로 빼곡했지만 대부분의 종이들은 하얗게 비어있는 상태였다. 별 생각 없이 그것들을 보고 있었는데 돌연 심중에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나타나지도 않는 무언가를 찾아서 계속 후덥지근한 사막 위를 헤매느니 차라리 방금 떠올린 생각대로 행동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어 나는 곧바로 관리에게 입을 열었다. 종이 몇 장과 펜 한 자루를 좀 얻을 수 없겠느냐고 말이다.
그는 다소 당황했지만 내가 줄곧 부탁하자 처음 있는 일이지만 안 될 것도 없다며 그것들을 내주었다. 나는 그에게 성심껏 감사를 표하고 종이뭉치와 펜을 받아들었다.
얼마 뒤 관리는 가야할 곳이 있다며 자리를 떠났다. 작별인사를 하고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나는 모래바닥에 주저앉아 텅 빈 지면(紙面)을 쳐다보며 한참을 생각에 빠져있었다. 곧 나는 수기를 한편 쓰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첫 문장을 어떻게 시작할지에 대해 한동안 고민하다가, 첫 문장부터 쓰기보다는 맨 마지막 문단부터 쓰는 것이 더 내 상황에 합당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나의 수기는 다음과 같이 끝난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죽을 수도 없다. 회한은 영원하고 고통 또한 끝나지 않는다. 존재. 내가 존재하기 시작했던 시점에서부터 이미 모든 것은 실패했었던 것이다. 나는 이곳의 뜨거운 공기를 마시면서 펜을 긁는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결말 또한 없다. 종언은 꿈이고 한낱 환각이다. 태양조차 없는 이 불길 속에서 나는 눈을 뜨고 있다.
끝.